짬날 때마다 영화감상 / 세상일 간접경험 '기쁨' 남미숙 (약사 - 나의 여가). 한겨레.1994.6.3.13면. 

나는 시간만 나면 영화를 본다. 아니 그보다는 영화를 보기 위해 시간을 쪼갠다는 게 더 알맞은 표현일 것이다. 사람 사이에 부대끼고 힘들 때는 혼자 영화관을 찾는다. 물론 친구들을 오랜만에 만날 때도 영화를 함께 보자는 제의를 많이 한다. 소규모 영화상영 클럽이나 비디오방도 토막시간에는 자주 찾는 편이다. 내가 영화보는 것을 취미로 갖게 된 것은 영화광인 친구 덕분이다. 그 친구는 체력이 허용하는 한 하루에도 몇편씩 영화를 볼 뿐 아니라 마음에 드는 좋은 작품은 너댓번을 보고도 양이 차지 않아 비디오테이프를 사서 지니고 있을 정도로 영화광이다. 이 친구에 끌려다니며 '세뇌' 당하다 보니 나도 어느새 영화 속으로 빠져들어가게 된 것이다. 요즘은 잡지를 보거나 서점에 들러도 영화관련 코너를 먼저 돌아보게 된다.  

막동이 시나리오 당선작 제노사이드 쓴 안재훈 씨. 한겨레.1994.6.1.16면.   

"처음 타란티노를 알게 됐을 때, 친구 하나가 그러더라고요. 야, 너랑 똑같은 자가 또 있구나." 제1회 막동이 시나리오 공모 당선작 (제노사이드)의 안재훈(25)씨가 타란티노처럼 비디오가게 점원을 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곳은 타란티노에게 그랬듯, 안재훈씨에게도 학교였다. "이름난 영화 찾아다니며 보는 영화광은 아닙니다. 그럴 필요 있나요? 비디오 가게만 가도 가슴이 뛰는데요. 장르 가리지 않고 아무 영화나 좋아해요." 

예체능계 남자수석 소영준군. 한국일보.1996.12.6.38면. 

소군은 입시공부에 매달리면서도 한달에 한번은 꼭 영화를 보러 갔고 토요일 하오 등 여유가 있을 때는 반드시 비디오로 영화 감상을 했다며 스스로 영화광이라고 말했다. 영화학과가 설치된 대학을 지원할 생각이다. 

일 까지 찾아가 관람 '영화광'.문화일보.1997.9.24.24면. 

서른 세살의 독신남 김재용(서울 구로구 독산동)씨. 평범한 회사원인 그는 일과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한 두 편의 비디오와 케이블영화를 보고 그러고도 시간이 남으면 일본 위성방송의 영화까지 놓치지 않는 영화광이다. 특히 일본영화에 관심이 많은 그는 이번 여름휴가도 도쿄로 갔다 왔다. 

여고 3년생 김현정(경기도 분당시 야탑동) 양. 반에서 1,2등을 다투고 공부만 잘하는 모범생이라는 뜻의 '범생이'로 불리는 평범한 여학생이지만, 입시 스트레스를 영화로 푸는 영화광이다. 할리우드영화는 시시해서 안보고 유럽영화를 좋아한다는 그는영화잡지를 정기구독하며 가끔씩 친구들과 토론회를 갖는다. 부모님의 권유로 대학진학은 영화와 무관한 학과를 택할 예정이지만 언젠가 영화와 관련된 일을 하고 싶어 한다. 

외국의 난해한 아트영화들에는 관객이 들지만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같은 실험성 높은 우리 영화는 외면당하는 풍토도 서구 우월주의나 명성에 집착하는 영화보기 풍토를 보여준다는 지적이다. 케이블 영화채널 캐치원 주최의 제1회 공포영화제를 기획했던 송혁 과장(캐치원 마케팅팀)은 "계보를 줄줄 외우는 등 영화보기를 지적 과시의 대상으로 착각하는 사이비 마니아들도 있다"고 말한다. 

소설가 이제하씨.이 세기의 인물탐구 27. 서울신문.1993.5.5.11면. 

 군제대후 조각과를 4학년 1학기에서 그만두고 서양화과 3학년에 편입, 그는 프랑스의 초현실주의 화가인 델보를 비롯, 뭉크와 스텡 프란시스 베어컨에 빠져있었고 영화에 대해서는 한때 소형영화클럽을 만들만큼 영화광. 요즘도 시간이 날때마다 청계천에 들려 레이저디스크를 복사해온다. 비디오테이프만 8백여개. 좋아하는 작품은 소련의 영화감독 타르코프스키의 노스탤지어를 꼽고 있다.  

예술인의 고민 / 윤대녕 소설가. 서울신문.1994.12.27.12면

오랫동안 귀로 들어오던 레오 카락스의 영화 <나쁜 피>를 보았다. 영화 비평가가 아니므로 주제넘은 소리를 할 수는 없겠지만 이 영화를 보는 동안에 나는 예술, 대중, 권력이라는 해묵은 자기 질문을 다시 하게 되었다. 90년대 들어 폭발적인 문화수요가 일어나면서 이른바 매니아 집단들이 형성되고 있다. 영화 쪽도 사정은 마찬가지여서 컴퓨터 통신을 통한 동호인 모임이 있는가하면 미개봉 필름만 상영하는 소수 단체도 있는 모양이다. 쉽게 말하면 일반대중의 문화감식 수준이 많이 높아졌다는 얘기다.'나쁜 피'는 말하자면 개봉되기 오래전부터 매니아 집단 사이에서 돌려보곤 하던 그런 영화 중의 하나다. 

