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터 빅은 참 한결같은 그룹이다. 멤버의 변화 없이 지금까지 주욱 같이 왔다. 미스터 빅의 보컬인 에릭 마틴의 목소리는 너무나 매력적인데 이렇게 매력적인 목소리에 이렇게 잘생긴 얼굴에 무대매너까지 좋으면 도대체 어떻게 하라는 것인가,라는 생각이 든다. 에릭 마틴은 스튜디오 버전과 라이브 버전의 목소리가 거의 변화가 없는 정말 희한하고 요상한 사람이다.

 

에릭 마틴은 소녀소년 같은 얼굴에서 점점 더 멋있어져서 그런지 여자들의 애정공세는 현재에도 식을 줄 모르는 것 같다. 에릭 마틴의 목소리에 한껏 빠져든 나는 어떤 소설 속에서도 고등학생인 주인공이 학교 축제 무대에 올라 에릭 마틴의 노래를 부른다고 써 버렸다. 미스터 빅이 ‘투 비 위드 유’로 한국에서, 아시아에서 인기가 있을 때 이게 무슨 록이야! 했던 록 마니아들이 많았지만 그게 무슨 대수냐, 사람들이 좋아하면 그만이지. 하지만 미스터 빅의 고출력 고사운드 록이 앨범에는 가득하다. 그들은 메탈밴드였던 것이다.

 

부드러운 것 같은데 갈라지는 허스키가 끝에 살짝 묻어나는, 아무튼 에릭 마틴의 목소리는 잘 담근 갓김치 같은 그런 맛이 나는 소리였다. 미스터 빅은 지금까지도 투어를 계속하고 있다. 일본은 뭐 수도 없이 갔고 우리나라에도 작년까지 왔다. 기타를 치는 폴 길버트, 일명 길벗 아저씨는 꼭 코미디언 같은 얼굴로, 코미디언 같은 표정으로 연주를 하는데 기가 막힌다. 마르고 목이 길어서 꽤 멋있어 보여야 하지만 길벗 아저씨는 그냥 친근하다. 미스터 빅이 최고를 달릴 때 부산 공연을 와서 드릴로 막 연주를 하고 이빨로 막 그냥.

 

에릭 마틴은 나이는 들었지만 살도 찌지 않고 목소리 또한 변하지 않고 무대 매너 역시 청중을 잡았다 놓았다 하면서 음악을 즐기는 것 같다. 베이스에 빌리 시한 역시 변함이 없다. 길벗 아저씨도. 단지 드럼을 치던 펫 토페이가 2018년 2월에 사망함으로 드러머가 바뀌었다.

 

개인적으로는 미스터 빅의 시끄럽고 사운드가 강한 음악이 좋지만 ‘저스트 테이크 마이 하트’같은 노래가 에릭 마틴의 목소리를 잘 담아냈다고 본다. 그러니까 에릭 마틴이 ‘졋 텍 마 핫’하면 앞 줄의 여자들이 꺅 하며 사르르 무너졌다. 여러 공연이 그렇지만 미스터 빅의 공연을 보는 관객들의 표정은 정말 ‘행복해’이다. 그건 아마도 미스터 빅이 지금까지 주욱 끌고 온 그들만의 에너지가 공연 중에 팬들에게 막 뿌려져서 그럴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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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위 맘스틴은 잉베이 맘스틴, 잉위 맘스테인 같은 이름으로 사람들에게 알려졌으며 서로 자기가 알고 있는 이름이 맞다며 잉위 맘스틴의 팬들은 서로 우기기도 했었다. 잉위 맘스틴은 잘 생긴 얼굴로, 날씬한 근육질로 늘 바로크 시대의 레이스가 달린 의상을 입고 기타를 미친 듯 연주했다. 마치 들판을 뛰어다니는 백마처럼.

 

2015년에 서울에서 공연을 했었는데 역시 육중해진 몸이었다. 하지만 실력 만은 출중했다. 요즘 보면 마를린 맨슨도 섹시함은 몽땅 사라지고 항아리 같아진 몸으로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는데 뭔가 딱해 보인다. 그럼에도 전 세계의 수만은 팬들이 응원을 하고 있다. 그런 것을 보면 이승환은 대단하다는 말밖에 나오지 않는다.

