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이 선생이다
황현산 지음 / 난다 / 2013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저자 황현산은 1945년 생이다. 옛날 사람이다. 오래된 사람의 글쓰기는 이렇다.


넓디 넓은 자갈밭에 앉아 구슬을 찾듯 단어를 고른다. 골라진 단어들을 이리저리 꿰어 문장을 만든다. 만들어진 문장은 창밖에 걸린다. 하루내 말린 문장을 늦은 밤 꺼내와 색을 칠한다. 그리고는 다시 창 밖에 걸어 말린다. 쎄 했던 색깔이 차분히 가라앉아 은은한 빛을 띨 때까지, 바람과 새벽의 냄새가 배 시간과 밤의 소리가 고일 때까지, 칠하고 말리기를 반복한다. 그러기를 며칠, 까만 하늘을 밀고 들어오는 여명과 함께 하나의 글이 탄생한다.


요새는 아무도 이렇게 글을 쓰지 않는다. 아무도 이런 글을 읽지 않기 때문이다. 문화적으로는 영락없이 꼰대인 나는 이런 사람들이 다 죽고 사라졌을 때 우리에게 무엇이 남을지를 고민 한다. 천박한 가벼움이 사막의 모래처럼 끊임없이 날아온다. 이런 문장들이 풀과 나무가 되어 막아주지 않으면 세상은 오래지 않아 폐허가 될 것이다. 나는 평생 모래를 씹고 삼키며 살 수는 없다. 끔찍한 일이다. 그런데 나는 결국 그런 세상을 맞아야 한다. 


곧 사라질지언정 차라리 옛날 사람으로 태어났으면 좋을 뻔 했다. 그들은 전쟁을 겪었고 힘든 삶을 살았지만 땀 흘려 오래 만드는 일을 존중했고 자유를 찾아 싸웠으며 돈을 섬기지 않았다. 그들은 천박하지 않았다. 염치가 있었다. 도리를 알았다.


언젠가 죽음은 이 옛날 사람들을 모조리 찾아가 기어이 그 이마에 칼을 찔러 넣을 것이다. 그러고나면 나는 세상을 떠나 아주 먼 곳으로 갈 것이다. 그 곳에서 옛 기억을 간직한 소수의 사람들이 모여 찬 바람을 맞으며 궁핍하게 살아갈 것이다. 시간이 흐르고 흘러 먼 미래에 인류는 이렇게 떠난 사람들을 우연히 찾게 될 수도 있다. 그들은 우리에게 '원시 인류'라는 이름을 붙일 것이다. 그들은 오래된 인류의 유산을 찾아 기뻐하지만 우리의 말과 글을 이해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 때가 되면 문학은 고고학이 될 것이다. 문학은 새까만 어둠을 겹겹이 둘러 입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우리가 묻어버린 것들
앨런 에스킨스 지음, 강동혁 옮김 / 들녘 / 2015년 9월
평점 :
절판


내 책장은 장르 소설의 무덤이다. 한 번 들어가면 영원히 빛을 보지 못한다. 그건 내 취향탓도 있지만, 솔직히 책 잘못도 있다. 한 번 읽는 것도 끔찍할 만큼 엉망인 책들이 많다. 문장에 신경쓰는 작가는 거의 없다. 인기를 끄는 이유는 줄거리, 반전, 트릭 때문인데 아무래도 불감증 환자인지 나는 이런 것들을 통해서는 심장을 추동하는 흥미진진을 느끼지 못한다. 책에서 가장 좋았던 부분은 주인공이 용의자를 찾아갔다 핀치에 몰린 대목이었다. 나는 두 손을 모아 간절히 주인공이 뒈져버리길 기도했다. 지긋지긋한 장르의 공식이 깨지길 바라면서.


