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친구들 SE [워너 9월 11900원 할인전]
워너브라더스 / 2006년 9월
평점 :
품절


마틴 스콜세지 감독은 역시 독특하다는 말 밖에 할 말이 없다
갱스 어브 뉴욕, 을 비롯해 디파티드도 그렇고 이 영화 역시 감독의 이름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타란티노와 더불어 정말 개성있는 감독이다

 

실화라서 그런지 더욱 실감이 난다
갱스터에 대한 동경심, 그리고 그들의 실체가 잘 드러난 영화다
직장에서 죽어라 일하고 세금 바치고 작은 월급으로 근근히 살아가는 밥벌레가 되고 싶지 않다는 헨리 힐의 독백을 나는 너무나 공감했다
아마 갱스터가 되는 사람들 중 많은 이들이 이 같은 심정일 것이다
직장인의 비애라고 해야 할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적성이나 취향과 관계없이 직장에 나가고 작은 돈을 벌어 가족과 먹고 산다
그 날이 그 날 같고 인생은 지루함의 연속이고 직장에서 안 잘리면 천만다행인 그런 똑같은 나날이 반복된다
알라딘에 맨날 토로하는 얘기도 그런 직장인의 비애가 아닌가?
아마도 헨리는 어려서부터 아버지와 똑같은 길을 걸어가는 것에 대해 혐오감을 느꼈을 것이고, 갱스터가 되지 않는 이상 아버지처럼 살지 않으면 밥 벌어 먹기 힘들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특별히 머리가 좋지도 않고 (공부 쪽으로) 좁아터진 집에 불구인 동생을 포함해 일곱 식구가 우글거릴 정도로 가난하고 미래에 대한 희망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헨리가 폼나게 사는 길은 갱스터 밖에 없었을 것이다
더구나 그가 사는 동네는 이탈리아계 마피아인 폴리의 구역이었다
폴리의 부하들이 저지르는 꺼리낌 없는 행동들, 일종의 특권은 어린 헨리에게 동경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경찰도 제지하지 못하고, 오히려 폴리는 어두운 세계의 경찰 노릇을 하면서 질서를 잡아주기까지 한다
내가 보기에 헨리는 갱스터가 될 자질이 충분한 아이다
자발적이라는 느낌이 든다
정말 원해서 하는 거 말이다
설경구랑 조한선 나온 "열혈남아"를 보면, 모두 억지로 상황 때문에 조폭이 됐다는 느낌을 받는다
반면 헨리는 정말 그 일을 원하고, 그런 직업을 즐기는 것 같다
이렇게 말하면 좀 웃기지만, 갱스터로서의 정체성이 확실하다고 해야 할까?

 

생각이 없을 정도로 잔인하기 그지없는 토미를 보면서 분명히 어디서 본 배우다, 싶었는데 필모그래피를 찾아보니 역시나, "나홀로집에" 나왔던 어설픈 악당이었다
왠만큼 유명한 외국 배우가 아니면 구분을 잘 못하는데 이번에는 정말 딱 눈에 들어왔다
무척 반가웠다
그런데 영화 속의 토미는 정말 너무 잔인하고 살인을 즐긴다는 느낌까지 받았다
분노를 통제하지 못하는 antisocial personality 같기도 하고 하여튼 정상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결국 겁도 없이 마피아를 죽이는 바람에 총맞아 죽었지만 말이다
그것도 참 웃긴다
순수 이탈리아인만 마피아 조직에 들어올 수 있는데, 토미가 마피아로 인정받게 된다
그들의 친구인 지미와 헨리는 기쁨에 들떠 이제 자신들도 보호받을 수 있는 조직이 생겼다고 좋아한다
생애 최고의 날이라고 생각한 토미는 어머니가 맞춰준 양복을 입고 의기양양하게 마피아의 사무실로 들어간다
그러나...
그는 뒤도 돌아보지 못하고 그대로 총맞아 죽고 만다
얼굴을 쏘는 바람에 얼굴이 심하게 뭉개져 어머니는 관도 열 수 없었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5.18 때 총맞은 사람들 사진을 본 기억이 난다
코 등이 뭉개져 형체가 없어진 사진이었는데, 너무 무서워 벌벌 떨었다
영화 속에서는 총 쏘는 장면만 보여 주고 끝인데 사후처리 장면을 보여 준다면 정말 잔인하고 끔찍할 것이다
보통 주인공은 총을 신나게 쏴 댄다
그리고 혼자서 대부분의 악당을 전부 해치운다
그렇지만 주인공에게 총맞은 이들의 다음 모습은 더 이상 안 나오니까 동정심을 가질 여유가 없다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주인공의 끔찍한 살해 행위를 보면 더이상 공감이 안 가고 멋있게 보이기는 커녕 잔인하게 느껴져서 불편하다

 

로버트 드 니로는 얼마 전에 본 "택시 드라이버" 때와 너무 달라 얼른 못 알아 봤다
알 파치노와 약간 비슷한 것 같기도 하고...
마지막까지 믿었던 헨리에게 뒤통수를 맞고 20년을 복역하게 생겼으니 인간을 믿은 자신의 어리석음을 한탄하면서 보내고 있을까?
2004년까지는 가석방 대상에서 제외된다고 했는데, 과연 출소했을지 어떨지 궁금하다
나와봤자 벌써 70이 넘은 노인이겠지만...

 

좀 이해가 안 간 부분은, 마피아의 보스인 폴리가 헨리의 증언에 의해 기소됐고 역시 20년이 넘는 형을 언도받았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헨리는 마피아의 복수를 피해 간 걸까?
증인 보호 프로그램에 의해 모든 기록이 말소된 채 5년간 평범한 노동자로 살아간다고 나왔는데, 영화 속에 묘사된 마피아들은 5년이 지났다고 해서 그래도 놔 두지 않을 놈들이다
역시 연방 정부에 맞서기엔 그저 한낱 범죄 집단에 지나지 않는 걸까?
아니면 보스인 폴리가 감옥에서 평생 썩게 된 것을 새로운 기회라고 생각한 2인자에 의해 용서를 받은 걸까?
조직 내의 역학 관계도 있겠지만, 내가 보기엔 생각만큼 복수하기가 쉽지 않았던 것 같다
하긴 전국적인 조직망이 아닌 이상 그 넓은 미국땅에서 주민등록증까지 말소된 헨리를 찾기는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뮌헨 올림픽 당시 이스라엘 선수들을 살해한 테러리스트들을 찾기 위해 이스라엘 정보부 요원들이 전 세계를 떠돌아 다니는 영화 "뮌헨" 을 보면서, 이런 점을 느꼈다
암살이라는 게 생각만큼 쉬운 게 아니구나, 영화에서 쉽게 죽이는 건 정말 영화니까 가능한 거구나...
하여튼 정부보다 우위에 있는 조직은 없는 것 같다
군사력, 정보력, 인맥 기타 등등에서 모두 말이다
사조직이 국가를 능가한다면 그 나라는 더 이상 국가 유지가 안 될 수도 있겠지만.

