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성당 (무선) - 개정판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19
레이먼드 카버 지음, 김연수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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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회색으로 가득하다. 어쩌면 누렇게 변색된 벽지 색인지도 모르겠다. 회색 세계에 낡은 집. 낡은 소파. 낡은 TV. 낡은 자동차. 거기에 낡은 사람이 있다. 그들은 대개 실직자거나 알콜 중독자거나 실직한 알콜 중독자들이다. 남루한 삶이 오래된 물때처럼 착 달라붙어 떨어질 생각을 않는다.


살다보면 내 인생이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건지 자문해 볼 때가 있다. 그럴때면 몰락이 의외로 급작스럽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몰락은 참을성 있게, 은근히, 끈질기게 동작한다. 몰락은 천천히 젖어들어 일상이 된다. 그래서 쉽게 눈에 띄지 않는다. 그것은 중독의 메커니즘을 공유한다. 


몰락을 멈추는 유일한 방법은 그 몰락을 자각하는 것이다.


레이먼드 카버는 1977년 5월까지 알콜 중독자로 살았다. 그는 중독자 요양원에서 나온지 얼마 안돼 출판인 프레데릭 힐스를 만난다. 힐스는 카버의 책 하나를 페이퍼백으로 출간 할 계획과 함께 장편 하나를 쓸 경우 당장 오천 달러를 지급하겠다는 제안을 한다. "레이는 테이블을 떠나 화장실로 갔고, 거기서 울었다." 카버가 화장실에서 뭘 더 했는지는 모르지만 틀림없이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서 이미 한참이나 진행된 몰락의 흔적을 발견했을 것이다. 그리고는 자기에게 아직 그 몰락을 멈춰 세울 능력이 있음을 확인했을 것이다(p. 324 일부 인용).


카버의 소설에 등장하는 실직자와 알콜 중독자와 실직한 알콜 중독자들 또한 종국에 가서는 자신의 몰락을 눈치채고 그 원인을 깨닫는다. 그렇다고 그들의 인생이 순식간에 솟구치는 건 아니다. 왜냐하면 날개는 이제 막 추락을 멈춰 세웠을 뿐이기 때문이다. 추락의 깊이는 깊고도 깊어 구름 너머 빛의 세계까지는 아직 한참을 날아올라야 한다.


카버의 문장은 담담하다. 철저히 긁어 모은 감정은 양철 상자에 담겨 누구의 손길도 닿지 않는 찬장 구석에 놓인다. 


카버의 이야기는 지루하다. 솔직히 너무 지루하다. 뜨거운 여름날 먼지 낀 선풍기가 힘없이 돌아가는 이발소 같다. 사건이라 부를만한 것도 없다. 말했듯이, 몰락은 일상이다.


그런데 카버의 소설엔 감정과 사건이 없기에 오히려 그것들이 닿을 수 없는 뭔가를 보여준다. 그것은 진짜 삶이다. 돌이켜보면 진짜 삶에선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축구장을 만들고 전쟁을 일으키고 술을 만들어 억지로 스펙타클을 짜내는 것이다. 열광으로 가득한 이 거짓 세계에 구원은 없다. 구원은 오로지 구질구질한 현실에만 존재한다. 당신의 인생이 구질구질하다는 건, 역설적으로 당신이 진짜 삶을 살고 있다는 증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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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의 시대 - 뉴스에 대해 우리가 알아야 할 모든 것
알랭 드 보통 지음, 최민우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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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어렸을 때 어른들은 항상 신문을 읽으라고 말했다. 기사로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듣고 사설로 자기 생각을 키우라고 하면서.


<보바리 부인>의 귀스타브 플로베르는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신문이 대량 발행되던 시대에 살았다. 그는 신문이 쓰레기라고 말했다.


"소작농들이 중산층의 4분의 3보다 덜 멍청하다. 중산층은 항상 자기들이 신문에서 읽은 것에 대해 법석을 떨고 한두 군데 신문에서 얘기한 것에 따라 풍향계처럼 빙글빙글 돈다." 플로베르는 오로지 완전한 문맹자와 무지렁이 프랑스인들만이 주체적으로 생각할 수 있다고 보았다.(p.80)


나에게 신문을 읽으라고 종용했던 어른들에게 바보 상자는 언제나 TV였다. 오늘날 나에게 사람들을 바보로 만드는 게 뭐냐고 묻는다면 스마트폰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바보 상자는 신문에서 TV로 TV에서 스마트폰으로 변해왔지만 따지고 보면 그 핵심은 변하지 않았다. 그것은 매체가 쏟아내는 정보들, 즉 뉴스가 문제다.


