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들메를 고쳐매며
이문열 지음 / 문이당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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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열은 껄끄러운 작가다

그의 문학적 위상이 이제는 현실 정치판에까지 미쳐 (한나라당 공천 심사 위원으로 위촉될 정도) 대표적인 보수 논객으로 수많은 분열과 논쟁을 일으키고 있다

작가의 정치적 발언은 누가 됐든지, 그 작품을 사랑하는 독자로서는 부담되는 일이다

작품과 작가를 완벽하게 분리하기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니까

홍위병 발언이라든지, 반페미니스트적인 논쟁 등으로 칼럼 등에 실리는 그의 발언들을 편하게 대하기 어렵지만, 역시 작가는 작품으로 말한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보여주는 산문집이다

 

이문열은 글을 참 잘 쓰는 작가다

또 그 작품에 깊이가 있으며 한국을 대표하는 현대 작가라는 걸 부인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수려한 그의 문장들을 읽으면서 문장 자체에 감동할 때가 참 많았다

특히 중편 정도의 분량 밖에 안 되는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은 금방 읽는 게 아까워 한 자 한 자 정성들여 읽었던 기억도 있다

"영웅 일기"라든가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 혹은 그의 여러 단편들을 읽으면서 읽는 재미에 푹 빠지곤 했다

"선택"도 반페미니스트적이고 가부장적인 사고 방식으로 논란이 많은 작품이지만 앞부분의 몇몇 구절만 빼면 재밌는 소설이었다고 기억된다

특히 사라져 가는 우리 문화에 대한 (주로 가부장적이고 조상 숭배 얘기지만) 안타까움은 여러 단편들을 통해 잘 그려져 읽을 때마다 마음이 찡하곤 하다

 

이번 그의 산문집은 주로 칼럼에 기고한 얘기들로 구성됐다

현실적인 정치 얘기도 많고 (주로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당선자에 대한 비판들) 경박한 인터넷 문화에 대한 비판도 많으며, 반미 감정에 대해서도 어이없어 한다

미국이 물러나면 안보는 어찌 할 것이냐는 식의 전형적인 보수 논리가 주를 이룬다

내 생각과는 다른 부분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감동적으로 글을 읽은 것은 미려하고 아름다운 문장들, 또 문학에 대한 깊은 애정, 그의 풍부한 학식 덕인 것 같다

나는 늘 고전을 읽지 않는 것에 대해 약간의 죄책감을 갖고 있는데, 이문열처럼 고전을 열심히 읽고 감동하는 사람을 보면 기가 죽는다

요즘은 세상에 읽어야 할 책들이 얼마나 많은데, 나는 내 수준에 맞는 책이나 부지런히 읽고, 훌륭한 고전은 직업적으로 읽어야 할 작가들에게나 맡기자는 심정으로 조금 편해지긴 했다

어쨌든 그의 독서 노트 부분을 보면서 다시금 고개가 숙여진다

직업적인 작가이기 때문에 당연히 그 정도 수준의 책들은 읽어야 하겠지만 말이다

 

역시 제일 감동적인 글은 산문집의 제목처럼 "신들메를 고쳐매며"라는 부분이었다

처음에 제목만 보고 무슨 내용인지 이해가 안 갔는데, 무척 감동스런 이야기가 숨어 있었다

이제 그의 나이는 60을 바라보고 있다

괴테나 톨스토이 등은 말년에 "파우스트"나 "부활" 같은 대작들을 썼지만, 그건 아주 특별한 천재들의 예외라는 것이다

자신이 천재가 아님을 고려하면 글쓰기 수명은 대부분의 직장인들처럼 65세가 정년임을 인정할 수 밖에 없고, 그렇다면 글을 쓸 수 있는 기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자각해야 한다

다작하는 작가라고 알려졌지만, 도스토예프스키 같은 거장들에 비하면 형편없는 수준임도 알고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제는 남은 기간 동안 필생의 역작을 쓰는데 온 역량을 쏟아 부어야 할 때라는 걸 깨달았다고 한다