 

노련한 보스 폴리는, 절대로 마약은 손대서 안 된다고 헨리에게 경고한다
아마 자기 경험을 토대로 한 얘기였을 것이다
마약 거래를 하면 연방정부에서 절대로 그냥 놔두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미국 정부는 다른 건 다 몰라도 마약은 절대 용납하지 않는 것 같다
그 정도로 폐해가 심각하다는 얘기일 수도 있겠다
감옥에서 평생을 썩기 싫으면 마약에 절대 손대지 말라는 폴리의 조언을 받아들이기엔, 헨리는 너무 젊고 야심만만 했던 것일까?
결국 마약 거래 때문에 헨리는 기소됐고 절묘하게 증인이 되서 빠져 나오긴 했지만, 평생 믿고 의지하던 친구들을 배신했고 증오해 마지 않던 삶, 밥벌레 같은 삶을 살고 결국 이혼까지 했다

 

이런 생각을 해 본다
도박판에서 돈을 많이 딴 노름꾼이 그 자리에서 툭툭 털고 일어난다면?
주식에서 돈을 왕창 딴 사람이 다시는 주식에 손 안 대고 그 돈으로 쭉 성실하게 살아간다면?
이 영화 속의 헨리도 6백만불에 이르는 돈을 수중에 넣기까지 했다
그런데도 왜 자꾸 다시 범죄 생활에서 못 벗어나는 걸까?
또 문득 이런 생각도 든다
술집 나가는 아가씨가 돈을 착실하게 모아 그 생활으 청산하고 성실하게 산다면?
왜 이런 일은 불가능한 걸까?
쉽게 돈을 벌면 쉽게 잃는다는 속담을 증명이라도 하듯 말이다
내가 생각하기엔 생활 습관을 바꾸지 못해서인 것 같다
특히 헨리처럼 체질적으로 갱스터로서의 삶이 몸에 착 맞는 사람은 더더욱
하여튼 라이프 스타일이라는 건 쉽게 변하는 게 아님이 분명하다
그래서 도박꾼은 또 도박장으로 향하고, 주식꾼도 객장을 떠나지 못하고 술집 아가씨들도 마찬가지인 듯 하다

 

마지막에 헨리가 지미와 폴리를 배신한 건 정말 충격이었다
자기 목숨을 너무 사랑한다는 헨리의 변명이 정말 그럴 듯하게 들린다
결국 가장 중요한 건 생명이고, 어찌 보면 어지간한 배신 행위는 목숨이 걸린 이상 용서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든다
소설이나 영화에서 보면 목숨을 초개와 같이 여긴다는 표현이 흔히 나오는데 정말 이게 가능할까?
또 죽어 버리면 그만인데 과연 생명보다 더 중요한 대의명분이 있을 수 있을까?
나처럼 작은 고통에도 벌벌 떠는 사람은 독립운동 같은 건 죽었다 깨어나도 못할 일이고, 그래서인지 영웅이라는 것도 왠지 허울 뿐이라는 생각이 자꾸 든다
아마도 나는 헨리와 같은 타입의 인간인 것 같다
물론 감옥에 들어가는 게 무서워 절대 범죄 같은 것도 못 저지를 위인이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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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인 에어 2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10
샬럿 브론테 지음, 유종호 옮김 / 민음사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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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재밌는 연애 소설을 읽은 적이 있던가?

소설을 안 좋아하기 때문에 근래 읽어 본 기억이 별로 없다

이 소설은 마치, 고등학교 때 수업 시간에 선생님 몰래 책상 아래 숨겨두고 읽었던 로맨스 소설 같다

물론 그 재미나 수준은 하이틴 로맨스 소설과는 비교할 수도 없다

그러고 보면 나는 옛날부터 로맨스 소설을 별로 안 좋아했다

신데렐라에 대한 환상이 없어서인지, 도무지 소설 속의 모든 완벽한 조건들에 동화되지가 않았다

완벽하게 아름다운 주인공, 뭐든 척척 잘 해내고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다만 돈이 없다는 게 유일한 흠인데 그것마저 기다렸다는 듯이 나타난 돈 많고 성격 좋은 남자가 채워준다

대체 이런 일이 현실에서 가당키나 하냔 말이지...

그런 거부감 때문에 완벽한 주인공이 등장하는 소설은 언제나 흥미 밖이었다

그런데 이 소설은, 정말 너무 완벽하게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제인 에어, 과연 그녀는 19세기 영국의 일반적인 여인이었을까?

그렇다고 하기엔 너무 현대적이고 너무 당당하고 자신감이 넘친다

정말 이렇게 주체적이고 독립적인 여자가 19세기에도 가능했을지 나로서는 참 신기하다

내가 생각하는 당시 여자들은 매일 파티에 나가서 부잣집 남자 고르는 게 지상 최대의 목표던지 (오만과 편견에 나오는 리즈의 어머니처럼) 아니면 먹고 살기 힘들어 노동에 치여 사는 그런 피폐한 여자들 뿐이었다

내 상상력의 빈곤인가, 아니면 시대를 앞서가는 샬롯 브론테의 놀라운 창작력인가?

그녀 역시 사립학교를 세우려고까지 한 걸 보면, 평범한 여성은 아니었던 것 같다

또 결혼도 죽기 1년 전, 그러니까 서른 여덟 살에서야 한 걸 보면 아마도 독신으로 살 결심도 했을 것 같다

 

말이 나온 김에 그녀의 일생을 잠깐 훑어 보면, 목사의 셋째 딸로 태어났으나 위로 두 언니는 기숙학교에서 죽고 만다

제인 에어에 나오는 로우드 학교가 바로 이 기숙학교를 모델로 한 것이라고 한다

로우드 학교는 빈민구제를 목적으로 세워진 자선 학교인데 형편없는 식사와 엄격한 규율 때문에 학생들이 숨막혀 하고, 발진 티푸스가 돌자 절반 이상의 학생들이 사망한 끔찍한 학교다

아마도 그녀는 자신의 경험에 기반해 로우드 학교를 창조해 냈을 것이다

전염병에 취약할 수 밖에 없는 당시 현실을 이해는 하지만, 기숙생들의 발육에 지장을 줄 정도로 형편없는 식사를 제공하는 자선학교는 문제가 있다

더구나, 그 이사장은 학생들을 굶기는 것이 극기를 배울 수 있는 길이고, 하나님에 대한 신앙심을 키우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샬롯 브론테는 종교적 근본주의자, 혹은 원리주의자들이 얼마나 위험한지 여러 대목에서 보여 준다

무조건 하나님을 갖다 붙이면 된다는 생각, 인간 사회의 관습이나 상황 등은 초월할 수 있다는 어처구니 없는 망상, 정말 치떨리게 싫다

또 이런 생각들이 중세 암흑기를 낳고 종교전쟁을 일으키지 않았던가?

 

그렇지만 따지고 보면 소설 속의 근본주의자들만 비웃을 게 아니다

우리 역시 명분과 논리에 휩싸여 마치 그것이 반드시 지켜내야만 하는 지고지순한 것이라도 되는 양 상대방을 공격한다

얼마 전 알라딘에서도 확인한 바이다

특히 정치적인 논쟁이 붙었을 때 나중에는 대체 저런 쓸데없는 말싸움을 왜 하나, 싶은 생각이 든다

말을 위한 말, 헤게모니를 장악하기 위한 투쟁, 알맹이는 하나도 없는 껍데기들, 그러나 상대의 가슴에는 비수가 되는 날카로운 언어들...

