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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깅을 하고 오는데 동네가 이렇게나 예쁘게 바뀌었다. 인공조명은 광합성은 없지만 사람들을 즐겁게 한다. 그 가운데 스티비 원더와 안드라 데이의 캐럴이 흘렀다. 아아 이제 완연한 겨울, 크리스마스가 다가온다. 겨울은 춥지만 뜨뜻한 계절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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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비 원더는 시각장애를 겪고 있다. 사람들은 그가 태어날 때부터 장애를 안고 태어났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그는 안타깝게도 출산 예정일보다 6주 일찍 태어났다. 뇌에서 눈으로 가는 혈액이 원활히 공급되지 않아서 그는 인큐베이터 안에 들어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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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운명의 장난이었는지 당시 인큐베이터 기계의 고장인지 간호사의 실수인지 아기 스티비 원더가 들어가 있던 인큐베이터에 산소가 과다 공급이 된다. 때문에 스티비 원더는 망막의 기능을 잃어버리게 된다. 시력을 잃어버리지 않을 수 있었지만 결국 이렇게 되어 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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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는 시력을 잃은 대신 노래를 얻었다고, 그 덕분에 노래를 부를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열 살 때부터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고, 오르간, 베이스, 리코드 등 그가 완벽에 가깝게 연주하는 악기만도 스무 개가 넘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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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지구에서 하모니카를 가장 잘 부르는 사람이 스티비 원더가 아닐까. 스티비 원더 하면 많은 노래가 있지만 isn't she lovely가 있는데 싱글 버전과 앨범 버전이 있다. 앨범 버전에는 첫 시작에 아기 울음소리가 들린다. 이 노래는 잘 알겠지만 자신의 첫째 딸 '아이샤 모리스'에 대한 자신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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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노래의 내용은 아이샤 모리스를 볼 수 없어서 사람들에게 물어보는 내용이다. 이봐 내 딸 예뻐? 정말 작고 귀여운 거야? 나 닮진 않았지?(하지만 정말 빼닮았다) 하며 딸을 볼 수 없는 안타까움과 기쁨을 그대로 표현한 곡이다. 보이지 않아서 느낄 수밖에 없는 아빠의 마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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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의 라이브 공연을 보면 그의 딸인 아이샤 모리스가 늘 따라다니며 백 보컬을 맡고 있다. 그래서 공연에서 이 노래가 나오는 영상을 보면 카메라가 아이샤를 비추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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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비는 7명인가? 자녀를 두고 있다. 아이샤의 동생들도 나의 노래도 만들어 달라고 할 법 하다. 스티비 원더가 2009년인가 올림픽경기장에서 콘서트를 한 적이 있었다. 그때 앞자리에서 노래를 들었던 그 굉장한 감동은 새빨간 거짓말이고 헤헤. 그때 우리나라에서 콘서트 티켓이 최단 시간에 매진이 되었다. 말 그대로 순삭이었다. 공연장에는 일반인들 반, 우리나라 연예인과 최정상 가수들 반이었다. 김태우가 가장 열광했던 것으로 아는데

스티비의 원래 이름은 스티브 랜드 하드웨이 모리스다. 10살 때 길거리에서 노래를 부르는 스티비를 보고 한 무명가수가 픽업을 해서 당시 기획사에 데리고 가서 그곳의 사장에게 보여줬는데 그 사장이 스티비의 노래를 듣고 이건 불가사의다! 그랬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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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장의 말을 빌리면, 세계의 7대 불가사의가 있는데 이 아이는 8대 불가사의다. 그래서 불가사의? 궁금하다? 원더? 뭐 이렇게 파생되어 스티비 원더가 된 것이다. 그리고 이즌쉬럽미 노래 시작 전 애기 울음소리는 모리스의 울음소리는 아니라고 한다. 어떻든 그래서 그런지 스티비 원더의 노래는 여기, 가슴을 뜨뜻하게 해 주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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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04 21: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교관 2018-12-05 14:18   좋아요 0 | URL
알아보지 않으면 어때요, 노래를 듣고 여기, 여기 가슴이 따뜻해져오면 그것만으로도 얼마나 멋진 일입니까 ㅎㅎ. 오늘도 좋은 하루 보내세요
 

 

 

 

 