이제 햇빛이 얼마 남지 않았고 가야 할 길은 아직 멀다

그 동안 문학 밖의 여러 난잡했던 일들은 잊어 버리고 (보수와 진보 논쟁에 휩싸였던 일) 신들메를 고쳐매고 부지런히 남은 길을 해가 떨어지기 전에 가야 할 때라고 말한다

노년을 바라보는 작가의 결연한 다짐이 그대로 전해져 온다

 

그가 정말 여러 복잡한 논쟁들로부터 벗어나 자신을 문학사에 길이 남게 해 줄 위대한 작품을 쓰게 되길 바란다

여전히 마지막 다짐 후에도 사회 현상에 대한 자신의 보수적인 시각을 드러내는 일과 젊은이들을 훈계하길 게을리 하지 않으나, 어찌 됐든 다른 무엇보다 자신의 말처럼 이제는 문학에만 전념하여 고전으로 남을 소설을 쓰게 되길 바란다

작가도 퍽이나 분노하고 괘씸하게 여긴 책 장례식 같은 사건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았음 좋겠다

그들의 취지는 이해하나 소설이 무슨 죄가 있겠는가

어리석은 대중의 무지를 보여 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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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문화 낯설게 읽기
기호학연대 엮음 / 문경(문학과경계)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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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미리 밝혀 둘 것은 아주 어려운 책이다

평범한 교양서를 읽는 수준의 나 정도 독자는 꽤나 헤맬 것이다

기호학이라는 학문 자체가 어렵고 도상적이며 이론적이라는 걸 알고 있지만, 그 소재가 대중 문화이기 때문에 선뜻 집어든 책인데, 절대 쉽게 읽히지 않는다

화려하게 저자들의 약력을 기술해 놓은 것만 봐도 슬쩍 기가 죽는다

 

사실대로 고백하자면 꼼꼼하게 다 읽은 건 아니다

어려워서 이해가 안 가는 부분들도 있었고, 지나치게 이론화 되어 실제적인 의미가 퇴색된 것 같다는 반발심이 드는 부분도 있었다

다만 책을 읽은 이상 어느 정도의 감상은 있게 마련이라 몇 자 짤막하게 적는다

 

누구나 흔히 알고 있는 것이지만, 광고는 늘 대중을 속인다

정우성과 고소영이 나오는 삼성 카드 광고에 사용된 소품들이 얼마나 비싼 것인가는 잘 알려진 사실이다

정우성이 타는 벤츠 자전거가 소형 자동차 한 대 값이라니, 다른 건 말 안 해도 알 만 하다

정우성은 대표적인 보보스 족으로 그려지는데 광고 기획 당시 월 300만원 정도는 저축이나 일상 생활에 상관없이 순수하게 레저 비용에만 쏟아 부을 수 있는 경제력을 가진 사람으로 설정했다고 한다

한 달에 300만원을 버는 사람도 시청자들의 다수가 아닌 마당에 순수 레저 비용으로 쓸 사람은 극히 제한되어 있다는 건 자명한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성 카드를 쓰면 당신도 정우성처럼 멋지게 보일 수 있다고 광고는 부추긴다

 

대한민국 1%가 타는 차라고 광고하는 렉스턴을 당신이 타면 바로 그 1%에 낄 수 있다고 속삭인다

광고는 끊임없이 당신을 강조한다

그저 수많은 익명의 소비자 중 한 명에 불과한 나를 콕 집어 "당신"이라고 명칭하면서 마치 한 개인을 위해 준비한 상품인 듯 선전한다

자본주의 경제를 대표하는 광고들의 본질을 파헤치는 건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 같다

 

취화선에 대한 비판도 상당 부분 동의한다

저자는 절대 취화선을 깍아 내리려는 게 아니라고 강조하지만, 임권택 감독의 작품에 대해 할 말이 많은 건 분명하다

뭐, 그만큼 거장의 작품이기 때문에 이야기할 꺼리가 많은 것이기도 하겠지

취화선은 한국의 미를 세계에 알린 작품으로 칸 영화제에서 감독상까지 받았음에도 우리 관객에게 왜 외면당했는지에 대해 분석하고 있다

베를린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받은 "오아시스"가 흥행에 성공한 것과는 반대로 수상 소식이 알려져도 취화선은 여전히 관객들로부터 외면받았다