(중략)어쨌든 영화를 보고 나서 관객들의 표정은 대개가 석연치가 못하다. 난해하다는 뜻일 것이다. 가장 대중적이고 상업적인 예술 장르라는 영화가, 거꾸로 가장 예술적이라는 상업적 용어로 포장돼 관객을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형국이다. 내가 보기에 이 영화는 예술 이데아 품목의 필름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든다.  

좋은 비디오 함께 봅시다. 한겨레.1992.3.13.21면. 

요즘 도시인들의 새로운 여가풍속을 상징하는 표현으로 '방콕파'란 유행어가 있다. 휴가 때나 쉬는 날 무얼하느냐는 물음에 혼자 편히 감상할 수 있는 매력에 흠뻑 빠진 '비디오광'가운데 상당수는 날마다 한편이라도 안 보면 잠을 잘 수 없는 '비디오 중독증'의 경지에 이르러 생활의 리듬을 잃기도 한다.  

김성곤 교수의 영화 에세이. 박덕규의 책읽기.국민일보.1994.9.9.10면.  

영화 얘기만 나오면 주인공 인적 사항에 영화감독의 다양한 경력에 영화 유파까지 얹어 소감을 피력하는 비디오광들을 자주 만난다. 영화라면 나도 논리적인 감상문을 늘어놓을 수는 있지만, 이 비디오광들 앞에서는 할 말을 잃게 된다. 우선은 그들의 시청량을 못 따르기 때문이고, 더 정확하게 말하먄 그들이 그 폭넓은 시청량을 무기삼아 나처럼 일상적인 차원의 영화팬들로서는 잘 이해되지 않는 설명을 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급독자공동체의 길잡이.김영진의 <미지의 명감독>.씨네21.1997.11.4-11. 82쪽.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상하다. 언론에서 부추겨준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와 데이비드 린치와 타르코프스키는 다들 보러가면서 미클로시 얀초나 프리드릭 소 프리드릭슨의 걸작은 왜 거들떠도 보지 않는 것일까?  혹시 우리의 영화문화는 블록버스터건 예술영화건 유행만 따라가고, 우리의 영화광은 영화를 '지적 과시'의 무기로만 삼고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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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일(1997.1.). 비디오의 헤쳐 모아 영화 만들기. 월간 말.248-249. 

248쪽 

이제는 숨은 비디오 찾기도 슬슬 지겨워지기 시작할 것이다. 게다가 비디오시장의 위축은 숨은 비디오가 나올 수 있는 구조조차 숨통을 틀어막고 있다. 올 한 해동안 당신 주변의 동네 비디오 가게 중 사분의 일이 사라졌다. 대부분의 비디오들은 영화관에서 개봉된 다음에 찾아오고, 미개봉작들은 천편일률의 따분한 액션영화와 에로영화가 차지한다. 그리고 더 이상 속아서(?) 숨은 비디오 걸작을 내지 않을 만큼 비디오 업자들도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세련되어 졌다. 자. 이제는 비디오 가게 구석의 먼지를 뒤집어쓰며 없는 비디오를 찾으려고 시간을 보내는 대신 눈을 돌려보자. 우선 당신 방안에 있는 비디오 테크를 다시 들여다보실 것. (중간) 비디오는 당신의 적극적인 참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비디오의 새로운 제품이 나올때마다 광고에는 온갖 새로운 기능이 추가되었다고 으스댄다. 정작 당신이 손가락으로 하는 일이라곤 네 가지밖에 없는데, 비디오에는 오디오와 달리 명품이란 없다. 말 그대로 소모품이 그 운명이다. 그래서 수명을 다하기 전에 온갖 기능을 모두 사용하라고 만들어진 기계다.  

249쪽 

우선 당신이 좋아하는 명장면 열 개를 뽑아 보자 그리고 그 장면이 나온 비디오를 빌린다. 이제부터 당신이 해야 할 일은 다소 번잡스럽더라도 창조적인(!) 작업이다. (중략) 문제는 이 영화들을 얼마나 보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읽어 낼 것인가이다. 그것을 읽어내는 것은 영화를 읽는 것을 넘어서서 우리 세대들의 마음과 정서를 일어내는 일이 될 것이다. (중략) 비디오라는 기계는 멈추지 않고 계속 흘러가며 그저 우리들의 기억 속에 숨어 버리는 영화의 이미지와 사운드를(우리는 한 번 본 영화를 과연 어디까지 기억할 수 있는가) 보존하고, 반복시키고, 돌아보게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기억의 속도를 뜯어내고 멈추고 더 나아가 다른 속도로 만들어 낸다. 비디오가 영화를 보는 태도에 가져온 가장 혁명적 전환은 영화를 가지고 다시 우리가 영화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이다. 영화비평가 중의 비평가라고 불리운 앙드레 바쟁이 우리에게 해주는 충고, 영화를 많이 보는 것은 영화를 사랑하는 일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정말 중요한 일은 좋은 영화를 여러 번 보는 일이다. (중략) 이제부터 우리가 하려는 일은 비디오로 당신이 좋아하는 장면의 비밀을 훔쳐내고,산산조각 내버린 다음 우리 방식으로 다시 조립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과정은 잔인무도한 시체부검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영화를 사랑하는 마지막 단계, 영화를 다시 한 번 만드는 것이다. 우리는 사랑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정성일(1995.12). 남한에서 예술영화를 본다는 것. 월간 말. 240 - 241. 

