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를 생각한다
존 코널 지음, 노승영 옮김 / 쌤앤파커스 / 2019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인간의 삶은 자연에 가까워질 때 위로와 위안을 얻을 때가 많다.물가 위에 유유히 떠나니는 철세들, 대관령 목초지 위에서 푸른 초원위에 뛰어는 소들의 모습들 ,이러한 모습들은 인간의 보편적인 삶과 엮여 있으며, 생명에 대해 소중함을 느끼는 순간이다. 그 과정에서 인간은 소를 가축화 하였으며, 소의 삶과 인간의 삶음 점점 더 가까워지게 되었고, 소를 우리에 가두어 키울 수 있게 되었다.하지만 우리는 소가 순하면서도 거칠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다.소의 코두레에 워낭을 달았던 이유는 소의 거침에 대해 인간이 통제를 하기 위해서 거대한 몸집의 가장 약한 부분에 사물을 끼워서 소의 통제력을 강화하기 위해서다.식물 중에서 나무가 버릴 것 없다고 생각하는 우리의 기본적인 가치관이 소에게도 적용되는 이유이다.심지어 소의 머리에 돈을 끼워서 제사를 올리는 것을 보면 우리에게 소의 영향력은 절대적이며, 다양한 관점에서 소의 유익함을 바라보게 된다.



아일랜드 작가 존 코넬은 소가 주는 이익으로 소의 부산물인 우유를 주시하고 있다.  인간의 모유 역할을 하는 우유를 상시적으로 공급하는 소에 대한 다양한 관점을 살펴볼 수 있으며, 인간의 역사와 소의 역사는 같은 궤도를 따라 움직이고 있음을 재확인할 수 있다.그러나 여기서 놓칠 수 없는 것이 있으니, 소의 역사 속에 인간의 잔인한 폭력성이다.그 폭력성을 인간 스스로 자각하고 살아갈 수 있을 때 소에 대한 소중한 생명의 가치,자연으로서의 가치를 인지하면서 살아갈 수 있다.


소에게 필요한 것은 먹이였다.인간은 소를 정해진 기간도안 키워 가면서 소를 상품화한다. 때로는 같은 종끼리 선택 교배를 통해서 소의 야생성을 지우고,가축화하는데 있어서 용이한 선택을 시작하였다.과거 동굴 벽화 속의 소의 모습과 다른 아일랜드의 레드 소가 탄생될 수 있었던 이유는 여기에 있다. 특히 인간에게 소의 존재이유는 소가 생명이면서,상품이기도 하다. 저 푸른 초원위에 소를 방목하면서, 자식을 키웠던 부모들은 이제는 협소한 공간 위에 한 장소에 소를 가두어 키우게 된다.공장식 밀집 구조에서 소를 가두려면, 소 우리가 튼튼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소를 도축하기 직전 거대한 화물차가 소우리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시설이 완비되어 있어야 한다.그 과정에서 소의 예민함이 드러날 수 있으며, 소가 가지는 폭력적인 행동과 소리는 그 과정에서 불가피 하다. 특히 소가 우는 소리, 무엇에 부딪치는 소리를 들으면,소의 기운 뿐만 아니라 영혼을 느낄 수 있다.소를 도축하기 전에 소를 한 쪽으로 몰다가 다친 농민들이 부지기수인 이유는 여기에 있다.


인간의 역사 속에서 나치와 히틀러는 소를 악용하였다. 인간이 개념적으로 만들어낸 우생학은 소를 관찰하는 과정에서 만들어낸 개념으로, 우수한 종을 서로 교배시키면서, 건강한 소,튼튼한 소를 되물림해왔던 소의 교배 과정들을 인간에게 그대로 적용하게 되었다.그 과정에서 우수한 아리아인을 만들고 싶었던 히틀러의 삐뚤어진 욕망은 인간의 삶을 무차별적으로 파괴하기에 이르렀다.그러나 보다시피 인간의 삶은 히틀러의 욕망의 사슬에서 벗어나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나갔다.