저자는 한국의 미를 알리기 위해 지나치게 영상에 집착한 나머지, 정작 배우들의 연기나 전체적인 서사 구조가 영상미에 묻혀 버렸다고 평한다

취화선은 예술가의 삶을 너무나 정형화 시키고 속된 말로 뻔한 이야기 이상의 의미를 주지 못했다는 것이다

영화를 안 봐서 단정지을 수는 없지만, 사실 이런 느낌 때문에 안 보기도 했다

"서편제"에 대한 마광수의 비판에 상당 부분 동의했기 때문에 취화선 역시 끌리지가 않았다

 

마광수가 한참 문필을 날릴 때 (즐거운 사라로 연대에서 해직되기 이전) 지루하기 짝이 없는 영화일 뿐더러 엽기적이기까지 하다고 비판했다

딸의 득음을 위해 아버지가 딸의 눈을 멀게 하다니, 이게 말이나 되는 발상이냐는 것이다

눈이 멀어야 득음 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인데, 본인이 선택하는 것도 아니고 아버지가 딸에게 장님이 될 것을 강요한다는 게 얼마나 어이없냐고 한탄한다

사실 나도 이 부분이 무척 마음에 안 들었는데, 나름대로 이름있는 교수가 비판하니까 대리 만족을 느꼈던 기억이 난다

 

신창원에 대한 언론의 부추김도 기호학적 의미로 설명된다

신창원을 이슈화 시키고 의적으로 둔갑시킨 것도 언론이고, 또 그 현상을 비판하는 것도 역시 언론이다

사실 언론의 이런 자극적이고 모순적인 행태는 (이슈를 만들고, 다시 그것을 비판함으로써 기사를 만들어 내는 행위) 스포츠 신문 등에서 극명하게 드러나는데 유력 일간지라 해도 다를 게 없다는 것을 여러 예를 통해 보여 준다

미군 병사들이 이라크인들에게 구호품을 나눠 주는 사진을 실으면 독자들은 은연 중에 전쟁의 당위에 대해 동의하게 되고, 반대로 집을 잃고 헤매는 아이들의 사진을 실으면 반감을 품게 된다

즉 언론이 어떤 사건과 사진을 택하고, 어떤 식으로 기술하느냐에 따라 여론의 행방을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대중들이 특정 집단에 끌려 갈 만큼 어리석은 것은 절대 아니라는 말도 빼 먹지 않는다

대중들은 설득 당하는 것 같으면서도, 나름대로의 취사 선택을 통해 원하는 문화를 양산한다고 한다

대중에게 선택받은 것들은 (밀리언 셀러 음반이라든가, 베스트 셀러가 되는 책들, 혹은 수백만이 본 영화 등등) 대중의 정서와 기호에 적합하기 때문에 선택받은 것이다

대중과 언론은 (혹은 지배층은) 끊임없는 상호 작용을 통해 지배적인 문화와 이념을 형성해 간다고 한다

확실히 인터넷 등을 통해 대중은 문화를 창출해 내고 있다

광고가 판을 치고 갈수록 언론의 힘이 세지는 21세기에 숨은 의미까지 간파하는 똑똑한 소비자 내지는 독자가 되기는 무척 어려운 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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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벌이의 함정 - 중산층 가정의 위기와 그 대책
엘리자베스 워런, 아멜리아 워런 티아기 지음, 주익종 옮김 / 필맥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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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읽는 책들은 유별나게 나의 감성을 깨우는 것 같다

어제도 이 책을 읽은 후 정신이 번쩍 드는 기분이었다

세상 살기 정말 만만치 않아...

 

제목부터가 도발적이다

"맞벌이의 함정"이라...

왜 둘이 버는데 계속 빚을 지고, 사는 건 더욱 척박해지는 것일까?

정말 우리들은 신용카드가 주는 과소비에 취해 있는 것일까?

