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무 다이스키 하면 귀여움의 끝판왕 포뇨와 소스케가 당장 떠오른다. 소스케가 좋아하는 햄을 소리를 지르며 같이 좋아하는 포뇨. 포뇨는 인어일까, 금붕어일까, 오염 변이체일까. 포뇨를 보면서 늘 생각했다. 소스케와 포뇨의 관계는 사랑일까, 우정일까. 관심일까. 포뇨 속에는 멋진 대사가 있다. 소스케와 포뇨를 남겨두고 양로원으로 가는 리사는 소스케에게 말한다.


소스케, 우리 집은 폭풍 속의 등대야. 어둠 속에 있는 사람들이 우리 집 불빛으로 용기를 얻고 있어. 그러니까 누군가 지켜야 해. 신기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지만 지금은 왜 그런지 알 수가 없어. 그치만 알게 될 거야.”

소스케는 포뇨에게 아마 등대 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마지막에 소스케는 아무런 조건 없이 포뇨를 받아들인다. 물고기인 포뇨라도, 인어인 포뇨라도, 사람이 아닌 포뇨라도.


그 무엇이 됐건 간에 포뇨는 포뇨이기 때문에 소스케는 포뇨를 사랑할 것이라고 했다. 이 두 귀여움 존재들에게 사랑이라는 최선을 다해서 노력하지 않으면 행복해질 수 없다는 걸 알게 된 것 같다.


해무다이스키 하면 포뇨가 떠오르는데, 그것과는 다르게 포털 뉴스 기사 여러 꼭지에 느닷없이 햄을 비롯한 가공식품이 어쩌고 하는 기사가 떴다. 아무튼 몸에 너무 안 좋데. 자주 먹으면 큰일 난데. 그래서 여러 꼭지에서 다루었다. 가공식품은 사람들, 아니 현대인에게 어떤 식으로 안 좋은지 말을 하고 있었다. 이렇게 몸에 안 좋은 걸 경쟁하듯 엄청 만들어서 그로서리 가판대에 잔뜩 올리게 하고 맛있다고 연예인들이 나와 온갖 광고를 하면서 먹으면 안 좋으니 선택을 하는 건 너의 의지야,라고 하는 게 여하튼 마음에 들지 않는다.


햄 같은 이런 가공식품은 맛있기도 하지만 다른 식품보다 오래 보관할 수 있기 때문에 선물용으로 좋다. 들어온 선물을 몸에 안 좋으니 난 받을 수 없어,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코맥 매카시의 ‘더 로드’를 읽어 보면 대충 지구가 멸망하고 먹을 것과 신발을 찾으러 다는 게 삶의 유일한 목적이 된 아버지와 아들이 나온다. 먹을 것이 극도로 부족하기 때문에 인간의 무리를 만나면 큰일 난다. 그럴 때 빨리 도망가려면 신발이 필요하다. 소설은 정말 재미있고 마음이 우~리 했다. (우리하다, 이거 사투린데 모르는 사람이 많겠지만) 두 사람은 끊임없이 먹을 것을 찾으러 다니는데 아버지와 아들에게 기쁨을 주는 건 무너진 건물에서 찾아낸 캔으로 된 콜라였다. 아들은 온통 불행인 이 세상에서 처음으로 달콤한 맛을 본다. 그렇게 욕을 들어 먹었던 콜라를 난생처음 먹어보는 아들에게 크나큰 기쁨이었다.


코맥 매카시도 올해 유월에 세상을 떠났다. 더 로드는 영화로도 재미있었다.


햄 같은 가공식품은 1인 가구에게는 꽤 요긴하고 필요한 식품이다. 보관을 오래 할 수 있고 간단하게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어떤 영화에서 세상이 멸망한 지구에서 100년이 지난 햄통조림을 발견해서 따서 먹는 장면도 나오겠지. 햄은 그냥 먹어도, 아니 그냥 먹는 게 제일 맛있는 것 같다. 짭조름하면서 뜨거운 밥 위에 올려 먹으면 너무 맛있다. 하지만 보통 그렇게 잘 먹지 않는다. 이런 기사가 뜨기 전에도 햄이나 스팸, 소시지 같은 가공연육을 잘 먹지 않았을뿐더러 직접 사 먹어 본 적도 없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그럴 것이다.


나는 날 때부터 좋지 못한 위를 달고 태어난 탓에 햄이나 스팸 같은 가공식품을 먹고 나면 어김없이 위가 소화장애를 일으켰다. 한 번에 50번 정도 씹으면 모를까. 그러나 그렇게 씹어 먹기란 전두광 얼굴에 똥을 던지는 것처럼 어려운 일이다. 소화가 안 되면 괴롭다. 그저 더부룩하고 체기가 있는 것이 아니라 어지럽고 모든 행동에 제약을 받는다. 위장장애가 그렇다.


