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택수, 「아버지의 등을 밀며」(낭송 손택수)

 
 
 

 

손택수 시집은 '목련전차' 밖에 못 봤지만, 내 정서에 맞는 좋은 시를 많이 발견한 시인이다. 안도현의 시배달이 끝나고 이어 받은 나희덕의 시배달로 처음 온 시다. 어버이날을 염두에 두고 고른 듯...... 찡허니 마음을 울렸다!

내 아버지 삶의 한 조각을 보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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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de 2008-05-11 0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시 예전에 보았던 거지만 이렇게 낭송으로 들으니 또 다르네요 ^^
순오기님 덕에 좋은 낭송 잘 들었어요 ^^

순오기 2008-05-11 04:35   좋아요 0 | URL
일주일에 한편씩 들어오는 시배달...참 마음을 움직이는 시가 많더군요.
무딘 감성에 밀고 들어오는 물결을 거부할 수 없는 시들... 찡허고 좋아요!
 

 이 글은 2003년 7월 3일 밤새 내리는 빗줄기에 잠못들며 썼던 나의 사부곡입니다. 당시 암으로 투병하던 아버지를 이제는 보내드려야겠다고 마음을 다잡으며 작별을 준비했지요. 내 홈피에 이걸 올리고 이리저리 알게 된 형제들과 조카들이 들어와서 읽으며 울었던...  항상 자식들에게 해 준게 없다고 한스러워 하시던 아버지께, 형제들이 이 글을 출력해 보여드렸었지요. 아버지는 고맙다고 하시며 그 해 가을에 먼길 가셨습니다. 어려서부터 멀리 시집간다고 했던 말처럼 나만 멀리 떨어져 살았기에, 아버지 가시기 전 한번이라도 더 뵈려고 격주로 인천을 오르내렸지요. 그렇게 아버지를 보내고 가을마다 혹독하게 겪어야 했던 천식을 달게 받았습니다. 내가 아버지를 추억하는 한 방법이었으니까요~~~~그래서 또 가을은 아팠답니다.ㅠㅠ 

아버지를 추억하며  - 작성일 2003-07-03 04:52:00

  창밖엔 엄청난 비가 쏟아지고 있어 심야의 정적을 온통 흔들어 깨웁니다. 잠든 식구들 귓전을 때리는 빗소리에 이리 뒤척 저리 뒤척 잠자리 편치 않을까 살펴보며, 나 혼자 이 밤과 동무하고 있네요.

  엊그제 동생이 전해 준 아버지 소식~ 큰딸 집에 가 보고 싶어하신단 소리에 마음 저려오더니... 큰언니 집에 들르셨다 혈관질환 수술 앞둔 작은 아버지 문병 가서 형제분이 손잡고 울었다는 친정엄마 전화에 가슴끝이 아려 옵니다. 늦은 밤 작은언니 전화로 상황 설명 듣고 나니, 가슴이 아리다 못해 미어지며 멍멍함에 잠은 저 멀리 가 버렸습니다. 눈물 많은 우리 형제 아버지와의 작별을 준비하는 떨림이~ 이 밤 소리쳐 내리는 빗줄기처럼 내 마음 영 추스르기 어렵네요.

  아버지를 추억하면~ 집 앞에 든든하게 자리잡고 있던 감나무처럼 쌈싸롬한 감 꽃부터 풋감의 떫은 맛, 달콤한 홍시의 맛까지 다양하게 체험케 한 아버지의 모습은 언제나 자랑이었고 든든함이었습니다. 때론 까치 밥 남겨두는 조선의 마음처럼 인자하신 아버지였습니다.

  우리 아버진 시골에선 흔치않은 열정으로 우리 5남매의 공부를 다 봐 주셨습니다. 깎아만든 앉은뱅이 책상 앞에 두고 맏이의 공부를 가르치시며 어깨 넘어 배우는 둘째의 영특함을 알아보셨고, 셋째, 넷째, 막내까지 그렇게 가르치셨습니다.

'연필 바로 잡아라~ 머리 들고 등 꼿꼿이 세워라~ 책을 너무 가까이 보면 안 된다~ '늘 귓전에 맴돌던 아버지 말씀처럼 나도 우리 애들에게 그리 합니다. 항상 반듯하게 연필을 깎아주시며 까아만 연필심을 삭삭삭~ 소리나게 도슬러 주시던 아버지...나도 일주일에 서너 차례 스무 자루의 연필을 깎으며 그 소리까지 따라하고 있네요. 어떤 생각, 어떤 정성으로 연필을 깎아주셨는지 가늠이 되고도 남습니다.

  하얀 손수건 가슴에 달아 입학시키면, 담임선생님 담배 한 보루 사들고 꼭 학교를 찾으셨다는 아버지~ 선생님의 각별한 관심속에 우린 자부심으로 학교 생활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그 이후 공부야 제 하기 나름이었겠지만. 아버지는 우리 앞길의 시작을 그렇게 열어 주셨습니다.

