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쿠와 우키요에, 그리고 에도 시절 - Art 020
마쓰오 바쇼 외 지음, 가츠시카 호쿠사이 외 그림, 김향 옮기고 엮음 / 다빈치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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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 솔출판사간 <도쿠가와 이에야스(전32권)>를 재독하고 있는 형편에 일본에 대한 관심이 무슨 풍선마냥, 갓 부은 맥주거품마냥 점점 부풀어 오르고 있다. 풍선도 너무 부풀어 오르면 터지기 쉽상이고 거품은 시간 지나면 김빠지기 마련이다. 과거 <대망>이란 제하로 낙양의 지가를 올렸던 본 책은 이른바 덕천막부의 300년 에도평화시대가 열리기까지의 그 유혈낭자한 시절을 그리고 있다. 민주주의가 피를 먹고 자랐듯이 평화도 유혈의 바탕위에서 더욱 굳어지는 모양이다. 강구연월에 격양가를 부르는 시절, 말하자면 어여쁜 백성들이 잔뜩 먹고 들눕어 배 뚜디리며 노래 부르는 그런 시절, 그런 시절이 오면 자연적으로다가 문화가 창달하고 백화가 만발하는 법이니, 이른바 300년 에도평화시절에 ‘하이쿠’와 ‘우키요에’가 발달한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보면 일본 사무라이들이 할복하기 전에 반드시 두세줄의 짧은 시형태의 “지세이(辭世)”라는 것을 읊는데 - 이것도 일종의 ‘하이쿠’가 아닌가 모르겠다. 생각의 나무에서 나온 <일본의 무사도>를 보면 첫장에  '몸이여, 이슬로 와서 이슬로 가니, 오사카의 영화여 꿈속의 꿈이로다' 라는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지세이가 나온다. 기실 이건 히데요시가 할복하기 전에 지은 것이 아니라 종신와석(終身臥席) 간에 말하자면 유언으로 지은 것이다. 다 읽어 보지는 못했지만 대충 훑어 보니 이 <일본의 무사도>라는 책은 무사도를 찬양고무하는 일본정부의 홍보책자 비슷한 그런 책인 것 같다. 독자제위의 주의를 요하는 바이다. - 내 생각하기에 무식한 칼잡이들이 어디서 이런 시짓는 법도 배웠나 신기하기도 했던 것이니, 나 같은 넘은 물론 할복할 용기도 없겠지만 배를 쨀려고 해도 지세이를 짓지 못해 난처해할 것을 생각하니 실로 한심한 생각이 들어 실실 웃음이 다 나올라고 했다. 


“우키요에”로 말하자면 19세기 일본의 상품이 유럽에 들어올 때 포장지로 사용되기도 했다는 것인데, 알려진 이야기로는 인상파 화가들이 우연히 이 우키요에를 보고는 그 강렬하고 화려한 색채에 말그대로 강한 인상을 받았다는 것이다. 고호, 마네 등 인상파 화가들 이래로 이 “우키요에”라는 것이 일본을 대표하는 문화상품으로 세계적으로 인기를 누리고 있다고 한다. 손철주가 <인생은 그림같다>에서 한 아래와 같은 이야기(이건 요 아래 담뽀뽀님의 서평을 보고 알았다)는 한번 음미해볼 가치가 있다는 생각이다. "일본은 지금도 방방곡곡을 우키요에로 도배하고 있는 반면, 한국은 한쪽 구석에라도 민화를 걸어놓고 즐기는 집안이 손에 꼽을 정도이다. 그 민족이 먼저 소비하지 않는 상품을 외국인이 무엇이 아쉬워 찾을 것인가. 우키요에의 번성을 돌아보며 민화의 복권을 꿈꿀 일이다." 우리의 민화가 비록 우키요에 만큼 세계적으로 인기를 얻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우리 집구석에서 조차 사라진다는 것은 가슴아픈 이야기이다. 


이 책 <하이쿠.....>를 보니, 아마도 인상파에 강한 인상을 준 그림은 바로 19세기 초중반에 활동한 ‘우타가와 히로시게’와 ‘가츠시카 호쿠사이’의 작품들인 것 같다. 그들의 그림은 지금봐도 색감이 뛰어나고 세련되어 보인다. 예경에서 나온 <에도시대의 일본미술>을 보니 양인은 무슨 역사의 라이벌 내지는 당시 일본 화단을 이끌던 쌍두마차 비슷한 존재였던 것 같다. (물론 예경에서 나온 <에도시대의 일본미술>도 읽지는 못했다. 예경에서 무슨 염가판매 행사를 해서 아트라이브러리 시리즈 여런권을 헐값에 구입할 때 딸려온 것 같다.) 호쿠사이가 히로시게보다 연상이고 ‘후지산 36경’연작으로 먼저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다. 이어서 히로시게가 유명한 ‘도카이도(東海道) 53역참’을 제작했으며, 이책 <하이쿠....>에 제일 많이 등장하는 ‘명소에도백경(名所江戶百景)’은 히로시게 말년의 야심찬 기획이었다고 한다.


