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트릭스로 철학하기
슬라보예 지젝 외 지음, 이운경 옮김 / 한문화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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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트릭스, 사유의 샐러드 보울


우선 이 책은 참으로 흥미로운 책이다.  매트릭스라는 영화를 모티프로 하여 유수의 철학자들이 달려든 영화라는 점에서 그러하다. 그렇게 ‘매트릭스로 철학하기’라는 책이 나오게 된 것이다. 이는 매트릭스라는 영화가 그 얼마나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는가를 가늠케 하는 증거이지만 그 주체가 바로 철학자들이라는 것은 새삼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역대 이토록 철학자들의 구미를 당긴 영화가 몇이나 되던가..


또한 이 책은 리뷰를 쓰는 것이 매우 어려운 책이기도 하다. ‘매트릭스’라는 한 편의 영화 속에 등장하는 장면들을 논의의 구심점으로 하여 출간한 책이라는 일관성을 가지지만, 참여한 모든 철학자들의 매트릭스를 바라보는 관점들이 각기 다르기 때문이다. 저마다의 탁월한 철학적 분석과 그에 해당하는 사유의 결과물들을 내놓고 있다는 점이 독자들의 구미를 당기기에 충분하면서도 이견(異見)들의 집합소이기도 하다. 하여 이를 통섭하는 리뷰를 작성하기위한 개인적인 한계를 극복할 방법과 능력이 내게는 없다는 고백을 딜레마로 남기는 출간물이다.


 이 책을 가장 흥미롭게 해주는 요인은 여러 장면들에 대한 사유의 투영이기도 하지만 같은 장면에 대한 전혀 다른 각도의 접근을 보여준다는 사실이다. 이는 비단 매트릭스에만 국한된 사유의 방식은 아닐 것이다. 저마다 자신의 사유를 투영시키는 프리즘의 성격과 특징들이 뚜렷하게 구분되는데, 이는 한 시대를 살아가는 모두에게 요구되는 사유의 방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반복하자면, ‘매트릭스로 철학하기’라는 책의 리뷰를 쓰기가 어려운 것은 다양한 학자들의 각기 다른 관점들을 통섭하는 것의 어려움에 있다. 이들의 프리즘을 하나의 리뷰에 버무려 넣는다는 것 자체가 어쩌면 어불성설일 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성격이 뚜렷하면서 특정한 것들의 모임은 도가니탕(Melting Pot)이 아니라 샐러드 보울(Salad Bowl)의 성격을 가질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여기서 나는 의외일 수 도 있지만, 타자의 것과 만나는 과정과 결과를 일컽는 ‘혼종’이라는 용어를 떠올리게 되었고 이에 나의 사유를 투영시키게 되었다.


 

 


혼종의 속도와 태도..


현대는 문화의 혼종시대라고 말할 수 있다. 사실 역사는 늘 그래 왔다. 혼종의 시대가 아닌 적이 없었던 것이다. ‘혼종’은 서로 다른 문화가 서로에게 유입, 영향을 끼치며 섞이는 것을 뜻한다. 교통이 발달하면서 혼종의 속도는 점점 증가해, 개개인들이 사용할 수 있는 첨단 통신기기가 보편화된 현대에서는 말 그대로 광속인 것이다.

 감기 바이러스가 지구를 한 바퀴도는 데 걸리는 시간은 교통의 발전 속도와 같았다고 한다. 감기 바이러스는 인간과 함께 움직이기 때문이다. 건강한 인간이 도보로 지구를 한 바퀴 도는 데 걸리는 시간은 약 420여일, 즉 1년하고도 두어 달은 족히 걸린다. 물론 앞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전혀 없는 평지여야 하고 잠도 안자고 걸어야 하는 수치이다. 반면 시속 800km로 날아가는 비행기로는 약 50시간이 걸린다는 계산이 나온다. 감기 바이러스의 확산 속도를 문화의 혼종 속도로 대신해도 무리는 없어 보인다. 과거나 현대의 혼종은 그 속도의 차이가 있을 뿐 언제나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마치 ‘매트릭스로 철학하기’라는 책이 전혀 색다른 해석과 사고를 펼칠 수 있는 장을 마련하고 있는 것 처럼, ‘혼종’ 이라는 각기 다른 것들의 만남을 대하는 태도가 왜 중요한 것인지를 말하고 싶은 것이다. 왜냐면 ‘매트릭스로 철학하기’라는 책은 그러한 혼종의 장을 마련해주기 때문이다. 그것도 정신을 차리지 못할 정도로 말이다.


타자의 견해를 수용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문화 역시 그와 마찬가지여서 흔히 ‘문화 충격’이라 일컽는 갈등의 과정과 직면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과거 우리는 서구의 문화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 적이 있다. 더욱이 현대는 ‘글로벌’이라는 용어가 언론과 매체를 장악한지 오래되지 않던가... 구한말에도 전혀 새로운 문물들이 우리나라에 상륙했고, 여전히 그 물결은 계속되고 있다. 특히 근래에 와서는 ‘다문화가정’이라는 용어가 생길만큼 외래의 물결은 거침이 없다. 국내의 상황과 국외의 조건들이 만나 결합하는 혼종의 결과물이므로 이를 피해갈 방법이 없다. 이러한 혼종의 상황을 그 어떤 나라이든지, 그 어떤 개인이든지 격을 수밖에는 없다. 독자적으로 홀로 살아가지 않는 다음에야 말이다.


 마치 매트릭스라는 한 편의 영화에서 보여주는 많은 장면들을 다각도의 프리즘으로 들여다 볼 수 있는 다양성의 여지를 주는 것은 차라리 애교에 가까울 지도 모른다. 절대적 공식이라는 것은 몇몇 자연적인 현상을 발견하는 ‘론, 혹는 법칙’들에서 찾아 볼 수가 있다. 예를 들면 ‘상대성 이론’이라든지 ‘에너지 보존의 법칙 또는 만유인력의 법칙’ 과 같은 것들이 그것이다. 그렇게 절대적이라는 것들도 때로는 시간이 흐르면서 새로운 발견에 의하여 무너지곤 하는 경우들을 종종 목도해온 것도 사실이다. 한마디로 다양함을 함유하고 있을 가능성을 언제가 개방시켜 두는 것이 필요하다 하겠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문화적 혼종이라는 것은 결코 피해갈 수 있는 현상들이 아니다. 문제는 그 문화적 혼성을 어떠한 자세로 수용하느냐인 것이다. 이런 경우 우리는 흔히 '융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융해는 무사고적 수용이라는 말과 상대적인 용어일 것이다.

 

 사실 타문화 혹은 타자의 이론(異論)들의 접근을 완벽하게 차단해 낼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렇다면 융해라는 긍정적 과정을 거치게하여 새로운 우리의 것으로 창출해내는 노력이 필요하다. 부정적 반응은 필연적으로 흡수될 문화 혹은 이론(異論) 들과 부정적 결과물을 낳는 싸움을 하게 한다. 사람들의 모임은 언제나 이론이 제기되기 마련이듯 말이다. 이론은 타자를 곧잘 불쾌하게 만든다. 이는 타자와의 논쟁을 유발시킨다. 그러나 논쟁은 매우 유익한 발전의 과정이다. 단, 사유가 개방적이어야 한다는 전제를 필요로 한다.



조선의 경우...