240쪽 

1995년 남한에서 '예술영화'를 본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또는 '예술영화'라는 말 자체가 갖고 있는 그 이상한 분위기를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 것일까. 혹시 그것은 일정부분 새로운 상업주의와 결탁한 협잡은 아닐까. 관객들은 왜 '예술영화'라는 한마디에 모든 것을 눌러 참아가면서 소비하는 것일까. 조금 과장해서 '예술영화의 이데올로기'라는 말이 가능한 것일까. 올해 비디오시장에서 가장 주목할만한 경향은 '예술영화'라고 분류되던 영화들이 갑자기(!) 지금까지의 금기사항을 돌파하길도 하듯 출시되기 시작한 것이다. (중략) 오히려 여기서는 1995년 지금 여기에서 진행되는 이미 저기에서의 물신화된 예술영화 비디오를 물어 볼 생각이다. 우선 예술영화는 그렇게 고상하고 품위 있는 용어가 아니다. 예술영화는 그 자체로 또 다른 상업영화의 범주이다.  

(중략) 영화는 '돈이 많이 드는' 예술이며, 배급구조 없이는 살아남을 수 없다. 그래서 전후 유럽영화들은 할리우드의 외곽지역, 또는 변방, 더 솔직히 말하면 시장의 여백 사이로 파고들어야만 했다. 유럽영화들이 자신의 관객으로 선택한 것은 유럽의 반 할리우드 성향의 학생들과 지식인, 그리고 고정관객들과 유럽 바깥의 유럽성향의 '속물' 엘리트주의에 빠진 엄숙주의 관객들이었다. 그리고 이것을 영화매스컴들이 부추기기 시작했다. 

241쪽 

중요한 것은 유럽영화의 한 장르로서 '예술영화'가 산업적으로 발명(!)된 사실이다. 실제로 유럽의 '예술영화'는 정말 예술 지향적인(그런데 정말 그런 게 있기는 한 것일까 영화들이 아니라 시대의 분위기와 고급이라고 스스로 생각하는 대중의 일부관객들이 좋아하는 변덕스러운 취향에 따라 포장되는 패션 영화들이다. 그건 마치 지식조차도 철따라 갈아입는 의상처럼 바뀌는 전후 서구 소비사회의 속도에 어울리는 것이기도 하다. 시대를 뛰어넘는 명작이라는 표현은 언제나 재고처리를 서두르는 광고문구이다.  

(중략) 더욱 위험한 것은 유럽 '예술영화'의 한국적 모방들이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이 중독은 더욱 치명적이기조차하다. 유럽 '예술영화'에 빠져든 것은 대부분 영화광들이고, 그들은 우리 시대의 영화유행을 이끌어가고 있다. 더 나아가 그것을 가치의 기준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 또다른 편향과 종속에로 뛰어드는 위험한 불장난이다. '예술영화' 비디오들은 그 자체로 비판하기보다는, 오히려 그것들의 숭배와 물신화의 과정을 통해서 우리들의 반성적 의식을 요구하는 자아비판의 과정이다.이 새로운 상업주의의 경향이라고 부를 '예술 영화'는 이제 새롭게 시작하는 영화 1백년 내내 싸워야 할 또 다른 우상숭배이다.  

정성일(1995.9). 우리가 찾아야 할 남한의 컬트영화들.월간 말. 244 - 245. 

244쪽 -245쪽

흥미 있는 것은 컬트영화가 태어나는 과정이 나라마다 서로 다르며, 그 과정이 그 나라의 컬트영화를 규정한다는 사실이다. 미국의 컬트 영화는 주로 대학가 근처의 심야 영화관에서 태어났다. 그것은 대학생 문화이며, 여가의 문화이며, 제도 내의 반제도이며, 보호받는 일탈이다. 프랑스에서 컬트는 시네마 데끄로부터 태어난다. 그것은 이미 제도이며, 역사이며, 문화이며, 자가당착적 저항이며, 보수적인 싸움이며, 개인적인 탐닉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선 우리에게(244)는 심야영화와 시네마데끄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컬트영화가 만들어질 수 있는 토대가 세워졌다. 그것은 영화에 의해서가 아니라 비디오를 통해서이다. 심야의 교회 십자가만큼이나 많은 비디오 대여점의 형광간판이 유령처럼 섬광을 발하고 연간 1조1천억원에 달하는 비디오들이 동네 구멍가게 비디오점의 진열대를 장식한다. 너무나 많이 쏟아져서 뭐가 뭔지 알 수 없다. (중략) 양적 전화는 질적 전화를 가져온다는 옛 선현의 말씀은 여전히 옳다. 구경거리로 영화를 보던 비디오 마니아가 어느새 영화광으로 '전화'하여 이제 참고서적까지 들고 비디오 대여점을 순례하기 시작한다. 그들의 찬양의 대상을 찾기 위해서. 이것은 축복받은 결말일까? '여전히' 아니다. 가장 유감스러운 것은 우리의 컬트문화(이런 말이 허용된다면)가 일정 부분 '수입되었다'는 것이다. 수많은 컬트논쟁가들이 컬트영화의 정의를 내리면서 간과하고 있는 사실은 영화광들이 컬트영화라고 발견하는 것은 소수를 제외하고는 자국의 영화라는 점이다. 여기에는 이유가 있다. 영화광들이 컬트영화로 맞서려는 것은  전세계적 규모의 영화문화(그런데 그런 것이 가능하기나 할까?)가 아니라, 바로 자국의 문화와 영화산업의 토대 위에서 자국의 영화산업 양식과 문화, 공식 역사, 교과서화된 영화에 맞서려는 것이다. 컬트영화광이라고 불리는 것은 영화의 체제에 맞서는 '반체제 아웃사이더'가 되는 것이지, 결코 국적불명의 유행에 휩쓸려 사대주의자가 되는 것이 아니다. (중략) 마침내 영화광들은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사대주의자가 되었고,바깥의 영화를 끌어들이는 첨병이 되었으며, 바깥에서 바깥과 싸우는 국적 없는 전투에 참여한 것이다. 토대에 대한 비판없이 남한의 컬트영화 현상을 공격하는 것은 정말 비겁한 일이다.   