 3학년인가 4학년때 서울에서 노란 가방 두 개를 사 오셨습니다. 꼬불꼬불 파마머리 '캔디'그림이 있던 가방이었죠. 언니랑 그 가방 들고 얼마나 어깨 힘 주고 뽐내며 다녔든지~ 아이들이 그 가방 한 번 들어보려 순서까지 정해서 따라 다녔던 유년의 기억이 슬며시 웃음짓게 합니다.

  아버지의 성격을 제일 많이 닮은 나는 아버지의 각별한 사랑~ 편애를 받기도 했지요. 서울 다녀오시며 동물과자랑 호두과자 사오시면 잠자리에 든 우리들 앞에 구구구~ 모이 준다며 방바닥에 놓아주신 어머니, 우린 그게 재미있어 병아리처럼 입으로 콕콕 쪼아먹었습니다. 우리가 잠든 뒤에 오시면 내 몫의 과자를 더 많이 숨겨 두셨다 슬쩍 주시기도 했지요. 그 추억이 좋아서 지금도 나들이 다녀오면 우리 애들 줄 호두과자 꼭 사들고 들어갑니다.

  아버지를 추억하며 빼 놓을 수 없는 건 우리 집 노래방입니다. 일찌감치 저녁상 물리고 둘러앉아, 아버지가 깨알같은 글씨로 적어 놓은 노래 책을 보면서 목청껏 따라 부르기도, 앞서 부르기도 했던 우리만의 노래방이 밤마다 성업 중이었지요. 눈물 젖은 두만강, 선창, 불효자는 웁니다, 울고넘는 박달재, 아내의 노래, 단장의 미아리고개~ 참으로 많은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 중에 18번은 단연 '눈물 젖은 두만강'이었고 항상 마무리곡으로 또 한 번 불렀지요. 한 길에서 4~50미터 들어가 앉은 우리 집 앞을 지나는 마을 어른들이 들으며 흥겹게 따라 불렀다 하셨으니까요. 그 덕분에 이만큼이라도 음치를 면한 것 같습니다

  언니 오빤 중학교 마치면 인천으로 올라 와 학교 다니고, 직장 다녔고, 막내 남동생은 6학년 때 인천으로 전학 시켰지요. 나 혼자 중학교 2학년까지 시골에 남아 부모님과 함게 살았습니다. 인천으로 다 이사온 후에도 학교 마치고 독립하는게 소원이었던 나는, 결혼 외엔 절대 독립할 수 없다는 아버지 무서워 꼼짝없이 있다가 스물 아홉에 시집갔으니 이래 저래 부모님과 제일 오래 살았습니다.

  아무것도 없이 달랑 인천으로 이사 와 방 두 칸 셋방살이가 왜 그리 부끄러웠는지, 친구 사귀면서 집에도 오고 가고 했을텐데 한번도 집에 데려오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우울한 사춘기를 보내었지요. 그땐 아버지가 한없이 한없이 작고 초라하게 여겨지던 시절이었네요. 당신도 힘겹고 버거운 객지살이였을텐데 난 힘이 되기는 커녕 나만의 사춘기를 치열하고 적나라하게 겪어내고 있었으니~ 생각하면 아버지께 죄송할 따름입니다.

  사춘기 이후엔 아버지와 제일 많이 싸움(?)도 했습니다. 성격이 똑 부러지는 아버지 닮아 자기 주장 강하고~ 나 하는 건 다 옳고 남하는 건 다 시원찮아 보이니 원~ 똑같은 부녀간에 마찰도 젤 심했지요. 다른 형제들 다 착해 아버지께 감히 반기를 못 드는데, 난 꼭 따져들며 시시비비를 가렸으니, 제 잘난 맛이라 해도 그러고 나면 맘이 불편해
  "괜히 아버지께 그랬나 봐~" 후회하면 우리 언니들 왈~
  "얘 너 같은 애도 하나는 있어야 돼~" 그랬으니,
후회하는 건 잠시 뿐, 다음에 또 그리하게 됩니다. 지금 생각하면 참 어지간히도 철딱서니 없었지요.

  대부분의 가난한 집 아이들이 그렇듯이 우린 그 이후 철이 들어버렸습니다. 고단한 현실을 비켜서지 않고 당당하게 맞서 사시는 부모님 보면서 우리도 그렇게 당당하게 살아내었습니다. 직장을 다니면서 학업을 계속 했고, 만학으로도 과정을 다 마쳤으니 우리 부모님은 당신의 끈들을 당당하게 세상에 내 놓으셨습니다. 우리도 이제는 제 몫의 삶을 뚜벅뚜벅 성큼성큼 걸어가고 있으니까요.

  집 앞의 감나무에 올라가 깃발을 흔드는 꿈을 꾸고 장남의 앞길을 예감하신 부모님~ 5월 1일 대통령 표창 받은 우리 오빠~ 그 아들이 대견하고 자랑스러워 표창장과 대학원 졸업사진 액자에 넣어 걸어두고 흐뭇하게 바라보는 아버지 뵈니 내 가슴이 촉촉하게 젖었습니다.

