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들의 사회 이반 일리치 전집
이반 일리치 외 지음, 신수열 옮김 / 사월의책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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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전문가가 존재하지 않는 사회를 상상하는 건 쉽지 않다. 근대 사회의 출현 이후 그들은 많은 분야에 전문가라는 깃발을 걸고 보통 사람들의 생활을 도와왔다. 그들은 일상에 바쁜 우리가 좀처럼 관심을 두기 어려운, 그러나 아주 중요한 문제를 끈질기게 파고 들어가 해결책을 제시하는 존재였고 이 과정에서 방대한 지식을 축적해 우리 사회가 진보할 수 있는 토대를 구축한 사람들이었다. 문제는 그들이 너무 비대해졌다는 것이다. 그들은 너무 거대한 성을 지었고 견고한 담합을 이뤄냈다. 그들은 서로의 실수를 눈감아줬고 막대한 지식 격차를 이용해 우리를 눈 먼 장님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들이 여전히 이타심을 가지고 보통 사람들을 대하는지 의심해 봐야 할 시대를 맞이한 것이다.


전문가 사회는 필연적으로 고착화 된다. 전문가는 자신에 대한 일반인의 의존이 항구적이며 맹목적이길 원하기 때문에 우리가 평생 무지한 존재로 남길 원한다. 이를 위한 첫 번째 방법은 그들의 세계를 아주 복잡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리하여 보험 전문가는 맞춤이라는 명목으로 도저히 전체 내용을 파악할 수 없을 만큼 갈기 갈기 상품을 쪼개며 의사와 법관들은 모국어로 쓰여도 해석할 수 없는 전문 용어로 자신의 보고서를 채운다. 그들의 목적은 단 하나, 우리가 백기 투항을 하는 것이다. 자신의 밥 그릇을 넘보지 말라고 협박하는 건 하수의 방식이다. 절대 넘볼 수 없게 만드는 것. 침범의 의지를 '스스로' 꺽게 만드는 것. 이것이 바로 전문가들의 수성 전략이다.


