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 세트 - 전11권 - 시공인문교양만화 시공인문교양만화 사기
요코야마 미츠테루 지음, 서현아 옮김 / 시공사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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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대의 남자라면 누구나 62권짜리 '만화 삼국지'를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고전 중에 고전, 방대한 캐릭터, 사춘기 소년의 로망을 폭발시킬 힘과 힘의 대결. 이 모든걸 10권짜리 무시무시한 소설이 아닌 만화로 본다! 앞집 철수도 옆집 만수도 다 봤다. 심지어 철수 엄마도, 만수 엄마도, 이 만화를 볼 때만큼은 혼내지 않았다. 그 만화의 작가 요코야마 미츠테루. 이번엔 그가 '사기'를 그렸다.





요코야마 미츠테루 얘길 좀 더 해보자. 로보트라면 유년기 남자아이에게 딱지나 막대 자석보다 소중한, 그야말로 목숨과도 바꿀 수 없는 존재인데, 과거 거대한 강철 로보트를 직접 조종하며 세계를 지키는 놀라운 소년의 이야기가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철인 28호! 요코야마 미츠테루는 이 철인 28호의 원작가다(더 놀라운건 그가 '요술공주 샐리'의 작가라는 것!). 로봇물을 통해 불세출의 작가가 된 그였지만 어쩐지 이후의 필모그래피는 '역사'를 빼놓고 설명할 수가 없다. 앞서 언급한 '전략 삼국지'를 비롯,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로 이어지는 전국 명장의 이야기, 그리고 오늘 소개할 사기까지 동아시아의 굵직굵직한 전쟁사는 모두 그의 손을 거쳐 만화로서의 생을 얻었다. 역사처럼 진지한 주제를 만화가 따위가 다뤄서는 안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가? 있다면 부디 그 경거망동한 생각을 거두시길. 삼십년 뒤에 퀴퀴한 먼지를 마시며 과거를 탐구할 사람은, 바로 오늘 시시한 만화를 보며 똘망똘망 눈을 빛낼 한 소년일 테니까.



단순한 선과 과잉된 검지. 요코야마 미츠테루의 트레이드 마크!



요코야마 미츠테루의 '사기'는 철저한 고증을 보탰다거나 새로운 역사적 관점을 제시하는 만화는 아니다. 그야말로 만화! 흥미진진한 사실의 덩어리들을 만화답게 시원시원하고 굵직굵직하게 뽑아낸다. '속닥속닥'하는 의성어가 나온 직후 '아니 그자가 음모를!?'하고 놀라는 등장인물의 클로즈업이 되면 사건은 쿵쾅쿵쾅 요란한 소리를 내며 일사천리로 진행된다. 급작스런 전개와 감정의 변화에 때때로 '응?'하는 당혹감을 느끼기도 하지만, 이 단순하고 명쾌한 진행이야말로 만화의 매력 아니겠는가. 쇼파에 앉아 한 시간 남짓을 읽고 나면 제국의 역사는 수십년이 흘러가 버린다. 페이지를 넘길 때 마차 흘러 넘치는 매력적인 캐릭터와 사건은 투자한 시간의 대가로 충분할 것이다.


사기를 읽으며 신나는 또 한가지는 익숙히 알고 있던 단어와 고사성어들의 기원을 발견하는 것이다. 왜 외국의 소설이나 인문서를 보다 보면 단어의 기원을 찾아(주로 라틴어, 또는 그리스어에 기원을 두곤 한다) 서로 다른 단어들끼리의 긴밀한 관계가 밝혀지곤 하지 않는가. 사기를 읽고 있으면 우리 말에도 이런 흥미진진한 기원이 숨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토사구팽, 관포지교 같은 사자성어는 말할 것도 없고 와해, 궤변 같은 일상 단어가 언제 어디서 비롯되었는가를 알게 되면 머리 속에 번뜩하는 느낌표가 새겨지며 절로 무릎을 치는 당신의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여담이지만, 말의 기원을 알게 되면 언어에 대한 이해와 애정이 심오해지는 법이다. 아이를 가진 부모라면, 그리고 그 아이가 좋은 글을 쓰길 원하는 부모라면, 역사책을 꾸준히 읽히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아이들이 한 권에 1,000페이지는 족히 넘어가는 '사기'의 성인 버전을 읽을리는 만무하니 이 만화는 분명 좋은 대체제가 될 것임이 틀림없다.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한 가지 아쉬운 점을 들자면, 항우와 유방의 대결이 보인 빈약함이다. 한나라와 초나라, 장기의 테마가 되기까지 한 이 두나라의 충돌은 '초한지'라는 소설로 각색되어 길이길이 남을 만큼 스펙타클하고 긴장감있는 사건이었다. 이 시기는 한신, 소하, 번쾌, 유방, 항우, 장량, 범증 등 역사에 내놓라 할만한 영웅들을 한꺼번에 쏟아냈으며 하루하루가 말 그대로 '역사'였던 난세였다. 항우와 유방은 세기의 라이벌 아니었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수진'은 엉겁결에 넘어가 버리고 '사면초가'는 들릴둥 말둥 사라져 버린다. 두 영웅의 대결만을 바라본 사람이라면 필시 자기의 서재에 '초한지'를 추가해야 할 것이다. 


