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주의 감정수업 - 스피노자와 함께 배우는 인간의 48가지 얼굴
강신주 지음 / 민음사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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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주의 감정수업>은 '스피노자와 함께 배우는 인간의 48가지 얼굴'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나는 내 글에 '4가지 얼굴로 말하는 감상'이라는 부제를 달고 싶다.



지루함


이 책은 48권의 소설을 통해 48개의 감정을 설명한다. 내용을 알지도 못하는 소설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떠들 수는 없기에 이같은 형식은 필연적으로 줄거리 소개를 동반한다. 마치 게임을 하기 전에 들어야 하는 지루한 규칙들처럼. 뒤이어 쏟아져 나오는 구태의연한 의미 설명은 '지루함'이야말로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이라는 사실을 확인해준다. 더 큰 문제는 이 형식이 48가지 감정을 설명하는 내내 단 한 번도 바뀌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놀라운 대담함인가!


동일한 형식 속에서 되풀이 되는 48개의 이야기는 사실 1개의 이야기에 불과하다. 1개의 이야기를 48가지로 말하는 걸 '다채롭다'고 한다면 48가지의 이야기를 1개로 말하는 걸 '지루하다'고 한다. 주간지의 칼럼에나 어울리는 형식으로 518p의 책을 만들었다는 건 이 책을 손에 든 순간 느껴지는 묵직함이 감동의 무게가 아니라 지루함의 무게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이 책에서 뭔가 배울 수 있다면 오직 한 가지, 형식이 내용을 낳는다는 창작 원칙일 뿐이리라.



욕망


48권의 소설 중 25권이 자사의(민음사) 소설이라는 사실을 통해 이 출판 괴물의 의도가 무엇인지 쉽게 알 수 있다. 이 괴물은 소비자를 어떻게 유혹 할지도 잘 안다. 제목에는 '수업'이라는 글자를 달고 수업을 할만한 '멘토'를 모셔온다. 각종 상담과 TV출연으로 가장 핫한 선생님을. 도무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감조차 잡지 못하는 현대인들에게 '멘토'와 '수업'만큼 구미가 당기는 아이템은 없으니까. 


<강신주의 감정수업>은 자사의 책을 더 많이 팔고 싶은 출판사의 욕망과 쌓아온 입지를 경제적 가치와 대중적 명예로 환산하고자 한 저자의 욕망이 결합한 결과다. 욕망이 가장 추해지는 순간이 언제일까? 그것은 이 욕망이 노골적으로 드러날 때이다. 


물론 저작권 문제를 좀 더 쉽게 처리하기 위해 자사의 소설을 중심으로 기획했을 수도 있다. 또 다르게 생각해보면 무려 23권이나 다른 회사 책을 넣었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그렇게 될 수 밖에 없었네요, 흐흐'하는 음흉한 웃음소리가 들리는 이유가 뭘까?



과대평가


이 책은 각 챕터의 끝에 '철학자의 어드바이스'라는 코너를 달아 또 한 번 지루한 설명을 감행한다. 자기 삶을 스스로 꾸릴 수 있는 사람, 자기 앞에 놓인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려는 사람들에게 시시콜콜한 충고는 오히려 모욕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시도를 감행한 이유는 이 책이 스스로 생각할 줄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씌여졌기 때문일 것이다. 


이 책에 가장 잘 어울리는 부제는 '스피노자와 함께 배우는 인간의 48가지 얼굴'이 아니라 '스스로 생각할 줄 모르는 사람들을 위한 안내서'다. 16쇄라는 판매부수는 '스스로 생각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 얼마나 위대한 일을 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강력한 증거다.



연민


반골 기질이 다분한 철학자였던 강신주가 이토록 상업적인 기획과 영합한 이유가 무엇일까? 스스로 생각할 줄 모르는 사람들에 대한 연민 때문이었을까? 도무지 어떻게 해야 할지 실마리 조차 잡지 못하는 사람들에겐 극약 처방도 필요한 법이니까. 그러나 저자 자신이 말하듯 연민은 결코 사랑이 될 수 없다. 그것은


타자의 불행을 감지했을 때 출현하는 감정이기에, 연민의 밑바닥에는 다행히 자기는 그런 불행을 겪지 않았다는 것, 나아가 불행한 타자를 도울 수 있는 자신에 대한 자부심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p. 130~131)


나도 이 철학자의 연민이 좋은 결과를 낳았으면 좋겠다. 연민에 힘입어 계몽된 독자들이 마침내 스스로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 되는 것. 그러나 이 희망은 인류가 출현한 이래 단 한 번도, 현실이 된 적이 없다. 