다행스럽게도 (그러나 사실을 알고 보면 더욱 불행하게도) 저자들은 우리 사회가 "악덕 채무자 신화"에 속고 있다는 사실을 간파한다

우리가 지난 세대보다 조금 더 많이 쓰고 있지만, 그건 말 그대로 아주 조금일 뿐이다

두 사람이 함께 버는 소득에 비하면 소비가 크게 증대하지 않았다고 한다

오히려 과소비 부분은 가정 경제가 어려워지면 얼마든지 줄일 수 있다고 한다

실직, 질병, 이혼 등으로 한 사람의 소득이 사라질 때 절대 줄일 수 없는 고정 비용의 증가 때문에 많은 미국의 중산층 가정들이 파산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고정 비용을 차지하는 가장 큰 부분은 역시 집값이다

땅덩어리 넓은 미국도 우리처럼 집값을 지불하기 위해 몸부림을 치고 있다

우리나라가 강남에 입성하기 위해 허리가 휘도록 대출금을 갚아가는 반면, 미국은 시내를 떠나 교외의 주택지구로 나가기 위해 애를 쓴다

도심은 슬램화 되어 범죄가 들끓고, 무엇보다 가난하고 위험한 유색 인종들이 많아 공립학교 교육이 형편없기 때문에 부유하고 안전한 백인들이 사는 교외로 나가 자녀들을 좋은 학교로 보내기 위해 미국 중산층들은 자신들의 소득 대부분을 집값에 쏟아 붓는다

더 좋은 학교에 보내기 위한 부모들의 노력은 비단 우리 사회만의 문제는 아닌 모양이다

"강남 엄마"의 반대말이 "그냥 엄마"라고 하더니만, 미국 엄마들도 교육 문제로 몸살을 앓고 있다

한 세대 전만 해도 대학을 나와야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21% 정도 됐는데, 요즘은 97% 이상이 대학과 성공이 정비례 관계라고 믿는다

주립 대학은 받을 수 있는 학생 수가 한정되어 있고, 사립 대학은 등록금이 워낙 비싸기 때문에 미국 중산층들은 대학에 보내기 위해 어렸을 때부터 좋은 학교에서 공부시키길 원한다

 

미국 공립 교육이 사립에 비해 얼마나 형편없는가는 여러 연구들을 통해 드러나고 있다

특히 도심의 학교들은 총기 난사 등으로 대표될 정도로 자녀들에게 위험하기까지 하다

당연히 부모들은 교외의 안전한 주택 지구로 옮겨 자녀들이 좋은 학군의 학교로 다닐 수 있게 되길 바란다

교외 지역의 주택들은 한정되어 있고, 수요는 늘어나기 때문에 집값이 천정부지로 치솟는 건 당연한 결과다

그런데 여기서 맞벌이들이 함정에 빠지게 된다

혼자 벌 때는 비싼 교외 주택을 갖는 걸 상상도 못 하다가, 한 사람이 더 벌게 되자 그 소득을 집값에 쏟아 부을 수 있게 된다

입찰 경쟁이 시작된 것이다

우리 집만 맞벌이를 하는 게 아니라 거의 모든 집이 둘 다 벌기 때문에 다들 입찰 경쟁에 뛰어들 수 있다

당연히 집값은 계속 오를 수 밖에 없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붉은 여왕의 세계가 나온다

이 곳은 워낙 빨리 돌기 때문에 부지런히 뛰어도 여전히 제자리에 머무를 수 밖에 없다

그렇지만 뛰지 않으면 그나마 제자리에도 못 있고 뒤처지게 된다

맞벌이 중산층들이 이 붉은 여왕의 세계에 빠져 있는 셈이다

 

저자들이 내 놓은 해법은 학군제를 폐기하고 원하는 학교에 보낼 수 있게 하라는 것이다

공교육의 질을 높히고 프리 스쿨을 공교육화 시키라고도 한다

조기 교육 열풍은 우리나라에만 국한된 게 아닌 모양이다

미국도 교육 개념이 바뀌어 7세부터 시작하는 공교육은 너무 늦기 때문에 다들 프리 스쿨에 미리 보낸다고 한다

그런데 이 유치원 개념의 프리 스쿨에 엄청난 사교육비가 쏟아지고 있다

또 대학 등록금도 동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대학은 방만한 경영을 지양하고 스포츠 팀 운영처럼 돈이 많이 드는 일은 과감하게 포기하라고 요구한다

