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 기본적으로 상()위에서 다뤄져야 한다. 안과 상, 두 글자의 한자 모양을 봐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요즈음 청와대에서 대통령과 참모들이 커다란 상을 가운데 놓고 편한 차림으로 둘러앉아 나랏일을 논의하는 광경이야말로 안이 상 위에서 제대로 대접받는 모습이다. 이전의 청와대에서도 커다란 상을 가운데 놓고 대통령과 참모들이 둘러앉긴 했으나 대통령이 일방적으로 불러주는 대로 참모들이 받아 적는, 안이 제 대접을 받지 못하는 광경이었다. 그 결과 그 상에서 다뤄진 갖가지 안들이 새 정부 들어 재차 다뤄져야 하는 참사가 발생한 게 아닐까?

안과 상이 한자라, 한자문화권 나라들에서나 있을 수 있는 표현으로 인식할 수 있다. 그렇지 않다. 북핵 위기 사태에 대해 미 국무장관의 이런 발언이 뉴스에 소개되었으니 말이다.

모든 옵션이 테이블 위에 놓여 있다라며 그 동안 금기시돼온 군사옵션을 암시했다.

테이블은 상이고 그 위에 놓인 옵션은 안이 아닌가? 그렇다. 상과 안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항상 어울리게 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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밭농사를 하면 항상 느끼는 일이지만 사실 잡초와 작물은 하나도 다를 바 없는 풀들이다. 흙과 물과 햇빛만 갖추면 잡초나 작물이나 한껏 푸르게 자라날 수 있는 것이다. 다만 잡초는 농부에게 배척당하는 처지이고 작물은 보살핌을 받는 처지라는 점에서 운명이 달라질 뿐이다.

만일 밭에 작물을 심어는 놓았으되 보살피지 않거나 보살핌을 게을리 한다면 얼마 안 가 잡초 밭이 돼 버리고 만다.

사실 작물에 대한 농부의 보살핌이라는 게, 잡초들 입장에서는 그토록 얄미울 수가 없을 것이다. 작물들과 같은 땅에 뿌리를 내렸는데 잡초들에게는 물과 햇빛의 혜택을 주지 않겠다는 비닐 멀칭도 그렇고, 기껏 힘들게 자라났는가 싶었는데 사나운 낫으로 상부를 쳐내버리거나 아예 뿌리째 뽑는 김매기라니

 

그런데 결말은 기막힌 반전이다. 잡초와 구별되어 일방적인 보살핌(혹은 사랑)을 받는 작물이 막상 다 자라면 농부의 손에 삶을 마쳐야 하는 것이다. , 작물에 대한 그 동안의 일방적인 애지중지는 오직 사람의 식량으로서 쓰이기 위함이었다는 게 만천하에 드러난다.

 

하긴 작물은 이미 그 이름에 운명이 정해져 있었다. ‘()’은 사람 인변(=)이 들어있는 한자이니 애당초 사람 손에 죽을 처지가 아니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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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 등에 뭔가가 매달려 있다. 평생 당신 등에서 떨어지지 않으려는 듯 온힘을 다하여 매달려 있는 것이다. 기겁한 당신은 죽어라고 몸을 흔들며 비틀며 난리친다. 운 좋게 그 뭔가가 당신 등에서 떨어지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는 그렇지 못하다. 결국 지치고 만 당신은 그 뭔가에 항복한다. 항복이라기보다는 체념이란 표현이 더 적합하지 않을까.

그 순간부터 당신 등은 당신뿐만 아니라 지겨운 그 뭔가의 소유도 될 것이다.

 

말이 자기 등에 올라탄 카우보이를 어떻게든 떨어뜨리려고 난리치는 장면이 바로 로데오 경기의 장면이다. 관객들은 그런 말의 몸부림을 즐겨보지만 사실 말의 입장에서는 끔찍한 순간일 뿐이다. 애당초 말은 사람을 등에 태우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말은 단지 대지를 마음껏, 홀가분하게 내달리고 싶었다. 그런데 죽어라고 자기 등에 물귀신처럼 달라붙은 사람이란 이물(異物).

우리는 이빨 새에 오징어의 작은 찌기 하나가 끼어도 견디기 힘들다. 이쑤시개를 찾아 어떻게 해서든지 그 찌기를 빼내려 애쓰게 된다. 과장된 표현 같지만 그 순간 사력을 다한다. 이물감이란 정말 견딜 수 없는 그 무엇이다.

 

말이 숙명적인 이물감에 굴복하는 순간사람에게 등을 허락하는 순간은 사실 홀가분하게 대지의 자연을 누리고 싶은 천성을 포기하는 것이다. 물론 대신, 사람한테서 사료 공급 같은 보상이 뒤따른다. 사람을 자기 등에 태우고 하자는 대로 걷거나 달리거나, 멈추거나 하는 말의 숙명. 우리는 그것을 한자어로 순치(馴致)라 하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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밭농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밭가는 일만 힘든 게 아니다. 간 밭의 두둑마다 검정비닐도 씌워야 한다. 이를 멀칭이라 하는데 만일 멀칭을 하지 않으면 무섭게 기승을 부릴 잡초들을 각오해야 한다. 얼마 안 가 밭의 작물들은 무성한 잡초에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다. (이를 소재로 한 작품이 잡초이다.)

두둑들에 검정비닐을 씌우는 일도 쉬운 건 아니다. 바람이라도 불면 허공으로 날아가려는 비닐의 끝자락을 잡고 난리다. 가수 김조한의 이 밤의 끝을 잡고란 노래가 있지만, 밭에서는 검정비닐의 끝을 잡고헤매기 일쑤다.

멀칭이 끝나면 그 때부터는 비닐에 일정 간격으로 구멍을 내 파종하거나 모종해야 한다.

4,5월은 이런 일들로 밭에서 고생해야 한다.

 

우리 선인들이 (晝耕夜讀)이라 했다. 낮에는 농사짓고 밤에는 공부한다는 뜻으로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공부하기를 잊지 않는 자세를 일컫는다. 그런데 이런 의문이 고개를 쳐들었다.

주경야독이란 게 가능할까?”

밭농사를 하는 중에는 제대로 책 한 권을 읽거나, 글 한 편을 쓰지 못하고 마는 경험만 있어서다. 몸이 지친 탓도 있겠지만 이상하게도 머리의 뇌가 정신적인 활동을 주저함을 느끼기 때문이다. 무심의 경험으로는, 뇌는 몸이 농사 같은 고단한 일에 매이지 않을 때에나 제대로 활동했다. 몸이 마냥 편안한 일상에 있을 때 뇌가 비로소 기지개를 켜고 작동하던 것이다.

주경야독.

실제로 가능한 일이라기보다는 농사짓고 살아야 하는 고달픈 삶에서도 책 읽기를 잊지 말자는 소망 차원의 경구가 아니었을까?

 

부처님 예수님 공자님 모두, 고된 육체노동보다는 몸을 편안히 하는 상태에서 명상과 사색 끝에 귀중한 깨달음들을 얻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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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애하는 국민 여러분이라든가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이라는, 담화의 천편일률적인 첫인사말을 바꿔보는 게 어떨까? 세월이 흐른 뒤 결코 국민과 친애하지 않았거나 국민을 존경하지 않았음이 드러나는 경우들이 잦아서 이제는 거부감마저 들기 때문이다. 차라리 그냥 국민 여러분이라고 담화를 시작하기를 감히 제안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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