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권으로 읽는 세종대왕실록 한 권으로 읽는 실록 시리즈 4
박영규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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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에 관심이 많아 작정하고 읽을 생각으로 찾아봤는데 의외로 관련 도서가 없다는 게 희한했다. 심지어 실록 원본마저 제대로 디지털화 된 자료를 찾기 힘들었다. 그러니 아쉬운대로 가장 나은 선택을 할 수 밖에 없지.


나는 한 권으로 어쩌고 하는 책은 잘 믿지 않는데 대체로 지식이란 두께의 한계를 넘어설 수 없기 때문이다. 한 권으로 요약했다는 책들이 다루는 주제는 대개 어마어마하게 방대한 경우가 많다. 그런 걸 한 권으로 묶었으니 차 떼고 포 떼고 얼마나 많은 것들이 버려졌을까?


내가 <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이 아니라 이 책을 택한데도 그런 이유가 있다. 그 방대한 실록을 한 권으로 묶었다면 고개가 갸우뚱하지만 세종실록을 한 권으로 묶는 건 그나마 가능한 일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알고보니 이것도 참으로 허무맹랑한 추측이었다. 세종실록은 조선왕조실록 전체의 10분의 1쯤 되는데 당시 책으론 163권 154책이고 현재 번역본으론 권당 400쪽 책으로 약 45권이라고 한다. 와! 1년 동안 읽기에도 벅찬 양이네.


이런 현실이고 보니 한 권으로 읽든 두 권으로 읽든 어쨌든 읽을만한 분량으로 책을 내준 것 자체만으로 감사한 마음이 든다. 이 책은 시리즈로 신라, 고구려, 고려의 실록까지 갖고 있는데, 앞으로 전체를 탐독해 볼 생각이다.


내가 실록에서 찾고자 하는 건 근엄한 역사적 위인들의 현실적 인간의 모습이다. 위인전의 인물들은 지나치게 추상화 되어 있어 인간이 지닐 수 밖에 없는 입체적 면모를 거의 드러내지 않는다. 이런 걸 읽고 있으면 잘 만들어진 동상을 보는 것 같다. 실록엔 대화가 나온다. 왕과 왕의 대화, 왕과 신하의 대화, 신하와 신하의 대화들 말이다. 말에는 그 사람의 생각이 묻어 나온다. 성격이 묻어 나온다. 그러나 가장 좋은 건 감정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글에 비해 말은 함부로 뱉을 확률이 훨씬 높다. 신하와의 언쟁 중 감정이 격해진 왕들이 쏟아내는 말을 듣고 있으면 내가 직접 내전에 앉아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이들의 대화에 집중하면 특정 사안을 두고 오가는 가상의 대화도 만들어낼 수 있다. 그러면 600년 전의 역사도 어젯밤에 일어난 일처럼 생생한 이야기가 된다. 나에게 역사란 본질적으로 이야기인 것이다.


앞서 얘기했듯 한 임금의 실록임에도 분량이 너무 많아 한 권으로 구성하는 게 엄청나게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작가에게 존경을 표한다.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구성에 있다.


뭔가를 한 권으로 묶고 싶을 때 선택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다짜고짜 사건 중심의 이야기를 풀어내거나 만화로 그리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구성은 역사를 표면적으로 이해하게 만드는 단점이 있다. 그래서 이 책은 세종실록을 요략하여 담았다. 내 기준으로는 이게 아주 중요했다. 실록이라 칭했으면 실록에 쓰인 그 문구들이 그대로 담겨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걸 다 담을 순 없으니 반복되는 사건과 중요도가 떨어지는 것들은 과감하게 빼버렸다.


요략 다음으로 이어지는 건 중요 인물 소개다. 요략이 세종의 치세를 시간 순으로 나열한 편년체라면 이 부분은 열전이다. 정치, 행정, 문예, 국방, 과학에 이르러 세종 대에 활약한 인물들이 총출동한다. 그 유명한 황희, 김종서, 장영실, 박연 등등! 그저 명 재상으로만 알았던 황희가 사실은 부정부패에 끊임없이 연루됐었다는 사실, 북방의 호랑이라 불리며 변방에서 사심없이 우국충정을 다한 것처럼 보인 리얼 마초 김종서가 끊임없이 한양으로 돌아가게 해줄 것을 청한 사실은 역사를 읽는 또 다른 재미다.