 덕흥대원군은 조선의 백성들에게 가장 큰 고통의 원인이었던 삼정의 문란을 역대 그 어느 임금보다도 신속하고 강력하게 바로잡은 역사적 인물이었지만 국외의 정세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했다. 강력한 힘을 앞세워 거침없이 밀고 들어오는 서구의 세력의 유입에 대응하는데 서툴렀다. 결과적으로 이를 적절하게 수용한 일본에 의해 강점되는 빌미를 제공했던 것이다. 어떤 학자들은 미국에 의해 점령당하는 것보다 일본의 식민지가 된 것이 차라리 나은 결과를 초래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가정법에 불과한 것이고 자신들의 입장을 피력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실제로 조선에 총기가 들어 왔던 것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훨씬 이전의 일이었다. 폴투갈의 상선은 조총을 일본에 가져가 이를 은과 바꾸었다. 그것이 1543년의 일이다. 일본은 통신사를 파견하면서 조선에 이 조총을 예물로 가지고 왔다. 그러나 조총의 위력에 대한 통찰력이 없었던 조선 정부는 이를 무기고에 처박아 두었던 것이다. 그러는 사이 일본에서는 조총으로 무장한 다이묘들이 칼을 든 다이묘의 사무라이들을 싹 쓸어버리고 나라를 평정하면서 일본 열도의 새로운 정부를 수립했다. 그리하여 뎃뽀(철포-조총을 뜻함)도 없는 놈이 덤빈다는 말로 '무뎃뽀'라는 말의 유래가 된 것이다. 제 아무리 사무라이들이 검을 잘 쓴다 한 들 뎃뽀(조총)로 무장한 다이묘들을 어떻게 감당 할 수 있었을 것인가... 이때 일본의 무뎃뽀 사무라이들은 대부분 철포의 위력 앞에서 죽어갔다.  

 

 

무뎃뽀의 대가를 톡톡하게 치룬 조선과 한국

 

철포의 위력을 알게 된 일본은 조선을 침공하기로 결심한다. 그리하여 1592년 일본은 조선에 병력을 투입한다. 그렇게 아무런 준비도 없는 상태에서 임란을 맞은 조선에서는 듣도 보도 못한 조총 앞에서 헤아릴 수 없는 병사들이 쓰러져 갔던 것이다. 혼종에 대한 바르지 못한 판단은 이러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 것이다.

 

사실 조선에서는 어쩌면 폴투갈의 상선들이 일본이 아니라 조선과 먼저 거래를 텄을 사건이 하나있었다. 그것은 바로 순도 높은 은(銀)의 추출 기술이다. 당시 명나라는 은(銀) 본위제 화폐를 시행하고 있었고, 명나라 대부분의 거상들은 은을 상거래의 수단으로 했다. 당시 서구인들에게 명나라의 문물들을 가져다가 서양에 판매 할 경우 그 수입은 상상을 초월할 지경이었다. ‘5개의 선박 중 하나만 돌아와도 이익’이라는 말은 바로 이때 생긴 말이다. 그리하여 서구의 상인들은 명나라의 결재수단인 은을 절대적으로 필요로 했다.

 

 그런데 문제는 순도 높은 은의 추출 기술에 있었다. 명나라에서 원하는 순도 높은 은을 추출할 수 있는 기술이 당시에는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추출기술을 자체 개발한 사람들이 있었으니 바로 명종 때의 쌍놈들이었다. 이 두 사람은 순도 높은 은을 추출하는 능력을 자체 개발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조선은 이 기술과 인력의 가치를 알아주지 않았다. 쌍놈이 개발한 기술이라고 천대했던 것이다. 마치 조총을 무기고에 가져다 썩히듯이 말이다. 이를 눈치 챈 일본은 이들을 일본으로 정중히 모셔갔다. 그리하여 일본의 은 추출능력이 세계 최고를 자랑하게 되었으며 일본의 은은 서구인들을 매료시키는 데 성공했고 결과적으로 폴투갈의 상선들은 양질의 은을 생산해내는 나라, 일본으로 그 뎃뽀를 가져간 것이다.


이는 사소한 문제 같지만 사실상 일본이 조선을 침공 할 수 있는 힘의 근원이 되어준 중요한 문제였다. 이 사건은 바로 새로운 것에 대해 어떤 자세를 가지느냐의 중요한 교훈이 되기에 충분한 사건이랄 수 있다.

 

그 후, 우리나라는 일제 강점에서 벗어나자 바로 한국전쟁에 돌입하게 된다. 휴전이 되면서 미국을 중심으로 엄청난 새로운 물결이 밀려들어왔다. 문화의 대 혼종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힘에 또 한 번 우리는 적절한 대응을 하지 못한다. 아무런 준비 없이 또 한 번 무비판적으로 수용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이땅은 100여년 동안 서구의 물질, 사상, 학문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국가가 되었다. 그 중 서구의 경쟁 시스템과 사고는 대한민국에 치명적인 영향력을 끼친 것 중의 하나이다. 선의의 경쟁이라는 것이 그것이고 이에 자본주의가 함께 맞물려 갔다. 선의의 경쟁이라는 용어의 배후에는 사실은 강자의 피도 눈물도 없는 논리가 서려있다.


우리의 교과서는 약육강식의 논리와 적자생존의 논리를 아무런 거침이 없이 가르쳤다. 이미 너무나도 친숙해져버려 이제는 의심조차도 하지 못하게 된 이 논리는 한국 사회를 100여년간 지배해온 것이다. 특히 학교에서의 경쟁 일변도 교육시스템은 은 대한민국의 주도세력일 수 밖에 없는 인력들의 핵심 동력이로 작용했다. 이제 우리가 스스로를 돌아봐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혼종의 물결을 저항 하기란 거의 불가항력적인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혼종에 대한 당사자들의 태도가 향후 엄청남 결과를 초래 할 것이라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물론 다양성을 인정한다는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에 알맞은 적절한 판단과 준비의 신중한 작업을 요망하는 일이라 하겠다. 또한 매트릭스를 소재로 서술해간 철학자들에게서 배우는 혼종에 대한 태도 역시 이와 일맥상통하는 일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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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잘라 2012-06-03 07: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든 사람에게 다 잘 해줄 수 없고 나는 모든 것을 다 할 수 없고 모든 사람이 될 수도 없으며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도 없습니다. 내가 얼만큼인지는, 평탄할 때 보다는 위기에 나타나기 마련이지만, 내가 얼만큼인지 알아보기 위해 일부러 고난을 만들어낼 수도, 그러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고난을 신의 선물이라고 하는 말에 공감합니다. 저는 매트릭스를 여러 번 봤지만 여전히 철학하기 보다는 SF 오락물로 즐기는 수준 밖에 못됩니다. 물론 요즘 케이블에서 계속 나오는 주성치의 소림축구가 훨씬 웃을거리도 많고 여운도 많이 남는다고 주장하는 바입니다만!!! ^^(모바일 댓글이라 엔터를 못찾겠네요ㅠㅠ)

차트랑 2012-06-02 2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매리포핀스님 안녕하세요?
매리포핀스님의 말씀 적극 공감합니다.

그리고 주성치의 소림축구는 매트릭스를 뛰어넘는 철학이 담겨 있는
영화라고 저는 느꼈습니다.

얼마전 페이퍼에서 물의 이치와 스타워즈 에피소드 1에 등장하는
건간족의 방어막의 작동원리를 간단하게 쓴 적이 있는데요.

소림축구도 그와 같다고 보았답니다.
제 아무리 강한 것이라도
부드러움의 힘에 제압 당하고 말죠.

건간족의 망어막도 그러하답니다.
제 아무리 강력한 힙으로 공격한다 한들
그들의 방머막는 꿈쩍도 하지 않죠

그러나 부드럽게 다가가는 발 하나를 견디지 못하고
우리가 담글 수 있게하는 것이
물의 이치라고 생각합니다.

소림축구도 부드러운 힘으로 제압하잖아요.
이만한 철학을 매트릭스에서는 찾아볼 수가 없답니다.

왜 매리포핀스님의 견해에 공감하고 있는지 아시겠지요??
저의 서재를 찾아주시고
글을 남겨주셔서 고맙습니다 매리포핀스님~
즐거운 주말 되세요~ 아셨죠?^^



책읽는나무 2012-06-03 0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님이 학당에서 공부하시는분인줄 잘 몰랐습니다.
전 옆에 페이퍼를 보고서 첨엔 고등학생인줄 알았어요.ㅋㅋ
그러다 까먹고 있다 다시 보니 고등학생일 것이라 착각했었던 바로 그분이 맞았네요.

수양공부를 따로 하시다니 정말 대단하시군요.
음~
범상치 않군요.
저도 수양공부를 좀 해야하는데 말입니다.참 쉽지가 않습니다.ㅠ

2012-06-03 02: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6-03 02: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녀고양이 2012-06-10 16: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나 좋은 페이퍼입니다.
차트랑공님, 그동안 죄송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다양성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그 뒤의 말씀,
'적절한 판단과 준비의 신중한 작업'에 대해여 너무 생각이 없던 것이 아닐까
반성합니다. 저는 적절한 판단이라고 읽었는데, 원래 쓰신 절절한 판단이 맞을까요?
어쩐지 절절한 판단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만큼 진정성의 문제니까요.. ^^

즐거운 한주되시기 바랍니다.

