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홀릭 - 인터넷오페라로 경험한 천 개의 세상
이보경 지음 / 창해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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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모로 살아가기 힘든 시대다. 이런 때일수록 심신을 보할 음악을 찾아서 듣기를 권한다. 그중에서도 특히 모차르트의 음악이 좋다는 건 많이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것을 제대로 음미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조금이라도 많은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빨리 그 세계에 발을 들였으면 싶다. - '들머리' 중에서

 

 

인터넷으로 즐기는 오페라 

 

책의 저자 이보경은 서울대학교 외교학과를 졸업하고, 프랑스 소르본 대학에서 사회학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1987년 문화방송에 기자로 입사했으며, 현재 경인지사 부장으로 재직 중이다. 우연한 기회에 인터넷오페라를 통해 지금까지 150편 이상을 감상했다. 살아가기 힘든 시절, 견딜 수 있도록 도와주는 좋은 음악과 시를 많은 이들과 함께 나누고 싶은 소망을 갖고 이 책을 출간했다.

 

그녀는 최근 몇 년 동안 힘든 시간을 통과해왔다. 2012년 총선을 앞두고 MBC의 공정방송을 외치며 진행된 6개월의 파업과 그로 인한 여파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힘들었던 4년여의 시간 동안 인터넷으로 150편이 넘는 오페라를 감상하면서 심신의 치유를 경험했다. 이 책은 그런 과정의 소중한 결과물인 셈이다.

 

때는 2012년 봄. 이 기자가 한창 MBC의 공정방송을 외치며 파업에 참가하던 시기였다. 곧 끝날 것 같았지만 쉬이 끝나지 않았던 파업, 어느 날 그녀는 이채훈 당시 MBC PD의 초청으로 모차르트 강연을 듣게 됐고 강연 내용을 검색하던 도중 연관 자료로 붙어 있던 오페라 아리아를 듣게 됐다. 아리아를 듣는 순간 '힐링'을 경험했던 그녀가 이후 오페라에 푹 빠지게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렇게 오페라를 통해 위로받고 심신의 치유를 경험하는 4년여의 시간이 시작됐다. - '기자협회보(2015년 12월 16일)' 중에서

 

다양한 매력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오페라를 '어려운 고전예술'이라는 선입견을 갖고 있는 게 사실이다. 심지어 이는 배부른 사람이나 특정한 사람들이 즐기는 '사치스러운 장르'라서 일반인들이 범접할 수 있는 분야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더구나 한국에선 오페라의 공연이 다른 것들에 비해 매우 얇은 편이다.

 

그렇다면 오페라를 좀 더 편하게 즐길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저자는 집에서 편안하게 인터넷으로 오페라를 즐기라고 권한다. 공연장까지 가는 수고와 번거로움, 금전적인 부담이 줄어들기 때문에 이를 추천한다. 유튜브, 중국의 유쿠 등에 이미 많은 오페라 작품들이 올라와 있다. 한국은 인터넷 강국이 아닌가. 방방곡곡 어디든 마음만 먹으면 손쉽게 오페라를 즐길 수 있다.

 

인터넷을 통해 오페라들을 한두 편 접하다 보면, 처음엔 이해하기 어렵고 약간은 부담스러웠던 장면들이 어느 순간 이해되면서 여기에 빠져드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책은 4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문화적 차이와 기본 지식 부족으로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었던 오페라의 세계로 우리를 친절하게 이끌어준다.

 

 

 

 

손바닥 오페라 여기까지

 


오페라는 보통 2~3시간 동안 공연이 이어지니 클래식 가운데 단품으로는 제일 길다고 할 수 있다. 저자는 인터넷오페라 감상의 큰 장점으로 운동을 병행할 수 있다고 말한다. 제자리 걷기나 실내 자전거를 타면서 오페라를 감상할 경우, 오페라 감상 자체는 마음을 위무하는 약손이 되고 그때 병행하는 피트니스는 약발이 된다는 것이다. 우리말 자막이 있는 오페라 20편, 한국인이 사랑하는 오페라 10편, 오페라로 즐기는 고전 30편 등을 정리함으로써 오페라 세계에 입문하려는 이들의 편의를 도왔다.

 

 

조금 더, 전체 훑기


오페라 남녀 오페라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는 르네상스 말기부터 바로크 시대, 고전기, 낭만기, 진일보한 현대 오페라를 시간의 흐름에 따라 살펴본다. 그 속에서 노래극 흥행사들이 필살기로 내세웠던 무대 위 남녀, 나아가 유명 작곡가들의 무대 아래 남녀 생활을 전체적으로 아우르고 있다. 글룩(1714~1787년)이 작곡한 '오르테오와 에우리디체'는 1762년 10월 5일 빈에서 초연이 올려졌다.

 

우리말로 가극歌劇이라고 표현하는 오페라의 역사는 약 420년 정도이다. 악보가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작품은 1600년에 만들어진 <에우리디체>이다. 에우리디체는 신부 이름이고, 신랑은 오르페오다. 그리스 신화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에서 따온 것이다. 대본은 오타비오 리누치니, 작곡은 야코포 페리다. 원작은 약 2천년 전에 쓰여진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에 실린 10편과 11편이다.

 

그 내용은 이렇다. 결혼식이 벌어진다. 신부는 신랑에게 씌워줄 화관을 만들려고 꽃밭에 갔다가 그만 독사에 물려 죽고 만다. 이에 신랑은 신부를 저승에서 데려오기로 결심하고 저승의 신에게 호소한다. 그는 뛰어난 시인이자 연주자이며 또한 가객이었다. 마침내 저승의 신도 감동해 신부를 다시 데려가라고 허락한다.

 

보십시오 님이시여,

우는 저를 보고 아름다운 부인이 얼마나 한숨짓고 계신지,

얼마나 서글프게

는물 고인 두 눈으로 저를 보고 계신지를.

보십시오 님이시여,

이 그늘, 그리고 어둔 지하의 신들마저

얼마나 저의 비탄에 저의 통곡에

다 같이 슬퍼하고 괴로워하는지를.

 

- '저승의 신에게 호소하는 부분' 중 일부 

 

그런데, 조건이 있었다. 이승에 도착할 때까지 신랑은 절대로 아내의 얼굴을 봐선 안된다는 것이었다. 신화의 뒷 부분을 우리는 이미 안다. 맞다. 어둠에서 벗어나기 직전, 신랑은 뒤따르던 아내를 돌아본다. 신랑은 약속을 어겼기에 저승으로 떨어진다. '바늘 가는 데 실 간다'는 말처럼, 비탄에 빠진 신부도 결국 죽고 만다.

 

 귀스타브 모로, <오르페우스>

 

바로크 시대에 하이브리드 인간 카스트라토가 등장했다. 남성도 여성도 아닌 제3의 성이 무대를 뒤흔들었다. 오직 성악용으로 양산된 카스트라토는 성인 남성의 몸으로 꾀꼬리 같은 여성의 목소리를 내는 특이한 인물이었다. 약 200년 동안 수십만 명이 제조(?)되었지만 이 중 열댓 명 정도만 최고의 진주로 대접받았다. 영화 <파리넬리>를 참고하라.

 

정상적인 사람은 누구나 변성기를 거친다. 하지만 카스트라토는 소년의 미성을 인위적으로 유지한 채 어른의 가창력이 보태진 사람들이다. 1600년대 중반 이탈리아에서 본격적으로 배출돼 1900년대까지 존재했는데, 이들은  한동안 유럽 대부분의 성악계를 휩쓸었다. 마지막 카스트라토 알렉산드르 모레스키가 유일하게 목소리 녹음을 남겼다. 이는 1902년 바티칸의 시스티나 성당에서 부른 성가였다.

 

남자아이의 변성이 단절되는 것을 우연한 기회에 알게 되었을 것이다. 사내아이가 어떤 병이나 불의의 사고, 또는 사나운 짐승에게 물려 고환의 기능이 상실되었을 경우 변성變聲이 발생하지 않는다. 이를 인위적으로 시행함으로써 만들어진 사람들이 바로 카스트라토이다. 아마도 그 시대에는 항생제나 마취제가 없었기에 수많은 소년의 비명과 절규 속에서 수술이 진행되었을 것이다. 주로 고환 압착이나 제거, 드물게 수정관 차단법 등이 이용되었다.