 

내가 제인 에어를 매력적으로 생각하는 까닭은 그녀의 날카로운 지성과 독립심 때문이다

보통 소설 속 주인공들은 아름다운 외모가 기본 조건이라도 되는 양, 하나같이 예쁘고 눈부시다

그러나 샬롯 브론테는 제인 에어에게 눈부시 외모 대신 강인한 의지를 부여한다

벌써 이것부터가 얼마나 현대적인지 모르겠다

외로워도 슬퍼도 절대 울지 않고 오히려 괴롭히는 사람들을 사랑하기까지 하는, 현실에서는 거의 볼 수 없는 상상적인 캔디 캐릭터가 요즘도 난무하는데, 제인 에어는 부당한 처사에 단호하게 대응한다

또 그런 이유로 주변 사람들에게 사랑받지 못했다

한 살 때 양친이 죽은 후 외숙모 집에서 구박을 받고 살았던 중요한 이유는, 먼저 그녀의 외모가 예쁘지 않았다는 점, 그리고 쉽게 기가 죽지 않았다는 점 때문이다

솔직히 나도 그렇다

귀여운 애가 말을 안 들으면 그래도 귀엽게 봐 줄 수 있는데 못생긴 애가 떼를 쓰면 정말 얄미워 쥐어 박고 싶어진다

아마도 반항할 수 없는 어린 아이라는 사실 때문에 무자비한 억압을 쉽게 생각해 낼 것이다

제인 에어는 남의 집에 더부살이 하는 주제에 못생기고, 거기다가 어른들에게도 자기 주장을 펴는 당돌한 꼬마애니, 천성적으로 귀여움 받을 운명이 아니었던 것이다

결국 그녀는 외숙모와 사촌들의 구박에 못 이겨 로우드 자선 학교로 떠난다

그러나 그 학교에서 받은 육 년의 교육은, 제인을 훌륭한 숙녀로 변모시키고 (비록 식사는 형편없었지만) 2년 간 교사로 일할 수 있게 도와준다

다시 한 번 교육의 힘이 얼마나 큰지 실감했다

만약 그녀가 외숙모 집에서 계속 구박덩어리로 자랐다면 아마도 성깔만 있는 형편없는 여자로 전락했을 것이다

 

제인은 매우 강한 여자다

로체스터와의 결혼식 날 아내가 아직 살아있다는 사실을 알고 그녀는 단호하게 돌아선다

가정교사로 근무하면서 얻은 월급, 결혼식 때 받기로 한 패물을 모두 버려둔 채 조용히 몸만 빠져 나간다

비록 로체스터의 아내가 갇혀 지내는 광인이고, 또 그가 제인을 몹시 사랑했지만 정부로 사는 것은 그녀의 도덕 기준에 어긋난다

과연 나라면 미치도록 사랑하는 남자를 단지 도덕적이지 못하다는 이유로 단념할 수 있을까?

그것도 결혼식 바로 직전에 말이다

더구나 제인은 가진 게 하나도 없는 가난뱅이고 로체스터는 비록 스무 살이나 많긴 하지만 매우 부유한 신사다

또 이 두 사람은 서로를 너무나 갈망한다

오, 제인, 넌 정말 대단하다

나라면, 나였다면 절대로 포기하지 못할 것이다

사랑 앞에서 이성을 유지하기란 얼마나 힘든 일인가?

차라리 돈 앞에서 양심을 지키는 편이 쉬울 것 같다

 

제인이 로체스터의 재산은 단 한 푼도 갖지 않고 그의 집을 빠져 나간 후 죽음 직전의 기아에 허덕인다

나중에 그 얘기를 들은 로체스터는, 비록 나와 결혼하지 않더라도 떠난다는 얘기나 하고 갔으면 내 재산의 절반을 떼어 줬을텐데 왜 말 없이 갔냐고 원망한다

로체스터로서는, 자기 목숨만큼 사랑하는 여자가 돈 한 푼 없이 낯선 곳에서 헤맸다는 사실이 너무나 괴로웠을 것이다

그런 걸 보면 제인이 얼마나 순결하고 도덕적인지, 금방 알 수 있다

그녀로서는 로체스터를 떠나는 이유가, 그의 조건 때문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하고 싶었을 것이다

만약 조금이라도 로체스터의 호의에 기댄다면, 자기 양심에 비춰 부끄러운 일이라고 생각했ㅇ르 것이다

 

어쨌든 너무 순결한 이 아가씨는, 생판 모르는 곳에 버려진 후 사흘간 기아에 허덕이다 죽기 직전까지 간다

너무 배가 고파 음식점에 들어가 구걸도 해 보지만, 그것도 해 본 사람이 한다고 입도 떨어지지 않았을 뿐더러 누구도 그녀에게 음식을 내주지 않는다

더구나 비바람이 몰아치는 숲 속에서 잠을 자다 보니 생명의 위협까지 느낀다

샬롯 브론테는 이 죽음같은 기아와 공포를 너무나도 생생하게 묘사한다

난 지금도 굶어 죽는다는 말을 실감하지 못한다

풍요의 시대에 당연한 말이겠지만, 소설을 읽으면서 너무 무서워 소름이 쫙 끼칠 정도였다

정말 내가 동전 한 푼 없이 거리에 버려진다면 나에게 한 끼 식사와 잠자리를 제공해 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친척도 아는 사람도 단 한 명도 없는 낯선 곳이라면?

당장 외국 땅을 생각하면 된다

만약 내가 영국 땅에 버려진다면?

아, 정말 생각만 해도 등골이 오싹하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지금 누리고 있는 것들을 너무 당연하게 생각하고, 또 그것이 얼마나 고마운지를 잊고 지낸다

 

2권으로 이루어진 두꺼운 책이라, 나는 제인이 로체스터와 맺어질 지 아니면, 원리주의자 세인트 존과 맺어질지 못 견디게 궁금해 몇 번이나 마지막 장을 열어 보고 싶어 안달이 났다

그렇지만 소설의 재미를 반감시킬 수는 없으므로 꾹 참고 또 참으며 다음 장을 넘겼다

솔직히 나는 로체스터와 다시 연결될 줄은 몰랐다

내가 알고 있기로는, 제인이 선교사와 결혼해 떠난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돌아가는 분위기가 이건 아닌데, 싶어 고개를 갸우뚱 하면서 읽었다

그녀의 외사촌으로 밝혀진 세인트 존은, 비록 그리스 조각상처럼 잘 생겼지만, 인도로 선교 사업을 떠나겠다는 생각 밖에 없는 원리주의자 목사다

가끔 나는 선교 사업하는 분들이 위대해 보이면서도 그 열정이 어디서 나오는지 궁금했었다

이런 말 함부로 하면 그들에 대한 모욕일 수도 있겠으나, 세인트 존 같은 원리주의적인 열정이 어느 정도는 작용할 것 같다

원리주의의 특징은 신념이 너무 강하다 보니 모든 것을 그 신념에 맞춰 해석하고 남을 재단한다

쉽게 말해 나에게 그렇게 엄격하다면 타인에게는 얼마나 엄격하겠는가?