차트랑 2012-06-12 0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마녀고양이님,
이렇게 찾아주시니 그저 감읍할 따름입니다.

제가 알고 지내는 알라디너분들이 많지 않은데
생각을 많이 하게하는 일들이 있어
그만 기력을 잃고 뜸했답니다.

그런데 이렇게 마녀고양이님께서 돌아와주시니
반가움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아마도 마녀고양이님께서는 저의 기쁨을
모두 느끼실 수 는 없을 것입니다.
이런 기쁨이 어디 저의 것 뿐이겠습니까
많은 분들께서도 저와 같은 심정이시리라 믿습니다.

이렇게 다시 와주셨으니
이제부터는...
마음 편히 하시기를요....

고맙습니다 마녀고양이님~

추신: 위의 제 글은 마녀고양이님께서 읽으신대로 '적절한' 이 맞습니다.
제가 저런 황당한 오타를 내버렸군요^^

차트랑 2012-06-13 0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타 수정~
'절절한 판단'을 '적절한 판단'으로^^

북극곰 2012-06-19 1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책은 제가 이해도 못할 어린? 시절에 사 가지고서는
역시나 읽다가 던져버리고 아직도 책장에 꽃혀만 있는 책이랍니다.
다시 한번 정신을 차리고 읽어보고 싶네요. ;)

차트랑 2012-06-19 13:28   좋아요 0 | URL
북-킄-콤님 께서 와주셨네요?
와~ 이런 영광스러운 일이^^

저 역시 이해하지 못하고 재도전 한 책이 이었답니다.
고등학교 때 도전했던 '달과 6펜스'가 그 것이었습니다.
저는 솔직히 대학에 가서 재도전 했다가 또 실패했더랍니다 ㅠ.ㅠ

이거 자존심 무지 상했습지요 ㅠ.ㅠ
그렇게 시간이 흐르다가는...
세번째 도전을 하게되었답니다^^
세번째 되어서야 달과 6펜스를 좀 이해하게 되었던거에요.

이런 고백은 저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일이지만
북-킄-콤-님께서 그리 말씀해주시니
제가 어찌 솔직해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요 ㅠ.ㅠ

찾아주셔서 고맙습니다 북큭콤님~^^
 
관중과 공자 - 패자의 등장과 철학자의 탄생 제자백가의 귀환 2
강신주 지음 / 사계절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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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권에서 강신주는 1권을 읽은 독자에게 기대 그 이상의, 보다 훨씬 더 많은 제자백가의 그 것들을 보여주고 있다. 아무래도 저자가 단단히 마음먹은 것 같아 읽는 내내 즐거웠다. 그래, 관중과 공자에 관하여 이 정도의 것은 보여주어야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저자는 이 저서에서 관중과 공자에 관하여 자신의 독창적인 생각들을 토해낸다. 어쩌면 많은 인내의 시간을 필요로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연 저자가 이러한 생각을 글로 출판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민을 했을까...왜냐면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은 공자 이전에 민중의 중요성을 간파하고 제나라를 패국으로 만든 관자의 통찰력을 높이 평가할 것이고 상대적으로 공자의 수고스러움이 안쓰럽게 느껴지며 때로는 시대가 소망하지 않는 자신만의 생각을 가지고 관직에 오르기를 바라면서 천하를 주유하는 초라한 공자의 모습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벌거벗은 임금님

공자가 누구던가...조선을 500여 년간 지배해온 이념의 창시자가 아니던가. 조선의 중심 이념에는 공자라는 인물이 존재하고 조선은 공자를 모신 사당에 문묘 18현을 배향하기까지 그 얼마나 피비린내 나는 정치적 싸움을 해왔던가... 공자 없는 조선은 상상 할 수 없으며 공자가 곧 조선을 지탱해온 힘이었다는 것을 과연 어느 누가 부정할 것인가. 공자의 힘은 조선의 국왕보다도 더 컸다. 조선을 배경으로 하는 사극에 등장하는 왕들이 신하들에게 쩔쩔매는 장면은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닌 것은 우리 역사가 바로 그러했기 때문이다.


그러한 공자는 관자 앞에서 너무나 초췌한 모습 그 자체 일 수밖에 없으니 저자는 그 얼마나 고민스러웠으랴. 저자는 이 저술을 통하여 그동안 막연하게 생각해오던 공자에 대한 환상을 완전히 깨버린다. 이처럼 공자가 대중 앞에 벌거벗은 몸을 보여준 적은 없었다. 그동안 수많은 공자 관련 서적들은 공자를 보기 좋은 포장지로 감싸기에 급급했다는 것을 드디어 들켜버린 셈이다. 공자의 위상에 큰 손상일 입힌 저자 강신주에게 돌팔매질을 해야 하는 사람들이 생겨날 것이 분명하다. 공자는 그들에게 왕이나 다름없는 인물이었기에...


저자는 그렇게 강보에 꽁꽁 싸맸던 공자의 껍질들을 하나 씩 벗겨내어 마침내 그 본 모습을 독자들에게 보여준다. 포장하지 않은 공자의 진면목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어쩌면 골수 유학자들에게는 심히 불쾌한 일일지도 모른다. 아마도 조선이었다면 저자가 그 목숨을 부지할 가능성은 제로 퍼센트인 것이다. 독자들에게 공자를 관자보다 훨씬 못 미치는 인물로 각인시킬 수도 있는 저술에 분노했을 것이며 더더욱 참을 수 없는 것은 그들이 감추고 싶었던 유학의 본질을 적나라하게 노출 시켰기 때문이다. 이는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사안이다. 자신들의 지배 이념을 그토록 통렬하게 드러내다니…….



관중과 공자가 선택한 키워드의 차이점


관중과 공자는 시대적인 차이는 있지만 공통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관중은 자신의 힘으로 그 어떤 나라이든 패국으로 만들고 싶어 했고 공자는 주례를 바탕으로 나라를 바로 세워보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관중은 환공이 이끄는 제나라를 패국으로 만들기 위해 전례 없는 생각을 해낸다. 바로 민중의 중요성 인식이 그것이다. 반면 공자는 관자보다 독자들에게 훨씬 더 잘 알려진 인물이지만 관중과는 전혀 다른 길을 택한다. 주(周)나라의 예(禮)를 회복하여 정국을 안정시키겠다는 일념, 즉 지극히 보수적인 경향을 보여준 것이다. 정치에 관한한 대 선배인 관자의 엄청난 성공 사례를 잘 알고 있었으면서도 관중을 벤치마킹하지 않고 정 반대의 길을 택한 셈이다.

  

사실 관중과 공자의 가장 큰 차이점은 패국을 완성하는 데 가장 중요한 핵심을 어느 곳에 두느냐이다. 관중은 패국의 열쇠를 민(民)에게서 발견한 반면 공자는 흔히 인(人)이자 백성(百姓)에게서 찾으려 했다는 점이다. 2권을 읽기 전에 1권을 읽는 것이 바른 순서임에 틀림이 없는 것은 인민(人民)이라는 용어에 대한 올바른 개념의 이해 때문이다. 



춘추전국시대의 인민(人民), 백성(百姓), 군자君子, 소인小人 의 용어 인식

 

요즘이야 인민, 백성이 모두 같은 일반인을 지칭하는 말이지만 주나라 시절에는 그것이 아니었다. 주나라의 인(人)은 경대부등 지배세력을 가리키는 말로 공자가 말하는 군자에 해당한다. 백성(百姓)이라는 용어 역시 당시에 성을 가진 경대부등의 지배세력을 뜻하는 용어였다. 人의 상대적 용어인 민(民)은 전쟁에 져 주나라에 끌려온 노예로서 한 쪽 눈을 찔러 보이지 않도록 했고 노동력에 동원되거나 필요에 따라 제사의 희생물이었던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었다. 군자(君子)의 상대적 용어인 소인(小人)은 피 지배세력을 뜻하는 말이다.