 

마치 생활용품을 제조하듯 왜 이런 인물들을 만들어냈을까? 그 이유는 다음 세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첫째, 교황이 여성의 가창 금지령을 내렸기 때문이다. 둘째, 소년은 수술 후 바로 가창 훈련에 들어갈 수 있으므로 필요한 인재를 신속하게 양성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셋째, 성악 교육에 매를 이용해 효율적인 양성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것도 있는 법, 변성 차단은 생식 불능을 초래했다. 이는 바로 작용 반작용의 법칙이기도 하다.

 

      

 

참혹한 수술을 받은 사람들 중에는 불과 0.1퍼센트만이 파리넬리 근처라도 갔다. 수술에는 다양한 요법이 둥원되었다. 이 일은 이발사들이 많이 했다. 이발소 커튼 뒤에서 아이의 비명을 막기 위해 방성구防聲具가 동원되었다. 수술 후 출혈 과다로 사망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런데도 로마와 나폴리의 이발소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들이 붙어 있었다.

 

"사내아이 카스트레이션 싼값에 모심"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났더라도 발군의 실력이면 출세가도를 달렸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딱히 일이 없었다. 성직자나 수도자는 당연히 될 수 없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그때 역시 심신이 우수하고 성性적으로 결함이 없어야, 성생활이 금지된 성직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카스트라토는 공무원이나 군인도 될 수 없었다. 취업도 금지되었다. 학업 등 개인적인 성취는 돈이 없어서라도 시작하지 못했다. 결혼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종교적 관념상 결혼은 자식을 낳는 게 주요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모차르트는 <피가로의 결혼>을 전후해 <후궁 탈출>, <돈 조반니> 등 창작활동을 계속함에 따라 계속 빚이 늘어갔지만 창작의 열정은 꺾이지 않았다. 서른 살의 나이에 다양한 장르에서 벌써 500편을 만들어낸 다작왕이었다. 그리고 일생 동안 626편을 작곡했다. 누가 그와 겨룰 수 있겠는가?

 

여러 작품 가운데서도 1786년 발표한 <피가로의 결혼>은 특히 위대했다. 프랑스에서 피에르 보마르셰의 동명 연극이 2년 전 큰 화제가 된 터였다. 혁명을 불러왔다는 후세의 평가를 받는데, '신성로마제국'은 그것의 반입을 금지했다. 그럼에도 모차르트는 대본가 로렌초 다 폰테와 의기투합했다. 다 폰테는 자서전 대필자, 저널리스트 등 15개 직업을 전전한 뒤 대본가로 활동 중이었다.

 

 로렌초 다 폰테(1749~1838년)

 
<피가로의 결혼>은 초야권初夜權의 오래된 관습 등 당시 기득권의 탐욕을 정면으로 비판한 사회 풍자적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런데 음악은 우아하기 그지없다. 그 둘의 신묘한 조화라니....... 그들은 '남녀의 사랑 이야기'라고 눙쳐 검열의 그림자를 피할 수 있었다. <세비야의 이발사> 후편 격인 이 작품의 줄거리는 아래와 같다.

 

난관을 뚫고 결혼에 성공했던 알마비바 백작과 로지나 커플이 <피가로의 결혼>에선 마주치기만 하면 서로에게 눈썹을 치뜨는 전투적인 부부로 등장한다. 이들과 대조를 이루는 커플은 결혼을 앞둔 피가로(전편에서는 이발사, 속편에서는 백작의 하인. 백작의 결혼을 성사시킨 공로로 하인이 되었다)와 백작부인의 하녀 수잔나다. 바람둥이 행각으로 아내 로지나를 수없이 좌절시켜온 백작은 이제 수잔나에게까지 흑심을 품는다. 이를 알게 된 피가로는 수잔나 및 백작부인과 연대해 희극적인 계략을 써서 백작을 무릎 꿇게 만들고, 백작부인은 사과를 받아들여 남편을 용서한.

 

 

 

19세기에 그린 <피가로의 결혼> 1막의 한 장면

 

 

한 발 더, 비교 감상

 

방법론을 통해 그 결을 드러낸다고나 할까? 오페라마다 예외 없이 등장하는 아모레(사랑)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마스카니 작곡의 이탈리아 오페라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와 빈에서 초연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장미의 기사>를 비교함으로써 작품 속 마초이즘과 페미니즘을 살펴본다.

 

또한 은장미를 거론하는 <장미의 기사> 속 원수 부인과 <돈 조반니>를 비교해 탈선의 가속 페달을 밟아 비극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인간 군상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리고 세계적으로 유명한 두 프리마돈나, 즉 지구촌 최악의 바람을 맞은 마리아 칼라스와 최고의 섹시 소프라노 안나 네트렙코의 삶과 노래를 비교 조망한다.

 

먼저 시칠리아 섬의 비극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의 줄거리를 살펴보자. 주인공 투리두는 평범한 가장이다. 하지만 막이 오르자마자 그가 부르는 아리아는 묘하다. 옆집 부인을 그리워하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옆집 남편은 마차를 몰고 이곳저곳 다니는 운송업자지만 아내의 자조를 믿는다.

 

축제일을 맞아 성당 주변은 봄기운이 완연하다. 떠들석한 분위기와는 달리 투리두의 처는 표정이 어둡다. 간밤에 남편이 외박했던 것이다. 시어머니에게 이 사실을 보고한다. 먼 마을에 간다고 했던 남편을 동네에서 본 사람이 있다면서 이웃집 여자를 거론한다. 남편이 군에 가기 전 영원한 사랑을 약속했던 여자다. 하지만 시어머니의 반응은 냉랭하다. 결국 이웃집 남자에게 이 사실을 알린다.

 

이웃집 남자는 투리도에게 과수원 앞에서 결투를 하자고 신청한다. 포도주를 계속 마시던 투리도는 어머니에게 옛날 군에 입대할 때처럼 작별인사를 해달라면서 결말을 살짝 보여준다. 자신이 못돌아오면 아내의 엄마가 되어 달라고 부탁한다. 만취 상태로 그는 결투장으로 나선다. 해가 지기 전 마을 아낙네의 비명 소리 "투리두가 죽었어요!"로 극은 끝난다.

 

시골의 기사도騎士道를 감상했으니 이젠 <장미의 기사>로 넘어가 보자. 때는 1740년대 신성로마제국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女帝의 통치기, 장소는 빈이다. 극의 출발부터 충격이다. 중년 부인이 젊은 백작과 호화 침실에서 뒹굴고 난 아침에서 시작된다. 육군 원수의 중년 부인은 한참 연하인 옥타비안과 불륜 관계를 맺고 있다. 1911년에 초연되었는데, 이 작품은 당시에도 '공연 포르노'로 묘사됐다. 

 

인기척에 놀란 젊은 백작은 급히 커텐 뒤로 몸을 숨긴다. 등장한 인물은 그녀의 무뚝뚝한 사촌이자 방탕한 오크스 폰 레르헤나우 남작이다. 중년의 남작은 갓 수도원에서 나온 15세의 소녀를 신부로 삼으려 한다. 약혼녀 소피에게 은으로 된 장미를 가져다 줄 '장미의 기사'를 추천해 달라고 요청해 온다. 시녀 마리안델로 변장한 옥타비안 백작이 잠시 시중을 든다. 부인은 옥타비안에게 기사를 맡아달라고 부탁한다. 

 

소피는 부유한 상인 파니날의 딸로 남작은 돈을 노리고 결혼하려는 속셈이다. 어떤 일이 일어날지 미리 짐작한 부인은 옥타비안을 보낸 것이다. 옥타비안과 소피는 첫눈에 사랑에 빠지고 남작은 유혹의 편지에 걸려들고 만다. 남작은 시녀 마리안델로 변장한 옥타비안과의 은밀한 만남 중 발각된다. 부인은 사심 없이 애인 옥타비안을 보내준다.