'읽어야 되는데 읽어야 되는데' 마음만 먹었으나 그 압도적인 분량에 엄두를 못냈던 사람들에게 좋은 기회다. 빽빽한 통근 버스 에서도, 흔들리는 전철 에서도 쉽게 읽을 수 있는게 만화! 요코야마 미츠테루와 먼지 날리는 전장으로 달려가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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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스틱 (개정증보판)
칩 히스.댄 히스 지음, 안진환.박슬라 옮김 / 엘도라도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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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 프리젠테이션을 잘해야 성공하는 시대가 왔는지 모르겠다. 벤처 붐? 승진 전쟁? 돈! 돈! 더 많은 돈? 요즘 사람들은 시간이 없다. 긴긴 이야기를 하염없이 들어줄 수 있는 사람은 없어. 핵심만 간단히! 현대인들이 얼마나 시간에 쫓기는지 알려주는 일화를 얘기해 줄게. 엘리베이터 피치. 오 마이 갓! 당신의 상사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는 동안 당신은 신규 사업 기획안을 아주 멋들어지게 끝내야 한다구.


세상엔 메시지가 넘쳐 나잖아. 똑같이 해선 기억에 남지 않아. 자극과 충격을 담은 헤드라인을 달아주자구. '장윤정, 노홍철과 결별이유 이상하더니 역시...' 역시 뭐? 하지만 이래야 사람들은 기사를 클릭해. 클릭을 해야 돈이 되지. 고상한척 하지 맙시다. 누군가 그랬지 외눈박이의 마을에선 두눈박이가 왕이라고. 천만에 외눈박이 마을에서, 두눈박이는 그저 장애인일 뿐이야. 진지한 이야기를 아주 오랫동안 무엇의 방해도 받지 않고 계속하고 싶다면, 정신병원을 찾아야 해. 그런 시대가 왔다고.




메시지를 잘 전달하고 싶다. 이런 욕망을 가진 사람은 이미 자신의 메시지를 만든 사람들이다. 내가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아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절대 다수일 때 우리는 사회는 건전한 토론과 밝은 철학으로 건강해 질 수 있다. 하지만 내보기에 이런 책을 찾는 절대 다수는 아직 자기가 어떤 말을 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사람들이다. 해야할 이야기도 없는 사람들이 이야기를 잘 하는 법을 알아봤자 그건 그냥 휘리릭~ 아무 의미도 없는 일이되겠지. 그러니 이 책을 보려는 사람들은 전부 생각해 봐야해. 자기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건지. 그걸 왜 해야하는지. 진정성이란 바로 이런 과정을 통해 만들어지는 이야기의 정수이며, 기억에 영원히 남을 이야기란 거의 예외없이 이 진정성을 통해 빚어지는 법이니까. 전략이니 포장이니 하는 것들은 그 다음 순서에 불과하다고. 그래서 난 이 리뷰의 제목 일부러 이렇게 지었어. '스틱!을 읽고'





