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 열린책들 세계문학 46
존 르 카레 지음, 김석희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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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르 카레는 1931년 영국 도싯 주의 항구 도시 풀에서 태어났다. 베른 대학과 옥스퍼드에서 문학과 어학을 수학한 뒤 1956년 졸업, 이튼 칼리지에서 2년 간 독일어를 가르쳤다. 그의 아버지는 유명한 직업 사기꾼이었는데 대다수의 평범한 사기꾼들과는 달리 자기 아이를 내깔려두거나 하지 않았다. 무려 300억을 빚지고 파산한 빈털터리였음에도 아버지는 아들을 명문 학교에 보냈다. 아들을 끔찍이 사랑해서가 아니다. 졸업 후 그가 가질 인맥과 배경을 사기에 활용하기 위해서였다.


본명 데이비드 존 무어 콘웰. 이 남자의 학창 시절이 어땠을지 상상이 되는가? 그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사람들, 자신과 관계를 맺으려는 사람들에게 자기 정체에 깊숙히 뿌리내린 아버지의 야망을 숨겨야했다. 동시에 그는 이 야망을 조용히 뽑아 뿌리를 말리는, 그러니까 겉으로는 아버지의 충실한 심복인양 하지만 사실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사람들, 자신과 관계를 맺으려는 사람들을 진실되게 대하려는 사나이이가 되야만 했다.


사나이는 1961년 부터 영국 외무부에 근무하면서 소설을 썼는데 훗날 이 외무부가 영국의 정보부 였음이 밝혀진다. 사람들은 그제서야 왜 그의 소설이 이토록 리얼했는지를 깨닫는다. 그러나 그는 스파이였기 때문에 스파이 소설을 잘 썼던 게 아니다. 그 보다 더 강한 이유가 존 르 카레의 삶에 씌여 있다. 앞서 언급했던 학창 시절을 돌아보라. 그는 아주 어릴 적 부터 자신의 정체를 숨겨야했던 스파이, 그 자체였던 것이다.


소설을 쓰기 시작한 이래로 사내는 인세만을 입금 받는 통장을 하나 만들었다.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를 쓴 뒤 그는 은행 직원에게 전화를 걸어 통장의 잔고가 얼마 이상이 되면 연락을 해달라고 부탁한다. 1963년 존 르 카레는 자신이 부탁했던 은행 직원으로부터 전화를 받는다. 그는 전화를 끊고 책상에서 일어나 외무부 건물을 나간다. 잠시 서서 주변을 둘러보는 일, 그러니까 감상에 젖어 촉촉해진 눈으로 자신의 사무실과 붉은 벽돌이 멋드러진 건물의 외벽과 쇠창살이 튀어나온 담벼락을 쓰다듬는 일 따위는 하지 않는다. 스파이는 감상에 젖지 않기 때문에? 그 이유는 존 르 카레가 자신의 소설에서 서커스(영국 정보부)를 어떻게 묘사하는 지 보면 알 수 있다. 첩보의 세계에서 정당과 정의는 과정이 아니라 결과에만 허용된다. 이데올로기 싸움은 인간을 위한 투쟁이 아니다. 권력 깊숙히 파고든 고위 관료들에겐 그저 비지니스 모델에 지나지 않는다.


2005년 <팅커 테일러 솔져 스파이>를 펴낸 열린책들은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를 펴낸 열린책들과 같은 출판사다. 2005년에 <팅커 테일러 솔져 스파이>를 읽은 사람이라면, 두 출판사가 같은 출판사라는 사실을 미루어 짐작해, 그 때 그 소설을 읽으며 머리 속에 옮은 질병, 즉 난독증이 <죽은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에게도 옮겨 붙었을 거라는 생각을 하기 쉽다. 그러나 그런 걱정은 기우에 지나지 않는다. 어쩐 일인지 2005년의 열린책들은 2009년의(세계 문학판 1쇄를 찍은 해) 열린책들과 사뭇 다르다. 강산이 변하기엔 한참 모자란 시간이었음에도 이 회사는 놀라운 변화를 보여준다.


왜 자꾸 딴 얘기를 하냐고 화를 낼 수도 있다. 우리는 분명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에 대해 얘기하려고 이 자리에 모인 건데 말이다. 그런데 이런 얘기는 이 책을 읽을까 말까, 살까 말까, 빌려볼까 돌려볼까 고민을 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된다고 믿기에 행해지는 얘기들이다. 그런 이유라면, 나는 이 책에 대해 내가 느낀 것과는 정반대로 얘기하고 싶다. 