독자의 어드바이스


강신주의 다음 책이 철학이었으면 좋겠다. 이 모든 영합이 심사숙고라면 진저리치는 요즘 사람들을 철학으로 이끌기 위한 미끼였다는 것을 증명하듯이. 


성경에는 '칼로 흥한자 칼로 망한다'는 말이 나온다. 나는 그에게 이런 말을 해주고 싶다. '상담으로 흥한자 상담으로 망한다'.


부디 그의 명예가 영원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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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4-05-18 18: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읽은 강신주 리뷰 중 가장 속시원한 리뷰군요...

한깨짱 2014-05-19 12:47   좋아요 0 | URL
생각이 같은 독자를 만나다는 건 정말 흥분되는 일이군요! 감사합니다!

양손잡이 2014-05-19 09: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강신주 팬이지만 이 책은 오점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문학작품의 주제와는 완전히 동떨어진 내용들...

한깨짱 2014-05-19 12:47   좋아요 0 | URL
제 생각에도 이 책은 오점이 확실합니다. 기획이 너무 뻔해요. 급하게 쓴 것 같기도 하고. 정성을 안 들인 것 같기도 해요. 정말 별로 입니다.

바라리 2017-08-02 08: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강신주의 책보다 더 내용이 비천한 아무런 근거도 없는 무조건 씹고 보자식 리뷰

한깨짱 2017-08-02 13:08   좋아요 0 | URL
무조건 씹자라니... 바라리님이 제 글에 반응한 바로 그 근거에 의해 저도 강신주님의 글에 반응한 것 입니다. 제 생각에 아무런 근거가 없다면 바라리님의 댓글도 마찬가지겠지요.
 
진중권의 미학 오디세이 3 (20주년 기념판) - 피라네시와 함께 탐험하는 아름다움의 세계 미학 오디세이 20주년 기념판 3
진중권 지음 / 휴머니스트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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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초에 그림이 있었다. 이것은 미가 아니었다. 차가운 동굴 벽에 뜨겁게 살아나는 들소를 보며 태초의 인류는 경이로움을 느꼈다. 그들에게 그림은 주술이자 종교였다.




알타미라 동굴벽화



그리고 미가 탄생한다. 제욱시스와 파라시오스의 전설적 그림 경연을 논할 필요도 없이 이 시대의 미는 명확했다. 무엇이 더 실제와 똑같은가? 그들은 예술가이기 전에 엔지니어이자 과학자였다. 무언가를 정확하게 묘사하기 위해선 영감보다 세밀한 관찰력과 집중력이 필요했을 것이다. 




<창을 든 사람>. 로마 시대 모작. 원작은 폴리클레이토스. 기원전 440년경



아리스토 텔레스는 예술의 본질을 미메시스(모방)라 말하며 이 그리스 예술을 옹호했다. 그렇다면 모방은 무엇을 주는가? 재인식의 기쁨이다. 실제와 똑같은 그림과 조각을 보면서 '아, 이것이 이토록 아름다운 것이었구나'를 새삼 깨닫는 것. 하지만 예술의 본질이 고작 이런 것일까? 모방은 아무리 잘해도 모방일 뿐, 절대 실제를 뛰어넘을 수 없지 않은가. 예술의 본질이 현실의 모방인 이상 예술은 현실보다 저급할 수 밖에 없다. 저급한 것을 지속해야 할 이유가 어디 있을까? 그리하여 여기 진리가 탄생한다. 



출처: http://www.orthodoxartsjournal.org/medieval-art-from-catalonia/



중세 시대의 화가들은 결코 보이는대로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그들은 '아는대로' 그렸다. 신의 위대함을 알기에 예수는 항상 가운데, 가장 크게 그려야 한다. 원근같은 눈속임은 중요하지 않다. 진리는, 본질은 우리의 눈과 얼마나 떨어져 있느냐에 따라 변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라 예수가 우리와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다 한들 그 위대함이 줄어들리 있겠는가? 그리하여 중세의 예술은 어린 아이의 그림처럼 유치하게 보인다. 하지만 몰라서 그랬던 게 아니다. 오히려 알았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천년 동안 짓눌러온 성스러움의 무게에 지쳤던 걸까? 14세기 이탈리아, 내륙의 도시 피렌체에서 거대한 복고 열풍이 불기 시작한다. 이른바 르네상스. 미의 부활이다.




