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외국어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김진욱 옮김 / 문학사상사 / 1996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드디어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을 읽었다

"드디어"라는 표현을 쓰는 까닭은 그 유명세에 비해 일본 작가라는 편견 때문에 읽고 싶다는 생각이 안 들었기 때문이다

일본 작가들의 책은 주로 실용서가 많은데, 그 내용이 조잡하다는 생각이 들어 별로 안 좋아한다

소설은  "실낙원"만 읽었던 것 같다

그런데 실제로 무라카미 외에는 한국에 뿌리 내린 작가가 없다고 한다

아마 그래서 접할 기회가 더 적었던 것 같기도 하다

 

처음에는 "해변의 카프카"를 읽을까 했는데, 도대체 그가 유명세만큼 괜찮은 작가인지 궁금해 먼저 에세이집을 읽기로 했다

결론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역자 후기처럼 확실히 그를 대표하는 무국적성, 상실감 등등의 언어가 딱 들어맞는 책이다

제목도 너무 멋지다

"슬픈 외국어", 참 감각적이다

그가 미국 프린스턴 대학에 교환 교수로 4년간 있으면서 느낀 점을 쓴 에세이들인데, 확실히 작가의, 그것도 베스트셀러 작가의 기행문은 다르다

미국 사회를 보는 깊이가 있다고 해야 할까?

 

미국 문화에 젖어 산 세대지만, 또 기꺼이 외국 생활을 원해서 간 거지만 외국어는 외국어일 따름이다

그의 표현을 빌리면 외국어를 아무리 잘 해도 절대 모국어의 "자명성"을 가질 수는 없다

사실 내가 외국 나가서 살겠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해 보지 않는 까닭도 바로 그 모국어의 "자명성"을 외국어에서는 절대 얻을 수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자명성"이라는 일본어가 우리말로 적당히 번역되지 않은 것 같긴 한데, 어쨌든 의미는 충분히 전달된다

이 나이에 영어를 아무리 잘 한다고 내 사고 체계가 영어식으로 바뀌지는 않겠지

한국어가 아니면 도저히 사유할 자신이 없다

그런 의미에서 외국 생활을 기꺼이 자처하는 하루키에게 영어는 유창한 실력과는 별개로 "슬픈 외국어"일 뿐이다

 

미국 대학 교수들의 스노비즘은 좀 의외였다

내가 생각하는 미국 교수들은 자유롭고 격식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물론 서부 쪽은 그렇다고 하는데 하루키가 있었던 동부 지역은 교수라면 이러이러 해야 한다는 격식들이 많았다고 한다

제일 웃긴 건 버드 와이저를 마시면 싸구려 느낌이고 교수는 하이네켄 같은 유럽 맥주를 마셔야 한다는 거다

물론 상표가 주는 이미지는 있을 수 있지만, 최고의 지성인 집단에서 맥주 따위로 인격을 논한다는 건 너무 우습다

차도 BMW 같은 걸 타고 다니면 역시 속물로 보일 수 있고, 옷 역시 아르마니 같은 걸 입으면 지성인 답지 않다고 생각한단다

스티븐 킹의 소설 대신 에이미 탄 등의 소설을 읽어야 하고, 케니 지 대신 클래식을 들어야 한단다

교수는 돈 대신 명예를 택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또 지성인들의 집단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교양은 있어야겠지만, 틀에 끼워 맞추는 건 너무 억지스럽고 유치하다

그런데 하루키는 전통을 던져 버린 일본 교수들도 썩 좋아하지는 않는 것 같다

그래도 미국 동부 대학의 교수들은 돈에 초연하고자 하는 제스쳐라도 취하는데, 일본 교수들은 그야말로 돈이 최고다는 걸 공공연하게 드러낸다는 것이다

 

페미니즘이 서구 사회에 완전히 정착됐다는 것도 알게 됐다

"말을 듣지 않는 남자, 지도를 읽지 못하는 여자"에서도 저자가 페미니스트들의 공격을 받을까 봐 대단히 조심한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하루키의 글을 읽으면서 페미니즘이 공공연한 지배 이념이 됐다는 느낌이 든다

