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의 심장 열린책들 세계문학 213
미하일 불가꼬프 지음, 정연호 옮김 / 열린책들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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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 11월, 볼셰비키 혁명은 인류 역사상 최초의 공산주의 정권을 탄생시킨다. 드디어 프롤레타리아의 해방, 비로소 종말을 맞은 억압의 역사. 수고롭고 짐진 자들의 모든 근심이 완전히 사라질 것처럼 보이던 시대, <개의 심장>의 미하일 불가꼬프는 그 희망의 소용돌이 속에서 도리어 환멸을 본 소설가였다.



<개의 심장>, 그리고 <악마의 서사시>


이 책에 수록된 두 편의 소설 <개의 심장>, 그리고 <악마의 서사시>는 모두 공산주의 사회의 천박함과 부조리를 고발한 작품이다. 


<개의 심장>에선 끓는 물에 화상을 입은 옆구리를 질질 끌며 떠돌아다니는 개 샤릭이 등장한다. 어느날 외과 의사 필립 필리뽀비치는 이 개를 데려와 따뜻히 입히고 먹이는데, 그것은 샤릭에게 인간의 뇌하수체와 생식기를 이식하기 위해서였다. 이 그로테스크한 실험을 통해 개 샤릭은 인간이 된다. 인간이 된 샤리꼬프(개인간 이라는 뜻)는 가지지 못한 것이 폭력 행사의 자격이 되는 양 충천해 있던 그 시대의 프롤레타리아처럼 온갖 폐 끼치기가 자신의 권리라고 생각한다. 겉모습은 인간이지만 여전히 지성이 부족한 샤리꼬프. 불가꼬프는 받아야 될 이유도 모르는 채 권력을 부여받은 인간이 얼마나 단순하고 천박해 질 수 있는지 인간이 된 개 샤리꼬프의 행위로 은유한다. 


<악마의 서사시>는 공산주의 중앙 집권 체제의 비효율과 인간성의 말살을 조롱하는 작품이다. 볼셰비키 혁명의 주역 레닌은 강력한 중앙 집권 체제를 꿈꿨고 실제로 그러한 국가를 건설했다. 강력한 중앙 집권 국가는 모든 생산과 소비 기타 등등 인간의 행위를 계획한다. 이후 체제는 이것을 맹신하고 예외를 인정치 않는 권위주의적 사회로 변질되는 데 특히 소비에트 사회는 의문을 제기하는 자를 반혁명으로 규정함으로써 '인간의 생각하는 능력'을 완전히 마비시킨다. 생각이 마비된 인간은 창의적으로 행동할 수 없고 창의가 결여된 인간은 다양한 예외가 존재하는 세상 일에 기계적 반응으로 일관할 뿐이다. 결국 체제는 끔찍한 비효율 덩어리로 전락하고 인간은 하나의 부속품이 된다.


불가꼬프는 개에서 인간으로 급변한 '샤리꼬프'의 만행을 들려줌으로써 혁명처럼 급진적인 변화가 이 세상에 얼마나 큰 혼란을 초래하는지 보여주고자 했다. 불가꼬프는 <악마의 서사시>를 통해 그 대단한 혁명이 이뤄낸 것이 그토록 무능하고 비효율적인 정부였는지 의문을 던진다.


물론 역사가 보여준 공산 국가의 실체는 불가꼬프의 묘사대로였다. 프롤레타리아에게 혁명은 그저 분노를 배설할 화장실에 불과했고 스탈린, 마오쩌둥, 김일성 같은 사람들에겐 권력을 차지할 구실에 지나지 않았다. 진짜 해방은 어디에도 없었다. 결과적으로 혁명은 인류 역사상 가장 끔찍한 사기가 됐다. 하지만 나는 불가꼬프에게 묻고 싶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가능한 방법이 과연 무엇인지를.