<아테네 학당>. 라파엘로 1510~1511년



르네상스라는 말은 '고대의 부활'이라는 뜻이다. 고대가 어디냐. 바로 그리스. 예술은 다시 자연을 미메시스하기 시작했고 미 또한 다시 단순해졌다. 예술의 역사가 여기서 멈췄다면 우리의 여정도 훨씬 쉬웠을 터. 그러나 중세의 종교적 진리가 그랬던 것처럼 르네상스의 규칙과 질서가 사람들을 숨막히게 했었나 보다.




<성 리비노의 순교>. 루벤스, 1633년 작



루벤스는 윤곽을 지우고 구도에 혼돈을 더했다.




<모자를 쓴 여인>. 마티스, 1905년 작



마티스는 대상으로부터 색채를 해방시켰다.




<아코디오니스트>. 파블로 피카소, 1911년 작



피카소는 대상으로부터 형태를 해방시켰다. 형태도 색채도 더이상 현실의 사물을 지시하지 않을 때 그림은 도대체 무엇이 되려 하는걸까?


내용이 사라진 예술을 대변하는 건 칸트의 형식 미학이다. 예술의 본질은 내용이 아니라 형식에 있다는 주장. 그 형식의 아름다움이 곧 예술의 아름다움. 이제서야 나의 해바라기 그림이 고흐의 해바라기 그림만큼 비싸게 팔리지 않는 이유를 알겠다. 나는 고흐의 내용을(해바라기) 훔칠 수는 있다. 그러나 그의 형식(스타일)을 훔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다음 사각형에 이르러 예술은 완전한 침묵에 도달한다. 이 절대적 암흑 속에 어떤 형식이 존재할 수 있겠는가?




<검은 사각형>. 말레비치, 1912년 작



이 완전한 침묵 앞에서 미학은 난데없이 모방론으로 회귀한다.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예술이 도대체 무엇을 모방한단 말인가? 그것은 바로 자연. 침묵하는 자연을 모방한다.


과거의 인류는 나무가 돌이 별이 바람이 들려주는 얘기를 직접 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근대는 합리적 이성을 앞세워 자연을 파괴했고 자본주의는 숲의 아름다움을 바다의 숭고함을 생명의 소중함을 경제적 가치로 환산한다. 만물이 화폐의 액수로 환원되는 것이다. 이 획일성의 폭력에 자연은 침묵으로 저항한다. 현대 예술이 대중의 '코드'를 따르지 않고 철저히 이해될 수 없는 것으로 남으려는 이유는 이 침묵을 모방하기 때문이다. 불가해와 의도적 소통의 부재는 자연과 예술이 현대 사회에 저항하는 방식이다.


예술의 탈주는 혁신을 통해 이루어진다. 동일성의 폭력에서 벗어나려면 기존의 코드를 깨고, 늘 새로운 형식을 만들어내야 한다. (p. 146)


그러나 새로움이 극단에 이르렀을 때 이 새로움은 과연 차이를 만들어 낼 수 있을까? 외눈박이 마을에선 두눈박이가 비범한 존재가 될 수 있다. 그러나 모두가 두눈박이가 됐을땐? 그땐 오히려 외눈박이가 비범한 존재가 되는 게 아닐까? 동일성의 폭력을 피해 끊임없이 비범한 것이 되려한 예술은 모든 것이 비범해지는 순간 외려 평범함으로 복귀한다. 예술은 사물 그 자체가 되고 더이상 예술과 비예술을 가르는 차이가 사라진다. '예술이 더 이상 없기 때문이 아니라, 에술이 너무 많기 때문에 예술은 죽는 것이다(p.343)'라고 한 장 보드리야르의 묵시론적 선언은, 


그래서 위대하다.




<샘>. 뒤샹, 1917년 작



예술은 죽었고, 우리의 미학도 여기서 끝이다. R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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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의 미학 오디세이 2 (20주년 기념판) - 마그리트와 함께 탐험하는 아름다움의 세계 미학 오디세이 20주년 기념판 2
진중권 지음 / 휴머니스트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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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권에서 우리는 미가 어디에 속해 있는지를 찾다 미로에 갇혀 버렸다. 미는 구체적 대상에 객관적으로 존재하는가? 그렇다면 수 많은 사람들의 각기 다른 미적 취향을 우리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또 시대에 따라 달리지는 미적 관점은 어떻게 할 것인가? 이 막다른 출구에서 우리는 수용자의 주관으로 발길을 돌린다. 미를 간직한 객관적 실체란 존재하지 않는다. 미란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판단' 속에 존재하는 법. 그러나 그 누구도 하수구를 기어다니는 시궁창 쥐가 TV에 나오는 예쁜 탤런트보다 예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렇다. 우리는 미로에 빠졌다.