전문가 사회의 거래는 오직 상품과 화폐로만 구성된다. 이 말은 우리가 그들의 서비스를 이용했을 때 반드시 돈을 내야 한다는 말이다. 뭐 이리 당연한 말을 하냐고? 의사가 없던 시절로 돌아가 보자. 애를 낳을 땐 산파로 소문난 동네 아줌마의 도움을 받았고 감기에 걸리면 들과 산에서 구한 약초로 병을 다스렸다. 그런데 요즘은? 의사가 진찰을 하고 주사를 놓고 처방전을 써준다. 과거엔 상호 부조나(애 잘 받는 아줌마) 자연의 혜택(약초)으로 해결할 수 있었던 문제가 진료비와 주사비와 약 값으로 대체되는 것이다. 돈 없이는 생존권도 없다. 현대 서비스 사회에서 빈부의 차는 사치품을 더 살 수 있느냐 없느냐로 나타나는 게 아니다. 좋은 의료를 받을 수 있느냐, 좋은 교육을 받을 수 있느냐, 좋은 주거 환경을 가질 수 있느냐, 그러니까 삶의 기본권과 생존권을 누릴 수 있느냐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이 흐름을 되돌릴 만한 힘은 없다. 한 때는 우리도 해결할 수 있었던 일을 맹목적으로 전문가에게 위임한 결과 이제는 완전히 불구가 됐고 이로 인해 더더욱 전문가들에게 의존할 수 밖에 없는 악순환에 들어섰기 때문이다.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게 자기 밖에 없다는 것을 증명하고 난 전문가들은 이제 필요 자체를 정의함으로써 권력을 영속화 한다. 생각해 보자. 우리가 언제부터 반려견 행동 전문가와 청소, 정리, 이사 전문가와 헬스 케어 전문가, 입시 상담 전문가, 스트레스 관리 전문가, 라떼 아트 전문가, 네일 아트 전문가, 레저와 여행 추천 전문가를 필요로 했는가? 우리도 모르는 새에 우리는 너무 바보가 되어 정리도 청소도 제대로 할 수 없는 사람, 심지어 내가 뭘 먹어야 하는지, 아니 뭘 먹고 싶은지 어디로 여행을 떠나고 싶은지 조차 모르는 인간이 된 것이다. 전문가 사회는 우리 대신 우리의 필요를 정의하며 나아가 그 필요를 교묘하게 욕구로 바꿔 놓음으로써 우리가 마치 처음부터 그것을 간절히 바랐던 것처럼 순전한 욕망의 노예로 만들어 버린다. 오늘날 잘 나가는 상품들이 소비자의 필요(needs)에 호소하지만 더 위대한 사치품들은 우리의 욕망(wants)를 자극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그러나 전문가 사회의 가장 끔찍한 점은 그것이 가진 정치적 함의다. "전문 서비스의 일방적 공급에 경제를 의존하고 있는 사회에서는, 반민주적인 지도자를 받아들이도록 사람들을 체계적으로 준비시키는 일이 훨씬 용이하게 마련이다."(p.113).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전문가들의 첫 번째 임무는 복잡한 사태를 더욱 복잡하게 정의해 그것으로부터 일반인들의 눈을 돌리게 만드는 것이다. 사안을 직접 판단할 수 없는 사람들은 문제를 한 방에 해결해 줄 전문가에게 자신의 권리를 양도 함으로써 자발적인 노예가 된다. 그리고 노예가 된 자신을 이끌어줄 강력한 독재자를 원하는 것이다. 너무나 많은 정보를 공유해 모르는 게 없을 정도로 많은 걸 알게 된 21세기 선진 시민에게 이 같은 상황은 얼핏 초현실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는 전 세계에서 빈번히 발생하고 있는 정치 현실이다. 이 글을 읽는 대한민국의 국민들도 2007년 12월 19일 '경제 대통령'이라는 슬로건을 내건 경제 전문가를 대통령으로 뽑은 적이 있음을 기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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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맨은 벨을 두번 울린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69
제임스 M. 케인 지음, 이만식 옮김 / 민음사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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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 맨이 왜 벨을 두 번 울리는지 알기 위해선 1927년 3월 19일의 뉴욕 롱아일랜드로 가야 한다. 그곳에 잡지 편집자 앨버스 스나이더와 일명 호랑이 여자 루스 스나이더가 있었다. 둘은 부부였다. 대개의 부부는 남자 혹은 여자가 바람을 피우거나 아니면 둘 다 바람을 피웠는데 스나이더 부부의 경우는 아내가 바람을 핀 케이스였다. 그녀의 정부는 코르셋 외판원 저드 그레이. 법정의 증언에 따르면 호랑이 여자는 그레이에게 남편이 성관계 후 자신을 때린다고 말했고 그런 말을 할 때마다 그레이가 "그 짐슴을 죽이고 싶어."라고 대답했으며 호랑이 여자는 "정말 진심이야?"라고 물었다고 한다. 진심이고 말고. 그레이는 둔기를 휘둘러 잡지 편집자를 쓰러뜨린 뒤 철사로 목을 졸라 죽였다. 핏줄이 터져 시뻘게진 눈 그것도 튀어나올 정도로 커진 두 눈을 정면으로 봤어야 했을 테지만 그레이는 망설이지 않았다. 사랑의 힘은 이토록 위대하다.


호랑이 여자는 남편 몰래 5만 달러짜리 상해 보험을 들었다. 남편의 사망 시 두 배로 보상 받는 '배액 보상' 조항이 포함된 것이었다. 그녀는 우편배달부에게 이 보험 증서를 자신에게 직접 배달하라고 지시했으며 초인종을 두 번 울리는 것이 신호였다. 포스트맨은 벨을 두 번 울린다. 이후 이 말은 성적 불성실을 뜻하는 관용어가 된다.