  치열하게 겪어낸 사춘기나 내 청춘의 방황으로 잠시 흔들렸던 시기를 제외하고는, 나에게 아버지는 언제나 자랑이고 든든한 후원자였습니다. 본대로 들은대로 한다는 말씀처럼 나도 우리 아버지 하신대로, 우리 아이들에게 똑같이 하고 있는걸 발견합니다.
회갑을 맞아 덕수이씨 우리 집안 가승보(家承寶)를 내셨고, 고희를 맞아 가정예절요람(家庭禮節要覽)을 한정 출판하여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젊은 시절부터 약골이셨기에, "회갑까지 살아줘서 고맙다"는 엄마의 찬사를 받으셨던 아버지. 이제 일흔 일곱 되셨으나 어느 자식이 부모의 수가 흡족하겠으며, 떠나시면 애닮다 않겠는가요. 건강하게 장수하셔야지 통증으로 고생하시는 아버지 뵈면 더 오래 계시라 붙들기가 송구할 따름입니다.

**이후에도 아버지를 추억하는 글을 참 많이도 썼는데...... 편애를 받은 만큼 애증도 많았던 우리 부녀......사랑은 추억입니다. 지금도 철들지 않은 난, 아버지의 사랑이 그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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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08-05-08 08: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효...눈물납니다...

순오기 2008-05-08 19:33   좋아요 0 | URL
아버지의 사랑을 추억하는 거지요.ㅠㅠ

꿈꾸는잎싹 2008-05-08 15: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요.ㅠㅠ
저도 어머니보담 아버지와의 추억이 많은데...
순오기님, 오늘도 좋은 날되소서.

순오기 2008-05-08 19:33   좋아요 0 | URL
우리도 어머니는 삶의 전선에서 바쁘셨어요~ ㅠㅠ

2008-05-08 23: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순오기 2008-05-09 08:31   좋아요 0 | URL
'애증'은 또 하나의 사랑이겠죠!
아들은 엄마 닮은 여자를, 딸은 아빠 닮은 남자를 무의식적으로 찾는다던데...내 주변을 봐도 맞는 말 같아요.^^

마노아 2008-05-09 0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버지 돌아가시기 일주일 전부터 날마다 편지를 썼어요. 일을 나가면 엄마가 아빠에게 편지를 읽어주시곤 했죠. 일곱번째 편지를 쓰던 날 아버지께서 돌아가셨어요. 이미 차갑게 식은 아빠 발치에서 울며 그 편지를 읽어드렸죠. 그리고도 날마다, 꼬박 서른번째까지 편지를 썼어요. 부칠 수도 읽어줄 수도 없었지만요. 좋은 추억도 많았는데, 아빠를 떠올리면 언제나 눈물이 앞서요. 십년이 더 지났는데도 아직도요.

순오기 2008-05-09 08:33   좋아요 0 | URL
서른번째까지 편지를 쓴 님의 마음을 알 것 같아요~~ 저도 돌아가신 후까지도 여러번 부치지 못하는 편지를 썼으니까요~~~ 그래서 지금도 그 편지를 읽으며 추억하지요.ㅠㅠ

웽스북스 2008-05-09 0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순오기님 글도, 마노아님 덧글도 ㅜㅜ

순오기 2008-05-09 08:38   좋아요 0 | URL
살아계실때 잘 해야 한단 말이 실감나는 건, 꼭 가신 다음이라는...

비로그인 2008-05-09 1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페이퍼보고 참았던 눈물이 마노아님 댓글에서 터졌습니다.

순오기 2008-05-09 19:29   좋아요 0 | URL
같은 마음을 느낀 승연님을 토닥여주고 싶어요.

2008-05-10 01: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순오기 2008-05-10 02:12   좋아요 0 | URL
아아~~~ 님, 묻어두었던 기억을 떠올려 힘들게 해서 죄송합니다~~
아버지는 우리 기억속에 늘 살아 있어 이렇게 불쑥 차고 올라오면... 참, 견디기 힘들 시간을 또 보내게 되지요. 그게 다 사랑이라고... 그런게 사랑일거라고 생각해봅니다!ㅠㅠ

2008-05-13 16: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순오기 2008-05-13 17:59   좋아요 0 | URL
그렇죠~ '꽃들도 사랑을 한다...' 세상에 생명 있는 모든 것은 사랑을 하지요~~~ 토요일에 초등생들과 에니메이션 영화 '호튼'을 봤는데, 작고 하찮은 것도 생명은 소중하다는 주제의 좋은 영화였어요. 항상 애들 영화도 짝짓기 사랑 타령이나 한다고 내가 투덜거렸거든요.^^
 