해마다 등록금 인상을 놓고 진통을 앓는 것 역시 한국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닌 셈이다

기부금 입학은 사립 대학 운영에 필수라는 말이 실감난다

대학 총장의 능력은 얼마나 많은 기부금을 모아 오느냐로 결정된다는 말에도 고개가 끄덕여진다

 

제일 우스운 건 이 모든 문제들의 현실적인 해결책이 자녀를 안 갖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지난 세대까지만 해도 자녀는 집안 경제의 노동력이 되고, 부모의 노후를 책임지는 보험의 역할을 했다

그러나 요즘은 자녀가 없으면 안전한 노후를 보낼 확률이 늘어나고, 자녀를 키우는 가정은 무자녀 가정보다 파산할 확률이 세 배나 커진다

자녀가 주는 이득을 예전에는 개인이 취했으나, 이제는 세금을 내고 노인 인구를 부양하며 나라를 지키는 등의 이득을 사회가 갖게 된다고 분석한다

자녀는 이제 품질 보증서가 없는 비싼 소비재가 되어 부모를 파산으로 이끄는 중요한 요인이 되버렸다

자녀 양육의 책임을 계속 개인에게만 돌리면 현명한 선택을 하려는 개인들은 요즘처럼 출산률 저하로 대응하는 수 밖에 없다고 경고한다

출산률 저하는 여성들의 스트라이크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이제는 중산층의 strike로 그 범위가 넓어진 셈이다

사회가 이런 식으로 자녀를 안 낳는 가정에게 상을 주고 (경제적 이득), 낳는 가정에게 벌을 준다면 (파산과 같은 경제적 불이익) 출산율은 계속해서 저하될 수 밖에 없다고 지적한다

 

맞벌이를 하기 전 아내의 역할은 가정 경제의 안정망이었다

남편이 실직하면 곧 아내가 돈벌이에 나설 수 있기 때문에 (과연 우리나라에서도 이 말이 통용될지는 의문이지만) 그런대로 가정을 유지해 나갈 수 있었는데, 요즘처럼 둘 다 버는 시대에 한 명이 실직하게 되면 두 사람의 소득에 맞춰 고정 비용을 지출하던 가정은 파산의 위협에 처할 수 밖에 없다고 한다

또 아내는 가족이 아프면 간호사의 역할을 하게 되지만, 둘 다 직장에 나가는 상황에서 누군가가 아프면 돌보는 사람을 돈으로 살 수 밖에 없고, 결과적으로 이것 역시 가정 경제에 치명타를 안기게 된다

그러므로 맞벌이 가정이 안전한 경제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고정 비용의 지출을 줄이는 게 최선이라고 진단한다

고정 비용이란 일시적인 사치나 과소비가 아니라 소득이 줄어들어도 절대 줄일 수 없는 모기지 대출금 같은 것을 말한다

두 사람의 소득을 기준으로 경제 계획을 세우면 안 되고, 한 사람의 소득은 안전망으로 남겨 두는 게 최선이라고 한다

또 국가에서 제공하는 의료 보험이나 실험 보험 등 만으로는 부족하기 때문에 장애 보험이나 간호 보험 등 가능하면 보장을 많이 받을 수 있는 보험에 미리미리 가입하라고 충고한다

(간호 보험은 새로운 개념이라 신기했다 연로한 부모가 아플 때 당신이 직장을 팽개치고 간호하러 갈 수 없다면 당장 간호 보험에 가입하라고 한다)

36개월 자동차 할부보다 60개월 장기 할부가 더 위험하다는 사실을 빨리 간파하라고 한다

고정 비용이 많을수록 가정 경제는 안전망이 줄어든다는 사실을 명심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가장 중요하고 핵심적인 해결책은 중산층들이 이익 집단으로서 단결하는 것이라고 한다

은행들은 이자율의 규제를 없애기 위해 정치인들에게 끊임없이 정치 자금을 헌납하고 자신들에게 유리한 광고를 내보낸다

이제 중산층들도 단결해서 대학 등록금 인상을 막고, 파산 신고를 보다 쉽게 할 수 있게끔 법을 고치라고 정치인들을 압박하라고 한다

은행에게는 채무자에 불과하지만, 정치인에게는 한 표를 가진 유권자라는 사실을 명심하라는 것이다

 

