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맹 가리는 에밀 아자르라는 이름으로 자기 앞의 생을 썼고 모모와 로자 아줌마를 통해서 삶과 죽음을 고찰했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랬다. 로맹 가리는 에밀 아자르를 사촌 동생이라 하기도 하며 감독으로 영화도 두 편이나 찍고 죽기 전까지도 굉장히 멋에 신경을 썼다.

 

그 덕분인지 24살인지 23살인지 어린 진 세버그를 아내로 맞이했다. 진 세버그가 반할 정도니 로맹 가리도 괴짜에 참 멋있는 사람이었다. 진 세버그는 아름답고 당시에 있을 수 없는 여성상을 지니고 있는 배우였는데 진 세버그는 박애주의자였다. 그것도 심각하고 지독한 박애주의가 진세버그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로맹 가리와 결혼을 하고서도 집에 거지들을 가득 불러 같이 살았다. 로맹 가리가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진 세버그가 자살로 죽고 몇 해 뒤에 로맹가리도 자살을 했다. 진 세버그는 50년대 말, 60년대 초 영화계를 누벨바그로 해체시켜 버린 장본인 중에 한 명이었다.

 

영화 속에서 또 하나의 해체가 있었는데 그것이 85년도 아메리칸 지골로이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리치드 기어로 신인 시절이었다. 때마침 영화 의상을 맡고 있던 신입 디자이너였던 조르지오 아르마니가 리차드 기어의 영화 의상을 담당하면서 영화를 보기 위해 집에서 빵만 구워대던 미국의 여자들을 극장으로 불러들였다.

 

조르지오 아르마니의 의상을 입은 리차드 기어는 옷을 입었는데 섹시함이 줄줄 흐르는 기현상이 영화 속에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전까지만 해도 정장은 양복으로 불리며 고리터분하고 권위주의적 남성의 상징이었다. 그런데 조르지오 아르마니와 리치드 기어가 나타남으로 해서 수트라는 개념이 처음 등장했고 영화 속 리차드 기어는 그야말로 모델의 일상을 훔쳐보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프랑스에 진 세버그(미국 출생이지만)가 있었다면 미국에도 머리가 숏 컷으로 해체주의적인, 앤디 워홀의 뮤즈었던 에디 세즈윅이 있었다. 당시 여성들이 경멸했던 아주 짧은 숏컷에 굉장히 크고 무거운 귀걸이와 눈 주위를 가득 매운 눈 화장, 검은 망사 스타킹의 에디 세즈윅은 엔디 워홀과 함께 펙토리에서 기존 예술을 뒤집는 작업을 많이 했다. 에디 세즈윅은 보브 딜런과 잠시 만나기도 했지만 역시 짧은 생을 살다 마감하고 만다. 에디 세즈윅을 연기한 시에나 밀러 주연의 팩토리 걸이 있으니 보면 재미있다.

 

에디 세즈윅의 이 스타일은 에디 세즈윅이 죽었다고 해서 끝나지 않는다. 에디를 그대로 벤치마킹한 사람이 일본의 나무로 아미에였다. 아미에 나무론가? 아미에 나무로는 노래도 잘 불러 에디 세즈윅이 정말 다시 되살아난 것 같은 기분이 그간 들게 했다. 그리고 바로 이효리가 에디와 아무로를 벤치마킹해서 그들의 스타일을 이효리 만의 독자적인 모습으로 잘 기획했었다. 그럼 트위기는요?라고 하는 사람이 있을 텐데 트위기는 아직 살아있고 궁금하면 검색해보자.

 

에디 세즈윅은 샤넬이나 각종 런 어웨이에서 아직도 스타일을 살려서 무대를 장식하고 있다. 에디의 연인 앤디 워홀이 해체주의, 포스트모더니즘의 중심에 있는 인물이 아닐까 한다. 우리가 잘 아는 팝아트의 창시자이자 영화배우, 사진작가, 음반 제작자 등 니코의 벨벗 언더그라운드의 그 앨범 표지, 바나나 하나로 넘어설 수 없는 앨범표지를 만들어버린 사람이었다. 물론 그 바나나는 앤디 워홀식으로 여러 다양한 의미가 있다. 벨벳 언더그라운드 루 리드 등 모두가 앤디 워홀에 신세를 지고 있었다.

