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르노빌의 목소리 - 미래의 연대기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지음, 김은혜 옮김 / 새잎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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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거대한 불기둥이 떨어졌을 때 인류는 처음으로 원자력의 위대함을 목격했다. 사람들은 공포에 전율했고 온 몸을 벌벌 떨었으며 그 압도적 무력이 행사한 황폐 위에 앉아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자 사람들의 공포는 점차 매료로 변해갔다. 힘이란 그런 것이다. 그것을 쥐는 순간 두 팔아 잘려나갈 수도 있다는 걸 알지만 마음은 이미 초원을 달리는 야생 준마를 바라본다. 땅위를 내리 찍는 힘찬 다리, 바람에 휘날리는 갈퀴. 저 말을 잡아 길들일 수만 있다면.


그토록 많은 원자력 발전소가 일본에 있다는 건 그래서 아이러니가 아니다. 일본인만큼 원자력의 위력을 실감한 민족은 없다. 그들은 야생 준마의 갈퀴를 틀어 쥐었다. 체르노빌이 폭발했을 때도 그들은 갈퀴를 쥔 손을 놓지 않았다.


저자는 몇 해 전 일본 훗카이도에 있는 토마리 원전을 방문한 적이 있다. 그녀는 그곳의 직원들에게 체르노빌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들은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연민을 담은 미소를 지었다. 그러면서 "우리가 일하는 원전에서는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일"(p. 6)이라고 했다. "원전 건물 위로 비행기가 떨어져도 끄떡없고, 규모 8.0의 강진도 견뎌낼 수 있다"(p.6)고 했다. 2011년 3월 11일 일본 역사상 처음으로 규모 9.0의 지진이 발생했다. 단숨에 태평양을 건너온 해일이 후쿠시마를 덮쳤다. 해일은 건물과 땅과 사람과 동물 나무와 꽃을 가리지 않고 평등하게 집어 삼켰다. 발전소가 정전 됐다. 원자로를 식힐 수가 없었다. 4개의 원전이 열에 삼켜졌다. 국제 원자력 사고 등급은 150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고 아직까지도 그 죽음의 칼을 놓지 않은 체르노빌을 7등급으로 분류한다. 2011년 4월 후쿠시마는 7등급을 받았다. 내 생각에 후쿠시마가 7등급을 받은 건 그 사고 규모가 체르노빌 급이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국제 원자력 사고 등급은 7등급이 끝이었다. 전문가들은 그것보다 더한 피해를 상상할 수 없었을 것이다. 어쩌면 그 보다 더한 피해는 인류의 종말을 의미하므로 분류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을 수도 있다.


두 번의 값비싼 수업을 받았는데도 인류는 여전히 이 준마의 갈퀴를 놓지 않는다. 체르노빌의 주인공이었던 러시아는 세계 7대양에 떠다니는 원전 수십개를 띄울 계획을 세우고 있다. 이 해상 원전은 인도네시아와 베트남에 팔릴 것이다. 체르노빌 사고로 가장 큰 피해를 입었던 벨라루스는 100년 전 7.0의 지진이 발생했던 지역에 원전을 짓고 있다. 한국의 노후화 된 원자력 발전소는 시도 때도 없이 가동을 멈춘다. 건설에 씌여진 자재들은 대부분 납품 비리로 인한 불량품이다.


<체르노빌의 목소리>에는 체르노빌을 경험한 수 많은 사람들의 고백이 담겨 있다. 슬픔은 그 강도가 너무 압도적일 경우 때때로 희극적으로 보일 때가 있다. 체르노빌이 그렇다. 해체작업자들은 정부의 철저한 기만 아래 보호 장구도 없이 불타는 원자로 지붕에 올랐다. 정부는 공황을 조성하는 것이 두려워 주민들에게 보호 장구와 해독 약품을 지급하지 않았다. 주민들은 여전히 자기 집에 앉아 오염된 우유와 감자를 먹고 강에 나가 헤엄쳤다. 그들은 인근 마을의 소개가(재난을 맞아 주민과 시설을 대피시키는 일) 시작됐다는 얘기를 들으면 군인들에게 뇌물을 주며 자기 마을은 빼달라고 부탁했다. 그들은 방사능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것은 냄새도 색깔도 모양도 없었기 때문이다.