<포스트맨은 벨을 두 번 울린다>에 대해선 마땅히 할 얘기가 없다. 떠돌이 체임버스가 우연히 그리스인 파파다키스의 식당에서(주유소 및 정비소 겸업) 일을 하게 되는데 언제나 그렇듯 둘 사이에 여자가 등장한다. 그녀는 파파다키스의 아내였고 젊은 시절 헐리웃에서 굴러 먹은 적도 있던 꽤 근사한 여자였다. 그녀는 자신의 인생이 왜 이 개기름 번지르르한 그리스인과 엮이게 됐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여자였고 체임버스는 이 여자의 인생을 녹슨 철로에서 걷어차 거칠지만 짜릿한 황야로 굴러가게 할 남자였다.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보는 순간 그 사실을 깨닫는다. 두 사람이 알몸으로 침대 위에 오른 건 소설이 시작한지 채 10페이지도 지나지 않아서였다.


어쨌든 두 사람은 사랑했다. 하지만 그 사랑을 파파다키스와 공유해야 했고 보통의 인간은 사랑을 나눠 쓰는데 인색한 법이었다. 파파다키스는 자기가 누구와 사랑을 공유하는지 몰랐기 때문에 증오는 체임버스의 마음 속에서만 커갔다. 그는 그녀와 함께 남자를 죽이기로 결심한다. 두 사람은 생각을 행동에 옮긴다. 그리고 실패한다.


사랑이 얼마나 위대하냐면, 사람이 다른 사람을 죽이게 할 뿐만 아니라 실패로 끝난 그 살인을 다시 한 번 시도하게 만들 정도다. 두 번째 살인은 멋지게 성공한다. 그러니 알아두시길, 사랑의 힘으론 못할 게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을! 두 사람의 행복이 오래 오래 영원히 갔으면 좋았으리마는 팔리는 이야기의 고질적인 습성으론 도저히 참아 넘길만한 엔딩이 아니었다는 사실도 이해해 주시길. 파파다키스에겐 두 사람도 모르는 보험이 들어 있었다. 보험 회사의 조사원과 검찰이 사건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두 남녀는 정말로 서로를 사랑했을까? 어쩌면 사랑은 진정한 사랑과 단순한 욕망으로 구분되는지도 모른다. 그 둘은 양 손바닥 만큼이나 닮아 있어 거의 구별이 되지 않는다. 확인하는 법은 끝까지 달려가 보는 거다. 진정한 사랑은 길이 험할 수록 단단해지지만 욕망은 엉성한 매듭으로 묶은 풍선처럼 서서히 바람이 빠져나가 쭈글쭈글 쪼그라든다. 체임버스와 그녀의 사랑은 무엇이었을까? 궁금하다면 이 책을 펼쳐 끝까지 읽어라. 마지막 장에 이르러 당신은 당신의 마음 속 초인종을 두 번 울리는 포스트맨을 만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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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과 문장들 - 뜯어 쓰는 아트북
허윤선 지음 / 루비박스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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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기획 의도가 너무 선명하게 드러나는 책은 좋아하지 않는다. 마지막 책장을 덮었을 때 과연 한 권의 책을 읽은 것인가 같은 의문을 들게 하는 책도 좋아하지 않는다. 이를테면 그림이 난무하거나 지면이 헐렁거릴 정도로 여백이 창궐하는 책들 말이다. 그런 면에서 <그림과 문장들>은 나의 의심을 사기에 충분한 책이었다. 평소라면 결코 사지 않았을 이 책을 장바구니에 담은 건 나에게 아무 생각 없이 페이지를 넘길 수 있는 책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저자는 어떤 그림을 볼 때면 책이 떠올랐다고 말한다. 그래서 100점의 그림에 100가지 문장들을 모았다. 어떤 것들은 그림이 좋았고 어떤 것들은 문장이 좋았다. 그림이 좋았던 것들과 문장이 좋았던 것들을 여기에 옮긴다.



그림이 좋았던 것들




윌리엄 아돌프 부그로, <작은 도둑>, 1900, 캔버스에 유채, 124x70cm





구스타브 카유보트, <창가에 서 있는 청년>, 1875, 캔버스에 유채, 117x82cm





빌헬름 함메르쇠이, <젊은 여자의 뒷 모습이 있는 실내>, 1904, 캔버스에 유채, 60.5x50.5cm



문장이 좋았던 것들



인생에서 마지막으로 찾아오는 중요한 깨달음 중 하나는 꿈꾼 대로 살 수 없다는 것이다

- 제임스 설터, <가벼운 나날>



"미토르니히 조르겐." 유태어를 모를까봐 말해주겠는데, 

그건 세상을 원망할 건 없다는 뜻이다. 그렇다. 세상을 원망할 건 없다. 

