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릇을 비우고 나면 많은 것이 그리워졌다 - 삶의 모든 마디에 자리했던 음식에 관하여
정동현 지음 / 수오서재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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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무엇을 먹을까 생각한다. 혀끝이 기억하는 맛을 찾아 기억을 더듬다 보면 괜히 멈칫하게 되는 음식들이 있다. 추억을 함께 먹은 음식들. 할머니와 서울 가는 길에 지하철의 작은 가판대에서 쪼그려 앉아 먹었던 묵 한 사발, 주말 오후 적당히 신김치를 쫑쫑 썰어 조물조물 비빈 엄마표 비빔국수, 늦은 시간 학원이 끝난 후 출출한 허기를 달래며 먹었던 4천 원짜리 우동, 토요 자율학습일마다 배달 시켜 친구들과 나눠먹었던 참치비빔마요 도시락 등 그 시절에만 느낄 수 있었던 그 맛이 담긴 음식들 말이다.


《그릇을 비우고 나면 많은 것들이 그리워졌다》는 독자들이 가진 다양한 추억의 맛들을 떠올리게 만든다.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살고 싶어 사표를 던지고 요리사로 시간을 보냈던 정동현 셰프는 자신의 삶 속에 녹아있는 음식들을 하나씩 이야기한다. 삶 속에 음식이 있고, 음식 속에 삶이 있다고 생각하는 그의 생각은 담담하지만 솔직한 글에서 묻어 나온다. 그래서 책을 읽는 동안 그의 이야기는 마음 한구석을 콕 건드려 내 추억의 일부가 조금씩 흘러나오도록 만든다, 마치 반숙 계란의 노른자가 슬며시 흐르는 것처럼.



책에 담고 싶었던 것은 무엇이 맛이 있고 없다는 비평이 아니다. 그보다 음식에 담긴 추억과 삶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 한 그릇을 먹기 위해, 만들기 위해 견디고 버텨야 했던 시간을 쓰고 싶었다. 왜 우리가 때로 국수 한 그릇에 눈물을 흘리고 가슴이 북받쳐 오르는지 작은 실마리를 찾고 싶었다. 그리고 이 책은 지나간 시간에 대한 기록이기도 하다. / p. 12









《그릇을 비우고 나면 많은 것들이 그리워졌다》에는 우리가 일상에서 자주 먹는 음식들을 말한다. 김밥, 칼국수, 양념치킨, 돈가스 등 어제 먹었던 점심 메뉴가 될 수도 있었던 이제는 너무도 익숙해 대수롭지 않은 음식들 말이다. 정동현 셰프는 그 음식들 속에 자신의 어린 시절을 넣고, 아버지의 고독과 어머니의 사랑도 넣는다. 양념 같은 이 이야기들은 독자들의 기억 한 편에도 비슷하게 자리 잡고 있어 읽는 내내 마음이 따뜻하고 뭉클해짐을 느낄 수 있다. 그때가 아니면 다시 느낄 수 없는 맛, 그래서 더욱 혀끝을 자꾸 맴도는 그 맛이 떠오른다.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그 시절, 다시 그 열차를 탄다 해도 그 맛이 날까? 기억은 여전히 생생하다. 철없이 조르기만 해도 먹을 것이 끊임없이 나왔고, 졸리면 그저 부모님 어깨에 기대 자기만 하면 되었던 맘 편한 시절. 아쉬운 마음만 남기지 말고 언제 한번 기차를 타야겠다. 맥주도 한잔 하겠지. 동해를 보며. 저 계곡 위에서, 푸르고 높은 산에서. 기차 안에서. 캬아. / p. 24




정동현 셰프는 자신이 요리를 했던 경험을 살려 《그릇을 비우고 나면 많은 것들이 그리워졌다》 속에 음식을 먹는 사람과 만드는 사람의 삶의 이야기가 공존하도록 만든다. 음식을 먹는 사람으로서 그 음식들이 자신에게 어떤 거름이 되었는지 이야기하면서 동시에 음식을 만드는 사람으로서 음식 하나를 만들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지 말한다.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레스토랑에서 김치 만들기를 주문받은 에피소드, 음식의 미묘한 맛을 좌우하는 소금에 대한 철학 등 요리사로서의 고민과 격정의 시간들을 섞어낸다. 미트볼을 만들며 흐뭇했던 그의 동료처럼 소박한 음식 한 그릇을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정성이 들어가는지 그의 글은 잔잔하게 이야기한다.