정성일(1998.7). 어제의 컬트는 오늘의 컬트가 아닌데...월간 말. 228-229쪽. 

228쪽 

한국에서 컬트(cult)영화라는 말은 그 이상한 이름짓기의 주해가 만들어 내는 소란스러운 표류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왜냐하면 이 우리는 이 말의 실체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 말이 힘을 갖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영화에서 제도 바깥에 있는 사람들을 통해 유포되기 시작한 데 있다. 그런 가운데 컬트라는 말은 제도에 대한 저항의 함의를 획득하게 되었으며, 일종의 비밀결사체와도 같은 자장을 발휘하였다. 그러나 저항과 자장은 유행과 광고와 카피로 전이되었다. 모두들 자기가 편한 방식으로 이 말의 몸을 빌려쓰고 스스로를 변장했다. 여기에 포스트모더니즘이 가세했다. 서로 아무런 연관이 없는 두 개의 말은 잡종교배하였고 컬트는 점점 더 많은 주석을 갖기 시작했다. 오래된 우화의 교훈처럼 너무 많은 이름을 갖고 있는 것은 결국 아무 것도 아니다. 컬트는 그 모든 영화의 다른 이름이자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되었다. 이제 유행은 지나가고 컬트라는 말의 자장은 그 힘을 잃었다. 

안정숙.특정취향 관객을 위한 영화 장르 아닌 관람방식 지칭, 컬트영화란 무엇인가. 한겨레.1992.10.24.9면. 

(전략) 그러나 정성일씨는 "엄격하게 말해서 '컬트영화'는 없다. 이런 영화관람방식의 '컬트영화현상'이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블루벨벳>이 문화적 풍토, 토양이 다른 서울의 대극장에서 상영될 때 그것을 컬트영화라 부를 수 없다'는 주장이다. 소수의 광적인 관객의 적극적인 관람이 '컬트영화'의 요건이라면, 이 용어는 한국적 상황에서 <파업전야>같은 영화에나 붙일 수 있을 것"이라고 그는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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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dson.D& Zimmermann,P(2009). Cinephilia, technophilia and collaborative remix zones. Screen.50;1. p.135-146. 

p.136 

역사적으로 시네필리아의 개념은 아카데믹 담론과 대중적 담론 사이에 위태롭게 박혀 꼼짝하지 않았다. 개인주의적 쾌락의 엘리트주의적 개념들(성스러운 대상, 고급 예술)과 일반적 쾌락의 집단적 개념들(대중 예술, 대중 오락)에 절합된  채.  

Campbell.Z(2009). On the Political Challenges of the Cinephile, Framework: The Journal of Cinema and Media.50(1-2).p.210-213.   

p.212 

오늘날의 시네필리아 논쟁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나는 생각한다. 시네필리아의 자율성, 시네필리아의 권리 그리고 테크놀로지들을 사용하기 위한 능력을 위해 싸우는 것이다. (이메일, 인터넷, 디지털 해적행위) 문화와 일상 그리고 쾌락이 아닌 정규적 여가로 쏟아지는 이득만이 존재하는 상업적 기업적 규정에 의해 영향을 받지 않는. 

Ng.J(2010). The Myth of Total Cinephilia. Cinema Journal.49(2).pp.146-151.  

p.150 

이런 새로운 기술을 통해, 시간은 이런 시네필의 순진한 처리가 되었고, 시네필의 레져가 되었으며, 관리할 수 있는 덩어리, 그리고 우스꽝스러운 사치를 제의받게 되었다.  내가 언제 원할 때, 내가 어떻게 원할 때로서의 영화를 보기 위한 시간. 강의를 스킵하기 위한 시간. 대학에 우연히 잘 구축된 비디오 라이브러리를 탈출하기 위한 시간. 14시간의 회사 일을 마치고 한밤 중 방해받지 않기 위한 두 시간의 자리을 찾기 위한 시간. 일시정지할 시간, 빨리감기위한 시간. 다시보기를 위한 시간. 또 다시 보기를 위한 시간.  

p.151 

어떻게 이런 시네필리아의 개념이 그것의 중심형태인 쾌락 및 사랑과 연결되는 것을 지지하는가? 그 질문의 본질적인 맥락에서 볼때, 그것은 답하기 불가능한 것이다. 사랑은 개인적인 것이다. 우리는 단지 우리 스스로의 이유로 우리 자신을 볼 수 있다. 이런 이유로 시네필리아는 이론화하기 불가능한 것이다. 그것은 담론을 탈출한다.  

Hilderbrand,L(2009). Cinematic Promiscuity : Cinephilia after Videophilia.Framework: The Journal of Cinema and Media.50(1-2).p.214-217.  

p.215 

비디오는 시네마를 재매개하고 정당화했다. 

