첫째 청년은 지팡이를, 둘째 청년은 검은 선그라스를, 셋째 청년은 짧은 턱수염을 컨셉으로 한 차림으로 몸을 흔들거리면서 노래 불렀다. ‘우우우하며 시작되는 이상한 멜로디의 노래였다.

나는, 1994년 어느 늦은 밤 모 TV의 음악프로그램에서솔리드란 이름의 낯선 청년 셋이 노래 부르던 그 장면을 아직도 기억한다. 그 노래가이 밤의 끝을 잡고였다.‘솔리드는 재미동포 2세들로써 구성됐으며 우리나라에 R&B(알앤비)를 최초로 대중화시켰다고 어느 음악평론가가 평했다.

 

한 편, R&B(알앤비)란 낯선 용어를 위키백과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R&B(Rhythm and Blues; 'R&B')는 흑인의 생활양식에 맞도록 녹음 된 블루스 보컬이나 밴드 연주의 대중음악을 총칭한다. 나른한 듯한 느낌을 주기도 하며 가성을 많이 섞어 부르기도 한다. 1940년대 말 ~ 1950년 대 초, 블루스가 스윙 같은 댄스풍 재즈와 섞여 태어난 흑인음악이다. 블루스보다 댄스비트가 강하고 리듬멜로디도 대중적이다. 가사도 고단한 삶을 노래하던 블루스와 달리 쾌락적으로 흘렀다.”

 

우우우 하면서 시작되는 이 밤의 끝을 잡고노랫말은 이렇다.

 

- - 다신 널 볼 수 없겠지

나의 입술이 너의 하얀 어깨를 감싸 안으며

그렇게 우린 이 밤의 끝을 잡고 사랑했지만

마지막 입맞춤이 아쉬움에 떨려도

빈손으로 온 내게 세상이 준 선물은

너란 걸 알기에 참아야겠지

 

내 맘 아프지 않게 그 누구보다 더

행복하게 살아야 해 모든 걸 잊고

이 밤의 끝을 잡고 있는 나의 사랑이

더 이상 초라하지 않게

나를 위해 울지 마 난 괜찮아

 

<후략>

 

 

연인들이 타인들로 바뀌는 마지막 밤을 노래한 대중가요가 심심치 않게 있다. 이 노래 또한 그런 내용의 노랫말이다. 그 중 나의 입술이 너의 하얀 어깨를 감싸 안으며/ 그렇게 우린 이 밤의 끝을 잡고 사랑했지만이란 부분이 고혹적이다.

우선나의 입술이 너의 하얀 어깨를 감싸 안으며란 부분이다. 마지막 밤을 보내는, 새벽을 맞는 연인들이 나체로 깨어있음을 암시한다. 그래서 연인의 하얀 어깨가 드러나 있는데 그 어깨를 화자가 입술로 애무하는 장면이다. 아무래도 20대나 30대 초반의 한창 젊은이들의 사랑 장면으로 봐야 옳다. 나이가 많은 사람들이 알몸으로 (노랫말의 분위기로 보아 연인들은 지금 이불도 덮지 않고 있다.)그러다가는 감기 몸살에 걸리기 십상이다. 나이 많은 사람들은 아무리 헤어지는 마지막 밤이라도 이불도 안 덮고 그러는 무리를 저지르지 않는다. 왜냐고?‘헤어질 때 헤어지더라도 건강은 챙겨야 한다는 삶의 지혜가 축적돼 있기 때문이다.

 

이어지는이 밤의 끝을 잡고 사랑했지만란 부분이 나는 이 노래에서 절구(絶句)라고 여긴다. 마지막 밤이 새며 훤하게 동터가는 시간대임을 잘 나타내기도 했지만, ‘이란 추상적 개념인 시간을 구체적인 사물인 양 -’아서라도 그대와 더 있고 싶다는 고도의 수사법이 사용됐기 때문이다.

이런, 고도의 수사법은 조선 중종 때 송도 명기 황진이의 시조에서도 쓰였다.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버혀 내여

춘풍 니불 아래 서리서리 너헛다가

어론님 오신 날 밤이여든 구뷔구뷔 펴리라.“

 

여기서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버혀내어란 구절이 그것이다. ‘이란 추상적 개념인 시간을 구체적인 사물인 양 표현하여 님을 기다리는 안타까운 심정을 절실하게 표현했다.

좋은 표현은 시공에 구애받지 않는다.

1990년대 솔리드와 조선 중종 때의 황진이는 시간상으로나 공간상으로나 절대 만날 수 없다. 하지만이란 추상적 개념인 시간을 구체적인 사물인 양 표현하는 마음의 공감대에서 양쪽은 완전히 만났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이 영화가 논픽션 영화의 진수를 보여주었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나는 다른 좋은 점을 찾아 봤다.

 

 

 

 

 

이 영화는 다 함께 하는 예술의 의미를 곱씹게 했다는 데 의의가 있다. 우리가 아는 예술은 대개 예술가가 혼자 이룬 뒤 나중에 대중들이 국외자로서 향유하는 형태였다. 대중들은 하나의 그림 앞에 거리를 두고 서서 고개를 끄덕이거나 아니면 다른 그림으로 발길을 돌리거나 하는 피동적인 객체였다. 하지만 웨이스트랜드는 예술가가 대중들과 함께 예술 행위를 함으로써 결국은 벅찬 공감대까지 이루는, 공동예술의 진면목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관객들의 눈시울까지 뜨겁게 적셨으니, 이 영화의 공감대는 스크린 밖에까지 펼쳐진 게 아니었을까!