 人과 民이라는 말을 사용하다보니 중국을 중화인민공화국(中華人民共和國)이라고 하던데 혹시나 춘주 전국시대의 인민이 가지는 의미를 행여 여전히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덜컥 인다.

 

위의 용어를 정확하게 인식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왜냐면 관중은 피지배 세력인民을 패국으로 가는 키워드라고 생각했고 공자는 정치적 안정을 위해 民을 다스리는 지배세력인 人을 키워드로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정치적 신념에 따라 관중은 민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 성의를 보여준다. 물론 꿍꿍이는 제나라를 패국으로 이끌기 위한 사전 포석이지만 말이다. 백성들이 풍족하게 살 수 있도록 제도적인 장치들을 마련하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관중은 현대의 복지정책으로 민중들에게 아낌없는 지원을 한 셈이다. 민중이 국가에 대한 신뢰를 가져야만 국가에 충성하는 존재라는 점을 정확하게 간파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백제의 민중이냐 신라의 민중이냐가 무엇이 중요하단 말인가. 가족과 더불어 굶주리지 않고 인생을 노력 한 대로 살아갈 수 있고 필요하다면 국가가 자신의 가족을 보호하고 지원하는 상황에서 민중의 나라가 신라인가 백제인가는 중요하지 않은 일이지 않은가. 관중이 민중을 그토록 보살피는 전략을 사용한 것이 춘추 전국시대, 즉 피지배 세력은 인명으로서의 가치가 존중되지 않던 시대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관중은 이러한 민중의 심리를 잘 파악했고 민중들이 배고프지 않도록 힘썼으며 결국 패국을 이루었다.


관중이 당대의 정치력으로 저 거칠고도 사납기만 하던 춘추 진국시대에 제나라를 최초로 패국으로 이끈 그의 생각보다 사실 내게 더 관심이 가는 인물이 공자인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저자가 공자를 포장한 껍데기들을 홀홀히 털어내어서가 아니다. 정이 정호 형제와 송대의 주희를 거쳐 조선에 그토록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인물 공자는 과연 당대에 어떤 사유로 인생을 보냈는가가 궁금했던 것이다.


 공자의 손자인 자사가 정리한 중용을 읽고 논어와 맹자를 읽으면서 느꼈던 지고한 정신세계는 과연 어떤 근원에서 발원하였기에 조선의 민중들을 그토록 힘들게 만들었는가...나는 이것이 가장 궁금했던 것이다.

 조선 선비의 자제들이 태어나 5세에 천자문을 깨우치고 나면 흔히 동양의 고전이라 이름하는 동몽선습, 사자소학, 명심보감을 달달 암송한 후, 논어, 맹자, 대학, 중용을 거쳐 역경 시경 서경을 기본으로 익혔는데 이를 4서 3경이라 했다. 조선 선비의 자제는 4서 3경 외에 다양한 경전들을 읽고 암송했으며 시서화(詩書畵)에 능해야 했다. 그래서 각 고을마다 성독 소리가 끊이지 않고 들려왔던 것이다.


물론 과거를 보아야 했으며 과거 시험은 동양의 고전에서 출제했다. 하여 과거를 치루는 선비의 자제들은 주희가 해독한 주석까지도 달달 암기하지 않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서 주희는 공자를 능가하는 교주가 되어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주입식 교육의 전형적인 모습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이렇듯 조선의 정치적 이념의 발원지인 공자는 그동안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人과 民이라는 용어의 개념정리가 안된 탓에 상당히 오해를 받아온 것이 사실이다. 어떤 오해야 하면 공자가 말하는 애인(愛人)이란 사실인 즉 민중을 제외한 경대부(사대부)를 뜻하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흔히 우리는 공자의 애인(愛人)을 마치 요즘의 민중을 뜻한다 생각하고 공자가 참 일반인들을 무던히도 사랑했구나 오해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공자가 말하는 仁의 대상은 일반인인 대중을 제외한, 조선으로 치면 농공상(農工商)을 제외한 사(士)들 만을 칭하는 매우 제한적인 용어이며 지극히 정치적인 용어인 것이다. 현대로 말하면 정치인들과 관료들 그리고 많은 재력을 가진 기업인들인 것이다. 민중 곧 대중은 공자의 愛와 仁에서 열외자였던 것이다. 공자는 더욱이 민중이 문자를 알아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어디서 많이 들어보던 말이 아닌가? 그렇다. 바로 조선의 세종대왕이 한글을 만들려하자 이를 극렬히 반대하던 조선의 선비들이 그러했다. 공자의 그러한 생각은 중국의 정이 정호형제와 주희를 통해 조선에 고스란히 전해졌던 것이다.


그러한 공자의 이론은 사실상 강력한 패국을 꿈꾸는 군주들에게 어필하지 못했다. 왜냐면 공자가 그토록 중요하게 생각하는 지배세력들은 실상 군주들에게는 언제든 위협의 대상이 될 수 있는 폭발력을 가진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틈만 보이면 스스로 군주가 되겠다고 덤비며 하룻밤 사이에 아군이 적군으로 돌변하던 춘추 전국시대의 혼란기였으니 복례를 외쳐대는 공자의 말이 먹혀들 수 없었던 것은 당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자는 14년이라는 기나긴 시간동안 정치를 해보겠는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이 나라 저 나라를 떠돌아다녔던 것이다.


결국 공자가 자신의 신념이 세상에 통하지 않는 다는 것을 깨닫고 노나라로 돌아가기로 결심했을 때는 그동안 자신을 믿어주던 제자들마저 상당히 떠나가버리는 이탈 현상이 생긴 후였다. 그러나 공자는 자신의 신념을 굳게 지켜냈다. 이탈 현상을 막기위해 유학의 본질을 교조적으로 탈바꿈하는데 공자는 극적으로 성공을 한 것이다. 이 시점에서 공자의 유학은 종교적인 차원에 다다르게 되어 조선에까지 상륙한다.


공자의 생각은 춘추전국시대의 패국을 꿈꾸는 군주들에게 어필하지는 못했지만 공자는 현재까지 유학의 발원지로 인정받고 있으며 성인으로 추앙받고 있다. 조선에서도 이는 예외가 아니었다. 그러나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말은 공자의 의도를 정확히 읽어낸 사람의 주장임이 강신주라는 걸출한 사람의 분석으로 명확하게 드러난 셈이다.

 

 


현대의 정치이념에 드리워진 관중과 공자의 생각


현대의 정치사에도 관중과 공자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정치인들의 이전투구 양상은 사실상 대중을 위한 것이라고 보기 어려운 측면들이 강하다. 그나마 관중의 생각은 현대의 정치 시스템에도 잘 들어맞는다. 곤궁한 대중들을 위해 관중이 노력했던 것처럼 정부도 국민을 위해 노력한다. 이는 대중의 지지를 얻어 패국을 이루려 했던 관중의 뜻과 일맥상통한다.

 공자 역시 자신의 생각으로 새로운 정치 질서를 창출하고자 했고 춘추전국시대의 제자백가들의 사유도 정치적인 성격이 강했다. 공자에게 모여든 수많은 제자들도 공자라는 인물을 통해 출사하여 명성을 얻고 귀족적인 삶을 살아가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정치적인 판단과 목적을 가지고 공자의 문하로 들어선 것이다. 그러나 공자의 사유는 그의 시대가 요구하는 사유방식이 아니었고 현대의 정치 시스템에도 잘 들어맞지 않는다. 지배자와 피지배가가 명확하게 구별되는 사유 방식의 정치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이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공통분모를 가지는 부분이다.



발견, 아나키스트 강신주님


이 책을 읽으며 매우 인상 깊었던 요인은 꼭 관중과 공자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저자 강신주의 사유가 빛나는 책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 책을 저술하기위해서 그가 연구해온 뜨거운 정렬과 그 성과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빛나는 대목은 이 책을 통하여 저자 강신주님은 자신의 신념인 무정부주의를 피력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도 아주 절절하게 말이다. 이는 놀라운 발견이자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러하다. 그동안 몇 권 되지 않는 책을 읽어온 독자로서 이처럼 무정부주의임을 피력한 저술가가 몇이나 되던가...아마도 국내에서는 찾아보기 어렵지 싶다. 번역서는 물론 논외로 해야 할 것이다.


