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없는 남자들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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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년 만에 내놓은 신작이라는 소릴 듣고 "재작년에 내가 본 건 뭔데?" 라고 생각하며 사들었다. 읽고 보니 9년 만에 내놓은 단편집이라는 얘기였다. 의도하지 않았는데 괜찮게 됐어. 나는 단편을 좋아하거든.


하루키의 장편은 대개 두꺼웠었다는 기억이다. 그래서 지루하면 더 참을 수 없었다. 단편집은 하나가 지루해도 조금만 참으면 또 다른 하나가 나온다. 핵노잼의 지옥에서도 기대의 꽃은 피는 것이다.


이 책에는 전부 일곱 편의 단편이 실린다. 당연하게도 모두 단편이지만 한국에서 통용되는 200자 원고지 800장 내외의, 천편일률적인 1만 6천자 짜리 소설은 아니다. 일본 출판계에도 이런 규칙이 있는진 모르겠지만 하루키가 그런 걸 지킬 이유는 없겠지. 문학상 공모전에 원고를 내진 않을테니까 ㅋㅋㅋ. 어쨌든 그래서 어떤 건 좀 길고 어떤 건 그거 보단 좀 짧고 그렇다. 바꿔말하면, 어떤 건 뭐 이런 얘기를 이렇게 길게 써 하는 게 있고 어떤 건 야 여기서 이렇게 끝내선 안돼 더 이야기를 들려줘 라는 게 있다는 말이다.


작품간 편차라는 건 있을 수 밖에 없고 하루키도 인간인 이상 그 한계를 보여주는 건 당연하지만, 그렇다하더라도 <여자 없는 남자들>을 읽고 나면 이 사람이 진정 어마어마한 이야기의 대가구나 하는 생각에는 대부분 공감하게 될 것이다.


특히 나는 익숙한 평범의 세계를 걷다 문득 불가해의 샛길로 빠져드는 하루키 소설 특유의 황당함이 진짜 좋다. 이를테면 <1Q84>,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해변의 카프카>처럼 눈하나 깜짝하지 않고 초자연의 세계로 도약하는 것들 말이다. 이럴 때 이 소설들은 무시무시한 흡입력으로 나를 끌어당긴다. 이러쿵저러쿵해도 하루키의 매력은 바로 이거다. 강렬한 이야기의 흡입력. 상징이니 문학성이니를 떠나서 그냥 책에서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매력.


이 단편집을 읽으며 나는 오랫동안 멈춰 있어 녹이 슨 내 대뇌의 한 영역이 다시 돌아가기 시작한 것을 느꼈다. 한 동안 솟아나지 않던 새 소설에 대한 구성이 폭발하듯 뿜어져 나온 것이다. 하루키의 소설에서 모티브를 얻은 게 아니다. 평범한 얼굴의 그의 소설이 갑자기 낯선 이면을 휙 드러내듯 그냥 그렇게 뜩 나타난 것이다. 아무런 연고도 인과도 필연도 없이 생성된 생각의 무리들. 나는 이 생각의 무리를 소중히 안아들고 책장을 덮었다.


이 책에서 단 한 편의 소설을 꼽으라면 <기노>를 들고 싶다. 위에서 충분히 얘기한, 내가 좋아한다는 그런 류의 소설이다.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하나를 더 꼽자면 <드라이브 마이 카>다. 얼핏 지루한 이야기가 50페이지 넘게 이어지지만 그 지루함의 껍질 사이로 솟아나온 이면의 가시들과 그 가시들을 한 칼에 쳐내 그대로 드라이브 쓰루하는 능력은, 이 이야기의 드라이버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를 일깨워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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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오노 나나미의 국가와 역사
시오노 나나미 지음, 오화정 옮김 / 혼미디어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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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오노 나나미라는 이름만 듣고 덜썩 구매한 게 잘못이었다. 수 천년의 역사를 양 손에 쥐고 주물러온 여자다. '국가와 역사'에 대한 심사숙고, 특유의 쿨한 문체로 써내려가는 혜안을 기대했는데, 그냥 여기저기 널려 있던 글을 짜집기한 책이다. 시오노 나나미의 글 사이사이 등장하는 편역자의 참견은 사족도 그런 사족이 없어. 만드느라 애쓴 사람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시오노 나나미에게 최고의 남자는 마키아 벨리였고 마키아 벨리에게 최고의 남자는 체사레 보르자였다. 이 세 사람을 하나로 꿰뚫는 문장은 이거다.