불가꼬프는 우리가 충분한 시간을 가져야 한다고 말하지만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가 나타나고 국가라는 것이 형성된 이후 착취의 구조는 거의 변한 적이 없다. 우리는 수 천년의 시간을 가져왔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변하지 않았다. 아니 변할 생각 조차 하지 않았다. 인류의 역사는 오랜 시간을 두고 점진적으로 발전하기도 하지만 놀라운 진화는 언제나 급진적 변화를 통해 이뤄져왔다. 공산주의 혁명이 그 과정에서 많은 실수를 저질렀고 사악한 독재자들 때문에 변질된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그 순수한 가치마저 폄하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공산주의 혁명은 인간은 모두 평등하다는 사실을 실제로 확인한 사건이었으며 우리에게 또 다른 길이 있음을 보여준 중요한 가능성이었다.



그러나 분노가 거세된 세대에게...


임상수 감독의 영화 <돈의 맛>에 보면 회장 비서 영작(김강우 분)이 회장 아들 윤철(온주완 분)에게 싸움을 거는 장면이 나온다. 윤철의 수모를 참다 못한 영작은 차를 세우고 윤철을 차 밖으로 끌어낸다. 힘으로는 이길 수 있을 거라 믿었던 영작은 그러나 주먹으로도 윤철을 이기지 못하고 길바닥에 뻗어버린다. 피착취자 최후의 수단마저(힘, 혁명) 무용지물이 되는 것이다.


임상수 감독은 분노하지만 철저하게 짓밟히는 우리 세대의 무력감을 표현하려 했던 것 같다. 촛불 시위에 나섰다 물대포에 쓰러지는 시민의 마음 같은 것 말이다. 그러나 이것도 다 옛말이다. 


영작은 실패했지만 분노할 줄 안다는 면에서 일종의 가능성을 갖는다. 그러나 지금의 우리는 다르다. 우리는 짜증을 내는 일은 있어도 분노할 줄은 모른. 우리의 분노는 완전히 거세됐다. 뭔가를 해야한다는 건 뭔가가 억압하는 것만큼 짜증나고 귀찮은 일일 뿐이다. 그런 얘기를 하려면 그냥 닥쳤으면 좋겠다.


사실 이 소설은 나에게 거의 아무런 흥미도 주지 못했다. 혁명이란 우리 세대의 관심사에서 뿌리 끝까지 사라져버린 단어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도 변할 수 있겠지. 사람은 늘 변하는 법이니까. 이 상황이 더 악화되는 방향으로 변할 수도 있다는 게 함정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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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순 - 개정판
양귀자 지음 / 쓰다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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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 대처하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다. 그저 아무런 생각없이 시간이 다하기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모든 것엔 이유가 있음을 믿고 버티는 사람도 있다. 그런가하면 속속들이 삶을 파헤쳐 기어이 그 존재의 이유를 찾아내겠다는 사람도 있다. 마치 그 이유를 알아내면 다시는 삶이 줄 고난과 모순에 고통 받지 않을 거라 생각하는 것처럼.


<모순>의 주인공 안진진은(25살, 여) 세번째에 해당하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어느날 문득 자기 자신을 설명하라는 스스로의 요구에 맞닥뜨린다. 나는 누구인가. 내 삶은 어떻게 여기까지 흘러 왔는가. 그 요구에 정면으로 부딪치기로 결심한 안진진은, 그러나 곧 자기 삶을 설명하기 위해서 또 다른 누군가의 삶이 필요하다는 걸 알게 된다. 그것은 엄마, 바로 엄마의 삶이었다. 그녀는 마음 속 구석진 곳에 놓여 있던 녹슨 상자를 꺼내 연다. 상자 안에는 엄마의 삶이 들어 있었다. 빛바랜 엄마의 삶을 들어올리자 안진진은 그 뒤로 주렁주렁 딸려오는 삶의 모순을 목격하게 된다. 



엄마와 이모


안진진의 엄마와 이모는 일란성 쌍둥이다. 두 여자는 한날 한시에 태어났다. 두 여인은 일란성 쌍둥이라는 말로는 부족할만큼 지독하게 닮았다. 그러나 똑같은 조건에서 태어나 똑같은 환경에서 자란, 지독하게 닮은 두 여자의 삶은 결혼 후로 급격하게 달라지기 시작한다. 


