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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브 메이 페일
매튜 퀵 지음, 박산호 옮김 / 박하 / 2016년 1월
평점 :
절판
매튜 퀵의 작품을 소설로 만난 것이 이것이 처음이네요. 전작인 실버라이닝 플레이북은 영화로 유명했었고 저도 영화로는 보았습니다만 활자로는 접하지 못했거든요. 듣자하니 책은 좀 더 난해하고 독특하다고 하던데, 그런 작가의 작품이니 이 작품도 읽기에 수월하지는 않겠구나 했었습니다.
그런데 왠걸, 생각보다 상당히 빠르게 읽히더군요. 500쪽이 넘으니 얇은 소설은 아닌 셈인데 금세 페이지가 넘어가더라고요. 책의 초반부는 고개를 갸우뚱 하면서도 부담없이 읽히는 내용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포샤라는 여인이 바람피는 남편을 죽이겠다고 벽장에 숨어서 스스로와 남편을 비웃는 독백을 쏟아내는 시작은 상당히 경쾌합니다. 다행히(?) 남편은 죽이지 않았습니다만 이혼을 결정하고 만취상태로 고향으로 돌아가는 비행기에 올라 옆자리에 앉은 수녀에게 횡설수설 대는 장면, 호더인 어머니와의 재회 장면, 그리고 옛 친구와 그녀의 아들, 그리고 그녀의 오빠 척과 만나는 장면이 이어지죠. 그리고 마침내 고교시절 은사에게 일어난 비극적인 사고 이야기를 전해듣고 그를 찾아가기로 결정하기까지가 첫 챕터입니다. 이 소설은 이렇게 포샤의 챕터로 시작하여 은사인 버논의 챕터, 버논의 어머니인 매브의 챕터, 그리고 척의 챕터를 거쳐 다시 포샤의 챕터로 마무리되는 구조입니다. 각 챕터가 해당 인물의 1인칭 시점으로 전개되므로 챕터별로 느낌이 많이 다른데요, 포샤는 문학적 재치가 있지만 메탈에 빠진 인물인데다 남편의 재력에 힘입어 사치스럽게 살아온 인물이기에 제가 앞서 언급했던 인상을 받게 되었던 것이죠. 그리고 서사구조가 의도적으로 보일 정도로 통속적이어서 좀 당황스럽기도 했습니다만, 이제 생각해보면 이것은 독자를 착각하게 만듦으로써 후반부에 한방 먹이고자 했던 의도로 생각됩니다. 덧붙이자면 이 책에서는 메탈이 상당히 중요한 소재로 활용됩니다. 어떻게 봐도 미국인이 쓴 소설이다 싶게 미국적 소재들이 연이어졌습니다만, 그 중에서도 메탈이 특별한 것은 메탈의 양면성이 작가가 보는 인생의 양면성을 비추어내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챕터 2에 접어들면 불의의 사고 이후 칩거하고 있는 버논이 말을 시작하면서 분위기가 급변합니다. 인생은 살만한 의미가 있는가를 끊임없이 자문하는 그는 자신의 개에게 알베르 카뮈라는 이름을 붙여주었을 정도지요. 그런 그가 치명적인 2연타를 얻어맞고 마침내 죽음을 택하려할 때, 포샤가 찾아와 그를 살려냅니다. 만약 이 책에 핵심적인 플롯이 있다면 포샤가 절망에 빠진 버논을 구원할 수 있겠는가일 것입니다. 포샤가 버논을 구하기 위해 하는 노력은 일반적인 소설에서라면 해피엔딩으로 이어질 수 있는 종류의 것이었는데요, 이 지점에서 일단 작가가 한방을 먹입니다. 버논이 카뮈를 인용하여 던지는 부조리라는 말은 구원이라는 주제에도 적용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세상과 인간의 마음의 불가해한 부분은 구원이라는 것이 인간의 노력으로 가능한가에 대해서 회의를 던져주는 것이죠. 이러한 회의는 자동적으로 실버라이닝 플레이북을 떠올리게 하기도 합니다.
챕터 3의 매브는 수녀가 되기 위해 버논을 떠났고 그 이후로 둘 사이에는 큰 골이 져 있었습니다. 버논의 불행한 사고 이후 매브는 아들에게 끊임없이 화해의 편지를 보냈습니다만, 마음을 닫은 버논은 편지를 펴보지조차 않고 있었던 것이죠. 챕터는 이 편지들을 담아냅니다. 기적에 가까운 우연으로 매브와 포샤가 이어지고 이를 통해서 포샤는 버논을 찾아갈 수 있게 됩니다. 포샤가 비행기에서 푸념을 늘어놓았던 수녀가 바로 매브였던 것입니다. 이것을 포함해서 이 챕터에서 표현되는 기적적인 일들은 저로써는 당혹스럽게만 느껴졌습니다. 현대 소설은 인과를 좋아하게 마련이죠. 저 역시 현대인이니만큼 인과를 벗어난 플롯에는 거부감을 느끼곤 합니다. 작가가 이적을 믿는지는 알 수 없는 일입니다만, 이해하기 어려울만큼 이적을 던져놓는 이 챕터의 의도는 챕터 4를 통해서 짐작해보게 되더군요.