"뭔가를 지키고 싶으면, 때로 그것의 근본정신에 어긋나는 일도 감히 하는 용기를 갖지 않으면 안된다."


예컨대 민주주의를 지키려는 자들이 이를 위해 민주적 방식만 고집하다간 결국 비민주적인 사람들에게 둘러 쌓여 몰락한다는 것이다. 정의와 이상은 현실에 비하면 한 줌에 불과하다. 그걸로 원하는 바를 거머쥘 수 없고 뜻하는 바를 이루지 못한다면 그 정신이 아무리 숭고한들 쓰레기에 불과한 것이다. 극단적 실용주의와 철저한 현실 인식. 자신의 주장을 내뱉음에 있어 한치의 주저도 없는 자신감. 시오노 나나미에게 마음을 뺏긴 사람은 대개 여기에 꽂힌거라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여자를 적으로 만나고 보니 그 쿨함이 섬뜩함으로 다가온다. 작가가 아닌 일본인, 특히 그 일본인이 자국의 외교에 대한 견해를 피력할 때 한국인인 나의 가슴은 증오와 경멸로 날카롭게 벼려진다. 이럴 때 이 할머니는 영락없는 극우파 싸이코패스의 모습을 한다.


"유럽은 무려 천 년 동안 서로 전쟁을 했습니다. 바로 그런 것에 대한 반성으로 '최소한 전쟁은 하지 말자'며 EU를 만든 겁니다. 그런데 아시아는 섬 이름이니 바다 이름, 신사 참배 같은 체면 문제로 옥신각신하고 있으니 안타깝습니다."


유럽이 EU로 거듭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그런 것에 대한 반성"이 전범국의 철저한 반성과 화해의 노력으로 이뤄졌기 때문이다. 총리의 신사 참배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단지 개인의 의사 표현에 불과한가? 한 나라를 대표하는 자가 전범의 위패 앞에서 고개를 속인다. 그 순간 총리가 떠올리는 생각은 무엇인가? 전범국으로서의 반성인가? 아니면 전쟁 패배에 대한 반성인가? 독도를 다케시마라고 부르면 독도는 다케시마지 더 이상 독도가 아니다. 독도가 아니라면 그 섬이 한국의 것일 수 없다. 이름은 단순한 겉치레가 아니다. 이름은 권력을 반영한다. 소유권이 있는 자만이 명명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이름을 바꿔 부르면 소유를 뿌리서부터 흔들 수 있다.


시오노 나나미는 기본적으로 일본을 전범국으로 간주하는 것 같지도 않고 타인의 고통에 매우 둔감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그 전쟁의 잘못은 자신들이 저지른 비인륜적 행위가 아니라 그 전쟁에서 패배한 거라고 여기고 있다. 이러한 태도로는 일본의 외교가 얻을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다. 실제 일본은 아베 총리 취임 이후 전세계적 왕따가 되어 외교의 장에서 자취를 감췄지 않은가?


남의 나라 남의 역사를 얘기할 땐 쿨하고 대범한 실용주의를 펼치지만 내 나라 얘기가 나오자 평범한 노인네의 뻔한 '곤조'가 드러난다. 나는 그녀에게 이런 말을 해주고 싶다.


곤조를 지키고 싶으면, 때로 그것의 근본 태도에 어긋나는 일도 감히 하는 용기를 갖지 않으면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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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머리칼 2015-07-12 2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멋진 감상평이십니다..저는 시오노 나나미를 군국주의자로 생각합니다..

한깨짱 2015-07-16 13:07   좋아요 0 | URL
시오노 나나미는 힘에 대한 의지가 어마어마한 사람 같습니다. 패권주의자에 군국주의자 같은 느낌이 있죠.
 