인간은 소를 가축화하였고, 일방적인 관점에서 소와 동거동락하게 된다.그래서 인간은 일방적으로 소에게 무언가를 주고 있으며, 소의 삶을 인간이 전부 결정한다고 착각하기 쉽다. 그러나 이 세상에 일방적인 것은 결코 없다는 것을 존 코널의 저서를 통해서 깨닫게 되었다.소의 부산물인 젖이 인간에게 우유로 바뀌면서,인간의 모유를 대체할 수 있게 되었다는 걸 잊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그 과정에서 인간의 삶은 과거보다 건강해졌고, 전염벼에 취약하게 된 이유, 사회적인 변화가 점차 바뀔 수 있었던 이유는 여기에 있다.여성의 인권과 삶이 과거보다 더 나아질 수 있었던 이유도,소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으며, 여성의 인권이 신장되었으며, 과학과 문화,사회 곳곳에 여성의 활약이 두드러질 수 있었던 이유는 여성이 해 왔던 일들을 소가 대신할 수 있었고, 인간의 삶이 자연에서 벗어나 도시화가 진행된 이유는 여기에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고교 독서평설 2020.1 독서평설 2020년 1월호
지학사 편집부 지음 / 지학사(잡지) / 2019년 12월
평점 :
품절











고등학생에게 최고의 목표는 좋은 대학에 입학하여,좋은 곳으로 취업의 문을 두드리는 것이다.그 과정에서 논술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이유는 학생의 변별력이나 공부에 대한 능력이 논술에서 당락이 결정되기 때문이다.그래서 논술은 고등학생에게 대학으로 가기 위한 입문이면서, 자신의 능력을 요구하는 실력 검증의 척도이기도 하다.그래서 고등학생에게 필요한 것이 비판력과 사고력, 창의성과 표현력이다. 이 요건을 갖추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독서 습관인데, 보다시피 고등학생에게는 독서를 할 수 있는 시간이 제한되어 있으며,절대적으로 부족하다.



시간이 부족한 고교생에게 여러권의 책을 읽은 것과 같은 효과를 얻는 것은 그 무엇보다 중요한 요소이다. 매달 나오는 고교 독서평설이 필요한 이유는 효율적인 공부를 위해서이며, 짜임새 있고, 논리적인 논술 글쓰기의 바탕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여기서 독서평설은 큰 역할을 담당하고 있으며, 고교생에게 필요한 지식에 대한 큐레이션 역할을 하고 있으며, 고교생에게 필요한 소양이나 지식, 더나아가 고교생이 필우 도서까지 파악할 수 있다.


사고력과 비판력을 기르려면,무엇보다 다양한 지식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한 과목 뿐만 아니라 다른 과목에 대해서 깊이 있는 지식이 요구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그래서 논술이 학생에게 어려운 이유는 논술은 국거 뿐만 아니라 역사,사회,과학, 체육, 미술 등등 논술의 주제에 맞는 소재들을 각각의 영역에서 채워 나가야 하기 때문이다.그 단적인 예로 이 책에서 '지소미아'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고 있는데,지소미아 파기는 왜 시작되었고, 그 과정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지소미아를 둘러싸고 한국의 입장과 일본의 입장을 파악할 수 있어야 하며,그 파장에 대해서 면밀하게 분석할 수 잇어야 한다.특히 지소미아에 대해 찬성과 반대 ,둘 중 하나를 선택하려면, 사회, 과학,경제까지 아우를 수 있는 식견을 갖추고 있어야 국제관계 속에서 각 나라의 이해관계를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즉 한국과 일본 사이의 지소미아 파기로 인해 예상되는 파장들, 국가의 외교에 대한 무능력에 대해서 비판하려면 거기에 맞는 자료와 통계를 제시할 수 있어야 하며, 문제가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 ,명확한 이해와 분석이 요구된다. 즉 이 책에서 언급하고 있는 다양한 소재들은 주제에 맞는 논술을 쓸 수 있도록 전체의 줄거리를 잡아 나갈 수 있으며, 고교 독서평설이 필요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Journal de Deuil. 26 Octobre 1977 - 15 Septembre 1979 (Paperback)
롤랑 바르트 / Contemporary French Fiction / 2012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죽음이 하나의 사건이 되는, 다가오고 있는 모험이 되는 때가 있다.그런 때 죽음은 운동을 일으키고, 흥미를 자극하고, 긴장감을 깨우고, 행동을 하게 하고, 마비를 일으킨다.하지만 죽음이 더는 사건이 되지 못하는 그런 알이 온다.그때 죽음은 그저 일정한 시간의 연장,딱딱하고, 뻔하고, 특별한 것도 없고,지루하고,이미 결정되어 있는 것일 뿐이다.진정한 슬픔은 그 어떤 네러티브의 변증법보다도 강력하다.(-60-)