이 책은 정말 쓰레기다. 백 번, 천 번을 읽어도 재미라고는 눈꼽만큼도 찾을 수 없다. 냉전 시대의 첩보는 낡고 허름하다. 너덜너덜한 누더기들이 문장을 넘어 책 밖으로 쏟아져 내린다. 할 수만 있다면 별 0개를 주고 싶지만 인터페이스가 허락하지 않는다. 만약 당신에게 8,820원이 있고 그 돈으로 엄청나게 쓸모 없는 짓을 하고 싶은데 그렇다고 그 돈으로 '똥'을 사고 싶지는 않다면 이 책을 사서 읽어라. 나는 그 누구에게도 이 책을 추천하고 싶지 않다. 정말로, 정말로,


나 혼자만 읽고 싶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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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타의 매 열린책들 세계문학 63
대실 해밋 지음, 고정아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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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가 있지만 그걸 안다고 해서 이 소설이 재미 없지는 않을 겁니다.


대실 해밋의 <몰타의 매>를 드디어 읽었다. 좋아하는 열린책들 세계 문학 전집 양장본으로. 열린책들에 감사. 양장본에 감사.


<몰타의 매>는 나를 매료시킬 수 있는 것들로 가득한 소설이다. 우선 하드보일드 탐정 소설. 하드보일드라면 그 대가라 불리는 헤밍웨이를 제외하고는 무조건 OK인 나다. 나에게 하드보일드는 일종의 신앙과 같다. 나 외에 다른 문학을 섬기지 말라? 말씀은 믿음이 부족한 사람에게나 필요한 법이다.


하드보일드하면서 탐정소설이다. 이 말은 나에게 문학과 장르 소설의 경계에 걸쳐 있다는 말로 들린다. 경계는 얼마나 매혹적인가! 그 곳엔 두 가지 성질이 매끄럽게 섞여 있다. 문장의 아름다움 혹은 주제의 진정성 거기에 이야기의 재미가 붙는다. 순수 문학이 화려하게 피는 꽃이라면 경계에 선 문학은 그 꽃이 진 자리에 열매를 맺는 문학이다. 터져나온 과육이 뺨으로 턱으로 가슴으로 줄줄 흐른다. 지저분하고 천박해 보이지만, 그 맛을 모르고 논하지 마오.


<몰타의 매>는 아가사 크리스티와 그녀의 추종자들이 뱉어내는 복잡한 트릭이 없다. 있는대로 플롯을 꼰 뒤 온갖 잡다한, 있을 법하지 않은, 부자연스러운 트릭으로 장식하는 소설이 아니다. 범죄는 리얼하고 묵직하다. 미국 최대의 탐정 사무소에서 실제 탐정으로 일해 본 경력이 도움이 됐을 것이다.


<몰타의 매>는 탐정 소설이지 추리 소설이 아니다. 탐정은 행동하지만 추리는 생각을 한다. 탐정은 움직이지만 추리는 빙빙 맴돌 뿐이다. 탐정은 추리와는 달리 밀실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사방팔방 돌아다니고 여기저기 쑤셔 쥐새끼를 밖으로 끄집어 낸다. 그리고는 도망치는 쥐새끼를 온 힘을 다해 쫓는다. 이 소설엔 생각대신 행동이 있다. 지루할 새가 없다.


샘 스페이드. 유쾌한 금발의 악마 같은 남자. 그는 하드보일드를 갑옷으로 무장한 남자다. 그는 선하다고도 악하다고도 볼 수 없다. 그를 설명하는 단어는 오로지 프로페셔널, 이거 하나 뿐이다. 직업 탐정의 세계에선 이거 말고는 아무 것도 필요 없다.


유명한 탐정은 어느 순간 '범인은 바로 너야'하는 쇼맨쉽을 발휘해야 하지만 직업 탐정은 범인을 본 순간 주먹을 날려 턱을 부숴버린다. 그럴 수 없는 상황이라면? 마주 앉아 협상을 벌인다. 정의의 사도로 보이고 싶은 생각은 눈꼽만큼도 없다. 취미로 바이올린을 켜고 독서를 하는 우아한 인간이 아니다. 우선 살아야 한다. 살아서 연명해야 한다. 휴식은 담배 한 개비와 위스키로 충분하다.