 

앤디 워홀의 친구가 누구냐면 백남준이다. 백남준이 70년대 초 한국 땅에서 예술, 초현실 예술을 하려고 하니 머리 길면 잘라버리지, 자정이 되면 통행금지를 하지, 열받아서 독일로 가버린다. 독일에서 백남준은 플록서스라는, 그러니까 뭐랄까 우리 식으로 말하면 문화새마을운동 같은 것을 일으켜서 독일 예술계를 해체시켜 버린다. 발칵 뒤집어놓은 거지. 플록서스가 뭐냐? 나도 잘 모르지만 행위나 퍼포먼스로 금기나 기존의 틀에 충격을 주는 예술을 통틀어 말한다. 전위예술 가끔 멍하게 보면 재미있고 괜찮다. 부수고 던지고 고함치고 소리 지르고, 가끔 우리도 일상에서 그럴 때가 있지 않나.

 

나는 어쩌다 백남준의 아트전에 빠지게 되어 몇 년을 많이도 가서 봤었다. 70년대 백남준과 독일에서 같이 플럭서스를 활동한 예술가가 오노 요코였다. 당연히 존 레넌과 결혼한 오노 요코 덕분에 존 레넌과 예술적 친구가 된 백남준은 존과 친구인 앤디 워홀과도 함께 모두가 예술적 경계를 허물어트리며 친구가 된다.

 

정말 멋진 일이다. 이렇게 세계적인 해체주의 작가들은 서로 그렇게 보이지 않는 끈으로 애당초 연결되어있다가 후에 서로 친구가 된다. 백남준이 죽었을 때 뉴욕에서 장례식을 했는데 사회를 오노 오코가 봤다. 이 장례식이 얼마나 멋지냐면 관속에 편안하게 누워있는 백남준의 배 위에 장례식 장에 모인 전 세계 예술가들에게 매고 있는 넥타이를 가위로 잘라서 올려 달라고 오노 요코가 말을 하고 모두가 그렇게 한다.

 

존 레넌이 아직 비틀스 시절 오노 요코 덕분에 일본에 멤버들과 온 참 재미있는 긴 일화가 있는데 로맹 가리의 책에 대해서 이야기하려다 산을 넘고 강을 건너버렸다. 발렌시아가의 이야기도 있는데.

 

로맹 가리의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를 읽어봐야 하는데. 내년에는 읽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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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잭슨의 노래가 이 어촌에도 여기저기 들려올 때가 있었다. 노래방의 화면에 마이클 잭슨의 문워크의 뮤직비디오가 늘 나오고 있었고 옷 가게에서 또는 카페에서 심지어 바닷가 가로등에 달린 스피커에서도 마이클 잭슨의 노래가 나올 정도로 마이클 잭슨의 노래가 인기가 있었을 때가 데인저러스 앨범이 나왔을 때가 아닌가 싶다.

어쩐지 근래에는 마이클 잭슨의 노래를 찾아듣지 않으면 잘 들을 수 없다. 한국이고 한국인이 가요를 듣는 게 너무 당연하지만 마이클 잭슨의 노래는 비틀스처럼 끊어지지 않고 흘러나와야 뭔가 지구시스템이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군, 하는 생각이 든다.

한창 엠티비라는 것이 붐을 이루었고 엠티비 시상식이 미국에서 매년 열렸으며, 가장 인기가 좋았던 것은 엠티비 뮤직비디오 부분이었다. 쟁쟁한 그룹들의 뮤직비디오, 요컨대 에어로 스미스 ‘겟 어 그립’의 뮤직비디오(리브 타일러와 알라시아 실버스톤이 뮤직비디오를 장식했다)와 건스엔 로지스의 ‘노벰버 레인’의 뮤직비디오가 경합을 벌이는 가운데 마이클 잭슨의 데인저러스의 뮤직비디오는 그야말로 지구인이라면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영상이 되었다.

