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의 눈물 - 서경식의 독서 편력과 영혼의 성장기
서경식 지음, 이목 옮김 / 돌베개 / 2004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서경식이라는 이름을 처음 알게 된 건 이른바 유학생간첩단 사건 때문이 아니라 창비에서 나온 <나의 서양미술순례>를 통해서였다. 이 책은 창비 문고판으로 1992년에 초판 1쇄가 처음 나왔는데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은 초판 11쇄로 1995년에 나온 것이다. 미술순례라는 제목에 어울리지 않게 도판이 모두 흑백이어서(책 앞부분에 칼라도판이 몇장 있긴 하다.) 다소 실망스러운 면도 없지 않았지만 다행스럽게도 책의 내용이 그 실망감을 상쇄해 주었다. 이 책 서두에 등장하는 그림 “캄퓨세스왕의 재판”(무슨 까닭인지 사람의 생껍질을 홀랑 벗기는 고런 무지막지한 형벌을 받는 그림)이 유독 기억에 남아있다. 작가의 의도는 아마도 한국의 형무소에서 고단한 수감생활을 하고 있는 형들에 대한 은유에 무게가 있었겠지만 나에게는 심은하가 나오는 영화 <텔미썸씽> 덕분에 기억에 더 남았던 거 같다. 맞는지 모르겠지만 연쇄살인 과정에서 어떤 단서로 이 그림이 등장했던 것 같다.(아닌가?) 물론 내 순진한(?) 영혼이 그 잔인무도한 형벌방식에 약간 충격을 받기도 했을 것이다. 이 책은 2002년도에 창비에서 양장 칼라판으로 재출간되었는데, 본인은 이 책도 사고 말았다. 돈도 많지...


이 책 <소년의 눈물>은 서경식의 <디아스포라 기행>을 구입하니 부록으로 딸려온 책이다. 원래 볼려고 구입한 디아스포라 기행은 방치한 채로 어쩌다 보니 이 책을 먼저 보게 되엇다. <나의 서양미술순례>도 마찬가지이지만 <소년의 눈물>도 일본어로 쓰여진 것을 번역한 것이다. 서양미술순례를 처음 읽었을 때는 그것이 조금 이상했다. 재일교포든 재미교포든 우리나라 사람은 당연히 우리나라 말을 할 줄 알아야한다는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또 당시는 그런 분위기였다. 지금도 물론 그렇지만 말이다. 반만년 단일민족이라는 혈연적 폐쇄성과 군사문화가 강요한 애국주의가 그런 분위기를 조장했을 것이다. 이 책에도 나와있듯이 재일교포는 일본에서도 소수자로 천대받고 그들의 조국에서도 국외자로 쇠외되는 이중고에 신음하고 있는 것이 현실인 것 같다. 이 책은 1995년 '일본 에세이스트클럽상'을 받았는데 수상의 주된 이유가 '빼어난 일본어 표현'이라는 사실을 알고 작가는 그저 기쁨에 젖어 있을 수만은 없었다고 술회하고 있다. 일본의 식민지배와 재일교포 차별정책 그리고 역사를 왜곡하는 일본 우익사상을 반대하지만 이 모든 것을 일본어로 사고하고 일본어로 표현해야하는 작가는 스스로‘언어의 감옥에 갇힌 수인’이라고 말하면서 모국어 상실의 아픔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서경식의 독서편력과 영혼의 성장기’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은 말그대로 이런 저런 책을 읽으면서 소년에서 어른으로 성장해가는 과정을 기록한 작가의 독서일기이다. 어린시절의 이야기를 자세하게 기억하고 잇는 사람을 보면 조금 신기한 생각이 든다. 본인은 어린시절의 기억이라고는 특히 인상적인 몇몇 장면을 제외하고는 거의 전무한 형편이니 어떨 때는 내가 이러다가 오래지 않아 치매에 걸리지는 않을까 불쑥 걱정이 되기도 한다. 본인도 대충 기억하기로는 어린시절에 책욕심이 꽤 많았고, 책도 많이 본다는 소리를 들었던 것 같다. 우리집 옆 골목에 살던 동네 친구인 정아무개와 경쟁적으로 계림문고를 사 모으던 기억은 남아있다. 당시 계림문고 소년소녀세계문학전집의 목록에는 <십오소년 표류기>, <장발장>, <암굴왕>, <삼총사>, <정글북>, <해저2만리> 등 이른바 자타가 공인하는 어린이용 모험소설말고도 <춘희>, <죄와 벌>, <전쟁과 평화>, <좁은 문>, <폭풍의 언덕> 등과 같이 성인용 고전 명작들도 수두룩했으니,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어린시절에 읽은 명작의 다이제스트는 성인이 된 후의 독서습관에 좋지 못한 영향을 미친 것 같다. 물론 아동용 책으로 고전명작을 다 섭렵했다고 생각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왠지 읽은 것만 같았고 또 내용을 대충알고 있으니 정본 고전명작에 자연 손이 가질 않았던 것이다.