이카루스의 꿈


미로에서 탈출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뭘까? 복잡한 미로에 갇혀 실마리를 잃었을 땐 그 안을 아무리 열심히 뛰어다녀봐야 헛수고일 뿐이다. 막다른 골목을 만날 때마다 머리 속은 더 복잡해지고 점점 초조감이 몰려온다. 몰려온 초조감은 피로로, 피로는 곧 탈진으로 이어진다. 그럼 무슨수로 탈출할 것인가? 바로 날아오르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는 손>과 같은 미로에 갇혔다. 그러나 그림 밖으로 나오면 어떤가? 이것은 단지 '에셔'라는 화가가 그린 그림일 뿐이지 않은가? 우리가 저 그림 속에서, 저 손들이 그리는 선을 따라 행진한다면 우리는 영원히 미로에 갇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하늘 높이 훨훨 날아올라 모든 걸 헤아릴 수 있는 절대적 위


치에 서면? 그땐 이 모든 게 한갓 허상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지 않겠는가? 이것이 바로 헤겔의 길, 주객의 대립을 극복하기 위한 헤겔의 철학이었다. 


하지만 인간이 어떻게 자신의 세계 밖으로 나갈 수 있겠는가? 단순히 지리적 위치를 뜻하는 게 아니다. 모든 걸 헤아릴 수 있는 위치란 우리의 인식 너머에 있는 어떤 곳을 의미한다. 그곳은 인간의 영역이 아니다. 그곳은 초월자의 영역이다. 하늘을 날겠다는 인간의 꿈은 태양빛에 녹아 추락한지 오래다. 헤겔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런 주장을 한걸까? 헤겔은 '절대 정신'에 귀의해 주간과 객관을 통합했다고 생각했지만, 도리어 그 초월적 관념을 상정한 순간 인간은 주관과 객관을 통합할 수 없다는 걸 증명한건 아닐까?



원초적 지각


나는 이전 권의 리뷰에서 어쩌면 세상의 본질이 주관과 객관이 뒤섞인 모호함 그 자체에 있는건지도 모른다고 했다. 메를로 퐁티라면 아마도 이런 생각에 동의할 것이다.


메를로 퐁티는 미로를 탈출하는 방법은 날아오르기가 아니라 주관과 객관이 분리되기 전의 상태로 나아가는 것이라고 했다. 무슨 말이냐고?


당신이 '빨간'색을 보았다고 하자. (중략) 빨강은 빛의 객관적 성질인가? 아니면 우리의 눈이 만들어낸 주관적 효과인가? 그러나 지각이 이루어지는 최초의 순간엔 이런 문제가 일어나지 않는다. 우린 그냥 바라볼 뿐, 빨간색이 '보는 행위'에 속하는지, '보이는 사물'에 속하는지 묻지 않는다. '보는 것'과 '보이는 것'의 구별은 나중에 이 지각 체험을 돌이켜 생각할 때 비로소 생기는 것이다.(p. 67)


메를로 퐁티는 이처럼 '원초적 지각' 속에서 미로를 탈출하려 한다. 왜? 그 지각 속에는 주객의 대립이라는 것 자체가 아예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메를로 퐁티에게 있어 지각의 주체는 '맑고 투명한 사유'가 아니라 '혼탁한 신체'였다. 하지만 여기 심각한 문제가 있다. 불명확하고 혼란스러운 감각(수 많은 착시 현상을 떠올려 보라!), 자신도 인정하는 이 '혼탁한 신체'가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어쩌면 먼 옛날 인류의 신화가 힌트가 될지 모르겠다. 그 많은 신화들이 증거하는 만물의 근원은 어디였던가? 바로 어두컴컴한 혼돈, 세상은 바로 그 속에서 나왔다.



미로 박살내기


그리고 여기 하이데거가 있다. 하이데거는 하늘을 나는 위험한 짓도 모호한 원초적 지각으로 돌아가는 것도 거부한다. 미로에 갇혔을 때, 그곳을 탈출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미로를 박살내는 것이다하이데거는 주객을 뚫고 나오는 '진리'에 귀를 기울이라고 했다. 하이데거는 고흐의 구두 그림을 보고 격정에 찬 목소리로 그 감상을 남기는데, 그것은 결코 하이데거 자신의 주관적 감정이 아니라고 한다. 그에 따르면 이것은 자기가 작품 앞에 선 순간 작품이 스스로 입을 열어 자신에게 들려준 얘기라고 한다.