이 앨범의 뮤직비디오에는 수많은 스타들이 마이클 잭슨과 같이 했다. 에디 머피, 나오미 캠벨, 마이클 조던, 크리스 크로스, 맥컬리 컬킨 등이 함께 했다. 맥컬리 컬킨은 블랙 오어 화이트 뮤직비디오 첫 화면에 등장을 하여 존 굿맨인지 존 굿맨을 닮은 아버지를 록으로 사막까지 날려 버린다.

맥컬리 컬킨은 마이클 잭슨과 상당히 친하다. 마이클 잭슨이 어린이 성 추문에 휩싸였을 때 법정에서 그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증언을 하기도 했다.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세세한 모든 것이 법과 문서로 이루어진 나라에서, 특히 정점에 있는 인기스타가 그렇게 하기 쉽지 않았을 텐데. 마이클 잭슨이 성 추문에 휩싸였을 때 우리나라 김혜자도 그건 이상한 언론 오보라고 했다.

이 언론의 오보는 한물간 스타들을 괴롭히기를 좋아하여 그간 맥컬리 컬킨을 궁지로 몰아넣는 기사를 참 많이도 냈다. 한국 언론은 그것을 그대로 받아 적으니 사람들은 그걸 보며 정말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맥컬리 컬킨은 생각하는 것처럼 방탕하고 망가지고, 그렇지 않다. 아버지와의 문제가 있어서 돈도 많이 까먹었지만 그래도 190억 정도 있다고 한다. 게다가 여타 어린이 스타들처럼 방탕하게 생활하지 않고 절제와 절약 같은 것으로 잘 지내고 있다고 한다. 그간의 행보를 보면 ‘나 홀로 집에’의 캐빈에서 벗어날 수 없기에 ‘나 홀로 집에’를 비트는 웹드라마도 찍고 밀라 쿠니스와 오랜 열애 끝에 헤어지고 난 후 다시 연애를 하며 잘 지내고 있단다.

마이클 잭슨의 데인저러스 앨범의 노래 중에 Jam의 뮤직비디오에는 마이클 조던과 크리스 크로스가 나온다. 잼의 시작은 굉장하다. 콰쾅 하면서 시작을 알리는데 아직 이만큼 시작의 임팩트가 좋은 노래가 없다. 마치 첫 소절이 가장 좋은 소설 같다.

크리스 크로스는 당시 가장 뜨거운 가수였다. 어린이들이었는데 랩으로 미국의 음반계를 뒤흔들어 놓았다. 두시의 데이트 김기덕은 연일 크리스 크로스를 칭찬했고 서태지는 크리스 크로스의 노래를 흥얼흥얼 거렸다. 크리스 크로스의 노래는 아침저녁 라디오 음악 프로그램을 통해서 흘러나왔다. 아마도 박진영은 크리스 크로스를 보고 량현 량하를 기획하지 않았나 싶다. 그랬던 크리스 크로스였는데 한 명은 이미 몇 해 전에 죽었다. 그렇게 잊혔다.

팝 하면 또 김광한이었다. 김광한 디제이가 김기덕보다 팝에 대해서는 더 알차고 자세하게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랬던 김광한도 2015년에 죽었다. 전태관도 며칠 전에 죽었다. 김종진은 아파하는 친구 곁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 때문에 고통스러워했다. 물론 마이클 잭슨도 죽었다. 따지고 보면 사람은 누구나 다 죽는다. 그럼에도 나는 왜 죽음 속에 나를 집어넣지 않고 있을까. 내일이라도 당장 죽을 수 있는 날이어서 문득 김수영 시인의 시가 떠오르네.

마이클 잭슨의 장례식에서 조그마했던 딸이 지금은 태풍 성장을 해서 누드도 찍고 기사를 장식하고 있다. 먹고살기 힘든데 마이클 잭슨은 무슨 얼어 죽을,라고 하면 할 말은 없지만 마이클 잭슨을 좋아하는 사람끼리 모이면 그만의 이야기로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 모를 것 같다.