<우리가 묻어버린 것들>은 얼핏 <HQ 사건의 진실>과 비슷한 플롯을 지니지만 HQ보다 어설프다. 나은 점은, 길이가 짧다. 한 200페이지 정도. 대단한 미덕이다. 또 하나, 그래도 작가가 새로운 표현을 써 넣으려 애를 쓴다. '나는 머리를 가득채우고 소용돌이치다가는 저녁 어둠에 부딪쳐 조그마한 물결로 산산이 부서지는 불길한 기분에 잔뜻 짓눌려 있었다' 라거나 '록우드가 저지른 죄의 얼룩이 칼의 이름을 더럽히고 있다' 라거나 '나무의 위엄을 띤 진짜 불이 생겼다' 같은 것들. 때로는 새로운 문장을 쓰겠다는 집착이 과도해 괴물이 탄생할 때도 있지만 중요한 건 노력 아닌가? 게다가 데뷔작이라고 하니까.


장르 소설을 쓴다는 건 특정 공식에 여러 변수들을 채워 넣는 작업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야기를 전개하기 위해 필요한 캐릭터들을 만들어내고 이 캐릭터들이 관계할 수 있는 사건을 만들고 막힌 흐름을 한 방에 뚫어줄 소품을 복선으로 흩어 놓는다. 좋은 소설이라면 이 모든 게 자연스럽게 존재해 그 존재의 목적을 눈치채지 못해야 한다.


존재의 목적을 눈치채지 못한다?


그렇다. 실세계의 캐릭터(우리들)는 어떤 목적을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다. 사르트르 식으로 말하자면 대자적 존재. 우리 인간은 어떠한 경우라도, 결코, 무언가의 수단으로 전락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소설 속의 존재는 다르다. 그들은 사건을 일으키기 위해서,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기 위해서, 또는 범인이 되기 위해서 존재한다. 만일 셜록 홈즈가 코난 도일의 소설에서 범죄를 해결하기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상상해보라. 홈즈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 그는 당장 소설의 세계에서 쫓겨날 것이다.


정리하면, 좋은 소설은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존재가 자신의 목적을 감쪽같이 숨긴 채 음흉하게 잠복해 있는 소설이다. 장르 소설은 이런 일을 잘 하지 못한다. 특히 현실 세계를 배경으로 할 때 그 조악함은 앞니에 낀 고추가루 처럼 끔찍하다. 그런데도 이런 소설이 살아남는 이유는 독자들이 이런 조악함을 눈치채지 못하거나, 장르 소설은 원래 그런 거라고 간주하거나, 부분의 매력에 빠져 전체적인 완성도는 무시하기 때문일 것이다. 마치 달고 맵기만 한 짬뽕을 냠냠 맛있게 먹듯이. 난 이런 류의 '영화'는 참 재밌게 보는 편인데 유감스럽게도 책에서만큼은 셋 중 무엇도 용납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이런 소설을 읽을 때마다 항상 괴롭다. 


나는 또 한 번 내 책장에 무덤을 파야했다. 그걸 보고 <우리가 묻어버린 것들>이 묻는다. 당신이 묻을 게 뭐냐고. 나는 답한다. 


바로 너라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체르노빌의 목소리 - 미래의 연대기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지음, 김은혜 옮김 / 새잎 / 2011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945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거대한 불기둥이 떨어졌을 때 인류는 처음으로 원자력의 위대함을 목격했다. 사람들은 공포에 전율했고 온 몸을 벌벌 떨었으며 그 압도적 무력이 행사한 황폐 위에 앉아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자 사람들의 공포는 점차 매료로 변해갔다. 힘이란 그런 것이다. 그것을 쥐는 순간 두 팔아 잘려나갈 수도 있다는 걸 알지만 마음은 이미 초원을 달리는 야생 준마를 바라본다. 땅위를 내리 찍는 힘찬 다리, 바람에 휘날리는 갈퀴. 저 말을 잡아 길들일 수만 있다면.


그토록 많은 원자력 발전소가 일본에 있다는 건 그래서 아이러니가 아니다. 일본인만큼 원자력의 위력을 실감한 민족은 없다. 그들은 야생 준마의 갈퀴를 틀어 쥐었다. 체르노빌이 폭발했을 때도 그들은 갈퀴를 쥔 손을 놓지 않았다.