오늘날 "컬렉터 에디션"dvd는 다수가 전문적 재생산 가치를 활용가능하게 했다. 그러나 그것들은 비디오 수집의 과정을 탈개인화했다. 수집은 창조보다 소비행위가 되었다. 그리고 그러한 스페셜 에디션은 종종 마케팅 이상의 것은 아니었다.  

p.216 

홈비디오는 시네마의 특수성을 드러냈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우리가 필름을 더 친밀하게 보도록 했다. 나는 극장 안에서 미학적 전유와 거리가 있는 경험을 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집에서 감정적인 개방을 하는 경험이다.  

만일 당대의 시네필리아의 정치학이 그런 것이라면- 나는 오늘날 시네필리아 측면에서, 그것이 지배적이거나 논리정연한 정치적 위치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그것은 개념을 깨거나 용어의 엄격한 개념일지도 모른다. 시네필리아는 드문 전문가 메뉴로부터 쪼개진다. 혹은 순수주의자 미학으로부터 쪼개진다. 일상적 실천을 포함한. 거기엔 영화를 사랑하는 다수의 방식이 있다. 극장에서나, 집에서나. 각자의 맥락은 그것만의 특수성을 드러낸다. 

Martin,A(2009). Cinephilia as War Machine.Framework: The Journal of Cinema and Media.50 (1-2).p.221-225. 

p.221 

시네필은 단순한 영화팬이나 따분하고 영감이 없는 영화 동료들과 다른 누군가로서 정체화하길 원한다. 

p.222 

시네필리아의 본질적 형태나 내용은 없다. 그러나 아마도 본질적인 시네필의 과정 혹은 제스쳐와 같은 어떤 것이 있다. 시네필리아는 전쟁 기계다. 그것은 전술적이고 문화적 전쟁 기계다.  

p.223 

실제로 우리는 시네필리아의 세계사에 관해 거의 알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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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동진(2005). 웰빙 시대의 소비문화 "비판"을 위하여. 문화과학 통권 35호. 72~85

74-75. 

따라서 소비문화라고 말할 때의 문화란 소비에 관한 문화가 아니라 오히려 소비라고 불리는 행위 자체의 문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굳이 도식적으로 말하자면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소비란 생산, 유통, 소비라는 경제적 활동의 다양한 수준 가운데 하나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런 분업 자체(74) 가 일반화된 연후의 소비, 그리고 생산에 의해 결정되는 경제적 활동이나 실천에 관한 상상적이고 소외된 표상 그 자체로서의 소비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결국 소비란 생산과 대칭적인 위치에 놓여지는 것이 아니라 생산의 소외된 표현, 혹은 생산과정에서 이뤄지는 사회적인 적대나 착취에 대한 인식을 소비자라는 상상적인 표상으로 치환하는 것을 뜻한다. 이런 가정에 따를 경우 우리는 소비문화를 말한다는 것은 자본주의적 생산의 착취적이고 적대적인 성격을 망각하고 있는 주체, 즉 이데올로기적인 주체로서의 소비자의 주체성을 비판하는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76 

노동자들이 더 이상 자신의 정체성을 노동자라는 자신의 경험적인 현실에 근거하기보다는 자신들이 참여하는 다양한 사회적 활동과 참여하는 공동체(지역사회나 종교적 모임을 비롯하여 스포츠 동호회, 영화 클럽 같은 취향의 공동체)를 통해 적극적으로 구성한다는 주장 역시 진실이다. 그러나 그것이 정확한 것이라고 단지 체험이 어떻게 현상하는가를 보여주는 데 머물러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중략) 한편 자신들을 임금소득자, 생산자, 취미의 주체, 성정체성이나 성별, 다양한 윤리적,사회적 관심의 주체로 동일시하는 것을 확인하고 강조하는 다양한 사회학적인 주장들 역시 우리에겐 익숙하다. 그렇지만 이 모두는 노동의 소멸이나 쇠퇴가 아니라 역설적으로 말하자면 노동이 더욱 더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적어도 우리가 맑스의 주장에 충실하고자 한다면 노동의 이데올로기가 소멸했거나 쇠퇴했다고 생각할 수 있어도 노동이 소멸했다거나 그것의 의의가 반감되었다고 주장할 근거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바뀐 것이 있다면 노동의 정체성이 변화되었고, 노동과 다른 사회적 활동 사이의 연관일 뿐이기 때문이다.  

77 -78

"경제와 정치 혹은 문화, 이 가운데 무엇이 사회의 정체성을 정의하는 일차적인 요소인가." 이런 질문에 대하여 우리가 내세울 수 있는 유일한 답변은 이런 것이다. "아무거나" 그러나 사회의 특성을 지배하고 변형시키는 일차적인 요인으로서 무엇이 그 "아무개"가 무엇이 될지를 결정하는 것은 결국 경제이다. 이를테면 지식정보자본주의나 디지털경제, "기호와 상징의 경제'를 들먹이는 이들의 주장처럼 우리는 지식과 정보, 취향의 제조가 가장 중요한 가치의 원천이 되었다는 점을 극구 부인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그것은 경제란 심급이(77) 부차적인 것이 되었다거나 아니면 노동이 규정적인 계기로서의 의의를 상실했다는 주장으로 번역될 수 없다. 자본주의적 경제활동이 '미학화'되었든 아니면 '체험과 정서'가 주요한 경제활동이 되었든 그 어떤 것도 결국에는 자본이 자신의 내적인 장벽으로서의 자본의 한계를 돌파하려는 움직임으로부터 귀결되었다는 점을 부인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소비문화 비판에 관한 최근의 흐름, 즉 소비문화의 비판의 재귀성이란 흐름을 다시금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81 