 

1955년 라 스칼라에 오른 베르디의 <라 트라비아타>는 '세기의 공연'으로 평가받았다. 주인공 비올레타는 뛰어난 미모의 매춘부였는데, 마리아 칼라스는 그 역할에 심하게 몰입했다. 그때까지 통용되던 드높은 풍의 비올레타를, 베르디가 의도했던 100퍼센트 인간풍으로 전환시켰다는 극찬이 쏟아졌다. 이 역할도 1958년까지 약 60번을 맡았다.

 
그즈음 믿을 수 없는 변화가 있었다. 100킬로에 가깝던 몸무게를 몇 주 만에 55킬로로 감량한 것이다. 키가 172센티였으니 호리호리한 체형으로 거듭난 셈이었다. 지방흡입술 같은 게 있을 리 만무한 시절, 호사가들은 그것에 대해 수군댔다. "저 여자, 촌충을 무더기로 흡입했대" 이렇게 그녀의 엄청난 체중 감량은 촌충요법설로 남았다. 디바의 옷장엔 화려한 의상이 넘쳤고 구두가 300켤레에 달했다.

 

 

처절한 비운의 역설


 

너무 일찍 요절한 빼어난 네 명의 작곡가 모차르트(35세 사망), 비제(37세 사망), 페르골레시(26세 사망), 벨리니(34세 사망) 등의 삶과 음악을 조명했다. 그들이 짧은 생애 동안 남긴 작품의 카타르시스를 통해 우리는 역설적이게도 우리 안에 내재되어 있는 상처를 회복하고 치유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영혼을 힐링하는 오페라의 세계로 초대한다

 

이 책에 등장하는 원전 인용문과 대부분의 가사를 저자가 직접 번역했다. 우리말 자막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의 구분, 우리말 자막이 없을 경우 조금이라도 편하게 인터넷으로 오페라를 즐길 수 있는 방법 등을 제시한다. 오페라와 관련된 기본적인 용어와 사항들도 따로 정리하고 있다. 특히, 책의 말미에는 인터넷오페라 157편의 감상 목록을 실었다. 이제, 오페라의 세계로 한번 빠져들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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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근육을 키워라 - 하루 10분 재테크 공부로 돈이 저절로 붙는 체질 만들기
백승혜 지음 / 라온북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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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통해 구하지 못하는 정보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시다시피 많은 사람이 부자가 되지 못한다. 그 원인이 체계적이지 않은 재테크 지식 때문이다. 새해에 늘 하는 다짐 중 하나인 운동. 하지만 막상 운동을 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건강에 대한 정보를 몰라서? 아니다. 좋은 운동법을 배워도 몇 번 해보고는 그만두기 때문이다. - ' 머리말' 중에서

 

 

부동산 지식에 대한 근육을 만들자

 

저자 백승혜는 18년 차 인테리어 디자이너이자 이룸경매학원 원장이다. 그녀는 경매, 분양, 프랜차이즈, 상가개발, 주거 인테리어 디자인 등 부동산 분야에서 다양한 활동을 해왔다. 이 과정에서 축적된 지식으로 많은 사람이 성공적인 재테크를 통해 부자가 되도록 방향을 잡아주고 있다.

 

저자 백승혜(오른 쪽) 

 

 

 


늘 명쾌하고 확실한 솔루션을 제시한다는 평을 듣는 그녀도 처음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재테크 바보'였다. 하지만 부자가 되는 법을 집요하게 연구하고 공부한 결과, 지금의 자신을 만든 '부자근육'을 키우는 데 성공했고, 지금은 이 지식과 실천법을 사람들에게 널리 알리는 데 힘쓰고 있다.

 

해마다 부자가 되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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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한류 장사꾼이다 - 밥장사 황해진의 중국 창업 성공기
황해진 / 경향미디어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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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인생 역전을 꿈꾸는 사업 실패자와 일을 하고 싶어도 일자리를 찾지 못하는 명퇴자들, 그리고 '3포, 5포'도 모자라 '헬조선'이라는 기막힌 신조어를 읊고 있는 이 땅의 취준생들에게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 되고 싶다. 평범함보다 못한 나 같은 사람도 한류 덕분에 이렇게 인생 성공의 맛을 보고 있으니 아무리 어렵더라도 제발 포기만은 하지 말하고 전하고 싶다. - '프롤로그' 중에서

 

 

어느 한류 밥장사의 중국 성공기

 

지은이 황해진은 현재 중국 청도에서 코리안 레스토랑 '바로쿡'을 운영하고 있다. 한류를 좋아하는 중국 젊은이를 타깃으로 하는 알짜배기 장사다. 한국에 있을 때는 인쇄 및 광고 사업을 했다. 국내에서 개인 브랜드 광고 분야를 개척하며 승승장구했으나 뜻하지 않게 사업에 실패해 신용불량자로 전락했다.

 

급기야 건강까지 악화되어 암 선고를 받았고, 수술 후 자포자기 심정으로 중국에 삶의 터전을 옮겼다.

 

 

 

 

 

 

 

 

 

 

 

 

 

 

 

 

 

 

 

 

 

이 질문에 대한 논쟁은 사실 의미가 없다. 한류란 무엇인가? 유행인가, 아니면 문화인가? 책의 저자처럼 현지에서 직접 사업을 하면서 느끼는 소감이 바로 해답이 아닐까 싶다. 그는 "한류는 한국인의 마음이다. 한류는 유행이 아니라 문화다. 한류는 자원이다"라고 말한다. 나는 이 대목에서 '자원資源'이란 말에 자꾸 눈이 간다.

 

 

 

 

 

드라마 속 여주인공 천송이의 대사가 나올 당시 중국에선 조류 독감이 극성을 부리고 있을 때였다. 하지만 천송이의 대사 한 마디가 이를 잠재웠다는 사실이다. 국내에서 이런 상황이 발생하면 가게 문을 당분간 내리는 집들이 속출할텐데 말이다. 현재에도 중국에선 치맥 문화가 들불처럼 번지고 있다고 한다.       

 

한국에 살고 있는 사람은 한류를 모른다. 그 위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외국 땅에서 안다. 신용불량자 신세로 멋모르고 중국 땅에 발을 밟았던 저자도 처음 3년 동안 한류를 몰랐다. 그러나 그의 가게에서 한류 대박이 터지면서 그야말로 그는 한류 충격을 받았다. 한류 원조는 10여 년 전의 <대장금>이다. 그런데, 2014년 <별그대>의 한류는 그때와 많이 다르다.

 

스마트폰의 시대인 요즈음 문화 이동은 빛의 속도로 전파된다. '치맥 문화'가 보여주는 것처럼 한류가 산업으로 연결됨을 증명해준다. 물론 바로쿡도 치맥에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말할 수 없겠지만 분명한 것은 '한국음식'이라는 브랜드 때문에 성공한 것이다. 사람에게 가장 밀접한 게 '의식주'다. 이중에서 식문화야말로 그 나라를 대표하는 문화 코드이다. 한국음식은 음식에 마음(정)을 담아내므로 최고의 경쟁력이다.

 

 

중국에서 얻은 선물

 

"무심무심의 경지에 들어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때 비로소 자유로운 삶을 얻게 된다" - 장자

 

조조는 유비의 유능한 부하 서시徐庶를 찾아가 자신을 도와 달라고 간청하지만 거절당한다. 그런데 사람 욕심이 많은 조조는 결코 포기하지 않고 그의 모친을 위나라로 데려와 아들에게 편지를 써도록 한다. 즉 서시의 효심을 자극한 것이다. 결국 서시는 '방촌이난方寸已亂'이라는 말을 유비에게 남기고 떠난다. 이는 마음이 어지러운 상태에선 어떤 일도 계속 할 수 없다는 뜻이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현재 하고 있는 일이 잘 풀리지 않는다면 가장 먼저 살펴봐야 할 것이 바로 자신의 '마음'이다. 혼란스러운 마음의 뿌리는 대개 타인을 의식하는 삶에서 시작된다. 따라서 내 삶을 챙기다 보면 마음이 편해지므로 일이 잘 풀리게 된다. 그래서 저자는 한국에서의 삶이 집중하기에 여의치 않다면 외국에서 시작해보는 것은 방법이 된다고 조언한다.