마지막으로 부록에는 이조니 호조니 하는 조선시대의 정부 기관이 간략하게 설명되어 있고 추가로 '인물 찾기'를 제공한다. 역사책이라 자칭하는 것들 중에 이 '찾기'를 빼먹는 경우가 참 많은데 읽는 사람으로선 그저 황당할 따름이다. 나중에 글을 쓰거나 별도의 연구를 진행할 때 그 사람이 했던 말, 연루된 사건을 찾기 위해 얼마나 오래 책을 뒤적여야 하는지 아는 사람들은 그 중요성을 잘 알 것이다.


처음엔 반신반의 했지만 <한권으로 읽는 세종대왕실록>은 아주 훌륭한 책이었다. 익숙한 대왕의 업적과 우리가 몰랐던 새로운 면모가 균형을 잡고 나아간다. 이를 토대로 조선왕조실록을 점점 더 깊이 파들어가 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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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문의 여자
오쿠다 히데오 지음, 양윤옥 옮김 / 오후세시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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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인간이 근본적으로 악하다는 생각은 나만 하는 게 아닌 것 같다. 도처에 그 증거가 흘러넘치니 어찌보면 당연한 것일지도. 나아가 인간은 지구에 이빨은 꽂은 기생충이요 따라서 박멸해야할 존재라는 생각을 가질 수도 있다. 이런 생각으로 대규모 테러를 정당화하는 범죄자들이 나오는 소설 또는 영화를 본 것도 같다. 하지만 나는 이런 생각엔 다소 회의적이다. 그 내용이 끔찍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악행을 능동적, 자각적으로 여기게 만드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성경의 유명한 구절을 빌려 말하자면, "그들은 그들이 무슨 짓을 하는지 알지 못한다." 인간은 자신의 행동이 악하다는 자각하에 그런 짓을 벌이는 게 아니다. 그들은 모른다. 무지 속에선 선악조차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오쿠다 히데오는 친애하는 한국 독자 여러분께 보내는 글에 이렇게 썼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양심이라는 것을 갖고 있으나 그것이 발휘되는 건 주로 자신에게 불이익이 돌아오지 않는 경우에 한 합니다. 또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의를 소중한 것으로 생각하지만 그것은 때때로 타인을 비난하는 경우에 한해서만 발동되곤 합니다.

(p.7)


오해하지 말자. 정의나 양심은 그 자체로 선한 것이 아니다. 그것이 어디서 어떻게 발휘되었느냐에 따라 그 성격이 결정된다. 정의나 양심도 악을 위해 봉사할 수 있다. 역사상 가장 강력했던 악들은 모두 이 경우에 등장했다. "정의의 이름으로 널 용서하지 않겠다!"고 외치고 나면 그 어떤 살인도, 거짓도, 전쟁도 용서된다.


<소문의 여자>의 주인공 미유키는 대단히 수완이 좋은 여자다. 그리 예쁜 얼굴이 아닌데도 육감적 몸매와 색기를 이용해 묘한 매력을 뿜어낸다. 거기에 남자들이 넘어가고 넘어온 남자들을 죽여 재산을 차지한다. 돈을 향한 미유키의 질주는 멈추지 않는다. 차지한 재산으로 고급 룸싸롱을 열어 새로운 희생자를 물색하고 평범한 유치원 교사를 유혹해 업소에 취직 시키는가하면 청탁을 받아 잘 나가는 회사의 사장을 추문에 끌어들이기도 한다. 미유키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 절대악이지만 오쿠다 히데오가 주목하는 건 이 악과 은밀히 공모하고 그 덕을 보려는 보통 사람들의 욕망이다. 그들은 미유키를 방패막이 삼아 양심의 가책을 잘라낸다. 그들은 죽었다 깨도 자신이 무슨 악을 저질렀는지 알지 못할 것이다.


장편 소설이긴하나 10개의 에피소드가 서로 느슨히 묶인 구성이다. 긴장감 넘치는 소설을 기대해선 안된다. 에피소드가 전개될 때마다 하나씩 하나씩 퍼즐이 맞춰져가는 미스테리도 아니다. <사랑과 전쟁> 또는 MBN의 <기막힌 이야기 실제상황>을 떠올리면 된다. 구성의 치밀함이나 문장의 완성도는 애초에 이 책의 관심사가 아니다. 그저 멍하니 책장을 넘기게 하는 것. 악이 극단적 스포트라이트로 강조되어 입체감이 떨어지기는 하지만 깊이는 언제나 무념의 독서에 방해 요소니 거론치 말자. 애초에 방향이 다른 것이다.


