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인가 국내 소설을 읽지 않게 되었다. 마음은 있는데 손이 가질 않는다. 나이가 들수록 영화로 말하자면 방화에는 자주 눈길이 가는 반면 외화와는 어느듯 거리가 생기고, 소설로 말하자면 방설(우리나라 소설, 댓구를 고려한 나의 신조어)로부터는 멀어지는 반면 외설(외국소설)과는 가까워 지는 것 같다.


국내 소설도 읽어야 된다는 생각에 착안한 것이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이었다. 이 한 권으로 지난 한해 한국소설을 정산한다는 편하고도 가당찮은 생각을 품었던 것인데, 그 놈의 정산이 통 되질 않고 있다. 아마도 제29회 부터는 전혀 읽지 않은 것 같다. 금년에도 어김없이 책은 구입했다. 우수상 수상작가의 면면을 살펴보니 금시초견의 인사도 서너분 계신 듯 하다. 나름 독서가를 자처하는 처지에 심히 부끄럽고 한심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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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에 지다>를 읽다가 문득 생각해 본다. 할복에 대해서. 자기 배를 자기가 푹~ 찔러 쭉~ 째면 피바다야 뭐 말할 것 도 없겠고, 아프기도 엄청 아플 것이고, 창자나 내장 같은 뱃속에 있던 것들이 배밖으로 흐믈흐믈 기어나오기도 하고 하는 것인데, 혹은 까칠한 넘 중에는 기어나온 자기 창자를 집어 던져 분사(憤死)하기도 했다고 하는데 정말 눈알이 튀어나올 일이다. 자결하는 사무라이가 배를 떡 갈라놓은 채 헐떡거리고 있으면(아시다시피 배쨌다고 바로 죽지는 않는다.) 그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뒤에 대기하고 있던 또 다른 사무라이가 배 짼 무사의 목을 한 칼에 댕강 잘라 주는 것인데 이른바 가이샤쿠라고 한다.

이 가이샤쿠라는 것도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닌 것이, 전언에 의하면 그 이름도 빛나는 미시마 유키오가 큰 마음 먹고 할복할 때 가이샤쿠한 아무개씨는 검도가 몇단이나 되는 유단자 임에도 다리를 덜덜 떨다가 단칼에 유키오의 머리와 몸통을 분리시키지 못해 여러차례 칼질을 했다고 하니 자결하는 자의 고통을 감해주는 것이 아니라 배가 시키는 것이 되고 보면 그 칼질에 실수가 있어서는 무사의 수치라고 할 만한 그런 것인 것이다.(역시 전언에 의하면 아무개씨는 자살방조무시기죄인지 살인방조거시기죄인지로 징역 몇 년을 살았다고 한다)


계속해 보자면, 몸통에서 분리된 머리통이 다다미 장판위로 뚝 떨어져 이리저리 구부르기도 했을 것이고, 그 머리통을 잃어버린 원통한 목아지에서 뿜어져 나오는 피분수는 또 어떠 했을 것이며, 그 유혈낭자함과 그 피비린내하며....... 이른바 주신구라 운운하는 40여명이 떼거지로다가 동시 할복을 할 경우 그 비장장엄한 장관은 실로 두눈뜨고 지켜보기 어려웠을 것인데, 일본 개항초기에 서양 코쟁이들이 이 할복하는 광경을 목도하고는 기절초풍 놀래 자빠졌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거니와 아마도 꿈에 다시 볼까 두려웠을 것이다.


그렇다고 이 할복이라는 것이 되나마나 퍼질러 앉아 배만 째면 되는 것이 아닐뿐더러 자기가 하고 싶다고 아무나 할 수 있는 것도 아닌 것이다. 일종의 허가사항이었고 말하자면 무사만의 특권이랄 수도 있는 것이니 참말로 무섭고도 대단한 특권인 것이다.(농민이나 상인에게는 할복이 허용되지 않았다)