 

 

 

 

현지화 콘셉트가 생명이다

 

"중국인들은 땅 위에 네발 달린 것은 탁자 빼고 다 먹고, 물속에 있는 것은 잠수함 빼고 다 먹고, 하늘에 날아다니는 것은 비행기 빼고 다 먹는다"라는 농담이 있다. 중국음식은 지상의 모든 자연물을 식재료로 활용한다는 말로서 중국음식의 다양함을 대변하는 말이다. 다양한 소수민족과 각 지방 특색의 음식 문화가 어우러지고, 양념과 조리법, 불의 세기와 재료 손질법에 따라 맛이 달라지는 섬세함까지 배어 있다. 중국음식 문화는 '요리의 천국'이라는 별명을 붙을 만큼 세계인들에게 다양함과 우수성을 인정받았다.

 

모든 장사에는 콘셉트가 중요하다. 현지형인가 한국형인가, 주고객은 중국인인가 한국인인가, 나이는 젊은층인가 중장년층인가, 가격은 저가인가 고가인가, 규모는 대중소 중 어떤 규모인가 등 이런 물음에 명확하게 답해야 한다. 콘셉트 정리는 장사의 목적을 정리하는 일이며, 그래야만 이에 합당한 전략전술을 구사해 성공이란 답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중국에 진출한 소형 콘셉트 K-FOOD 가게들은 대부분 한국인 집성촌에서 한국식으로 한국인을 대상으로 운영해왔다. 이런 경우 교민이 많지 않을 경우 한국인들 간에 출혈경쟁이 불가피해진다. 더구나 교민의 이동에 따라 매출은 기복이 생기게 되므로 안정적인 사업을 하기에 어렵다. 중국 진출에 성공하려면 처음부터 현지화 콘셉트를 준비해야만 한다.

 

 

중국에서 성공하려면

 

편법이나 불법은 꿈에도 생각 말라

진심과 인정은 어디에서나 통한다

급변하는 중국, 지금이 기회다

우리와 너무 다른 '차이'를 인정하라

누구를 만나건 만만히 보지 말라

 

 

꿈보다 생존이 먼저다

 

 

만족하고 물러설 줄 알면 치욕을 당하지 않고, 멈출 줄 알면 위태롭지 않고 오래 지탱할 수 있다. - 노자

 

자기계발서에 흔히 등장하는 말이 있다. "돈을 위한 일을 찾지 말고 자신이 좋아하는 일, 자신을 행복하게 하는 일을 찾아야 한다" 이대로 한다면 성공에 다가갈 수 있을까? 아니다. 이 말에는 가장 중요한 전제가 빠져 있다. 지금 당장 먹고 사는 일이 해결될 때에나 적용할 수 있는 충고인 셈이다.

 

현대그룹을 창업한 정주영 회장은 나이 열아홉에 무조검 서울로 올라왔다. 소 판 돈을 훔쳐 무단가출했던 것이다. 그에겐 재산이라곤 건장한 몸뿐이었다. 1943년, 쌀가게에 취직했다. 빨리 많이 배달하려고 밤에 잠을 자지 않고 무릎이 까여 피가 흐를 정도로 밤새 자전거 타는 것을 연습한 장면은 무척 감동적이다. 3년이 지나 가게 사장은 성실한 점원에게 가게를 인수하도록 한다. 정주영의 첫 번째 사업은 쌀가게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퀴즈가 나간다. 정주영은 쌀장수가 자신을 행복하게 만드는 좋은 일이라서 이곳에 취직했을까? 당연히 아니다. 아마도 가출한 신분이었기에 우선 굶지 않는 게 최선의 목표였을 것이다. 자신이 그토록 하고 싶은 천직을 찾는 일은 나중에나 가능했던 것이다. 우리들의 꿈은 성장하면서 변하고 바뀐다. 대통령이 꿈이었던 사람이 도로청소에 혼신을 다해야 하는 미화원이 될 수도 있다. 왜? 지금 당장 배가 고프니까. 행복을 찾아 허송세월하는 배부른 배짱이가 되지 말자. 발등의 불은 바로 생존이다.

 

매슬로의 욕구 5단계

 

1단계~ 식욕, 성욕, 수면

2단계~ 생존의 안전

3단계~ 소속감, 가정

4단계~ 타인의 인정, 명예, 자존심

5단계~ 자아 실현(최고의 인간 존재)

 

 

 

불평하는 당신, 차라리 지금 떠나라

 

아직도 '흙수저' 타령이나 '헬조선'을 외치며 남의 탓 아니면 사회구조 탓만 하려는가? 등 터진다고 고래만 원망하는 새우가 되려는가? 우리들의 인생은 무한경쟁이다. 오늘의 갑이 내일의 을로, 오늘의 을이 내일의 갑으로 바뀌는 게 인생의 묘미 아닌가 말이다. 자신을 낳아준 부모조차 아들이 너무 못생겼다고 외면했지만 타고난 외모를 비관하지 않고 행복은 남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 속에 있음을 깨닫고 꾸준히 독서하며 글을 써 불후의 명저들을 남긴 러시아의 대문호 레프 톨스토이를 보라.

 

한국에서 답을 못 찾는다면 죽을 각오를 하고 해외에서 답을 찾아라. "세계는 넓고 할 일이 많다"고 외치던 김우중 전 대우 그룹 회장을 뛰어넘는 사람이 처음부터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다. 인생 역전을 꿈꾸는 사람, 중국에서 창업하려는 사람, 일자리를 찾지 못한 명퇴자들, 그리고 취업준비생 모두에게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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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놉티콘
제니 페이건 지음, 이예원 옮김 / arte(아르테) / 2016년 1월
평점 :
절판


난 실험이다. 늘 그랬다. 이건 기정사실이자 내개 할당된 자유이자 엄연한 팩트다. 난 감시 대상이다. 학교에서나 사회복지사와 면담하는 자리며 법원이나 경찰서 유치장에서는 물론이고, 거기서 그치지도 않는다. 언제고 저들은 사방에서 날 감시한다. 나무에 오른 날 감시한다. 난 떡갈나무 가지 중 제일 길고 튼튼한 가지를 골라 매달린 채, 내 평생의 소원과 꿈들이 흘러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몇 시간이고 버틸 수 있다. 저들은 휘영청 걸린 달과 눈싸움을 하는 날 감시한다. 

 

 

감시당하는 우리 사회를 고발하다

 

소설은 청소년 보호시설 '파놉티콘'에 배치된, 폭력과 마약에 절어버린 열다섯 살 소녀 아나이스 헨드릭스의 목소리로 시작된다. 거친 욕설과 다소 듣기 거북한 비난들이 난무하는 이 소설은 어떤 문학의 범주에 넣어야 하는지 의아할 정도이다. 하지만 이 작품으로 2012년에 데뷔한 제니 페이건(사진)은 될성부른 작가들의 등용문으로 여겨지는 워터스톤즈 서점의 '워터스톤즈 일레븐'에 이름을 올렸다. 또 2013년 최고의 젊은 영국 작가로 선정되기도 했다. 

 

'파놉티콘(판옵티콘)'이란 C자형 원형감옥이다. 이는 1700년대 후반 영국의 철학자이자 법학자인 제레미 밴담이 설계한 감옥이다. 이 감옥의 특장은 감시자는 위에서 내려다보며 모든 수감자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할 수 있지만, 수감자들은 감시자를 결코 볼 수 없는 독특한 구조이다. 이곳에 후송되어 49호실에 배치되어 이동하는 아나이스의 눈에 비친 모습은 이러하다.

 

건물 전체가 곡선형을 이룬다. 정확히는 알파벳 C자 모양이고, 그 곡선을 따라 건물 맨 위층에 굳게 닫힌 검은색 문이 여섯 개나 있다. 그 바로 아래층과 그 밑에 층에도 똑같은 문이 여섯 개씩 나 있는데, 문마다 하얗게 칠했고 하나도 빠짐없이 활짝 열려 있다. 여기선 소등 전에는 문을 절대로 닫는 법이 없다고 들었다.

 

파놉티콘

 

아무튼 이런 특성 탓에 감시를 받지 않을 때조차도 수감자는 스스로 감시받는다고 여기게 된다. 이 양식에 맞춰 건축된 수용시설에 주인공인 아나이스가 입소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소녀는 자신의 출생에 대해 아는 게 그리 많지 않다. 이런 처지의 청소년들이 대개 그렇듯 그녀 또한 여러 위탁가정을 전전하며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나쁜 어른들을 만나고, 험한 일을 겪고, 폭력과 약물에 길들여진다.