저자는 몇 해 전 일본 훗카이도에 있는 토마리 원전을 방문한 적이 있다. 그녀는 그곳의 직원들에게 체르노빌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들은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연민을 담은 미소를 지었다. 그러면서 "우리가 일하는 원전에서는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일"(p. 6)이라고 했다. "원전 건물 위로 비행기가 떨어져도 끄떡없고, 규모 8.0의 강진도 견뎌낼 수 있다"(p.6)고 했다. 2011년 3월 11일 일본 역사상 처음으로 규모 9.0의 지진이 발생했다. 단숨에 태평양을 건너온 해일이 후쿠시마를 덮쳤다. 해일은 건물과 땅과 사람과 동물 나무와 꽃을 가리지 않고 평등하게 집어 삼켰다. 발전소가 정전 됐다. 원자로를 식힐 수가 없었다. 4개의 원전이 열에 삼켜졌다. 국제 원자력 사고 등급은 150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고 아직까지도 그 죽음의 칼을 놓지 않은 체르노빌을 7등급으로 분류한다. 2011년 4월 후쿠시마는 7등급을 받았다. 내 생각에 후쿠시마가 7등급을 받은 건 그 사고 규모가 체르노빌 급이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국제 원자력 사고 등급은 7등급이 끝이었다. 전문가들은 그것보다 더한 피해를 상상할 수 없었을 것이다. 어쩌면 그 보다 더한 피해는 인류의 종말을 의미하므로 분류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을 수도 있다.


두 번의 값비싼 수업을 받았는데도 인류는 여전히 이 준마의 갈퀴를 놓지 않는다. 체르노빌의 주인공이었던 러시아는 세계 7대양에 떠다니는 원전 수십개를 띄울 계획을 세우고 있다. 이 해상 원전은 인도네시아와 베트남에 팔릴 것이다. 체르노빌 사고로 가장 큰 피해를 입었던 벨라루스는 100년 전 7.0의 지진이 발생했던 지역에 원전을 짓고 있다. 한국의 노후화 된 원자력 발전소는 시도 때도 없이 가동을 멈춘다. 건설에 씌여진 자재들은 대부분 납품 비리로 인한 불량품이다.


<체르노빌의 목소리>에는 체르노빌을 경험한 수 많은 사람들의 고백이 담겨 있다. 슬픔은 그 강도가 너무 압도적일 경우 때때로 희극적으로 보일 때가 있다. 체르노빌이 그렇다. 해체작업자들은 정부의 철저한 기만 아래 보호 장구도 없이 불타는 원자로 지붕에 올랐다. 정부는 공황을 조성하는 것이 두려워 주민들에게 보호 장구와 해독 약품을 지급하지 않았다. 주민들은 여전히 자기 집에 앉아 오염된 우유와 감자를 먹고 강에 나가 헤엄쳤다. 그들은 인근 마을의 소개가(재난을 맞아 주민과 시설을 대피시키는 일) 시작됐다는 얘기를 들으면 군인들에게 뇌물을 주며 자기 마을은 빼달라고 부탁했다. 그들은 방사능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것은 냄새도 색깔도 모양도 없었기 때문이다.


한 번은 초원 위에 유령이 서 있는 걸 본 적이 있다. 가까이 가보니 그건 비닐을 뒤집어 쓴 할머니와 젖소였다. 할머니는 젖소와 자신을 방사능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비닐을 썼다고 말했다. 젖소는 싱싱하게 돋아 있는 풀을 우걱우걱 씹어 먹었다. 방사능 구름이 하늘을 덮었을 때의 일이다.