자신에게는 엄격하고 타인에게는 관대하라는 격언은, 사실 지키기 어렵다

왜냐면 인간은 보통 하나의 잣대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남과 나를 구분해서 보기가 매우 어려운 까닭이다

하나의 프리즘으로 세상을 보기 마련이다

 

만약 제인이 신앙심 때문에 인도로 선교 사업을 떠났다면 아마도 세인트 존의 그 강압적인 신심에 부응하느라 너무 많은 일을 한 나머지 일찍 죽었을 것이다

제인은 몹시도 가냘프고 작은 여인으로 나온다

어쩌면 샬롯 브론테의 분신인지도 모른다

이 가엾은 작가는, 서른 여덟에 결혼한 후 임신한 채 그 다음 해 죽고 만다

그녀 역시 목사와 결혼한다

현명하게도 제인은, 세인트 존의 강압적인 신심에 함몰되지 않고 용감하게 로체스터를 찾아 떠난다

이미 눈이 멀고 한 팔을 잃은 불구였지만, 아내가 죽은 후였기 때문에 제인은 떳떳하게 그와 결혼하고 아이도 낳는다

 

최고의 번역이라는 광고 문구가 부끄럽지 않을 만큼 문장이 참 매끄럽다

그리고 작가 자신이 반어법이라든가 심리 묘사를 참 잘 구사한다

문장 실력이 보통이 아닌 것 같다

인간의 이중적인 심리라든지 위선적인 부분을 어찌나 잘 꼬집어 내는지 허걱 놀래면서 밑줄을 그은 부분이 많다

위트가 풍부하고 특히 위선적인 행동을 풍자하는 솜씨가 놀랍다

그리고 매우 신심이 깊었을 것 같다

문장에 인용되는 성경 어구들이나 전체적인 내용을 볼 때 아마도 작가의 신앙심이 많이 투영된 듯 하다

또 이런 신앙심이 일반화 된 사회였기 때문에 제국주의의 팽창과 더불어 선교사들도 많이 파견됐을 것 같다

가난뱅이 제인이 있는지도 몰랐던 외삼촌의 재산을 갑작스레 상속해서 부자가 된 점만 빼 놓고는, 별다른 우연의 요소도 없고 모든 설정이 훌륭하다

또 부자가 된 것을 두고, 이제 나도 독립적인 여자가 됐다는 의미로 받아들였다는 점이 마음에 든다

독립적인 여자, 남편이나 친척의 재산에 의존하지 않아도 되는 여자, 이렇게도 명쾌한 부자의 정의가 또 있을까?

 

제인은 갑자기 생긴 2만 파운드를, 그의 또다른 외사촌들 세 명에게 공평하게 분배한다

요즘 물가로 계산해 보면 만약 나에게 20억원의 유산이 느닷없이 생겼는데 만난지 한 달 밖에 안 된 사촌들에게 5억씩 나눠 줄 수 있을까?

그런데 내 동생들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그들에게 갖는 신뢰감과 애정이 그것을 가능하게 만들 것이다

제인 역시, 그 사촌들이 자신이 누구인지 모를 때 기아로 죽어가기 직전 구해준 후 따뜻한 애정을 베풀어 줬기 때문에 선뜻 나머지 만 오천 파운드를 건네 줬을 것이다

사촌 중 한 명인 세인트 존은, 갑자기 부자가 됐는데도 그것에 휘둘리지 않고 공평하게 분배하는 모습에서 더더욱 선교사로서 적합할 거라고 생각하고 적극적으로 구애했다

이런 제인의 태도야 말로 그녀를 인격적으로 훌륭하게 만드는 점이다

 

너무 재밌게 읽고 많은 생각을 한 책이다

아마도 제인 에어라는 캐릭터는 앞으로 내가 살아갈 날들의 좋은 멘토가 돼줄 것 같다

19세기 영국의 소설가가 이렇게도 현대적인 강인한 여성 캐릭터를 만들어 냈다는 점이 정말 놀랍다

샬롯 브론테에게 찬사를 보내는 바다

더불어 유종호씨의 번역도 정말 훌륭했다는 점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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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아이즈 2007-01-20 12: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어코 빠지셨군요. 전 제인 에어만 보면 엘리자베스(오만과 편견)가 떠올라요. 분명 다른 케릭터일 텐데... 마린님의 샬롯 브론테와 제인 오스틴에 대한 구별 멘트가 궁금해지네요.
근데 제인에어 '2'라는 건?

marine 2007-01-20 1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민음사에서 나온 책이 1,2권으로 나눠졌어요 1권에는 리뷰가 하도 많길래...^^
그리고 마린이라는 발음이 예쁘네요, 블루마린 보다는 마린이 더 듣기 좋네요^^
샬롯 브론테와 제인 오스틴 모두 각각 한 권의 책 밖에 안 읽어봐서 매우 주관적인 생각입니다만.....
아마도 오스틴이 더 속물 근성 표현을 잘 하는 것 같아요 요즘 식으로 하자면 좀 더 베스트셀러 작가답다고 해야 할까요? 일단 주인공들 미화를 안 하잖아요 속물근성이나 위선적인 면, 특히 심리 분석에 탁월하고.... 반면 브론테는 훨씬 더 기독교적이고 단아한 스타일이죠 그래서 더 반듯하고... ^^

다크아이즈 2007-01-20 17: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훙, 이렇게 명쾌할 수가. 제 머리에서 웅웅대던 걸 마린님 (이제 이렇게 불러도?^^*)이 정리해주니 이해가 쉽네요. 그럼 난 오스틴에 한 표!

marine 2007-01-20 2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고 보니 "오만과 편견" 을 다시 읽어보고 싶네요
 
행복에 걸려 비틀거리다
대니얼 길버트 지음, 서은국 외 옮김 / 김영사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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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기대를 가지고 열심히 읽었다
그러나 마지막 결론은 실망스럽다
어쩌면 행복을 찾는다는 것 자체가 답이 없는, 우문현답 같은 놀이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역자는 마지막 후기를 빌어, 행복이란 부를 가져서 내가 느끼는 감정, 즉 효용에다가 그것을 얻을 수 있는 확률을 곱하는 것이라고 했다 (베르누이라는 사람이 만든 공식)
같은 100만원을 가졌어도 이건희가 가진 100만원과 내가 가진 100만원의 감정은 하늘과 땅 차이이니, 단순히 부를 행복의 척도라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런데 재밌는 건 그 부를 얻게 됐을 때 내가 얼마나 행복하지는 나조차 모른다는 것이다
그 점이야 말로 저자의 독특한 시각인데, 저자는 현재의 나와 미래의 나를 구분해서 설명한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몇 년 후 내가 1억 짜리 차를 가지면 미치도록 행복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열심히 저축을 하고 차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고 과외로 일도 한다
그러나 막상 1억 짜리 차를 갖게 됐을 때, 과연 몇 년 전에 생각했던 것만큼 미칠 정도로 행복할까?
그건 알 수 없다
미래를 예측하기 위해 우리는 전두엽의 상상 능력을 사용하지만, 우리의 뇌는 매우 부정확한 데이터를 가지고 계획을 세우고 상상하기 때문에 예측과 결과가 맞을 확률은 낮은 편이다
뭐, 당장 나 자신만 봐도 그렇다
엄청나게 기대했던 데이트가 정말로 기대 수준을 충족시킨 적이 몇 번이나 있었을까?
언젠가 미친듯이 사랑했던 남자가 있었는데, 그와 데이트하면서 가장 좋았던 시간은 집 앞에서 그의 차를 기다리던 시간이었다
자주 인용되는 셍텍쥐뻬리의 어린 왕자에 이런 말이 나온다
너를 네 시에 만난다면 나는 세 시부터 행복해진다고
그런데 저자의 설명을 빌리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 그렇다고 한다
소풍가기 전날 밤이 제일 흥분되는 것과 똑같은 이치다

 