나의 엄마는 말썽꾸러기 술꾼 남편을 만나 평생 가난하게 살았다. 남편은 술을 먹고 패악질을 하다 정신을 차리면 모아둔 돈을 훔쳐들고 집을 나가 몇 일이고 몇 달이고 돌아오지 않았다. 아이를 기르기 위해 엄마는 시장에서 좌판을 벌인다. 팬티와 양말을 팔아 몇 십년간 아이들을 먹이고 가르쳤다. 그래, 이제야 좀 숨을 돌릴까 싶었더니 이내 막내 아들이 살인미수로 감옥에 갇히고 만다. 그러나 언제나 그랬듯 엄마의 삶에는 오히려 활력이 넘친다. 마치 고난이 살아갈 동기라도 되는 듯이, 펄펄 끓는 활력은 두터운 절망 앞에서도 엄마의 삶을 나아가게 한다. 


반면 이모의 삶은 고급 병원의 무균실처럼 깨끗하다. 이모에겐 술꾼 남편이 없다. 아이들은 한 번의 말썽도 없이 모두 훌륭하게 자랐다. 이모에겐 단 한명의 시끄러운 인간도 없다. 그런데 이모의 삶에는 자그만 새싹하나 틔울 수 없는 팍팍한 건조함이 있다. 박제된 동물은 살아 있는 생명보다 더 생생하고 윤기나는 털을 뽐내지만 가짜라는 것을 숨길 수 없듯이 이모의 삶은 너무나 이상적이어서 도리어 인간의 삶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행복으로 가득차 있지만 진짜같지 않은 삶. 이모는 끝내 그것을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삶이 스스로 끝나기를 기다리지 않았다.



고난의 이유


영화 <매트릭스>에서 아키텍트가 자신을 찾아온 네오에게 매트릭스의 버전에 대해 설명해줬던 장면이 기억난다. 거기서 아키텍트는 매트릭스의 최초 버전이 오로지 행복으로만 가득찬 세계였다고 말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오히려 행복을 견디지 못하고 죽어나갔다. 이후 아키텍트는 인간이 고통을 통해 현실을 인지하는 것 같다고, 그래서 매트릭스에 고난을 프로그래밍했고 이후로 아무 문제 없이 매트릭스를 유지해나갈 수 있었다고 말한다.


<모순>은 고난이야말로 삶의 유일한 조건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고난없이 우리는 살아갈 수 없다고. 고난은 더 큰 고난에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 끝없이 투여되는 예방주사 같은 거라고. 


고난은 정말 축복일 수 있을까? 


그래서 삶은 거대한 모순인걸까? 


고난을 겪는 사람들에게 고난이 축복이라고 말하는 건 지나친 폭력같다. 신이 있다면 묻고 싶다. 우리를 살아가게 하는 게 정말 고난이냐고. 이 모든 게 의도된거라면, 만약에 그렇다면 당신이 약속하는 천국이란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거냐고.


양귀자는 <모순>을 쓰기 전 <슬픔도 힘이 된다>는 소설집을 낸 적이 있다. 그녀는 아마도 슬픔을 긍정하는 법을 배웠을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삶을 극복하는 법이 그 모순을 긍정하는 것임을 배웠을 것이다. 나도 그녀의 나이가 되면 내 가슴을 조이는 고난들을 따뜻한 외투처럼 여길 수 있을까? 뭐 어렴풋이는 알 것 같다. 죽을 것처럼 허우적대기는 하지만 결코 가라앉지 않고 있으니까. 이 허우적댐이 조금씩 스트로크로, 물장구로, 숨쉬기로 바뀌어 힘차게 물살을 가르는 수영이 될 수 있음을.


나는 그대로 가라앉는 것도 나쁘지 않은 방법이라고 생각하지만, 오늘만큼은 그녀를 따라 수영 선수가 될 수 있음을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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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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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3월 5일에 1쇄를 찍은 피로사회는 1년 6개월 동안 27쇄를 거듭했다. 자기계발서, 문제집, 참고서만이 팔려나가는 시대에 철학책이, 그것도 '승진에 도움이 되는' 혹은 '논술을 위한' 인문학이라는 문구를 달지 않은 책이 이처럼 큰 성공을 거둔 것은 대단히 이례적인 일일 것이다.