오늘 - 내내 침울하던 중에 - 오후가 끝나갈 즈음 갑자기 참을 수 없는 슬픔의 순간, 너무도 아름다운 헨델의 오페라<세멜레 Semele> 3악장을 듣다가 눈물을 터뜨리다.마망이 말하던 단어 ("나의 롤랑, 나의 롤랑") (-130-)


자기만의 고유한 슬픔을 지시할 수 있는 기호는 없다.
이 슬픔은 절대적 내면성이 완결된 것이다.그러나 모든 현명한 사회들은 슬픔이 어떻게 밖으로 드러나야 하는지를 미리 정해서 코드화했다.
우리의 사회가 안고 있는 패악은 그 사회가 슬픔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165-)


내가 너무도 사랑했었고 너무 사랑하고 있는 이들이, 내가 죽고 또 그들보다 오래 살았던 이들마저 죽고 난 뒤에는, 이 세상에서 아무런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고 말거라면,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나는 죽어서도 계속 디억되어야 할 필요가 있고,내가 살았던 흔적을 세상에 남겨둘 필요가 있을까? 마망에 대한 기억이 아놔 그녀를 알았던 이들이 죽은 뒤에도 세상에서 살아남지 못한다면,내가 죽은 뒤에도 기억되어 차갑고도 위선적인 역사의 어딘가에서 계속 살아남게 된다는 게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을까? 나는 나 혼자서만 '기념비'가 되고 싶지는 않다.(-204-)


1년 반 동안 내가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 잘 아는 건 오로지 나 자신 뿐이다.그동안 나는 당연히 해야만 하는 임무들을 미루기만 하면서, 꼼짝도 않고 아무런 변화도 일으키지 않은 채 제자리에 머물러 있는 슬픔의 자기 순환적인 길 안에 갇혀 있었다.그러나 나는 언제나 한 권의 책을 씀으로써 하나의 작별을 마무리짓곤 했었다.그것이 나의 방식이었다. -집요함,은밀함- (-241-)


인간은 언젠가 죽음과 마주할 때가 있다.내가 죽거나 아니면,누군가가 죽을 때이다.죽음은 항상 내 가까운 곳에 있으면서, 일상적이면서, 어색함과 만날 때가 있다.나의 죽음과 자의 가족의 죽음, 전혀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죽음을 목도하는 것은 죽음이라는 단어가 3인칭 대명사처럼 남의 일인 것처럼 생각하기 때문이다.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누군가의 죽음에 대한 경험이다.죽음은 누구에게나 보편적인 가치이며, 언어로 형용하기 힘든 감정이기도 하다.죽음과 슬픔에 대해서 내면 속의 영혼의 울림이라 부르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죽음을 목도한 자신의 슬픔과 외로움과 불안은 그 어떠한 언어로서 표현되지 못하고,부유하게 되는 이유였다.사람이 이상적으로 판단하지 못하고, 스스로 감정을 삭히면서 살아가는 것은 죽음이 우리 앞에 있기 때문이다.