2011년 후쿠시마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높은 방사선 수치 때문에 원격 조종 로봇마저 작동을 멈춘 그 곳에서 유일하게 움직일 수 있었던 건 단백질로 무장한 인공지능 로봇, 인간이었다. 그들은 영웅처럼 달려가 원자로에 물을 뿌리고 잔해를 수거했다. 트럭 운전사들은 일당이 80만 원이라는 말을 듣고 앞다투어 후쿠시마로 달려갔다. 그들은 로봇처럼 바로 죽지 않았다. 차라리 그랬다면 행복했을 텐데... 사람들은 온 몸에서 피를 쏟아낸 다음에야 죽을 수 있었다.


일본 정부는 후쿠시마 산 농산물에는 아무런 해가 없다며 판매 촉진 캠페인을 벌였다. 한국은 일본의 바다에서 잡힌 물고기를 수입했다. 사람들의 두려움은 오래가지 않았다. 방사능은 냄새도 색깔도 모양도 없었기 때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올 댓 이즈
제임스 설터 지음, 김영준 옮김 / 마음산책 / 2015년 8월
평점 :
품절


<올 댓 이즈>에는 인생을 하나의 쓸쓸한 농담으로 만들어내는 힘이 있다. 주인공 보먼의 친구 에딘스는 사랑했던 아내를 기차 사고로 잃는다. 그는 미국 남부에서 태어난 진짜 남부 남자로 언제나 여자를 지켜줘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살았다. 그러나 그는 아내를 홀로 기차 여행에 보냈고 그녀를 죽게했다. 에딘스는 죄책감에 시달린다. 몇 년이 지나 에딘스는 아이린을 만난다. 결혼한다. 에딘스의 집 안엔 전처가 쓰던 물건이 가득 든 서랍이 있었다. 결국 에딘스는 아이린의 성화에 못 이겨 유품을 내다 버렸다. 그리고 둘이 함께 새 집으로 이사간다. 새 집은 아이린이 새로 들인 가구로 채워진다. 에딘스는 오래만에 집을 찾은 보먼과 함께 바에 들른다. 거기서 그는 이런 얘기를 한다.


"아내와 같이 바에 앉아 있는 상상을 했어. 이런 바 말고 좀 더 근사한 데. 여기서 동쪽으로 더 가면 있는 그런 바에서. 그냥 앉아서 이야기하는 거야. 특별한 거 말고 그냥 이 얘기 저 얘기. 방금 들어온 손님에 대해서, 아니면 나중에 우리가 어디로 갈지. 일상에서 스치는 일들 있잖아. 아내는 예쁜 드레스로 멋지게 차려입고. 아, 사람들 옷차림도 얘깃거리겠네. 난 옷을 좀 잘 입고 다니고 싶더라. 어쨌든 같이 얘기하면서 한 시간 정도 재밌게 보내는 거야. 그러다 아내가 화장실에 가면, 그사이 바텐더가 아내 잔이 빈 걸 보고 나한테 묻겠지. 아내분이 한 잔 더 하실 거냐고. 그럼 난 그렇다고 대답하고. 내 아내는 자리로 돌아와도 잔이 새로 채워진 걸 모를 거야. 그냥 들고 한 모금 마시겠지. 그동안 무슨 일 있었는지도 모르고."(p.330)


인간은 평생 온갖 속임수로 세월을 이기려하지만 언제나 세월이 인간을 이긴다. 인생의 정점에 섰을 때 그것은 가능해 보이지만 쌀쌀한 바람이 등을 스치는 계절이 오면 어렴풋이 불길함을 느끼게 된다. 좀 더 추워져 눈이 내리면 두 손을 들어 옷깃을 여미려 한다. 그러나 이미 두 손은 꽁꽁 얼어 붙어 움직이지 않는다. 


모든 것은 흘러간다. 사라진다. 쓸쓸해진다.


이 책을 읽으면 딱 이런 기분이 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코언 형제 - 부조화와 난센스 마음산책 영화감독 인터뷰집
조엘 코언·이선 코언 지음, 윌리엄 로드니 앨런 엮음, 오세인 옮김 / 마음산책 / 2009년 4월
평점 :
품절


이곳을 좀 아는 사람들은 알겠지만 난 코맥 매카시에 환장한 사람이고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 미친놈이다. 코언 형제는 이 소설을 영화화한 감독이다.