<피로사회>의 이례적 성공은 그 내용의 이례적 대담함으로부터 출발한다. <피로사회>는 고도로 발달한 과학 기술과 의료, 상대적으로 민주화된 정치에 힘입어 삶의 질이 전반적으로 높아졌음에도 오늘날 우리의 모습에서 좀처럼 '행복'을 발견할 수 없는 이유를 설명한다. 그런데 그 설명은 지난 수 십년간 해답이라 불렸던 위대한 철학자들의 답안을 계승하지 않는다. <피로사회>는 현대의 지평을 열었다는 푸코와 프로이트와 아감벤 등을 더 이상 현대를 설명하지 못하는 구시대의 유물로 만들어버린다. 한병철의 <피로사회>는 현대 사회에서 개인이 겪는 무력감과 우울의 원인을 그야말로 현대의 최첨단으로 해부해낸다.



성과사회


저자 한병철은 현대의 심리적 질병들의 원인으로 성과사회를 지목한다. 과거 푸코, 프로이트 등의 철학자들이 세상을 정의하는 단어는 규율사회였다. 규율사회는 '~해서는 안된다'는 금지의 부정성과 '~해야 한다'는 강제적 부정성이 지배하는 사회로 개인은 이 안에서 사회의 억압을 받고 그에 복종하는 주체로서 살아갈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현대에 이르러 생산의 문제가 도래한다. 


자본주의는 항상 더 많은 생산을 꿈꾸지만 규율사회의 '금지'는 곧 그 한계를 드러내고 만다. '9시 출근에 6시 퇴근'이라거나 '모든 학생이 12시까지 야자를 해야 한다'는 규칙은 고루하고 비효율적인 악습이다. 강제적인 명령은 더이상 획기적 생산의 증가를 보장해주지 않기에 '자기 주도', '자기 계발', '자율'등의 긍정성이 이 악습을 대체한다. 사람들은 자기 발전을 위해 새벽반 영어 학원을 등록하고 인문학 고전을 읽으며 자기계발서를 탐독한다. 이 모든 것은 누가 시켜서 하는 게 아니다. 모두 자기 자신이 자기 자신을 위해서 하는 일이다. 명령에 복종하던 과거의 인간은 이제 스스로 행동하는 성과주체가 된다. 


얼핏보면 성과사회의 개인은 규율사회의 억압과 금지를 벗어던진 진정한 자유의 주체로 여겨진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 현대 사회의 비극이 있다. 규율사회에서 채찍을 내리는 건 타자였다. 그러나 성과사회에서 채찍을 내리는 건 누구인가? 바로 자기 자신이다. 성과사회에서 '나'는 나 자신의 경영자이자 피고용인이며 주인이자 노예이고 착취자이자 피착취자다. 나 자신을 착취하는 게 바로 자율적인 나이기 때문에 나 자신은 그것이 착취임을 깨닫지 못한다.


이때 자본주의는 성과주체에게 진실을 보여줄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자본주의는 '자기 착취'를 '자기 계발', '의식 있는 사람' 등으로 포장하며 대량으로 유포한다. 자기 착취는 타자에 의한 착취보다 훨씬 더 효과적이고 능률적이기 때문이다. 이런 환경 속에서 '성과주체는 완전히 타버릴 때까지 자기를 착취한다. 여기서 자학성이 생겨나며 그것은 드물지 않게 자살로까지 치닫는다'(p.103).


한편 '자기계발'의 조류에 뛰어들지 못하거나 그 조류 속에서 조난당한 개인은 낙오자가 된다. 예전에는 실패의 이유를 사회의 탓으로 돌릴 수 있었으나 성과사회에는 더이상 핑계가 될만한 금지가 존재하지 않는다. 성과사회에는 당신이 실패할 이유가 하나도 없다. 당신이 성공하지 못했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당신이 무능한 탓이다. 이같은 성과사회의 오만은 개인을 심각한 자괴감 속으로 빠뜨린다. '아무것도 가능하지 않다는 우울한 개인의 한탄은 아무것도 불가능하지 않다고 믿는 사회에서만 가능한 것이다'(p.28). 