빈센트 반 고흐, <구두>



작품이 들려주는 '진리의 소리'를 듣기 위해 우리는 일종의 영매가 되야한다. 은폐되 있던 진리. 들리지 않던 소리. 작품이 직접 전하는 얘기를 듣는다면 더이상 무슨 논쟁이 필요하겠는가? 그러나 나는 이 순간 영화 <라쇼몽>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거기 살인 사건이 있다. 그 사건의 관련자들은 모두 세 명. 그러나 세명의 증언은 서로 달라 무엇이 진실인지 알수 없었다. 그렇다면 살해당한 그 사람으로부터 직접 이야기를 들어보면 어떨까? 그것보다 더 정확한 진술이 있을까? 그리하여 영매가 도착하고 접신이 이뤄진다. 접신은 성공하고 영매의 입에서 죽은자의 증언이 터져나온다. 그러나 그 말 속엔 얼마나 많은 거짓이 담겨 있었던가!



제 3의 길


이도 저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여기 제 3의 길이 있다. 이것은 나 자신의 생각이다.


나는 미가 객관적 실체와 주관적 판단이 주고 받는 상호 작용이라고 생각한다. '미'는 대상에 객관적으로 존재한다. 그러나 그것은 완전한 형태가 아니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그것은 아직 '미'가 아니다. 그럼 이 '미가 아닌 것'을 '미'로 만드는 것은 누구인가? 그것은 당신. 바로 작품 앞에 선 당신이다.


이 생각은 하이데거의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하이데거에게 있어 미(진리)는 작품 내에 이미 완벽하게 갖추어져 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그 진리를 들어주는 것. 혹은 꽉 닫힌 관뚜껑을 열어 그 진리를 풀어주는 것이다. 여기서 수용자는 말그대로 일방적인 수용자가 된다. 그러나 우리는 작품에게 말을 걸 줄 아는 존재다. 우리가 작품과 더 많은 대화를 나눌 때 '미'는 더 아름답게 빛난다. 여기서 중요한 건 이 대화가 작품에 속한 것도 내 안에 속한 것도 아니라는 점이다. 대화는 나와 작품이 서 있는 세계 속으로 뻗어나간다. 대화는 이 세계 속에 구체적으로 존재한다.


우리는 예술 작품 앞에서 주눅이 들고 자신감을 잃는다. 우리에게 예술은 너무나 어려운 존재다. 그러나 반대의 경우도 얼마든지 있다. 아주 무식한 사람을 만나 전혀 말이 통하지 않았던 경험이 있는가? 마찬가지로 모든 예술이 풍부한 대화를 건넬 수 있는 건 아니다. 예술에는 엄연히 객관적인 '질의 차이'가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작품과 어떠한 대화도 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작품의 질이 낮기 때문일까? 아니면 우리의 수준이 낮기 때문일까? 진정 훌륭한 사람이라면 그 누구와도 훌륭한 대화를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무지한 사람들과 어떻게 '대화'했는지 떠올려 보라. 우리가 예술 작품과 아무런 대화도 나누지 못했다면 작품과 우리 모두 훌륭하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작품이 일방적으로 우리에게 말을 걸어 온다면? 그 작품은 우리의 수준을 훨씬 뛰어 넘는 진정 훌륭한 작품일 것이다. 반면 우리가 일방적으로 작품에게 말을 건다면 그 작품은 저급한 것이다. 가장 이상적인 미가 언제 나오는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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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의 미학 오디세이 1 (20주년 기념판) - 에셔와 함께 탐험하는 아름다움의 세계 미학 오디세이 20주년 기념판 1
진중권 지음 / 휴머니스트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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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의 미학 오디세이>가 나온게 벌써 20년이라고 한다. 참으로 세월이란! 


이 책은 1994년 1월 15일에 초판이 나왔다. 오랜 군부 독재 끝에 탄생한, 이른바 문민정부 시대의 책이다. 진중권은 자신이 이 책을 쓸 무렵엔 이미 그가 추구하던 이상 사회가 붕괴한 상태였다고 한다. 이해한다. 군부 독재라면 치를 떨었던 한 남자가 그 군부 독재자들의 힘을 빌려 대통령이 된 시절이니까.