챕터 4를 이끌어가는 척은 포샤의 선배이고 버논의 제자입니다. 한때 마약중독으로 밑바닥 인생을 살았던 그는 재기 끝에 바텐더가 되고 초등학교의 교사가 되고자 노력하는 중입니다. 버논을 구원하는데 실패한 포샤의 사랑을 구하면서 포샤가 '러브 메이 페일'을 쓰는 동안 곁을 지켜주지요. 사실 챕터 4는 혼돈의 도가니입니다. 최악의 인간으로 묘사되던 포샤의 남편은 포르노 감독을 접고 선교 활동을 떠나겠다고 합니다. 버논이 읽어주길 바라면서 그간의 일을 자전적으로 써낸 포샤의 소설 '러브 메이 페일'은 엄청난 악평을 받게 됩니다. 연이은 포샤의 좌절이지요. 그리고 척은 어쩌면 구할 수 있었을 자신의 여동생을 마약에 빼앗겨 버립니다. 이런 실패들은 인간이 타인은 커녕 자신도 구원할 수 없지 않은가, 부조리 속에서 운명을 가늠할 수 없는 인간이 구원을 확신하는 것은 하나의 오만이 아닌가 하는 화두를 던지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챕터 3의 이적들은 세계의 불가해성과 인간의 한계를 드러내기 위한 밑거름이 되는 것이 아닐지요..
이렇게 밑바닥까지 파고드는 끝에 던져지는 챕터 5의 구원도 같은 맥락에서 보아야하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희망찬 결말입니다만 단순히 해피엔딩으로 보기에는 마음이 걸립니다. 사랑이 사람을 구원할 수 있는가, 작가는 그것을 무조건 긍정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사랑만으로 세상과 사람을 설명할 수는 없다고 말하지요. 책의 제목도 그런 의미를 띄는 것이 아닐까요? 하지만 그런 불가해성 때문에, 당신의 행동이 구원으로 이어져 알 수 없는 곳에서부터 뒤늦게 찾아올 수도 있다고 하는 희망을 놓을 수가 없게 됩니다. 챕터 5의 도입에서 인용되는 커트 보네커트의 말 '사랑은 실패할지도 모르지만 공손함은 항상 승리할 것이다'는 작가에게 그렇게 이해된 것이 아닐까 추측해보게 되네요.
포샤가 쓴 책의 제목이 '러브 메이 페일'인 것, 그리고 그 책의 받게 되는 악평과 그 책이 끌어내는 모호한 구원은 작가가 가장 강하게 시니시즘을 드러내는 부분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이 책이 비평가들로부터 받는 악평의 내용을 보면 어쩌면 작가가' 독자들이여, 내가 이런 식으로 소설을 쓸 줄 알았겠지?'라고 말하는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그리고 그 책이 포샤의 낭만적인 바램대로 구원을 가져오는 것은 다시 한번 '독자들이여, 그렇다고 내가 기계적인 절망을 읊을 리도 없지 않은가?'라고 말하는 것 같고요. 실버라이닝 플레이북을 보면서도 어쩌면 작가는 대단히 냉철한 사람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었는데요, 이 책을 보면서도 다시 한번 그런 생각을 하게 되더군요. 실버라이닝 플레이북은 일단 책을 구해서 한번 읽어봐야겠다 싶어지네요.
아쉬웠던 점은 후반부에서 오히려 책의 긴장감이 떨어진다는 점이었습니다. 전반부에서 부담스러울 정도로 장황한 어조로 서술되던 이야기는 후반부에서 급격히 간결하게 서술되기 시작하는데요, 화자가 바뀌었기 때문이기도 하겠습니다만, 결과적으로 좋은 효과를 거두지는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둥 떠있는 느낌이라고 할까요? 특히 버논이 완전히 사라진 챕터이기 때문에 포샤의 심리 흐름이 중요할 텐데 척의 심리를 따라가면서 포샤도 이야기에서 소외되는 인상을 받게 됩니다. 아마도 개인적으로 마지막 결말에 공감하기 어려웠던 것도 작용했을 것 같습니다. 모호하고 섬세한 결말이기 때문에 오히려 그 과정이 치열해야 독자가 공감할 수 있었을텐데, 너무 간단히 툭 던져놓는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술술 읽히는 소설이라고 해서 한번 읽고 올바른 길을 따라갔다고는 할 수 없겠죠. 또다른 길이 있었는데 그 길을 놓쳤을지도 모르니까요. 이번에는 작가가 흥미로운 이야기를 쓰는 사람임을 알게 된 셈이니, 다른 작품을 통해서, 또 이 책을 다시 한번 읽어보면서 다른 길을 더듬어봐야겠네요.
덧. 외국 영화가 원제를 발음 그대로 한국어로 옮겨 국내 개봉시에 제목으로 쓰는 것이 보편화된지도 꽤 오래 되었지요. 그런데 요새 책에서도 그런 경향이 커지는 것 같습니다. 영화도 그렇겠지만 책은 더욱 더 제목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때문에 작가의 의도에서 벗어나서 엉뚱한 한국어판 제목을 만들어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해왔습니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꼭 원제 발음을 그대로 책의 제목으로 써야 야하는 것인지는 의문입니다. '러브 메이 페일'이라는 제목을 듣고 한국인이 어떤 첫인상을 받을 수 있을까요? 차라리 'Love may fail'이라고 영어 그대로 썼으면 더욱 느낌이 왔을 것 같습니다. 어째서 '사랑은 실패할지도 모른다'라는 제목을 쓰지 않았는지 저로써는 알 수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