죽음은 이질적이면서,응시해야 할 대상이기도 하다.인간은 반드시 죽음을 겪어야 하는 존재이고, 그것을 똑바로 보아야 하는 존재이기도 하다.고차원적인 생각과 사회를 추구하면서, 인간은 나의 죽음 뿐만 아니라 누군가의 죽음도 챙겨야 하는 순간이 찾아오면서, 인간은 점점 더 죽음에 갖혀버린다.그 죽음의 대상이 내가 직접 본적도 없고,소통해 존적도 없는 사람인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이 책은 나에게 겸손함과 위로와 안타까움을 동시에 체험하게 해주었다. 누군가의 애도 일기는 그것을 쓰는 사람의 기억의 실체이고, 감정이 있으며, 일기를 쓰는 목적이 있다. 그리고 그 끝마무리는 희극이 아닌 비극이 될 수 있다. 그건 이 책을 읽는 것은 좋지만, 스스로 애도 일기를 쓰면 안되는 또다른 이유이다.내 안의 슬픈 감정과 아쉬움이 머물러 있는다는 것은 유쾌하지 못하고,거기에서 스스로 벗어나지 못하면서, 삶에 대한 의미조차 내려놓게 된다.그 어떤 노력도 죽음앞에선 소용없다는 생각이 들게 되면,우리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된다. 마망의 죽음으로 인해 거기에 속박되는 삶을 살았던 롤랑바르트의 삶이 마망 알리에트 벵제의 삶을 따라가게 된 것은 불가피한 선택과 결정이었다.견디지 못하고, 넘어서지 못하는 것,그것이 그의 마지막 저작물 ,애도 일기>에 기록되어 있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Journal de deuil : 26 octobre 1977 - 15 septembre 1979 (Diary)
롤랑 바르트 / POINTS / 2016년 3월
평점 :
품절


죽음이 하나의 사건이 되는, 다가오고 있는 모험이 되는 때가 있다.그런 때 죽음은 운동을 일으키고, 흥미를 자극하고, 긴장감을 깨우고, 행동을 하게 하고, 마비를 일으킨다.하지만 죽음이 더는 사건이 되지 못하는 그런 알이 온다.그때 죽음은 그저 일정한 시간의 연장,딱딱하고, 뻔하고, 특별한 것도 없고,지루하고,이미 결정되어 있는 것일 뿐이다.진정한 슬픔은 그 어떤 네러티브의 변증법보다도 강력하다.(-60-)


오늘 - 내내 침울하던 중에 - 오후가 끝나갈 즈음 갑자기 참을 수 없는 슬픔의 순간, 너무도 아름다운 헨델의 오페라<세멜레 Semele> 3악장을 듣다가 눈물을 터뜨리다.마망이 말하던 단어 ("나의 롤랑, 나의 롤랑") (-130-)


자기만의 고유한 슬픔을 지시할 수 있는 기호는 없다.
이 슬픔은 절대적 내면성이 완결된 것이다.그러나 모든 현명한 사회들은 슬픔이 어떻게 밖으로 드러나야 하는지를 미리 정해서 코드화했다.
우리의 사회가 안고 있는 패악은 그 사회가 슬픔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165-)


내가 너무도 사랑했었고 너무 사랑하고 있는 이들이, 내가 죽고 또 그들보다 오래 살았던 이들마저 죽고 난 뒤에는, 이 세상에서 아무런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고 말거라면,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나는 죽어서도 계속 디억되어야 할 필요가 있고,내가 살았던 흔적을 세상에 남겨둘 필요가 있을까? 마망에 대한 기억이 아놔 그녀를 알았던 이들이 죽은 뒤에도 세상에서 살아남지 못한다면,내가 죽은 뒤에도 기억되어 차갑고도 위선적인 역사의 어딘가에서 계속 살아남게 된다는 게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을까? 나는 나 혼자서만 '기념비'가 되고 싶지는 않다.(-204-)


1년 반 동안 내가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 잘 아는 건 오로지 나 자신 뿐이다.그동안 나는 당연히 해야만 하는 임무들을 미루기만 하면서, 꼼짝도 않고 아무런 변화도 일으키지 않은 채 제자리에 머물러 있는 슬픔의 자기 순환적인 길 안에 갇혀 있었다.그러나 나는 언제나 한 권의 책을 씀으로써 하나의 작별을 마무리짓곤 했었다.그것이 나의 방식이었다. -집요함,은밀함- (-241-)