 

그러던 어느 날, 아나이스는 정작 자신은 기억하지 못하는, 경찰관을 공격한 혐의로 파놉티콘으로 후송된다. 수용된 파놉티콘 내에서도 소녀는 비슷한 처지의 아이들과 연대를 형성하고 몰래 들여온 약물을 복용하는 듯 제멋대로인 듯하지만 정작 자신의 알몸을 감출 권리조차도 얻지 못한다. 항상 감시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이미 영국 최고의 사실주의 영화감독 켄 로치에 의해 영화화하기로 결정되었다.

 

 

    

 

열다섯 살 소녀 아나이스 헨드릭스는 스코틀랜드 정신병원에서 태어나 여러 위탁 가정을 거쳐 폭력과 마약에 빠지게 된다. 경찰관을 공격한 혐의로 어린 범죄자들의 보호시설인 파놉티콘으로 호송하는 경찰차 뒷좌석에 앉은 그녀는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며 세상에 대한 불만을 거침없이 토로한다. 첫 인상이 벌써 뭔가 억울한 사람과 사악한 교도관들의 만남이라는 분위기가 느껴진다. 파놉티콘에 도착한 소녀는 이렇게 말한다.

 

딱 질색이다. 신변 인수, 낯선 장소, 직원들, 서류철. 땅굴이도 있어서 그 안에 기어들어 가 살 수 있으면 좋겠다. 아니면 나무 위에 지은 집이라든가.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는 곳이라면 어디든 좋다. 

 

브렌다 선생의 안내를 받아 3층으로 올라갔다. 여자 아이 3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49호실은 층의 한가운데 방이다. '콧수염'은 양쪽 뺨에 갈색 선을 나선형으로 세 걔씩 그렸는데, 눈은 크고 갈색이다. 귀걸이는 안 했고 머리가 길다. 이름은 '타시'다. 야구모자를 쓴 '커트 머리'는 배때기에 칼자국 투성이며, 골반에 살이 튼 걸로 봐서 애 엄마인듯하다. 이름은 '쇼티'다. 그리고 '아일라', 이렇게 3명이다. 앞으로 자주 부딪힐 인물들이다.  

"방문은 항상 열어두는 걸 원칙으로 한다, 아나이스. 대신 옷을 갈아입을 때는 당겨서 일부 닫을 수가 있어. 안은 아무도 못 들여다봐. 물론 감시탑이 있기야 하지만 거긴 아무도 없거든. 야간 간호사 선생님이 근무 중일 때를 빼고는. 그리고 간호사 선생님은 유사시에 중앙 잠금 장치를 이용해 시설 내 문을 전부 잠글 수 있어. 거주자 안전을 위해서!"

아나이스가 옷을 벗던 동작을 멈추자 브렌다가 고개를 젓는다. 이는 속옷까지 다 벗으라는 신호인 셈이다. 그녀는 팬티를 벗어 비닐봉지에 던진다. 그런데, 이 방은 전에 있던 방보다 작다. 복도에서 다시 탕탕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아까 그 남자앤가 보다. 난간을 아주 후려 팰 기세다. 파놉티콘에는 남자애들도 있다. 물론 여자애들과 함께 방을 사용하지  못한다.

"남자애들 방은 대부분 2층에 있어서 문 왼편에 서서 갈아입기만 하면 아래층에서 옷 갈아입는 걸 볼 수 있는 사람은 없어. 서로 신뢰하는 분위기를 만들 수 있도록 방문을 열고 지내는 게 여기 규칙이다. 여기 파놉티콘에 비밀이란 없거든"

 

사람들은 참 이상하다. 다들 감시받길 원하는 것처럼 군다. 누군가가 밤낮 안 가리고 자길 쳐다봐줬으면 하는 것 같다. 온라인에 사진을 올리고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들이 자기를 맘대로 들여다보게 놔두잖아! 심지어 만난 적도 없는 사람들까지 그리고 또 실제보다 뽀샤시하세 광이 나는 척 굴지. 어떤 사람들은 아예 서너 군데 사이트를 돌아다니며 게시물을 올린다.

그뿐인가. 직장에서는 상사가 감시하지, 버스에서는 카메라가 감시하지, 하물며 기차 안에서도, 부츠 매장에서도 오죽하면 감자튀김 가게 앞에서마저 카메라한테 감시당하며 산다. 그리고 집에 가면? 구경할 사람이 누가 있는지 보러, 누가 자길 보고 있는지 확인하려 어김없이 또 온라인 접속을 한다!

감시탑을 한참 동안 쳐다보면 꼭 벌레처럼 보인다. 창에 반사된 해가 황금빛 홍채처럼 작게 빛날 때면 특히 그렇다. 어젯밤처럼 달이 깃들면 창백한 눈동자를 하고서 줄곧 사람을 좇는다. 층층이, 방방이, 모두가 저 창에 반사된다. 심지어 아나이스 자신도 저 안에 깃들어 있다. 그런 자신의 모습을 올려다본다.

지금 그녀는 3층 층계참에 앉아 있다. 가부좌를 틀고 고무공 던져 받기 놀이를 하는 중이다. 공은 곱슬머리 남자애한테서 뺏었다. 브라이언이라는 사이코다. 이 공놀이에서는 공을 떨어뜨리지 않고 받아야 한 번으로 치는데 벌써 170번째다. 공을 떨어뜨리면 돼지가 죽을 거란 뜻. 돼지는 바로 그녀에게 공격을 당했다는 경찰관을 지칭한다. 

돼지가 죽으면 날 열여덟 생일까지 철통보안 중경비시설에 처박힐 거다. 그다음은 감옥이다. 하지만 그때까지 멀쩡히 버틸 리가 없지. 열여섯 살까지도 버티기 힘들걸. 그때쯤엔 벌써 죽었을 테니. 그럼 아나이스, 돼지, 테리사, 그리고 마지막으로 위탁됐던 집에서 만난 제이크 녀석, 목에 줄을 맨 제이크까지 한데 다시 뭉치는 거지. 황천 가기 전 마지막 유치장에서 포커나 치고 앉았을 불쌍한 우리 신세. 공이 어느새 완벽한 리듬을 이루며 척 하고 손에 붙는다. 벌레 눈들이 지켜보고 있다. 저놈의 감시탑, 얼굴을 박살내달라고 아주 애원을 하네.

 

아나이스는 태어나서 일곱 살 때까지 스물세 군데 옮겨 다니다가 입양이 됐고, 열한 살 때 거기서 나와서 지난 4년간 스물일곱 번 옮겨 다녔다.

 

늘 같은 악몽을 꾼다. 상습적으로 마약을 하는 사람들은 실제로 이런 악몽에 자주 시달린다고 한다. 아나이스는 여전히 마약을 끊지 못하고 있다. 경찰관 폭행 사건도 그렇다. 그녀는 그날 어떤 일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당시에도 분명 마약에 취한 상태였을 것이다. 꿈에서 저들은 바늘 끝보다도 작은 점 같은 아나이스를 키운다.

극미한 세균 조각에서부터 그녀를 배양해갖곤 방호복과 마스크로 무장하고 현미경에 날 올려놓고 관찰한다. 바보 같은 노래가 갑자기 떠오른다. 이게 무슨 노래였지? 테리사가 불러주던 동요지. 여자아이들은 설탕과 향신료, 세상의 온갖 달콤한 것들로 빚어 만들었다는, 지랄 같은 노래.

 


"그럼 아나이스는 뭘로 빚어졌다고 봐야 할까요?"
"설탕과 설사지 뭐겠어요"
"아니, 농담이 아니에요. 아나이스를 뭘로 만든 거죠?"
"세균요. 죽은 외계 괴생물체에서 채취한 세균에서라고요. 됐어요? 그럼 이제 당장 꺼져!"

