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긴 이 상황에서 안졸린 게 이상하지.
모두들 안자고 있다. 낙동강 전투때 북한이 이겼는지 남한이 이겼는지 왕왕 소리가 오가고 있다. 남편과 어머니다. 남편은 어머니를 앉혀놓고(?) 한국의 근현대사를 열변하고 있다. 어머니, 이승만은 나쁜놈이예요. 막걸리 두 잔에 호로록 취하시는가 싶더니 다시 어린애처럼 귀엽게 복귀하신 어머니. 아들의 음주 역사강의(?)에 진지하게 귀기울이시지만 놀라워하진 않으신다. 이승만은 개새끼예요. 더한 말이 나와도 동요하지 않으신다. 아들 말이라면 콩이 맥주를 쏜다, 해도 믿으실 분이니까. 지난 대선에서 박근혜를 찍었다는 실토를 하신 이후로 어머니는 무척 미안해하셨다. 난 언제부턴가 둘 간의 대화에 끼지 않고 내 할 일을 하게 되었지만 그 누구도 불편해하지 않는다. 어머니가 오시면 내 할일은 두 배가 되기 때문에 집안은 평소보다 세 배는 잘 정돈되어 있다. 시집살이를 해서가 아니라 내가 정해놓은 마지노선인 셈인데 나는 나의 셈법에 넌더리를 내면서도 고칠 생각을 하지 않는다. 나의 끝없는 인정욕구가 날 이렇게 만드는 건가 싶지만 어쩌면 나를 지탱해온 비빌 언덕에 다름 아니라는 생각을 한다.
어머니가 드디어 하품을 하셨다. 이야기가 어느 대목에 이르러서 끝이 나게되었는지 이 글을 쓰느라 들을 새가 없었다. 어머니 이제 주무세요. 너 허리에 물파스 바르지 그랬냐. 저 허리 괜찮아요. 에고 그 허리 큰일이다. 괜찮아요 어머니. 남편이 방으로 들어갔다. 쓰러지듯 짧은 한숨을 쉬는 소리가 들린다. 츄리닝 바지를 벗고 파자마스러운 바지로 갈아입는 소리도. 나도 이제 들어가야겠다. 알라딘이 밥 먹여주는 것도 아닌데 이 늦은 시간까지 무슨 청승인지, 왼쪽 두개골에서 찌르르 사이렌 소리가 울린다. 내일부터 비가 주말 내내 실컷 온다고 하니 나로선 빗물의 연휴다. 지난 열흘간의 일이라면, 수확의 기쁨 운운할 체력이 없었다는 것. 그런 클리셰에 놀아나지 않을 체력만 남았다. 아니 남아돈다. 난 내가 이렇게 대단할 줄 몰랐다. 이제 짧으면 열흘, 길면 보름? 밑도 끝도 없는 근거만 남았다.
그러니까 내 체력의 위대함을 증명하기만 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