뜨거운 80년대를 산 당시의 젊은이들에게 90년대는 위선적 민주주의와 위태로운 번영이 뒤범벅된 역겨운 시대였을 것이다. 그리하여 한 남자는 구역질 나는 현실을 떠나 이상적 진리 탐구의 영역에 발을 디딘다. <미학 오디세이>는 현실의 압도적 부조리함에 삶의 추동을 잃은 뜨거운 청년이 차가운 지식인으로 다시 태어난 관문이었던 셈이다. 



무엇이 아름다운가?


현대인들에게 미란 대상에 속한 객관적 실체라기 보다는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느껴질 수 있는 주관적 판단이라는 생각이 더 익숙할 것이다. 저급한 대중 문화를 향유하는 걸 정당화하기 위해선 절대적 미의 기준을 부정하는 것이 더 유리할테니까. 그래서 우리는 '~라는 노래가 ~하므로 ~보다 더 우수하다'거나 '~라는 책은 ~하므로 더 저급한 것'이라고 하는 말에 질색을 하며 달려든다. 오늘날 개인의 취향을 무시하는 건 몰상식의 증명이자 용서 받을 수 없는 폭력행위다. 문제는 이렇게 미의 주관성에 대한 뜨거운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강남의 성형외과로 달려가 객관적으로 예쁘다고 판단되는 눈과 코와 이마와 턱을 구한다는 사실이다. 우리의 태도는 진정 무엇일까?


미는 정말로 주관적 판단에 있는 걸까?



미는 대상에 있는가 수용자에게 있는가?


좀처럼 쉽게 답할 수 없는 문제다. 우리 중 대다수는 전지현과 자신의 여자친구 중 누가 더 아름다운가 라는 질문에 아마 '전지현'이라고 답할 것이다. 아니라고? 이 딱한 사람 같으니... 대다수의 미적 판단이 하나로 수렴된다는 건 미가 주관적 판단이 아닌 대상 즉 객관적 실체에 있다는 얘기다. 그러나 과거엔 어땠을까? 아래 그림을 보자. 루벤스의 1639년 작 <파리스의 심판>엔 '미'를 대표하는 삼미신이(아프로디테, 헤라, 아테나) 등장한다. 당신은 저 셋 중 누가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하는가? 파리스의 골머리를 썩혔던 이 문제가 아마도 우리에겐 실소로 다가올 것이다. 풍만하고 후덕한 아줌마 세 명 중에서 세계를 대표하는 '미인'을 선택하라니...




<파리스의 심판>. 루벤스. 1639년 작.



이런걸 보면 '미'가 대상에 존재하는 객관적 실체는 아닌 것 같다. 미가 객관적이라면 시대를 불문하고 우리는 동일한 대상에서 동일한 아름다움을 느껴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 저 삼미신 중에서 아름다움을 느끼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고대엔 미가 확실히 대상 안에 객관적으로 존재했다. 고대 그리스의 예술과 그 고대를 부활시키려 한 르네상스를 보라. 그들에게 미는 완벽한 비례와 구도였다. 때문에 당시의 예술가들에게 예술은 번뜩이는 영감에 따라 마음대로 짓고 허무는 작업이 아니라 아름다움의 규칙을 발견하고 그 규칙을 작품에 정확히 적용하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예술은 일종의 기술, 즉 '테크네'였던 셈이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바로크 시대에만(르네상스를 바로 뒤 이은 예술 사조) 가도 벌써 그 중심을 잃고 흔들리기 시작한다. 아래의 두 그림을 보자. 







위는 푸생의 <성가족>(1648년 작)이며 아래는 루벤스의 <성 리비노의 순교>(1633년 작)다. 르네상스의 고전미를 그대로 답습한 화가답게 푸생의 그림은 배경과 인물의 구분이 뚜렷하고(명확함) 안정적인 구도를(완벽한 구도) 갖추고 있다. 반면 루벤스의 그림은 구도가 격정적이고(불완전한 구도) 인물과 배경은 전체 안에서 통합되어 있으며(모호함) 복잡한 구성을 갖고 있다. 푸생의 그림이 질서, 비례, 척도를 중요시하는 '이성의 그림'이라면(객관) 루벤스의 그림은 감정과 분위기를 강조하는 '감성의 그림'이라고(주관) 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시 비평가들은 푸생이냐 루벤스냐를 놓고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고 한다. 이 논쟁이 어떻게 끝났냐고? 사실 이 논쟁이 어떻게 끝났는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우리에게 중요한 건 따로 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이 논쟁을 통해 사람마다 미학적 취향이 다 다를 수 있음을 확인했다는 것이다. 