5월은 즐거움이 많은 달이지만, 내겐 5월이 아픈 달이다. 산자의 죄의식을 갖게 하는 5.18이 그렇고, 4년 전 5월 18일에 돌아가신 시어머니의 삶이 또 아프다. 102살까지 사신 시할머니를 모시느라, 당신은 어른이 되어보지 못한-시어머니로서의 권리를 누려보지도 못하고 가신 삶이 짠하다. 막 결혼해서 여자의 일생을 생각하니, 이런 시어머니의 삶이 어쨰 그리 짠하던지... 내 딴엔 마음을 담아 편지도 보내며 좋은 며느리가 되고 싶었다. 그럼에도 살다보면 또 마음처럼 잘 하고 살지 못하는게 인생이더라.ㅠㅠ

말씀이 많지 않으셨던 시어머님은, 열여섯까지 일본에서 자라고 해방이 되어 우리땅에 돌아와 부모님이 정해준 배필 만나 혼인하고 자식 낳아 키우며 살아오신 전형적인 우리 어머니들의 삶과 다르지 않았다. 공무원이셨던 아버님의 박봉(예전의 공무원은 정말 박봉이었다)을 쪼개어 6남매를 키우고 가르치느라, 여늬 부모들처럼 자신을 위해선 철저하게 절제하며 살아오신 세월이었으리라 짐작해본다.

지난 일요일은 시어머니의 제사였다. 돌아가시기 2년 전, 대장암 진단으로 수술을 하고 항암치료를 받았으나 전이된 암을 막을 수는 없었다. 수술하고 그 힘들다는 항암주사를 맞으면서도 시할머니를 1년 더 모셨으니, 우리 자식들은 너무 오래 사는 시할머니를 원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시할머니를 땅으로 보내드리며, 당신이 제대로 모시지 못하고 마음 섭하게 했던 일들을 다 용서하고 편히 가시라던 시어머니의 말씀을 떠올리면, 언제나 내 가슴이 아프고 눈시울이 젖는다. 모시고 살면서 항상 잘할 수 없는 것이 사람이고 며느리 마음임을 나도 알만큼은 알 세월이 지났기 때문이다.

시어머니의 임종을 혼자 지킨 나는, 처음엔 내 도리를 했다고 혼자 뿌듯했었다. 마지막 생신도 우리집에서 내가 차려드렸고, 목욕시켜 드리고 난 이틀 후 혼수상태가 되어 딱 이주만에 눈을 감으셨는데 그 임종까지 지켰으니 내 할 도리 다했다고 생각했다. 기차를 타고 가서 뵌 어머님은 차마 숨을 거두지 못하고 힘겹게 호흡하고 계셨다. 혼자 병상을 지키며 독서회 토론도서였던 '오월의 미소'를 읽고 있다가, 힘겨운 호흡을 유지하는 어머님이 안쓰러워 "혼자 남을 아버님이 걱정돼 못 가시나요? 아버님 잘 모시겠으니 걱정 말고 편히 가셔요!" 속삭였더니 정말 그 말을 듣기라도 한 듯 숨을 거둬가셨다.

시어머님을 보내고 치열했던 우리의 삶이 약속을 지킬 수 없었다. 큰딸 세살때 이혼하겠다고 했던 내가, 곱지 않은 며느리였음에도 어머님은 찾아와 내 손을 잡으며 "네가 더 잘났으면 잘난 사람 만났겠지, 내 아들을 만났겠냐~ 그저 이게 네 복이다 생각하고 살아라!" 하시던 말씀에 난 더 할말이 없었다. 나도 내 자식을 키워보니, 자기 자식을 부족하다고 말하는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겠더라. 부모에겐 다 금쪽같은 자식이고 어디 내놔도 빠지지 않을 자식인데, 그 자식을 낮춰 말하며 나를 다독였던 게 그분의 인격이고 사랑이었단 걸 절절히 깨달은 건 한참 후였다.

시어머님의 그런 다독임이 있었기에 내 자리 지키며 살아온 세월이었다. 시어머니 눈에 내가 곱기야 했겠냐만 어머니의 포용은 이렇게 우리 가정을 지켜낸 힘이었단걸 믿는다. 엊그제 제사에 동서들과 시누이가 모여 음식을 만들며 어머니 이야기로 그분을 추억했다. 2004년 5월 18일에 가신 시어머니를 추억하는 내게 5월은 아프다.


돌아가신 날을 음력으로 하니 5월 4일 일요일이었다. 성주,민경이랑 무궁화 기차를 타고 목포로 ~
한시간 후~ 목포역에 도착~ 마중 나온 큰시숙님과 큰동서, 둘째 시누이랑 같이 큰댁으로 가는 길에, 간만에 고향에 온 시누이를 위해 목포 앞바다도 보여줄 겸 빙~ 드라이브 ! 클리오님은 잘 아시겠지만(^^) 신안비치 옆에 있던 커피숍 '헤밍웨이'도 사라지고... 이번주 '한국사전- 이순신 3부'에 나올 '고하도'가 오른쪽으로 보이는데 사진은 못 찍었다. 차 세우기가 곤란해서.....ㅠㅠ
유달산의 '노적봉'은 차를 세우고 찍었다. 주변에 가려지는 것들이 많아서 형체가 보일려나~~


이사람 저사람 사들고 온 과일이 넘쳐 국산 수입산 가리지 않고 다 상에 올렸다. 카톨릭에선 고인의 사진을 놓고 제사지낸다. 이번 제사는 연휴라서 식구들이 많이 모여 사진에 다 담을 수 없었다. 우리 어머님 모처럼 흐뭇하게 지켜보셨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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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희망꿈 2008-05-07 09: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음이 많이 아프시겠네요. 부모의 마음은 정말 한결 같은가봐요.
힘드셨겠지만 그 분을 추억하며 따뜻하게 5월을 보내시길 바랍니다.
저희 시아버님 제사는 내일이랍니다. 이제 돌아가신지 2년밖에 되지 않았는데,
시간이 참 많이 흐른것 같아요.

