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시도 채 안되어 잠이 들었던 어제는, 숙면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잠을 잘 못잔 것은 아니다. 온갖 잡스런 꿈을 꾸던 중 남편이 새벽에 오줌 누러 일어나는 소리에 설핏 정신이 들었고 아, 방금 나는 이런 꿈을 꾸고 있었구나, 생각이 났다. 그 생각은 잠에서 깬 이후로도 계속 남아있다. 차마 말하지 못할 정도의 꿈은 아니었는데 보통 이런 류의 꿈은 온갖 잡다한 꿈을 제치고 기억에 오롯이 남는다. 외간 남자(연예인 포함)가 등장해야만 이 정도 반열에 오를 수 있는데, 글쎄 어제는 어떤 남자가 중국어도 못하는 나를 데리고 중국으로 가서 함께 일해보자는 것이다. 남편이 있는 나를 말이다. 게다가 남편이 눈앞에 있는 자리에서 그런 제안을 했다. 그래서 그랬는지 손끝 하나 대지 않고 날 흥분시켰다고 봄직하다.

 

조금 있으면 밭으로 가서 구덩이를 파고 병든 사과들을 묻어야 한다. 8월은 시나노 레드, 9월은 홍로와 홍장군에 이어 이제 10월을 눈앞에 두고 있는데 그간 아무런 보람도 없이 골병만 들었다고 한탄할 내가 아니다. 상실감은 상실감이고, 그 정도 잃었다고 해서 끄떡할 거였으면 애초에 시작도 안했다. 전투력을 다시 불태워야 할, 이제 미야마의 계절이다. 스케일에 압도당하지 말자. 5월, 그  때아닌 더위 속에서도 마냥 신났던 날들을 기억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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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을 안치고 고담이 어디있나 찾으러 애들 방에 왔더니 컴이 켜져있는게 아닌가. 물론 고담인 의자에 누워 자고 있었고. 그래서 한줄 쓴다. 옆에 있는 다른 의자를 끌어다 앉고. 밥이 끓기 시작할 때까지만 말이다. 어젠 남의 집 과수원에서서 일당 7만원을 받고 일을 했다. 40분 걸려 들어간 깊은 산속 과수원. 그 집 앞마당엔 허연 개 한마리가 있었는데 덩치가 버들이만 했다. 그 개의 목을 거의 끌어안다시피 안고 쓰다듬다가 조금 울었다. 버들이 생각이 나서 그랬던 건 아니고 일꾼으로 온 내가 웬걸하인 취급 받는 느낌이 어느 순간 조금 들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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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수철 2015-09-22 1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버들이는 잘살 거예요.

잘 지내시죠?^^

컨디션 2015-09-24 01:33   좋아요 0 | URL
그동안... `자폭` 후에도 이곳을 배회하는 버릇을 못버리다가 결국 숨어살다시피 하고 있는데 이런 누추한 곳까지 어인 발거음을..^^

한수철님도 잘 지내시죠?

한수철 2015-09-24 08:52   좋아요 0 | URL
예, 전 똑같습니다.^^

...자폭 이후 다시 활동을 시작하신 건 알고 있었는데

주리를 틀어도 내가 먼저 알은체를 하지는 않을 거야- 그런 고집이 발동돼서, 그냥 가끔 몰래 방문하곤 했어요.

자주 글 남겨 주세용

컨디션 2015-09-29 10:23   좋아요 0 | URL
ㅋㅋ 주리를 틀어도...

에,,저도 뭐 별반 다를바 없는 심정으로 버텼?어요. 댓글 안달겠다는 `고집`ㅎㅎ

한수철님 글 안읽고는 못배기는 1인으로서 그저 눈팅만 일삼느라, 저 나름 맘고생 하고 있답니다.^^
 

오랜만에, 아니 어쩌면 처음으로, 아침 이 시간에 컴퓨터 앞에 앉았다. 남편이 좀더 이불 속에서 밍기적거렸으면 좋겠고 올려놓은 찌개가 좀 천천히 끓기 시작했으면 좋겠다. 오늘은 오후 5시 무렵이면 집에 돌아와 샤워를 하고 있을 것이다. 저녁은 아주 간단하게, 대충(늘 그랬지만) 때울 참이다. 그래서 이겠지만 난 지금 조증이다. 하지만 손가락은 굼뜨다. 마음 같아선 자판 위에서 춤을 춰도 모자랄 판에. 이 모두가 가운데 손가락 때문인데 그동안 이 손가락의 장단에 오랫동안 놀아나도록 스스로를 방치한 대가이니 이제 와서 무슨. 키보드 워리어가 되기엔 너무 늦었다고 누굴 탓하리. 

 

남편이 아직 이불 속에서 나오지 않고 있으므로 두번째 단락을 이어간다. 오늘 남편은 일박이일 일정의 출타를 앞두고 있다. 남편의 포터는 36번 국도를 달려 어느 작은 소도시에 도착할 것이다. 늦여름 꽃들이 드문드문 피어있고 이제 막 피어난 코스모스 사이로 노을빛이 내려앉는 길 위를, 요즘 같은 저녁을, 오늘은 각자 해결하는 방식이라니, 좋아서 미치겠다. 이렇게 좋아 죽겠는 내 마음을 남편이 알게 된다면 얼마나 서운하고 또 서운할까. 그래도 좋다. 알 턱이 없는데 무슨 걱정이랴. 이랴이랴, 말을 타고 달리는 내 마음을 누가 말릴소냐.   