객관과 주관의 고리 안에서


현대에 이를 수록 '미'는 점점 더 주관화하는 경향을 보인다. 그도 그럴것이 현대 예술에는 더이상 객관적 미를 파악할 대상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미는 이제 완전히 주관 속으로 침몰한 것처럼 보인다. 예술가들은 차가운 이성대신 뜨거운 감성을 작품에 답는다. 그들의 작품을 만드는 건 기술이 아니라 번뜩이는 영감이다. 현대의 예술가들은 공방에서 평생을 보내는 장인 보다는 책상 앞에 앉아 펜대를 굴리는 카피라이터를 더 닮아 있다.


미에 대한 논쟁을 이렇게 마무리 할 수 있을까? 객관주의자들은 이대로 영영 퇴물이 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걸까? 아니다. 주관주의자들에겐 아직 대답해야 할 질문이 남아 있다. 미가 정말로 주관에 속하는 것이라면, 사람들은 왜 우리 동네 담벼락에 휘갈긴 낙서가 아니라 바스키아의 그래피티를 예술이라고 부르는 걸까? 




바스키아의 그래피티



대다수의 사람들이 우리 동네 담벼락의 낙서보다 바스키아의 낙서에서 아름다움을 느끼기 때문이라고 말한다면 당신은 미가 주관적 판단이 아닌 대상 안에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아무리 철저한 주관주의자라 하더라도 모든 대상에서 미를 느끼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도대체 어떤 기준에서 미와 추를 경험하는 걸까? 이 문제에 답하기 위해서 우리는 결국 대상으로 돌아와야 한다. 하지만 대상으로 돌아오는 순간 우리는 사람들마다 서로 다른 미학적 취향을 갖는 이유를 설명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주관과 객관을 도는 뫼비우스의 띠


우리는 이 무한의 띠 위에서 길을 잃는다. 어쩌면 모순 그 자체가 이 세상의 본질인지도 모르겠다. 미궁 속에 빠졌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세상의 핵심에 가닿은 걸지도. 미학 오디세이 1권은 이렇게 불길한 가능성을 안은 채 2권으로 나아간다.




<그리는 손> 모리츠 에셔. 1948년 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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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음 한국사 : 15세기, 조선의 때 이른 절정 - 조선 1 민음 한국사 1
문중양 외 지음, 문사철 엮음 / 민음사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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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이해되지 않는 걸 모조리 악하다고 생각하는 현대인들에게 역사 공부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건 시대착오적인 발상일 것이다. 사람들이 역사를 경외시 하는 이유는 그것이 진지하고 긴 호흡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역사를 외면하는 이유는 그것이 지긋지긋한 암기 과목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사는 사실의 나열만으로도 하나의 이야기가 되는 흥미진진한 학문이다. 역사가 긴 호흡을 갖고 있다는 건 이렇게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끝도 없이 펼쳐진다는 의미다.


역사를 공부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기 역사를 공부하는 건 더더욱 중요하다. 다른 나라를 침범한 야만적 제국주의자들이 기를 쓰고 그 민족의 역사를 지우려고 한 것만 봐도 자기 역사를 아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민음 한국사의 출간은 나에게 대단히 반가운 일이었다. 왜곡된 역사관이 역시 왜곡된 역사관을 가진 정부의 용인 아래 버젓이 교과서로 만들어지는 이 때, 뭔가 제대로 된 역사를 보여주려는 시도가 바로 이 '민음 한국사'이기 때문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연산군


물론 최초의 시도는 아니겠지만 이 책은 세계사 속에서 한국사를 기술함으로써 역사의 보편성과 특수성을 동시에 조망한다. 


역사의 보편성을 이해한다는 건 산 넘고, 물 건너 사는 그들이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걸 확인하는 것이다. 광적인 배타성과 차이에 대한 몰이해는 대개 그들과 우리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생각에서 나온다. 그러나 인류는 표면적으로 다양하게 발전해왔을 뿐 근본적으로는 지구에 속하는 한 종으로서 비슷한 역사의 발전을 이뤄왔다. 


한편 역사의 특수성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왜 당신들과는 다를 수 밖에 없었는지를 설명해 준다. 남들은 다 똑같은 데 왜 너만 그러니 라고 하는 순간 보편성은 폭력이 된다. 이 보편의 폭력을 막고 차이를 있는 그대로 존중해 주는 열쇠가 바로 역사의 특수성에 대한 이해다.