 

잉위 맘스틴의 음악을 제대로 듣는 건 역시 음악감상실에서였다. 요즘에도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면 이동을 할 때에도 어딘가에 머물러 있을 때에도 음악을 듣지만 리스닝보다는 히어링 같은 개념이다. 그저 듣는다,라는 의미다. 적어도 음악감상실에서 듣는 잉위 맘스틴의 음악이라는 건 몸이 음악에 잠기고 음악에 머리가 감싸이고 온 정신이 음악에 맡겨지는 느낌이었다.

 

집중적으로 음악을 들으려고 했다. 음악밖에 들을 수 없는 곳에서 음악을 듣는 것이다. 다른 건 전혀 필요 없고 필요하지도 않았다. 한 시간이나 두 시간 정도 듣고 싶은 음악을, 오로지 음악을 듣는 것에 시간을 보낸다. 그렇게 생각을 하면 음악감상실 정도는 없어지지 않고 있어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한다.

 

누가 음악을 들으러 갑니까? 온천지가 음악인데,라고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영화도 아무 곳에서나 볼 수 있지만 아직 극장에서 영화를 본다. 음악 따위 카페에서 들으면 되잖아요, 할지도 모르지만 음악을 들으러 카페에 가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는 것 같다.

 

극장처럼, 수많은 가수가 새로운 음악을 만들어 내면 음악 감상실에서 먼저 틀어준다. 오로지 음악에 몸을 맡기고 음악을 듣는다. 음악이라는 것이 스피커를 통해서 나오기 때문에 천장, 벽면, 바닥 그리고 앉아 있는 의자에서 세밀한 리듬까지 나온다. 그러면 집이나 차에서 또는 이어폰으로 듣는 음악과는 다른, 확실한 느낌을 받지 않을까.

 

오래전에는 음악을 들으려면 음악이 있는 곳에 가야만 했다. 그래서 음악은 대부분 귀족문화였다. 음악을 듣기 위해서는 당연히 음악이 있어야 했고, 음악을 연주하려면 악기와 악사가 있어야 하고 그 공간이 있어야 가능했는데 일반 서민들은 그런 곳에 발을 디딜 수 없었다. 그렇기에 많은 음악가들이 귀족의 녹을 받으며 음악을 만들었고 그 대부분이 귀족 음악이었다. 베토벤도 모찰트도 바그너도 대부분 그랬다.

 

사람들이 공연장에 품을 들여가서 피아노 연주를 듣고, 오케스트라를 듣는 건 분명히 그 이유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조금만 음악 소리를 크게 해도 와서 시끄럽다고 조용히 해 달라고 하는 요즘이다. 음악이 소음과 비슷해져 버린 건 주위에 너무 많은 소리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 사이에서 들리는 음악은 그저 소음에 지나지 않는다.

 

음악감상실에서는 오로지 음악이 흐른다. 침대처럼 편한 소파에 앉아 흐르는 음악을 듣는다. 때로 잉위 맘스틴 처럼 강력한 기타 연주는 몸을 부르르 떨게도 한다. 음악에는 어떤 그런 마력이 존재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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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모르는 누군가 나의 책을 읽고 리뷰를 해주었는데 글을 쓴 나보다 더 글을 좋아해 준 것 같은 기분이다. 나의 다른 책이 나온다면 읽을 계획이라는 말에 묘한 기분이 든다. 시와 소설은 쓴 사람의 것이 아니라 필요로 하는 사람의 것이라는 말을 실감했다.

 

작년의 나에게 일어난 신기한 여러 개의 일 중에 하나는 단편영화를 제작하여 극장에까지 올려 상영을 한 신입 영화감독이, 자신이 쓴 시나리오를 봐 달라며 보내온 일이었다.

 

나는 시나리오를 한 편도 본 적이 없다. 보내온 시나리오를 펼쳐 보고 이것이 영화 시나리오라는구나, 하며 신기해했다. 시나리오라는 것은 소설과는 다르고 에세이와는 전혀 다른, 마치 눈앞에 노을 질 무렵에서 어스름해질 무렵으로 넘어가는 크리스마스이브를 보내는 주인공인 시원과 주영이 있는 듯하다.