사실 이 책은 매우 훌륭하다. 흔히 '뜬구름 잡는 얘기'라고 말하지 않나. 이 책엔 그런 내용이 없다. 스틱!은 매력적인 이야기를 만드는 6가지 법칙(단순성, 의외성, 구체성, 신뢰성, 감성, 스토리)을 제시하고 있는데 그 이름의 상투성으로 볼 때 이 책 또한 애매하고 모호한 이야기를 되풀이하고 있을거라는 걱정이 앞설지도 모르지만, 그렇지 않다. 스틱!은 애매함의 함정을 벗어나기 위해 수 많은 사례를 제시한다. 이 사례들만 따로 정리해 기억에 새겨둬도 얼마든지 훌륭한 카피라이터, 작가, 연설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의 가장 위대한 점은 뭐니뭐니해도 '재미가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책 한권을 읽는데 얼마나 많은 어려움을 겪는지 아는가? 이 책은 거의 450페이지에 걸쳐 자신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루한 구석은 없다. 특히 주제를 떠나, 저자가 보여주는 문장력은 스티븐 킹의 '유혹하는 글쓰기'에 플라잉 니킥을 먹일 만큼 유려하고 재미있다. 세상 사람들의 30%만이라도 이 책의 저자만큼 자신의 법칙에 충실하다면, 이 세상이 이토록 혼란스럽지는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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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에서 철학하기 - 낯익은 세상을 낯설게 바꾸는 101가지 철학 체험
로제 폴 드르와 지음, 박언주 옮김 / 시공사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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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계가 오로지 하나의 모습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건 착각이다. 그건 새누리당 지지자나 기독교도들의 생각에 지나지 않아. 농담이에요.


집에 가는 길을 일부러 돌아가본 사람은 안다. 내려야할 정류장을 일부러 지나쳐 본 사람은 안다. 기어가는 개미의 눈높이로 그 길을 봐본 사람은 안다. 내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 세상이, 이 익숙한 세계가, 얼마나 낯선지를. 농담이 아니다. 지금 당장 집 밖으로 나가 쭈그려 앉아 문을 올려다 보라. 그리고 느껴보라 당신이 발로 차 닫았던 그 낡고 녹슨 철문이 얼마나 위압적으로 다가오는 지를.


사람들은 상황이나 사건을 다양한 시점으로 바라보는 것에는 익숙하다. 그러나 사물들에 대해서는, 그것들을 빡빡한 질서 속에서 엄격히 불변을 고수하는 수도승 쯤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우리가 사물의 다양성을 알아채지 못하는건 우리가 그들에게 귀를 기울이지 않기 때문이다. 마음을 가다듬고 그들에게 집중해 보라.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을 뽐내고 싶어하는 사물들의 환호성이 들리지 않는가?


왜 낯선 곳에서 철학은 나오는가? 철학은 지식에 대한 사랑이다(Philosophy는 지혜를 사랑하다 라는 뜻). 지식은 단연코 의문에서 나온다. 의문은 호기심을 연료로 한다. 호기심은 새로운 것을 발견했을 때 샘솟는다. 


우리는 생각없이 소리를 지르며 방안을 뛰어다니는, 마냥 즐거워만 보이는 어린아이들의 삶을 부러워 한다. 나도 저 아이들처럼 생각없이 살았으면 좋겠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어린이야 말로 진정한 사색가다. 


'아빠 나는 왜 태어났나요? 그건 엄마가 너를 임신했기 때문이야. 왜요? 아빠가 엄마를 사랑했기 때문이지. 왜요? 엄마가 예뻤거든. 왜요? 얘야 시간이 너무 늦었구나 이제 잘 시간이야'


어린이는 세상의 모든 것을 강박적으로 탐구한다. 왜? 이 모든 세상이 낯설고 흥미롭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따분함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이 세계는 알고 싶은 것으로 가득한 바다다. 아이들은 매일같이 그 바다로 나가 호기심을 충족시킬 만큼 가득가득 지식을 낚아 올린다. 


불행하게도 아이는, 자신이 많은 것을 안다고 느꼈을 때 어른이 된다. 그리고 그 순간 세계에 대한 질문을 멈춘다. 우리가 철학을 포기한 이유? 그건 우리가 이 세게에 대해 더 이상 궁금한게 없기 때문이다. 맑고 푸르던 호기심의 바다는 검고 끈적끈적한 일상이 되어 작은 배를 집어 삼킨다. 배는 심해로 침전하고, 우리에게 남은건 전동차의 빈 자리를 향해 질주하는 탐욕과, 앉자 마자 잠에 드는 한심함과, DMB로 야구나 시청하면 그만인 별볼일 없는 퇴근길이다. 





