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외출을 거의 하지 않고 집에만 있어 시간이 많을 줄 알았는데 하루가 터무니없이 빨리 지나가 버린다. 누군가를 만나고 집에 돌아오면 그때부터 또다른 하루가 있었는데 지금은 잠에서 깨서 다시 잠자리에 들 때까지 일직선으로 그냥 하루가 지나가 버리는 느낌이다. 그래서 어떤 하루의 오후에는 가슴이 텅 비고 나를 둘러싼 공기에 주눅들고 허무해져 울어버리고 싶어진다. 연암 박지원이 끝없이 넓게 펼쳐진 요동벌판을 지나며 '인생이란 본시 어디에도 의탁할 곳 없이 다만 하늘을 이고 땅을 밟은 채 떠도는 존재일 뿐' 이라며 그곳이 훌륭한 울음터라고 했듯이 한번씩 나에게도 통곡할 울음터가 필요하다.
지난 가을엔 책은 많이 읽었는데 거의 정리를 하지 못했다. 시간은 가고 기억은 사라져 가서 안타까웠지만 할 수가 없었다. 이제 겨우 정신이 좀 돌아와 그동안 읽은 책에 대해 조금씩이라도 정리를 해야겠다. 이 해가 가고 있고 내년엔 또 새 책을 읽어야 하기에 어서 내 언저리에서 맴돌고 있는 것들을 보내야 할 것 같다.
시대와 장소는 다르지만 이 두 문장가는 우리들에게 패러다임의 변화를 요구한다. 광활한 우주의 한 점 초록별에 사는 지구인들에게, 벌써 망해버린 명나라의 유령들을 여전히 붙잡고 살아가는 답답한 이들에게 편협한 자기중심성에서 벗어나 새롭고 합리적인 곳으로 나아가라고 한다.
우리는 코스모스를 제대로 이해해야만 한다. 자신의 위상과 위치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주변을 개선할 수 있는 필수 전제이기 때문이다. 우리와 다른 바깥세상이 어떠한지 알아내는 것도 자신이 처한 상황을 개선하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준다.
-코스모스중에서, p386
오랑캐라고 하는 청나라는 중국의 제도에서 이익이 될 만하고 오래 향유할 만한 것들을 가로채 가지고는 마치 본래부터 자기 것이었던 양한다. 대개 천하를 위하여 일하는 자는, 진실로 백성에게 이롭고 나라에 도움이 될일이라면 그 법이 비록 오랑캐에게서 나온 것일지라도 마땅히 이를 수용하여 본받아야만 한다.-열하일기 상 중에서, p240~241
연암 박지원과 칼 세이건은 같은 것을 다르고 다양하게 말하고 있다.
엮은이 고미숙은 '열하일기는 이국적 풍물과 기이한 체험을 지리하게 나열하는 흔해 빠진 여행기가 아니다. 그것은 이질적인 대상들과의 뜨거운 '접속' 의 과정이고, 침묵하고 있던 '말과 사물' 들이 살아 움직이는 '발굴' 의 현장이며, 예기치 않은 담론들이 범람하는 '생성' 의 장이다. 그런 까닭에, 우리는 『열하일기』를 통해 아주 낯설고 새로운 여행의 배치를 만나게 된다.'
고 했듯이 우리는 사람, 환경, 우주 모두를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만나야 할 듯 하다.
한 번씩 이런 상상을 해 본다. 만약 내가 눈이 멀게 된다면......
그런 상황에서는 모든 것이 불편해질 것이고 결국 나 혼자서는 일상을 영위할 수 없겠다는 생각을 하며, 그 생각만으로도 암담하고 비참한 기분이 든다.
빽빽하게 채워진 글들과 쉼표와 마침표의 문장부호만으로 서술되는 '눈먼 자들의 도시'는 나의 상상으로 예상되는 눈멂의 세계를 구체적이고 적나라하게 표현해준다. 실명은 눈을 뜬 채 행해지는 온갖 인간의 이기심에 대한 경고이자, 눈을 뜨고도 볼 수 없는 것들을 실명을 통해 보게 하고 일깨우려는 것 같다.