그래서 가끔 이렇게 선물로 들어온 햄을 먹을 때에는 작정하고 약간 조리를 해야 한다. 일단 펄펄 끓는 물에 푹 삶는다. 잘 삶는다. 햄 따위는 부대찌개를 먹어보면 알겠지만 가열되면 맛이 좋아진다. 대충 삶아도 된다. 물을 버리고 난 후 한 번 구워서 먹으면 된다. 그리고 부들부들하기에 몇 번 씹지 않고 그대로 넘어갈 수 있으니 나물과 함께 먹으면 여러 번 씹을 수 있다.


간편한 가공식품을 먹을 수밖에 없는 사회구조를 만들어 놓고 이건 먹으면 안 된다는 건 어떻게 생각해도 좀 이상하다. 구조가 옳은 방향으로 바뀌는데 정말 오래 걸린다. 지금은 자동차 기름을 넣으러 가면 무연휘발유와 고급휘발유가 있다. 이 무연휘발유의 ‘연’은 무엇일까. 이 녀석이 햄 먹다가 도대체 무슨 이야길 하나 싶겠지만 – 여하튼, 연은 납을 말한다. 그러니까 무연휘발유는 연기가 없는 휘발유가 아니라 납이 없는 휘발유를 말한다.


기름의 옥탄가를 높이는데 납이 들어갔다. 그런데 그동안 기름에 들어간 납이 타들어 가면서 전부 공기로 나왔는데 이게 사람들이 흡입을 하게 되고 후에 큰 문제가 될 것이 뻔했다. 그렇게 휘발유가 국회를 통과해서 전부 무연휘발유로 바뀌는데 50년이 걸렸다고 했나? 아무튼 나쁜 구조가 올바르게 바뀌는데 시간이 아주 오래 걸린다. 그러나 망가지는 데는 금방 걸린다.


햄 같은 가공식품이 인간에게 썩 좋지 못한 식품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그러나 어쩔 수 없이 먹어야 하는 사회구조다. 맛있는 식품이라며 대대적인 광고로 대량으로 만들어서 풀어 넣고 너네가 알아서 사 먹어라, 선택은 너네의 몫이야.라고 하는 구조는 어떻게든 괴이하다. 종이빨대를 쓰네 마네 하면서 사람들 괴롭히지 말고 이런 직접적으로 와닿는 식품 같은 것에 좀 더 신경을 쏟아 줬으면. 그리고 바지 좀 어떻게 챙겨 줬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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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흐린 겨울의 날 오전에 거부할 수 없는 귤을 까먹으며 아무것도 없는 텅 빈 마당을 본다. 마당은 개념 없는 웅덩이다. 마당에 강아지가 앉아 있으면 그건 강아지의 집이 되고, 바람이 불어 마당의 나무에서 떨어진 낙엽이 깔리면 그건 그것대로의 세계가 된다. 그런 마당에 편지가 한 통 도착했다.


편지봉투에 보낸 사람은 없고 받는 사람의 이름에 나의 이름이 또박또박한 글씨체로 적혀 있었다. 편지봉투를 뜯어 편지를 보았다. 편지지에는 그동안 잊고 있었던 이름이 있었다. 그녀의 이름이었다. 그녀는 곧 떠날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나에게 안부를 전하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그저 안부였다. 특별한 것도 없고 못 잊은 사랑이라는 가슴 떨리는 말 따위도 없었다.

   

그저 그녀는 어느 날 가슴에 멍울이 잡혀 병원에 갔는데 암이 길어질 대로 깊어졌다고 했다. 받아들이기까지 2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는 말도 있었다. 담담하게 말하는 투로 적어 나갔다. 그녀는 아직도 내가 준 책을 들고 있다는 말도 했다. 내가 줄을 죽죽 그어가며 읽었던 책을. 그녀는 자신의 시간이 임박했으니 괜찮다면 편지를 한 통 부탁한다는 말을 하며 마쳤다.


그러나 나는 이 편지를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문제가 있었다. 첫 째, 그녀와 내가 만난 건 십 년도 훨씬 전의 이야기다. 둘째, 우리는 삼일동안 만난 것이 고작이다. 삼 년도 아니고, 삼주도 아닌 딱 삼일을 같이 지냈을 뿐이다. 삼일이었다, 삼일. 삼일이라는 단어가 마치 학명도 없는 심해 바닥에 붙어사는 물고기의 이름처럼 느껴진다. 물론 그때 나는 그녀를 사랑했었다. 사람이 사랑에 그대로 빠진다는 말을 실감했다. 그녀의 작고 보드라운 손을 잡는 것이 좋았다. 그 작은 손바닥 안에 크나큰 세계가 들어 있었다. 나는 그녀의 손을 통해 그 세계로 들어갔다. 그 세계는 내가 보지 못하는 것들과 경험할 수 없었던 것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윌리 왕카 세계 못지않았다.