왜 우리는 이처럼 다르게 예측하는 걸까?
뇌가 정보를 받아들일 때 전부 저장을 하려면 아마 몇 년만 살아도 용량 초과에 이를 것이다
우리의 뇌는 똑똑하게도 경험을 압축한 후 몇 개의 키워드만 입력한다
알집 프로그램을 생각하면 될 것 같다
그래서 나중에 회상하려고 할 때 일부를 꺼낸 후 상황에 맞게 재구성한다
그러고 보면 100% 정확하게 기억하는 경우는 거의 없는 것 같다
특별히 인상깊게 본 것, 중요하게 생각한 것에 대해서는 대충 비슷하게 회상하지만, 그 외의 주변 풍경은 정황에 맞춰 꾸며 낸다는 것이다
그러니 슈퍼갈 때 마주친 옆집 아줌마가 무슨 옷을 입었는지 정확히 기억을 못하게 된다
그렇지만 또 아주 맹탕으로 꾸며내는 건 아니고 대충 비슷하게는 생각해 내기 때문에 법원에서도 목격자들의 진술을 증거로 용인하고 있다

 

저자는 우리의 뇌가 눈과 상호작용을 한다고 설명한다
뇌는 상황을 나에게 유리한 쪽으로 해석한다
그렇지만 완전 미친 놈이 아니고서야 불리한 상황을 무조건 유리한 쪽으로만 해석하지는 않는다
이런 극단적인 낙관주의자는 현실 파악을 제대로 못해 대처능력이 떨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뇌는 눈이 받아들인 현실을 어느 정도 가공한 후 가능하면 유리한 쪽으로 인지시킨다
합리화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다
여우와 신포도 우화처럼 말이다
인간이 매우 자기중심적이면서도 어느 정도 현실감각을 유지하고 사는 것은, 다 뇌와 눈의 조화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데 사실 나는 이 자기합리화에 서툰 편이다
일어난 현실을 나에게 유리한 쪽으로 해석해 버리는 게 속편할텐데, 거의 불리한 쪽으로 받아들이므로 걱정 근심이 많다
저자는 이것도 방어기제의 일종이라고 설명한다
사실 나도 그런 이유로 최악의 상황을 상상한 후 실제가 그 보다 나으면 최악은 면했다고 위안하는 편이다

 

저자는, 사람들이 자신을 매우 특별한 존재로 생각하고 있지만 결국 인간은 다 거기서 거기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어설픈 상상으로 미래의 감정 상태를 예측하기 보다는, 차라리 그것을 먼저 겪고 있는 현재의 다른 사람이 어떤 상태인지 관찰해 보라고 한다
내가 느끼는 것과 남들이 느끼는 감정이 어떻게 다를 수 있냐고 흥분하는 사람도 있겠으나, 저자의 실험에 따르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비슷하게 반응한다
사실 나도 아빠를 보면서 저 모습이 몇 년 후의 내가 아닌가 싶을 때가 있다
아빠는 취향이나 신념, 사고방식 등이 나와 매우 비슷한 사람이다
부모 자식 간이니 닮는 게 당연하면서도 흡사 놀라울 만큼 성향도 비슷하고 생각하는 방식도 닮아서 가끔 나도 놀랜다
요즘 드는 생각은, 내가 50대가 되면 딱 아빠처럼 늙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그래서 아빠를 자주 관찰하게 되고 아빠가 하는 얘기들은 나도 신뢰감을 가지고 경청하는 편이다
저자는 여기서 범위를 확대시켜 대부분의 사람들이 비슷하게 느낀다고 설명한다
다른 사람이 현재 겪고 있는 경험의 느낌을 토대로 미래의 내 감정을 예측하라, 이게 바로 저자의 결론이다

 

이기적 유전자에서 알게 된 밈이라는 개념을 저자도 쓰고 있다
개인의 행복과 사회의 행복은 일치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회의 유지를 위해 꼭 필요한 신념들이 있다
그래서 사회는 그 신념이 개인에게도 좋은 것이라는 생각을 전파시킨다
신념이 정확한 것일수록, 안정된 사회일수록 신뢰감이 생겨 더욱 쉽게 확산된다
이를테면 결혼이나 자녀를 낳으면 행복하다는 신념이 그렇다
결혼 생활 내내 행복한 것도 아니고, 꼭 자녀가 있어야 결혼 생활이 행복하게 유지되는 것도 아니다
case by case고 개인마다 생각이 다를 것이다
그러나 안정적인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남녀가 가정을 이루어 그 안에서 2세를 양육시켜 사회에 내보내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므로 사회는 끊임없이 개인에게 결혼해서 애를 낳아야 진정한 행복을 찾게 된다고 주입시킨다
특히 개인의 선택을 존중하지 않는 한국 사회에서는 이 신념이 서구보다 훨씬 널리 퍼진 것 같다
또 이런 이유로 동성애 가족이나 싱글맘 등도 쉽게 용인되지 않는 것 같다
확실히 밈은 독특한 설명체계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다시 한 번 도킨스의 책을 참조할 생각이다

 

왜 내 예측이 항상 빗나가는지에 대한 설명은 훌륭한데 그 대안이 별 게 없다는 사실이 좀 슬프다
그래도 우리는 현실에 대한 면역력이 충분하기 때문에 아주 불행한 경우를 당하더라도 왠만하면 적응해서 살아갈 수 있다는 말이 약간의 위안이 될까?
어찌 보면 행복은 너무 추상적이고 가변적인 감정, 혹은 상태라 진정한 행복을 얻는다는 건 뜬구름 잡는 일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다만 잘못 예측하기 쉬운 미래의 나를 위해 현실의 나를 너무 닦달하지 말라는 정도로만 생각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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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덴의 용 - 인간 지성의 기원을 찾아서 사이언스 클래식 6
칼 세이건 지음, 임지원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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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칼 세이건이라고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악령이 출몰하는 세상" 을 매우 지루하게 읽은 데 비해, "에필로그" 나 "에덴의 용" 등은 퍽 재밌게 읽었다
어려운 내용을 어렵지 않게 설명하는 것, 과학 저술가들이 가져야 할 가장 큰 덕목이 아닐까 싶다
처음 제목을 들었을 때 무슨 내용인지 전혀 감이 안 잡혔었다
얼핏 생각하기에, 진화에 관한 내용이 아닐까 싶었다
역시 생물학에서 진화가 빠질 수 없는 핵심임은 분명한데, 그 중에서도 이 책은 뇌에 관한 내용이다
역자가 우려한 대로 30여년 전에 쓰여진 책이라, 최신 뇌의학의 성과를 따라잡지 못할까 봐 걱정했지만, 큰 문제는 없었다
또 역자가 성실하게 주석을 달아준 덕분에 많이 보완이 됐다

 

항상 느끼는 바지만, 교과서에서 배운 것과 책에서 읽은 것은 느낌이 참 다르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정신분열증 중에 파과형이라는 게 있다
쉽게 말해 완전히 미치광이를 뜻한다
그런데 대체 파과가 무슨 뜻인지 전혀 감이 안 잡혔고 심지어 파괴형을 잘못 썼다고 이해하기까지 했다
나처럼 생각하는 필자가 있었는지 어떤 책에는 정말 파괴형이라고 나오기도 했다
그런데 오늘에서야 비로소 그 뜻을 알았다
破瓜란 오이를 깨뜨린다는 뜻으로, 오이 瓜 를 쪼개면 여덟 八자가 두 번 나오니, 곧 이 팔 청춘, 십 육세를 뜻한다고 한다
여자가 성교를 할 수 있는 나이이기도 하다고 한다
그러니까 파과란 사춘기 혹은 청춘을 의미하는 단어다
영어로는 hebephrenic인데, hebe는 사춘기라는 뜻이고 phrenic은 mental 즉 정신 상태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파과형 혹은hebephrenic은 사춘기적 특성, 곧 질풍노도의 시기와 비슷한 정도의 날뛰는 감성 같은 걸 의미한다
hebe가 사춘기를 뜻하는 이유도 그리스 신화에서 나왔다
이런 의미를 모르고 무조건 외웠으니 공부가 즐거웠을 리 없다
사지를 의미하는 limb이라는 뜻도 바로 주변부라는 것을 알았다
몸통에 비하면 팔다리는 주변부인 셈이다
또 limbic system 즉 변연부의 의미가 중뇌에 비하면 주변이라는 의미라고 한다
팔다리를 의미하는 limb과 뇌 속의 limbic system이 같은 의미였다
이런 걸 알게 될 때마다 동양인이 서양의 학문을 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새삼 느끼게 되고, 공부를 잘하는 사람들은 바로 이런 단어의 뉘앙스를 이미 알고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언젠가 연세대학교 내과 교수를 하다가 제약회사의 이사로 스카웃 된 여자의 인터뷰를 본 적이 있다
그녀는 공부하는 게 너무 즐거워 줄창 공부만 하다가 졸업을 했다고 한다
이제 보니 아마도 그녀는 의학의 이런 세부적인 곳에서 흥미를 느끼지 않았을까 싶다