인간은 뉴스로 세상을 지각한다. 플로베르는 바로 이 문제를 간파했던 것이다.


뉴스는 어머니를 죽이고 불을 지른 아들의 살인을, 이집트 콥트 교도를 산채로 불태운 IS의 만행을, 심각한 부정부패를 저지르고도 뻔뻔하게 웃는 정치인을, 누드톤 드레스를 입은 여배우의 몸매를, 무너진 건설 현장에 깔려 죽은 노동자의 사망 사고를 24시간 365일 쉬지 않고 보도한다.


뉴스를 읽다보면 이 세상은 불의의 사고로 충만하고, 윤리와 도덕은 완전히 무너졌으며 악인과 미치광이로 가득해 도무지 살만한 곳으로 생각되지 않는다. 그러나 실제 지구에선 수 억 명의 사람들이 따뜻한 햇빛과 바람을 맞으며 황금빛 해안을 거닐고 사고 없이 자동차와 전철과 비행기를 타는 등 못해도 55억명의 인간은, 별일 없이 잘 산다.


뉴스는 일반적으로 평범한 일을 보도하지 않는다. 이 말은 뉴스가 세계를 대표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 앞에 펼쳐진 뉴스의 스크린은 너무 거대하고 자극적이라 우리는 그 너머에 진짜 세계가 존재한다는 걸 종종 잊어버리곤 한다. 이 대목에서 알랭드 보통이 제시하는 해결책은 결코 파괴적이지 않다. 보통은 뉴스가 이미 우리 세계를 단단히 둘러싼 피부 같은 것이라 생각한다. 벗겨내거나 다른 것으로 교체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피부의 감각을 더 예민하게, 그 밖의 세계를 투과할 수 있을만큼 투명하게 바꿀 수 밖에 없다. 뉴스는 사람들의 눈을 자극하는 살인, 교통 사고, 전쟁, 경제 위기를 오로지 사실에만 기반해 객관적으로 전달하는 것에서 나아가 그런 것들이 우리의 삶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으며 우리가 그 관계를 통해 무엇을 '더' 깨달아야 하는지 적극적으로 알려줘야 한다. 


보통은 '객관적 사실 보도'를 신성한 소처럼 숭배하는 뉴스의 심장에 칼을 꽂는다. 보통은 뉴스가 문학이 되기를 촉구한다. 기사에 생생한 감정과 사적 의견을 담아 더 호소력 있는 뉴스를 만들어야 한다고 것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이를 미친 소리로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지난 수 천 년간 사실을 각색하고, 허구의 인물을 만들고, 가상의 사건과 공간을 기술해왔음에도 문학이 뉴스보다 더 오래가고 감동적인 '진리'를 전달했음을 생각해보면 과연 알랭드 보통의 주장을 허튼 소리로만 치부할 수 있을지 의심이 간다.


<뉴스의 시대>가 편안한 점은 우리가 자극적 뉴스에만 눈길을 주고 그 내용에서 우리의 삶을 개선한 의미를 찾지 못하는 점을 단순히 대중의 천박함 탓으로 돌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알랭드 보통은 오만한 계몽의 연단에 서서 철학을 이해하지 못하는 대중에게 호통을 치지 않는다. 그는 그 자신이 뉴스에게 권하듯 철학을 더 호소력 있게 만드는 데 큰 노력을 기울인다.


알랭드 보통의 철학은 결코 쉽지 않다. 그러나 그의 책은 충분히 쉽다. 바로 이러한 점이 알랭드 보통의 철학을 인기 있는 대중서로 만드는 힘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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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 동안의 고독 - 1982년 노벨문학상 수상작 문학사상 세계문학 6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안정효 옮김, 김욱동 해설 / 문학사상사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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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란 참 신기하다. 처음 읽을 땐 그렇게 좋던 것이 두 번, 세 번 읽을 수록 실망스러운 게 있는가 하면 처음엔 그렇게 싫던 것이 두 번, 세 번 읽을 수록 참맛이 나는 경우도 있다. 무엇이든 섣불리 판단내리길 좋아하는 나는, 그래서 종종 민망해지곤 한다. 그럴 때면 책 앞에서 절이라도 해야지. 속죄와 송구의 마음으로, 미안함과 고마움을 담아서.