잘은 모르지만 마이클 잭슨은 이 앨범에서 이전의 앨범과는 다른 목을 긁는 강렬한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기도 한다. 그리고 서서히 슈퍼스타에서 존 레넌처럼 메시아적인 모습으로 바뀌어 간다. 지구를 노래하고 인간을 노래한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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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때까지만 해도 교회에 호치키스 지뢰를 뿌려놓고 전선을 다 잘라먹을 만큼 장난이 심했다. 장난. 이 장난기는 언제쯤부터 생겼고 어쩌다가 이렇게 극에 달했을까

.


국민학교 3학년 때에는 한 여름에 아이들과 놀 때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입 다물고 진지하게 땀을 흘리며 지지 않으려고 뛰어다니고 놀았다. 그 모습이 얼마나 위험하고 웃긴지 어른들은 웃겨 죽는다고 했다. 그러다가 넘어지면서 팔을 바닥에 짚었는데 탁 꺾이면서 깁스를 하게 되었다. 깁스를 하고서 그날 슬픈 표정으로 있었지만 그 다음날에는 또 깁스를 한 채 진지하게 뛰어다니며 놀았다

.


그러다 한 번 학교 운동장에 미끄럼틀에서 놀았는데, 거기서는 아이들이 미끄럼틀 위에서 양손으로 옆을 잡고 공중 돌기 하듯 한 바퀴 돈 다음 미끄럼틀을 타고 내려갔다. 나는 당연하게도 깁스를 하고 있기에 그것을 할 수 없었는데 미끄럼틀 위에 있다가 교장실에서 보는 교장선생님에게 걸려 거기에 있던 아이들과 함께 교장실에 불려갔다

.


장난.

장난이라는 건 순전히 교장선생님이 아이들을 향해 내뱉는 행위에 대한 평가를 뭉뚱그려 하는 말이었다. 깁스를 한 채 나는 장난을 칠 수 없지만 그 자리에 있었다는 이유로 나는 장난이 심한 다른 아이들과 함께 교장실로 불려가서 무릎 꿇고 혼나야 했다

.


어른들의 눈으로 보는 그 알 수 없는 평가에 들어가기 위해 장난이라는 행위를 하는 아이들은 없다. 더욱이 나는 한 쪽 팔에는 깁스를 한 채이기 때문에 위험한 장난을 할 수가 없다

.


교장선생님은 위험한 장난을 해서 우리를 혼낸다고 말했지만 그 속을 잘 들여다보면 미끄럼틀이 망가지는 장난을 치고 있다는 것이 주 요지였다. 그래서 나는 장난이라고 우리를 치부하는 교장선생님이 지금 장난치고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


어른이 되면 장난치기가 힘들어진다. 장난을 치고 싶어도 장난을 마음껏 칠 수 없는 이상한 나이에 접어들었기에 장난을 치고 있는 아이들에게 장난으로 장난에 대해서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생각을 하니 저 높은 곳에 앉아 있는 교장선생님이 측은해 보였다. 이것이 장난이라면 장난을 좀 쳐야겠다고 생각했다

.


나는 깁스 한 팔을 들고 한쪽 팔로 받치면서 인상을 썼다. 왜 그러냐? 깁스 한 팔이 아프냐?라고 교장선생님은 교장선생님 특유의 그 톤을 유지하고 물었다. 가려워요. 근지러워 죽겠는데요.라고 말했을 뿐인데 교장선생님은 장난인 것을 알았는지 유지하던 톤에서 벗어난 목소리로 장난하지 말고 똑바로 무릎을 꿇엇,라고 했다. 그때 나를 제외한 다른 아이들은 무릎 꿇고 손들고 있었다

.


이것이 장난이라면 교장실에 불려온 것도 장난이고, 미끄럼틀에 깁스 한 팔을 한 채 올라간 것도 장난이고, 깁스 자체도 장난인 것이다. 장난을 칠 수 없는 나이에 장난하냐? 라든가, 장난치지 마, 같은 소리를 들으면 장난이기 이전에 덜컥 겁부터 난다. 오빠, 지금 장난이지.라는 말이 나오는 건 이미 장난이 아니기 때문이다

.