성과사회는 그저 사회에 순응하며 적당히 살아갈 마음을 가졌던 평범한 사람들에게 더 큰 비극으로 다가온다. 규율사회에서 포기는 최소한의 생존권을 보장했다. 데모하지 않고 불만 품지 않고 회사나 열심히 다니며 복종하는 삶을 사는한 자기 자리는 지킬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성과사회는 금지와 함께 최소한의 생존권마저 없애버린다. 성과사회에서 개인은 호빗의 삶을 살고 싶지만 산더미처럼 몰려오는 경쟁자들은 기어이, 당신을 샤이어 마을에서 몰아내고 만다.



성과사회와 정치


에리히 프롬이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 지적했듯 사람들은 과도하게 부여된 자유를 기꺼이 반납하고 스스로를 노예로 전락시키려는 경향이 있다. 현실 정치에서 이는 독재자에게 투표하는 성향으로 나타난다. 


나는 지난 10년간 한국 사회가 보수적 가치를 더 중시했다고 생각치 않는다. 한국 사람들은 지난 10년간 명백히 독재에 표를 던졌다. 성과사회의 무한 경쟁에 지친 개인이 드디어 탈진한 것이다. 탈진한 개인은 더이상 생각할 여유가 없다. 그들은 그저 시키는대로 하고자 한다. 이 악물고 열심히 살아볼테니 '잘살아 보세'를 만들어 달라는 얘기다. 그러나 자본주의와 결탁한 독재자들은 규율사회로 돌아갈 생각이 없다. 독재자들은 오히려 규제를 풀고 경쟁을 장려한다. 자수성가 스토리는 성공 신화가 되어 광범위하게 유포되고 사람들은 그것으로 자기 자신을 채찍질한다. 독재자의 유일한 미션은 성과사회를 강화하는 것이다. 경쟁이 풍작일수록 자유가 풍년일수록 독재자의 위치가 견고해지기 때문이다.


현대 사회의 독재자가 과거의 독재자보다 무서운 점은 그것이 한 명의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과거의 독재는 1인 독재로서, 명백하게 가시적이었다. 그러나 현대 사회의 독재는 시스템으로서 존재하기에 더이상 독재처럼 보이지 않는다. 독재처럼 보이지 않기에 비난과 전복의 근거를 제공하지 않는다. 그것은 몇 년을 주기로 얼굴만 바꿔가며 지구가 멸망할 때까지 번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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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충 극장 열린책들 세계문학 204
카렐 차페크 지음, 김선형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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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코'하면 그저 매력적인 동유럽 관광지 따위로 여겨지는 시대라 여간 반발심이 생기는 게 아냐, 그러니 좀 김빠지는 얘기를 해야겠다. 나는 오늘 '체코'를 대표하는 한 문학가를 소개하려 한다.


뿡야!


어느날 잠에서 깨보니 자신이 흉측한 벌레로 변해있었다는 '그레고리 잠자'의 이야기를 기억할 것이다. 모른다고? 그렇다면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은 들어봤겠지. 이 소설의 주인공이 그레고리 잠자라네. 어쨌든 '부조리'에 관해서라면 그 어떤 대문호와 붙더라도 원, 투 스트레이트! 강냉이 한 됫박은 털고도 남을 부조리 소설의 대가 프란츠 카프카는 무려 체코 사람이었다. 하지만 오늘의 주인공은 아냐. 패스!


그렇다면 이 남자는 어떨까?


어지간히 책을 안보는 현대사회의 전형적 무지랭이일지라도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란 제목 정도는 들어봤을 것이다. 제목과는 달리 감당할 수 없는 허무의 무게에 짓눌려야 하는 이 소설은 1968년의 프라하를 살아낸 밀란 쿤데라의 작품이다. 모를까봐 하는 얘긴데, 프라하는 체코의 수도야. 그럼 오늘의 주인공은 바로?


딩동댕~ 딩동댕~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나인(Nein. 아니다라는 독일어)! 나인(Nein)! 나인(Nein)! 오늘의 주인공은 당신도 나도 전혀 알지 못했어, 열린책 세계문학 전집이 없었더라면 어지간히 책을 좋아하는 나조차 평생 모르고 지나쳤을 그런 작가라네. 


카렐 차페크. 


너무 생소해서 깜짝 놀랐지?