 

소설 속에서 아나이스는 여러 어른들을 만난다. 위탁가정에서 만난 어른들과 경찰관, 그리고 법 집행인들 등등. 대체로 질이 나쁜, 세상의 더러움을 모아놓은 것 같은 어른들의 모습이다. 어쩌면 그녀에게는 그것이 곧 세상이었을 것이다. 그 속에서 그녀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온갖 종류의 반항을 선보인다. 그리고 그녀의 하루하루는 더 나쁜 방향으로만 흘러간다. 그럼에도 그 속에는 희망의 싹 같은 것이 보인다.

 

그녀는 파리에서 온 프랜시스 존스로 신분을 세탁한다. 그녀는 실종자 명단 벽보에 붙은 얼굴이 아니다. 이제 그녀는 누구의 감시도 받지 않는다. 이제 다 끝났다. 더 이상 실험은 없다. 면담도 없고, 파일도, 중경비시설로의 직행도, 사람을 패는 일도, 사람에게 된통 당하는 일도, 감방에 갇히는 일도 없다. 소설은 이렇게 끝을 맺는다.

 

"나는, 오늘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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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욘드 로맨스 - 사랑에 대한 철학의 대답
M. C. 딜런 지음, 도승연 옮김 / Mid(엠아이디) / 2016년 1월
평점 :
절판


이 책은 성애性愛가 무엇인지, 그리고 이에 대한 솔직한 답변을 찾기 위한 다양한 시도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현대인에게 유행하는 낭만적 사랑은 결핍에 기반한 사랑의 한 형태이기에 이를 어떻게 하면 정직이라는 가치를 통해 보다 진실한 사랑으로 이끌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를 이 글에서 주장하고자 한다. - '서문' 중에서

 

 

사랑의 의미를 찾아서

 

책의 저자 M.C. 딜런(1938-2005)은 버클리 대학에서 석사와 예일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으며 빙햄톤 대학에서 강의 특화 석좌교수로서 1968년부터 2005년까지 재직하였다. 전공은 대륙철학과 현상학, 실존철학이며 특히 영미권의 유력한 메를로 퐁티의 주석가로서 평가받는다.

2001년에 출간된 <비욘드 로맨스>는 딜런 교수의 현상학적 통찰과 교수법의 진수가 담긴 저서로 그 내용은 1970년대부터 2005년까지 뉴욕주립 빙

 

<비욘드 로맨스>는 정직한 글이다. 낭만적 사랑으로서의 로맨스를 넘어서 그보다 진실하고 현명한 사랑의 이름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저자의 어조가 그러하다. 하지만 정직함이라는 <비욘드 로맨스>의 미덕을 믿고 관망적으로 글을 대한다면 이것이 쉽사리 소화될 수 없는 밀도와 중량을 가진 것임을 금세 알아차리게 될 것이다. - 도승연, 광운대학교 교양학부 조교수

 

책은 육체적 사랑과 몸에 대한 저자의 솔직한 철학적 대답을 담고 있다. 즉 고대철학부터 포스트모더니즘과 현상학에까지 이르는 서구 사상사思想史를 관통하면서 사랑에 대한 기존의 이상적 모델이었던 낭만적 사랑에 관한 여러 가지 문제점을 지적한다. 낭만적 사랑은 상대를 이상화하며 박제화하기에 변화를 긍정하지 못하고 모든 것이 동결된 죽음으로 완성될 수밖에 없는 사랑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낭만적 사랑은 상대방을 향한 사랑이 아닌 자신의 사랑을 위한 사랑, 즉 도구적 사랑이 되고 만다.

 
저자는 낭만적 사랑이 가진 이러한 폐쇄성을 뛰어넘기 위해 사랑에 대한 일반적인 철학적 담론과는 달리 상대방의 신체와 그 변동에 주목하고 육체적 관계와 성애의 문제에 대해 심층적으로 답변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판단한다. 그는 성애의 문제가 더 이상 재생산의 문제와 결부되지 않는 현대 사회에서 성애에 대한 섣부른 신비화나 악마화를 걷어 내고 그 현실에 담백하게 접근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그런 맥락에서 그는 우리 시대의 사랑에 대한 통속적인 관념들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다양한 논의들을 검토하면서도 정직이라는 가치가 진실한 사랑을 이끌어낼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따라서, 이 책은 그렇게 좋은 사랑의 이름을 찾으려는 그만의 철학적 여정인 셈이다.

 

 

 

 


저자는 플라톤의 이데아론과 아리스토텔레스의 고대 철학적 견해로 출발하여 아퀴나스의 자연법을 경유하고, 근대의 주체 철학과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 현대의 포스트모더니즘에 이르는 장구한 서구의 사상사를 관통하면서 마지막 종착지로서 자신의 전공인 메를로퐁티의 현상학에 기대어 낭만적 사랑의 치명적 문제점들을 지적한다. 또한 인류학과 문학, 정체성을 다루는 다양한 학제를 오가며 낭만적 사랑의 병폐를 비판한다.

 

이처럼 낭만적 사랑의 질병으로 가득한 현대 사회의 위기를 드러냄으로써 그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다름 아닌 사랑의 다른 이름이라고, 그리하여 지금과는 다른 진실한 사랑에 이르는 길을 찾아야 하는 이유와 방법을 고민하게 한다. 물론 철학사와 다양한 학제를 넘나들면서 만나는 이 길이 수많은 지적인 미로와 그 수만큼의 결들을 가진다는 사실은 솔직하게 인정하는 것이 좋겠다.

 

 

사랑이란 무엇일까?

 

이는 바로 철학적 질문이며, 이 물음에 답하려고 수많은 철학자들이 노력해왔다. 하지만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명쾌한 답변이라기보다는 마냥 다양하기만 했다. 그렇다고 시시한 답변이란 말은 아니다. 단지 각자의 답변들이 보편적이지 않았기에 모두의 합의를 도출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프랑스의 소설가 마르키 드 사드(1740~1814년)는 '사디즘'이란 어원의 창시자(?)이다. 그의 소설 <소돔의 120일>은 사후 발견돼 1904년 출간되었다. 프랑스 루이 14세 치하에서 권력자들이 젊은 남녀 노예를 이끌고 120일간 향락을 벌인다는 내용으로 1부만 완성됐고, 2∼4부는 줄거리가 요약된 미완성 작품이다. 

 

이 책은 교황청 금서로 2세기 가까이 묶였다가 1957년 족쇄가 풀렸고 국내에선 1990년, 2000년에 각각 출판됐지만 금서로 지정되며 절판됐다. 2012년 동서문화사가 재출간한 책도 유통이 금지되는 '유해간행물'이 될 위기에 처했다가 독자들의 항의로 '청소년유해매체물'로 분류돼 시중에 풀렸다. 그는 정상적인 사랑의 형태를 넘어선 근친상간, 잔인함, 동무과의 성교, 동성애 등과 같은 사랑의 방식을 소개했다. 그는 바로 '음란함'을 떠올리는 추문의 상징인 셈이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1225~1274년)는 자연이 허락한 사랑의 형태를 신봉하며 사드가 주장하는 형태의 사랑을 격렬히 거부했다. 즉 오직 출산을 증진하고 자손을 돌보는 이성애의 일부일처제만을 믿으며 자신의 철학에 따라 독특한 삶을 영위한 스콜라학의 황금시대를 구축한 인물이다.

 

18세기의 사드와 13세기의 아퀴나스 중 누가 더 행복했을까? 기독교의 논리라면 아퀴나스는 천국에, 사드는 지옥에 있을 것이다. 그런데, 아퀴나스의 사상을 신봉하던 중세시대의 종교 집행관들은 수많은 이교도異敎徒들을 화형火刑에 처했다. 그렇다면 이들은 천국과 지옥 중 어디에 있어야 할까?

 

만약 우리가 사랑이 무엇인지 알았다면 아마 사랑에 대해 묻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사랑이 무엇인지 모른다면, 그것과 우연히 마주친다 해도 어떻게 그것이 사랑인지 알 수 있겠는가.