 

 

 

특히 티앙이란 인물이 자신을 소재로 한 빅 무니즈의 작품이 훌륭한 예술작품으로 인정받는 순간 하염없이 흘리는 눈물이라니. 그 장면에서 함께 눈물을 흘리지 않을 관객이 있을까?

 

 

 

 허구(픽션)는 실제를 바탕으로 한다. 실제의 갖가지 현상들에서 허구로 엮을 재료를 구한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허구는 실제의 현상들보다 더 재미있을 수밖에 없다. 지루하거나 하찮아 보이는 실제의 재료들은 일단 제외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잘 된 허구라도 실제를 못 따른다는 사실 또한 부정할 수 없다. 왜냐면 허구는 실제의 부분적인 모습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논픽션 영화는 실제와 픽션 사이에 서 있는 아주 모호한 영화다. 어쨌든 실제의 현상들에서 필요한 것들만 간추려 엮은 영화라는 점에서 픽션 영화와 다를 바가 없으니까.

웨이스트랜드는 논픽션 영화가 갖는 자기모순을 충분히 극복한 수작이었다. 이 작품을 기획하고 연출한 빅 무니즈의 탁월한 능력에 찬사의 박수를 아낄 수가 없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춘천의 남쪽에 구곡폭포가 있다. 춘천의 명소로써 더운 여름철에는 시원하게 떨어지는 물줄기로, 한겨울에는 산악등반 훈련지로 명성이 드높다. 그런데 그 구곡폭포가 문배 마을의 조촐한 시냇물이 벼랑을 만나 떨어지는 물줄기라는 사실을 당신은 아는지.

 우리 삶에는 절대적이라는 게 없다한 마을의 조촐한 시냇물이 거창한 폭포와 한 줄기로 이어져 있는데 어떻게 한쪽은 작고 다른 한쪽은 크다고 분리해 말할 수 있을까.

우리가 살고자 열심히 노력할 때, 같은 순간 다른 존재들이 그만큼의 고통을 받으며 죽어갈 수 있음을. 우리의 생존 조건과 다른 것의 멸실 조건이 이어져 있음을.

우리는 절대적으로 상대적인 관계다.

춘천의 남쪽에 구곡폭포가 있다. 춘천의 명소로써 더운 여름철에는 시원하게 떨어지는 물줄기로, 한겨울에는 산악등반 훈련지로 명성이 드높다. 그런데 그 구곡폭포가 문배 마을의 조촐한 시냇물이 벼랑을 만나 떨어지는 물줄기라는 사실을 당신은 아는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본래 나는 '호'붙이는 것을 싫어했다. 

부모가 붙여준 이름 갖고 살기도 바쁜데 무슨 호까지 덧붙여 산단 말인가 하는  저항감이 있었다. 그런데 몇 년 전 지인이 내게 '무심'이란 호를 붙여주었을 때 마음에 썩 들어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리고  말했다. 

  "정말 내게 맞는 호일세. 그런데 내가 무심한 것은 사실, 워낙 유심하다 보니 그리된 거지." 

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이런 게 선문답이 아닐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제목이 난해하다는 말씀들이 있어서, 무심이 나섰습니다. 

 

 우선 '가섭'은 부처님의 수많은 제자 중 한 사람입니다.

'별전 (別傳)'이란 개인 전기로 일화(逸話)나 기문(奇聞)입니다.

이에 관련된 내용을 '두산 백과'에서 인용합니다.  

"어느 날 석가 세존()이 제자들을 영취산()에 모아놓고 설법을 하였다. 그 때 하늘에서 꽃비가 내렸다. 세존은 손가락으로 연꽃 한 송이를 말없이 집어 들고[] 약간 비틀어 보였다. 제자들은 세존의 그 행동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가섭만이 그 뜻을 깨닫고 빙그레 웃었다[]. 그제야 세존도 빙그레 웃으며 가섭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에게는 정법안장( : 인간이 원래 갖추고 있는 마음의 덕)과 열반묘심( : 번뇌를 벗어나 진리에 도달한 마음), 실상무상( : 불변의 진리), 미묘법문( : 진리를 깨치는 마음), 불립문자 교외별전( : 언어나 경전에 따르지 않고 이심전심으로 전하는 오묘한 진리)이 있다. 이것을 너에게 주마.” 이렇게 하여 불교의 진수는 가섭에게 전해졌다. 이심전심이라는 말이나 글이 아닌 마음과 마음으로 전하였다고 한데서 유래한다. 불교의 심오한 진리를 깨닫게 해주는 말이다. 현대의 ‘텔레파시가 통한다’와 유사한 의미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이심전심 [以心傳心] (두산백과)

 
따라서 '가섭 별전'은 이심전심이란 말의 유래에 관한 또다른 일화라는 정도로 해석하면 되지 않을까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