원작보다 훌륭한 영화는 없다. 사실이다. 그런데 이 사실이 영화 역사상 딱 두 번 틀렸던 적이 있다. 한 번은 <빌리 엘리엇>의 스티븐 달드리가 마이클 커닝햄의 동명 소설 <The Hours>를 연출했을 때고 한 번은 저 코언 형제가 <No Country for Old Men>을 만들었을 때다. 적어도 내 경험상 지구상에서 이 형제보다 훌륭한 스릴러를 만드는 감독은 존재하지 않는다.


<블러드 심플>이라는 저예산 영화로(지인들을 통해 제작비를 확보했다) 커리어를 시작한 형제는 황금 종려상을 거머쥐고 박스 오피스 성적으로 전투력을 인정 받은 후에도 여전히 저예산 영화를 만든다. 저예산 이라면 지루한 에술 영화거나 이해할 수 없는 컬트 무비라는 편견을 갖는 사람이라면 오해마시라. 코언 형제는 재미를 모르는 사람들이 간섭하는 게 두려워 저예산을 택한다. 형제는 적은 돈으로 흥미진진한 영화를 만드는 데 탁월한 능력을 갖춘 재주꾼이다. 비록 모든 시도가 성공하는 건 아니지만.


형제는 영화로 대단한 예술을 하려는 미학적 야심이 없다. 주어지는 상은 흥행에 좋은 영향을 끼치거나 다음 영화의 투자금을 끌어오는데 도움을 줄 때 말고는 아무런 의미가 있다. 이들은 그저 이야기가 하고 싶을 뿐이고 영화가 눈에 들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형제의 영화에 끊임없이 예술이라는 딱지를 붙이려는 이유는 뭔가 할 얘기를 숨긴듯이 보이는 모호한 이미지들이 숏들을 채우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 이미지들이 숨긴 것처럼 보이는 다양한 상징을 읽으려 한다. 그러나 형제의 말에 따르면 이미지 속엔 어떠한 의미도 숨겨져 있지 않다. 이미지는 그저 이미지일 뿐이다. 형제는 그 상황 그 순간에 그 이미지의 등장이 적합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 장면을 찍는다. 이미지는 순수하게 이야기의 일부라는 얘기다(<No Country for Old Men>은 예외다. 이 영화는 이미 문학적 상징이 풍부한 원작을 각색하지 않고 거의 그대로 영화화 했기 때문이다).


물론 형제의 블랙 코미디를 종종 이해하지 못할 수는 있다. 사실 그들은 좀 꼬인 사람들이고 때문에 그들의 유머 또한 스트레이트하지 않다. 형제는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개그 콘서트>류의 유머를 구사하지 않는다. 이 말은 당신이 무표정으로 장면을 넘긴 순간 "아니 이게 안 웃겨?"하며 돌아보는 재수 없는 친구의 얼굴을 볼 수도 있다는 의미다.


이 책은 상당히 재미있다. 모음집 특성상 동일 내용이 되풀이 되는 건 있지만 많지 않다. 형제는 헐리웃에서 인터뷰하기 어려운 감독으로 악명이 높고 자기 영화에 대해 얘기하는 걸 끔찍이 싫어한다고 알려져 있지만 글을 읽어보면 꼭 그렇지도 않다. 할 얘긴 다 해 준다. 알아야 할 건 충분히 담겨 있다. 아쉬운 건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 대한 내용이 너무 적다는 것이다. 유독 이 영화를 찍고 난 뒤엔 인터뷰 혐오증이 극심해져 인터뷰를 하지 않은 건지 단순히 편집자의 의도인지는 알 수 없다. 코언 식으로 하자면 아마도, "닥치고 영화나 보라"는 얘기가 아닐까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