나는 삼일 내내 그녀의 손을 잡고 있었다. 그녀도 나의 손을 잡는 것을 좋아했다. 많은 얘기를 나눴지만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기억은 없다. 기억의 줄을 잡고 잡아당기면 많은 이야기를 했다는 것. 그녀는 갓 생명을 부여받은 커피처럼 신선한 향이 나는 여자였다. 이른 새벽까지 술을 마셨지만 다음 날 그녀의 눈동자는 바이칼 호수처럼 맑고 투명했다. 그날 오전 맥도널드에 앉아서 그녀의 얼굴을 보면서 나는 발기하고 있었다. 그때 그런 나 자신을 창피하게 생각했다. 이렇게 맑은 그녀를 보면서 발기 따위나 하고 있는 것일까. 그러나 발기는 나의 의지와는 무관했다. 마치 반사 신경이 교신을 통하는 무선통신처럼 그쪽으로 온 신경을 바짝 쏟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커피 잔을 사이에 두고 박정대 시인의 슬라브식 시랑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나 역시 어떤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기억이 없다. 그저 슬라브식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는 기억만 있다. 기억이란 늘 제멋대로다. 기억이란 언제나 그렇다. 편지를 받고 떠올린 그녀에 대한 기억은 바람 같은 여자가 그녀라는 것이다. 바람은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불어오는지도 모르게 와서 머리를 헝클어트리고 옷을 더욱더 여미게 했다. 그리고 왔을 때처럼 소리소문 없이 가버린다. 바람 같은 여자인 그녀를 한 순간에 사랑하게 되었다. 그녀는 건강한 여자였다. 아름다웠고 늘씬했다. 그녀의 모습에서 아픔의 냄새 따위는 나지 않았다. 찬란한 빛이 잠시 내려와 그녀를 빚어 놓은 것 같았다.


하지만 삼일이 지난 후 그녀는 다시 올게라고 떠난 후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다 다음 해인가, 그녀가 결혼했다는 소식이 마지막이었다. 그랬던 그녀가, 막연하지만 행복하게만 지낼 줄 알았던 그녀가 침묵의 시간으로 들어가야 할 때라고 편지지에서 말하고 있다. 그녀는 편지에 우리가 손을 잡고 해변에 앉아서 바다를 하염없이 바라본 것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다. 그녀가 보낸 편지는 그녀의 남편이 나에게 부쳤을 것이다. 편지지 글씨체와 편지봉투의 글씨체가 확연히 다르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남편은 어쩌면 나를 증오할지도 모른다. 동시에 그녀의 아내를 몹시 사랑하여서 그녀를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이렇게 해야만 하는 자신의 아내를. 내가 그녀의 남편이라면 나는 그런 마음이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고작 삼일 만난 남자에게, 그것도 십 년도 훨씬 이전에 만남 남자에게 편지를 써 보내야 한다니. 아내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서 남편은 그런 아내를 미워할 수만은 없지만 나는 미워하고 증오할 수 있다. 나는 남편의 고독을 이해한다.


그녀는 밝고 건강하고 아름다웠지만 표백해 놓은 마당 같은 얼굴을 할 때가 있었다. 그녀는 고독했던 것이다. 그녀는 분명 나를 사랑했다. 하지만 그것과는 무관하게 그녀는 고독했던 것이다. 그 고독은 나로 하여금 사라지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그녀에게 필요한 건 나의 가슴이 아니라는 것이다. 내가 아무리 노력을 한다고 해도 그녀의 고독을 달래줄 수는 없었다. 그때는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저 사실과 본질이 같다고만 생각했다. 본질은 사실에서 다른 경우가 있다. 그런 면에서 나는 바보였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상실이 몸과 마음에 내려와 있었다. 어쩌면 삼일 동안 나로 하여금 그녀 자신의 상실을 덜기를 바랐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깊어지는 상실을 내가 막을 수 없다는 걸 알게 된 그녀는 나에게 상처 주기 싫어 그대로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상실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었다. 상실의 시대는 이름만 다르고, 표정만 바뀌었지 언제나 우리 옆에 머물러서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도 지금처럼 11월이었다. 해운대의 물결은 투정 부릴 수 없을 정도로 햇빛을 튕겨 내고 있어서 눈부셨다. 그녀가 그 앞에 서 있으니 현실감은 떨어졌다. 그녀 역시 햇살처럼 빛났지만 그 빛에 내가 다가갈 수는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그저 바라보는 것뿐이다. 그뿐이었다. 그녀와 함께 있으면 행복했지만 동시에 불안이 거대하게 밀려들었다. 마치 돈이 많아도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는 불안에 떠는 것과 비슷했다. 실존적 불안에 가까웠다. 이데아적 불안은 아니었다. 한 번에 사용하기에는 나에게 큰돈인 백만 원이 손에 있었는데 갑자기 사라졌다. 나에게 들어온 돈은 늘 그렇게 사라진다. 그래서 늘 가난하다. 이런 가난은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던지면 돌아오는 부메랑과 같은 것이다. 그녀의 웃음만 보고 싶었지만 삶이라는 것은 언제나 바늘을 대동하고 우리의 연약한 피부를 찌르기 마련이다.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 순간은 행복했다. 행복할수록 불안의 짐짝이 붙어 있는 것처럼 불행했다.