무스탕 2008-05-07 09: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할머니께서 92세에 돌아가셨죠. 10년전입니다.
엄마가 65세 되시도록, 같이 늙어가도록 시어머니를 모셨던 거에요.
엄마의 걱정은 그러다(울 할머니께서 워낙 정정하셨거든요..;;) 자식 먼저 앞세울까 걱정이셨대요 (사위(제 고모부시죠) 한 분이 먼저 돌아가셨거든요)
외할머니는 엄마가 결혼 하기 전에 돌아가셨으니 친정엄마보다 시어머니랑 훨씬훨씬 오래 사신거지요.
전 저희 엄마가 할머니한테 해 드린거의 10%도 시어머니한테 못해드리는데 가끔 생각해 보면 에혀.. 한숨만 나와요.. 한심한 며느리.. ;;
순오기님. 좋았던 것만 기억하시고 지금은 편안하게 지내실거니까 웃으세요 ^^

클리오 2008-05-07 14: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반동 바닷가 정비하니까 깨끗해지고 좋긴한데, 옛날의 오밀조밀 분위기 있는 카페들이 전부 사라져서 흑.. 시어머니, 선하고 좋으신분인데 제가 싫어하는 잔소리과시다보니 좋은 의미인줄 알면서도 더 잘하지 못하네요. 겉으로라도 애교많은 며느리면 훨 나으련만...

세실 2008-05-07 15: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음이 짠합니다. 오늘 친정 부모님 모시고 점심식사 했는데 저희 엄마도 할머니, 외할머니 모시고 사느라 고생 많으셨거든요. 오늘 뵈오니 참 많이 늙으셨고, 야위셨단 생각 했습니다....저 살기 바쁘다는 핑계로 부모님께 참 불효하고 있습니다. ㅠㅠ
아웅 눈물나요.

마노아 2008-05-07 15: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찡하고 짠하고 뭉클하고 그랬어요. 시어머님께 순오기님도 인연이 된 며느리였을 거예요. 사람 사는 모양들이, 참 아프고도 아름답네요.

2008-05-07 17: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순오기 2008-05-08 07:32   좋아요 0 | URL
누구나 스스로 좋은 며느리라고 생각하진 못하죠. 그런 마음이기에 또 잘해드려야지 다짐하는 거고요... 친정아버지도 암으로 돌아가셨어요. 시어머니보다 6개월 먼저...ㅠㅠ

2008-05-07 23: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순오기 2008-05-08 07:34   좋아요 0 | URL
저도 그런 마음으로 아파요~~ 76세에 가셨는데도, 가시기 1년전까지 시할머니 모셨으니... 부모에게 내가 잘한 며느리라고 생각할 사람 하나도 없을거에요.

웽스북스 2008-05-08 0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시어머님이 순오기님같은 며느리를 만나신 건
그분의 삶에 참 다행스러운 일이었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순오기 2008-05-08 07: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아침부터 이 글 올려놓고 하루 종일 마음이 아파서 알라딘도 못 들어왔어요. 감정기복이 심한건지, 조절이 잘 안되는건지 그랬어요.ㅠㅠ
꿈님/부모를 보낸 자식 마음은 다 같겠죠. 시아버님 제사가 오늘이요.수고..
무스탕님/오래 사시기를 바라면서 모시는 분의 수고는 생각지 않았던거 같아요.
클리오님/목포를 함께 공유할 수 있다는 게 좋군요. 아무리 좋아도 시어머니는 시어머니인듯... ^^
세실님/살기 바빠서 도리도 제대로 못한다는 죄책감은 누구나 다 갖고 있을 듯...
마노아님/사람 사는 삶에 숨겨진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눈, 그게 사랑이겠죠! ^^
웬디양님/결혼하면 좋은 며느리 되어야지~~ 하는 것도 내 꿈의 하나였어요.^^

프레이야 2008-05-08 16: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순오기님 눈물이 나는 글이에요.
가시고 보내드리는 두분의 모습이 애틋해요.
님에게 오월은 또 그런 의미로도 아프군요.