우리는 사랑해야 하고, 또 사랑하고 있으니까. 

- 에밀 아자르, <자기 앞의 생>



행복한 사람은 의미를 따지지 않으며, 그냥 살 뿐이다. 

사랑하는 사람은 삶에 대해 꼬치꼬치 따지지 않고 인생을 즐긴다. 

- 한스 크루파, <영원과 하루>



그 사막에서 그는 너무도 외로워 때로는 뒷걸음으로 걸었다. 자기 앞에 찍힌 발자국을 보려고. 

- 오르텅스 블루, <사막>



나는 기적 같은 역전을 꿈꾸었다. 복권에 당첨되어 수백만 달러가 하늘에서 떨어지는 따위의 

일확천금을 꿈꾸며 터무니없는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처음에는 한 입, 다음에는 두 입, 다음에는 세 입을 먹여 살리려고 애쓰면서 몇 년을 지낸 뒤 

결국 내기에 지고 말았다. 

이유를 알기는 어렵지 않았다. 시간을 얻기에는 일을 너무 많이 했고, 

돈을 벌기에는 일을 충분히 하지 않았다. 

- 폴 오스터, <빵 굽는 타자기>



<그림과 문장들>을 읽고 나면 두 가지에 놀란다. 첫 째는 저자의 독서량이다. 100점의 그림에 100가지 문장을 붙이려면 적어도 1,000점의 그림에 1,000가지 문장을 봤어야 했을 것이다. 게다가 그녀는 그림을 보면 '문장'을 떠올릴만큼 단단히 책을 읽는 사람이다. 그림을 보고 단순히 '책'을 떠올리는 게 아니란 말이다. 둘째는 나의 멍청함이다. 어디서 이런 문장이 나왔을까 싶어 제목을 더듬다 그게 이미 내가 읽었던 책이라는 걸 발견하는 순간 이루 말할 수 없는 민망함이 얼굴을 찌른다. 삶은 망각과의 싸움이다.


문장들 중엔 책을 사들지 않고는 못 견디게 만드는 것들이 있다. 그러나 신중에 신중을 기할 것을 충고한다. 여기 모인 문장들이 진주라면 한 권의 책은 진흙탕이다. 그 한 알의 진주를 찾기 위해 얼마나 힘들게 진흙탕을 뒤져야 하는지, 보석을 보는 순간엔 결코 깨닫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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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 현실 세계 편 (반양장) - 역사,경제,정치,사회,윤리 편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1
채사장 지음 / 한빛비즈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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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그대로다. 넓고 얕다. 역사, 경제, 정치, 사회, 윤리 편으로 나눠 빠르게 겉핥기를 한다. 시험 전 가까스로 복사에 성공한 모범생의 요점 정리 같기도 하고 논술 대비 쪽집게 주제 뽑기 같기도 하다. 짧은 분량에 워낙 방대한 양을 담으려다 보니 차 떼고 포 까지 뗀 장기판을 연상케 한다. 프로크루스테스 처럼 자기 침대를 넘어서는 다리를 싹뚝 잘라버린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편집과 기획의 승리다. 쪽집게 과외나 요점 정리, 세 문장 요약에 익숙한 한국이 아니었다면 아마 성공하기 힘들었을지도 모른다. 한마디로 <지대넓얕>은 인문학을 꾸준히 접해왔던 사람들에겐 매우 지루한, 그러나 복잡한 건 딱 질색인 사람들에겐 구미가 당길 책이다.


정보는 넘쳐나고 우리는 길을 잃었다. 저자의 말처럼 정보가 폐품처럼 쌓여가는 시대다. 너무 많아서 뭘 봐야 할지 모른다면 너무 적어서 볼 게 없는 거랑 사실상 마찬가지다. 갈수록 편집과 기획의 역할이 강조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그래서 채사장은 일종의 정제소를 차렸다. 가공되지 않은 정보는 정보가 아니다. 이것은 데이터(Raw data)혹은 원재료에 불과하다. 이것을 쓸 수 있게 가공해야만 진짜 정보가(information) 된다. 최근엔 여기에 쉽고, 맛있게 라는 목표가 추가되야 대중의 관심을 받는다. 집밥 백선생이 뜬 이유를 생각해 보자.