그녀가 사라지고 나서 그녀는 텅 빈 동공이라고 생각했다. 그녀가 있던 자리에는 그녀의 잔상만 남아서 무형태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빛처럼 손에 잡히지도 않고 그저 희미하게 보일 뿐이었다. 그녀가 나에게 온 삼일 동안, 잠깐 있으면서 우리는 상실의 냄새를 안 것이다.


그녀는 내가 있는 모든 주위에 존재했다. 사물에, 노래에, 시에, 나의 주위 모든 것에 그녀가 존재했다. 누구도 알아주지 않지만 나는 그녀의 존재를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늘 없는 존재였다. 그녀의 이름은 말하지 않기로 한다. 그녀의 최종 목적은 이름의 거리에 도달하는 것이다. 그렇게 나는 믿고 싶었다. 그녀의 이름에 그녀가 당도하고 나면 그 이후에는 아마도 더 이상 상실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잘 알아서 척척 헤쳐나가리라. 그녀가 좋아하는 시의 세계에서, 겨울의 조각케이크의 세계에서 잘 헤쳐나가리라.


그녀는 십 년 전에 삼 일간의 만남을 뒤로하고 사라졌다. 그녀는 지금 그녀가 있는 그 자리에서 그녀의 모습으로 잘 살아왔을 것이다. 나는 나대로 내가 있는 이곳에서 나름대로 잘 지내고 있었다. 이곳에서의 생활은 불안하기는 해도, 불안을 잔뜩 끌어안고 지내고 있지만 그 불안의 덩어리가 대단히 커지지 않고 고만고만한 덩어리를 유지하며 지내고 있었다. 매일 불안하지만 죽을 때까지 껴안고 가야 할 관념이라 생각하고 받아들였다. 그러다가 문득 불안해야 하는데 불안하지 않으면 왜 불안하지 않지? 하며 불안했다. 그런데 지금은 도대체 왜 덜 불안하지. 이대로 나는 괜찮을까.


나에게 도착한 그녀의 편지는 덜 불안하고, 더 불행한 나의 삶을, 그런 나의 삶에 파동을 주었다. 그렇게 강한 파동은 아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파동의 진폭이 조금씩 커지기 시작한다. 나는 그것을 감지하고 있다. 편지는 마치 살아있는 생물처럼 존재를 증명했다. 서랍에 넣어 두었는데 책상 밖으로 나와 있었다. 항상 편지를 보관하는 통에 넣어두었는데 컴퓨터 옆에 있기도 했다.


한 사람이 사라진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그녀는 나에게서 한 번 사라졌다. 사라졌지만 사라진 것이 아니다. 지금 그녀는 이제 온전히 사라지려고 한다. 그녀는 나에게서 사라졌을 뿐이다. 세상에서 사라지진 않았다. 그녀는 나에게 그 본질을 증명하려고 편지를 보냈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나는 그녀에게 편지를 쓰지 않기로 했다. 나는 그녀에게 온 편지를 서른 시간 만에 태우고 말았다. 그녀에게 필요한 건 나의 편지보다 그녀의 곁에 있어줄 수 있는 그녀의 남편이다.


가끔씩 생각하고 있었다. 시간이 훌쩍 지나 모습이 변한 나에게 그녀가 안부를 묻게 된다면, 그저 '잘 지내'라고 대답하겠다고. 비록 잘 지내 그 뒤에는 복잡하고 시끄러운 일들이 있겠지만 그녀에게는 잘 지낸다고 그저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사랑이라는 거 너무 모호하고 손으로 잡히지 않아서 다시는 이런 사랑하지 않겠다 맹서를 하더라도 그녀를 다시 보게 된다면 무모한 나방처럼 불 속으로 뛰어들게 뻔하다.