한 번은 초원 위에 유령이 서 있는 걸 본 적이 있다. 가까이 가보니 그건 비닐을 뒤집어 쓴 할머니와 젖소였다. 할머니는 젖소와 자신을 방사능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비닐을 썼다고 말했다. 젖소는 싱싱하게 돋아 있는 풀을 우걱우걱 씹어 먹었다. 방사능 구름이 하늘을 덮었을 때의 일이다.


2011년 후쿠시마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높은 방사선 수치 때문에 원격 조종 로봇마저 작동을 멈춘 그 곳에서 유일하게 움직일 수 있었던 건 단백질로 무장한 인공지능 로봇, 인간이었다. 그들은 영웅처럼 달려가 원자로에 물을 뿌리고 잔해를 수거했다. 트럭 운전사들은 일당이 80만 원이라는 말을 듣고 앞다투어 후쿠시마로 달려갔다. 그들은 로봇처럼 바로 죽지 않았다. 차라리 그랬다면 행복했을 텐데... 사람들은 온 몸에서 피를 쏟아낸 다음에야 죽을 수 있었다.


일본 정부는 후쿠시마 산 농산물에는 아무런 해가 없다며 판매 촉진 캠페인을 벌였다. 한국은 일본의 바다에서 잡힌 물고기를 수입했다. 사람들의 두려움은 오래가지 않았다. 방사능은 냄새도 색깔도 모양도 없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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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댓 이즈
제임스 설터 지음, 김영준 옮김 / 마음산책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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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댓 이즈>에는 인생을 하나의 쓸쓸한 농담으로 만들어내는 힘이 있다. 주인공 보먼의 친구 에딘스는 사랑했던 아내를 기차 사고로 잃는다. 그는 미국 남부에서 태어난 진짜 남부 남자로 언제나 여자를 지켜줘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살았다. 그러나 그는 아내를 홀로 기차 여행에 보냈고 그녀를 죽게했다. 에딘스는 죄책감에 시달린다. 몇 년이 지나 에딘스는 아이린을 만난다. 결혼한다. 에딘스의 집 안엔 전처가 쓰던 물건이 가득 든 서랍이 있었다. 결국 에딘스는 아이린의 성화에 못 이겨 유품을 내다 버렸다. 그리고 둘이 함께 새 집으로 이사간다. 새 집은 아이린이 새로 들인 가구로 채워진다. 에딘스는 오래만에 집을 찾은 보먼과 함께 바에 들른다. 거기서 그는 이런 얘기를 한다.


"아내와 같이 바에 앉아 있는 상상을 했어. 이런 바 말고 좀 더 근사한 데. 여기서 동쪽으로 더 가면 있는 그런 바에서. 그냥 앉아서 이야기하는 거야. 특별한 거 말고 그냥 이 얘기 저 얘기. 방금 들어온 손님에 대해서, 아니면 나중에 우리가 어디로 갈지. 일상에서 스치는 일들 있잖아. 아내는 예쁜 드레스로 멋지게 차려입고. 아, 사람들 옷차림도 얘깃거리겠네. 난 옷을 좀 잘 입고 다니고 싶더라. 어쨌든 같이 얘기하면서 한 시간 정도 재밌게 보내는 거야. 그러다 아내가 화장실에 가면, 그사이 바텐더가 아내 잔이 빈 걸 보고 나한테 묻겠지. 아내분이 한 잔 더 하실 거냐고. 그럼 난 그렇다고 대답하고. 내 아내는 자리로 돌아와도 잔이 새로 채워진 걸 모를 거야. 그냥 들고 한 모금 마시겠지. 그동안 무슨 일 있었는지도 모르고."(p.330)


인간은 평생 온갖 속임수로 세월을 이기려하지만 언제나 세월이 인간을 이긴다. 인생의 정점에 섰을 때 그것은 가능해 보이지만 쌀쌀한 바람이 등을 스치는 계절이 오면 어렴풋이 불길함을 느끼게 된다. 좀 더 추워져 눈이 내리면 두 손을 들어 옷깃을 여미려 한다. 그러나 이미 두 손은 꽁꽁 얼어 붙어 움직이지 않는다. 


모든 것은 흘러간다. 사라진다. 쓸쓸해진다.