사람들이 월요병에 시달리고 있다. 특히나 지금과 같은 계절에는 월요일 오전에 일어나서 움직이는 것이 힘겹다. 그건 급작스럽게 바뀌어버린 계절 탓에 밤 새 높은 온도에서 잠을 자면서 몸이 따뜻하고 안온함에 적응이 되어 있다가 먼지가 많고 쌀쌀한 이른 오전에 일어나서 움직이는 것에서 오는 괴리가 몸을 힘들게 하는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대부분 가족을 위해서 또 욕 들어 먹지 않기 위해서 더 나아가 나를 위해서 힘든 몸을 일으켜 세워 월요일의 오전을 극복하고 각자도생의 길로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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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월요병이나 월요일 개념이 없기 때문에 월요일이 딱히 힘든 날도 아니고 일요일이 마음의 안식 같은 날도 아니다. 구치소에도 월요일이나 일요일의 개념이 잘 없는 편이다. 구치소 법무부 직원들이나 재소자들도 일요일이나 월요일이나 거의 흡사하게 흘러간다. 같은 시간에 기상을 하고 점오를 하며 번호를 외치고 이발소에서 일을 하는 기결수(미결수만 있는 구치소에도 형을 사는 기결수가 복역한다)는 면도날을 갈고 가위를 제자리에 두고 직원들의 이발을 하고 수염을 깎아주고 월급을 받는다. 단지 평일처럼 접견, 즉 면회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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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처럼 겨울 속 온도가 높은 날은 구치소의 소각장에 겉옷을 입고 있으면 등에 땀이 흐른다. 구치소에서는 매일 엄청난 양의 인분과 굉장한 양의 쓰레기와 설명 할 수 없는 양의 더러운 물이 나와서 처리 장에서 처리과정을 거친다. 겨울의 소각장은 꽤 재미있고 무엇보다 따뜻하다. 활활 타오르는 불기둥을 보는 것은 어린이 때나 어른이 되어서나 어째서 재미있는지 모를 일이다. 쓰레기 중에는 책도 많다. 미결수인 재소자들은 기결수가 되어서 교도소로 이송이 되거나 아니면 그대로 구치소를 빠져나갈 때까지 사방 안에서 할 일이 없기에 책을 많이 읽는다. 암수살인에서 주지훈이 법률에 관한 책을 독파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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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소자들이 소설을 많이 읽는데 레이먼드 카버의 소설을 읽는 사람은 드물다. 소각장에서 만난 평식이 형은 레이먼드 카버의 팬이었다. 오전 소각을 하고 점심시간에는 사방으로 올라가지 않고 따뜻한 소각장 옆에 비스듬히 누워 레이먼드 카버의 소설을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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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먼드 카버의 책을 읽고 있으면 옆에서 도대체 그 사람 책이 뭐가 재미있냐고 해. 읽어봤는데 도통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고 하면 그럼 한 번 더 읽어 보라고 말해. 두 번이나 읽었는데 당최 뭔 소리지? 하는 사람에게는 세 번 읽어보라고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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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식이 형이 나에게 해 준 말이었다. 나는 레이먼드 카버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었는데 평식이 형 덕분에 그의 소설을 읽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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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먼드 카버의 글이 중의적이라고 하는 서평이 많은데 그것도 받아들이는 사람 나름이라고 생각해. 카버의 단편들은 대체로 당시 미국 중산층의 이야기야. 80년대 이전의 미국 중산층은 자식에게는 엄격한 교육과 제재가 있었고 이웃과의 교류가 지금보다는 암묵적으로 이어진 화합 같은 것이 많았지. 눈에 드러나지 않는 견제가 있었고 중산층을 벗어나기 위해 부부관계도 여러모로 고충을 겪고 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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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치소는 한 곳에서 보통 일주일 씩 근무를 하기 때문에 평식이 형과는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죽 같이 지내게 되었다. 저녁을 제외한 시간에는 평식이 형이 레이먼드 카버에 대해서 하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따뜻한 소각장과 날름 거리는 불꽃과 레이먼드 카버의 이야기. 갇힌 곳, 구치소지만 꽤 낭만적이었다. 지옥 같은 곳에도 틈은 언제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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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먼드 카버가 단편만 쓴 이유는 돈 때문이었지. 돈을 벌기 위해 몇 년씩 걸리는 긴 장편을 쓸 수가 없었던 거야. 190센티미터가 넘는 거구로 카버는 마땅히 집필할 수 있는 공간이 없었어. 그는 자동차에 구겨지듯 애매하게 앉아서 글도 썼지. 그런 것을 생각하면 참 글을 쓰고 싶었구나. 그런 생각이 들어. 뭉클하기도 하지. 지금 손에 들린 이런 멋진 글을 남겨 놓았으니.라며 평식이 형은 손에 들린 카버의 책을 흔들며 그렇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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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카버는 18살에 결혼을 했어. 나는 대단하다며 박수를 쳤다. 그래서 장모에게 늘 미움을 받았고 죽을 때까지 그 미움이 계속 이어졌지. 카버의 첫 단편 ‘목가’가 ‘웨스턴 휴머니티스 리뷰’라는 잡지에 실렸을 때, 카버가 그 잡지를 들고 무척 기뻐했다고 해. 그때 한 푼의 돈도 받지 못했지만 그 잡지를 들고 기뻐했지. 이후 (평식이 형은 자신의 책을 보이며) 제발 좀 조용히 좀 해요,라는 단편이 ‘폴리 선집’이라는 단편집에 실리면서 알려지기 시작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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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카버는 술 때문에 서서히 망가지지. 알코올 의존 재활치료센터에 두 번이나 들어갔고 한 번은 병원에 입원도 했었지. 카버의 글이 좋은 게 뭔지 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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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모른다고 했다. 