이 책에서 제시한 해결책이 전부 현실적이거나 바람직한 것은 아닐 수 있다

그렇지만 여기서 제기한 문제들은 분명히 중요하고 간과할 수 없는 본질적인 것들이다

특히 개인이 과소비를 하기 때문에 그들은 빚에 허덕이고 있다는 식의 표면적이고 쉬운 도덕주의적 해결책을 지양한다는 점이 마음에 든다

(오히려 소비를 줄이면 내수가 침체된다는 건 기본적인 경제 상식이라고 한다)

하버드 대학에서 파산법을 강의하는 법대 교수인 저자와 그녀의 딸이 함께 쓴 이 책은 쉽지만 날카로운 문제 제기로 뉴스위크지에 의해 10대 경제서로 선정됐다

우리 나라 현실에도 아주 적합한 지적들이 많기 때문에 읽어 보면 많은 도움이 되리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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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 - 역사인물 다시 읽기
한명기 지음 / 역사비평사 / 200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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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도 새벽까지 책을 읽느라 아침에 늦잠을 잤다

도서관에서 세 권을 빌려 왔는데 한 권만 읽으려다 다음 책이 궁금해 잠깐 본다는 게 다 읽어 버렸다

그만큼 저자의 기술 능력이 뛰어난다

한 번 손에 잡으면 끝까지 읽게끔 만드는 얘기 솜씨가 대단하다

서울대 사학과를 졸업한 후 현재 단국대 교수로 재직 중인 저자는 학위 논문이 광해군인만큼 시원스럽게 그 시대를 이야기한다

처음에는 제목이 "광해군"이라 요즘 실리 외교 전문가 어쩌고 하면서 비운의 왕이었다는 식으로 미화하면 어쩌나 걱정을 했는데, 역시 전문가는 다르다

광해군의 진면목이 궁금한 사람이라면 읽어 보라고 권하고 싶다

역사, 정치 이야기를 마치 소설 쓰듯 재밌게 풀어내고 있어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내가 알고 있는 광해군은 임진왜란으로 황폐화된 나라를 살리고, 명, 청과의 관계에서 실리 외교를 추구한 한마디로 개혁적이고, 현명한 임금이었다

폐모살제 같은 유교적 업보를 지녔으나, 세조 역시 조카를 죽이고 왕위에 올랐던 것처럼 그것이 폐주가 된 치명적인 하자는 아니었다고 생각했다

개혁적이고 실리를 추구한 왕이 명분론자들에게 쫒겨났다고 생각했는데, 당시 정치 상황을 살펴 보면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는 걸 알 수 있다

의외로 광해군 역시 명나라에 많은 집착을 보인다

여태까지 알고 있기로는 명나라의 국운이 다한 걸 알고 명을 배척했다고 믿었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명이라는 거대한 제국이 하루 아침에 여진족에게 무너지지는 않았기 때문에 200백년 동안 명을 섬긴 조선으로서는 명이 망한다는 사실 자체를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이다

광해군 역시 기본적으로 명을 섬기면서도, 무리하게 파병 요구를 하자 국내 사정을 봐 가면서 가능하면 미루려고 했을 뿐이다

재야 유림들은 임진왜란 때 나라를 구해 준 명에 대한 보답을 소홀히 한다고 당장 파병하라고 요구했지만, 정치 일선에 있지 않는 사람들의 명분일 뿐이었다

명을 배신했다고 반정을 한 세력 역시 명의 파병 요구를 거절했을 정도로 현실과 이상은 늘 거리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명의 파병 요구를 거절하지 못한 광해군은 결국 임진왜란 끝난지 얼마 되지도 않아 다시 1만 병력을 모아 요동으로 보낸다

이 파병은 백성들의 삶을 대단히 피폐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무리한 궁궐 확장 공사와 더불어 대대적인 원망을 받게 된다