이 책을 읽으면 딱 이런 기분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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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언 형제 - 부조화와 난센스 마음산책 영화감독 인터뷰집
조엘 코언·이선 코언 지음, 윌리엄 로드니 앨런 엮음, 오세인 옮김 / 마음산책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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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을 좀 아는 사람들은 알겠지만 난 코맥 매카시에 환장한 사람이고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 미친놈이다. 코언 형제는 이 소설을 영화화한 감독이다.


원작보다 훌륭한 영화는 없다. 사실이다. 그런데 이 사실이 영화 역사상 딱 두 번 틀렸던 적이 있다. 한 번은 <빌리 엘리엇>의 스티븐 달드리가 마이클 커닝햄의 동명 소설 <The Hours>를 연출했을 때고 한 번은 저 코언 형제가 <No Country for Old Men>을 만들었을 때다. 적어도 내 경험상 지구상에서 이 형제보다 훌륭한 스릴러를 만드는 감독은 존재하지 않는다.


<블러드 심플>이라는 저예산 영화로(지인들을 통해 제작비를 확보했다) 커리어를 시작한 형제는 황금 종려상을 거머쥐고 박스 오피스 성적으로 전투력을 인정 받은 후에도 여전히 저예산 영화를 만든다. 저예산 이라면 지루한 에술 영화거나 이해할 수 없는 컬트 무비라는 편견을 갖는 사람이라면 오해마시라. 코언 형제는 재미를 모르는 사람들이 간섭하는 게 두려워 저예산을 택한다. 형제는 적은 돈으로 흥미진진한 영화를 만드는 데 탁월한 능력을 갖춘 재주꾼이다. 비록 모든 시도가 성공하는 건 아니지만.


형제는 영화로 대단한 예술을 하려는 미학적 야심이 없다. 주어지는 상은 흥행에 좋은 영향을 끼치거나 다음 영화의 투자금을 끌어오는데 도움을 줄 때 말고는 아무런 의미가 있다. 이들은 그저 이야기가 하고 싶을 뿐이고 영화가 눈에 들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형제의 영화에 끊임없이 예술이라는 딱지를 붙이려는 이유는 뭔가 할 얘기를 숨긴듯이 보이는 모호한 이미지들이 숏들을 채우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 이미지들이 숨긴 것처럼 보이는 다양한 상징을 읽으려 한다. 그러나 형제의 말에 따르면 이미지 속엔 어떠한 의미도 숨겨져 있지 않다. 이미지는 그저 이미지일 뿐이다. 형제는 그 상황 그 순간에 그 이미지의 등장이 적합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 장면을 찍는다. 이미지는 순수하게 이야기의 일부라는 얘기다(<No Country for Old Men>은 예외다. 이 영화는 이미 문학적 상징이 풍부한 원작을 각색하지 않고 거의 그대로 영화화 했기 때문이다).


물론 형제의 블랙 코미디를 종종 이해하지 못할 수는 있다. 사실 그들은 좀 꼬인 사람들이고 때문에 그들의 유머 또한 스트레이트하지 않다. 형제는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개그 콘서트>류의 유머를 구사하지 않는다. 이 말은 당신이 무표정으로 장면을 넘긴 순간 "아니 이게 안 웃겨?"하며 돌아보는 재수 없는 친구의 얼굴을 볼 수도 있다는 의미다.


이 책은 상당히 재미있다. 모음집 특성상 동일 내용이 되풀이 되는 건 있지만 많지 않다. 형제는 헐리웃에서 인터뷰하기 어려운 감독으로 악명이 높고 자기 영화에 대해 얘기하는 걸 끔찍이 싫어한다고 알려져 있지만 글을 읽어보면 꼭 그렇지도 않다. 할 얘긴 다 해 준다. 알아야 할 건 충분히 담겨 있다. 아쉬운 건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 대한 내용이 너무 적다는 것이다. 유독 이 영화를 찍고 난 뒤엔 인터뷰 혐오증이 극심해져 인터뷰를 하지 않은 건지 단순히 편집자의 의도인지는 알 수 없다. 코언 식으로 하자면 아마도, "닥치고 영화나 보라"는 얘기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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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 자무시 - 인디영화의 대명사, 짐 자무시 인터뷰집 마음산책 영화감독 인터뷰집
루드비그 헤르츠베리 엮음, 오세인 옮김 / 마음산책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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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행 야간 열차를 탄 나는 첫 차도 다니기 전인 이른 새벽 부산역에 도착했다. 차갑게 식은 우동 한 그릇을 먹으며 이제 막 깨어나기 시작한 도시를 구경한다. 어둠 속에서 설렘과 기대가 부풀었다. 잠시 후 지하철을 타고 해운대로 향했다. 그 곳에서 부산 영화제 ID 카드를 받고 보고 싶던 영화를 잔뜩 예매했다. 남포동과 해운대를 오가는, 하루 4편의 영화를 보기 위한 미친 일정.