순오기 2008-05-08 18:55   좋아요 0 | URL
어머니 사랑이 우리 눈물의 원천이겠죠~~ 오월, 참 아픈 달이에요.ㅠㅠ
 
8월 15일 광복절을 기념하며 -땅은 우리민족의 목숨이었다

내가 토지를 처음 접한 건 최수지가 '최서희'역으로 나왔던 TV드라마였다. 21권으로 완간된 책을 산 건 2002년 1월이었고, 그 책을 완독한 건 2004년 3월 10일 수요일 오전 10시 37분이었다. 40일만에 토지 읽기를 끝낸 감동은 굉장했었다. (먼댓글)

박경리 선생의 이름을 들은 건 중고등학교 국어책에 제목만 실렸던 '파시'때문이었다. 문학소녀를 자청했던 난, 그 작품을 찾아 읽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때의 감동을 되살리려고, 초등학교 학부모독서회에서 2002년 '김약국의 딸들'과  2004년 '토지'를 토론했기에 대가의 작품을 탐독할 기회를 다시 얻었다. 그 후 TV아침드라로 방송되었던 '성녀와 마녀'를 만났고, '김약국의 딸들'은 원작과 많이 달라 도중에 시청을 접었다.

 다행히 '토지'를 읽기 전에 박경리 선생을 뵐 기회가 있었다. 하동군에서 '토지'에 묘사된대로 '최참판댁'을 복원하고 가진 '제1회 토지문학제'에 그분이 오셨다. 2001년 11월 11일 광주시교육청의 학부모독서회 문학기행에 참여했기에, 당당한 그분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황홀했었다. 그분을 뵈었기에 그 후 토지를 사면서도 망설이지 않았고......

 

팜플릿 아래 사진은 '토지'에 묘사된대로 복원한 최참판댁과 초가집은 별당아씨의 초당이다.



박경리 선생은 전야제부터 참석하셨고, 함께 온 많은 문인들을 뵙는 것만으로도 우린 좋았다. 하지만 하동군청의 이 행사를 박경리선생은 썩 달가와하지 않으셨다는 후문으로, 하동군에선 최참판댁과 전시관을 세우고도 원주의 '토지문화관' 때문에 '평사리문학관'으로 명명했다.

당시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명되었던 그분을 응원하는 현수막도 걸렸다. 우린 일정상 백일장엔 참여하지 못하고 다음 장소로 이동해 아쉬움이 많았다.



>> 접힌 부분 펼치기 >>

얼마 전, 공지영의 '네가 어떤 삶을 살든 나는 너를 응원한 것이다'에 거론된, 박경리선생의 'Q씨에게'를 구입하려다 절판이라 못 샀다. 4월 25일 뇌졸중으로 쓰러진 소식을 접하고 안타까웠는데, 5월 5일 눈을 감으셨다니 그분께 경의를 표하며 명복을 빈다. 작년 7월 폐암선고를 받고도 치료를 거부하고 겸허히 받아들이셨단 기사에 울컥~ 했었다. 우리시대 최고의 문학산맥이었던 그분은 평생의 역작이었던 '토지'를 남기셨기에 편히 눈을 감았으리라... 장례위원장이신 박완서선생께서 편안히 눈감으셨다고 전하는 걸 뉴스에서 보았다. 이제는 다시 뵐 수 없는 분이기에 남겨주신 작품으로만 만나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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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기세덱 2008-05-06 09: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선생께서 우리에게 베풀고 가신 것이 너무 많아 감사한데도, 좀더 우리곁에서 더 많은 것을 내어놓고 가시라고 막 투정을 부리고 싶네요.
사진들 보니, 너무너무 좋으셨겠어요. 선생의 존안을, 그 손 한 번, 뵙지 못하고, 잡아보지 못하고 보내드린 것이 무척 아쉬운 아침입니다.

순오기 2008-05-06 13:54   좋아요 0 | URL
너무나 아쉽지만, 폐암 치료도 거부하고 담담히 받아들였단 기사를 읽으며 편하게 가신게 다행이다 싶었습니다. 겸허하게 죽음을 받아들이는 삶의 자세에 왈칵~ 눈물을 쏟았습니다!

전호인 2008-05-06 1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선생님의 얼굴을 보아서는 푸근하다는 인상이 지배적이었는데, 인생살이에 팔자가 드셌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초저녁에 태어나셨는 데 호랑이 띠인지라. 사주풀이상 초저녁은 호랑이가 굶주림에 먹이를 찾아야 하는 시간이었기에 팔자가 드셀 수 밖에 없었다네여. 그래서 부군과 아들을 여의고 힘들게 살수 밖에 없었다는 선생의 말이 갑자기 기억이 납니다.
독자와 함께했던 지난 날들이 그래도 외롭지는 않으셨을 듯하고, 다시 자연으로 돌아오셔서 함께 할 수 있기에 안타깝지만 위로가 됩니다. 고이 영면하소서.

순오기 2008-05-06 13:55   좋아요 0 | URL
사주팔자라는게 지나고 보면 그렇게 맞아떨어지는가 봅니다. 때론 해석하기 나름일거라 생각도 하지만... 당신의 '토지'로 돌아가신 그분을 우리는 작품의 '토지'로 또 만날 수 있으니까요!