진득한 토마토 소스와 미트볼을 입에 넣고 우적우적 씹을 때, 모두 어린애가 된 것 같았다. 작은 선물에 기뻐하고 서로의 얼굴만 봐도 즐거웠던 시절이었다. 미트볼을 담았던 큰 트레이는 깨끗이 비워져 윤이 났다. 미트볼을 만든 장본인인 엘리스는 정작 음식에는 손을 대지 않고 남은 일을 했다. 나는 그녀가 우리를 계속 보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의 얼굴에 깃든 옅은 미소가 우리를 향해 있었다는 것도 알았다. / p. 250







《그릇을 비우고 나면 많은 것들이 그리워졌다》를 덮으며 고픈 배를 움켜쥐었다. 이 헛헛함을 무엇으로 채울 수 있을까 고민하며 가까운 식당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배는 채워도 마음은 채우지 못했다. 오늘 내가 먹은 음식의 맛을 함께 나눌 사람이 없었으니. 《그릇을 비우고 나면 많은 것들이 그리워졌다》 속 그의 글이 유독 더 따뜻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그 음식의 맛을 나눈 사람들과의 사랑이 묻어져 나오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그 맛을 떠올릴 때, 함께 떠오르는 사람들. 그 맛에 우리는 오늘도 먹고, 사랑하고, 살아간다. 당신은 오늘 누구와 또 다른 추억의 맛을 나누었나요?



나는 어제와 같은 오늘을 살았고 오늘과 같은 내일을 살 것이다. 그토록 지루한 하루를 매일 견디던 형, 죽을 나에게 사다준 그 형은 마침내 고시에 합격해 어엿한 가장이 되었다. 나는 내가 죽을 만드는 정성과 같은 지루함을 벗 삼고, 흰죽과 같이 하찮은 나의 하루를 감사하길 바란다. 그 뜨거운 한 그릇을 전하는 마음으로 사랑하며 살길 바란다. / p. 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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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구의 사랑 오늘의 젊은 작가 21
김세희 지음 / 민음사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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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단어를 쓰는 순간 그것의 존재를, 그것이 우리 집단 안에 정말 존재하고 있음을 인정하는 일이 되기 때문이어서였을까? 아니면 단지 그 단어 자체에 강렬한 거부감을 느껴서였을까? 손을 잡지 말라고, 또는 껴안지 말라고까지 할 수는 없었다. 그들은 어디까지가 동성애이고, 어디서부터 아닌지 가려낼 능력이 없었다. 그 점 때문에 그들은 혼란을 겪었다. 우리는 모두 손을 잡고 다녔다. 모두들 끌어안고 있었고, 서로의 품에 기대어 5분 또는 10분간 짧은 잠을 잤다. 사이좋은 원숭이들처럼 긴 머리를 빗겼고, 둘씩 셋씩 넷씩 주렁주렁 허리를 껴안고 붙어 다녔다. / p. 27



사랑과 우정 사이에 놓였던 그때 그 시절, 함께 붙어 다니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던 그때에 여자친구들은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었던 존재들이었다. 혹여나 이 아이가 내가 아닌 다른 아이들과 놀까 봐 불안하기도 했고, 학년이 바뀌어 우리 사이가 이전 같지 못해 서먹해질까 걱정했던 적이 있었다. 우리 사이엔 비밀이 없길 바랐고 내가 너를 좋아하는 만큼 너도 나를 좋아해 주길 바랐다. 하루의 시작과 끝을 학교에서 보낸 시간이 많았던 우리는, 그렇게 그 시절 서로의 기억 속에 강하게 자리 잡았었다.