여기서는 아무도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하다.
실명은 또 이런 것, 모든 희망이 사라진 세계에서 살아간다는 것이기도 하다.-p294
인내심을 가져라. 시간이 제 갈 길을 다 가도록 해주어라. 운명은 많은 우회로를 거치고 나서야 목적지에 도달한다는 것을 아직도 확실히 깨닫지 못했는가. 여기에 이 지도를 세우기 위해, 운명이 얼마나 많은 길을 돌아왔는지는 운명 자신밖에 모를 것이다.-p330
오셀로, 리어왕, 멕베스,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
인간이 겪는 비극의 이유는 다양하지만 위의 4작품은 개인의 욕망과 욕심, 잘못된 판단. 질투로 인해 끝이 불행하다. 과실, 성격적 결함, 단순한 판단 착오나 실수라는 뜻의 '하마르티아' 로 인해 그들은 비극적인 결말을 자초한다. 그것이 자기자신 한 사람의 문제일 수도 있지만 이아고와 멕베스 부인과 같은 주위의 사람때문에 나락으로 빠질 수도 있다.
이 작품들을 읽어 갈 때 이미 우리는 주인공들이 앞으로 불행해지리라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시절이나 지금이나 우리는 단지 나약하고 본성에 따르는 인간일 뿐인지라 앞을 내다볼 수 없다. 많은 권력과 재산을 물려받은 딸들이 배반한다는 것을 리어왕은 인정하지 못했고, 당신은 왕이 될 사람이라는 예언을 들었을 땐 이미 멕베스는 왕이 된 것이다. 사랑에 빠져서는 안되지만 사랑에 빠져버렸기에 안토니는 그 늪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비극이란 완결된 행동의 모방일 뿐 아니라 공포와 연민의 감정을 불러 일으키는 사건의 모방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시학' 중에서
무대에 올려진 작품을 감상하며 배우들은 앞날을 모르는 것 처럼 연기하지만 관객들은 어느정도 비극적인 결말을 예상하며 '나'를 생각하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대로 내가 똑같이 그러한 행동을 한다면 나역시 비극적인 삶을 살거라는 공포를 느끼며 나는 그러지 말아야지 생각하면서도, 그러한 상황에 막닥뜨린다면 나도 그럴 수 밖에 없으리라는(아니라고 부정하고 싶겠지만) 소극적 긍정을 하며 주인공들이 마치 나인양 불쌍해진다.
내일과 또 내일과, 내일과 또 내일이
이렇게 쩨쩨한 걸음으로, 하루, 하루,
기록된 시간의 최후까지 기어가고
우리 모든 지난날은 죽음 향한 바보들의
흙 되는 길 밝혀 줬다.
꺼져라, 꺼져라, 짧은 촛불!
인생이란 움직이는 그림자일 뿐이고
잠시 동안 무대에서 활개치고 안달하다
더 이상 소식 없는 불쌍한 배우이며
소음, 광기 가득한데 의미는 전혀 없는
백치의 이야기다.
-멕베스, 5막 5장, p459
'햄릿' 이라는 인물은 쉽게 이해하기 어렵다. 전에 읽었던 '아이스퀼로스 비극' 중 오레스테이아(오레스테스 이야기)에서 오레스테스는 그의 모친 클뤼타이메스트라와 그녀의 정부가 부친 아가멤논을 죽였음을 알 때 아무 망설임없이 복수를 감행한다. 그에 비해 햄릿은 망설이고 고뇌한다. 오레스테스와 다르게 햄릿은 르네상스의 인물이기 때문일까?
복수를 하는 자는 이유가 있고, 해야만 하는 당위성이 있다. 하지만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어머니를 죽인 오레스테스는 복수의 여신들에 의해 쫓기는 신세가 된다.