<백년 동안의 고독>을 쓴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콜롬비아 사람이다. 콜롬비아라고 하면 자살골을 넣은 수비수가 훌리건의 총을 맞고 죽은 나라로 밖에 생각치 않는 우리에게 문학을 떠올리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사실 이런 인식은 전세계적으로도 그리 낯선 게 아니어서 문학의 창시자라고 생각하는 건방진 유럽, 미국인들 또한 남미라 하면 그저 혼란한 정치, 군사 독재, 마약, 미개한 백성, 가난 등이 한 솥에서 끓고 있는 광란의 부대찌개 쯤으로 생각했다. 이러한 생각이 바뀐 건 아이러니하게도 자기들의 문학이 한계에 다다랐다는 인식을 하면서부터였다. 그들은 자연스레 남미로 눈을 돌렸다. 그곳에 보르헤스와 마르케스가 있었으니까.


끊임없이 꼬리를 물고 늘어지는 이야기, 마술적 사실주의, 메타 소설 등 새로운 이야기 전략으로 무장한 그들은 일약 세계 문학의 스타로 떠오른다. 보르헤스는 노벨상을 거부했고 마르케스는 바로 이 책 <백년 동안의 고독>으로 노벨상을 수상한다.


보르헤스와 마르케스는 둘 다 남미 문학의 대표자지만 '남미 문학'이라는 한 범주로 담기엔 민망할 정도로 다르다. 보르헤스가 윤회, 시원 등 주로 철학적 관념을 이야기로 승화시키려는 경향이 강하다면 마르케스는(적어도 이 책을 두고 볼 땐) 훨씬 역사적이고 현실적이다. 극단적으로 말해, 더 사람 냄새가 난다.


사실 '마술적 사실주의'만 두고 보면 마르케스야말로 진짜 남미 문학의 아버지다. 그렇다면 도대체 마술적 사실주의가 무엇이냐? 나는 불합리한 이야기로 만들어내는 '메타포'라고 생각한다. <반지의 제왕>을 예로 들어보자. 이 소설은 명백히 환상적이고, 마술적이다. 실제로 마법이 등장하잖아? 그리고 이 책이 씌여진 시기를 고려했을 때 사우론은 '나치'의 상징으로 반지 원정대는 '연합군'의 메타포쯤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반지의 제왕>도 마술적 사실주의의 한 부류로 볼 수 있을까? 아니다. 물론 현실 세계의 관점에서 볼 때 <반지의 제왕>은 매우 황당한 이야기다. 불멸의 나즈굴이 용을 타고 날아다니고 유령 부대가 오크를 무찌르니까. 하지만 그 누구도 이 소설에 용과 오크, 유령이 나오는 걸 문제 삼지 않는다. <반지의 제왕>은 애초에 용과 오크, 유령이 가능한 세계를 만들어 놓고 그 위에서 이야기를 짓기 때문이다. 그런데 마술적 사실주의에는 현실과 환상을 구분해줄 경계가 없다. 독자는 작품을 읽는 순간 그 배경이 우리가 사는 현실 세계라고 믿지만 그 안에선 흙과 석회를 파먹는 여인이 등장하고, 4년 밤낮을 그치지 않는 비가 내리고, 사람이 담요를 타고 하늘로 날아오르는 등 황당하기 짝이 없는 사건들이 벌어진다. 그렇다면 이런 짓을 왜 하는 걸까? 작가는 무슨 이유로 자기 작품을 비합리적 사건으로 채워 독자를 혼란에 빠뜨리는 걸까?


2차 세계대전의 참상을 초현실주의 기법으로 풀어낸 소설 <제 5도살장>의 커트 보네거트는 이 소설이 왜 초현실적이어야만 했는지를 묻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대답한 적이 있다. "그토록 비현실적이고 불합리하며 부조리한 현실을 도저히 기존의 사실적인 이야기 방식으로는 써낼 수 없었다"고. 나는 일찍이 이 휴머니스트의 대답보다 마술적 사실주의의 존재 의의를 명백하게 밝혀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그렇다. 마술적 사실주의는 도저히 있을 법하지 않은 일들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진지하게 그려낸다. 하지만 그것은 거짓말이나 헛소리, 광인의 농담 따위가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현실이 그렇게 합리적이라고 장담할 수 있을까? 사람들은 소설보다 더 소설같은 현실이라는 말을 종종한다. 이 말은 그저 기적처럼 벌어진 일들에 대한 단순한 감탄사일까, 아니면 비로소 깨달은 궁극적 현실 인식일까?