이륙과 착륙이 있는 가장 공허한 느낌들, 술에 매달리는 실망한 표정의 사람들 너머로 바닥에서 부서진 벌레들처럼 실망하고 배회하는 이곳, 껍질은 박살 나고, 체액이 흐르고 날개를 꺾이고, 다리는 어디 가고 없는 벌레들을 보며 언젠가는 우리에게도 날개가 돋아날 거라고 믿으며 라디오 헤드의 렛 다운을 좋아했던 그녀와 다시 한번 바닷가에 앉아 렛 다운을 듣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설령 기회가 온다고 해도 그러지 않을 것이다. 너는, 너는 네가 어디 있는지 알 거야, 땅이 무너져도 다시 떠올라서 튀어 오를 거야.

 



눈물 나게 좋아하는 곡, 라디오 헤드의 렛 다운 https://youtu.be/HMrIRpWMaoU?si=QQoDzrBH5u200Dq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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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커피를 받으러 가는 길에 어디선가 곰탕국물에 후추가 쏠쏠 뿌려진 냄새가 났다. 날이 조금 흐리고 포근한 겨울의 아침이다. 정말 크리스마스 같은 날이다. 크리스마스에 흰 눈이 펑펑 내리는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좋다지만 고요하고 포근하고 외투를 벗으면 조금 추울 정도의 그런 날이 크리스마스에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일기예보에서 오늘부터 영하에 한파에 어쩌고 하던데 어제와 별반 다를 바 없이 포근하고 고요하고 조금 차가운 겨울의 날이다.


이런 날 음악을 듣고 있으면 시끌시끌한 세상만사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이런 고요함이 주욱 이어져 저녁, 밤까지 지속된다. 아마 오늘 밤에 강변을 조깅하면 너무나 고요한 풍경을 만날 것이다. 겨울의 이런 포근하고 고요한 날은 얼마 되지 않으니 매년 이런 날을 만나는 나는 이런 날을 기록한다. 그리고 기억한다. 기억은 늘 제멋대로라 믿을 게 못 되지만 기록은 믿을 수 있다.


내가 가지고 있는 폰은 태양광에서는 사진처럼 보이지만 색온도가 6000도 이상이 되지 않는 밤, 태양이 숨어버린 밤에 사진을 찍으면 그림처럼 사진이 찍힌다. 뭉개지고 빛은 번질 대로 번지고. 그래도 그 나름대로의 멋이 있어서 괜찮다. 또 대부분 작은 폰 화면으로 보기 때문에 크나큰 컴퓨터 화면으로 보는 것만큼 그림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아무튼 나니아 연대기에서 장롱 문을 열고 들어 갈수록 하얀 눈밭이 나오는 것처럼 점점 날이 추워질 것이다. 그러면 강변에 사람들이 줄어든다. 늘 그 시간에 나와서 으쌰으쌰 운동을 하던 어르신들은 거의 나오지 않고, 달리는 사람들도 급격하게 줄어든다. 코로나가 덮치기 직전의 말도 안 되게 추운 날 레깅스를 두 장을 껴 입고 조깅을 하러 나갔던 날에는 아무도 없었다.


미친것처럼 불어오는 바람과 기온이 너무 낮은 날이라 마스크 위로 입김이 올라와서 눈썹에 붙어서 살얼음이 되었고 강이 얼어붙었다. 그날도 일일이 사진으로 담아 놓고 기록을 해놔서 잘 알고 있다. 그렇게 추운 날에도 일단 달리기 시작하고 15분이 지나면 등이 후끈후끈하다.


기억나는 건 그렇게 추운 날 저 멀리 마주 오는 자전거 한 대가 보였다. 그 사람과 스치고 지나가면서 그와 나는 서로 곁눈질로 서로의 얼굴을 보았다. 분명 둘 다 속으로 이런 미친놈을 봤나, 이렇게 추운 날 자전거를 타러(달리러) 나오다니, 했을 것이다. 나는 그랬거든.


매년 드는 생각은 날이 아주 추워지면 오리들은 평소보다 많이 나타난다. 그 추운 강물 위에 삼삼오오 앉아서 잠을 자거나 휘청이는 강물에 몸을 실어서 묘한 풍경을 자아내는데, 그렇게 많았던 강변의 길고양이들은 도대체 어디에서 이 추운 겨울밤을 보내는가, 하는 거다. 강변에는 길고양이들이 아주 많다. 사람들이 길고양이들에게 우호적이며 캣맘들이 사료를 챙겨 와서 매일 먹인다.


배부른 고양이들이 벌러덩 드러누워 배를 하늘로 까고 아아 기분 좋은 걸, 하는 모습을 거의 매일 본다. 하지만 몹시 추운 겨울날에는 말이 다르다. 없다. 고양이들도 추워서 거의 볼 수 없다. 고양이가 인간보다 추위를 타지 않는다. 그들의 심장은 아주 빨리 뛰어서 펌프질을 계속하여 피를 빨리빨리 돌게 한다. 그래서 수명이 인간보다 짧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몹시 추운 날에 대부분 보이지 않는 것은 어딘가에 몸을 웅크리고 앉아서 추위를 피하고 있다는 말이다. 도대체 어디로 전부 숨어서 추위를 피하는 걸까.