효형에서 나온 <에도의 여행자들>을 보면 - 물론 이 책도 사놓고 보지 못한 축이다. 이번에 대충 앞쪽만 훑어봤다 - 교토에서 나고야를 거쳐 에도에 이르는 가도를 ‘도카이도(東海道)’라고 한단다. 이 책 첫장의 제목은 ‘문인들의 여행’이고, 소제목은 ‘마쓰오 바쇼와 오쿠노 호소미치의 여행’, ‘고바야시 잇사와 시나노 귀향 여행’, ‘요사노 부손과 하이카이 그리고 그림 여행‘ 등으로, 바쇼, 잇사, 부손의 소위 하이쿠 3대 가인이 모두 등장한다. 시인묵객에게 있어 방랑이란 어쩌면 숙명같은 것이리라. 알알이 주옥같은(하이쿠에 있어 알알이 주옥같다는 표현을 정말 적확하다는 생각이다.) 시편들을 남겼으나 혹은 객사하고 혹은 고향에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이 책 <에도의 여행자들>에 히로시게의 <명소에도백경>의 컬러판 도판을 곁들였더라면 훨씬 보기에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 어쩌면 히로시게의 <명소에도백경>만으로 JUST GO나 HELLO 시리즈 류보다 훨씬 기품있는 <도쿄관광 가이드북>이 한권 나올만도 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이건 끝으로 해보는 쓸데없는 여담인데, 우키요에의 중요한 부분 중 하나인 춘화(春畵)가 이 책에서는 배제되어 다소간에 허전한 마음이 없지 않다.

 




우타가와 히로시게의 <에도근경 8경> 중 '하네다의 낙안(落雁)'(1837).  아닌 것 같으면서도 언뜻선뜻보면 고흐풍의 느낌을 받기도 한다. 문득 당나라 시인 왕발의 <등왕각서>중 유명한 구절 <낙하는 여고목제비하고, 추수는 공장천일색이라 (落霞與孤鶩齊飛 秋水共長天一色)> (떨어지는 저녁놀은 외로운 기러기와 가지런히 날고, 가을물은 길게 뻗은 하늘과 더불어 한색이로구나) 이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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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nnon 2006-05-09 15: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무라이는 무식한 칼잡이가 아니라 당시의 지식인 계층이었죠.

붉은돼지 2006-05-10 1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식인 계층이라기 보다는 지배계급이라는 생각입니다.
 

 

 

 

 <하이쿠와 우키요에, 그리고 에도시절>을 읽다가  p172~173에서



 

꽃씨와 도둑 - 피천득

마당에 꽃이

많이 피었구나


방에는

책들만 있구나


가을에 와서

꽃씨나 가져 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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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어디선가 본 것 같은데 기억이 안난다. 펠릭스 누스바움. 



 

그리고 이건 여담인데, 정말 여담인데 문득 생각나서 몇 자 적어본다.  182페이지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한 5년 전부터 나는 여름이면 ‘잘츠부르크 음악제’를 찾는다. 구시가의 뒷골목에 있는 오래된 호텔에 일주일 정도 머물면서. 오페라 두세 작품, 교향악과 실내악, 그 외의 가곡 리사이틀 등을 각각 한두 공연씩 즐기는 것이 언제나의 일정이다."

본인같은 필부에게는 팔자에 없는 꿈같은 이야기일 것이나, 능력이나 자격이 있는 인사에게는 일상의 일일 수도 있을 것이다. 경제대국 일본에서 대학교수로 재직중이며 저명한 문필가이기도 한 50대의 독신남 - 아마도 그런 듯 하다 - 에게는 매년 여름을 잘츠부르크에서 보내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러한데 이산 백성의 눈물과 아픔에 대한 이야기를 진지하게 경청하다가 문득 이 이야기를 듣게 되니 뭐랄까? 책을 읽는 동안 디아스포라로서의 작가의 아픔이나 고민, 비애, 애환 같은 것들이 진지하게 가슴으로 다가왔다가 이 대목에 이르러 일순 공중부양하여 붕붕 떠다니는 그런 묘한 기분을 잠시 느꼈던 것이다.