재미있을 것 같은 영화보다는 봐야만 할 것 같은 영화를 봤다. 그 때는 학생이었으니까. 웬지 예술 냄새가 나는 영화들만 골랐다. 그래서 졸았다. 시작한지 10분도 되지 않아. 그대로 영원히 잠들어 버릴 것 같은 순간 나를 깨운 건 스크린 가득 클로즈업 된 빌 머레이의 얼굴이었다. 순식간에 잠이 달아났다. <Broken Flowers>, 짐 자무시와의 운명적 만남이었다.


이후 나는 <천국보다 낯선>을 봤고 <미스테리 트레인>을 봤고 <다운 바이 로>를 <데드맨>을 <고스트 독>을 그리고 <커피와 담배>를 봤다. 몇몇은 끔찍할 정도로 지루했고 몇몇은 기가막힐 정도로 환상적이었다. 눈 깜짝할 새에 나는 졸업을 했고 영화를 관뒀고 회사에 취직했다. 더 이상 짐 자무쉬를 찾지 않았다. 그게 벌써 10년 전이다. 시간이라는, 이 부지런한 악마에 그저 감탄할 뿐이다.


기억은 시간이 지날수록 흐릿해지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나이가 들수록 옛 일을 떠올리게 된다. 구석에 쳐박혀 먼지 덮힌 기억을 자꾸만 꺼내본다. 그럴수록 기억은 더 생생해진다. 나는 어느 큰 도서관에서 이 책을 발견했고 거의 동시에 꺼내들었다. 이틀 뒤 내 책상 위에는 이 책이 배송되어 있었다.


<잠 자무시> 인터뷰집은 그의 대다수 영화와 마찬가지로 지루하다. 여러 인터뷰를 모아 놓은 것이기 때문에 같은 얘기를 되풀이 할 때가 많다. 확실히 그의 영광은 데뷔작인 <천국보다 낯선>에 몰려 있다. 사람들은 거의 신화가 된 이 작품에 대해서만 궁금해한다. 이 줄거리도, 유명한 배우도 없는 흑백 영화가 왜 자기를 그토록 매료시켰는지 놀라워 한다. 사람들은 그 이유를 짐 자무시의 입에서 찾으려 한다. 그러나 대답은 신통치 않다. 대개의 위대한 예술은 창작자의 이해와 역량을 한참이나 초월하는 불가해한 존재기 때문이다.


부질없는 질문과 힘겨운 대답이 이어진다. 자기 영화를 팔아야 하는 입장이 아니었다면 짐 자무시는 결코 인터뷰 같은 걸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를 위한 유일한 위로는 어서 빨리 책장을 덮고 스크린 앞에 앉아 그저 영화를 보는 것이다. 때문에 의도치 않게 인터뷰집을 효과적으로 읽는 법을 배웠다. 절대적으로 질문에 집중하라는 것. 훌륭한 질문에 바보 같은 대답은 나올 수 있지만 바보 같은 질문에 훌륭한 대답은 나올 수 없다. 그러므로 질문을 읽은 뒤 그게 형편없거나 당신의 흥미를 끌지 못한다면 그 답변 전체를 건너 뛰어도 무방하다.