뭐 대단한 명작이라 부를 수는 없고 이것을 범죄 스릴러로 홍보하는 게 맞는지 의심이 들기도 하지만 그럭저럭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가장 큰 미덕은 미유키라는 거대악을 중심으로 스륵스륵 모습을 드러내는 평범한 악들의 서식지다. 그것은 우리의 일상 생활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악은 도처에 있다. 그 악의 침입을 막기 위해 꽁꽁 문을 닫고 총구를 겨눠보지만 이내 해는 지고 캄캄한 창 위에 내 얼굴이 비친다. 그리고는 깨닫지, 바로 나 자신이 악이었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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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파수꾼
켄 브루언 지음, 최필원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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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의 책을 한 권 고르라면 나는 <밤의 파수꾼>을 선택할 것이다. 아일리쉬 하드보일드 누아르로 소개되는 켄 브루언의 대표작. 아이슬란드가 아니라 아일랜드다. 대영제국을 구성하는 4개국 중 하나인 북아일랜드와도 구분해야 한다. 아일랜드는 20세기에 들어와 영국으로 부터 독립했다. 약소 민족이자(켈트족) 수탈의 대상으로 수백 년을 살아왔지만 불굴의 근성으로 번영을 이뤄낸 국가. 어딘가 한국의 근대화를 소개하는 듯한 뉘앙스도 느껴지는 묘한 친밀감. 이런 변방에서 나고 자란 아웃사이더들은 시니컬함과 자기 파괴적 유머에 있어서 신적 능력을 부여받는 경우가 종종 있다.


가르다(아일랜드 공화국 경찰)에서 잘리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정말 잘리고 싶다면 제대로 노력해야 한다. 공개적으로 대망신을 당하지만 않으면 그들은 거의 모든 잘못을 눈감아 준다.

(p.7)


가르다에서 잘리기 위해 잭은 과속하는 벤츠 한 대를 쫓아간다. 관용차였다. 끈질긴 추적 끝에 뒷문을 열고 내린 사람은 누구나 알아볼 수 있는 재무부 소속의 고위 간부였다.


"선생의 기사가 미치광이처럼 차를 몰았습니다."

"내가 누군지 알고 있습니까?"

"그럼요, 간호사들과 놀아났던 그 얼간이 자식 아니십니까."

"꽉 막힌 친구로구먼. 자넬 당장 잘라버리라고 하겠어. 앞으로 자네에게 무슨 일이 벌어질지 상상이 안 되지?"

나는 말했다. "앞으로 저에게 무슨 일이 벌어질지 정확히 알고 있습니다."

그러곤 그의 입에 강력한 펀치를 날렸다.

(p.10~11)


아일랜드인은 대부분이 알콜중독자다. 알콜중독자들의 대부분은 가르다가 된다. 아일랜드에는 사설 탐정이 없다. 잭은 알콜중독자 사설탐정이 된다. 꽤 유능하다는 명성을 얻지. 수임료가 쌌기 때문에.


<몰타의 매> 같은 걸 상상하면 안 된다. <밤의 파수꾼>에 비하면 <몰타의 매>는 전형적인 헐리웃 스타일의 클리셰 소설처럼 느껴진다. 우리가 아일랜드에 대해 아는 게 전혀 없고 거기에 기대하는 게 아무 것도 없는 걸 알기라도 하듯 <밤의 파수꾼>의 사설 탐정은 어처구니 없는 행동들을 거듭한다. 펍에 앉아 술을 마시다 사건을 수임한 뒤 집에 돌아와 술을 마신다. 가르다에 정보를 요청하지만 거절당하고 용의자의 집에 무단 침입한다. 냉장고에서 스테이크를 꺼내 구워 먹던 잭은 용의자가 들어오자 실수로 그를 죽여 버린다. 다시 쏟아지는 술폭탄. 쓰러져 정신 병원에 갇히고, 알콜중독자의 나라답게 세심히 짜여진 치료 프로그램을 이수한 뒤 퇴원해 다시 술을 마신다. 사건의 극적 해결? 무슨 말을하는지 모르겠다. 그런 건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 수 없이 많은 버스와 기차와 비행기를 놓쳤지만 결국엔 죽음이라는 목적지에 도착하는 인간의 삶과 마찬가지로 사건은 수 많은 실수와 바보같은 조사를 거치지만 결국 해결된다.


탐정 소설에 어울리는 정교한 플롯 따위를 운운하며 폄하하기엔 이 책이 뿜어대는 매력이 너무나 황홀하다. 잭은 내 독서 인생을 전부 건다 해도 찾기 힘들 정도로 독보적 인물이다. 잭은 수영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비가 억수로 쏟아지는 밤 자신이 복수해야 할 놈을 부두 밖으로 던져버리는 인간이다. 잭은 알콜이 자신을 파괴한다는 걸 정확히 알기 때문에 술을 마시는 사람이다. 그는 인생이라는 공을 몰고 파멸을 향해 질주하는 스트라이커다. 진짜 아이러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손에서 책을 놓지 않는 거.