 

S#이 뭔지, 인서트에 대해서 찾아봤던 작년이 떠오른다. 시나리오 어땠어요?라고 물어오면 나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시나리오에 대해서 나 같은 인간이 논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시나리오에 대해서 묻지 않았고 나 역시 시나리오에 대해서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아마도, 어쩌면 서로가 다른 길을 가고 있지만 그 밑바닥에는 ‘글’이라는 크고 굵고 단단한 강이 흐르고 있어서 마르지 않는다는 것을 무언으로 알고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우리 사회가 변영주 감독 같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늘 한다. 변영주 감독은 어떤 우울하고 암울하고 슬픈 영화 속에서도 위트와 유머를 찾아낸다. 이 사회가, 그 속의 우리들이 변영주 감독 같다면 불행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변영주 감독이 인간이 망가지는 길의 첫 번째는 같은 영화를 수십 번 본다. 두 번째는 그 영화에 대한 리뷰를 작성한다. 마지막으로 영화를 만들려고 뛰어들면서 망가진다고 했다. 우리는 그렇게 기분 좋게 망가지는 것이다. 한 번도 망가지지 않고 죽는 것 또한 불행하고 슬픈 일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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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자를 알게 된 건 순전히 음악감상실 때문이었다. 프랑스 음악이라고는 에디트 피아프, 파트리샤 까스 정도였다. 조지 밴슨의 ‘낫띵스고나 체인지 마이 러브 포 유’를 불러 인기를 얻은 글렌 메데이로스가 엘자와 노래를 같이 불러 알게 되었다.

 

글렌 메데이로스,라는 이름이 참 좋다는 생각이 든다. 어쩐지 촌스럽지 않으며 이름이 긴데도 발음하면 길어 보이지 않고, 영어 발음이 좋은 사람이 ‘글렌 메데이로스’라고 발음하면 호감이 대번에 갈 것 같은 이름이다. 글렌 메데이로스는 이름만큼이나 좋은 얼굴로 노래까지 잘 불러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노래를 잘 부른다는 건 그 외의 것들에 대해서도 관심을 받게 하는 묘한 힘을 가지고 있다.

 

글렌 메데이로스는 엘자와 ‘프렌드 유 기브 미 어 리즌’이라는 듀엣곡을 불렀다. 여기서는 엘자도 영어 버전으로 부르는데 ‘엉 로망 뒤£¥$§#&’에서는 엘자가 불란서버전으로 부른다. 영어로 하면 ‘러브 올웨이즈 파운드 어 리즌’이다. 뮤직비디오는 80년대 불란서인지 미국인지 아름다운 해변에서 두 사람은 사랑하는 사이를 너무 잘 연기한 덕분에 실제 사귀기도 했다.

 

엘자의 얼굴은 불란서의 얼굴보다는 구라파의 얼굴에 가까워 보인다. 개인적으로는 그렇다는 말이다. 하지만 불란서 출신 배우들, 줄리엣 비노쉬나 줄리 델피의 얼굴이 엘자에게 보인다. 엘자의 얼굴은 되게 동양적인데 눈은 구라파, 언어는 불란서 뭐 이런 느낌이다. 엘자는 가수지만 데뷔는 영화로 했다.

 

이름도 멋진 글렌 메데이로스와 듀엣을 불러 알게 된 엘자의 노래를 음악감상실에서 여러 곡 들었다. 머리에 박혀있던 샹송의 이미지가 깨졌다. 엘자의 노래는 장벽 같던 샹송이 아니었다. 엘자의 노래는 꼭 가요를 듣는 것 같았다. 강수지가 불란서어로 부르는 느낌? 제대로 설명할 수 없지만 들어보면 가요처럼 친숙하다.

 

한때 불란서 음악을 꽤 들었는데 대체로 가요와 비슷하여 듣기 편해서 신기해하기도 했다. 얼마 전 티브이 먹방예능 국경 없는 포차인가, 거기서 에펠탑이 보이는 곳에서 열린 포장마차에서 프랑스인들의 흥이 어쩐지 한국인과 비슷하게 보였다.