카버의 글이 좋은 것은 지식이나 아는 것이 많아서 쓴 글이 아니야. 그저 수정하고 수정하고 또 수정을 한 글이라 좋은 거야. 그는 수정하는 것을 즐겼고 그것은 작가에게 바람직한 거야. 글을 마지막까지 수정을 하는 거지. 하나의 단편에 수정 본이 스무 개나 있는 경우도 있고 더 많은 경우도 있었지. 원래 카버는 시인이 되려고 했어. 그래서 쓴 시도 수 십 번이나 수정을 했어. 매일매일 앉아서 10시간을 글을 썼는데 대부분이 수정에 수정에 또 수정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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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식이 형은 어찌 된 일인지 목요일부터 보이지 않았다. 평식이 형의 재소자 복의 앞주머니에 5살짜리 딸의 사진을 늘 넣고 있었는데 가끔 둘이 비스듬히 소각장 앞에 누워 있을 때 그 사진을 꺼내서 보여주었다. 귀여운 모습의 아이에게서 평식이 형의 얼굴이 조금 보였다. 평식이 형도 작가를 꿈꾸고 있었는데 알코올 때문에 사고를 치고 복역을 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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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서 목요일부터 보이지 않는 것일까. 평식이 형은 기결수다. 구치소에서 형을 살고 있는 것이다. 조금씩 월급을 받아 가면서. 가끔씩 담배가 몹시 피우고 싶다고 했다. 그러던 평식이 형은 흡연욕을 참지 못하고 소각장에서 담배를 몰래 주워 피다가 걸려버렸다. 그것도 계장에게 걸리는 바람에 야외로 나갈 수가 없게 되었다. 평식이 형에게서 아직 레이먼드 카버의 이야기를 좀 더 듣고 싶었는데, 그날이 오늘처럼 겨울의 틈을 벌리고 있는 아주 따뜻한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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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덕분인지 레이먼드 카버의 글이 거부감 없이 다가왔다. 삭막한 구치소의 추운 겨울의 따뜻한 소각장과 평식이 형과 레이먼드 카버. 오늘의 먼지가 낀 따뜻한 겨울의 공기가 그날과 비슷했다. 점심 맛있게들 드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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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트니 휴스턴은 4살 때 교회에서 홀로 노래를 불러 사람들의 박수를 받았다. 경악에 가까운 노래 솜씨를 휘트니 휴스턴은 사람들에게 들려주기 시작했다. 노래를 부르는 그녀도, 그녀의 노래를 듣는 사람도 모두가 행복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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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사람 중에는 나의 아버지도 있었다.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전에 술만 드시고 집에 오시면 휘트니 휴스턴의 노래를 틀어 달라고 했다. 그러면 나는 카세트테이프나 레코드 판을 뒤져서 휘트니 휴스턴의 노래를 틀었다. 그러면 아버지는 벽에 기대어 가물가물해지는 정신을 잡고 노래가 참 좋구만,라며 노래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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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어릴 때 집은 참 가난하여 단칸방에 식구 네 명이 살 때도 있었는데 티브이는 없어도 집에 노래는 늘 나오고 있었다. 가난 때문에 풍성하게 살 수는 없어도 아버지는 내가 듣고 싶은 노래가 있으면 손을 잡고 가서 음반을 사 주었다. 어머니도 그것에 대해 나무라지 않았으며 모친도 티브이보다는 음악을 집에 늘 틀어 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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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문인지 국민학교 때에도 마이마이 같은 것으로 음악을 늘 듣고 있었고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음악감상실에서 주로 살다시피 했는데 그곳에 있으면 노래 이외에 팝 가수들의 가십거리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러면서 박은석의 칼럼을 읽게 되고 김태훈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임진모의 책을 구입하여 읽으면서 듣는 것 이외의 것들에 대해서도 많은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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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슬 로즈는 걸핏 하면 호텔의 2층에서 로비로 의자를 집어던졌대. 로비에는 자신을 보러 온 팬들이 가득했는데 말이야. 존 세카다는 머라이어 캐리 뒤에서 긴 시간 백댄서로 춤을 추면서 기회를 엿보다 노래를 불러 if you go 같은 감미로운 노래를 발표했지. 미트로프는 미식축구를 하던 그 큰 덩치로 그렇게나 멋지고 아름다운 가사의 노래를 불렀던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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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을 모아 놓고 주워들은 이야기를 들려주면 모이를 받아먹는 새끼 참새들마냥 재미있어했다. 어쩐지 이런 이야기는 지금도 사람들에게 들려주면 모두들 눈을 말똥말똥하게 뜨고 듣고 있다. 그것은 참 신기한 일이다. 휘트니 휴스턴은 바비브라운을 만나고 나서 망가지기 시작했다. 약과 술에 몸과 마음은 잠식되었다. 푹 꺼진 눈과 깡마른 몸으로 약에 취해 사람들 앞에서 나오지 않는 목소리로 노래를 부를 땐 그녀의 노래를 들으며 자란 나로서는 몹시 안타까운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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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보면 휘트니 휴스턴의 노래를 주로 겨울에 많이 들었다. 여름에도 들었을 법한데 기억이 전혀 없다. 마찬가지로 아버지에 대한 기억도 겨울이 훨씬 많다. 이불을 덮어 주고 출근을 했다던가, 새벽에 라면을 끓여 먹고 가면 꼭 나 먹으라고 라면을 밥그릇에 조금 남겨두고 갔다던가, 추운 날을 헤치고 같이 목욕을 하고 휘트니 휴스턴의 카세트 테이프를 사러 손을 잡고 겨울의 음반가게에 갔다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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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그렇듯이 추억이라는 게 마음 안쪽으로부터 따뜻하게도 하는 동시에 마음 안쪽에서부터 아프게도 한다. 겨울은 제일 싫어하는 계절이라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따뜻한 기억은 주로 겨울에 몰려 있는 것을 보면 앞으로도 겨울에 몇 개의 따뜻한 기억을 만들어가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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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금기를 깨버린, 기존의 콘크리트처럼 굳건한 ‘틀’을 콘크리트로 깨버린 건축가가 있었으니 그가 안도 다다오다. 안도 다다오의 이야기는 워낙 유명하고 방대하고, 또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매년 안도 다다오의 이야기를 적어놔서 썩 새로울 것도 없지만 ‘틀 깨기 4부작(영화, 음악, 사진, 건축)’을 하기로 했으니 해버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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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잘 알겠지만 안도 상은 쌍둥이다. 입이 거칠고, 거친 만큼 성질도 더럽고, 하지만 건축으로 타인을 생각하는 마음은 자연과 같은 묘한 사람이다. 어린 시절 권투를 하다가 건축으로 전향한, 제대로 건. 축. 을 전공하지 않았지만 보라, 지금은 어떤가. 그것 자체가 틀을 깨버린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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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도 다다오의 건축물을 처음 본 것이 고등학교 사진부 암실에서였다. 당시 암실에는 금발의 제니퍼가 여체를 뽐내는 사진을 들여다보며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을 때 건축과를 진학한 선배가 들고 온 안도 다다오의 건축물 전집을 봤는데 그만 빠져들어 버렸다. 아아 세상에, 내 주위에서는 도저히 볼 수 없는 건축물. 안토니오 가우디의 아르누보와는 또 다른, 그러니까 인간이 몸을 말고 들어가서 생활할 수 있는데 점점 몸이 양수 속에 있는 것처럼 편안하게 느껴지는 건축물, 오 그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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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진과 디자인에 심취해서 디자인 학원에 1년 가까이 다니고 있었는데 방향을 틀어 나와는 무관한 건축과를 가버리고 말았다. 그것이 내 인생의 큰 실수였는데 그저 안도 다다오의 건축물이 좋아 건축과를 갔다가 성적은 바닥을 기었고 건축 사진만 찍으러 1년을 그렇게 다녔다가 졸업의 영광을 못 누릴 뻔했는데 방대한 양의 건축 사진들과 그나마 투시도를 제법 그렸고 모델링에서 점수를 받아서 겨우 졸업을 했다. 그때 나의 동경은 오모테산도를 누비며 안도 다다오의 발자취를 따라 걷는 것이었다