카렐 차페크


생소한 이름과 어울리게 강직성 척추염이라는 생소한 질병을 앓았던 이 문학가는 소설보다는 희곡으로 더 유명하다. 특히 <R.U.R>이라는 작품에서 지구 최초로 로봇(Robot. 노동을 뜻하는 체코어 Robota에서 유래)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낸 작가! 내가 로봇을 얼마나 좋아하는데, 몰라뵈서 죄송합니다.


강직성 척추염은 쉽게 말해 척추가 굳어버리는 병이다. 평생 앉아서 글을 써야 하는 작가에게 치명적이라 할 수 있는 이 병을 카렐 차페크는 극작가이자 동화작가, 체코 유력 일간지의 편집자, 소설가, 번역가로서 맞서 싸웠다. 글쓰기에 대한 열정이 유일한 치료제였던 셈. 


죽음을 외투처럼 입고 다니는 작가들 중에는 인간에 대한 연민의 정수를 작품 속에 피워내는 사람이 있다. 삶의 한복판에선 삶과 죽음이 동전의 앞뒷면 만큼이나 가까운 사이라는 게 쉽게 잊혀지기에 인간은 부질없이 명예를 쫓고 악착같이 돈을 벌고, 그렇게 오만것들을 욕망한다. 그러나 안개가 걷히고, 자신이 죽음의 수렁에 빠졌음을 알게 됐을 때 인간은 비로소 인생을 되돌아보게 된다. 연민은 필멸을 이해하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다.



곤충 극장


카렐 차페크는 인간에 대한 연민을 바탕으로 인간 세계를 풍자한다. 풍자는 사람을 깨우치기 좋은 형식인데 거기엔 유머가 있기 때문이다. 유머는 사람을 마취시킨다. 근육은 이완되고 머리를 감싸고 있던 딱딱한 껍질이 흐물흐물 녹아든다. 우리가 그저 자빠지고 뒹굴고 난리법석을 떠는 등장인물을 보는 동안 풍자는 슬그머니 본색을 드러낸다. 이야기가 끝나면 그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거울이었음이 드러나고 우리는 우리 앞에서 자빠지고 뒹굴고 난리 법석을 떨었던 그 녀석들이 바로 우리 자신이었음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곤충 극장>에는 인간을 똑닮은 곤충들이 등장한다. 쇠똥구리는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쇠똥에 모든 욕망을 쏟아 붓고 맵시벌은 아무런 죄책감없이 다른 곤충들을 죽여 그 시체를(부를) 차곡차곡 쌓아 나간다. 그런가하면 그 모든 소동이 자신과는 상관없다는 듯 그저 음란과 방탕을 일삼는 나비들이 있다. 하이라이트는 역시 폭력이다. 최첨단 과학기술을 앞세운 개미들은 두 풀잎 사이의 통로를 두고 전쟁을 벌인다. 그들은 마치 종의 전멸을 꿈꾸는 것 같다. 


<곤충 극장>을 하찮은 벌레들의 모자란 지능을 조롱하는 작품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우리는 쇠똥구리에게서, 나비에게서, 맵시벌에게서 그리고 개미에게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본다. 내가 지갑에 넣고 다녔던 게 사실은 쇠똥이었다는 걸 깨닫는 것이다. 풍자는 에둘러 말하지만 그 의미는 돌직구보다도 강하게 파고든다.



그리고 두 개의 희곡


사실 이 책엔 <곤충 극장> 이외에도 카렐 차페크의 태표작 <마크로풀로스의 비밀>과 <하얀 역병>이 수록되어 있다. 내가 <곤충 극장>의 소개글을 보자마자 아무런 고민없이 이 책을 구매했음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다른 두 개의 작품에 더 매료된 이유는 뭐 따로 있겠어? 두 작품이 더 재밌었기 때문이다. 


<마크로풀로스의 비밀>은 영생의 비밀을 깨우쳐 300년을 살아온 팜므파탈의 이야기를 통해 필멸의 존재가 가진 아름다움을 노래한다. 우리는 필멸하기에 역설적으로 더 아름다울 수 있다. 그리고 어쩌면 바로 그 필멸성 때문에 새로운 생명을 창조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된 걸지도 모른다. <마크로풀로스의 비밀>은 불멸을 욕망하는 인간을 연민하며 우리가 진짜로 추구해야할 것이 무엇인지를 깨우쳐준다.