할복하기 전에는 ‘지세이(辭世)’라고 하는 하이쿠 비슷한 짧은 글을 남겨야 하고,(자기 일생을 한두줄에 요약하는 일종의 유언이랄 수 있는데, 그 파란 많은 삶을 한두줄에 줄이자면 글 재주 없는 넘은 고민도 참 많았을 것이다) 배째는 순서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그리고 위에서 아래로  어쩌고 저쩌고 해야하고, 가이샤쿠하는 무사가 있어야 하고(가이샤쿠라는 것이 무나 호박 자르듯 댕강 자를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본 책을 보면 알 수 있다. 힘으로 내리치는 것이 아니라 정확함과 정밀함이 요구되는 대단히 기술적인 작업인 것이다.) 가이샤쿠가 실패할 때를 대비해 또 다른 무사를 대기시켜야 하고 어쩌고 저쩌고.......절차와 법도가 나름으로 복잡했던 것이니, 참으로 궁금하다. 이러한 전통은 과연 어디서 유래하여 어떻게 진화 발전되어 왔는지, 일본역사는 정말 흥미롭다. 친일 좀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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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맥을 바로 이해하기까지 그리 많은 시간이 소요된 것은 아니지만

그 잠시잠깐 동안은 그래도 조금은 놀랬다.  저자의 여자라니..

흔히 '누구 누구의 여자' 라는 표현은 아내를 대상으로는 잘 쓰지 않는 것 같다.

부적절한 관계를 연상시키는 이 말이 알라딘 메인 책 소개에 떡 올라와 있어

본인은 지은이 유병률이 무슨 커밍아웃을 한 것은 아닌가하는 생각도 잠깐 했고

한편으로는, 과연 저자의 여자는 어떤 여자일까 하는 궁금하기도 했다.

문맥을 이해하기까지의 그 찰나의 기간에 참 여러 생각이 왔다갔다 했고

실체를 확인한 후에는 사실 조금 실망하기도 했었다.  에이~ 별거 아니네....참...

"아기다리 고기다리 든", "아버지 가방에 들어가신다"  생각이 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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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살 경제학> 저자의 여자를 위한 맞춤 경제학"




여자 경제학유병률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여자들은 점점 더 혼자 살고, 수명 또한 길어진다. 예고도 없이 찾아오는 이혼과 사별, 경제력은 여자에게 있어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이제 미래를 단단히 준비해야 한다. 여자들에게 꼭 필요한 경제 마인드를 훈련하는 방법과 실제 경제생활에서 부동산, 주식, 환율, 금리의 흐름을 어떻게 봐야하는지 상세하게 적었다. 1,000원 쿠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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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달 특강에는 <연어>의 저자 안도현이 초청되었다. 경북예천이 고향이고, 대구 대건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고등학교 때 시인 자신만큼 상을 많이 탄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라고 한다. 온갖 백일장이며 문예공모에 당선되었다고 하니 이른바 소년 문사로 일찍부터 문명을 휘날렸으며 수많은 여학생 팬들을 몰고 다녔다고 한다. 문학을 하게된 데에 대하여 뭐 이렇다할 특별한 계기나 동기는 없었던 듯 하다. 몇 년간 중학교에서 교편을 잡았고 전교조활동으로 해직되었다가 복직했다. 그후 교직을 떠나 전업작가생활을 하다가 지금은 우석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고 한다. 요즘은 북쪽에 나무를 보내는 일을 하고 있으며, 지난주에 평양에 다녀왔다고 한다. 대구만큼 사과로 유명하다는 황주(처음 들어본다)의 3만평의 부지에 사과나무를 심는 일이란다. 시인의 근황이다.


연어는 일명하여 어른을 위한 동화라고 한다. 본인의 입장을 말하자면 군군신신부부자자(君君臣臣父父子子)라. 임금은 임금다워야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고......어쩌고 저쩌고....(내가 뭐 고문을 전문적으로 공부하지는 않았지만 맹자나 공자같은 것을 읽다가 보면 옛경전의 한구절에는 너무 많은 뜻이 함축되어 있어 일면으로는 대단한 진리를 내포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다른 일면으로는 바람타고 구름잡는 허황한 소리같기도 하니 연하여 또 해석상에 온갖 구구한 억측을 낳기도 하는 것이니 뜻글자인 한문의 매력이 여기 있다는 생각도 든다)