"VIP 마케팅"이니,"1인 마케팅"이니 하는 최근의 마케팅 기법의 유행이나 컴퓨터 정보통신의 폭발 이후 더욱 섬세해진 고객관계관리같은 다양한 마케팅 테크닉은 단적으로 "인구"소비자가 아닌 각각의 개인을 대상으로 함을 알려준다. 그/그녀의 인구학적인 배경이 아니라 전기적인(biographical)이력 그리고 각 개인의 구체적인 반응과 선택에 따른 정보의 수집과 평가, 홍보는 이미 우리 모두에게 익숙한 현실이 되었다.  

82 

트렌트는 사회 법칙과 달리 트렌드는 매우 우연적이고 자의적인 행위의 문법을 가리킨다. 따라서 과거의 시대엔 사회 법칙이 있었고 그것을 발견하는 것이 사회를 재현하는 인식원리이자 목표였다면 이제는 구조와 법칙이 아니라 트렌드를 찾아내야 한다! 트렌드란 이미 주어진 규칙에 따라 이뤄지는 행위가 아니라 연속적으로 행위가 이어짐으로써 행위방식과 선택이 결정되는 우리 시대를 가장 잘 표상한다! 

82-83 

어쨌거나 이제는 더 이상 신세대론은 사회학자들이나 문화이론가들에 의해 분석되지 않는다. 이를테면 한때 널리 회자되었던 P세대론(이는 국내)(82)광고기획사가 내놓은 작품이었다)이나 수많은 문화적 부족(오렌지족에서 메트로섹슈얼, 딩크족 등)에 대한 분석과 보고는 모두 광고, 마케팅, 시장조사 등을 담당하는 트렌드 분석가의 손에서 나왔다. 이런 변화는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당연한 말이겠지만 소비가 현실의 소외된 표상이기는커녕 직접적으로 사회적 현실을 재현하게 되었다는 것을 뜻할 것이다. 따라서 인구학이 사이코그래픽스로 대체되었듯이, 사회학은 이제 트렌드분석으로 대체되었다. 그것은 단순히 소비를 분석하고 정의하는 인식 수단이 바뀌었다는 것이 아니라 생산과 소비 사이에 연관이 변화되었다는 것, 그리고 소비를 통해 현실에 대한 체험과 인식이 생산된다는 것을 뜻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83 

물론 그것은 제품으로서의 상품이 아니라 자신의 정체성의 서사를 위한 매체로서의 상품, 즉 자신의 라이프스타일을 표현하는 오브제로서의 상품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에서 물신주의 비판의 가장 순수한 형태를 만나는 것인지도 모른다. 물건 혹은 사물을 전연 신비의 대상으로 간주하지 않는 것. 그 대상을 의학적이든 생태적이든 다양한 성분과 제조방식으로 환원함으(83)으로서 그것을 가능한 사물로서 다루는 것이 우리 시대의 소비문화의 역설적인 모습 아닐까. 그리하여 생겨난 결과는? 당연히 우리의 예상과는 정반대이다. 우리는 그 대상을 가능한 객관적으로 다루는 시늉을 취하면서 그 대상을 가장 신비화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시대의 물신주의 비판을 메타물신주의라고 부를 수 있을지 모른다.  

이영자(2010). 소비시장과 라이프스타일의 정치학. 현상과 인식 제34권 1/2호.pp. 101~124. 

104쪽 

라이프스타일은 '누가 될 것인가', '타인들에 의해 어떻게 인지되고 싶은 사람인가'를 모색하는 '자아의 기획'으로서 자아감각을 꾸며내고 타인과 구별되는 '개성'을 의식적으로 드러내는 문화적 상징의 수단이다. 개인적 정체성이 구성되는 형태로서의 라이프스타일은 정체성을 구별 짓는 기준으로 적용하는 취향과 감수성의 유형을 결정짓는 실천들의 체계를 말한다.  

105 

소비상품들이 정체성들을 구성하는 상징적 자원으로 기능한다는 것은 개인의 내면화된 가치나 독자적인 취향을 반영하는 라이프스타일 대신에 소비시장에서 생성되는 문화적 코드들의 조합에 의존하는 라이프스타일이 생성되는 것을 말한다. 

106 

소비시장이 주도하는 라이프스타일의 정치학은 라이프스타일의 '자유로운'선택을 매개로 자본주의 문화경제의 구조적 강제를 자아의 기획을 위한 '주체적'과정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효과를 겨냥한 것이다.(중략) 여기서 정체성의 위기는 자아의 기획이 소비시장에 점점 더 포섭되는 상황에서 유발되는 것으로 시장의 논리를 추종하는 '상업화된 자아'를 추구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1990년대부터  정체성이 소비문화의 키워드로 부상하게 된 것은 소비시장에 의존하는 자아의 기획을 기정사실화하는 라이프스타일 담론들이 매체와 소비시장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유통되어 온 것과 그 맥을 같이 한다.  