고양이들과 말이라도 할 수 있다면 그들의 입장을 잘 정리해서 책이라도 내 볼 텐데. 누구나 입장이라는 게 있다. 아이에게는 아이의 입장이 있고, 버스기사에게는 버스기사의 입장이 있다. 고양이들에게도 그들만의 입장이 있을 것이다. 터키인가, 터키의 어느 지역에도 길고양이들이 아주 많은데 거기의 고양이들은 사람들이 곁에 와도 도망가지 않고 집고양이처럼 부비부비한다고 한다. 모든 고양이들이 그렇다. 올해 난방비 걱정하는 내가 고양이들 입장까지 생각할 건 아니지만.

커피 받으러 가는 길에 후추 쏠쏠 뿌린 곰탕국물 냄새가


달을 떠서 갈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다


이토록 고요하고 적요하고


저어기 달과 별이 보이는 이런 풍경


여기서부터는 예전의 한파 속 풍경

날이 아주 차가우면 오리가족들이 오손도손 몰려나온다


이런 적은 잘 없지만 한파에는 이렇게 꽁꽁


한파에도 달리는 사람들


너는 한파 속에서는 어디에서


추워 옹크리고 있는 고양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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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위대하다고 느끼는 건 고등어를 구워 먹기 때문이다


인간이 정말 위대한 존재이고 만물의 영장이라고 느낄 때가 고등어를 노릇노릇하게 구워 먹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말을 하면 야이 고등어 같은 놈아,라고 할지 모르지만 루시드 폴의 [고등어]를 들어보면 ‘돈이 없는 사람들도 배불리 먹을 수 있게, 서울의 꽃등심보다 맛도 없고 비린지는 몰라도, 수많은 가족들의 저녁 밥상’을 지켜준 반찬이라면 고등어 같은 놈이라도 좋다. 노라조의 [고등어]를 들어보면 고등어는 ‘푸른 꿈과 푸른 등, 푸른 하늘로 높이 날아올라 새우등을 터트린 고래처럼 힘이라면 킹왕짱 물개처럼 굳은 심지 굳은 깡 굳은 의지로 거친 파도 헤쳐 헤쳐’ 그런 존재가 고등어다.


고등어는 구워 먹으면 맛도 좋고 분명 몸에도 좋다. 그건 정설이기도 하다. 그러나 베이컨, 이 베이컨을 아침마다 먹는 미국인들에게 베이컨이 좋은 음식으로 파고들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에드워드 버네이스에 따르면, 일정한 자극을 반복해서 가하면 습관으로 굳어진다는 것이, 바꾸어 말해 어떤 생각을 자꾸 하다 보면 확신으로 자리 잡는다는 것이 행동주의 심리학의 학성 가운데 하나였다.


과거의 영업인이 정육업자의 위탁을 받아 베이컨 판매 촉진을 모색하고 있다고 가정해 보자. 아마도 그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전면 광고를 반복해서 무수히 내보냈을 것이다.


“베이컨을 많이 드세요. 가격 싸고, 몸에도 좋고, 여분의 에너지를 비축해 줍니다. 베이컨 드세요.”


새로운 영업인은 사회의 집단 구조와 대중심리학의 원리를 이해하기에 우선 이런 질문부터 던질 것이다.


“사람들의 식습관에 영향을 미치는 사람이 누굴까?”


그 답은 명확하다.


“그래, 의사들이지.”


그러고 나면 새로운 영업인은 의사들을 찾아가 베이컨 섭취가 건강에 좋다고 공개석상에서 말해달라고 부탁한다. 그는 의사에게 의지하려는 사람들의 심리를 이해하기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의사의 충고를 따르리라는 것을 정확하게 알고 있다.


아침 방송은 전 세계 어느 나라나 가정의 중심에 있다. 그런 아침 방송에서 의사들이 나와서 오전에 먹는 베이컨에 대해서 칭찬을 늘어놓는다. 매일, 자주, 여러 의사들이 그런 말을 한다. 미국인들은 빵과 빵 사이에 베이컨을 넣어서 먹기 시작했다. 베이컨은 미국인들의 국민적인 사랑을 얻게 된다. 점점 세계를 확장하더니 많은 나라의 호텔 조식에도 베이컨은 빠지지 않게 되었다.