인간은 언젠가 죽음과 마주할 때가 있다.내가 죽거나 아니면,누군가가 죽을 때이다.죽음은 항상 내 가까운 곳에 있으면서, 일상적이면서, 어색함과 만날 때가 있다.나의 죽음과 자의 가족의 죽음, 전혀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죽음을 목도하는 것은 죽음이라는 단어가 3인칭 대명사처럼 남의 일인 것처럼 생각하기 때문이다.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누군가의 죽음에 대한 경험이다.죽음은 누구에게나 보편적인 가치이며, 언어로 형용하기 힘든 감정이기도 하다.죽음과 슬픔에 대해서 내면 속의 영혼의 울림이라 부르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죽음을 목도한 자신의 슬픔과 외로움과 불안은 그 어떠한 언어로서 표현되지 못하고,부유하게 되는 이유였다.사람이 이상적으로 판단하지 못하고, 스스로 감정을 삭히면서 살아가는 것은 죽음이 우리 앞에 있기 때문이다.


죽음은 이질적이면서,응시해야 할 대상이기도 하다.인간은 반드시 죽음을 겪어야 하는 존재이고, 그것을 똑바로 보아야 하는 존재이기도 하다.고차원적인 생각과 사회를 추구하면서, 인간은 나의 죽음 뿐만 아니라 누군가의 죽음도 챙겨야 하는 순간이 찾아오면서, 인간은 점점 더 죽음에 갖혀버린다.그 죽음의 대상이 내가 직접 본적도 없고,소통해 존적도 없는 사람인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이 책은 나에게 겸손함과 위로와 안타까움을 동시에 체험하게 해주었다. 누군가의 애도 일기는 그것을 쓰는 사람의 기억의 실체이고, 감정이 있으며, 일기를 쓰는 목적이 있다. 그리고 그 끝마무리는 희극이 아닌 비극이 될 수 있다. 그건 이 책을 읽는 것은 좋지만, 스스로 애도 일기를 쓰면 안되는 또다른 이유이다.내 안의 슬픈 감정과 아쉬움이 머물러 있는다는 것은 유쾌하지 못하고,거기에서 스스로 벗어나지 못하면서, 삶에 대한 의미조차 내려놓게 된다.그 어떤 노력도 죽음앞에선 소용없다는 생각이 들게 되면,우리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된다. 마망의 죽음으로 인해 거기에 속박되는 삶을 살았던 롤랑바르트의 삶이 마망 알리에트 벵제의 삶을 따라가게 된 것은 불가피한 선택과 결정이었다.견디지 못하고, 넘어서지 못하는 것,그것이 그의 마지막 저작물 ,애도 일기>에 기록되어 있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Journal de deuil. Tagebuch der Trauer, franzosische Ausgabe (Paperback) - 26 octobre 1977 - 15 septembre 1979
롤랑 바르트 / Editions du Seuil / 2010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죽음이 하나의 사건이 되는, 다가오고 있는 모험이 되는 때가 있다.그런 때 죽음은 운동을 일으키고, 흥미를 자극하고, 긴장감을 깨우고, 행동을 하게 하고, 마비를 일으킨다.하지만 죽음이 더는 사건이 되지 못하는 그런 알이 온다.그때 죽음은 그저 일정한 시간의 연장,딱딱하고, 뻔하고, 특별한 것도 없고,지루하고,이미 결정되어 있는 것일 뿐이다.진정한 슬픔은 그 어떤 네러티브의 변증법보다도 강력하다.(-60-)


오늘 - 내내 침울하던 중에 - 오후가 끝나갈 즈음 갑자기 참을 수 없는 슬픔의 순간, 너무도 아름다운 헨델의 오페라<세멜레 Semele> 3악장을 듣다가 눈물을 터뜨리다.마망이 말하던 단어 ("나의 롤랑, 나의 롤랑") (-130-)


자기만의 고유한 슬픔을 지시할 수 있는 기호는 없다.
이 슬픔은 절대적 내면성이 완결된 것이다.그러나 모든 현명한 사회들은 슬픔이 어떻게 밖으로 드러나야 하는지를 미리 정해서 코드화했다.
우리의 사회가 안고 있는 패악은 그 사회가 슬픔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165-)