<하얀 역병>은 나치즘의 광기를 묘사하는 작품이다. 세계는 하얀 반점이 생기는 신종 전염병으로 죽어간다. 급기야 역병은 신나게 전쟁을 준비하던 총사령관의 옥체를 범하게 되는 데, 유일한 치료법을 알고 있는 의사는 '총사령관께서 모든 전쟁 수단을 없애고 평화 협정을 맺으면 역병을 치료해주겠다'고 제안한다. 총사령관은 과연 어떤 결정을 내리실까? 위대한 조국을 건설하겠다는 야망은 오로지 전쟁을 통해서만 이룩할 수 있는 걸까? 전쟁은 생명보다 소중한가?



P.S


카렐 차페크 작품들의 가장 큰 매력은 무엇보다 쉽다는 것이다. 그의 작품을 읽는 동안에는 복잡한 상징의 의미를 파헤치려는 분투도, 대단히 심오한 메시지를 파악하려는 노력도 필요 없다. 이야기는 간단하고 의미는 드러나 있다. 동화 작가이기도 했던 그의 경력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한 가지 우려가 있다면 이 작품들이 모두 '희곡'이라는 점이다. 처음 읽는 사람들에게 희곡의 독해는 어려울 수 있다. 특히 <곤충 극장>은 그 쉬운 내용에도 불구, 등장인물이 너무 많아 이야기를 따라가기가 쉽지 않은 작품이다. 또 소설의 전통적 배경 묘사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희곡의 직접적인 무대 설명이 다소 건조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니 처음 희곡을 읽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미리보기 후 구매할 것을 당부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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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한당들의 세계사 보르헤스 전집 1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옮김 / 민음사 / 199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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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의 장님 소설가


2만권의 책 읽기와 유전, 불의한 사고가 겹쳐 시력을 상실했으나 죽을때까지 결코 독서와 쓰기를 멈추지 않은 전설의 소설가 보르헤스는 훗날 포스트모던의 아버지로 불리게 된다. 그 자신이 현존하는 지구인 중에서는 거의 견줄바 없는 석학인 동시에 '장미의 이름', '푸코의 진자' 등을 쓴 베스트셀러 작가이기까지 한 움베르토 에코는 포스트모던이란 사실상 보르헤스의 작품을 해석하면서 얻은 부산물에 불과하다고 했다.


그러나 태어나자마자 포스트모던을 접할 수 있었던 우리와는 달리 20세기 초반을 살았던 사람들은 그 문제적 단어를 접하기 위해 1935년까지 기다려야 한다. 보르헤스의 첫 소설집 '불한당들의 세계사'가 출간된 해가 바로 1935년이기 때문이다.



문학과 대중 문화의 혼합


포스트모던 문학의 주요 창작 특징 가운데 하나는 바로 예술과 대중 문화의 혼합이다. '불한당들의 세계사'는 이 부분에 있어 전형적인 특징을 드러내는 작품집으로 보르헤스는 특히 갱스터, 웨스턴 영화의 장르적 특징을 소설 전체에 걸쳐 적극적으로 차용한다. 여기서 우리는 대중 문화와 예술의 혼합이, 그러니까 고급과 고급도 아닌 고급과 저급의 합체가 왜 포스트모던, 즉 근대성의 대안이 될 수 있는지 의문을 품을 수 있다.


보르헤스는 그 어떤 소설가보다도 서사의 힘을 믿었던 것 같다. 그는 한 대담에서 '우리들은 작가들이 시 또는 문학의 가장 오래된 형태가 서사라는 것을 잊어버리고 있는 시대에 살고 있으며, 할리우드가 서부 영화를 가지고 세계의 서사성을 살려놓았다'고 말했다. 