지금에 와서 베이컨이 몸에 좋지 않고, 몸에 좋다는 말은 거짓말이라고 해봐야 한 번 굳어진 베이컨의 세계는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저 앞에서 먼저 쓴 생활 속의 오류에서 영양제에 대해서 한 번 언급을 했는데 과연 매일 몇 알씩 먹는 영양제는 내 몸에 좋은지 어떤지 제대로 알고 먹는 사람이 몇 이나 있을까.


베이컨처럼 영양제 역시 이런 광고와 선전을 통해서 하나의 완전한 세계가 되었다. 그 아성을 무너뜨릴 수 없는 지금이 되었다.


좀 다른 얘기로,

지드래곤은 머리카락, 손톱 발톱 모두 음성이 나왔다. 마약에 대해서 무죄다. 지디에 대한 기사는 수십 곳의 언론이 지드래곤의 무죄는, 지드래곤의 마약 혐의는 무죄가, 지드래곤은, 지드래곤, 지드래곤 라며 꼭지에 지드래곤이 무죄라는 제목으로 기사가 나와도 사람들은 애초의 떠들썩한 기사와 인터뷰 때문에 마약을 하지 않은 지드래곤보다 마약을(하지 않았어도) 한 지드래곤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더 많을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지디는 마약을 꾸준하게 하는 가수로 인식을 할 것이다.


누군가 지디는 마약을 하지 않았다고!라고 하면 뭐? 그래? 그렇지 뭐. 같은 반응으로 사람들은 일관할 것이다.


버네이스는 말한다. 자동차를 구입할 때 자동차의 어떤 면을 보고 구입하는지. 보통 자동차는 이동수단으로 구입을 하지만 자동차의 종류를 고르는 건 그것과는 무관하게 얼마 전에 그 형님이 이 자동차를 구입하여 자랑을 하더라, 아내나 애인이 이 자동차를 좋아하더라, 이 차를 몰고 다니면 사람들이 쳐다볼 것이다, 같은 생각이 자동차를 구매하는데 큰 역할을 한다. 보통 자동차는 나의 월급 곱하기 넉 달 치가 내가 구입할 수 있는 적절한 자동차의 가격이지만 대부분은 훨씬 비싼 자동차를 구입한다.


그간 우리가 철썩 같이 믿어왔던 것들이 뭐야? 아니잖아? 하는 기사. https://n.news.naver.com/article/029/0002839278


인간은 이렇게 수월하게, 집단적으로, 단체적으로 혹 넘어가는 경향이 있지만 고등어를 구워서 먹는 유일한 존재다. 인간은 위대하다는 말이지.



루시드 폴의 고등어나 들어보자 https://youtu.be/vTOLyOlVCD0?si=WpoMO_5zx2oyBZq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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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 바람이 부는 겨울 문턱에서 시원한 맥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생각해 보면 어릴 때에도 조안나골드는 주로 겨울에 먹었다. 하드는 여름에 먹었는데 아이스크림은 겨울에, 아주 차가운 바람이 부는 겨울밤에 따뜻한 방에서 두툼한 내복을 입고 동생과 함께 퍼 먹었다. 아버지가 겨울이면 가끔씩 아이스크림을 퇴근할 때 사 오셨는데 그게 뭐든 간에 그렇게 맛있었다. 선택의 폭이 넓어진 요즘 고르고 고른 아이스크림은 이상하게 생각만큼 맛이 안 난다. 방대한 자유가 주어져도 불안해서 제대로 놀지 못하는 꼴과 비슷할지도 모를 일이다. 어떤 실험에서 골라주는 음식을 먹는 군과 자유롭게 사 먹게 했던 군의 만족도에서 전자가 더 높게 나왔다. 인간은 늘 자유를 갈망하지만 그 자유라는 게 권력 안에서 안전하게 누릴 수 있는 자유를 말한다. 말 그대로의 완전한 자유가 주어진다면 불안해서 아무것도 못할지도 모른다. 정말 전두광이 노태우를 향해 한 말이 맞는 말일까.


오늘, 날이 추워졌다. 본격적인 겨울 여정의 시작이다. 그런데 일기예보에서 떠드는 것처럼 그렇게 춥지는 않았다. 조깅을 하는데도 등에는 땀이 났으니까. 이렇게 추운 날, 오전에 집에서 밀어내기를 해결하지 못하고 일하는 건물에서 해결하는 경우가 있다. 일하는 건물의 화장실은 비번이 달려있고 비데가 있고 매일 두 번 청소를 하기 때문에 깨끗하다. 모든 층의 화장실이 비데가 있고 다 그런 건 아니다. 비데가 설치되어 있어서 밀어내기를 하고 세척을 누르면 따뜻한 물이 나온다. 기분 좋다. 엉덩이가 닿는 부분도 따뜻하다. 겨울에는 정말 일어나기 싫다. 하지만 여름에도 엉덩이는 따뜻하고, 물이 더워서 힘을 주면 땀도 함께 난다는 문제가 있지만 지금은 겨울이니까.