107 -108

'생활자 마케팅'은 기업이 소비자 개인의 의식주의 기본생활, 레저 / 문화생활을 분할 담당하는 '생활디자인 매니저'로서 '생활기획업'('생활설계업')을 발전시킨다는 전제를 담고 있다. 즉 시장표적으로 설정한 생활자군 별 욕구, 기대, 생활양식 등을 파악하고 각 생활자군 별 라이프스타일을 개발하여 각 라이프스타일에 알맞는 상품과 서비스를 개발, 판매하는 것을 말한다. 이는 소비자의 욕구와 변화에 대한 기대를 최대한 반영한다는 명분으로 라이프스타일의 상품소비가 능동적으로 이루어진다는 환상을 줄 수 있다. (중략) 라이프스타일의 정치학은 마케팅의 논리의 문법이 소비자의 생활세계와 개인적 취향에 직접적으로 작용하도록 만드는 것으로 소비의 문화경제학이 시장의 영역을 넘어 생활양식 전반에 영향을 미치게 하는 것이다. 라이프스타일의 상품화는 소비시장으로 하여금 라이프스타일의 상징적 가치와 정체성을 창출하는 문화권력을 행사하게 한다. 

116 

라이프스타일 마케팅은 자아의 기획을 하나의 소비사업으로 삼아 '나는 누구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를 끊임없이 되묻게 하면서 새로운 라이프스타일을 선택하고 변화시키도록 압력을 행사하기 때문이다. 이는 라이프스타일을 탈근대성에서 중시되는 되기(BECOMING)의 상업적 구성들로 만들어 소비자로 하여금 자아의 기획을 끊임없는 '되기'의 시도들로 만들고 '그 누구'로 변화시켜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갖게 함으로써 라이프스타일 상품들을 소비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119 

상품미학은 '사용가치를 약속하는 외향'을 통해 인간의 욕구와 본능의 구조들을 변형시키는 방식으로 감성을 식민화하는 것이라면, 라이프스타일 시장은 상품미학에 의해 식민화되는 감성구조의 라이프스타일들을 유포하는 장으로 기능한다.  

정락길(2010). 시선의 윤리학적 성찰 : 세르즈 다네(Serge Daney) 비평 세계를 중심으로. 프랑스문화예술연구 제32집.p.619-661. 

620쪽 

거칠게 표현하자면 그의 비평은 영화적 경험 자체의 단독성(singularite)의 드러냄을 통해 현대 시대에 더욱 가속화되고 있는 이미지 경험의 세속화와 빈곤화에 대한 지속적 저항이기도 하다.  

621쪽 

경험에 대한 지속적인 성찰은 칸트 철학이 던져준 어떤 난제와 연관되어 있다. 칸트에게서 경험은 인식의 선험적 토대에 부딪히는데 거기에서 경험은 순수 형식으로서 공간과 시간의 절대적 강요에 놓여진다. 이 공간과 시간은 칸트의 철학에서 경험을 넘어선 선험적 형식으로 정의된다. 하지만 다네가 경험하는 영화적 시공간은 이러한 순수형식이 아니다. 이 공간과 시간을 자신의 경험과 교차 시키고 부딪히는 것, 그래서 그의 글은 이론적인 법칙의 해명으로 나아가기 보다는 그리고 정서에 대한 합의적 상식을 세우기보다는 시네필적 경험을 가로질러 자신의 존재적 단독성을 드러내고 세상 속에 소통시키고 있다.  

628쪽 

무엇보다 다네에게 있어서 시네필적 경험이 제시하는 수동성은 한편으로는 끔찍한 세상사의 사회적 현실로부터 도피해온 관객이 영화를 통해 새로운 사회적 실천을 욕망하고 재 몽타주와 하는 것이다. 이 과정을 통해 시네필이 경험하는 내용은 쾌락원칙에 기반한 것이라기보다는 자기를 상실하여 실제의 구멍에 마주하는 희열(jouissance)의 경험에 가까운 것이고 현실의 세계와 영화적 세계의 뒤섞임 속에서 이루어지는 주체의 구멍이라 불려지는 간극의 충격을 통해 불가능한 꿈을 꾸는 것이기도 하다. 

629쪽 

그들에게 영화는 이미 프로그램화된 상품이라기보다는 자신들의 육체 속에서 신경들의 이상한 조합이 저절로 행해지는 은밀한 욕망의 이차적 몽타주의 행위였으며 그래서 영화적 장치가 강요하는 수동성은 단순한 수동성이 아니었고 그들의 동일시는 프로이드의 신경증 환자의 동일시와 같은 독특한 매커니즘을 지닌 것이었다.  

638쪽 -639쪽

바쟁이 살았던 시기가 영화기 지식인들에게 진지한 사유의 대상이 되어야하는 중요한 문화라는 사실을 각인시켜야할 인정 투쟁의 대상이었다면, 다네가 살아갔던 시기는 텔레비전 이후 영화가 점차 자신의 영역을 침범당하는 시기이자 다양한 특수효과, 헐리우드의 블록버스터화, 그리고 컴퓨터를 기반으로 하는 정보화 혁명, 그리고 디지털 영화의 시대가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내는 시기라는 사실이다.  (중략) 80년대 <리베리시옹>지를 중심으로 텔레비전을 중심으로 한 이미지 전반의 문화에 대한 다네의 고찰은 초기에 적극적인 이미지의 민주화의 가능성의 모색에서 또한 점차 회의적인 시선으로 변해간다. 그리고 이러한 그의 애도 작업은 현대 사회의 개인주의 전체의 문제로 점차 확대되어가고 발터 벤야민의 경험의 빈곤화에 대한 성찰과 거의 흡사한 방식으로 전개되어 진다. 즉 더 이상 현대의 개인들은 타자성에 대한 관심을 거부(638)한 채 예술 작품으로부터 자신에 대한 확신과 민족 이외의 어떤 접촉의 경험도 원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639쪽 

다네의 이러한 애도작업은 예술의 종말을 고한 헤겔의 문제를 영화에 다시 던지는 것이다. 영화에 던져졌던 역사적 임무, 대중과 함께하는 문화적 공동체라는 주제가 이제 그 임무를 다 했다는것이고 이제 '영화 이후'의 미래가 어떠할 것인지를 사유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된다는 것이다.  