우리는 세상이 단 하나의 모습으로 존재하지 않음을 여전히 모른다. 우리는 하늘을 타고 내려오는 처마 끝의 봉긋함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걸어가며 볼 때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걸어가며 볼 때 질적으로 완전히 다르다는 사실을 모른다. 그걸 눈치 채지 못하는 이상 우리의 일상은 여전히 혐오스럽고 지리멸렬한 썩은 생선이다. 그러나 이 세계가 더 이상 익숙한 하나의 모습이 아님을 깨달을 때, 호기심의 톱니바퀴는 다시 구르기 시작하고, 탐구욕에 불타올라 일상을 따뜻한 애정으로 채우기 시작한다. 이것이 '일상에서 철학하기'가 필요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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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이재익, 크리에이터 - 소설.영화.방송 삼단합체 크리에이터 이재익의 거의 모든 크리에이티브 이야기
이재익 지음 / 시공사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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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나 자신을 크리에이터라고 생각할 땐, 내 주변에 친구가 없다고 느낄 때다. 창의력이란 별다른게 아니다. 세상을 다르게 보는 것. 반대로 생각하는 것. 삐딱하게 바라보는 것. 모두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을 당연하지 않게 받아들이는 것. 매사를 낯설게 느끼는 것. 이 모든 것엔 한가지 공통점이 있다. 주변 사람들을 당황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지금 당장 옆에 사람을 붙잡고 '당신은 따뜻한 봄날의 아침에서 죽음을 부르는 권태가 느껴진다고, 물을 마시면서 동시에 오줌을 싼다고, 수박은 숭고하기 때문에 하루에 정확히 두 쪽씩만 야금야금 먹어야 한다고' 말해 보자. 정중한 사람이라면 '아 네 그러시군요'하고 다시는 당신과 얘기를 하지 않으려 할것이고, 대개는 '어디 아프냐?'라고 할 것이며, 성스러운 사람들은 당신을 치유하기 위해 기도를 올릴 것이다. 중요한건 이 세 부류중 어디에도 진짜 당신의 친구는 없다는 사실.






창조의 순간엔 언제나 내적 필연성이라는게 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한건 그것이 보기 좋을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빛이 있으라 하니 빛이 생겼고, 역시나 '하나님 보시기에 좋으셨다'. 물론 하나님은 내적 필연성만 가지고도 이 세상을 창조할 수 있는 분이시다. 그 분은 굳이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이 세상을 창조한 이유를 설명할 필요가 없다는 얘기다. 하지만 우리 평범한 인간들은 내적 필연성에 더불어 외적 필연성을 갖다 붙여야만 모두에게 인정받는 창조물을 만들 수 있다. 뭔가를 만들게 하는 동기는 돌발적이고, 직관적이며 불가해한 면이 있다. 크리에이터들은 그 작은 알갱이를 가져다 언어를 붙이고, 그림을 그리고, 노래를 입혀 세상에 꺼내 놓는다. 그런데 그 언어와 그림과 노래는 '설득력'을 가져야만 한다. 모두가 이해와 공감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그게 바로 외적 필연성이다. 그런데 이 외적 필연성이란 것은 언제나 근사한 모습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반짝반짝 빛나던 내적 필연성, 당신에게 창조를 명한 그 착하고 귀여운 소녀는 미숙한 외적 필연성으로 인해 괴물같은 털복숭이로 성장한다. 으악! 하지만 당신의 눈엔 아직도 콩깍지가 씌여 있다. 사람들은 털복숭이를 보고 괴물이라고, 정직하게 충고하지만 당신에겐 그 모든 사람들이 무지하고 천박한 대중으로 보인다. 

으아니 늬들이 예술을 알아?


그래서 모든 창조자는, 고독하다.





에고의 화신, 치열한 고민, 더러운 성격, 짜증나는 히스테리, 잘린 귀, 더러운 마루 바닥을 구르는 가난, 발 뒤꿈치에 매달린 고뇌, 심장에 새겨진 흉터, 어깨에 앉은 우수, 아티스트를 상징하는 모든 궁상맞고 우울한 찌꺼기들이 이 책엔 없다. 저자의 목표를 들어보자.


'나는 소설가이자 방송인이자 시나리오 작가로서 한창 현업에서 뛰고 있기에 이책에서는 뜬구름 잡는 이론이 아니라 실질적인 이야기를 많이 하려고 했다. (중략) 이 책이 나와 같은 동료 크리에이터들, 또는 그런 일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한 줄기 빛까지는 몰라도 한 끼 별미 정도는 되었으면 한다. 가격도 딱 그 정도이니.'(p. 7)


이재인은 소설가로 등단하여 영화판에서 시나리오를 쓰다 SBS 라디오 '컬투의 두시 탈출'을 연출하고 있는 방송국 PD다. 그는 베테랑 작가이며 대중의 사랑을 쟁취한 성공적인 대중예술가다. 대중예술의 최전선에서 펼쳐지는, 그의 직업에 대한 소명의식과 프로페셔날리즘은 리얼 버라이어티 예능 프로를 보는 것처럼 스피디하고 톡톡튄다. 