무슨 멍멍 개 짖는 개소리냐 하면 이런 이야기다. 동화는 마땅히 아이들이 읽어야 하고 어른들은 어른들에게 어울리는 책을 읽어야 한다는 것이 본인 생각이니, 단도직입적으로다가 그러니까 단도로 배때기를 곧바로 찌르듯이 말하자면 어른들을 위한 동화니 뭐니 하는 것들에 본인은 반대한다는 그런 말이다. 특강중에 시인은 <연어>의 모델은 <어린왕자> 인데, 어린왕자 서문에 “이 책을 어린이가 아닌 어른에게 바치는 점에 대해 어린이들에게 양해를 구한다” 는 말이 나온다고 하면서 쥐빼리도 그런 걸 썼잖아~ 뭐~ 하면서 변명 비슷한 소리를 하고, 또 전업작가 시절에 이 책 한권 때문에 그래도 그럭저럭 배채우며 버텼다고 하니 어린아이도 아닌 어른인 본인이 양해를 안해줄 수도 없는 입장이 되었다. 그건 그렇고..


특강중에 몇 번 시인이 언급하였지만 인터넷에 한창 떠돌아 대한민국 국민이 다 안다는 연탄재 시(제목은 너에게 묻는다.이고 내용은 이렇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는 내 생각에 시가 아니고 일종의 아포리즘이다. 그 내용에야 십분천백분 공감동감하지만, 그건 일종의 금언이나 경구에 가깝다는 생각이다. 시는 읽는 이로 하여금 마땅히 감흥이나 감동을 일으켜야 할 것이니, 부끄러움이나 참담함을 느끼게 한데서야 그게 성경, 불경, 사서삼경의 경전이 아닌가 이 말이다.


시인의 시 중에 <우리가 눈발이라면>이라는 시는 중학교 국어교과서에 실려 있다고 한다. (시인으로 태어나 자신의 시가 그나라 국어 교과서에 실린다는 것은 과연 얼마만한 영광인가 잠시 생각해 보았는데.......역시 잘 모르겠더라) 중학교 다니는 시인의 아들이 어느날 아빠에게 이 시를 언급하면서 이 시중에 대비를 이루는 단어 몇 개 찾아보라고 하더란다. 그래서 시인이 조금은 황당한 마음에 대충 다섯 개를 찾았는데 그중 하나는 틀렸다고 한다. 허 참!! 시를 소개해 본다.(시인은 이 시를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는다고 한다. 아마 중학생의 나이에 어울리는 시라서 중학교 교과서에 실린 것이 아닌가 생각한단다)


우리가 눈발이라면 - 안도현

우리가 눈발이라면/ 허공에서 쭈빗쭈빗 흩날리는

진눈깨비는 되지 말자/ 세상이 바람 불고 춥고 어둡다 해도

사람이 사는 마을/ 가장 낮은 곳으로

따뜻한 함박눈이 되어 내리자/ 우리가 눈발이라면

잠 못 든 이의 창문 가에서는/ 편지가 되고

그이의 깊고 붉은 상처 위에 돋는/ 새 살이 되자



우리 공장의 직원 중 한분이 특강 말미에 시인의 시 중에서 시인이  암송하고 있거나 아니면 마음에 들어하는 시가 있다면 한 편 멋지게 낭송해 줄 수 없느냐고 하자 <사랑한다는 것>이라는 시를 낭송해 보였다. 시낭송에 뭐 특별한 것은 없었다. 고은처럼 흐느껴 울며 쌩똥폼 잡고 쑈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시를 소개해 본다.(전교조 해직교사 출신으로 “서울로 가는 전봉준” 같은 시를 썻던 시인이 왜 이런 시를 쓰는 시인으로 변했는지 - 이런 종류의 시가 나쁘다거나 시인이 뭐 변절했다는 둥둥의 그런 의미가 아니다 -  궁금했지만 손들고 물어보기가 부끄러워 그냥 어쩌다 살다보니 그리 되었겠지 내 멋대로 혼자 짐작하고는 그냥 참았다. 나는 떵이 매려워도 대충 잘 참는 편이다...꿍)