 

이는 플라톤의 대화록 '메논'에 등장하는 '메논의 역설'이다. 플라톤은 이 문제를 신화적 용어를 통해 풀어나간다. 즉 인간은 죽고 다시 태어나는 생과 생 사이에 진정으로 존재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관한 우주적 지식을 알고 있지만 새로운 세상에 다시 태어나면서 이전의 모든 지식을 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막 사춘기에 접어드는 10~12살의 아이들이 갖고 있는 성에 대한 지식을 살펴보자. 아이들은 이미 무엇을 몰래 해야 하고, 언제 부끄러워해야 마며, 어떤 부분을 감추어야 하는지 충분히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정작 섹스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생물학적으로 아이들의 몸은 아직 오르가즘을 경험하기엔 부족하지만 청년기가 되면 이를 경험하게 된다.

 

성에 대한 사춘기 아이들의 선先지식은 성에 대한 지각은 있지만 그 지각은 어떤 결정적인 지각은 아니라는 뜻이다. 이런 선지식은 육체적 차원과 문화적 차원이라는 두 개의 근원으로부터 기인한다. 아이들은 자신들의 육체와 성에 대해 어느 정도의 지각을 가지고 있다. 또 아이들은 성 정체성에 영향을 끼치는 문화적 차원의 무수한 실천들을 겪는다. 예컨대 배변훈련, 성역할의 강요 등이다. 요약하자면 질문을 유도하는 선지식은 태생적인 부분(육체적)과 길러지는 부분(문화, 환경적) 양자의 상호 작용을 통해 가능하다고 여겨진다.

 

오늘날 가장 유행와는 사랑의 스타일은 낭만적 사랑이다. 이는 젊은 날의 열정을 불타게 하며 이 열정을 뜨겁게 지피기 위해 금지된 것을 추구한다. 그리고 스스로의 모순을 감추고 있는데, 새로운 사랑의 전율이 영원하길 바란다는 점이다. 새로움과 영원함은 공존할 수 없으며 둘 중 하나만 선택해야 한다.

 

로미오와 줄리엣이 서로 사랑한 이유는 그들이 서로에게 금지된 존재였기 때문이다. 금지가 낭만적 사랑의 강도强度를 높이고 열정을 불붙게 한다는 그럴듯한 주장이다. 가질 수 없는 것을 원하는 이유는 그것을 소유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럴듯한 주장이 항상 진리를 보장해주지 못한다. 만약 금지가 욕망의 필수적인 요소라면 그것은 욕망을 제한하는 신중함이 금지 안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금지가 종교적 구조 안에서 이해될 때 이것은 신성한 것과 불경한 것을 구분하는 역사적 축적의 결과물이다. 그리고 이때 신성한 것은 신의 이름으로 승인되었던, 불경한 것이라 금지되었던 모든 것을 지칭한다. 결국 문화 안에서 금지야말로 욕망의 생성에 필수적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사람의 살은 맹목적으로 스스로를 창조하고 동시에 파괴한다. 이렇듯 살은 자신에게 삶과 죽음을 부여한다. 프로이트는 자기보존적 본능과 성적 본능을 합한 삶의 본능을 에로스Eros라 했고, 공격적인 본능들로 구성되는 죽음의 본능을 타나토스Thanatos라 했다. 에로스와 타나토스의 뒤얽힘은 신성하고 불경한 것들의 뒤얽힘과 맞물린다. 그리하여 신성함과 불경함은 신체의 살들로부터 분리되어 언어의 살 속에서 자율적으로 변화한다.

 

철학의 가치는 사물에 이름을 부여하고 그것을 올바르게 생각하는 방식에 있다. 철학에서 설득적이라는 의미는 그 결과와 관계하는 것이므로 나쁜 철학은 안 좋은 행동과 결과, 그리고 불행한 삶을 낳는다. 현재 우리의 문화에 만연한 철학이 결과하는 정당성의 기준에서 명백하게 불행을 낳고 있다면 이제 우리에겐 사랑을 부르는 보다 나은 이름이 필요하다.

 

 

포이에시스적 통찰

 

사랑은 언어에 의해 만들어진 사회적 구성물이다. 포이에시스가 이야기의 창작의 어원이라면 결국 사랑이란 포이에시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이다. 플라톤이 <향연>에서 소개하는 성애性愛는 그리스 미소년들이 일정한 나이에 도달했을 때의 사랑의 합법성을 전제로 하고 있다. 하지만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1926~1984년)는 이와 달리 당시 성인 귀족들과 소년들과의 관계는 사회적으로 '다소 문제가 있는 것'으로 간주되었다고 지적한다.

 

현대의 경우 동성애가 합법적으로 인정된다 할지라도 어린아이와의 성애는 성적 관계 자체를 범죄로 취급한다. 성적 활동에 대한 이해는 시대에 따라 매우 대조적이다. 간통에 대한 현대인의 태도가 호손의 '주홍글씨' 시대보다는 관대해진 게 분명하다. 그럼에도 케네디나 클린턴 같은 유명 인사들의 간통 문제가 사회적 이슈로 등장할 때 사랑에 대한 그들의 호소가 결코 간통의 책임을 정당화시켜주는 방어책이 되지 못했다.

 

기독교적인 사랑의 방식은 에로스에서 아가페로의 전환인데, 이 사랑은 소크라테스 초기에 있었던 '섹슈얼리티의 악마화'를 기반으로 한다. 에로틱한 사랑은 육체적으로 친밀한 사랑의 대상이 신성화된 금지에 의해 형이상학적으로 멀어짐으로써 가능하다. 즉 금기가 창조한 공간에서 에로틱한 사랑은 더 강한 생명력을 갖게 되는 것이다. 

 

아퀴나스는 진실한 사랑은 오직 신성한 결혼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21세기에는 진실한 사랑은 결혼이라는 제한 안에선 불가능하다고 얘기한다. 현대의 에로스는 어떤 대상이 금지되었기 때문에 그 금지된 대상을 사랑한다. 따라서 이러한 에로스는 언제나 불만족스러운 상태일 수밖에 없다.

 

돈 조반니는 1천 명이 넘는 수많은 여성들과 사귀면서 능숙하게 자신의 정체를 숨겼다. 이런 숨김이 유혹의 본질적인 전략이다. 왜냐하면 자기 은폐는 영원한 사랑의 약속으로부터 스스로를 지켜주기 때문이다. 키에르케고르는 돈 조반니가 사랑을 약속했던 그 순간에는 진실했기에 그를 순수한 존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여인들을 꼬시려고 자신까지 속였으므로 진실하다고 볼 수 없을 것이다.

 

포에이시스적 구성물로서의 낭만적 사랑이 사랑받으려는 자기 자신의 욕망과 충돌한다는 점에서 현대의 이 유일한 사랑의 방식은 본질적으로 진실하지 않은 사랑이다. 이제 우리들에게 남은 대안은 우리 자신의 시詩를 쓰는 일뿐이다. 자신의 삶과 육체가 함께 얽혀 있는 자신의 연인에게 삶과 육체를 서로 드러내고 향상시키는 방향으로 말이다. 

 

 

성 도덕

 

낙태, 산아제한, 이혼, 동성애의 가치에 반대하는 입장의 배후에는 자연법이 버티고 있다. 자연법의 관점에선 자연이 인간에게 디자인한 목적, 즉 자손 양육을 거스르고 낙태와 산아제한처럼 생명의 탄생에 반하는 시도는 자연의 의도와 명백하게 대조되므로 거부되어야 할 행위들인 것이다.

 

자연법에 기대어 성 도덕을 이해한다면 자위행위, 구강 및 항문 성교, 동물과의 섹스 등 자손의 번영을 도모하지 않는 모든 성적 행위는 부정되어야만 한다. 나아가 나이가 많은 상대와의 성교나 정액을 낭비하는 성교 역시 비난의 대상이 된다. 따랏 자연법 사상이 금지하는 근친상간, 혼전 괸계, 성적 문란, 매춘, 포르노그래피 등까지 확대된다.

 

행복을 위해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장하는 고전적 미덕인 실천적 지혜신중함과 함께 진정성이나 에로스를 악마적인 특성과 연결시키지 않는 새로운 미덕을 택해야 할 것이다. 태양을 그대로 바라봄녀 눈이 멀기 때문에 일식을 관찰할 때엔 필터를 이용하는 것처럼 생식기관도 마찬가지다. 삽입의 성관계가 몸에서 몸으로 세균을 옮겨 자연을 휘청이게 하는 강력한 통로임을 명심해야 한다.