안도 다다오는 건축물이 들어설 것 같지 않은 곳에 당당하게 보란 듯이 건축물을 세웠다. 안도는 일본 주택에 큰 관심을 보였다. 데면데면 붙어있는 오사카의 주택지에 도시게릴라의 집 제1호 도미시마 주택을 설계하는데, 지금 가서 함 보라 전혀 촌스럽지 않다. 그 속에 속 들어가면 정말 나오기 싫을 정도로 집을 살갑고 멋지게 지었다. 지나가면서 일별하는 것만으로도 머리에 딱 새겨질 만하다. 하루키의 글에 자주 등장하는 오모테산도와 오모테산도 힐즈의 거리를 몽땅 안도 다다오가 설계를 했다. 긴 도로가 죽 이어지는 양옆으로 안도 다다오의 건축물들이 거짓말처럼 늘어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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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건축물을 땅속에 묻은 지추 미술관(땅속에 박힌 미술관의 중정인 삼각 코트에는 해가 뜨면 해가 고스란히 그 속에 담긴다. 나의 얄팍한 언어로 표현하기 힘들다. 이해 바람) 등 안도 다다오가 설계한 건축물은 이제 신화가 되어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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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도는 왜 남들이 꺼려 하는 힘든 건축물을 창조하는 것일까.