 

어젯밤, 늦도록 아래 리뷰를 쓰느라 시간을 엄청 버렸다. 겨우 2시간 잔 것 같은데 내내 반수면 상태였다. 몸을 혹사했더니 리듬이 깨졌고 그 바람에 제 정신이 아닌 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이럴 때 찾아오는 쾌감이 있다. 허리를 쭉 펴고 실로 오랫만에 맛보는 쾌감을 깊숙이 끌어안는다. 아니 등에 업는다. 둥가둥가 아이를 얼르듯.

 

그동안 미뤘던 일들을 할 예정이다. 제일 먼저, 작은 물건부터 시작해서 큰 가구(랄 것도 없지, 냉장고나 장농을 옮기는 건 아니니까) 따위를 이리저리 들었다 놨다 할 것이다. 한번 일을 벌이면 끝장을 보는 스타일이라 아이들은 무척 심란해 할 테지만, 드디어 엄마의 히스테리가 집안의 먼지들과 소통하는 절호의 주기를 맞이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와, 생각만 해도 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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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정의 히말라야 환상방황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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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읽었다. 2주의 대출기간이 있었고, 미련없이 반납한 게 바로 어제다. 미련없이 반납했다는 건 '완독'을 했다는 것이다. 얼추 열흘 정도 걸렸다. 내 독서환경(독서력)에 비추었을 때 이 정도면 굉장하다. '정유정 책인데 그렇게나 많이 걸렸어?" 라는 힐난(물론 내가 나에게 던지는)은 이제 없다. 깨끗이 털고 일어난 기분이다.  

 

일단 책의 도입부터 확 끌렸다. 히말라야,를 결심하게 된 배경과 당시의 혼란스런 심경을, 자칫 뻔한 얘기를 뻔하지 않은 방식으로 전달하는 솜씨에 감탄했고 그것이 동력이 되어 끝까지 읽을 수 있었다. 그 방식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마지막 책장을 덮을 때까지 배신당했다는 느낌은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똑똑 떨어지는 스타카토식 문장. 달력을 한장한장 찢으며 달려가는 망설임없는 여정. 고산병에 시달리는 며칠 간의 기록조차 한치의 망설임 없이 잘 견뎌낸다. 글쟁이 특유의 과잉이나 엄살로 힘들게 하지 않는다. <7년의 밤>과 <28>이라는 탁월한 서사를 만들어낸 정유정이니까 이 정도는 거뜬히 견뎌내겠지, 하는 일종의 믿음. 다만, 신음소리조차 내지 않으려는 그녀의 앙다문 듯한 고통이 엉뚱한 차원에서 내게로 전이된 느낌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강하구나 정유정, 독하구나 정유정을 연발해야 했던 것도 일종의 고통이라면 말이다.  

 

떠난다는 것. 여행(해외)에 대한 로망은 누구나 있다. 본능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누구나 있다. 여행의 필요충분조건을 잘 구비했든, 여행에 대한 일념으로 몇년짜리 적금을 들어야 하든, 죽음을 눈앞에 둔 시점에 언뜻 떠오르는 소원이든. 그렇다면 나는 어떤가. 해당사항 없음,이다. 해외를 나가 본 적 없는 나. 이 시대의 '불능'이라고 해도 견딜만 한 표현이다.

 

뭐 어쨌든.

 

동행한 김혜나 작가는 물론이고, 히말라야 중턱(?)에서 정유정을 알아본 한국의 어느 청년 독자라든가, '뷰에 죽고 뷰에 사는' 등반 대장 버럼까지, 내가 부러워하고 또 부러워한 사람들이 바로 이들이었다. 그 이유는, 너무 뻔해서 밝히지 않겠다. 그러나 이것만은 밝히고야 말겠다. 내 부러움의  최종 승자는 따로 있었다. 다름 아님 정유정의 남편이다. 소설가, 그것도 매우 잘 나가는 실력파 소설가의 남편. 아내의 집필 환경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팍팍 밀어주는 외조력(?)까지 갖춘 것이 분명해 보이는 남자. 난 뜻밖에도 이 남자의 일상이 부럽다. 그가 무슨 일을 하는지 전혀 모르지만, 아무튼 부럽다. 아내가 벌어오는 인세 덕에 별 걱정없이 사는 것 아니냐는, 어떤 '편견'에 사로잡힌 것이라면 할 말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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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디션 2015-09-11 08: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타 아닌 오타 발생. 뷰에 죽고 뷰에 사는 남자는 `버럼`이 아니고 `검부`였다. 본문에서 고치지 않고 이렇게 셀프 댓글로 수정...하는 재미.
 

이상호 기자가 올린 <다이빙벨>을 보던 남편. 갑자기 끊겨서 영상이 안나온다고 한다. 같이 보자고 했건만 나는 이것저것 잡일을 하느라 그러지 못했다. 나중에 따로 보라고, (또는 보자고) 하는데 그럴 수 있ㅇㄹ지 모르겠다. 두려워서가 아니다. 두려워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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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5-09-02 1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꼭 보시기 바랍니다.

컨디션 2015-09-04 14:57   좋아요 0 | URL
네 봤습니다.
`손바닥 극장`으로요. 혼자서는 못보고 남편이랑 같이요.

울분 슬픔 두려움 등등이 어떤 확신으로 바뀌게 만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