651쪽 

다네는 현대 사회의 변화를 70년대 스노비즘(snobsme)의 사라짐이라는 주제 하에서 비틀고 있다. 스노비즘을 임의적으로 어떤 지식이나 대상의 위선적인 소유자라고 정의해보자. 그런데 60년대에 만연했던 스노비즘적 시네필들이 70년대부터 사라지기 시작하는 현상을 이야기하면서 다네는 현대 개인주의 사회의 이데올로기적 비판으로 나아간다. 왜냐하면 하나의 문화 속에 일군의 스놉(snob)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그들이 닮고자 하는 지적 이상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지적 닮음의 이상, 그러한 기준 자체가 소통의 민주주의라는 이데올로기하에서 사라져 버린 사회, 그것이 현대 사회의 모습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마구잡이로 소통되는 이 허상의 개인주의는 자기 충족적인 동시에 타인에게 대단히 관용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 거기에서 모든 것이 관용되고 용인되어 있다. 이 관용과 끊임없는 용인의 태도 속에서 실제로는 타자와의 관계는 상정되지 않는다. 이 관용의 과도함의 세계, 무관심성이 고도로 양식화된 세계, 모두가 자신의 집에서 편안하게 TV를 시청하는 세계에서 소통은 무한히 전 세계적으로 퍼져나가고 있지만 하나도 소통 되지 않는 텅 빈 소통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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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10.스크린. 비디오필 : 비디오매니아를 위한 고정특집. 239쪽. 

- 박찬욱의 비디오드롬. 

1994.4. 스크린. 비디오필. 비디오매니아가 찾은 숨은 걸작 비디오.272-273쪽. 

1996.5. 스크린.  임필성의 디어 시네필리안.264쪽.  

1999.8. 비디오 구구야화 제4집. 키노. 173쪽. 

키노는 96년 8월에 시작하여 이제 네번째 비디오 야화를 준비합니다. 우리가 처음 이 특집을 시작했을 때는 세상에 비디오광이 넘쳐나고 있었으며, 아직 우리는 국제영화제를 갖고 있지 못했으며, 이제 막(이른바 서방세계에서 '아트 하우스'라고 부르는) 예술 영화관 전통이 생겨나고 있었으며,정말 믿을 수 없는 미공개 영화들이 슬쩍 비디오로 출시되어 꽁꽁 숨어 있던 리스트들을 수없이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들은 이 특집을 하면서 사명감을 갖고 독자 여러분들과 발견의 기쁨을 나누며, 동시에 독자 여러분들로부터의 제보를 기대하였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 이후에도 적지 않은 새로운 명단을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원칙을 혼동하면 안 될 것입니다. 우선 우리가 비디오 특집을 마련한 것은 남이 알지 못하는 영화를보고자 함이 아니었습니다. 또는 (더 끔찍한 것은) 우리들은 이 특집을 의례적으로 그 동안 다루지 못한 비디오들을 모아서 마치 빚 청산 하듯이 덤핑 처리할 생각은 더더욱 없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발견의 기쁨'을 공유하고자 함이었습니다. 그래서 말로만 전해진 영화들을 비디오로 만나는 행복을 나누길 희망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다음은 우리가 혹시나 그저 스쳐 지나간 영화들 중에서 마땅히 '재평가 받아야 할' 영화들의 목적을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자면 우리는 매년 특집을 하는 순간마다 정말 참담한 심정으로 이제 이런 특집은 그만 하고 싶다는 슬픔에 사로 잡혀야 했습니다. 무엇보다도 비디오 문화의 실종, 비디오로는 우리가 단 한번도 영화를 제대로 볼 수 없을 정도로 능지처참 당한 기형적인 모습으로 출시되었기 때문입니다. 상영시간을 멋대로 줄이는 것은 예사이고, 거의 대부분의 영화는 제 모습의 화면 사이즈로 출시된 예가 거의 없다는 사실이 그 학살의 현장입니다.(당신의 키가 침대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멋대로 발을 자른다면 당신의 기분은 어떻겠습니까?) 또한 점점 더 축소되어가는 비디오 시장에서 이제 '발견'의 목록은 현저하게 줄어들어 버렸다는 사실입니다. 

194쪽 

주성치 영화를 한 번이라도 본 사람들이 곧 사이좋게 둘로 나뉘어지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누구는 자신의 선호도 명단 첫머리에 그 이름을 기입한 후, 줄기차게 비디오 가게를 드나들기 수십번 결국 청계천 뒷골목을 뒤지며 기꺼이 개인 소장의 기쁨을 누린다(어떤 이는 최저 3백운에 구입했다는 소문도 들려온다). 또 다른 누군가는 곧바로 폐기처분의 길로 달려가니 황당무계. 최저의 쓰레기 창고는 안 그래도 넘쳐나는 물량공세로 꽉 찼는데 그마저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기에 이른다(그러나 아직 이 댓가없는 열락을 누리기 마다하는 자는 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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