'복수의 서사' 는 '고통의 등가교환' 이라는 목표를 추구하는 서사이며 거의 실현 불가능한 그 목표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서사가 어떻게 창조적으로 실패하는가가 그 성패에 달려있다.-신형철,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중에서
억울하게 죽어 유령으로 나타난 선왕을 위해 햄릿은 아들로써 뭔가를 해야 한다. 당연히 아버지를 위해 어서 나서야 하겠지만 햄릿은 자신의. 자신만의 존재에 대한 고민에 빠진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여러 일들이 일어나고 햄릿을 포함한 주변 사람들이 거의 죽게된다. 우유부단한 햄릿이다. 그러나 그 망설임속에 있는 이유와 슬픔을 알기에 우리는 햄릿을 이해한다. 햄릿의 우유부단함 속에 존재가 있다.
있음이냐 없음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어느 게 더 고귀한가, 난폭한 운명의
돌팔매와 화살을 맞는 건가, 아니면
무기 들고 고해와 대항하여 싸우다가
끝장을 내는 건가.
죽는 건----자는 것뿐일지니,
잠 한번에 육신이 물려받은 가슴앓이와
수천 가지 타고난 갈등이 끝난다 말하면,
그건 간절히 바라야 할 결말이다.
죽는 건, 자는 것,
자는 건 꿈꾸는 것일지도-----
아, 그게 걸림돌이다.
왜냐하면 죽음의 잠 속에서 무슨 꿈이,
우리가 이 삶의 뒤엉킴을 떨쳤을 때
찾아올지 생각하면, 우린 멈출 수밖에----
그게 바로 불행이 오래오래 살아남는 이유로다.-햄릿, 3막 1장. p94~95
'To be, or not to be.'
햄릿에 나오는 너무나 유명한 이 문장은 '사느냐, 죽느냐, 이것이 문제로다' 또는 '있음이냐 없음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등 여러가지로 번역되는데 내 생각엔 햄릿의 어느 부분에 중점을 두느냐에 따라 다를 수 있고 나름 둘 다 맞는 것 같다.
직접 읽지 않아도 우리는 '로미오와 줄리엣' 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 고귀하고 애절한 사랑의 대명사가 아닌가. 이 책은 내가 알고 있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였다. 그냥 덤덤히 책을 읽었다. 그 덤덤함의 이유는 뭘까.
캐플렛가의 딸인 줄리엣은 아버지가 정해준 결혼 상대를 거부한다. 그러자 그녀의 아버지는 대놓고 말한다.
뭐 뭐, 어쨌다고? 말을 돌려! 이게 뭐지?
"반갑다." "고맙다" 하다가 "고맙잖다."
게다가 "반갑잖다?" 버릇없는 것 같으니.
고맙다 반갑다 다 집어치우고
그 잘난 몸이나 추슬러 이번 주 목요일에
성 베드로 성당으로 파리스와 함께 가.
안 그러면 틀에 묶어 내가 끌고 가겠다.
나가, 누렇게 썩을 년아! 나가, 이 못난 것아!
허연 상판하고는! -로미오와 줄리엣, 3막 5장 p113
가부장적인 아버지가 지배하는 시절에 자유연애는 비극적인 결말을 가져올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올리비아 핫세' 로 연상되는 나의 줄리엣이 아버지에게 이런 대접을 받았다는 것이 충격적이다.
셰익스피어는 극을 쓸 때 '약강 오보격 무운시' 라는 형식을 주로 사용하였다. 모든 운문 형식 가운데 이 '약강 오보격 무운시' 가 영어의 자연스러운 리듬에 가장 가까우며 셰익스피어가 그 대표적인 사용자이다라고 〈민음사판〉의 번역자는 말한다. 그래서 번역자도 그 형식으로 번역을 했다고 하셨는데 우리말이 영어와는 달라서인지 책을 읽는데 사실 많이 불편했다. 역자의 노력은 가상하나 앞 뒤가 맞지 않고 억지스러운 데도 많은 것 같아 유감이다.
〈열린 책들〉 판은 그러한 형식에 완전히 얽매이지는 않은 것 같아 읽기는 민음사판보다 좀 쉬웠다. 그러나 너무 산문적인 느낌이 강해서 아쉬웠다.
그 밖에 읽은 책들.....