 관중이 제나라를 패국으로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강신주는 자신의 무정부주의를 피력하고 있다. 관중의 정치력이 빛나는 것은 민중을 패자로 가는 키워드로 사유했다는 점이고 민중을 위한 정치를 피력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대목에서 저자 강신주는 관중의 정치력을 날카롭게 꿰뚫어본다. 이 책이 그야말로 빛을 발하는 대목은 관중의 정치력이나 공자의 진정한 모습을 독자들에게 드러내는 대목이 아니다. 바로 관중의 정치력을 통해 투사시킨 자신의 신념, 바로 그것이다.


국가란 패자로 나서기 위해 국민의 협조가 필요하다. 말이 협조이지 자발적인 복종의 성격을 띠지 않을 수 없다. 강제력보다는 물론 대단히 좋은 방법이라 하겠다. 그러나 이 자발적 복종에서 발견해내야 할 것이 있다. 바로 국가라는 강력한 시스템이 내미는 손 바로 그것이다.


저자는 자발적 복종은 강제된 복종보다 더 치명적이라는 통찰력을 독자에게 제시하고 있다. 강자가 보내는 러브콜은 약자가 스스로 강자가 되려는 노력을 망각하게 한다. 이 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강자가 약자에게 훨씬 더 많은 것을 빼앗아 가기위해서 시행하는 행위라는 것을 알게 해서는 안 된다. 민중에게는 그들이 처해진 삶의 조건에 필요한 것을 적절하게 제공하여 자발적 참여와 복종을 유도해내는 것이다.

국가의 군주는 땅에서 자라는 풀로 소나 양을 키우는 목동과도 같은 존재이다. 군주는 충분한 먹이를 제공한다. 이럴 경우 소나 양은 주인을 잘 따르면 먹을 것을 충분히 얻는다는 신뢰를 가지게 된다. 이렇게 되면 가축의 주인은 필요에 따라 그 가축을 자신들의 먹을거리로 삼거나 거래의 도구로 미음대로 사용할 수 있다.


이처럼 국가가 민중을 가장 효율적으로 지배하는 방식은 민중들이 자신이 지배당하고나 그러한 방식으로 억압받고 있다는 사실을 직시하지 못하게 할 때 가능한 일이다. 목동처럼 말이다. 관중의 정치 철학이 현대의 모든 국가, 특히 복지 정책을 통하여 체제의 안정을 영속화하는 작동의 원리인 국가주의 이념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을 통찰한 강신주의 사유가 빛나는 대목이다.


반면 인문주의는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원초적 불평등을 인식하고 있다. 강신주가 그러하다. 목축은 동물을 학대하는 가장 잔혹한 방법이라 말한다. 인간에 의해 길러지는 동물은 근본적인 자유를 박탈당한다. 그러므로 인간의 뜻에 따라 언제든지 살육당할 가능성에 노출되어 있는 것이다. 목축은 좋은 때를 기다려 살육을 잠지 뒤로 미루는 행위인 것이다. 그러나 동물은 이를 착각한다. 당장 죽이지도 않고 풍부한 먹을거리를 제공하지 있지 않은가…….때가 되면 자신을 사육하는 인간이 자신을 죽일 수밖에 없는 엄연한 사실을 부정할 수 있을 때 가축은 인간에게 은혜로운 존재로 둔갑하는 것이다.


진정한 불행이 시작된 것이다. 가축의 야성은 사라지고 인간의 집요한 목축행위로 인하여 가축은 예정된 파괴의 길을 갈 수 밖에는 없다. 이것이 목민의 발상인 것이다. 피지배층은 그렇게 길들여져 필요할 때마다 약탈당하게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축은 목동이 자신을 돌보아주며 보호해주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민중은 사실상 그러한 가축에 감정 이입을 하지 못하고 있다. 훈육에 길들여지지 않으려 거부하는 자는 제거의 대상이다. 결국 길들여지는 자 만이 살아남는 법이다. 민중의 삶도 그러한 것은 아닐까 회의하는 강신 주는 이 저술을 통하여 아나키스트의 면모를 확실하게 드러내고 있다.


국가 지배 체제로 편입하려는 의지와 노력은 공자의 제자들에게서도 발견되는 현상들이다. 목축의 대상이 아니라 목동으로서의 역할을 하고자하는 지배욕을 공자와 그 제자들은 은밀하게 숨기고 있었던 것이다. 신분 상승의 욕구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그들의 학문 속에서는 이를 드러내지 않을 수 없었다. 왜나면 허락된 자유는 언제든지 필요에 따라 철회될 수 있음을 그들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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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int236 2012-04-04 15: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강신주의 자발적 복종은 더 잔인하다는 말이 왠지 더 생각나는 요즘입니다. 제주 강정 마을에 기지가 들어서는 것을 국책사업, 국가 안보를 위한 일이니 당연히 희생해야 한다는 논리 속에서 자발적 복종의 단면을 보게 됩니다.

차트랑 2012-04-05 08: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aint님의 리뷰 덕분에
저도 이 책을 읽게되었습니다.
이점 깊이 감사드립니다.

국가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보는 좋은 계기가
되어줄 수 있는 매우 뜻 깊은 책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저의 서제를 찾아주셔서 고맙습니다 세인트님

2012-04-05 16: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양철나무꾼 2012-04-09 0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강신주 님은 이쪽으로 좀 독특하신 것 같아요.
좀 좋아하기 힘든, 알튀세르 이론을 좋아하셔서 메일 아이디를 알튀세르@로 사용하신다는 분이기도 하죠.
제자백가에서도, 관중에게 자신을 투사하시는~^^

좋은 리뷰 잘 봤습니다~!

차트랑 2012-04-09 1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무래도 철학의 탈주를 우선 읽어보아야 할 듯 합니다 ㅠ.ㅠ
푸코, 들뢰즈, 라캉, 데리다 그리고 알튀세르...
이런~ ㅠ.ㅠ
특히, 비철학적 철학을 요주의해야 할 것 만 같다는...
정말 마음에 안드는 프로이트와
마음에 쏙~드는 맑스를 통과하는 골치아픈 동굴탐험^^도 병행.
역시 마음에 안드는 헤겔선수도 끼워드려야...
스노볼이 따로 없군요 ㅠ.ㅠ

서양철학은 정말 머리를 지근거리게 한단 말씀이에요ㅋ
그러나 흥미를 결코 잃지않게 한다는 강점도 있습죠 ㅠ.ㅠ

그나저나 투사능력이 탁월한 강신주님~^^
이분 역시 요주의 인물이시라는...

양철나무꾼님께서 방문해주신 결과 이거 이거...
읽을거리 엄청 던져주시는걸요^^
고미숙선수가 들뢰즈를 언급할때면
멀쩡하던 머리가 갑자기 빙빙@@~

한동안 아짤아찔한 현기증을 경험하게 되나봅니다..
이런걸 두고 베리굿~ 현상이라고요^^
고맙습니다 양철나무꾼님~^^

마녀고양이 2012-04-09 18: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좋은 리뷰였습니다.....
한줄마다 생각에 잠기게 하고, 강신주님을 만날 생각이 없던 저에게 꼭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을 자발적으로(!) 들게하시는 리뷰였답니다. 실은 중간 부분에 백제 민중이나 신라 민중이나~에서부터 아, 그렇네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에게는 마음대로 해석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능력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아나키스트에 대해서도 다시 한번 생각해봅니다.

감사합니다.

차트랑 2012-04-10 00:28   좋아요 0 | URL
마녀고양이님께서 좋은 리뷰라고 칭찬을 해주시니
몸둘바를 모르겠습니다 ㅠ.ㅠ

저도 강신주덕분에 아나키스트 관련 서적을 뒤지고 있는 중입니다.
사실 뒤질 것도 없이 강신주께서 열거해준 저자를 찾으면 되는 일입니다만^^
제게 강신주께서 새로운 관심 분야를 알려준 것 같아서
매우 만족스러운 저술가라는 인상을 주었습니다.
앞으로 강신주라는 사람의 책을 더 읽어볼 생각입니다.