샘 스페이드는 하드보일드 최대의 적인 '사랑' 앞에서도 자기 삶의 태도를 굽히지 않는다. 브리지드 오쇼네시는 온갖 거짓말로 온갖 사건을 일으킨 뒤 샘 스페이드를 엮어 소동에서 벗어나려 하지만 결국 그에게 모든 음모가 탄로나고 만다. 여자는 샘 스페이드와 나눴던 사랑을 무기로 그를 설득하려 한다.


"하지만... 하지만 샘, 어떻게 그런 일을! 우리가 서로에게 어떤 의미였는데 그러면 안 돼요."

"왜 안 되는 거죠?"

"그럼 당신은 나를 가지고 논 거예요? 나를 좋아하는 척한 거예요? (중략) 나를... 나를... 사랑하지 않았어요? 사랑하지 않아요?"

"아마 사랑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죠?" (중략)

"나는 서스비가 아니에요. 재코비도 아니고요. 당신 때문에 얼간이가 되지는 않을 겁니다."(p.276)


샘 스페이드. 진정한 직업 탐정. 그는 단호히 사랑을 거부했기에, 비로소 나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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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선생이다
황현산 지음 / 난다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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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황현산은 1945년 생이다. 옛날 사람이다. 오래된 사람의 글쓰기는 이렇다.


넓디 넓은 자갈밭에 앉아 구슬을 찾듯 단어를 고른다. 골라진 단어들을 이리저리 꿰어 문장을 만든다. 만들어진 문장은 창밖에 걸린다. 하루내 말린 문장을 늦은 밤 꺼내와 색을 칠한다. 그리고는 다시 창 밖에 걸어 말린다. 쎄 했던 색깔이 차분히 가라앉아 은은한 빛을 띨 때까지, 바람과 새벽의 냄새가 배 시간과 밤의 소리가 고일 때까지, 칠하고 말리기를 반복한다. 그러기를 며칠, 까만 하늘을 밀고 들어오는 여명과 함께 하나의 글이 탄생한다.


요새는 아무도 이렇게 글을 쓰지 않는다. 아무도 이런 글을 읽지 않기 때문이다. 문화적으로는 영락없이 꼰대인 나는 이런 사람들이 다 죽고 사라졌을 때 우리에게 무엇이 남을지를 고민 한다. 천박한 가벼움이 사막의 모래처럼 끊임없이 날아온다. 이런 문장들이 풀과 나무가 되어 막아주지 않으면 세상은 오래지 않아 폐허가 될 것이다. 나는 평생 모래를 씹고 삼키며 살 수는 없다. 끔찍한 일이다. 그런데 나는 결국 그런 세상을 맞아야 한다. 


곧 사라질지언정 차라리 옛날 사람으로 태어났으면 좋을 뻔 했다. 그들은 전쟁을 겪었고 힘든 삶을 살았지만 땀 흘려 오래 만드는 일을 존중했고 자유를 찾아 싸웠으며 돈을 섬기지 않았다. 그들은 천박하지 않았다. 염치가 있었다. 도리를 알았다.


언젠가 죽음은 이 옛날 사람들을 모조리 찾아가 기어이 그 이마에 칼을 찔러 넣을 것이다. 그러고나면 나는 세상을 떠나 아주 먼 곳으로 갈 것이다. 그 곳에서 옛 기억을 간직한 소수의 사람들이 모여 찬 바람을 맞으며 궁핍하게 살아갈 것이다. 시간이 흐르고 흘러 먼 미래에 인류는 이렇게 떠난 사람들을 우연히 찾게 될 수도 있다. 그들은 우리에게 '원시 인류'라는 이름을 붙일 것이다. 그들은 오래된 인류의 유산을 찾아 기뻐하지만 우리의 말과 글을 이해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 때가 되면 문학은 고고학이 될 것이다. 문학은 새까만 어둠을 겹겹이 둘러 입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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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묻어버린 것들
앨런 에스킨스 지음, 강동혁 옮김 / 들녘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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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내 책장은 장르 소설의 무덤이다. 한 번 들어가면 영원히 빛을 보지 못한다. 그건 내 취향탓도 있지만, 솔직히 책 잘못도 있다. 한 번 읽는 것도 끔찍할 만큼 엉망인 책들이 많다. 문장에 신경쓰는 작가는 거의 없다. 인기를 끄는 이유는 줄거리, 반전, 트릭 때문인데 아무래도 불감증 환자인지 나는 이런 것들을 통해서는 심장을 추동하는 흥미진진을 느끼지 못한다. 책에서 가장 좋았던 부분은 주인공이 용의자를 찾아갔다 핀치에 몰린 대목이었다. 나는 두 손을 모아 간절히 주인공이 뒈져버리길 기도했다. 지긋지긋한 장르의 공식이 깨지길 바라면서.