그리고
박상영의 소설을 처음 읽었다. 사랑에 관한 얘기인데 그 대상이 동성이다. 여자사람친구 재희와 엄마도 등장한다. 사랑하는 사람도 만나고 그냥 즐기려고 만나기도 한다. 아닌 것 같은데도 마음을 제어할 수 없어 그 사람을 만나야 하고, 진짜 사랑하는데 또 어쩔 수 없이 그 사람을 멀리 떠나보내야 한다. 이성을 사랑하든 동성을 사랑하든 사랑이란 비슷비슷한 유형이다.
사랑은 정말 아름다운가.
내게 있어서 사랑은 한껏 달아올라 제어할 수 없이 사로잡혔다가 비로소 대상에서 벗어났을 때 가장 추악하게 변질되어버리고야 마는 찰나의 상태에 불과했다. 그 불편한 진실을 나는 중환자실과 병실을 오가며 깨달았다.-p169
반짝, 애틋한 마음이 들기도 했으나 나는 감히 규호를 따라가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이 설렘도 찰나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기에. 밤이 끝나는 시점과 해가 뜨는 시점은 이어져 있으니까.-p248
그래,그래 맞는 말이다. 어쩌면 그 절절한 사랑들은 한여름밤의 꿈들일지도 모른다. 훼방꾼 큐피드의 화살에 맞아 휘청거리며 그것이 전부인 것처럼 여겨지지만 결국엔 만신창이가 된 자기자신만 남는다.
사랑의 정체성은 태어나면서부터 정해지는 것이라고 한다. 자기 자식이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안 부모들은 그 현상을 인정하기 보다 병으로 여기고 치료되기를 원한다. '대도시의 사랑법' 의 주인공 영의 엄마도 그랬다. 정신병원으로 보내진 영은 상처를 받고 엄마와 소원해지지만 그 엄마는 암이라는 병을 앓고 있다. 엄마를 용서할 수 없지만 엄마이기에 영은 엄마를 돌본다.
그러니까 말이야. 엄마 있잖아
단 한번이라도 내게 사과를 해줬으면 좋겠어. 그때 내마음을 짓밟은 것에 대해서. 나를 이런 형테로 낳아놓고, 이런 방식으로 길러 놓고, 그런 나를 밀어내고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곳에. 무지의 세계에 놔두기로 결정한 것에 대해서, 제발 사과를 해줬으면 좋겠어. 그게 엄마의 본심이 아니었다는 것도, 누군가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지만, 알지만, 나는 엄마를, 당신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아....
-정말, 미안한데, 아마도 영영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아.
영은 엄마를 용서할 수 없지만 엄마 역시 아들의 성향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나라면 어땠을까.
나와 똑같이 외동딸을 두고 있는 어떤 분이 소설. '딸에 대하여' 를 읽고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그 대상이 누구든 딸과 함께 있어 준다면 내가 가고 없을 때 홀로 남겨질 딸이 외롭지 않을 것 같다고.
그러면 편안히 갈 수 있을 것 같다고.
'대도시의 사랑법' 엔 올림픽 공원이 자주 나온다. 우리집에서 산책길을 따라 45분쯤 가면 올림픽 공원에 도착하는 지라 좀 반가웠다. 코로나의 영향으로 실내에서 운동을 할 수 없어서 올해는 자주 올림픽 공원까지 걸어갔다. 걷다보니 걷는 것의 매력에 푹 빠졌고 시간이 날 때마다 걸어갔다. 올림픽 공원에 도착하면 생수나 커피를 사서 내가 좋아하는 나무가 있는 곳의 벤치에 않아 그저 멍하니 있다 온다. 이 소설을 읽고 그 벤치에 않아 영을 생각하기도 했다. 무서운 병에 걸려버린 영!
내내 영이 한 말이 걸린다. 영이 좀 편안히 잘 살면 좋겠다.
지난 시절 끊임없이 노력하고 애써왔지만 결국 나의 몸과 나의 마음과 내 일상에 남은 게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더 열심히 깨달을 따름이었다. 공허하고 의미 없는 낱말들이 다 흩어져 오직 글을 쓰고 있는 나 자신만이 남는다. 어깨를 잔뜩 구부린 채 미간에 짙은 주름을 짓고 있는 내가 나 자신의 호흡만을 들을 수 있는, 그런 세상.-P307~3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