뭐 어떻다는 것이 아니고 그냥 그런 생각이 잠시 들었다 말았다는 것이다. 어제 본인은 마누라하고 둘이 모모 식당에서 밥을 먹었는데 밥값으로 40,000원 가까이 지출했다. 그 식당은 뷔페식이라 산해진미를 배가 미어 터지도록 먹었다. 실로 함포고복하며 집으로 돌아오다가 아파트 입구에서 빈박스로 가득찬 리어카를 힘겹게 끌고가는 허리 완전 90도로 꼬부라진 할머니를 보았다. 일전에 tv를 보니 하루종일 폐지 모아서 보통 하루에 3000원을 번다고 한다. 마음이 아프다. 그러나 내가 한끼 4만원짜리 식사를 했다고(어쩌다 한번 기분내는 것이지,  매일 그러는 것은 당근 아니다.) 해서 나에게 눈물 가득한 가족사나 가슴아픈 개인사가 없다고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 알 수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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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식의 <디아스포라 기행> p133~p134에 “이우환은 1936년 경상남도 함안에서 태어났다. 대대로 책 읽는 집안이었던 듯, 아이들은 서너 살 때부터 고전적인 한시와 서화를 배웠다고 한다. 재일조선인인 숙부의 도움을 받아 1959년 일본으로 건너가 니혼 대학 철학과를 다녔다. 그후 모노파의 중핵을 차지하는 작가로 인정받아 1970년대부터 세계적으로 활약하게 되었다. 지금은 백남준과 함께 한국 미술계의 ‘큰 별’이며 국제적 스타다” 이런 구절이 나온다. 내 아무리 밤눈이 어둡고 미술에 문외한이라고는 하나 한국 미술계의 큰 별이자 국제적 스타를 모른다고 해서야 독서인으로서 체면이 말이 아닌 것이다..


인터넷을 훑어보니 관련 웹사이트가 있다. 다음은 동 사이트에 나와 있는 작가소개이다. 1936년 경남에서 태어나 '56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을 다니다가 도일, '61년 일본대학 문학부 철학과를 졸업하고 지금은 동경에 있는 다마미술대학 교수로 재직, '67년이래 동경화랑을 비롯한 일본 국내의 여러 화랑과 갤러리에서 수차례의 개인전 혹은 특별전을 가졌다. 1971년 전후 수년간은 평론집 「만남을 찾아서」(다하타서점 간행)를 비롯하여 다수의 논문을 발표. '71년 파리비엔날(파리) '77년 카셀다큐멘타(서독)와 같은 여러 국제전과 국제화상제(75년 이래 퀄른, 브랏셀 등)에 참가하였으며 '77년 오늘의 판화 100점전(뉴욕근대미술관) '78년 보이스, 세라등과의 7인전(프랑크푸르트미술관) '80년 20세기의 조각전(스위스, 바젤) '82년 오늘의 거장전(니콜른베르그시미술관) '83년 ARS '83전(헬싱키, 핀랜드)외에 여러 특별기획전에 참여한 바 있다. 는 것이고,


지난 31일(한국시간 4월1일) 소더비가 뉴욕에서 한ㆍ중ㆍ일 현대 미술품을 모아 마련한 동아시아 3국 미술품 경매 결과 국내 작가 24명의 출품작 25점 가운데 23점이 팔린 것으로 확인됐다. 이번 경매는 세계 미술시장의 중심인 뉴욕에서 한국 현대미술의 경쟁력을 평가받는 첫 시험대이란 점에서 미술동네의 관심을 모았었다. 이번 경매에서는 국내 원로·중견·청년 작가들의 작품들이 골고루 나와 추정가 혹은 추정가를 다소 웃도는 값에 팔렸다. 가장 비싼 작품은 중견작가 이우환(70)씨의 추상화 <무제>(1982년작). 추정가(5만∼7만달러)보다 높은 16만8천달러(한화 약 1억6천322만원)에 낙찰됐다. 원로화가 김창열(78)씨의 92년작 물방울 그림(5만400달러), 사진가 배병우씨의 2005년작 소나무 사진(4만8천달러)도 추정가를 웃돌았다. 는 신문보도도 나와 있었다.

 

 



16만8천달러에 팔렸다는 <무제>(1982년 작)

 



동풍 s84_5(1984년작)



점에서 s80-24(1980년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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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 롯데시네마에 갔다가 몇장 찍었다.  첫장은 디카로 찍은 것이고 다음 네장은 폰카로 찍은 것이다.

동네에 극장이 생겨 영화보러 자주 갈 줄 알았는데 그렇지가 않다.  오늘은 롯데시네마 2층에 있는

씨하우스라는 음식점에 밥먹으러 갔다가 재미있는 그림이 눈에 띄어 몇 장 박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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