그래서 그날 어떻게 됐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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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밥 예찬론자이자 일주일에 김밥을 두 번 이상 먹는 나는 어느 날 조금 비싼 김밥 전문점 앞을 지나다가 입간판에서 김밥에 들어가는 재료에 대해서 적어 놓은 문구를 보고 잠시 서 있었다. 계란은 어디의 달걀을 사용했고, 햄은 어디 꺼, 김은 어느 지역의 김, 오이는 어느 곳의 오이,,, 오이에서 잠시 멈췄다. 쳇, 하우스에서 재배하는 오이가 지역이 뭔 상관이야. 그래서 비싸게 팔고 있나. 흥,라며 잠시 서 있었던 기억이 있다.

 

딴짓하면서 허기를 사라지게 하는 마법을 부리는 것이 김밥이다. 김밥을 그냥 먹기도 하지만 딴짓을 하지 않을 때는 컵라면 먹고 남은 그릇에 김밥을 찢어서 넣고 고추장과 참기름을 넣어서 휘휘 저어 먹으면 최고의 비빔밥이다. 길을 걸으면서 먹기에는 자르지 않고 통째로 우걱우걱하기에도 좋다.

 

이 좋은 김밥에 대해서 김밥답게 맛있게 써 놓은 박연준 시인의 글이 있어서 발췌했다. 김밥의 얼굴을 보려면 잘라야 볼 수 있는 김밥의 얼굴은 태어난 곳에 따라 참 별나고 각각이다. 누구에게나 김밥에 대한 추억 하나씩은 있을 텐데 박연준 시인은 김밥 하면 떠오르는 장면에 대한 이야기도 했다. 어쩐지 이 짧은 글을 읽으면서 김승옥의 단편 ‘차나 한 잔’에 나오는 이 형이 왜 떠올랐을까.

 

그녀의 말마따나 특별해서, 평범해서, 슬퍼서, 기뻐서 더 어울리는 김밥이여 영원하라. 김밥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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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를 하고 그 해 겨울에 군고구마를 팔아서 번 용돈으로 중고 렌즈찰탁식 카메라를 구입해서 전라도로 삼일 정도 사진을 담으러 떠났다. 그때 분명 가방에 카세트테이프 여러 개를 넣었다고 생각했는데 넥스트 1집 하나 달랑 들어 있어서 3일 동안 이 테이프 하나만 죽 들었었다.

 

망했다 생각했는데 3일 내내 버스 속에서, 잠결에, 걸으며, 두륜산을 오르며, 어둑한 동네에서, 휴게소에서 신해철의 목소리를 들었다. 망할 줄알았는데 3일 후 집에 왔을 때는 내가 찍은 사진보다는 신해철이 쓴 글로 된 단편소설 집을 여러 번 읽은 기분이었다.

 

신해철은 정말 이 몇 곡 안 되는 앨범 속에 큰 세계를 축소시켜놨다. 음악적으로는 신시사이저로 후지산의 폭발 같은 풍부한 음을 표현하는데 개인적으로 잘 모르지만 이런 곡들은 녹음을 잘 해야 한다. 작곡자의 편곡이 생각처럼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게 녹음이 되어야 한다. 녹음실이라든가 녹음 장비라든가 녹음 기술이라든가에 따라서 듣는 이들의 실망과 행복의 폭이 커 버린다.

 

신해철이 재즈카페 앨범을 만들었을 때 그 앨범을 레코드 가게에서 입고를 시켜주지 않았었다. 당시는 대한민국에 발라드 열풍이어서 한국 가수가 발라드가 아니면 레코드 가게에서는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런데 가요제 대상 먹은 신해철이 기껏 만들어 온 음악이라는 게 발라드가 아닌 재즈, 펑크, 록, 랩 같은 생소한 음악이어서 외면을 받고 거절을 밥 먹듯 당했었다.