 

책의 핵심 내용은, 뇌가 진화해 왔다는 데 있다
내가 항상 궁금해 했던 것이 바로 동물들도 감정이 있는가이다
요크셔테리어를 키우면서 애정을 쏟고 있는데 과연 이 강아지는 내가 자기를 사랑한다는 걸 알고 있을까?
누군가의 표현처럼 그저 인간 혼자서 자기만의 관점에서 애정을 퍼붓고 있는 건 아닐까?
말하자면 지극히 인간적인 사고 방식으로 말이다
만약 개가 인간과 감정 교류를 한다면, 다른 동물은?
토끼는? 개구리는? 어디까지 감정의 교류가 가능한 걸까?
세이건은 변연계에서 정서를 관여하므로 변연계가 발달한 포유류와 조류까지로 본다
뇌도 진화를 거치는데 가장 기본적인 구조가 뇌간이나 척수 등과 같은 신경 지지대다
척추동물의 가장 아랫층을 형성하는 어류를 생각하면 쉽다
그 다음이 좀 더 발달한 구조로 중뇌를 포함한 R-복합체이다
아마도 파충류의 뇌란 뜻으로 R-복합체라고 이름붙인 것 같다
그 다음이 시상, 시상하부, 편도, 뇌하수체, 해마 등을 포함한 변연계다
바로 이 부위에서 감정이나 애정, 단기 기억 등을 관장한다
양서류까지는 변연계가 없는데 비해, 파충류는 약한 정도의 변연계 기능을 갖고, 조류부터는 확실하게 있다고 한다
R-복합체가 성적 본능이나 공격성, 위계 질서, 관습 등을 관장하는데 비해 변연계는 기억, 공포, 정서, 이타적 행위 등을 조절한다고 한다

 

재밌는 점은, 성행위와 과시 욕구의 관계다
내가 항상 의문시 했던 점이 바로 이건데, 영화에서 보면 오르가즘에 도달한 남자들이 욕을 해댄다
미국 영화에서는 Fuck you를 외치고, 한국 영화에서는 씨발이라고 중얼거린다
특히 자위 행위할 때 이런 욕을 많이 쓴다
성적 흥분이 최고조에 이르면 기분이 그만큼 최고에 달한 건데 대체 왜 욕을 하는지 좀 의아했었다
그런데 세이건이 이것들의 상관관계를 설명해 준다
fuck이 원래 찌르다라는 게르만어에서 나온 단어라고 한다
그러니까 fuck you는 너를 찌르겠다, 혹은 너를 공격하겠다, 지배하겠다, 이런 성행위나 지배 본능과도 연결된 단어라는 뜻이다
다람쥐원숭이는 무리들 앞에서 발기를 함으로써 자신의 서열을 과시한다
부풀어 오른 음경을 보여 주는 것이, 성행위를 하겠다는 의미가 아니라 내가 이만큼 강하다, 혹은 너희를 지배한다 이런 의미라고 한다
성욕과 위계 질서, 영토 본능, 공격 욕구 등이 모두 R-복합체라고 부르는 부위에서 관장한다는 걸 생각해 보면, 성행위를 할 때 욕을 하는 이유를 알 수 있다
다른 해석도 있겠지만 나는 오랜 숙제를 푼 기분이다

 

변연계보다 더 진화한 뇌의 형태가 바로 신피질이다
인간의 이마가 오스트랄로피테쿠스 등에 비해 튀어나온 이유도 바로 이 신피질 더 정확히는 전두엽 때문이다
전두엽은 사고를 관장하는 중추다
특히 인간과 다른 동물을 구분해 주는 중요한 기능인 예측하기과 계획 세우기를 가능케 한다
미래를 예상하기 때문에 불안이라는 감정도 생기고 앞으로의 재앙을 피하기 위해 장기적인 계획도 세울 수 있다
두정엽은 몸의 내제적인 감각이나 (이를테면 위치감각) 공간 감각을 담당하고, 귀 쪽에 위치한 측두엽은 여러 지각, 특히 언어 쪽을 담당하며, 뒷쪽에 위치한 후두엽은 인간의 가장 중요한 감각인 시각을 맡는다
재밌는 건, 양서류는 단지 망막에서 사물을 인지한다고 한다
반면 인간의 눈은 물체를 받아들인 후 후두엽에서 해석한 후 그것을 인지한다
읽기와 쓰기 같은 상징언어를 이해하는 것은, 다 두정엽 덕분이다
이처럼 뇌는 각 영역마다 기능 분화가 되어 있고, 서로 연결되어 겹치는 부분도 많다고 한다

 

뇌의 기능을 지도로 나타낸 그림을 보면, 제일 많은 부위를 차지하는 게 바로 엄지 손가락과 입이다
다른 손가락에 비해 짧고 뭉툭한 이 엄지야 말로 인간이 도구를 사용할 수 있게 만든 일등 공신이다
발성기관인 입의 중요성은 곧 언어 사용으로 이어진다
언어야 말로 인간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찬미되어 왔지 않은가?
물론 지금은 좀 수정되야겠지만
인간의 언어를 배운 귀여운 침팬지 워셔, 라나, 루시에 관한 얘기가 이어진다
동물도 언어가 있는지, 배울 수 있는지 알아 보려고 실험을 했다
그런데 이들의 입 구조는 언어를 사용하기에 부적합 했다
가드너 부부는 침팬지의 발달된 손의 특성을 이용해 수화를 가르치기고 했다
놀랍게도 이 침팬지들은 200여 단어를 기억하고 심지어 문장까지 만들어 냈다!!
정말 놀랍지 않은가?
침팬지도 추상적인 사고가 가능하고 언어를 쓸 수 있다는 게 증명된 셈이다
이런 사진이 실렸다
캔디를 주자 침팬지가 달콤하다는 뜻을 수화로 전달한다
수박을 주자 달콤한 음료라는 표시를 한다
watermellon이라는 수박의 뜻과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가?
침팬지의 수화 터득 능력에 관한 책을 보고 싶어진다

 

난 가끔 이런 상상도 한다
강아지를 키우면서 가장 안타까운 점이, 네 발로 걷기 때문에 손을 전혀 이용하지 못하는 점이다
손을 쓸 수 있다면 우리의 교감이 더 강해지지 않을까?
이를테면 같이 식탁에 앉아 밥을 먹는다든지 하는 식으로 말이다
그래서 가끔은 침팬지나 원숭이를 키워 보면 어떨까 싶다
일본에서는 원숭이도 심심치 않게 키우는 것 같던데 왜 이들은 반려동물로 널리 퍼지지 못했을까?
그런데 사춘기가 된 침팬지는 인간에게 큰 위협이 되기 때문에 같이 자랄 수 없다고 한다
인간보다 거대 유인원이니까 공격 본능을 제어하기 어려운 모양이다
좀 잔인한 생각인지 모르겠으나 소형견처럼 품종 개량을 하면 안 될까?
아, 내가 미쳤나 보다, 이런 생각을 하다니
동물 실험도 금지하자는 마당에 인간과 거의 비슷한 친척뻘인 유인원들에게 이런 잔인한 생각을 품다니...