안도는 처음부터 타협하기를 싫어 했다. 좀 더 잘 보이기 위해, 이득을 취하기 위해 건축물을 창조하는 행위를 버렸다. 오로지 희망과 도전으로 건축물을 설계하는 것이다. 건축가들이 가져야 할 바람직한 덕목이다(정규 이 새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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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례로 안도는 70년대 절벽을 깎아서 주택, 록코 집합 주택을 건축하기로 한다. 모든 것이 끝났을 때 10년이 지나갔다. 록코 집합을 짓기로 하고 스케치를 하고 시공을 하는 동안 법규제라는 ‘틀’에 강하게 부딪힌다. 관료들은 시공허가를 이런저런 이유를 대며 허가하지 않았다. 하지만 안도는 그에 굴하지 않고 건축주의 동의를 얻어내고 스티브 잡스처럼 같이 일하는 젊은 건축가들에게 우리가 목숨을 걸고 건축물을 지어야 그 속에 들어가서 생활을 하는 사람은 목숨의 위험을 받지 않는다,라며 끝까지 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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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지(죽은 땅)에 건축을 짓기로 하고, 법이라는 큰 규제에 부딪히고, 한계 건축을 뛰어넘고, 목숨을 건 공사, 그리하여 10년 만에 록코 집합주택이 완성된다. 83년에 록코 집합주택이 완성될 즈음, 비슷하게 지어 달라는 제의가 들어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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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시간 마침내 완성된 록코1, 록코2, 록코3 집합주택은 모두가 서로 연결된다. 건축주가 난색을 표하며 비용이 너무 많이 들어 포기를 하려고 할 때 안도는 말했다. “설비는 결국 망가질 날이 오지만 건축을 구성하는 사고방식은 살아남습니다. 긴 안목으로 보면 이것이 더 질 높고 가치 있는 건축입니다”라며 느긋하게 버텨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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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도의 유명한 건축물 말고 이런 곳에 한 번 가보고 싶지 않습니까. 관습과 틀을 깨버린 곳으로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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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가 중에 일본 사진계의 ‘틀’을 깨버린 사진가가 있었다. 열도에 사진으로 대 파란이 일어난다. 때는 95년 캐논 공모전이 있던 날이었다. 사진의 대국답게 엄청난 아마추어 사진가들이 공모전에 출품을 했다. 하지만 심사위원들의 눈을 사로잡는 작품은 보이지 않았다

.