인목대비 유폐와 중립 외교가 사대부들의 지지를 잃게 했다면 궁궐 건립과 파병은 민심을 떠나게 만들었다

그래도 광해군은 전투에 패배한 후 감금된 총사령관 강홍립의 밀서를 받으며 청의 정세를 관찰한다

강홍립이 일부러 투항했는가에 대한 진위는 아직도 가려지지 않는데, 어쨌든 우리 군사를 희생해 가면서까지 싸울 필요는 없다는 식의 언지를 광해가 내렸음은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포로가 된 강홍립의 가족을 국내에서 보호해 줄 필요가 없었을테니까

 

모문룡이라는 사기꾼 얘기는 명나라 환관들의 은 요구와 더불어 분노를 불러 일으킨다

명나라 장수였던 모문룡은 청에 패한 뒤 요동을 정벌하겠다고 남은 군대와 유민을 이끌고 조선 땅으로 들어온다

그 뒤 무려 8년 동안이나 조선에 눌러 앉아 걸핏하면 군량미와 자금을 요구한다

심지어 인조가 집권한 후에도 말이다

도대체 정부에서는 왜 모문룡에게 끌려 다녔던 것일까?

은혜를 베푼 나라의 장수이기 때문에?

아니면 청나라를 치기 전 오히려 조선을 먼저 칠까 두려워서?

조선은 명나라에 대한 사대를 단순히 외교 관계가 아니라 마음 속으로부터 내제화 시켰다는 생각이 든다

필요하면 취하고 필요없으면 버리는 태도는 유학을 숭상하는 조선인들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을까?

아마도 17세기 조선인들로서는 중원을 지배하는 명이 여진 같은 오랑캐에게 망한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한마디로 국제 정세에 어두웠던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다 망해 가는 명나라를 끝까지 받들어 온 나라가 청나라 군대의 쑥대밭이 되게 만들었겠는가?

 

광해군이 성군은 못 되더라도 연산군처럼 왕위에서 패악의 정치를 한 것도 아닌데, 왜 왕위에서 쫓겨났는지에 대한 약간의 답을 얻은 기분이다

그것은 그의 지지 기반이 약했다는 것이다

즉 광해군은 비록 왕이었지만 정치 기반은 소수 집단에 불과했다

이황이나 이이처럼 전국적인 명성을 얻은 서인 대신, 경상도 일부에서 명망을 얻는 조식을 받드는 북인 세력을 기반으로 했기 때문에, 여론에서 밀렸고 아버지 선조가 세자의 위치를 흔들었기 때문에 정치적인 기반도 약했다

말하자면 세자 때부터 그의 지지 세력은 주류가 아닌 비주류였던 것이다

그럴수록 정치력을 발휘해 자기 편으로 끌어 들여야 하는데 유약하고 소심한 광해군은 자신을 떠받드는 소수 정치 세력에 의존해 자꾸 무리수를 두게 된다

대표적인 예가 인목대비 폐위 사건이다

광해가 세자 시절 목숨을 걸고 그를 지지했던 정인홍이나 이이첨 같은 세력들은 집권 후 자신들의 권력 강화를 위해 그 때의 공을 내세우며 옥사를 일으킨다

인목대비를 유폐한 것이나 선조의 적자였던 영창 대군을 죽인 일 등은 격렬한 반대를 불러 일으켜 여론을 완전히 돌아서게 만들었다

더구나 광해군은 왕권 강화에 대한 집착을 궁궐 건축을 통해 드러냈다

전쟁 후 피폐해진 살림에 몇 개의 궁궐을 한꺼번에 지으려 들었으니 재정이 남아날 턱이 없다

급한 김에 사대부들에게까지 고통 분담을 요구하자 여론은 급격히 나빠졌다

마치 흥선대원군의 경복궁 증축 과정을 보는 듯 하다

 

어쨌든 광해군은 소수 세력의 지지를 받았고, 정치력 부족으로 다수파를 아우르지 못해 결국 실각하고 만다

후대로 갈수록 신하들의 입김이 세진 것은 인조 반정 이후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르겠다

실각 후에도 무려 19년을 더 산 광해군은 복잡한 국내외 정세를 관망하며 다시 복위할 꿈을 꾸었을 것 같다

실제로 몇 차례 광해군을 복위시키려는 시도도 있었다

그런 희망이 없었다면 재위 당시 병약했던 왕이 제주도 등의 험한 유배지에서 19년이 버티고 살 힘이 없지 않았을까?