뽀송이 2008-05-06 1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누구나 한번은 가게 되는 길인데도... 어찌나 마음이 횡하던지...
그만큼 박경리 작가가 우리에게 주었던 의미가 컸던것 같아요.
저 위의 시집 <우리들의 시간>에서 보면 그 분은 글을 쓰는 것을 업으로 생각하셨던 것 같아요. 그리고 시 속에서 외로움을 저는 느꼈답니다.
제 고향이 하동이라 더 짠하군요. 고인의 명복을 빌어드립니다.(__)

순오기 2008-05-06 13:58   좋아요 0 | URL
이참에 박경리선생의 시집을 사봐야겠다 생각했어요.
송이님 고향이 하동이군요. 이때 하동 솔밭에서 날씨가 추워 벌벌 떨며 점심을 먹었던 기억이...ㅜㅜ

무스탕 2008-05-06 1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어제 소식 듣고는 선생님 조금 더 오래 우리 곁에 머물러 주시지 이리 가십니까.. 아쉽고 안타깝더라구요..
직접 뵌적은 없지만 선생님은 계신 그 자체로 참 행복하고 감사하신 분이셨는데 말이에요..
고이 잠드소서..

순오기 2008-05-06 13:59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뇌졸중으로 쓰러지지 않았다면 조금은 더 머물수도 있었을텐데...
저런 분이 우리 곁에 계셨다는게 참 감사할 뿐이죠!

다락방 2008-05-06 12: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토지는 실제인듯 생생했죠. 그 모든 등장인물들이 현실감 있었으니깐요. 읽으면서도 읽고나서도 대단하다고 생각했었어요.

저는 뭘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죽음앞에서는 어떤 말도 제 마음을 제대로 표현해주지 못하는 것 같아서요.
고인의 명복을 빌 따름입니다.

순오기 2008-05-06 14:02   좋아요 0 | URL
토지를 잡고 살던 40일은 제가 그속에서 사는 듯했어요.
실타래처럼 엉킨 사람들의 삶을 목숨과 같은 토지로 잘 풀어내셨지요.
저도 마음이 텅 비어버린 것 같아요.

2008-05-06 13: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순오기 2008-05-06 14:04   좋아요 0 | URL
전에도 누군가에게 교정 받았는데도, 한번 입력되면 고치기가 쉽지 않네요.^^ 수정했습니다. 감사~

2008-05-06 15: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5-06 16: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행복희망꿈 2008-05-06 2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늘 보내는 사람의 마음은 슬픈것 같아요.
누구나 한 번은 들어보았을 그 분의 이름이 우리문학사에 오래도록 남을것 같아요.
마지막으로 쓰셨다는 시의 내용을 보니 모든것을 훌훌 털어버리시고 편하게 정말 토지로
돌아가신것 같더라구요.
좀더 좋은글을 많이 남기셨다면 하는 아쉬움이 많이 남네요.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순오기 2008-05-07 06:36   좋아요 0 | URL
보내는 사람의 애잔함...
담담하게 생을 마감하는 아름다움...

Jade 2008-05-07 07: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토지'는 아직 못읽어봤는데 순오기님 페이퍼를 보니 읽고싶어지네요. 문인장으로 치른다는 말, 밤새 빈소를 지켰다는 쟁쟁한 작가들의 이야기를 보고 가슴이 찡했어요.

순오기 2008-05-08 07:39   좋아요 0 | URL
위대한 작가이면서 존경받는 사람이 된다는 건 그분의 삶이 헛되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거겠죠. 이런 어른들이 한분 한분 가시는 게 안타깝지만, 그것이 인생이고 순리이기에 잘 보내드려야겠지요!
'토지'는 큰 맘 먹고 읽어야 할 명작이죠.

마노아 2008-05-07 1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경북지역 답사를 갔을 때 최참판 댁을 지나긴 했는데 제대로 둘러보질 못했어요. 그놈의 일정에 쫓겨서 말이지요. 두고두고 아쉬워요. 토지를 완독하고 다시 찾아가면 감회가 다를 것 같아요.

순오기 2008-05-08 07:42   좋아요 0 | URL
저는 최참판댁 복원한 첫 해에 갔었는데, 다음해에 갔다 온 독서회원들 말로는 '평사리문학관'도 지었고 자꾸 무언가 더하는 것 같아 아쉽더라고요. 토지의 독자들이 음미하며 더듬어 볼 공간이 되었으면... 뭐든 일정 때문에 제대로 맛보기가 어려운 일이 많아요.ㅠㅠ

후애(厚愛) 2008-05-07 1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토지를 즐겨 읽었던 독자로서 마음이 무척이나 아픕니다.
어제 인터넷에 뜬 기사를 보고 얼마나 놀랬는지...
오래 사실 줄 알았습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순오기 2008-05-08 07:48   좋아요 0 | URL
댓글 따라 님 서재에 가 봤어요. 흔적 감사해요.
조금 더 사셨더라면...아쉬움도 있지만 이미 육체에 고통이 있다면 더 오래 붙잡기도 힘들지요. 편히 가신 길 명복을 빌 뿐입니다.ㅠㅠ
 