 

미래 같은 걸 모르고 그저 하루를 견디기 바빴던 중고등 시절에는 그래서인지 음악을 꽤 다양하게, 집중적으로 들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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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차드 막스는 노래를 아주 쉽게 부르는 것 같은데 따라 부르려면 참 어려운 것 같다. 마치 변진섭이나 시나위 4집 때 김바다처럼 말이다. 리차드 막스를 잘 모르는 이들도 얼마 전에 비행기에서의 일화나 불후의 명곡- 전설을 노래하다,에 나와서 알게 된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리차드 막스는 사랑에 대한 노래를 많이 불렀다. 리차드 막스의 메가 히트송들도 사랑하는 아내를 위해 작곡을 한 곡들이다. 그러고 보면 백석도 자야를 사랑했을 때 찬란한 시가 탄생했고, 릴케 역시 루 살로메에 빠져 있을 때, 보들레르 역시 흑백 혼혈 잔 뒤발을 사랑하고 있을 때, 단테 역시 베아트리체를 찬양했다.

 

리차드 막스의 ‘right here waiting’ 이 노래는 아내를 위해 만들었다. 아내는 영화배우였다. 아내가 영화 촬영차 남아프리카 공화국으로 떠났고 그곳에서 몇 달을 지내야 했다. 아내를 너무 사랑한 리차드 막스는 그 몇 달을 기다릴 것을 생각하니 지옥 같은 날들이라고 생각이 들어 참을 수가 없었다. 어떤 무엇인가가 자신과 아내를 갈라놓을 것 같은 불안감이 들었다. 그래서 리차드 막스는 아내가 있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으로 갈 결심을 하고 비자를 신청하지만 왜 그런지 비자가 나오지 않았다. 리차드 막스는 몇 날 며칠을 비자국에 신청을 했지만 비자가 발급되지 않았다. 마지막 한 번더 비자를 신청하러 갔지만 결국 되지 않아서 포기하고 돌아온 날 그는 이 노래를 짧은 시간에 만들었다.

 

 

 

바다만큼이나 멀어져 가요

매일매일 그리고 난 서서히 미쳐가고 있죠

전화로 당신의 목소리를 듣지만 이 고통을 멈추진 못하는군요

내가 당신을 거의 볼 수가 없다면 우리가 어떻게 영원하다고 말할 수 있겠어요

 

 

 

리차드 막스는 이 노래가 너무 오글거리고 개인적인 노래라 음반에 싣기도 민망해서 테이프에 녹음해서 아내에게 보내주려고 했다. 그때 녹음을 도와준 친구가 노래가 너무 좋으니 싱글 앨범에 내자는 제의를 했고 리차드 막스는 받아들이는 바람에 현재에도 이 노래는 어딘가에서 꾸준히 흘러나오고 있다.

 

리차드 막스와 아내와의 사랑은 꽤 유명했다. 아내를 정말 사랑했다. 조금이라도 떨어져 있기가 그렇게 싫었을까, 할 정도로 말이다. 그리고 더 유명한 노래 ‘now and forever’이란 곡도 만들었다. 하지만 이 세상에 ‘영원’이라는 것은 그렇게 잘 없다. 리차드 막스의 아내에 대한 애절한 사랑은 2014년에 종지부를 찍고 만다. 우리는 때때로 언어에서 실수를 하곤 하는데 ‘절대’ 라든가 ‘영원’을 함부로 뱉어내면 안 될 것 같다.

 

꽃으로 비유를 하자면 조화를 구입해서 욕실에 두면 영원하다고 하는데 그런 죽어있는 ‘영원’은 외면받는다. 조화를 구입한 첫 날 정도 바라보지만 이후로는 거의 조화를 보지 않는다. 프리지아를 구입하면 며칠 만에 시들고 말지만 한 해가 지나서 또 봄에 오면 프리지아를 구입한다. 그 며칠 동안 프리지아는 향기를 뿜어내고 프리지아가 꽂혀 있는 꽃병을 며칠 동안은 늘 바라본다. 그렇게 시들고 피어나고를 반복하는 영원성. 노래 역시 그런 영원성을 지니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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