알콜중독자와 독서광, 거기에 아일랜드를 더하면 지독한 유머가 탄생한다. 잭은 사건을 수임한 뒤 옛 끈을 이용해 가르다에 정보를 요구하지만 거절당한다. 그는 감자튀김을 사들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가르다로 추정되는 두 남자에게 무차별 폭행을 당한다.


"남의 일에 함부로 참견하는 거 아니야."

나는 울고 싶었다. "가즈에 신고해."

그들이 내게서 떨어져나갔다. 나는 이렇게 소리치고 싶었다. '감자튀김이 먹고 싶으면 너희 돈으로 사먹어!' 하지만 피로 가득찬 입은 끝내 열리지 않았다.

(p.54)


영화 <콘스탄틴>에서 콘스탄틴은 극적인 구원 이후에 그렇게 좋아하던 담배를 끊고 껌을 씹는다. 어느날 잠에서 깬 잭은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지독한 숙취에 시달린다. 잭은 콘스탄틴과 마찬가지로 자신에게 필요한 게 뭔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내게는 해장술이 필요했다.


나는 이 책을 감히 코맥 매카시의 소설들 옆에 꽂을 것이다. <밤의 파수꾼>을 읽어라. 종이가 닳을 때까지. 세상이 멸망할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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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지옥에서 온 개 민음사 세계시인선 리뉴얼판 12
찰스 부코스키 지음, 황소연 옮김 / 민음사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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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지옥에서 온 개>라는 제목을 보고도 그냥 지나친다면 당신은 심장이 없는 사람이다. 로봇이 시를 쓰는 시대는 기어이 오고야 말겠지만 로봇이 시를 감상하는 시대는 오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조금이라도 자존심을 지키고 싶다면 시를 읽자. 오직 시만이 영혼을 만들 수 있다.


시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문자다. 시는 이계의 감성을 원료로 탄생한다. 시는 알콜중독자의 혼잣말과 비슷하고 정신병자의 이야기와 닮아 있다. 현실 세계에 단단히 뿌리를 내린, 깔끔하고 정갈한 똑똑이들은 그래서 시를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서러워 할 것 없다. 그 무지의 대가로 끝내주는 자동차와 연봉을 얻으니까. 우연히 이계의 언어를 들은 사람들, 그래서 그걸 이해하고 사랑하게 된 사람들에게 남는 것은 가난과 몰이해 뿐이다.


독해의 측면에서 부코스키의 시는 쉽다. 은유가 배제된 뒷골목 일화가 주된 내용이다. 정신병자냐 알콜중독자냐? 알콜중독자다. 그는 실제로도 알콜중독자였다. 술, 원나잇 스탠드, 콘돔, 애인들끼리의 다툼, 항우울제, 스위치 나이프, $6.50 tax included, finger fuck, 정액 분출, 난교. 이것들이 작가의 언어다. 태양이 꼭대기에 떠 있는 동안은 드러나지 않는 어둠의 도시. 찰스 부코스키는 그 도시의 성실한 주민이다. 그는 이 모든 것들을 이용하여 개미처럼 성실히 자신의 인생을 갉아 먹는다. 시란 어쩌면 이렇게 갉아낸 인생의 부스러기가 아닐까? 그래서 매끈하게 빠진 인생에선 시가 나오지 않는 것일 수도.


시를 번역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 같다. 언어가 다르면 운율을 살리기가 어렵다. 세밀한 뉘앙스의 차이도 전달하기 어렵다. 번역된 시는 밋밋해지기 일쑤다. 민음사의 세계시인선은 민음사 답지 않은 아름다운 패키지로 나를 놀라게 했는데 번역문 옆에 원문을 병기하는 것으로 나를 또 한 번 놀라게 했다. 읽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원문을 꼭 읽어 볼 것을 추천한다. 나는 한 편의 시를 원문, 번역문, 원문의 순서로 읽었다.


all I had to do

was


에서 한 박자 쉬면,


be there


에선 목소리를 깔고 읽을 수 있다. 그러면 시인의 속수무책, 어쩌할 도리 없이 낙담한 심정이 더 상세히 느껴진다.


그냥 그렇게

거기


에선 한 박자 쉬어도,


있는 수 밖에.


에서 목소리를 깔 수 없다.