내가 너무도 사랑했었고 너무 사랑하고 있는 이들이, 내가 죽고 또 그들보다 오래 살았던 이들마저 죽고 난 뒤에는, 이 세상에서 아무런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고 말거라면,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나는 죽어서도 계속 디억되어야 할 필요가 있고,내가 살았던 흔적을 세상에 남겨둘 필요가 있을까? 마망에 대한 기억이 아놔 그녀를 알았던 이들이 죽은 뒤에도 세상에서 살아남지 못한다면,내가 죽은 뒤에도 기억되어 차갑고도 위선적인 역사의 어딘가에서 계속 살아남게 된다는 게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을까? 나는 나 혼자서만 '기념비'가 되고 싶지는 않다.(-204-)


1년 반 동안 내가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 잘 아는 건 오로지 나 자신 뿐이다.그동안 나는 당연히 해야만 하는 임무들을 미루기만 하면서, 꼼짝도 않고 아무런 변화도 일으키지 않은 채 제자리에 머물러 있는 슬픔의 자기 순환적인 길 안에 갇혀 있었다.그러나 나는 언제나 한 권의 책을 씀으로써 하나의 작별을 마무리짓곤 했었다.그것이 나의 방식이었다. -집요함,은밀함- (-241-)


인간은 언젠가 죽음과 마주할 때가 있다.내가 죽거나 아니면,누군가가 죽을 때이다.죽음은 항상 내 가까운 곳에 있으면서, 일상적이면서, 어색함과 만날 때가 있다.나의 죽음과 자의 가족의 죽음, 전혀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죽음을 목도하는 것은 죽음이라는 단어가 3인칭 대명사처럼 남의 일인 것처럼 생각하기 때문이다.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누군가의 죽음에 대한 경험이다.죽음은 누구에게나 보편적인 가치이며, 언어로 형용하기 힘든 감정이기도 하다.죽음과 슬픔에 대해서 내면 속의 영혼의 울림이라 부르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죽음을 목도한 자신의 슬픔과 외로움과 불안은 그 어떠한 언어로서 표현되지 못하고,부유하게 되는 이유였다.사람이 이상적으로 판단하지 못하고, 스스로 감정을 삭히면서 살아가는 것은 죽음이 우리 앞에 있기 때문이다.


죽음은 이질적이면서,응시해야 할 대상이기도 하다.인간은 반드시 죽음을 겪어야 하는 존재이고, 그것을 똑바로 보아야 하는 존재이기도 하다.고차원적인 생각과 사회를 추구하면서, 인간은 나의 죽음 뿐만 아니라 누군가의 죽음도 챙겨야 하는 순간이 찾아오면서, 인간은 점점 더 죽음에 갖혀버린다.그 죽음의 대상이 내가 직접 본적도 없고,소통해 존적도 없는 사람인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이 책은 나에게 겸손함과 위로와 안타까움을 동시에 체험하게 해주었다. 누군가의 애도 일기는 그것을 쓰는 사람의 기억의 실체이고, 감정이 있으며, 일기를 쓰는 목적이 있다. 그리고 그 끝마무리는 희극이 아닌 비극이 될 수 있다. 그건 이 책을 읽는 것은 좋지만, 스스로 애도 일기를 쓰면 안되는 또다른 이유이다.내 안의 슬픈 감정과 아쉬움이 머물러 있는다는 것은 유쾌하지 못하고,거기에서 스스로 벗어나지 못하면서, 삶에 대한 의미조차 내려놓게 된다.그 어떤 노력도 죽음앞에선 소용없다는 생각이 들게 되면,우리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된다. 마망의 죽음으로 인해 거기에 속박되는 삶을 살았던 롤랑바르트의 삶이 마망 알리에트 벵제의 삶을 따라가게 된 것은 불가피한 선택과 결정이었다.견디지 못하고, 넘어서지 못하는 것,그것이 그의 마지막 저작물 ,애도 일기>에 기록되어 있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