책을 보다보면 작가의 셋째형이 작가에게 "나에게 독서란 도락이 아닌 사명이다"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는 구절이 나온다. 옛날에는 ‘학문을 한다’ 혹은 ‘공부를 한다’는 말을 ‘글 읽는다’고도 했으니 한자로 말하면 바로 독서다. 취미로서의 독서가 아니라 학문 혹은 공부로서의 독서였으니 수신(修身)은 물론이고 제가(齊家)하고 치국(治國)에 힘써야 할 선비에게 있어 독서란 도락이 아닌 사명이라 할 만하다. 하지만 이건 옛날 말이고 작금에 있어 독서는 만민공동의 취미가 되었다. 오늘날의 공부는 독서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으니 그럴만도 하다. 일일부독서면 구중생형극의 경지에 이른 선비는 아니지만 스스로 독서인을 자처하는 본인으로서 위 구절을 대하고 조금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그동안 본인의 독서가 너무 재미와 흥미 위주로만 흘러 넘치지 않았나 하는 반성을 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이건 사족인데, 역자 이목씨가 지곡서당에서 수학하였다는 프로필이 약간 이채로워서 알아보았다. 한학자 임창순 선생께서 후학을 양성했던 곳이 지곡서당(芝谷書堂)으로 현재 정식명칭은 한림대부설 태동고전연구소(泰東古典硏究所)이다. 연구소는 3년 과정으로 운영되며, 사서삼경을 중심으로 제자서, 역사서 문학서 등을 공부한다. 매년 10명내외의 인원을 시험을 거쳐 뽑는데 학비는 면제고 학생 전원에게 장학금을 지급하며 학생 1인에게 1연구실을 제공한다. 1981년부터 학생을 선발하여 2006년 현재 현재 28기생까지 모집하였다. 이수자 명단에 이목이라는 이름은 없었다. 역자소개에는 지곡서당에서 수학하였다고 했으니 수학은 하였으되 이수하지는 못한 것이 아닌지 멋대로 짐작해본다. 참고로 임창순 (任昌淳 1914∼1999) 선생은 호가 청명(靑溟)이며 독학으로 한학을 공부했다고 한다. 해방이후 우리나라 금석학의 최고 권위자이자 한학의 큰 학자로 통한다. 선생께서 중국의 서안의 비림(碑林)을 방문했을 때 선생의 박람강기에 중국 학자들도 놀래 자빠졌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입을 딱벌리고 뒤로 자빠졌다는... 히~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레이첼 2006-04-07 16: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알기로 번역자 이목 선생님의 본명은 '이목'이 아닌 걸로 알고 있습니다. 본명은 돌베개 출판사에 물어보세요~!

붉은돼지 2006-04-07 2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을 다시 보니 옮긴이 이목씨는 "지곡서당과 교토대학에서 공부했다"고 나와 있네요. 제가 뭐 이목씨의 학력이 궁금한 것은 아니고요 다만 지곡서당에서 공부했다고 하니 지곡서당이 어떤 곳인지 호기심에 인터넷을 조금 찾아봤을 뿐입니다. 뭐 별다른 뜻이 있는 건 아니에요.......
 