지친 아내들이 맥주에 발동 걸려 달려드는 남편을

물리치느라 애먹는 광경을

구경할 수 있지.


운율없는 시

향기 잃은 꽃.

이 구절의 원문이 궁금해?

만 원이면 알 수 있는 일.


민음사 세계시인선 12, 정가 10,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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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1-05 22: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한깨짱 2022-01-09 10:04   좋아요 1 | URL
네 얼마든지 인용하세요 감사합니다!
 
죽음의 중지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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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아무도 죽지 않았다."

(p.11)


<죽음의 중지>다. 이 사실을 듣고 기뻐하는 사람은 죽음의 중지가 고통의 중지, 질병의 중지, 가난의 중지 등등 온갖 부정적인 것들의 중지라고 생각했을 게 분명하다. 그렇지 않다. 오로지 죽음만이 중지한다. 세상은 지옥이 된다.


나는 아주 오래 전 부터 죽음이야말로 최후의 안식처이며 진정한 구원이라고 생각해 왔다. 사람들은 대개 우리가 발 붙이고 감각하며 살아가는 이 세계를 현실, 죽은 뒤에 가는 곳을 지옥과 천국으로 구분하는데 도대체 어떤 근거로 이런 허무맹랑한 얘기를 믿는지 잘 모르겠다. 내 보기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현실이야 말로 지옥이다. 전쟁과 살인, 강도와 강간, 정치인과 사장님, 부와 빈곤... 그러므로 이 세계로부터 우리를 영영 떠나게 해주는 죽음이 구원이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이 구원일 수 있겠는가?


<죽음의 중지>는 이 같은 구원론이 결코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소설이다. 물론 어조는 이렇게 어둡지 않다. <카인>에서 보여줬던 장난스런 풍자와 시큰둥한 조롱이 주를 이룬다. 사실 사라마구는 두 소설 모두에서 기절할 정도로 늘어지는 만연체 문장을 구사하는데 <카인>에 비해 <죽음의 중지>는 유머의 예리함이 떨어진다. 그래서 좀 지루할 수 있으니 선택하려는 사람은 참고하길 바라든지 말든지.


자, 이제 다시 소설로 돌아가 죽음이 왜 중지했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자. 이 소재는 정말로 매력적이다. 참신하다. 70이 넘은 작가가 생각했다고 보기엔 너무나 탱탱하다. 한 탐정이(하드보일드 한) 죽음이 사라진 이유를 쫓는 이야기를 그리면 현실과 환상을 넘나드는 기가막힌 스릴러를 써낼 수도 있다. 세상을 영원불멸할 지옥으로 만들기 위해 악의 무리가 죽음을 찾아 사냥하는(죽음을 거대한 용으로 묘사하자) 이야기라면 엄청난 판타지가 될 수도 있다. 나도 전에 이런 소재를 갖고 소설을 쓴 적이 있다. 두 편이다. 하나는 거대한 농장을 꾸려 이 땅을 지배했다고 믿는 초창기 인류에 대한 얘기다. 어느날 나그네 하나가 가장 큰 농장을 가진 주인을 찾는다. 주인은 나그네를 대접하며 자신이 어떻게 세상을 굴복시켰는지 얘기해준다. 주인은 정중하지만 거만하다. 넘치는 자신감을 숨기지 않는다. 나그네가 이 모든 것이 영원할 것 같냐고 묻자 주인은 망설임 없이 그렇다고 대답한다. 그 말에 나그네의 마음이 정해졌다. 그는 원래 잠시 머물다 세상을 떠날 생각이었으나 주인의 오만에 마음을 바꾼다. 나그네는 주인에게 이곳에 남아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는지 묻는다. 주인이 흔쾌히 그를 고용한다. 주인이 나그네의 이름을 묻는다. 그가 대답한다. 나의 이름은 죽음. 그렇게 인류와 죽음의 영원한 동거가 시작된다.


또 한편은 이렇다. 앞 소설에서 인간에게 들러 붙은 죽음은 오랜 시간 인간을 죽이며 살아간다. 그러다가 죽음은 한 여자를 만난다. 


사랑에 빠진다. 


그녀와 행복한 나날을 보내는 와중에 죽음은 자신으로 인해 그녀가 점점 죽어간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것은 막을 수 없는 일이다. 죽음이 있는 한 죽음은 사라질 수 없다. 여자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죽음은 자신도 확신할 수 없었던 일을 실행에 옮긴다. 자기 자신을 죽이기로 결심한 것이다.


사라마구의 죽음은 어떻게 와서 어떻게 사라졌을까? <죽음의 중지>에 그 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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