엔젤 엔젤 엔젤 메타포 5
나시키 가호 지음, 햇살과나무꾼 옮김 / 메타포 / 2008년 5월
평점 :
절판


메타포의 다섯번째로 130쪽의 짧은 분량이지만, 담고 있는 내용은 결코 가볍지 않다. 엔젤을 세번이나 쓴 제목에서도 읽히듯이 그 중의적 키워드를 찾는 독서로, 두 사람의 화자가 풀어내는 교차진술이 선뜻 이해하기 어려웠다. 서체가 달라서 화자가 다른 건 금방 알수 있지만, 두 사람의 관계를 알아채기는 쉽지 않았다. 고등학생인 손녀 고짱과 할머니 사와짱의 여학교 시절을 현재 시점으로 풀어내서 그런 듯하다.

엔젤은 표지에서 보이는 열대어 '엔젤'과 엄마의 자랑스런 범생이 딸 '고짱', 또 치매에 걸린 할머니 사와짱을 의미한다. 열대어 엔젤이 약자인 물고기를 공격하는 악마성과, 착하고 모범인 고짱의 정서불안의 원인찾기, 할머니 사와짱의 잃어버린 학창시절 '엔젤' 찾기로 볼 수 있다. 열대어가 있는 수족관과 받침대로 쓰인 책상, 그 서랍에 있던 나무로 만든 천사 조각상이 관계의 실마리를 푸는 열쇠다.

고짱은 여고생으로 하루에 서른 잔의 커피를 마시는 중독이다. 커피를 안 마시면 공격성과 절망감, 지나친 자기혐오에 빠져 구원을 생각했고 신을 찾게 되었다. 그러다 정서불안의 원인이 지나친 카페인 섭취라고 인식돼 커피를 끊고 열대어를 기른다. 두 마리의 엔젤피시와 열마리의 네온테트라가 있는 수족관은 바로 고짱이 창조한 세계다.

할머니 사와짱은 여학생때 친해지고 싶었던 야마모토 고코와 좋아했던 미도리카와 선생님이 입양자매라는 사실을 알고, 배신감에 심술을 부린다. 또한 집에서 일을 봐주던 친자매 같던 쓰네에게도 질투한다. 질투와 배신감에 심술도 부리고 악마같은 저주를 걸기도 했던 과거의 기억속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치매에 걸렸어도 유독 과거의 그 일을 용서받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고 읽힌다.

고짱의 수족관에서 벌어지는 엔젤의 악마성과 소심했던 소녀 사와짱의 과거를 같은 현재로 얘기하므로 복잡하지만 소설적 구성과 긴장감은 좋다. 또한 손녀 고짱과 할머니 친구 고쿄를 고짱이란 같은 이름으로 불러 좀 혼돈스럽다. 그래도 할머니 사와짱이 밤마다 학창시절로 돌아가 손녀 고짱과 친구나 자매처럼 소통하며 두 사람의 내면세계, 진정한 엔젤 찾기가 진행된다.

엔젤을 진정한 천사로 만들기 위해, 혹은 천사를 돋보이기 위해 악마의 존재가 필요했다. 스스로 창조한 세계에 천사와 악마를 같이 두신 신의 뜻을 발견하기까지, 천사가 될 수 없었던 인간의 악마성은 스스로 상처를 입히며 괴로움 당한다. 신의 용서를 받고 마음의 평화를 얻은 사와짱은 영원한 안식을 찾아가고, 여학생 고짱은 수족관을 통한 할머니와의 소통으로 내면의 자기를 찾는다.  

단시간에 읽을 수 있지만, 마치 마음속의 악마성을 들킨 듯한 느낌이라 리뷰 쓰기가 어려웠다. 나도 중고등시절에 별것도 아닌 일로 말하지 않고 끝낸 친구가 있어, 솔직한 내면을 들여다 보는 독서는 겁나고 부끄럽다. 짧지만 무거운 주제를 중의적 구성으로 풀어 내 학창시절을 되돌아 보고, 빛나는 10대를 살고 있는 우리 아이들의 내면을 짚어보는 엄마로서의 위치를 확인해 준 독서였다.

*전문 번역 기획실이라는 '햇살과 나무꾼'의 번역인데, 흔히 쓰지 않는 우리말을 찾아 쓴 노력은 돋보였지만, 간혹 부사의 쓰임이 어색한 곳과 '시'라는 존칭어를 한 문장에 두번이나 쓴 것은 좀 아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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뽀송이 2008-05-06 1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쵸? 아직 다 못 읽었지만, 흔치않은 표현에 잠시 멈칫했어요.^^;;
요즘 통 책이 읽히지않아 괴로워요.ㅡㅜ
님~ 잘 지내고 계시죠?

순오기 2008-05-06 16:15   좋아요 0 | URL
책이 온날 곧바로 읽었는데~ 서평 쓰기가 거시기 해서 엊그제 다시 읽었어요.
다행히 얇은 책이라 두번 읽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