<우리가 묻어버린 것들>은 얼핏 <HQ 사건의 진실>과 비슷한 플롯을 지니지만 HQ보다 어설프다. 나은 점은, 길이가 짧다. 한 200페이지 정도. 대단한 미덕이다. 또 하나, 그래도 작가가 새로운 표현을 써 넣으려 애를 쓴다. '나는 머리를 가득채우고 소용돌이치다가는 저녁 어둠에 부딪쳐 조그마한 물결로 산산이 부서지는 불길한 기분에 잔뜻 짓눌려 있었다' 라거나 '록우드가 저지른 죄의 얼룩이 칼의 이름을 더럽히고 있다' 라거나 '나무의 위엄을 띤 진짜 불이 생겼다' 같은 것들. 때로는 새로운 문장을 쓰겠다는 집착이 과도해 괴물이 탄생할 때도 있지만 중요한 건 노력 아닌가? 게다가 데뷔작이라고 하니까.


장르 소설을 쓴다는 건 특정 공식에 여러 변수들을 채워 넣는 작업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야기를 전개하기 위해 필요한 캐릭터들을 만들어내고 이 캐릭터들이 관계할 수 있는 사건을 만들고 막힌 흐름을 한 방에 뚫어줄 소품을 복선으로 흩어 놓는다. 좋은 소설이라면 이 모든 게 자연스럽게 존재해 그 존재의 목적을 눈치채지 못해야 한다.


존재의 목적을 눈치채지 못한다?


그렇다. 실세계의 캐릭터(우리들)는 어떤 목적을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다. 사르트르 식으로 말하자면 대자적 존재. 우리 인간은 어떠한 경우라도, 결코, 무언가의 수단으로 전락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소설 속의 존재는 다르다. 그들은 사건을 일으키기 위해서,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기 위해서, 또는 범인이 되기 위해서 존재한다. 만일 셜록 홈즈가 코난 도일의 소설에서 범죄를 해결하기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상상해보라. 홈즈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 그는 당장 소설의 세계에서 쫓겨날 것이다.


정리하면, 좋은 소설은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존재가 자신의 목적을 감쪽같이 숨긴 채 음흉하게 잠복해 있는 소설이다. 장르 소설은 이런 일을 잘 하지 못한다. 특히 현실 세계를 배경으로 할 때 그 조악함은 앞니에 낀 고추가루 처럼 끔찍하다. 그런데도 이런 소설이 살아남는 이유는 독자들이 이런 조악함을 눈치채지 못하거나, 장르 소설은 원래 그런 거라고 간주하거나, 부분의 매력에 빠져 전체적인 완성도는 무시하기 때문일 것이다. 마치 달고 맵기만 한 짬뽕을 냠냠 맛있게 먹듯이. 난 이런 류의 '영화'는 참 재밌게 보는 편인데 유감스럽게도 책에서만큼은 셋 중 무엇도 용납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이런 소설을 읽을 때마다 항상 괴롭다. 


나는 또 한 번 내 책장에 무덤을 파야했다. 그걸 보고 <우리가 묻어버린 것들>이 묻는다. 당신이 묻을 게 뭐냐고. 나는 답한다. 


바로 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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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르노빌의 목소리 - 미래의 연대기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지음, 김은혜 옮김 / 새잎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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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거대한 불기둥이 떨어졌을 때 인류는 처음으로 원자력의 위대함을 목격했다. 사람들은 공포에 전율했고 온 몸을 벌벌 떨었으며 그 압도적 무력이 행사한 황폐 위에 앉아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자 사람들의 공포는 점차 매료로 변해갔다. 힘이란 그런 것이다. 그것을 쥐는 순간 두 팔아 잘려나갈 수도 있다는 걸 알지만 마음은 이미 초원을 달리는 야생 준마를 바라본다. 땅위를 내리 찍는 힘찬 다리, 바람에 휘날리는 갈퀴. 저 말을 잡아 길들일 수만 있다면.


그토록 많은 원자력 발전소가 일본에 있다는 건 그래서 아이러니가 아니다. 일본인만큼 원자력의 위력을 실감한 민족은 없다. 그들은 야생 준마의 갈퀴를 틀어 쥐었다. 체르노빌이 폭발했을 때도 그들은 갈퀴를 쥔 손을 놓지 않았다.