행복만을 보았다
그레구아르 들라쿠르 지음, 이선민 옮김 / 문학테라피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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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임없이 내면으로 침잠해 들어가는 게 현대 프랑스 문학의 특징이고, 또 그래서 많은 비판을 받기도 한다는데, <행복만을 보았다>는 그 전형을 보여준다. 아무래도 요즘 사람이 쓴 거니까. 


1, 2, 3부로 나뉜 구성 중 1부는 오로지 화자의 내면 고백만으로 진행된다. 말투는 무심하지만 그 속에 미지의 우울을 숨겨둔다. 미지의 것에 독자는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하고 감지된 위험은 옅은 긴장을 두른 채 앞으로 나아간다. 그 솜씨가 보통이 아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141p까지 걷다 보면 독자의 감각도 역치에 다다라 더 이상 위협을 감지하지 못한다. 위험이 일상이 되면 더 이상 위험이 아니니까. 그 순간 이 작가가 무슨 짓을 저지르는지 직접 눈으로 확인했으면 한다. 치명적 일격을 가하기 위해 맹수는 인내하고 또 인내한다.


"영혼의 근간을 흔드는 작품"이라거나 "삶의 진정한 가치를 깨닫게 하는 소설"인지는 잘 모르겠고 평범해 보이는 삶 속으로 깊이 헤엄쳐 들어간 공허와 우울을 땅 위로 건져 올렸다는 점에서 감탄할만한 소설이다. 이제 그 우울과 공허는 내리쬐는 태양 아래서 말라 비틀어질 것이다.


삶을 파괴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정말 우연히 찾아오나? 재앙을 당하는 사람은 그저 운이 없었던 것 뿐일까? 이것들이 언제 어떻게 나타나 우리를 집어 삼키는지 알고 있는가? 가끔 뉴스를 보면 지나칠 정도로 성실했던 사람들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미친짓을 벌이는 경우를 종종 목격한다. 보통의 샐러리맨, 성실했던 아버지가 초등학교 앞에서 상습적으로 성기를 꺼내 가정을 파멸시킨다. 두 눈 가득 사랑을 담아 갓 태어난 아이를 바라보던 엄마가 아이를 목 졸라 죽이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단순한 일탈, 혹은 특정 사람만이 갖고 있는 특수한 정신 결함으로 치부하기에 그것의 겉모습은 몸서리쳐질 정도로 평범하다. 


당신은 <블레이드 러너>의 릭 데커드가 된 것 같은 느낌이 들 수도 있다. 평범과 똑 닮았지만 실상은 평범의 가면을 쓴 발작을 찾아내야 하는. 당신이 정말 릭 데커드라고 생각한다면, 한 가지만 더 생각해줬으면 한다. 안드로이드를 체포하려는 당신 조차 안드로이드일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모두 똑같은 발작을 지니고 산다. 그것은 평범의 얼굴을 한 우울과 허무 안에서 무럭무럭 자라난다. 평생 한 번도 그 모습을 보이지 않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결정적인 순간에 결정적인 방식으로 나타나는 사람이 있을 뿐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특정한 사람들만이 가진 특수한 정신 결함이 아니다. 이것은 인간이라는 종 자체에 내재된 원초적 결함이다. 그레구아르 들라쿠르가 힘겹게 낚아 올린 거대한 물고기를 유심히 쳐다보라. 그리고 당신 마음 속 깊숙히 헤엄쳐 들어가 그것과 똑 닮은 물고기를 작살로 찍어 물 위로 올라오라. 그것이 우리를 파괴하기 전에, 우리가 먼저 그것을 파괴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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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카 소년 탐정단 오사카 소년 탐정단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김난주 옮김 / 재인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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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로만 듣던 히가시노 게이고를 직접 눈으로 확인했다. 과연 현대 일본을 대표하는 추리 소설의 거장, 출간하는 족족 드라마, 영화로 옮겨가는 역벙급 전이력이 이해가 된다, 라고 말하면 좋겠지만 글쎄... 지금 나는 출판사와 작가, 그의 팬들에게 몰매를 맞을 각오로 이 글을 쓴다.