 

 

섹슈얼리티에 관한 악마화

 

우리 시대는 여전히 섹슈얼리티에 대한 기독교적 악마화를 하나의 진리로 간주한다. 섹스는 인간을 동물, 덧없음, 쇠퇴, 죽음과 연결시켜주는 육체적 현상 중의 하나이다. 섹스는 모든 신성하고 정신적ㅇ이고 순수하고 불변하는 것의 반대에 있는 것이다. 섹스의 가치만을 독립적으로 고려했을 때 이것은 전적으로 부정적이다. 섹스를 정당화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오직 종의 번식을 통해 영원성에 봉사하는 것뿐이다.

 

관용의 정치학은 성애의 가치문제를 혼동하게 하는 또 다른 금지에 의해 제한받는다. 저자는 이 금지를 '섹스의 악마화'라고 부른다. 즉 섹스에 관한 전면적인 부정은 자연법 이론을 떠올리게 하지만 섹스의 악마화와 자연법의 이론은 구별된다. 자연법 이론은 섹스를 부정하는 게 아니라 특정한 성행위는 지지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섹스를 그 자체로 나쁜 것으로 생각하는 상징주의를 버려야 한다. 10대들의 임신에 대해선 도덕적 차원에서 비난하기보다는 차라리 콘돔을 나눠주며 대처하게 만들고, 에이즈가 얼마나 위험한 질병인가에 대한 연구를 통해 문제를 공감해 나가야 한다. 성적인 문제들을 죄의식을 갖고 대응하기보다는 교육이나 조사를 통해서 실용주의적으로 해결해나갈 때에 성 도덕을 고양할 수 있다. 

 

 

낭만적 사랑과 상호주관성

 

낭만적 사랑은 유기체의 한 부분인 연인의 신체, 욕망, 변화를 보지 않고 상대를 이상화하는 무지의 베일 안에서 두근거림을 유지하고 강화하는 사랑이다. 따라서 이제 그 무지의 장막을 걷고, 연인의 신체에 대한 앎을 추구하려는 노력을 통해 지금보다 진실한 사랑의 이름, 아니 보다 나은 삶을 영위해야 한다. 영원한 두근거림이 진실한 사랑의 이상이라면, 그 사랑은 상대의 눈에 비친 아름다움의 절정, 생자필멸生者必滅이라는 이 우주적 진리는 무시한 채 모든 것이 동결된 죽음을 통해서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다.


이처럼 필연적으로 파국을 맞이할 수밖에 없는 로맨스의 특징은 그 자체로는 내적 모순을, 삶의 차원에서는 위험적 요소로서 작동하게 된다. 살아있는 신체가 아니라 이상화된 박제 속의 환상으로 연인을 이해하는 사랑은 사랑의 감정을 사랑하는 것, 그 전율을 사랑하기 위해 상대를 도구화하는 수단적 사랑에 불과하다.


이와 대조적으로 연인의 신체에 대한 앎의 노력과 그것에 기반한 사랑은 시간의 누적을 통해 서로의 역사를 공유하게 하며 하나의 전체인 동반자의 신체적 정체성을 하나의 스타일로서 이해하게 한다. 이처럼 상대에 대한 무지는 곧 사랑의 불가능성이며 진실한 사랑은 연인의 신체에 대한 앎을 통해 강해지는 것이다.


동일한 이유에서 저자는 육체적 관계로서의 사랑, 성애의 문제를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즉 진실한 사랑에 이르기 위한 필수적인 조건으로서 연인의 신체에 대한 지식을 강조하고 이때 신체적 지식을 얻기 위한 중요한 소통의 통로로써 성애에 주목한다. 자신이 느끼는 감각과 느낌을 상대와 함께 나눌 수 있다는 지각의 가능성은 데카르트적 주체의 한계를 훌쩍 뛰어넘으며 상호주관성intersubjectivity으로서의 주체의 이해로 이끈다.

 

이때 상호주관성로서의 주체는 연인을 자신의 쾌락을 산출하기 위한 객체로서 또는 나의 쾌락과 무관한 수단적 대상으로서 여기는 게 아니라 그 상황을 함께 하는 상호 이해적 관계로 이끌 수 있는 주체를 의미한다. 이러한 상호주관적 주체라는 인식적 전환의 계기를 성애에서 발견하는 저자에게 성애는 악이 아니며, 재생산을 위한 불가피한 의무도 아니며, 피부의 마찰을 통해서 얻어지기에 폄하되는 동물적 쾌락도, 더러운 것도 아니다.

 

이를테면 자신의 오른손으로 왼손을 만질 때의 느낌, 혹은 내가 연인의 손을 느낄 때의 그 촉감과 온도를 상기해보자. 이때 무엇이 만지는 주체이고 무엇이 만져지는 객체인가? 신체의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이 경계를 넘나드는 인식의 구체성은 비록 이성적 인식에 비한다면 애매하지만 이것은 인식의 하등함과는 전혀 다른 것이며 오히려 근본적 인식을 지칭하는 또 다른 인식의 형태를 지칭한다. 신체의 현상학에 기반한 이러한 저자의 결론은 프랑스 철학자이자 '몸의 현상학자'인 모리스 메를로 퐁티(1908~1961년)의 사상에 크게 빚지고 있다.


성애의 악마화는 비판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성애를 일반 도덕과 다른 중요성을 가지는 행위로서 특권화시키지도 않는다는 의미에서 저자는 인간이 유한성을 가진 유기체라는 사실을 명심하면서 자연의 법칙 밖에서 인간을 이해하는 어리석은 태도를 피하고, 과학이 인간에 대해 알려준 지식의 내용을 참고하는 현명함을 길러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곧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자연법은 틀렸지만 인간의 신체는 자연의 법칙의 지배를 받는 존재라는 사실을 명심함으로써 보다 유효한 도덕이 가능하다는 의미일 것이다.

 

 

결론


결론적으로 저자는 과학기술의 성과가 알려준 신체에 대한 앎을 인지하면서, 즉 과학이 말하는 일종의 상식, 즉 너무 많은 파트너의 수와 질병의 위험성 등을 무시하는 성행위는 피해야 하지만 동시에 성애의 악마화라는 현대 사회의 문화에 희생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성도덕이라는 특수한 영역이 아니라 일반 도덕의 보편적 관점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러한 주장은 성애를 재생산의 기능으로 해석하는 과거 자연법적 이해나 프로이트적 콤플렉스에 대한 논의를 넘어서 쾌락, 친밀함, 이해와 소통이라는 다양한 스펙트럼 안에 성애를 위치시킴으로써 그것의 구체적 양태를 도출하고자 한다. 


이 책의 특징은 실용성에 있다. 로맨스의 내적 모순을 서구 철학사에서 발견함으로써 신체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강조했다는 측면에서도 그러하다.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점은 삶이라는 인간 실존에 있어서 성애의 함축적 의미와 가치를 철학적으로 담론화하고 그것의 실천과 수행에 대한 접근방식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문화 전반에 있어서, 일상에서도 금기시되고 악마화되었던 성애를 전면에 드러냄으로써 성애가 재생산의 목적이 아니라 쾌락과 소통, 친근함과 삶의 이해라는 철학적 실용성이다. 이 실용성은 성애의 문제가 곧 사랑의 문제이고, 이것이 삶의 문제임을 일러준다는 점에서 삶의 기술적 실용성이기도 하다.


플라토닉 사랑의 본래적 의미가 우리가 흔히 아는 정신적 차원의 교감이 아니라 육체적 사랑을 통해 정신적 차원의 사랑까지 완성되듯, 성애 역시 유기체의 목적에 전적으로 지배되지 않는 삶의 자리에서 신체에 대한 앎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이다. 성애를 통해 주제화된 이러한 신체의 정체성은 곧 연인의 몸짓, 신체적 의도와 특징들, 그리고 그로부터 수반되는 모든 의도적 행위의 누적으로서의 스타일을 의미하며 이것은 삶의 모든 국면에서 드러나는 자기 자신이다.

 

사랑에 있어서 중요한 문제는 다름 아닌 사랑에 빠진 그들이며. 그들의 몸이며, 그 살들에 축적되어 그들이 함께 만들어온 역사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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