저자는 몇 해 전 일본 훗카이도에 있는 토마리 원전을 방문한 적이 있다. 그녀는 그곳의 직원들에게 체르노빌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들은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연민을 담은 미소를 지었다. 그러면서 "우리가 일하는 원전에서는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일"(p. 6)이라고 했다. "원전 건물 위로 비행기가 떨어져도 끄떡없고, 규모 8.0의 강진도 견뎌낼 수 있다"(p.6)고 했다. 2011년 3월 11일 일본 역사상 처음으로 규모 9.0의 지진이 발생했다. 단숨에 태평양을 건너온 해일이 후쿠시마를 덮쳤다. 해일은 건물과 땅과 사람과 동물 나무와 꽃을 가리지 않고 평등하게 집어 삼켰다. 발전소가 정전 됐다. 원자로를 식힐 수가 없었다. 4개의 원전이 열에 삼켜졌다. 국제 원자력 사고 등급은 150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고 아직까지도 그 죽음의 칼을 놓지 않은 체르노빌을 7등급으로 분류한다. 2011년 4월 후쿠시마는 7등급을 받았다. 내 생각에 후쿠시마가 7등급을 받은 건 그 사고 규모가 체르노빌 급이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국제 원자력 사고 등급은 7등급이 끝이었다. 전문가들은 그것보다 더한 피해를 상상할 수 없었을 것이다. 어쩌면 그 보다 더한 피해는 인류의 종말을 의미하므로 분류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을 수도 있다.


두 번의 값비싼 수업을 받았는데도 인류는 여전히 이 준마의 갈퀴를 놓지 않는다. 체르노빌의 주인공이었던 러시아는 세계 7대양에 떠다니는 원전 수십개를 띄울 계획을 세우고 있다. 이 해상 원전은 인도네시아와 베트남에 팔릴 것이다. 체르노빌 사고로 가장 큰 피해를 입었던 벨라루스는 100년 전 7.0의 지진이 발생했던 지역에 원전을 짓고 있다. 한국의 노후화 된 원자력 발전소는 시도 때도 없이 가동을 멈춘다. 건설에 씌여진 자재들은 대부분 납품 비리로 인한 불량품이다.


<체르노빌의 목소리>에는 체르노빌을 경험한 수 많은 사람들의 고백이 담겨 있다. 슬픔은 그 강도가 너무 압도적일 경우 때때로 희극적으로 보일 때가 있다. 체르노빌이 그렇다. 해체작업자들은 정부의 철저한 기만 아래 보호 장구도 없이 불타는 원자로 지붕에 올랐다. 정부는 공황을 조성하는 것이 두려워 주민들에게 보호 장구와 해독 약품을 지급하지 않았다. 주민들은 여전히 자기 집에 앉아 오염된 우유와 감자를 먹고 강에 나가 헤엄쳤다. 그들은 인근 마을의 소개가(재난을 맞아 주민과 시설을 대피시키는 일) 시작됐다는 얘기를 들으면 군인들에게 뇌물을 주며 자기 마을은 빼달라고 부탁했다. 그들은 방사능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것은 냄새도 색깔도 모양도 없었기 때문이다.


한 번은 초원 위에 유령이 서 있는 걸 본 적이 있다. 가까이 가보니 그건 비닐을 뒤집어 쓴 할머니와 젖소였다. 할머니는 젖소와 자신을 방사능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비닐을 썼다고 말했다. 젖소는 싱싱하게 돋아 있는 풀을 우걱우걱 씹어 먹었다. 방사능 구름이 하늘을 덮었을 때의 일이다.


2011년 후쿠시마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높은 방사선 수치 때문에 원격 조종 로봇마저 작동을 멈춘 그 곳에서 유일하게 움직일 수 있었던 건 단백질로 무장한 인공지능 로봇, 인간이었다. 그들은 영웅처럼 달려가 원자로에 물을 뿌리고 잔해를 수거했다. 트럭 운전사들은 일당이 80만 원이라는 말을 듣고 앞다투어 후쿠시마로 달려갔다. 그들은 로봇처럼 바로 죽지 않았다. 차라리 그랬다면 행복했을 텐데... 사람들은 온 몸에서 피를 쏟아낸 다음에야 죽을 수 있었다.


일본 정부는 후쿠시마 산 농산물에는 아무런 해가 없다며 판매 촉진 캠페인을 벌였다. 한국은 일본의 바다에서 잡힌 물고기를 수입했다. 사람들의 두려움은 오래가지 않았다. 방사능은 냄새도 색깔도 모양도 없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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