사랑한다는 것 - 안도현

길가에 민들레 한 송이 피어나면/ 꽃잎으로 온 하늘을 다 받치고 살 듯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오직 한 사람을 사무치게 사랑한다는 것은

이 세상 전체를 비로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차고 맑은 밤을 뜬눈으로 지새우며/ 우리가 서로 뜨겁게 사랑한다는 것은

그대는 나의 세상을/ 나는 그대의 세상을

함께 짊어지고/ 새벽을 향해 걸어가겠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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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사달 2008-08-14 1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아이디를 '四宜齋'라는 한자로 표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한자교육 不在로 한문학 전적을 제대로 번역해 읽을 수 있는 분도 점점 사라져 가는데 한문과 우리 古代史를 공부하는 이로서 모처럼 한자로 표기해 주신 분을 만나니 참 반갑습니다.
 

 

 

 

 

 

요즘 서평 숙제를 위해 <이지누의 집이야기>를 열심으로 읽고 있는데, 책 중에 나오는 회재 이언적의 독락당이니 낙산사 원통보전이니 하는 그런 것들을 찾아보려고 옛날에 읽었던 김봉렬의 <한국건축의 재발견>시리즈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은 월간 이상건축에서 1999년에 나온 초판 2쇄본인데, 이게 요즘 돌배게에서 개정 증보판이 나와서 사람 마음을 어지럽게 하고 있다. - 를 다시 꺼내보기도 하고 나름으로 건축이나 집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차에,

오늘 낮에 우연히 “이금희의 파워인터뷰”라는 프로를 보게 되었는데, 우리나라 현대건축의 아버지인 김수근 문하에서 십여년을 공부했으며 현재는 건축사무소 이로재履露齋(아마도 신발에 이슬 묻혀가며 세상을 돌아다니고 열심히 건축공부해서 사람 살기 좋은 건물을 만들겠다는 뭐 그런 뜻이 이로재라는 당호에 담겨있으리라 내 멋대로 짐작해보았고, TV를 보니 이로재라는 현판이 서재같은 사무실 벽에 붙어 있었는데 고풍스런 멋이 있더라)를 운영하고 있고, 자신의 말에 의하자면 김수근으로부터 ‘기맥힌 놈’이라는 소리를 들었다는 승효상이라는 사람이 인터뷰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알라딘에서 검색해보니 승효상의 저서로 여러권의 책이 줄줄이 줄을 잇고, 그 중 <건축, 사유의 기호>라는 책은 내가 오다가다 슬쩍슬쩍 보면서 관심을 가지기도 했던 것인데, 오늘 내가 안 기맥힌 사실은 내가 이때까정 승효상을 송효상으로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초중고대 16년의 학교생활중 내가 아는 친구중에 승씨라고는 눈을 씻고 닦고 찾아봐도 없었던 것이니 ‘승’을 ‘송’으로 착각했다고 해서 큰 허물이라 할 수는 없으리라. 아래 사진을 보면 승효상이 입고 있는 검도복에 이로재(履露齋) 승효상(承孝相)이라는 글자가 보인다.


인터뷰중 기억에 남는 이야기 두 토막. 하나. 승효상이 빈 유학시절에 절체절명의 어려운 시기에 처해있을 때 그에게 용기와 희망을 준 선배의 편지내용 “너는 낭중지추(囊中之錐)” 그때 그 말이 많은 도움이 되어서, 그래서 요즘 자신도 후배들에게 많이 돌려주고 있다고 한다. 칭찬은 역시 고래도 춤추게 한다.


둘. 영화 토탈 이클립스(나는 이 영화를 보지는 못했다. 다만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랭보 역으로 나오고, 동성애하면서 술처먹고 지랄하며 별스럽게 예술하는 넘들의 이야기라는 정도만 알고 있다...음...)를 보다가 랭보가 베를렌에게 했다는 “너는 시를 어떻게 써야하는 지를 알지만, 나는 시를 왜 써야 하는 지를 안다”는 말을 듣고 섬뜩했다는 이야기. 건축도  멋을 부리거나 똥폼만 잡을 것이 아니라 그 본질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는 요지의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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