역사의 보편성과 특수성을 동시에 조망하는 건 객관적 역사서를 만들기 위한 필수 요소다. 특수성만을 강조한다면 한 나라의 역사는 쉽게 신화화 될 것이다. 반면 보편성만을 강조한다면 역사에 필시 위계가 생기며 이 위계는 특정 국가의 역사를 깔보거나 침략의 구실이 될 것이다.


그러나 세계사 속에서 한국사를 기술함으로써 얻는 가장 큰 장점은 바로 재미다. 세종대왕님께서 훈민정음을 창제하실 무렵 - 비록 10년 뒤이긴 하지만 - 술탄 메메드 2세가 콘스탄티노플(오늘의 이스탄불)을 함락시켰다거나 연산군이 '무오사화'를 일으켜 조정을 피바다로 만들고 있을 무렵 피렌체의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자신의 공방에 앉아 '최후의 만찬'을 그리고 있었다는 사실은 언제 들어도 묘한 흥분을 자아낸다.



15세기의 조선


이 책은 15세기, 무려 태조(이성계), 태종(이방원), 세종, 세조가 등장하는 조선의 건국 초기를 다루고 있다. 이 네 명의 임금님이 등장하는 조선의 역사는 정치적 긴박감과 안정, 문화 발전의 대폭발이 번갈아 가며 일어난 그야말로 격동의 한 세기였다. 이 시기가 얼마나 흥미로웠는지는 이미 만들어졌거나 현재 진행 중인 드라마, 영화만 봐도 알 수 있다. 현재 절찬리 방영중인 KBS의 '정도전'은 태조 이성계의 조선 건국 과정을 그린 드라마이며 태종(이방원)의 형제의 난을 다룬 것이 역시 KBS의 '용의 눈물'이다. 한편 송중기를 스타의 반열로 만들어준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는 그 유명한 세종대왕의 이야기이며 작년에 개봉한 '관상'은 바로 세조(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을 소재로 한 영화였다.


이 네 명의 임금을 연달아 읽으면서 우리는 역사의 아이러니와 권력의 무정함을 느낄 수 있다. 태조는 다섯번째 아들 이방원의 도움으로 조선을 건국할 수 있었지만 그가 너무 잔인하다는 이유로(어쩌면 자신과 너무 닮았기에) 세자 책봉을 하지 않았다. 이는 결국 왕자의 난으로 이어져 조정에 피바람을 몰고 왔다. 이후 태조는 함경도 함흥에 은거하며 자기 아들을 죽이기 위해 반란을 꾸미기까지 했다. '권력은 아버지와 아들도 나눌 수 없는'것 이었던 셈이다.


한편 성왕 세종이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아버지(태종)가 수 없이 많은 사람을 죽여 없앴기 때문이다. 태종은 심지어 세종의 장인까지 단칼에 날려 버릴 정도로 왕권을 흔드는 어떠한 위협도 용납하지 않았다. 이렇게 확보된 정치적 안정은 세종으로 하여금 다른 것에 집중할 수 있게 하는 기반이 되었다. 성왕의 꽃은 코를 찌르는 피바다 위에서 개화한 것이다. 


조카 단종을 죽이고 왕위를 찬탈한 수양대군(세조. 세종의 둘째 아들)은 이후 온갖 방법을 동원해 왕권을 강화하지만 이후의 왕들은 그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조치' 때문에 오히려 약화된 왕권을 물려받아야 했다. 왕보다 강한 권력을 가진 신하 한명회가 그 누구보다도 강한 권력을 추구한 세조 때의 공신이었다는 사실은 아이러니로 점철된 역사의 한 장면을 여과 없이 드러내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약간 지루하다. 그 첫 번째 이유는 이 책이 정치만을 다루지 않기 때문이다. 암투와 간계가 난무하는 정치 투쟁은 밤을 새고 봐도 지루할 새가 없지만 '연분 9등제'와 <월인천강지곡>을 만나는 순간 지긋지긋한 국사 공부의 트라우마가 되살아 날 것이다. 두 번째 이유는 이 책이 객관적으로 씌여졌기 때문이다객관적인 서술은 문장에서 감정을 지운다. 감정이 지워진 문장에서 감동을 받을 수는 없다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은 역사서를 만들겠다는 생각은 그 자체만으로도 칭찬 받을만한 일이다. 하지만 그 이유 때문에 이 책은 어쩔 수 없이 따분한 교과서가 된다. 최선을 다해 객관성을 유지할 수록 이 책이 점점 더 재미 없어 질 것이라는 사실은, 이 세상의 본질이 사실은 아이러니가 아닐까? 라는 의문을 불러일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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