백선생과 채사장의 공통점은 넓은 지식이다. 솔직히 백선생의 가게를 가보면 조미료 범벅의 거지 같은 음식 투성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음식에 대한 그의 지식과 깊이를 무시해선 안 된다. 그는 자기가 가진 방대한 지식을 이용해 그저 대중의 입맛에 맞는 콘텐츠를 제공할 뿐이다. 고객이 원하고 즐거워한다면 일개 엔터테이너에게 그 이상의 책임을 묻기란 어려운 법이다. 나는 백선생의 음식에 대한 사랑과 지식을 존경하고 대중 요리에 대한 그의 생각을 존중한다. 채사장도 마찬가지다. 그는 방대한 독서를 통해 한 권의 책을 펴낸 인물이다. 아는 것과 쓰는 것이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지는 조금만 해봐도 안다. 세상에 책을 많이 읽는 사람은 널리고 깔렸다. 그러나 습득한 지식을 체계적으로 정리해 한 권의 책으로 엮어 낼 수 있는 사람은 흔치 않다. 그는 뭐 어디 대단한 교수도 아니고 인정 받는 외국 대학에서 공부를 하다 온 사람도 아니다. 우리와 똑같이 평범한 사람이다. 그래서 눈 높이에 맞춘 책을 쓸 수 있었다.


채사장과 백선생의 차이는 자기를 찾아온 사람을 다음 세계로 인도할 수 있느냐다. 냉정하게 생각해 보자. 백선생의 맛과 방법에 길들여진 사람들이 새로운 맛, 새로운 방법, 그러니까 지금까지 해왔던 것과는 정반대의, 그러나 충분히 의미있고 즐길만한 뭔가를 발견하려 할까? <지대넓얕>은 지금 당장은 비록 넓고 얕은 지식서지만(의도한 대로) 그 속엔 독자를 더 깊은 세계로 안내하려는 의도를 갖는다. '한 권으로 편안하게 즐기는 지식 여행서'의 끝에 다음 세상의 문을 여는 열쇠가 있다. 그 열쇠를 넣고 돌려보자. 그리고 천천히 문을 밀어보자. 처음 이 책을 펼쳤을 때 느꼈던 것보다는 확실히 묵직한 무게가 전해져 올 것이다. 그러나 겁 먹을 필요는 없다. 당신은 이미 발을 담궜으니까. 수심은 차근차근 깊어질 것이다.


한 권의 인문학이 두 번 째 인문학을 부르는 이유는 책장을 덮는 순간 새로운 의문이 물밀듯이 밀려들기 때문이다. 머리에 꽂힌 물음표는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그건 거울을 볼 때도 밥을 먹을 때도 똥을 쌀 때도 존재감을 과시하다 점점 커져 가슴을 답답하게 한다. 그러면 두 번 째 책을 꺼내 의문에 대한 답을 찾아야 한다. 그러나 그 두 번 째 책의 책장을 덮는 순간 답은 커녕 더 큰 의문이 해일처럼 밀려드는 걸 보게 될 것이다. 그럼 또 다시 세 번 째 책을 꺼내야 한다. 고백하건대 인문학은 답을 알려준다기 보다는 질문을 할 줄 아는 능력을 키워주는 학문이다. 그래서 역사상 수 많은 통치자들이 금서 목록을 만들고 철학자를 사형대로 보낸 것이다. 왜냐고? 질문은 권위에 도전하는 용기를, 그리하여 마침내 권력을 무너뜨리는 힘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한 마디만 더 하자. 이 세계에 한 번 발을 디디면 당신은 셀 수 없이 많은 책들로 둘러싸인 미로를 죽을때 까지 헤매는 벌을 받는다. 그러니 충고하건대 지금까지 모르고 살아왔다면 앞으로도 모르고 사는 것을 추천한다. 행복은 무지에서 온다. 맹세코 비아냥 대는 게 아니다. 무지한 자만이 행복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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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식 이야기
베르나르 키리니 지음, 임호경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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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나르 키리니는 
무성의하게 소설을 끝낼 때가 많다. 알렉산대 대왕의 매듭! 펼쳐 놓은 이야기가 수습이 안 될 땐 도마뱀 처럼 뚝 꼬리를 잘라 버린다. 아이디어가 참신할 수록, 독특할 수록, 황당할 수록 이럴 확률은 늘어난다. 원래 반짝 반짝 빛나는 원석은 그 가능성에 비례해 가공의 품도 늘어난다. 때로는 무한한 가능성이 도리어 발목을 잡을 수도 있는 것. 그러니 명심하자.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건 언제나 아무 것도 되지 않을 가능성도 포함한다는 사실을!