보르헤스에 의하면 문학의 본질은 서사다. 그러나 서사는 반복적이며 자기모방적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들은 점점 더 비슷해진다. 새로움의 한계에 부딪히는 것이다. 몇몇 똑똑한 작가들은 이제 서사로는 승부가 될 수 없음을 깨닫고 형식에 눈을 돌린다. 회화가 해바라기를 어떤 식으로 그리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예술을 만들어내듯 서사도 형식을 취해 서로 다르고, 복잡하고, 정교한, 그리하여 소설가라는 전문적 직업을 가진 사람만이 감당할 수 있는 소설 예술이 탄생한다. 소설 예술은 끝내주게 아름답지만 그것은 사람이 살지 않는 모델하우스 같다. 보르헤스는 이 지점에서 여전히 서사의 힘을 간직하고 있는 영화, 대중 소설에 눈을 돌린다. 


중세를 대체한 르네상스는 역사상 한 번도 제시된 적 없는 미학적 관점을 창조한 게 아니었다. 르네상스는 슬로건은 단순했다. 바로 찬란했던 과거로의 회귀, '고대의 부활'. 마찬가지로 보르헤스의 작업은 문학의 본질로 돌아가기 위한 노력이며 이것이야말로 순수성을 잃은 모던의 포스트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가로되,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은 없느니라


'불한당들의 세계사'를 특징 짓는 또 하나의 포스트모던 징후는 바로 상호텍스트성이다. 상호텍스트성이란 쉽게 말해 기존에 존재하는 작품을 '다시 쓰는' 것이며 좀 더 극단적으로 표현하면 '베껴 쓰기'라고 할 수 있다. 이 소설집에 수록된 모든 소설은 '장밋빛 모퉁이의 남자'를 제외하고는 이미 존재하는 책을 다시 쓴 소설이다. 보르헤스는 이런 사실을 숨길 생각이 전혀 없으며 책의 말미에 원전을 써주기까지 한다. 


상호텍스트성은 '태양 아래 새로운 건 있을 수 없다'는 창작 행위의 본질적 회의를 쿨하게 인정하는 태도다. 이제 작가는 새로운 작품을 창조해냈다는 영광과 권력을 반납하고 편집자의 위치로 내려온다. 그들의 창조 능력을 굳게 믿는 사람이라면 -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 - 상호텍스트성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을 넘어 심한 모욕으로, 나아가 파렴치한 사기로 보일테지만 나에겐 이것이 문학의 새 지평을 여는 중요한 열쇠로 보인다. 


상호텍스트성 안에서 개개의 작품들은 더이상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하지 않는다. 모든 문학 작품은 그저 다른 작품의 그림자일 뿐이며 작가는 이 절대적 평등 속에서 원하는 것을 취사 선택, 그저 황홀한 그림자 놀이에 동참하면 그만이다. 새로운 것, 변화에 대한 강박의 성벽이 무너지고 그 위에서 놀이로서의 문학이 가능성을 싹틔운다이제 창작은 마치 레고를 쌓고 허물기를 반복하는 아이들의 놀이를 닮아간다.



기타 등등


보르헤스의 명성을 듣고 '불한당들의 세계사'를 첫 책으로 선택한 사람은 뭔가 아쉬움을 느낄 수도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소설집은 보르헤스 전형적 특징이 불완전하게 제시되거나 아예 부재하기 때문이다. 상호텍스트성은 이제 막 뿌리를 내린 새싹처럼 가냘프고 마술적 사실주의는 어두운 지평선 위로 간신히 고개를 내민 여명처럼 희미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불한당들의 세계사'에는 추리 소설의 장르적 특성을 차용한 작품이 없다. 보르헤스 최고의 작품들은 뭐니뭐니해도 마술적 사실주의와 상호텍스트가 뿌려 놓은 수 많은 상징과 모호함, 그리고 난잡함이 다양한 복선과 어울려 강렬한 반전을 선사하는 추리 소설풍의 작품들이다. '불한당들의 세계사'에는 이 모든 것들이 아직 씨앗인채로 잠복해 있다. 


그러나 나를 포함하여 이 글을 읽는 모든 사람들에게 보르헤스는 필연이다. 어차피 그리 되어질 것이라면, 반드시 그렇게 되는 것이라면, 각 작품집의 호불호가 무어 그리 중요하겠는가? 무엇으로 시작했든 당신은 결국 보르헤스를 완독하게 될 것인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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