<백년 동안의 고독>은 호세 아르카디오 부엔디아와 우르슬라 이구아란이 늪지대에 둘러 쌓인 마을 마콘도에 정착해 호세 아르카디오와 아우렐리아노 대령과 아마란타를 낳고 그들이 다시 아르카디오와 아우렐리아노 호세와 17명의 아우렐리아노를 낳고 그들이 다시 미녀 레메디오스와 호세 아르카디오 세군도와 아우렐리아노 세군도를 낳고 그들이 다시 호세 아르카디오와 레메를 낳고 그들이 다시 아우렐리아노와 아마란타 우르슬라를 낳고 아우렐리아노와 아마란타 우르슬라가 결혼해 낳은 돼지 꼬리 달린 아이가 개미들에게 납치당해 사라지기까지, 약 100년에 걸친 부엔디아 집안의 흥망성쇠를 그린다. 이야기는 한없이 솟아 올랐다 한 없이 꺼져내리고 양껏 부풀어 올랐다 힘껏 쪼그라드는 등, 좀처럼 대중을 헤아릴 길 없이 난동을 부리지만, 이 난동이야말로 끔찍하고 부조리한 남미 역사의 진면목이라는 사실을, 그러니까 이 이야기가 현실보다 더 사실적임을, 비로소 우리는 깨닫게 된다.


똑똑한 사람들은 왜 이 따위 헛소리를 하는지, 그 따위 전략으로는 원하는 메시지를 전할 수 없음을, 한편으로는 측은한, 또 한편으로는 근엄한 선생님의 마음으로 마술적 사실주의를 탓할지도 모른다. 일찍히 사도 바울은 이런 똑똑이들을 위해 고린도전서 3장 18절에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어리석은 자가 되라. 그리하여야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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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이세욱 옮김, 뫼비우스 그림 / 열린책들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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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확실히 변하는가 보다. 12년 만에 <나무>를 다시 읽으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최초는 2003년 8월이었다. 을지포커스렌즈 훈련을 위해 2군 사령부로 파견을 나간 나는 무더움 여름밤이 몰아닥친 상황실에 앉아 적군의 침입을 기다리고 있었다. 상황실 속의 전쟁이란 참호를 파고 봉쇄선을 펼치고 탐색격멸을 시도하는 전쟁과는 사뭇 다른 것이어서 컴퓨터와 연결된 커다란 브라운관 TV에는 찰리, 에코(CE)로 시작하는 후방 지역의 평편한 지도만이 끝없이 펼쳐졌다.


그 무한의 모눈 옆에서 <나무>를 발견한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인간 정신의 일면은 극도로 단순화된 사물 혹은 일에 침잠해 들어가 해탈을 이루려는 정신의 또 다른 일면을 잡념의 작살로 꽂아 삶의 비린내가 풍기는 부둣가로 끌어 올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심해에서 끌려나온 정신이 언제나 비참한 삶을 살게 되는 건 아니다. 그날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책 한 권을 하룻밤 새에 읽는 경험을 했다.


<나무>는 잡념에 습격당한 내 정신의 일면을 순식간에 몰입의 세계로 되돌려놨다. 내가 주변을 다시 인지하게 된 건 <나무>의 마지막 장을 덮었을 때였다. 나는 2003년의 어느 여름밤, 분명히 한미 연합 훈련이 펼쳐지는 사령부의 중심부에 앉아 있었다. 그러나 내가 기억하는 건 후방을 교란하는 적의 특작부대나 포격을 시도하는 워게임의 커맨드 라인이 아니었다. 오로지 <나무> 만이 있었다는 기억이다. 그 밖에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2015년 겨울, 옛 기억을 떠올리며 나는 이 책을 구입했다. 페이퍼백 이었던 책은 신판과 함께 양장본으로 변했다. 변한 건 그게 전부였을까? 첫 페이지를 펼치는 순간 나는 내 마음이 예전과 같지 않음을 눈치챘다.


믿을 수 없을 만큼 변해버린 첫사랑 앞에서 우리는 어떤 태도를 취할 수 있을까? 불과 몇 초 전, 한 방울의 추억 만으로도 요동을 치던 심장은 간사하리만큼 빠르게 침착을 찾았고, 뜨거운 기대와 열광과 사랑으로 어쩔 줄 모르던 몸가짐은 예의 바르지만 감정을 느낄 수 없는 매너를 두른 채 평정을 지켰다.