 

심사위원 중에는 사진의 신이라 불리는 아라키 노부요시도 있었다. 이건 별로군, 이게 뭐야? 이건 사진이라 할 수 없군, 예술? 에응 하며 휙휙 던지고 있었다. 올해는 글렀구나, 이러면서 지루한 심사를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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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중 한 포트폴리오에서 앗 이런! 발칙하고 사랑스러운 사진을 담아낸 이가 누구지! 하게 된다. 95년도에 혜성처럼 등장해서 열도를 사진으로 뒤집어 버린 ‘히로믹스’였다. 히로믹스는 포트폴리오 ‘세븐틴 걸 데이즈’라는 36페이지의 자작 사진첩으로 대상을 차지하면서 일본의 기성 사진가들을 위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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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찍어놓은 세븐틴 걸 데이즈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자동카메라 코니카 빅미니로 여고생이었던 자신과 친구들의 일상을 스냅으로 담아낸다. 친구들은 스스럼없이 그녀에게 속옷 입은 모습을 카메라에 담게 한다. 히로미스는 평소의 일상에서 타인에게 들키면 안 되는 여고생의 터부 같은 모습을 적나라하게 또는 담백하게 그리고 거짓 없이 담아낸다. 포트폴리오 제목처럼 17세 당시 일본 여고생이 일상 속에서 느끼는 걱정, 불안, 미래, 밝음, 변칙 등의 모습을 그녀만의 방식으로 담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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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을 찍는 순간은 찰나로 지나가지만 사진이란 사진을 찍고 현상을 하고 인화를 하면서 그렇게 펼쳐진 수많은 사진 중에 몇 장을 선택하는 과정에서 사진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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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벗어난 이야기로 저 위의 사진들은 내가 촬영한 것으로 지금은 이렇게 별 볼 일 없는 인간이지만 사진 전시회도 여러 번 했었다. 인기는 없었지만. 이 구역에서 얼마간 사진으로 미친놈이 나였지만 지금은 시들, 시들시들해진 인간이 되었다. 하지만 개인전을 몇 번 하면서 좋아하는 것에는 충분히 푹 빠질 여지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것으로 만족한다

.

 

여고생들의 자연스러운 모습을 사진에 담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특히 타인에게 자신의 일상을 드러낸다는 건 참 난처하고 힘들일이다. 다이앤 어버스가 소외된 자들의 사진을 담으려고 그들 곁으로 굳건하게 다가갔듯이 방법은 여고생들 가까이 다가가야 하고 친하게 지내야만 그녀들의 일상을 담을 수 있다

.

 

여고생들은 밝고 웃음이 많고 즐겁지만 불안하고 불안정하다. 답답하다고 드러내놓고 마음껏 술을 마실 수도 없고 담배를 마음대로 피우지도 못한다. 수많은 생각들이 있지만 그것들을 입 밖으로 제대로 꺼내는 방법을 모른다. 그렇기에 그녀들에게 있어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은 친구들이다

.

 

다시 히로믹스로 돌아가서, 그녀는 공모전의 수상소감에서, 전 수동 카메라로 찍으면 실패할 확률이 높기 때문에 자동카메라를 썼어요.라고 했다. 아주 유명한 수상소감이 되었다. 그건 구도 무시, 초점 무시, 심도 무시였다. 사진은 그 순간을 담아낸다는 것이 중요하다. 사진을 찍을 때 카메라에 대해서 이런저런 말이 많은 사람은 신뢰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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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년도 일본의 사진계에서는 그 일을 ‘사건’이라고 불렀다. 그 사건에는 세 가지의 객기가 만났다. 당시 심사 위원이었던 아라키 노부요시의 객기, 새로운 것을 바라던 일본 사진계의 객기, 자동카메라 한대로 은밀한 여고생의 불안을 담아내 전국 사진 공모전에 출품하는 히로믹스의 객기. 이 세 가지의 객기가 만났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

 

덕분에 히로믹스의 카메라로 불린 코니카 빅미니는 열도에 불티나게 팔려 품귀현상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색감이 아주 묘하게 좋다. 히로믹스의 사진은 배두나에게도 영향을 주었고 에프엑스의 앨범에도 영향을 강하게 주었다. 요즘 여자들이 화장실에서 셀카를 찍는 시초가 되기도 했다. 히로믹스는 그야말로 ‘틀’을 깨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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