이 책엔 예술에 대한 골치 아픈 고민, 당신을 기어이 우울의 늪에 빠뜨릴 그 개떡같은 감상이 등장하지 않는다. 이재익은 약삭빠르고 명민한 대중예술가로서의 면모를 보여준다. 이재익은 예술 혹은 예술같은 일을 하면서 스포츠카를 몰 수 있는 법을 가르쳐 준다. 21세기를 크리에이터로서 '살고 싶은' 사람, 동시에 한 명의 생활인으로서 '살아가야만' 하는 사람이라면 이재익의 명민함은 괜찮은 길잡이가 될 수 있다. 


대중예술가가 되고 싶은 모든 사람들이여, 이 책을 보라.


이상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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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Q84 1 - 4月-6月 1Q84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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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Q84를 읽고 창피한 글을 쓰고 싶지는 않다. 키보드 위에 올려진 열개의 손가락을 바위처럼 단단하고 칼날 보다 예리한 하루키의 시선이 무겁게 누르고 있다. 그의 글 안에서 내 손가락은 자유롭지 못하다. 1Q84, 뒤틀린 시간과 공간의 통로를 통해 하루키는 내 글을 지켜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모든 글에 대한 글은 어쩌면 그 글의 '공기번데기'일지도 모르겠다. 마더는 도터의 탄생을 알고 있어. 1Q84에서 도터는 마더와 동일한 위상을 유지하지만 이 현실에선 아무리 야심차게 준비한 도터라도 결국엔 마더의 찌꺼기에 불과해. 1Q84를 읽고 창피한 글을 쓰고 싶지는 않아. 




1Q84를 사야 되나 말아야 하나, 그 맥없는 고민에 답을 얻기 위해 이 글을 읽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무라카미 하루키다. 읽을 사람은 읽는다. 그렇다면 나는 누구를 위하여 이 글을 써야 하는가. 나 자신이다. 나는 창문을 열고 컴퓨터를 킨다. 기분 좋은 가을 바람의 냉기가 창문을 통과해 살갗에 와 닿는다. 적당한 온도다. 나는 딱딱한 의자에 앉아 자리를 잡고 눈을 감는다. 지금부터 나는 1Q84의 공기번데기를 만들 것이다. 의식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엄숙한 분위기다. 아직 달이 뜰 시간은 아니다. 하늘에 두 개의 달이 떠 있다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번째 의문, 아오마메의 이야기는 덴고의 소설인가?


아오마메의 세계에 두 개의 달이 뜨기 시작했을 때 부터, 나는 그것이 덴고의 소설이라고 생각했다. 덴고는 '공기번데기'의 리라이팅을 통해 자신의 목소리를 찾는다. 그리고 두 개의 달이 뜨는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거기에 아오마메가 등장한다고 볼만한 여지는 전혀 없지만, 어느 순간 아오마메의 이야기에 일그러진 녹색 달이 등장하고 평행선을 달리던 두 레일이 덜컹하는 전환기의 당겨짐과 함께 서서히 한점으로 모여든다. 소설가가 하나의 세계를 써내려 가듯이 우리는 우리 자신의 삶을 스스로 써내려 간다. '책을 쓰는 것'은 '인생을 산다'의 은유로써 손색이 없다. 덴고는 장편 소설을 쓰고 있지만 그것은 동시에 자기 삶을 축조해 나가는 것과 같다. 그는 현실 세계에서 만나고 싶은 아오마메를 자신의 소설에 등장시킨다. 거듭 강조하지만 여기서 '쓴다'는 '산다'와 같다. 덴고는 소설을 쓰면서 그 소설을 산다. 덴고의 소설은 덴고의 바람이다. 그리고 거의 예외 없이 '현실'은 강렬한 바람에서 탄생한다. 