<오사카 소년 탐정단>은 진심으로 별로야.


일일 드라마에서나 박수를 쳐줄 법한 깊이 없는 캐릭터들이 이야기를 활보한다. 마치 종이 인형과도 같아 책을 든 독자의 입김만으로도 모조리 쓸려가버릴 것 같다. 문제는 깊이의 부재가 그대로 진부함과 결합한다는 점.


캐릭터는 '정의(definition)'나 '선언'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소년들은 악동이었다"라는 문장은 소년들을 결코 악동으로 만들지 못하는 것이다. 얼핏 작가는 자기 이야기의 신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빛이 있으라"하면 빛이 생기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그래서 상당한 분량의 심리 묘사와 행동, 사건에 대한 반응 등을 통해 총체적으로 인간을 구성해야 한다. 그런게 없으면 캐릭터는 얇은 책장과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납작해진다.


여자 주인공 시노부는 전형적인 안티 요조숙녀다. 청순가련형의 순종적 여성의 반대급부로 태어난 이 캐릭터는 뛰어난 신체능력과 결코 남자에게 의존하지 않는 의지를 지닌다. 성격은 99.9% 왈가닥이지만 의외의 순간에 의외의 여성미를 발휘해 완전체로 거듭난다. 대개는 자신을 돋보이게 만드는 무능력한 남자와 함께 하는데 이 책에서 그 역할을 맡은 건 신도 형사다. 그에 대한 인물평은 할 가치도 없다.


시노부는 또 하나의 전형을 지닌다. 바로 '평범한 사람'이라는 점. '평범함'에 대한 지나친 경탄과 찬양이 언제부터 시작됐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현대의 대중은 확실히 '평범함이 위대하다'는 생각에 깊이 조응한다. 빈부 격차가 극심해지고 사회가 정확히 둘로 나뉘자 가지지 못한 자들 사이에서 강한 반발심이 생긴다. "너희들이 그렇게 잘났어? 내가 보기에 너희들은 그냥 운이 좋았을 뿐이야. 진짜 능력이 있는 건 우리들이지."


사건 해결의 주인공은 언제나 경찰이 아니라 평범한 초등학교 교사 시노부다. 강력 범죄를 해결했다는 것 자체가 이미 평범하지 않다는 걸 증명함에도 불구하고 대중은 오로지 보고 싶은 것만 본다. '나같은 사람이 사견을 해결했다.' 우리의 가슴 속에 차오르는 자부심은 이 심각한 오해에서 출발한다.


평범함을 예찬하려면 시노부의 직업을 이용했어야 한다. 초등학교 선생을 몇 년 하다보면 누구나 사람에 대한 직관력이 생긴다. 용의자의 눈만 봐도 어떤 거짓말을 하는지 알 수 있지. 뭐 이런 식의 전개가 됐어야 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런걸로 히가시노 게이고를 비판해서는 안 된다. 그는 정말 아무런 생각없이 이 캐릭터들을 찍어냈기 때문이다. 그에겐 고민의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저 이야기를 전달할 캐릭터가 필요했고 마트에서 기성품 몇 개를 사왔을 뿐이다.


언젠가 히가시노 게이고의 인터뷰를 읽은 적이 있는데 그는 대단한 글쓰기 광이라고 한다. 머리 속에 수 없이 떠오르는 이야기를 글로 옮기고 싶어 사람도 만나지 않고 파티도 안 가고 인터뷰도 사절한다. 서점의 신간 코너엔 언제나 그의 책이 있는데, 이 정도 생산 속도를 유지하려면 위에서 언급한 '자잘한' 고민 따위, 정말 바람처럼 날려버려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른바 대인배의 풍모로.


히가시노 게이고는 자기 소설을 읽어볼까? 자기가 쓴 조잡한 문장에 철렁 가슴이 내려 앉아 본 적이 있을까? 이런 글로도 돈을 벌 수 있다는 사실이 나는 무척 놀랍다. 그가 왜 베스트셀러 작가인지, 나는 도무지 모르겠다. 