 

그런 점에서 다음과 같은 대목은 세이건의 통찰력이 돋보이는 부분이다
철창 속에 갇혀 있는 유인원들을 보러 간 그는, 갑자기 침세례를 받는다
거기서 그는, 1920년대 비인간적인 감옥을 소재로 한 (이를테면 알카트라즈 같은) 영화를 떠올린다
인권이란 개념이 무시되고 죄수들은 좁은 철창에 갇힌다
사람이 지나가면 침을 뱉고 욕설을 하고 철창을 두드린다
연구소 안의 유인원들과 똑같지 않은가?
인권의 개념을 어디까지 적용해야 하는가에 대한 대답은, 이제 인간은 물론이고 좀 더 넓은 범위까지 확대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동물 실험은?
생각하면 한이 없지만 어쨌든 진보나 인권의 개념이 점차 확장되고 있음은 분명하다
당장 사형제도만 해도 비윤리적인 것으로 점차 사라지고 있지 않은가?
그러고 보면 동물원이라는 것도 매우 폭력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마지막 장은 의사과학에 대한 경고로 끝이 난다
역시 세이건 답다
과학은 진리를 탐구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정책적인 면에서 어떻게 이용되느냐는 또다른 문제다
인문학과의 대립 또한 잘못된 비교가 아닐까 싶다
학문의 성격적 차이는 있겠으나 서로 대립되는 분야는 아닌 것 같다
모두 진리를 찾아가는 과정이 아니겠는가?
그런 면에서 보면 인문학과 과학의 갈등 관계를 유난히 부각시키는 분위기가 좀 불편하다

 

전체적으로 쉽게 읽을 수 있는 훌륭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진화야 말로 생명의 기본적인 발전 방향이라는 점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학교 다닐 때 용불용설은 틀리고 적자생존이 맞다는 얘기를 배웠는데 그 때는 참 이해가 안 갔다
획득형질이 유전되지 않는다면, 대체 어떻게 부모 세대와 다른 형질이 전해진다는 건가?
그 비밀이 바로 돌연변이다
학교 다닐 때는 우연히 일어나는 돌연변이가 대체 진화에 얼마나 영향을 끼친다고 돌연변이에 의한 적자생존을 지지하는지 이해가 안 갔다
그런데 책을 읽고 보니 돌연변이야 말로 가장 중요한 핵심 원리임을 새삼 느꼈다
세이건에 따르면 생식세포가 유전될 때 약 10% 정도의 돌연변이가 생기고 이 중 환경에 유리한 쪽이 계속 살아남아 진화된다고 한다
잘못된 돌연변이를 차단하기 위해 몸에서 자체적으로 보수 기능을 하고 유익한 것은 계속 전달된다
그러고 보니 DNA 수준에서 설명될 일이다
유전학이야 말로 최첨단을 달리는 학문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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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1-15 1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재밌겠다.

marine 2007-01-15 1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재밌어요 꼭 읽어 보시길~~
 
예술을 품고 유럽을 누비다 - 80일 간의 유럽 예술기행
이유리.서효민 지음 / 아트북스 / 2006년 7월
평점 :
절판


작년 여름이었을까?
우연히 서점에서 이 책을 발견한 뒤 무척 읽고 싶었었다
일단 책 판형이 크다는 점에서 마음에 들었고, 여행기라는데 400페이지 가까이 될 정도로 분량이 빵빵해서 내용도 알찰 거라는 기대를 했다
또 잠깐 들춰 봤더니 사진도 꽤 많이 실린 게 아닌가?
그래서 내심 사고 싶었지만 사진 때문인지 가격이 꽤 비싸길래 도서관에 신청만 해 두었다
보통 신간 신청을 하면 한 달 정도 걸려서 입고가 되는데, 이 책은 정기 도서 구입 목록에 들어있던 책이라 이제서야 빌려 볼 수 있었다
그러니까 나는 이 책을 읽기 위해 무려 반 년을 기다린 셈이다

 

도서관에서 책을 빌린 후 시간이 좀 지나긴 했지만 오래 기다린 끝이라 가벼운 흥분이 일었다
책을 읽기 전의 느낌은 대략 이런 거였다
나이도 어린 처자들이 무려 석 달 가까이를 유럽에서 미술관만 돌아다니면서 여행을 하다니, 너무 부럽고 과감한 시간 투자가 놀랍다...
사실 이런 여행이야 말로 내가 꿈꾸었던 바로 그 여행이 아니던가?
한 달의 짧은 유럽 여행 후 미술관에 대한 목마름 때문에 언제나 나에게 있어 여행은 미술관 투어였다
그러나 유럽은 일단 비행기 삯만으로도 잠깐 휙 둘러 보고 올 곳이 아닐 만큼 먼 곳이고, 거기다가 직장을 가진 후로는 돈은 되더라도 도저히 시간을 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더욱 그녀들의 미술관 투어 이야기에 기대를 많이 걸게 됐다
남들은 어떻게 시간과 돈을 쪼개 다녀 오는가?
더구나 미술 전공 학생들이면 보는 안목도 남다를 거라고 기대했다
그래서 두 시간 정도 걸리는 고속버스 안에서 기대를 잔뜩 품고 한 손에 커피를 든 채 책을 펴들었다
(버스 안 손님들은 전부 잠이 들었다
버스 타면 항상 신기한 것이, 사람들은 이 개인적인 시간에 왜 다들 잠만 자는 것일까?
일에 치여 잠을 한 숨도 못 자는 것도 아닐텐데 왜 차만 타면 자는 걸까?)

 

그러나...
역시 기대를 너무 한 게 문제였다
이런 말랑말랑한 책을 읽을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책을 편다는 건 참 보통 일이 아닌데 의외로 쉽게 출판되는 경우가 많다
내가 생각할 때 책을 쓰려면 어느 정도 문장력이 있어야 한다
이를테면 이것과 비슷한 여행기인 "노플랜 사차원 여행기" 같은 책은, 그런대로 문장력이 있는 편이다
독자가 읽기에 부담이 없을 정도의 문장력이 있고 또 위트가 있다
그런데 솔직히 이 책의 저자는 글 쓰는 연습을 더해야 할 것 같다
글빨 좋은 사람만 책 내라는 법은 없지만, 하여튼 문장력 부분에서 실망스럽다
그러고 보면 "내가 사랑하는 클래식" 을 쓴 박종호씨는 비교적 글을 잘 쓰는 편에 속한다
이야기의 재밌고 재미없고를 떠나서 눈에 거슬리지 않게 문장을 이어가는, 글 쓰는 솜씨 같은 거, 이런 면에서 아쉬운 책들이 많다

 