(스포일러 있음)


소설과 현실이 지나치게 가까워지자 덴고는 자기 이야기의 주도권을 상실한다. 덴고는 더 이상 소설을 쓸 수 없다. 현실은 소설과 지나치게 뒤엉켜 버리고 덴고 자신 조차 이것이 소설인지 현실인지 분간할 수 없는 상황이 이어진다. 여기서 분명한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야기는 계속되야 한다는 것이다. 급박한 상황에서 하루키는 자신이 직접 화자의 역할을 맡기도 한다(하루키는 3권에서 딱 한번 해설을 한 뒤 바람같이 사라진다). 하지만 좀 더 안정적이고 필연적인 화자가 필요하다. 그래서 우시카와가 등장한다. 그 우시카와는 덴고와 아오마메의 삶에 끼어든 '이물'이지만(생김새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공교롭게도 그 끼어듦이 세계에 균열을 만들고 이것을 통로로 두 사람은 재회한다. 여기서부터 다시 하루키의 소설이 시작된다.


1Q84는 책의 저자와 책 속의 등장인물들이 써내려가는 소설(삶)이 복잡하게 얽혀들면서 다층적인 구조를 형성한다. 그 애매모호함과 뭔가 있을 듯한 기대감이 시종일관 강력한 몰입도를 만들어 낸다. 하루키 소설의 강점은 뭐니뭐니해도 이 몰입도다. 아무런 관련이 없어 보이는 두 개의 이야기가 번쩍하고 스쳐 지나가며 섬광을 내뿜을 때, '헉'하는 신음 소리만이 독자의 텅 빈 머리를 울린다.



리틀 피플은 무엇인가?


나도 모른다. 알 수 없다. 리틀 피플을 하나의 의미로 결정짓기에 우리에게 주어진 힌트는 너무나 적다. 조지 오웰의 빅 브라더는 세상의 모든 권력을 쥐고 있는 강력한 힘이었다. 오늘날 빅 브라더는 예전만큼 쉽게 눈에 띄지 않는다. 그들은 평범한 얼굴을 하고 우리 속에 끼어들어 있지만 우리는 결코 그들을 알아채지 못한다.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대로 우리의 생각대로 우리 자신을 통제하고 있다고 믿지만, 오늘날 권력이 인간을 지배하는 양상은 훨씬 교묘하고 은밀해졌다. 하루키는 빅 브라더에게 현대적 의미의 새로운 이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그리하여, 리틀 피플?



공기번데기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나도 모른다. 알 수 없다. 공기번데기를 하나의 의미로 결정짓기에 우리에게 주어진 힌트는 너무나 적고 또한 일관적이지 못하다. 


나는 도터와 마더가 연결되어 있다는 걸 안다. 덴고가 아오마메의 공기번데기를 보고 그의 손을 잡았을 때, 헤클러&코흐 사의 권총을 목구멍에 쑤셔 넣고 방아쇠를 당기고 있던 아오마메의 손가락이 멈춘다. 


나는 도터와 마더의 모습이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 안다. 덴고가 목격한 아오마메의 도터는 10살의 아오마메였다. 


나는 도터가 매개자라는 가정을 할 수 있다. 후카에리의 도터는 리틀 피플과 이 세상을 연결한다. 아오마메의 도터는 덴고와 아오마메를 연결한다. 아오마메의 도터가 어린 시절의 모습이었던 이유는, 덴고의 기억이 20년 전에 멈춰 버렸기 때문이다. 


어쩌면 도터는 마더의 간절한 '바람'이 현실화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따지면 덴고가 아버지의 병실에서 봤던 공기번데기는 아오마메의 도터가 아니라, 바로 덴고의 도터일지도 모르겠다. 



하루키는 자신의 문학 세계를 어떻게 평하고 있을까?


스토리는 대단히 재미있게 짜였고 마지막까지 독자를 견인하는 힘이 있지만, 공기 번데기란 무엇인가, 리틀 피플이란 무엇인가 하는 점에서는 우리는 마지막까지 미슨터리어스한 물음표의 풀 속에 내던져지고 만다. 어쩌면 그것이 작가가 의도한 점인지도 모르겠으나, 그러한 자세를 '작가의 태만'이라고 받아들이는 독자들이 결코 적지 않을 것이다.


(중략)


이런 식으로 의미심장한 듯한 뉘앙스만 풍기는 자세에 관해 머지않아 진지한 고민을 요구받게 될 가능성이 있다. (Book2, p.145~146. '공기번데기'에 대한 비평 중)


"스토리는 대단히 재미있게 짜였고 마지막까지 독자를 견인하는"데 성공했다고 한다면, 어느 누구도 그 작가를 태만하다고 나무랄 수는 없지 않은가. (Book2, p.146. 덴고의 대사)



에필로그


설명을 듣지 않으면 모른다는 건 설명을 들어도 모른다는 것이다(책 본문 중). 그리하여 이 소설엔 해설이 없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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