얼마 전에 나의 트위터 라인에 이런 트윗이 떴다. 젊은 여성인데 치과 건물에서 화장실을 사용하고 세척을 눌렀는데 너무 뜨거운 물이 나와서 놀라서 그냥 일어나는 바람에 엉망진창이 되었다고. 찝찝한 마음을 정리하고 화장실에서 나왔는데 그때부터 문제가 생겼다고. 거기가 계속 쓰라리고 따가워서 창피함을 무릅쓰고 병원에 갔더니 그 안이, 그 주름진 부분에 1도 화상을 입었다고. 1도 화상 별거 아닐지 몰라도 주름진 그 부분은 또 말이 다르다. 그 여성은 트위터로 자신의 깊은 빡침과 함께 고뇌를 쏟아냈다.


그 야들야들하고 속된 곳이 화상이라니. 살면서 그곳에 화상을 입을 확률이 얼마나 될까. 정말 신경이 쓰일 것 같다. 그러다가 오랜만에 만난 5세 조카가 반갑다며 히히히하며 응침을 놓는다면, 오 마이 갓. 생각만으로 너무 끔찍하면서 영화의 한 장면처럼 그 모습이 촤르르 필름이 되어 흐른다. 주식이 폭망하고 집이 사기에 넘어가고, 사랑하는 사람이 죽는 것과 무관하게 이런 일상의 문제와 고민과 불행이 우리 인간의 삶에 따라온다. 응응의 그곳에 1도 화상이라니. 고소할 거라고 하던데 어떻게 되었을까.


누군가 밀리의 서재에 있는 나의 단편 소설을 리뷰해 주었다. 이렇게 정성 가득한 리뷰를 보게 되다니. 기분이 좋다. 특히 위로가 되었다니, 그리고 받은 위로를 연료 삼아 열심히 파이팅 하겠다고도 했다. 아마 그분의 리뷰를 보니 아주 힘들 때 나의 단편 소설을 읽게 된 모양이다. 그리고 그 안의 이야기에, 주인공들에게 위로를 받은 모양이다. 이 소설은 사실 내가 힘들 때 나를 위로하기 위해 썼던 소설이다. 처음에는 아주 긴 소설이었고 주인공들이 다 죽는 결말이었는데 행복하게 끝나도 괜찮잖아, 하면서 대거 줄이고 줄여 읽기 쉬운 짤막한 이야기가 되었고 주인공들은 행복하게 될 거라는 결말로 끝난다. 내가 쓰면서도 주인공들에게 힘을 내,라고 하면서 동시에 나도 힘을 받게 되었다.

나락으로 떨어지고 아무리 노력해도 되지 않을 때 좌절을 하게 되는데 그때 쓰러져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또 쓰러지고 자꾸 쓰러져도 괜찮다. 털썩 주저앉지만 않는다면 어떻게든 해볼 테니까. 어제 라디오를 듣는데 버지니아 울프의 말이 나왔다.


서두를 필요 없어요

반짝일 필요 없어요

자기 자신 말고는 다른 사람이 될 필요는 없어요

-버지니아 울프


누군가들이 부러워 허둥지둥되던 마음을 살짝 가라앉혀보자면서 디제이는 말했다. 매일 조깅을 하면서 알게 된 사실이 있다. 가끔 사람들과 함께 달리는 경우도 있다. 그때 나보다 잘 달리는 사람을 이기기 위해 그들의 속도에 맞출 필요는 없다. 달리기라는 건 나만의 보폭과 호흡이 있어서 그걸 꾸준하게 유지하면서 달리면 오랫동안 달릴 수 있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목적지까지 달려가게 된다. 자칫 누군가를 따라서 달리다 보면 근육에 문제가 생기거나 다리가 꼬여 넘어지기도 한다. 그렇게 한 번 넘어지면 일어나서 달리는데 노력과 폼이 든다.


그리고 리뷰를 해 준 분은 나에게 감사하고 인사까지 남겼다. 나야말로 감사한 일이다. 나는 매일 글을 적고 있지만 주위에서 가끔씩 듣는 말이 너의 글이 누군가에게 힘이 되는 그런 힘이 있는 글을 써라는 말이다. 하지만 나는 누구를 위해서 글을 써본 적이 없다. 좀 이기적일지는 몰라도 나는 나를 위로하기 위해서 글을 쓸 뿐이다. 누군가를 위로하는 글은 서점에 엄청 많이 있다. 굳이 나까지 누군가를 위로하기 위해서 글을 쓸 필요는 없고 그럴 자신도 없다. 리뷰를 해 준 분이 나의 글에게 위로를 받았다면 아마 나와 비슷한 마음이지 않았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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