또 한 가지 의문은, 공동 집필로 되어 있는데 한 사람만 글을 썼다는 점이다
여행은 둘이 떠났고 그 중 한 사람 글만 실려 있는데 왜 공동 저자로 이름이 나왔을까?
한 사람에게 미안해서 그랬나?
기왕이면 두 사람의 육성이 모두 실려 있었으면 좋았을텐데 아쉬운 점이다
처음에 읽을 때 난 혹시 저자가 유리라는 친구를 이성 친구로 생각하나 싶었다
유리는 이랬을 것이다, 저랬을 것이다 하면서 친구의 생각을 대신 얘기해 주니까
왜 유리라는 친구가 직접 글을 안 썼는지 모르겠으나 기왕이면 둘이 돌아가면서 글을 썼으면 좋았을텐데 아쉽다
그러고 보면 책을 내서 베스트셀러가 되려면, 최소한 주목이라도 끌려면 아이템을 잘 잡아야 하는 것 같다
이 책 역시 미술을 전공한 두 여학생의 유럽 예술기행이라고 주제를 잡지 않았다면 그저 그런 평범한 책으
로 독자의 눈길을 받기 어려웠을 것이다
책표지나 디자인 면에서는 비교적 좋은 점수를 주고 싶은데, 솔직히 문장력으로 보면 너무 초보티가 많이 난다
일단 독자의 눈길을 사로잡아야 한다는 점에서 보면, 소재 선정은 독특했으나 내용은 매우 평범하다
그러고 보면 손미나씨가 쓴 "스페인, 너는 자유다" 역시 실망스럽다
방송인이 쓴 책이니 특별한 글솜씨가 없는 게 당연하겠지만 그래도 김지은씨의 "서늘한 미인" 정도는 될 거라 기대했었다
아마도 아나운서라는 점, 또 아직까지 스페인은 한국에 덜 알려졌다는 점에서 관심을 끈 것 같다
그렇다고 이런 책을 특별히 비판하는 건 아니다
다양한 수준의 독자층이 존재하는 만큼, 또 거기에 대응할 수 있는 다양한 필자층이 있는 것도 좋은 일이다
다만 어떤 한 분야의 책, 한 수준의 책만 너무 몰빵되는 것 같아 다양성의 측면에서 아쉽다는 얘기다

 

책에 대한 전반적인 평가는 이쯤으로 하고, 책에 대한 개인적인 감상을 써 보자면....
일단 너무 부럽다
나에게도 이 정도의 시간을 낼 수 있는 백수 시절이 바로 작년에 있었다
본의 아니게 회사를 그만둔 후 5개월 정도의 시간이 났고 그 중 얼마는 평소에 소망하던 여행을 떠날 수 있었다
많은 돈은 아니었지만 하여튼 결심을 한다면 그 정도는 쓸 돈과 시간이 분명히 있었다
그렇지만 결국은 떠나지 못했다
새 직장을 잡아야 한다는 부담감, 서울로 가면 집을 얻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도저히 쉽게 여행을 결심할 수가 없었다
일정을 짧게 잡으면 그런대로 떠날 수도 있었겠으나 안 그래도 백수인데 놀러 가서 펑펑 돈을 쓸 수 없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결국은 말 그대로 백수로 방바닥 긁다가 끝났다
그러고 보면 여행이라는 것도 일종의 투자인 것 같다
그런 면에서 나는 박종호씨 같은 분이 참 부럽다
의사라는 직업이 주는 금전적 여유도 있었겠으나, 거기서 번 돈을 클래식 같은 고상한 취미에 쏟아 붓는 사람은 드물다
대부분 사회적 지위나 친분을 위해 골프에 쏟거나 차에 투자한다
또 아마도 대부분의 다른 직종을 가진 사람들 역시 집 사고 애들 교육비에 쓰고, 하여튼 돈 쓸 곳은 아마도 널려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한정된 재화를 한정된 곳에 쓸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어디에 투자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가치관이 보인다고 할 수 있다
적금 통장에 붓는 사람, 주식을 사는 사람, 뮤지컬 보는 데 쓰는 사람, 여행을 떠나는 사람, 차 사는 데 쓰는 사람, 그리고 불우 이웃 돕는 데 쓰는 사람...
어떤 것에 우선순위를 두느냐는, 어쩌면 그 사람을 판단하는 잣대가 될지도 모른다

 

지난 번 여행에서 안 가 본 곳이 바로 스페인이다
스페인은 남유럽에 위치해서 그런지 프랑스나 영국 등과는 또다른 느낌인 것 같다
뮌헨에 갔을 때 알테 피나코텍에 못 간 것도 아쉽다
여행에 너무 지쳐 있었는지 뮌헨에 도착해서는 호텔에서 잠만 잤다
영국 역시 마지막 일정인지라 피곤해서 에딘버러에 못 갔다
체코에서도 그 유명한 인형극을 못 봤다
당시에는 최대한 많은 곳을 도는 배낭여행이 유행이라서, 일정이 너무 빡빡했다
그래도 한 번에 여러 나라를 맛이라도 보고 온 게 다행스럽긴 하지만, 하여튼 여행 도중 체력이 바닥나서 무척 힘들었다
더구나 미술관 투어, 건축물 투어 이런 식으로 주제를 정해 놓고 갔으면 유익했을텐데 무조건 남들 가는대로 따라가는 식이라 아쉬운 점이 많다
지금 같으면 한 곳이라도 차분히 보고 돈을 좀 더 들여서라도 편안한 여행을 즐겼을 것이다
또 가능하면 가이드 투어를 했을 것이다
가이트 투어는 깃발부대다, 진정한 여행이 아니다, 하지만 그 나라 문화를 짧은 시간에 돌아 보기에, 가이드 투어는 상당히 유익하다
특히 대만과 일본에 갔을 때 가이드의 상세한 설명이 없었다면 아마도 대충 풍경만 보고 돌아왔을 것이다

 

다시 언제쯤 여행을 떠날 수 있을까?
요즘은 저가 항공사도 많이 나오니 예산 세우기가 더 쉬울 것 같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여행 하면 유럽의 미술관 투어였는데 요새 끌리는 곳이 바로 이집트다
확실히 크기는 사람을 압도하는 것 같다
직접 피라미드를 눈으로 본다면 아마도 이집트 문명에 대한 기존의 생각이 확 바뀔 것 같다
누가 여행은 삶의 비타민이라고 했던가!!
갑자기 막 떠나고 싶어진다
덧붙이고 싶은 말은, 사진을 좀 잘 찍고 싶다는 거다
이 책에도 본인들이 찍은 사진이 많이 실렸다
나는 인물 사진 찍는 걸 싫어하기 때문에 유럽 가서도 별로 안 찍었다
대신 풍경 사진을 잘 찍으면 훌륭한 기록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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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1-15 04: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부지런히 다독하시는 것 같아서 존경스러워요. 김지은씨 좋아하는데..MBC즐거운문화읽기에서 진행 참 잘했어요. 서늘한 미인 좋아요? 저도 문장력없는 미술관련책 싫어요. 박종호씨 기억해놔야겠어요.

marine 2007-01-15 1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늘한 미인" 읽을 만 하답니다 현대미술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됐죠
그리고 박종호씨, 글 잘 씁니다 문장력이 된다고 해야 하나요?

kleinsusun 2007-01-16 1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피라미드를 보고 시퍼요!^^
아....가고 싶은 이집트!!!

marine 2007-01-16 18: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선님은 저보다 기회가 많으실 것 같아요~~

시골영감 2009-07-03 17: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리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