12년 전, 딱 하룻밤을 보낸 옛 연인은 우리가 나눈 과거를 하나씩 꺼내 오래된 난로에 넣고 불을 붙였다. 그러나 초라할 정도로 작은 불꽃은 이미 식을대로 식은 냉기에 눌려 깜박깜박 위태롭게 흔들릴 뿐이었다. 우리의 과거는 좀처럼 미래로 이어지지 않았다. 오래지 않아 우리는 이것이 우리의 마지막 대화가 될 것이라는 걸 직감했다. 우리가 서로의 얘기에 귀를 기울였던 이유는 단지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마지막 이야기가 끝나는 순간 자리에서 일어나 난로에 물을 붓고는 건조한 악수를 건넸다. 일말의 여지도 남기지 않는, 완벽한 작별 인사였다.


사랑이 변하는 걸까? 사람이 변하는 걸까? 지나온 세월 동안 내가 성장한 걸까? 아니면 잃어버려선 안되는 뭔가를 잃은 채 살아온 걸까?


답이 무엇이든 중요한건 내겐 더 이상 <나무>가 필요치 않다는 사실이다. 12년 전의 그 날에 대해선, 그저 한 여름 밤의 꿈이었다고 밖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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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티는 삶에 관하여 (2017 리커버 한정판 나무 에디션)
허지웅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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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지웅은 원래 외모만큼 글이 훌륭한 사람이다. <마녀 사냥> 전에도 이미 많은 사람들이 허지웅의 글을 읽고 그의 올바른 생각에 감탄했으며 그 중 일부는 나도 허지웅처럼 글을 쓰고 싶다는 꿈을 꾸면서, 그리 자주 업데이트 되지는 않던 이글루스 ozyzzz 블로그를 찾았을 것이다. 수줍게 밝히자면, 나도 그런 무리 중 하나였다.


나는 나만 알던 스타가 대중의 관심을 받는 순간 급격히 흥미를 잃고 멀리하는 습성을 가졌는데, 허지웅 만큼은 예외였다. 나이가 들어 좀 유해진 탓도 있지만 무엇보다 저렇게 올바른 생각과 글과 말을 가진 사람이 대중과 함께 호흡하는 것이 우리 사회를 위해 바람직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뜨고 난 뒤 이 때다 싶어 내놓는 책들이 풍기는 장사꾼의 냄새도, 그래서 밉지가 않았다.


<버티는 삶에 관하여>는 그 동안 잡지, 블로그, 기타 매체에 투고해 왔던 허지웅의 글모음이다. 주제는 크게 정치/사회, 영화, 그리고 삶. 띄엄 띄엄 쓴 글을 모은 데다가 주제 또한 일관성이 없어 어느 정도의 산만함은 감안하고 봐야겠다 싶었는데, 책을 읽다 보니 생각보다 심했다. 우선 정치/사회는 워낙 당시의 생각이 뜨겁게 담긴 글이다 보니 이제는 달라진 온도차 때문에 지루하고 민망한 경우가 많았다. 영화는 좀 괜찮겠지 싶었지만 천만에! 이 책을 읽는 많은 사람들에게 영화는 또 하나의 암초가 될 가능성이 크다.


우선 최신작이 없다. 영화를 그저 심심풀이 땅콩으로 여기는 사람들에겐 침을 튀겨가며 해주는 진지한 옛날 영화 얘기만큼 황망한 게 없다. <마녀 사냥>의 허지웅에게 끌린 독자 중 과연 몇이나 록키 발보아의 애절한 끈기와 삶에 쩔은 존 맥클레인의 표정에 공감하겠는가? 허지웅은 그저 뇌가 섹시한 반항아가 아니다. 대중의 스포트라이트를 받고는 있지만 기본적으로 마이너한 감성을 지닌 매니아다. 그의 독특한 개성과 감수성은 당신이 기대했던 허지웅의 모습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


쉽게 말해 이 책은 재미가 없다. 


그런데 왜 끝까지 읽었을까? 진솔한 삶의 기록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버지와의 불화, 청년기의 상처, 고시원에서의 생활, 가난과의 싸움. 이 생경한 기록과 만나는 순간 우리는 허지웅의 딱딱해지다 못해 다시 낡고 닮아져 말랑말랑해진, 이제는 피부와 하나가 된 담담한 상처를 본다. 


상처를 공유하는 건 본인에게는 치유를 듣는 이에게는 공감을 선물한다. 우리는 옷을 들추고 서로의 상처를 보이며 친구가 된다.


허지웅 본인이 더 잘 알겠지만 소통을 위해 쓴 글은 때때로, 아니 아주 자주 글쓴이를 오해와 편견의 광야로 추방하곤 한다. 부디 그 외로움과 갈증과 피로를 이겨내고 끝내 또 하나의 책을 들고 우리 앞에 나타나길 빌며, 이 글을 마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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