고맙습니다 마녀고양이님~
 
중용한글역주 - 도올 선생의
도올 김용옥 지음 / 통나무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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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용을 공부해보겠다고 덤벼든지 6개월이 지났지만 텍스트를 읽으면 읽을수록 중용에 대한 리뷰를 쓴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그저 욕심에 중용의 텍스트를 싣고 있는 책만 여러 권 가진 꼴이 되고 말았다. 명심보감을 비롯 논어, 맹자, 대학등의 가르침을 깨달은 후에 중용의 가르침을 받으라 전하는 말이 있다는 점은 차치하고라도 중용의 가르침에 대해 언급한다는 자체가 능력 밖의 일이라는 것을 깨닫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는 듯 하다.


‘동양의 고전은 모든 텍스트를 암기하지 않고 논한다면 그 것이야말로 큰 글을 도둑질을 하는 것’이라고 말해준 학문이 깊은 지인의 말도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 이는 중용을 대하는 마음을 더 무겁게 하는 말이 아닌가 싶다. 결코 중용을 가벼운 마음으로 대하지 말라는 뜻 이렸다. 하여 중용의 모든 텍스트를 암기하기 시작했지만 머리가 나쁜 탓에 그만 장구를 거듭해 갈수록 어리버리하고 만다.

 

이렇듯 감당하기 힘든 중용의 리뷰를 적을 자격은 없는 것은 사실이지만 한 사람의 독자라도 더 중용의 큰 가르침을 공부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면 그나마 다행한 일이라는 심정으로 리뷰를 적는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중용의 리뷰는 불가능한 일이다. 다만 중용의 가르침 중 학생들을 대하는 한 사람으로 매우 귀감이 되는 구절을 간단하게 소개하는 것으로 글을 마무리 할까한다. 중용의 첫 장구는 천명지위성 솔성지위도 수도지위교(天命之謂性 率性之謂道 修道之謂敎) 라는 글로 시작한다. 첫 구절의 강렬한 인상도 인상이겠지만 지금껏 해온 일과 관계가 있는 교(敎)라는 글이 그 얼마나 무게감이 있는 말인지 깨닫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중용은 위의 15글자를 통하여 性, 道, 敎를 설명하고 있다. 이 중에서 나는 교(敎)라는 말을 깊이 새기고자 한다. 하여 敎에 중점을 두다보니 장구의 시작을 거꾸로 이해할 수 밖에는 없다. 중용의 교(敎)라는 말은 첫 장구인 수도지위교(修道之謂敎)라는 데서 처음 등장하는 말이다. 이는 ‘道를 닦으며 따르는 것 그것을 일컬어 敎라 한다’라고 이해할 수 있다. 구절의 뜻으로 보건대 그 敎를 이해하기 위해서 道를 알아야 한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솔성지위도(率性之謂道)가 그것 인데 이는 ‘性을 따르는 것 그것을 일컬어 道라 한다’라고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또 性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이 그것으로 이는 ‘天이 命하는 것 그 것을 일컬어 性이라 한다’로 이해할 수 있다. 여기서 天이란 우주의 이치 혹은 섭리로 이해하면 될 듯 싶다.


 

그렇다면 天이 命하는 性이란 무엇인가... 이는 모든 자연 속에 존재하는 실체들 각각의 성질을 뜻하는 말이 아닐까 생각한다. 최근 EBS에서 황제 펭귄에 대한 다큐를 방영한 적이 있다. 영하 50도를 오르내리는 추위 속에서 그들은 꼼짝하지 않고 알을 품어 부화시키고 어린 새끼를 키우는 수고로움을 전혀 마다하지 않는다. 그들이 알을 품기 시작하여 새끼로 자라게 하는 그 일련의 과정들은 너무나도 눈물겹고 고달픈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아마 방송을 보신 분들은 황제 펭귄에게 새끼를 키운다는 것이 그 얼마나 가혹한 일인지 공감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알을 낳자마자 어미는 아빠 펭귄에게 알을 건네고 먼 바다로 나가 음식을 섭취하고 돌아와야 한다. 그래야 아빠 펭귄과 교대할 수가 있는 것이다. 아빠 펭귄은 엄마 펭귄이 돌아오는 그 날까지 무려 4개월이라는 기나긴 시간을 꼼짝도 하지 않고 알을 품는다. 음식물은 전혀 먹을 수가 없다. 아차 실수하여 알을 놓치기라도 하면 영하 50도의 강력한 추위속에서 알은 순식간에 얼어버리고 만다. 그러면 펭귄들은 돌덩이처럼 굳어버린 알을 다시 품어보겠다고 기를 쓴다. 어디 이 뿐인가. 새끼를 또 아차 실수하여 놓치는 경우도 있다. 이 역시 순식간에 얼어버린다. 차가운 시신이 되어버린 새끼를 어미는 품겠다고 또 그렇게 애닯아 한다.

 

 어미가 먹이를 충분히 먹고 돌아오면 아빠 펭귄이 바다로 나가 음식을 섭취하고 돌아온다. 그 거리는 무려 100km가 넘는다. 일정 기간을 넘기면 아기 펭귄은 아사하고 만다. 엄마가 토해내는 음식물이 바닥이 나면 굶어 죽을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펭귄들은 한계 시간대를 넘기지 않고 돌아온다. 그들에게 시계가 없는데도 말이다.


 그렇다면 황제 펭귄은 그토록 연속된 시련의 행위를 왜 마다하지 않는 것을까...바로 天이 命한 그 性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이다. 자연이 이치는 황제 펭귄에게 그렇게 살아갈 수 있는 성질을 부여한 것이다. 어쩌면 펭귄이 그런 삶을 선택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선택 마 저도 추호의 어김도 없는 자연의 섭리인 것이다. 그것이 바로 그들의 性 이기 때문이다. 뜻이 그러하다면 주희가 그 性에 주석을 달기를, "性은 곧 理를 뜻하는 말이다"라고 언급한 부분에 대해서는 깊은 의문이 들 뿐이다. 


 

 ‘道를 道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道가 아니다’라는 말이 있기는 하다. 물론 이는 도가인 노자의 말이기는 하다. 그러나 유가의 중용에서는 분명히 道를 설명하고 있다. 솔성지위도(率性之謂道)가 바로 그것이다. 즉 天이 命한 그 性을 따르는 것이 바로 道인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황제 펭귄은 도를 행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주어진 性을 매우 잘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인간에게 도란 무엇인가를 말할 차례이다. 자연의 한 존재인 펭귄에게 性이 있듯이 인간에게도 그에 합당한 性이 있다고 보아야  한다. 인간도 역시 자식을 낳고 교육시키며 기른다. 뿐만 아니라 가족 뿐 아니라 타인을 사랑하고 도우며 中과 和를 이루려 노력하는 것이 인간이다. 공자가 말했다시피 인간은 仁을 행해야 한다. 자식을 사랑함에 애틋하고 타인을 사랑함에 거리낌이 없는 것이 인간의 모습이어야 한다. 세상의 和를 이루는 것이 인간이 갈 길인 것이다. 그 길에는 仁, 義, 禮, 知, 信이 있다. 이것이 인간이 가야 할 길이다.


비로소 敎라는 말이 나온다. 수도지위교(修道之謂敎)가 그것이다. 결국 인간이 따라야 할 그 本性에 맞는 길을 가는 것 道이고 그 道를 닦으며 따르는 것이 바로 敎인 것이다. 그렇다면 敎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敎와는 많이 달라진 모습의 敎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중용의 첫 장구를 공부한 사람에게 敎란 인간 본연의 性을 충실히 따르고 행하며 갈고 닦는 것이 바로 敎인 것이다.

 

중요은 道 다음에 敎를 놓고 있다. 이 얼마나 敎의 중요성을 강조한 말이던가... 참된 敎를 이토록 의미심장하게 가르치는 고전을 또 어디에서 찾아볼 수 있단 말인가... 이제는 敎라는 말을 함부로 사용하지 못할 것만 같다. 교라는 말 속에는 엄중하고도 깊이를 헤아리기 어려운 심연의 지혜를 가진 뜻이 담겨있으니 그 말의 아득함을 어찌 감당해야 한단 말인가...