 

신해철은 ‘영원히’라는 노래에서 말한다.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세상에 길들여짐이라고. 남들과 닮아가는 동안 꿈은 우리 곁을 떠난다고. 그러지 않기 위해서는 꿈을 잃지 말라고 신해철은 노래로 부탁, 위안, 위로, 속삭여 주었다.

 

도시인을 들어보면 한국은 정말 바쁘게 흘러간다. 우리가 점심을 식사라 부르지 못하고 한 끼라고 할 수밖에 없는 것은 점심 한 끼를 천천히 맛을 음미해 가면서 먹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학창시절에는 한 시간 정도 되는 점심시간에 빨리 먹고 공을 차야 했고 군대에서는 배식 받아서 정해진 시간 안에 먹지 못하면 혼이 났고 직장에서는 오히려 점심을 거르는 일이 허다해졌다.

 

도시락 싸 다녔을 때는 엄마가 해주는 음식 속에 갇혀 버려 음식을 느끼는 맛이 좁아졌다. 청년들은 취업을 하기 위해 시간을 쪼개 아르바이트를 하고 학자금 대출을 갚아야 하고 잠 한 번 편하게 푹 자기도 빠듯한 생활에서 작은 위안은 빠르게 먹을 수 있는 음식뿐인데 그것마저 여의치 않게 되었다.

 

신해철은 알고 있었다. 한국인이 천천히, 느리게 점심 한 끼 정도 먹을 수 없는 구조 속에 놓여 있다는 것을. 세상을 바꿀 수 없다면,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면, 그래서 그는 대안으로 그럴 바에는, 비록 그것이 어떤 면에서 안 좋을 수 있는 결과를 가져올지라도 ‘만족’이라는 카타르시스에 도달하는 것이 낫다고 본 것이다. 편의점 음식이면 좀 어때? 그 질 낮은 음식이라도 누군가에는 허기를 채워주고 배를 불리게 하는 큰 세계인 것을.

 

그리고 이 복잡하고 빠른 도시인의 생활 속에서 자신이 할 일은 노래로 위안을 주는 것이라 생각했다. 앨범을 듣다 보면 그렇게 느껴졌다. 인형의 기사 파트 2에서 잊지 않고 느리게 간절히 원하면 피그말리온처럼 이루어진다고도 말하는 것 같다. 때로는 그런 바보 같은 사람이 있고, 또 그런 바보 같은 사람들이 꾸준히 무엇인가를 해서 그것을 이룩하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아빠가 된 사람이라면, 아이가 없더라도 남자라면 아버지와 나 파트 1에 깊게 빠져들 수밖에 없다. 아버지라는 존재가 어느 날 다 커버린 자식들 앞에서 무너져가는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한 마지막 남은 방법은 침묵뿐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를 흉보던 모든 일들을 이제 내가 하고 있다.

 

스펀지에 잉크가 스며들 듯 그의 모습을 닮아가는 나를 보며, 이미 내가 어른들의 나이가 되었음을 느낀다. 그러나 처음 둥지를 떠나는 어린 새처럼 나는 아직도 모든 것이 두렵다. 언젠가 내가 가장이 된다는 것. 내 아이들의 아버지가 된다는 것이 두렵다. 이제야 그 의미를 알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누구에게도 그 두려움을 말해선 안된다는 것이 가장 무섭다. 이제 당신이 자유롭지 못했던 이유가 바로 나 였음을 알 것 같다.

 

라는 가사에서 젊었을 때의 정열과 야심에 불타던 기백이 사라져가는 것이 곧 나에게도 닥쳐올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안다. 어른이 된 지금 도처에 무서운 일이 있지만 어른은 무섭다고 해서는 안 된다. 누구에게도 무섭다고 할 수 없는 것이 가장 두렵다. 집을 떠날 때 듣던 신해철의 노래와 집으로 돌아올 때 들었던 신해철의 노래는 많이도 달랐다. 그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숨을 힘껏 참았다가 한 번에 크게 내뱉었을 때 갑갑하지 않고 시원하다면 할 만하다고. 그 속엔 아직도 꿈이 덜 망가져 있기 때문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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