그의 아내는 유명한 동양 남자들의 아내들처럼 남편을 support 하고 있다

그런데 그 사실을 미국인, 특히 미국 여자들에게 납득시키기란 대단히 어렵다고 한다

작품을 쓸 때 거의 아내와 공동 작업을 한다고 하면, "책에는 당신의 이름만 나오잖아요" 라고 반문한다는 것이다

대신 미국 여자들은 오노 요코를 support 하기 위해 가사와 육아를 전담한 존 레논 같은 경우에는 열렬한 지지를 보낸다고 한다

하루키는 여자도 자기 일을 가져야 한다는 일정한 틀 속에 끼워 맞추려는 페미니즘에 반발심을 드러낸다

벌써 이런 부작용이 생길 만큼 페미니즘이 성장했나 싶으니까 세월이 흐르긴 흐른 모양이다

물론 하루키의 생각에 나도 동의한다

개인은 그저 개인으로 존재할 뿐이다

사회적 틀 속에 개인을 끼워 맞추려고 하면, 맞지 않는 사람들은 사회로부터 거부당한 느낌을 갖게 된다

이데올로기는 늘 개인을 피곤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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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을 맡은 자의 슬픔 - 사회 귀족의 나라에서 아웃사이더로 살기
홍세화 지음 / 한겨레출판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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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세화의 전작, '나는 빠리의 택시 운전사'와 '쎄느강은 동서를 가르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를 인상 깊게 본 나는 그의 나머지 작품들도 몹시 읽고 싶었었다

어찌어찌 해서 미뤄 오다가 최근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는데 음, 솔직히 과히 즐겁지는 않았다

그가 제기하는 한국 사회의 문제점에 동의하지 않는 건 아니지만, 뭐랄까 전작에서 이미 충분히 써 먹은 얘기들의 재탕으로 느껴진가는 게 문제였다

한국 사회 기득권층의 보수성 내지는 수구성에 충분히 동의하고 있지만, 주장이나 논거가 감정적이고 논리정연한 맛이 없어 참신하지 않은 느낌이었다

좀 더 세련되고 시원한 문체를 기대하는 건 무리한 욕심일까?

내공이 떨어진 듯한 느낌을 준다

박노자의 '당신들의 대한민국'을 읽었을 때도 비슷한 느낌이었는데 세련된 필체의 비판이 듣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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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셸 푸코 살림지식총서 25
양운덕 지음 / 살림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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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이 책 참 어렵습니다

100페이지도 안 되는 얇은 책임에도 불구하고, 그저 입문서에 지나지 않는데도 워낙 푸코라는 철학자의 내면이 깊어서인지 쉽게 읽히지가 않습니다

자 들고 밑줄 그으면서 두 번 정독했더랍니다

그렇지만 누구에게나 자신있게 추천할 만한 책입니다

책값도 겨우 3300원에 불과합니다

3300원, 스타벅스 커피 한 잔 값도 안 되는 놀라운 가격에 이 정도의 지적 교양과 흥미를 얻을 수 있다는 건 대단한 일이죠

서점 가서 마땅히 고를만한 책이 없거들랑 (혹은 저처럼 사고 싶은 책은 많은데 주머니 사정이 딸리거들랑) 과감하게 살림 총서 시리즈 중 하나를 집어 드십시오

모든 책값은 3300원이고, 이렇게 어려운 일부 책을 제외하고는 서점 옆 커피숖에 앉아 한 시간이면 다 읽을 수 있는 가벼운 분량입니다

그렇지만 그 깊이는 가격이나 시간에 비해 대단히 깊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근대인은 흔히 생각하듯 이성적인 사고에 의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규율에 의해 길들여졌다는 게 푸코의 주장입니다

심지어 성에 대한 담론이 활발한 오늘날, 권력은 담론을 활발하게 펼치도록 유도한 후, 바람직한 방향마저 미리 제시함으로써 개인의 가장 은밀한 부분인 '성'마저도 권력의 통제 아래 둔다고 했습니다

전 이 부분 읽으면서 한 대 얻어맞은 느낌이었습니다

국가가 성을 억압한다면 도대체 왜 매춘은 고대로부터 늘 존재해 온 것인가에 대한 제 오랜 의문이 풀리는 순간이었습니다

국가, 즉 권력은 개인의 성을 마치 사회의 문제인 양 표면으로 끌러 올려 끊임없이 토론하게 만든 후 그에 대한 적절한 통제를 가하고 있었던 거죠

성을 까발리는 것만이 성해방이라고 주장하는 일부 몰지각한 이론을 시원하게 반격할 만한 내용이었습니다

그 외에도 우리가 어떻게 미시 권력에 의해 세심하게 길들여져 왔는지의 과정이 정말 치밀하고 세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꼭 한 번 읽어 보라고 권하고 싶은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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