 요즘 학교 내의 교권이 추락했다는 말이 최근 사회적인 이슈가 되고 있다. 敎의 權이 추락했다는 말은 敎에 權이라는 껍질을 하나 입혔기 때문에 생긴 말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중용에서 말하는 敎는 결코 추락하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엄중함을 감당하기에도 벅찬 말은 아닐런지...중용에서 가르치는 敎를 깨닫는다면 교권은 반드시 바로 설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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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2-03-06 1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이렇게 읽으신다는 게 어딥니까?
전 엄두도 못 내고 있는데.
근데 글씨가 커서 좋습니다.
글씨체가 뭔가요? 폰트는 10으로 키우신 건가요?
요즘엔 글씨 작으면 잘 안 읽게 되요.ㅋ

차트랑 2012-03-06 14:55   좋아요 0 | URL
요즘은 저의 독서기록장에서 오른쪽 마우스로 복사해서
리뷰나 페이퍼를 작성합니다.
글씨는 한컴바탕이고요 폰트는 10입니다.
그런데 선명도가 떨어지는 현상이 발생하는 듯 합니다.
테스트를 좀 해봐야 할 듯 합니다

그리고...
용기를 주셔서 고맙습니다 스텔라님
또, 마음만 먹는다면 누구든 읽으실 수가 있습니다^

2012-03-06 15: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3-06 16: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3-06 17: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3-06 20: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낭만인생 2012-03-06 2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중용, 쉽고도 어려운 교훈 인 듯 합니다
 
신화와 인생 - 조지프 캠벨 선집
조지프 캠벨 지음, 다이앤 K. 오스본 엮음, 박중서 옮김 / 갈라파고스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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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대들이 꼭 읽어야 하는 작가, 조셉 캠벨


필독서라는 말도 있지만 이제는 필독가라는 말도 때론 성립이 된다는 생각을 하게되는 것은 바로 조셉 캠벨과 같은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닌가 싶다. 신화와 인생을 번역한 이윤기선생이 이 책을 번역하지 않는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지만 조셉 캠벨은 참으로 멋진 생각을 가진 인물임에 틀림이 없다. 그 어떤 현상도 조셉 캠벨의 사고 영역에 장애가 되는 일은 없다. 그것이 종교이든 철학이든 간에 그의 영역 안으로 들어서기만 하면 모든 것들은 잘 버무려지고 융화라는 새로운 변화를 격게 된다. 그야말로 ‘化’를 이루어 내는 것이다. 그렇다고 다양성이 무시되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다양성을 고스란히 보존시켜내면서도 전체적으로는 전혀 새로운 맛을 주는 사고의 소유자인 것이다. 조셉 캠벨을 우리들의 20대가 읽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유이다.



열린 사고


 젊은 독자들에게 유익한 책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저자의 열린 사고이다. 저자는 큰 줄기의 종교뿐만 아니라 동서양의 잘 알려지지 않은 다양한 신화들을 연구해온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이다. 기독교, 불교, 유학, 도학등은 물론 일반인들로는 접하기 쉽지 않은 아메리카 부족을 비롯 아프리카의 원주민에 이르는 그들의 신화를 연구해왔다. 어쩌면 전 세계의 신화란 신화는 죄다 섭렵했는지도 모르겠다.


 한 가지 눈에 띄는 것은 자신 스스로 기독교의 가정에서 자란 사람이라고 말하면서도 이원론적인 기독교적 이론들에 공감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때로 조셉 캠벨을 지극히 동양적 사상에 물든 사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떨치기 어렵게 한다. 절대자와 인간의 간극인 넘볼 수 없는 종교적 금기사항을 저자는 무참히도 무너뜨린다. 이원론적 사고 혹은 사상은 기필코 대척점을 만들 수 밖에 없고, 언젠가는 반드시 서로 충돌할 수 밖에 없는 구도로 이해하는 그에게 이윈론이 자리 잡을 여지는 결단코 없다. 캠벨에게는 정신적 작용력의 한계는 없다고 생각하는 이유이다.



정말 멋진 독서법


이토록 경계를 자유로이 넘나드는 저자가 젊은 독자들에게 주는 또 다른 유익함은 독서의 좋은 방법을 소개하고 있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예를 들자면 캠벨이 조이스와 토마스 만 그리고 슈펭글러를 읽다보니 니체를 언급한 장면이 나오고 그렇게 니체를 읽는다. 니체를 읽으려면 쇼페펜하우어를 읽어야하고 쇼펜하우어를 읽으려면 킨트를 읽어야 한다. 칸트를 출발점으로 삼자니 매우 힘들다. 그리하여 괴테로 돌아간다. 조이스가 쇼펜하우어를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조이스의 시스템에서 쇼펜하우어가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되고, 슈펭글러의 사고 시스템과 조이스의 것이 매우 밀접하다는 점을 칼 융을 통해 깨닫게 된다. 그리고는 이 모든 것들을 한데 버무리는 작업을 해내는 것이 캠벨의 독서방법인 것이다.


사실 동양의 고전을 읽을 때도 이는 마찬가지이다. 중용을 읽다보면 대학, 논어, 주역 혹은 맹자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독서의 역량이 늘어가는 것은 말할 것도 없는 방식이 아니던가... 젊은 20대들에게 캠벨은 결혼 혹은 인생의 의미 뿐 아니라 진정한 독서의 방식과 그 가치를 여지없이 보여준다. 왕성한 독서력을 발휘할 수 있는 20대들에게 이 책은 매우 귀중한 깨달음을 가져다 줄 것이라 믿는다.

  


캠벨, 중용과 만나다...


  동양의 사상을 약간을 신비스럽게 여기고 있다는 점인 아쉬움으로 남지만 ‘인간은 신성으로 가득 채우는 것을 향해 나아가는 존재’라고 생각하는 그에게서 동양의 고전인 중용의 장구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중용에는 ‘지성여신’이라는 문구가 있다. ‘지극한 誠은 곧 神적인이다.’라는 말이다. ‘지성여신’이라는 문구 앞에는 ‘유천하지성, 위능진기성’이라는 말이 있다. 이는 ‘오직 천하의 지성이라야만이 자신이 가지고 태어난 誠을 이루어 낼 수 있다’는 뜻이라고 한다. 이 둘을 합치면 ‘오직 천하의 지극한 정성이라야만 자신의 誠을 이루어 낼 수 있는 것이고 그 지극한 誠은 곧 神적인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이 얼마나 조셉 캠벨의 이야기와 흡사한 말이던가...인간은 신성으로 가득한 것을 향해 나아간다는 조셉 캠벨의 말은 동양의 대표적인 고전 중 하나인 중용의 한 장구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느낄 수 있다.


저자가 들려주는 아파치족의 이야기는 지극히 물권을 인정하고 있다. ‘모든 사물들은 살아있고, 그 사물들은 우리의 필요를 이해하고 있다’ 내용이 그것이다. 이는 사물을 인간이라는 방향에서 출발하여 사고한 것이 아니라 사물을 주체로하여 사고한 말이다. 중용에서도 물권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대목이 있다. 인권이 중요하듯이 물권도 인정해주어야 한다는 내용이 그것이다. ‘능진기성 위능물지성’이 그것이다. 천지인의 조화로움과 일원론을 주장하는 동양사상에서 물권의 중요성을 제기한다는 자연스러운 일이겠지만 인간을 만물의 영장이라고 주장하는 서구의 사상으로는 설파하기 매우 어려운 내용이 아닐 수 없다.


여러 가지 면에서 캠벨은 우리의 젊은 독자들에게 많은 깨달음과 공감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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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학 어떻게 할 것인가
김용옥 지음 / 통나무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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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는 이 책을 모두 7개의 파트로 구분하여 제목을 붙였다. 첫 번째 글은 저자의 기철학에 대한 시론을, 두 번째 글부터 5번째 글은 저자의 논고들이고 나머지 하나는 일본어의 표기법에 관한 글이다. 첫 번째 글의 기철학 시론에서 저자는 동양사상에 새로운 지평을 열어가고자 하는 사상가임을 알 수 있게 한다. 그의 기철학은 모든 것의 유기적인 관계의 통합, 즉 몸이라는 것의 일원화이다. 세계 질서와 문화의 다원화를 인정하는 시대적 흐름으로 본다면 다원화 속에서의 일원화라는 개념이 서로 충돌하는 듯 보인다.  그러나 무질서 속에서의 질서라는 명제로 이해한다면 소통이 가능한 일일 것이다. 이는 기독교적 사고를 저변에 깔고 진화해온 서양철학과 대조되는 사상이며 새로운 개념으로서 김용옥의 기철학이다.