광해군과 그의 시대에 관해 객관적으로 소설처럼 잘 풀어 쓴 책이라 무척 재밌다

권하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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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국왕 이야기
임용한 지음 / 혜안 / 199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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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용의 눈물"이 한참 뜰 때 나온 책인데, 시류에 편승하는 일부 책과는 달리 수준있고 재밌는 역사 에세이입니다

저자는 목사이면서 역사학을 전공한 독특한 이력을 가진 사람인데, 글을 쓰는 솜씨가 아주 탁월합니다

야사 대신 실록을 근거로 삼으면서도 행간에 숨어 있는 왕들의 인간적인 이야기를 찾아 내서 독자들을 즐겁게 합니다

1권은 태조 이성계의 생애부터 8대 예종까지 이야기이고, 2권은 9대 성종부터 12대 인종까지 이야기입니다

1권에서는 특히 조선이 건국되기까지의 과정과, 형제들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태종의 이야기가 흥미진진하게 펼쳐집니다

2권의 압권은 역시 연산군 이야기죠

알려진 것과는 다르게 저자는 태종을 높게 평가하고, 세조는 깍아 내립니다

세조가 큰 아들이었을지라도 아버지 세종은 문종을 선택했을 거라는 식이죠

세조는 아버지 세종의 정책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평합니다

 

이 책의 장점은 역사를 보는 새로운 시각에 있습니다

제일 놀랬던 건 중종과 조광조의 관계입니다

다들 조광조는 훈구파들에게 제거됐다고 생각하는데, 역사적 사실을 꼼꼼하게 따져 보면 중종이 급진적인 조광조에게 질려서 훈구파를 이용해 버린 거라고 해석합니다

단종이 집권했을 때도 일반적인 해석과는 달리 정국은 불안정 하지 않았고, 김종서나 황보인이 전권을 휘두르지도 않았다고 봅니다

말하자면 단종에게 착실히 이양된 안정된 대권을 수양대군 개인의 야심 때문에 뺏었다고 보는 거죠

결국 수양대군이 등극하는데 도움을 준 사람들을 공신으로 책봉하면서 동맹 관계 유지를 위해 많은 권력을 나눠 주다 보니 훈구파라는 세력이 본격적으로 형성됐다고 봅니다

일찍 죽었기 때문에, 또 예종이라는 묘호 때문에 유약했을 것 같은 예종 역시 남이의 옥사를 일으킬 만큼 만만한 왕은 아니었다고 합니다

오래 살았으면 아버지 세조처럼 철권 정치를 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보는 거죠

사육신 역시 방에 앉아서 명분만 앞세운 허술한 계획으로 단종 복위 계획은 실패할 수 밖에 없고, 결과적으로 단종의 명을 재촉했다고 봅니다

 

3권이 나오기를 학수고대 하고 있는데 책이 많이 팔리지 않아서인지, 아직도 감감무소식 입니다

읽어 본 역사 에세이 중 제일 재밌고 나름대로 수준 있는 책인데 홍보가 덜 되서 그런지 많이 알려지지 않은 것 같아 안타까웠어요

이번 기회에 한 번씩 읽어 보시길 바랍니다

조선 국왕들의 인간적인 면모가 흥미롭게 펼쳐질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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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noma 2005-06-15 16: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3권 기다리는 사람이 저말고도 제 주위에 한 명 더 있는데... 메일이라도 보낼까봅니다. 진짜 관심많은 왕이 컴플렉스 덩어리 선조와 그 아버지 밑의 광해군인데... 그리고 아들과 며느리, 손자마저 죽이는 비정한 왕인 인조까지... 아흑...

ranoma 2005-06-15 16: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리고 박시백씨의 만화로 보는 조선왕조실록 한 번 보세요. 이 책과 이덕일씨의 책이 적절히 혼합된 듯한 느낌의 책입니다.

greentea 2006-10-18 0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무척이나 3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출판사에 전화해서 물어 보았더니 계획이 없다고 하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