유명한 예술가가 되면 모두 이런 곤혹을 치러야 한다. 수 없이 되풀이 되는 똑같은 질문들. 새 영화를 찍기에도 바빴을 이 사교성 없는 남자가 행한 그 끔찍한 앵무새 연기에, 슬픔과 연민을 담아, 진지한 경의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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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석에 반대한다 이후 오퍼스 7
수잔 손택 지음, 이민아 옮김 / 이후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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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이 예술을 현실의 모방으로 정의한 이래 예술은 끊임없이 자기의 존재 의의를 증명해야만 하는 비참한 쳇바퀴를 굴려왔다. 스승의 말이라면 사사건건 토를 달았던 아리스토텔레스가 역사상 최초로 예술을 옹호하는 발언을 했고 아주 체계적인 글까지 남겼지만 사실 그건 플라톤에 대한 반박이 아니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예술이 모방이라는 플라톤의 견해에 동의했다. 단지 그것이 유용하다고 말했을 뿐이다.


예술이 객관적 미의 구현이 아니라 예술가 자신의 주관적 표현이라는 관점을 널리 받아들인 오늘날에도 그 정당성에 대한 물음은 끈질기게 살아 남았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한 것이냐? 그것은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주고 우리 삶을 어떻게 변화시키느냐? 오래된 편견 안에서 사람들은 예술이 다른 무언가를 가리킨다고 믿는다. 예술은 무언가의 상징이다! 이런 관점에 따르면 예술은 그저 통로에 지나지 않는다. 진리와 본질은 예술 작품이 가리키는 어떤 곳 즉 예술 작품의 너머에 존재한다.


만약에 내가 망치를 가리키며 이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사람들은 망치라고 말할 것이다. 거기엔 일말의 주저도 의심도 없다. 그런데 내가 앤디 워홀의 브릴로 박스를 가리키면?


현대인들은 비평을 통해 예술을 받아들인다. 비평은 예술을 해석해 그것이 왜 예술인지를 밝혀낸다. 여기서 그들이 집중하는 건 내용이다. 그래서 피카소의 <게르니카>는 독재자 프랑코와 나치의 잔혹성을 폭로하는 정치적 메시지가 된다. 하지만 이게 과연 유일한 길일까? 우리는 <게르니카>를 그저 고통, 비애, 슬픔, 좌절 같은 감정 그 자체로 받아들일 수는 없는 걸까?


예술은 감각의 총체다. 이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우리는 왜 그것을 감각하지 않고 이해하려 드는가? 예술을 받아들이는 우리의 태도엔 확실히 문제가 있다. 수잔 손탁이 <해석에 반대한다>에서 주장하는 요지도 바로 이거다. 예술을 다른 무엇이 아닌 그 자체로 받아들이라는 것.


지금 중요한 것은 감성을 회복하는 것이다. 우리는 더 잘 보고, 더 잘 듣고, 더 잘 느끼는 법을 배워야 한다. 우리의 임무는 예술작품에서 내용을 최대한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작품 속에 있는 것 이상의 내용을 더 이상 짜내지 않는 것이다. 우리의 임무는 내용을 쳐내서 조금이라도 실체를 보는 것이다. 오늘날, 예술에 대해 뭔가를 말하려 한다면 우리는 예술작품이 우리에게 훨씬 더 실감나도록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한다. 비평의 기능은 예술작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예술작품이 어떻게 예술작품이 됐는지, 더 나아가서는 예술작품은 예술작품일 뿐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p34~35)


현대 예술이 그토록 이해하기 어려운 모습으로 나타나는 이유도 따지고 보면 해석으로부터 탈주하고픈 욕망이었을 것이다. 더 이상의 해석은 거부한다. 그리하여 예술은 침묵을 하나의 주요한 양식으로 받아들였다. 그런데 맙소사, 현대 예술은 아무 것도 말하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더 많은 해석을 쏟아내지 않는가! 뿐만아니라 현대 예술은 비평과 모종의 뒷거래를 벌이기도 한다. 까놓고 말해 캔버스 전체를 어지럽게 채운 페인트가 비평없이 예술이 될 수 있었겠는가?


우리의 문화는 무절제와 과잉 생산에 기초한 문화다. 그 결과, 우리는 감각적 경험의 예리함을 서서히 잃어가고 있는 것이다(p.34).


1933년애 태어난 손탁의 시대에도 이미 감수성의 종말이 문제시 되고 있었다. 이후로 우리가 그것을 회복할 시간을 가진 적 있을까? 우리는 21세기에 산다. 감성은 이미 멸종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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