 

2번째 글부터는 자신의 논고를 수록한 글들이다. 하버드대학교의 박사과정에서 발표한 논문 뿐 아니라 각 대학에서의 연구과 언론사의 학술지에 게재한 글들이다. 이 글들은 일관된 방향성과 목적성을 분명하게 밝힌 글들로서 제목이 주는 ‘동양학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연구의 성과물들이다.


결과적으로 독자의 입장에서 이 책의 내용과 전문성을 고려하여 판단한다면 첫 번 째 글은 기철학에 대한 시론을 소개한 글이라 볼 수 있고 2번 째 글(저자의 첫째 글)부터는 동양학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다양한 논고들이라 볼 수 있다. 결과적으로 동양철학과 서양철학에 대한 배경지식이 깊지 않은 독자의 한 사람으로 읽어나가는데 상당한 어려움을 겪는 장을 만나게 된다. 그 장은 바로 논고의 세 번 째 글인 ‘中央學界에 있어서의 中國哲學史記述의 轉換’이다.


氣哲學 試論을 이끈 장에서는 기철학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돕는 章이라고한다면 나머지의 논고들은 동서양의 철학을 넘나드는 저자의 광범위하면서도 뿌리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저술된 논고들이라는 점을 감안하고 읽어야 한다. 특히 225쪽에서 262쪽에 이르는 ‘中央學界에 있어서의 中國哲學史記述의 轉換’은 우선 한자를 상당히 사용한 글이며 그 내용도 중국 철학과 서양철학의 유물론과 관계하는 부분이면서도 상당한 이해도를 요구하는 장이기에 일반 독자인 나에게는 읽어내기가 매우 어려웠다.

 

이를 제외한 나머지의 장들은 일반 독자들이 이해하기에 큰 어려움이 없다고 본다. 저자는 글을 읽는 순서를 약간 재조정해주고 있다. 이점을 참고한다면 이해를 돕는데 일조할 수 있을 것 같다. 논고들의 목적은 동양학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후학들에게 주는 일종의 조언이라 할 수 있다. 후학들이 고전을 어떠한 자세로 번역에 임해야하고 연구해야 할지를 자신의 주장을 실은 글들이다.


철학과 사상의 중요성

 우리가 흔히 말하는 동양의 고전은 4書 5經을 일컬으며 그 고전들은 철학사상을 담고 있다. 철학 사상을 어떻게 하느냐는 저자에게 중요한 연구의 대상이면서 후학들에게 전하고 싶은 요체이다. 사상은 시대를 거쳐가면서 세계의 역사에 그 흔적들을 남긴다. 저자는 한국의 철학 연구의 문제점을 날카롭게 지적하면서 동시에 서양의 칸트, 헤겔, 니체 그리고 괴테에게 히틀러의 죄악에 대한 책임을 묻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철학사상은 주변 사회에 영향을 끼칠 뿐만아니라 전 세계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을 수 없는 무기와 다름이 없다. 나아가 철학적 사상에 대한 올바른 태도를 가져야 하는 이유로 저자가 밝혀두고 있는 점은 ‘새로운 혁명적 인간학’을  향한 방향점이다. ‘무엇을 하느냐’는 사실 중요한 목표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무엇을 위해, 즉 누구를 위해 그것을 어떻게 하느냐’의 방법론에 대한 올바른 방향설정이 없는 연구가 그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를 경고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러므로 ‘동양학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저자의 의지가 담긴 매우 귀중한 책이라 하겠다. 고전에 대한 이해의 방법론, 인용의 방법론 즉 연구의 전반적인 방법론을 다양하고도 깊이 있는 학문적 배경을 바탕으로 전개해가는 이 책은 비단 철학에만 국한 된 것은 아닐 것이다. 예를 들어 동양철학이 가지는 함의의 포괄성은 저자가 강력하게 지적하는 부분인데 포괄적이고 입체적이며 다각적인 고전의 함의를 대중들에게 어떻게 전달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를 지적하는 부분은 매우 인상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자가 제시하는 ‘동양학 어떻게 할 것인가’는 본질적으로 학계에만 국한되는 한계성을 넘어선다. 연구는 학자들이 하는 것이지만 그 연구를 일반 대중들에게 적절하게 전달해야 한다는 합목적성을 제시해주고 있다. 이 책은 그러므로 우리 모두를 위한, 인류를 위해 학계가 어떻게 노력해야 하는가를 제시해주는 논고들이라 할 수 있다.

 

 잘못된 인식이 끼치는 영향력은 지대하다. 잘못된 인식이 전파되어 사회로 흡수될 때 뒤따라오는 현상들은 해당 사회 뿐 아니라 전 세계적인 부정적 결과물을 내놓게 마련이다. 편견과 오류는 개인을 파괴하고 심지어 사회를 파괴할 수 있는 위험한 무기와 같다. 그러므로 사회와 문화가 발전할수록 철학과 사상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절실히 요구된다. 이를 위해서 동서양 철학에 대한 바른 이해가 필수 전제이다. 바른 이해를 위해서는 바른 연구의 지향점을 필요로 한다. 이러한 점에서 이 책이 가치를 매우 높이 평가하고 싶다.



독자들에게 이 책이 주는 의미

동양의 고전에서 드러나는 철학은 서양의 그것 과는 매우 다르다. 인간이 존재하는 우주관이 특히 그것이다. 동양 사상의 우주관은 실체와 현상을 이원적인 시각으로 접근하지 않는다. 현상을 초월한 실체에 독립성을 부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실체의 초월성을 바탕으로하는 이데아론적 기하학적 사유나 절대적인 도그마에 집착하지 않는다. 서양의 찰학적 사조가  헤겔 그리고 막스에 이르기까지 플라톤적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본체와 현상의 이원론적 구조가 서양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기독교적 도그마가 그 배후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양의 철학은 기하학적 사유가 자리잡을 여지가 없다. 동양은 공간조차도 시간적으로 파악하는 특이성을 가진 철학이기에 그러하다. 공간적 개념의 절대성을 맹신하지 않는 탓이다. 이러한 동서양의 철학적 구조를 일반 독자들에게 파악 할 수 있도록 해준다는 것이 이 책의 가장 큰 매력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사고를 전개시키는 과정에서 저자는 매우 깊고 폭넓은 동서양 철학을 끌어와 논고안으로 개입시키기 때문에 이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뒤따르는 한자들은 한자와 자주 접하지 않는 젊은 독자에게 독서의 어려움을 줄 수고 서양 철학적 배경을 상당히 요구하는 문제도 이 책의 단점으로 작용할 수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동서양의 철학적 배경 지식의 유무를 떠나 매우 유익한 책이 되리라 생각한다. 배경지식이 밝은 독자들이라면 가독성이 높다는 이점이 있고, 그렇지 않은 독자들이라면 자신의 독서 방향을 이끌어가는 안내서로서의 역할을 훌륭하게 해낼 수 있는 책이다. 이 책을 읽어보신 독자들이라면 이미 알 고 있듯이 눈에 띄는 고전들과 서양철학자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바로 이 점을 놓치지 않으면 된다. 책을 읽어가면서 포착한 고전과 철학에 주의를 기울인다면 이 책을 읽는 그 가치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자신의 시각과 통찰력을 높여줄 것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가장 바람직한 독서의 방법이 아닌가 생각한다. 저자가 이 책을 통해 기철학의 이해를 돕고 나아가 ‘동양학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방향을 설정하는 논고들이 후학들에게 유익하고도 큰 도움이 되어줄 수 있듯이, 이 책을 읽는 일반 독자들에게는 독서의 방향과 방법을 제시해줄 수 있는 매우 유익한 도서로서의 역할을 훌륭히 해낼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또한 저자의 후학들은 서양철학과 동양철학에 매우 깊은 경지에 이른 저자의 견해를 상당부문 수용한다 한다면 올바르게 고전을 연구하고 발전시켜가는데 도움이 크리라 여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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