<첫 문장 못 쓰는 남자>를 읽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 소설도 대단한 아이디어를 씹다 뱉은 껌처럼 퉤퉤 내다버린다는 점에선 <육식 이야기>와 마찬가지다. 아마도 이 남자는 아이디어가 무한히 샘 솟는 맷돌 하나를 책상 서랍에 숨겨둔 것 같다. 쓰고 버려도 넘칠 만큼 아이디어가 폭주하는 것이다. 애써 이야기를 다듬거나 장편으로 발전시킬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그러기엔 해야 할 이야기가 너무 많다. 문장을 써 내려가고 있는 동안에도 아이디어가 터져나와 집필을 방해할 정도다. 가지에 가지를 치는 생각은 어느새 거대한 나무가 되어 머리 속을 가득 채운다. 그러면 쓰던 걸 얼른 끝내버리고 이 새로운 나무에 집중해야 한다. 이 때 소설가는 일종의 벌목꾼이다. 거대한 나무를 베어 종이 안에 담지 않으면 뇌는 무성한 나무들에 완전히 잠식당하고 만다. 의식이 숲에서 길을 잃고 혼잣말을 하게 된다.


대변은 여기까지 하자. 솔직히 <육식 이야기>는 별로다. 씹다 뱉은 껌이라도 마다않고 두 번 세 번 곱씹은 이유는 생각의 꼬리가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수풀 사이로 살랑 살랑 흔들리는 꼬리를 보면 쫓아가지 않을 도리가 없다. 마침내 꼬리를 잡아 몸통을 끌어낸 순간 탄식의 한숨을 내쉴지라도 괜찮다. 그 꼬리를 보고 만진 것만으로도 충분한 것이다.


<육식 이야기>는 꼬리도 별로고 몸통은 더 별로다. 네 시작은 미약했으나 그 끝은 더 미약하리라! 좋은 아이디어를 모두 데뷔작에 쏟아 부었던 걸까? 아무튼 안타깝다. 훌륭한 소설가의 졸작을 읽는 건 본인 못지 않게 독자까지 무참하게 만든다는 걸 알아두시길. 이별의 아픔을 알아버린 사람이 새로운 사랑의 시작에 머뭇거리듯이 베르나라 키리니의 세 번째 책을 드는 게 망설여진다.


그나마 괜찮았던 작품이 뭐였는지 생각해 보자. <뒤 섞인 사랑>, <수첩> 그리고... 그리고 모르겠다. 나에게 세례를 준 책은 <첫 문장 못 쓰는 남자>다. 아니 <육식 이야기>가 주인공인 글에서 왜 자꾸 <첫 문장 못 쓰는 남자> 얘기를 하는가? 그런데 나는 이 대목에서 아주 중요한 아이디어 하나를 얻었다. 나를 실망시킨 <육식 이야기>를 모욕하는 방법 말이다. 어떻게? 제목을 그대로 놔둔 채 끊임없이 <첫 문장 못 쓰는 남자>에 대해 얘기하는 것이다. 조연이 주연을 대체한다. 속편의 주인공이 시작하자마자 전 편의 주인공에게 목숨을 잃는다.


이 마지막 문장을 읽는 순간 당신은 무성의하게 끝낸 소설을 읽는 기분이 어떤 건지 알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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