소년의 눈물 - 서경식의 독서 편력과 영혼의 성장기
서경식 지음, 이목 옮김 / 돌베개 / 2004년 9월
장바구니담기


어째서 어른들은 자기가 어렸을 때의 일들을 그렇게도 까맣게 잊어버릴 수 있는 것일까요? 그리고 아이들도 때로는 지극히 애처로운, 가엾고 불행한 존재라는 사실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어른으로 변해버리는 것일까요?-85쪽

1970년대말, 당시 한국에서 영어의 몸으로 고생하고 있던 셋째 형이 "나에게 독서란 도락이 아닌 사명이다"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낸 일이 있다.-146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대구 두류공원이다. 대구에 삼십년 넘게 살면서 두류공원에 수십번도 더 가 본 것 같은데,

이런 동상, 시비, 문학비 등을 한데 모아놓은 동상 동산이 있는 줄은 잘 몰랐다.

오늘 두류공원에 가보니 개나리도 피고 벗꽃도 피어 화사하고 

사람들은 인산인해를 이루고 못지않게 개들도 일조를 하고 여하튼, 봄은 왔더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우리가 물이 되어

우리가 물이 되어 만난다면

가문 어느 집에선들 좋아하지 않으랴

우리가 키 큰 나무와 함께 서서

우르르 우르르 비 오는 소리로 흐른다면


흐르고 흘러서 저물 녘엔

저 혼자 깊어지는 강물에 누워

죽은 나무 뿌리를 적시기도 한다면

아아, 아직 처녀인

부끄러운 바다에 닿는다면


그러나 우리는 지금

불로 만나려 한다.

벌써 숯이 된 뼈 하나가

세상에 불타는 것들을 쓰다듬고 있나니


만리 밖에서 기다리는 그대여

저 불 지난 뒤에

흐르는 물로 만나자


푸시시 푸시시 불 꺼지는 소리로 말하면서

올 때는 인적 그친

넓고 깨끗한 하늘로 오라


---------------------------


지금 이 나이에 이런 시를 웅얼거리는 건 조금 낯간지러운 일이다. 그리고 사실 본인은 강은교를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다.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강은교에 대해서 잘 모른다고 하는 게 더 정확한 말일 것이다. 페이퍼에 뭐 올릴 만한 시가 없나 생각하다가 문득 이 시가 생각났을 뿐이다. 황동규의 ‘즐거운 편지’처럼 어떤 영화에서 이 시가 소개되었던 것 같은데, 도통 기억이 나질 않는다.


시인은 1945년생이니 환갑이 지났다. 과거에는 여류(女流)라는 말을 많이 썼는데 - 여류시인이니 여류화가니, 여류작가니.....  - 요즘은 그런 말은 어디로 멀리 가버렸는지 잘 보이지 않는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여류가 있었다면 남류(男流)도 있었을 텐데, 남류라고 말해놓고 보니 생뚱맞고 또 웃긴다. 남류란 것이 원래 없었으니 여류도 어디론가 달아나 버린 모양이다. 여류라는 발언이 다분히 성차별적이지만 한편으로는 멋있는 구석도 조금 있었던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붉은돼지 2006-04-01 2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시 가만 생각해 보니 위 시가 영화에 소개된 것이 아니라 소설 같은 데 소개되었던 것 같기도 하다. 왜 있잖은가.. 최인호가 <별들의 고향>에서 마종기의 '연가'를 인용했듯이 작은 글씨로 시의 한구절 혹은 전문을 인용하고 소설의 처음 혹은 한 장이 시작되는 그런 거 말이다..
 



 

작년에 서울 출장갔을 때 궁에 들렀다. 경복궁말이다. 요즘 드라마 궁이 나름으로 재미있다고도 하는 모양인데 나잇살을 먹어서 그런지 어쩌다 한 번씩 보게되면 실실실 한심한 웃음만 샌다...어여쁜 신민들이 어찌 그 깊은 속(구중궁궐이라 하지 않았던가)을 짐작이나 할까만은 조선의 왕과 왕비의 삶이라는 것이 호사와 부귀와 영화속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러치며 찬란하게 빛난 것만은 아니었다. 경국지색의 절세가인들과 더불어 주지육림을 헐떡벌떡이기도 했겠지만, 보이지 않는 독살의 위험과 경륜만만한 노회한 대신들과 타협없는 대쪽으로 꼬장한 선비들이 벌이는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시들어 가기도 했던 것이니....구여운 어린 왕과 왕비를 보고 단종애사를 떠올리는 것이 새로울 것은 없다......궁내 기념품점에서 입궁기념으로 샀다. 15,000원 되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