어쩌면 그걸 모르기 때문에 내가 요 모양 요 꼴인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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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의 자화상
전성태 지음 / 창비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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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S24에서 받은 다섯 권의 경품 중 가장 훌륭한 책이었다. 글 줄 하나하나에서 땀 냄새가 난다. 성의와 성심이 가득하다. 진정 소설이라 부를만한 작품 열 한 편이 차곡차곡 시간을 깔고 누워 있다. 그럼에도 나는 슬펐다. 그 다섯 권의 책 중 이 책이 가장 팔리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순수 문학은 잔잔하고 지루한 장르다. 스펙타클이나 환상은 없다. 문학은 현실을 반영하는 거울이기 때문이다. 드라마나 영화 속을 헤집는 오만가지 사건과는 달리 우리의 삶은 얼마나 무료하고 지루한가. 지긋지긋한 현실을 벗어나기 위해 다시 지긋지긋한 현실을 집어드는 사람은 없다. 그런건 카프카의 소설에나 나올 법한 일이다.


그러나 문학을 열어 본 사람은 어렴풋이 느낄 것이다. 책이 들려주는 세상 이야기가 웬지 낯설고 생소하고 신비롭다는 것을. 어딘가에서 이런 이야기를 들은 것 같다. "일상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깊은 미스테리다".


우리는 세상 속에 살지만 정작 주의를 기울여 세상을 읽어본 적은 거의 없다. 인간은 세상을 덩어리로 인지한다. 우리에게 '세상'이란 것은 진정 추상적이다. 그 큰 덩어리를 이루는 세세한 알갱이를 만지며 살지는 않는 것이다. 여기가 바로 문학의 역할이 빛나는 지점이다. 문학은 우리를 추상적인 덩어리에서 끄집어내 세세한 알갱이 앞으로 데려간다. 평생을 알갱이와 부대꼈지만 한 번도 그 존재를 눈치채 본 적 없는 것들. 그래서 나에게 문학은 가장 진부하지만 동시에 가장 새롭고, 또 낯선 것이다.


작가 전성태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신화 속에서 살아온 것 같다. 그는 바다와 산을 보름씩 오가며 사는 산갈치라든가, 백년에 한 번 하얗게 핀 대나무 꽃을 봉황이 날아와 먹는 다는 둥, 마을 어른들과 어머니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가슴 속에 보물처럼 쌓아오다 끝내 소설가가 되 버렸다. 물론 이 남자의 소설은 그가 어릴 적 들어왔던 이야기와는 완전히 다르다. 환상의 세계를 그려 놓고 현실로 가는 다리 하나를 흐릿하게 지어놓는 스타일도 아니고 현실과 환상을 뒤죽박죽 섞어 한바탕 난동을 부리는 스타일도 아니다. 그저 평범한 인간들의 평범한 일상이 잔잔한 서정을 두르고 담담하게 나아간다. 그런데 나는 이 열 한 편의 소설을 읽고 난 뒤, 문학의 무게는 그 뻔한 일상을 묵묵히 밀고나갈 때 여지없이 더 묵직해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환상을 찾지 마라. 기적은 일상에 있다. 반짝 반짝 빛나는 삶의 진실도, 그 고통을 어루만질 치료약도 바로 삶 속에 있다.


어릴적 작가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던 어머니는 이제 치매에 걸려 어린 시절로 돌아갔다. 최근 것부터 차근차근 지워지는 기억이 그녀를 자꾸만 어린 시절로 데려간다. 그래서 이제는 작가가 어머니에게 이야기를 들려줄 차례가 됐다. 오락가락하는 정신을 끌어안고 침대에 누운 어머니에게 산갈치니 봉황이 뜯어 먹는 대나무 꽃 얘기를 하면 반짝 눈동자가 빛난다고 한다. 이야기를 먹고 자란 아이가 소설가가 됐듯 그의 어머니도 환상을 마시고 현실로 돌아왔으면 한다. 불가능한 일이라느 걸 알지만, 기적은 언제나 삶 속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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