《항구의 사랑》은 아이돌 문화가 유행하던 2000년대 초반의 고등학생 소녀들의 이야기를 그려낸다. 좋아하는 아이돌 오빠들을 주인공으로 팬픽을 쓰고 읽으며 동성 간의 사랑이 아무렇지 않게 느껴졌던 그때, 교내에서는 짧게 자른 머리 커트 머리를 한 여자아이들이 인기 있었다. 호기심이었는지, 첫사랑이었는지 알 수 없는 관계를 맺는 아이들을, 레즈비언이라는 단어 대신 '이반'이라고 불렀다. 김세희 작가는 자신의 고향이었던 목포, 그리고 자신이 보냈던 학창시절의 기억들을 《항구의 사랑》에 담아 독자들에게 전한다.



중학생이 되어 처음 『데미안』을 읽었을 때 난 인희를 떠올렸다. 어느 날 불쑥 곁에 나타나 나를 밝은 곳으로 이끌어 주었던 성숙한 친구. 나를 유년의 불안에서 끌어내 주었던, 친구라기보다는 스승 같았던 인물. 그러면서도 비칠 듯 말 듯한 베일에 감싸인 것처럼 어쩐지 속속들이 이해할 수는 없었던 수수께끼 같은 존재. / p. 16



'나'인 준희는 친구 인희에게 알 수 없는 묘한 감정을 느낀다. 친구라고 하기에는 조금 더 깊은 감정에 놓여 있었던 존재. 그것을 정확히 사랑이라고 표현할 수는 없을 정도로, 무어라고 표현할 수 없는 감정으로 인희를 바라본다. 인희의 존재가 조금 흐려졌을 때, 준희는 친구 규인의 연극 동아리에서 활동하는 민선 선배를 좋아하게 된다. 선배와 함께 있는 시간이 좋고, 가슴 설레는 이 감정을 쉽게 감추지 못한다. 《항구의 사랑》은 이 사랑과 우정 사이의 정확히 알 수 없는 사랑이 어쩌면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팬픽 때문이 아닐까 추측한다.



물론 팬픽에는 동성 커플이 등장했다. 그러나 내게 팬픽은 무엇보다 내가 사랑하는 가수가 등장하는 허구의 로맨스를 의미했던 것 같다. 10대 시절 내내 나의 가수는 조성모였다. 내가 그를 얼마나 사랑했던가. 열여섯 살 때는 그를 주인공으로 한 길고 복잡한 중세 궁정풍 로맨스를 쓰기도 했다. / p. 36



중학생. 이성에 대한 관심이 눈을 뜨기 시작할 무렵, 나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은 인터넷 소설이었다. 지금 읽어보면 터무니없는 전개에 어이없는 웃음을 터뜨리겠지만 당시에 나는 인터넷 소설을 통해 '사랑'의 감정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러다 자연스럽게 아이돌을 좋아하게 되고, 팬픽을 읽게 되었다. 팬픽 속에서 내가 좋아하는 오빠들은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다. 여느 인터넷 소설과 다르지 않게 그 속의 오빠들은 사랑에 아프고, 힘들고, 웃고, 즐거워했다. 동성, 이성을 떠나서 그저 어떤 로맨스로 바라봤다.


딱 그 정도였다. 중학교 2학년, 흔히 말하는 중2병이 지나가자 나의 관심도 시들했다. 친구들과 아이돌 이야기를 나누기는 했지만 이전처럼 팬픽을 읽지는 않았다. 그래서 사실, 《항구의 사랑》 속 그 감정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 시절의 내 모습을 돌아보아도 그저 수다 떨기를 좋아하는 여학생에 지나지 않았다. 다만, 내게도 소중한 친구였기에 그 친구도 같은 마음이길 바랄 뿐이었다. 그 시절의 욕심이라고 할까.



그런데 내가 그것을 선택했을까? 오랫동안 나는 내가 그녀를 사랑한 거라고 생각했지만 이젠 더 이상 그 감정을 내가 선택한 거라는 확신이 서지 않는다. 내가 감정을 소유했던 게 아니라 감정이 나를 소유했던 것만 같다. 강물의 표면에 붙들려 이리저리 떠다니는 나무토막처럼 눈에 보이지 않고 파악할 수도 없는 심오한 물살에 고통스럽게 휩쓸려 다녔던 것만 같다. 그 물살의 방향이 바뀌기 전까지는 계속 그렇게 붙들려 실려 가는 수밖에 없었다. / p. 103



이 혼란스러운 감정은 대학교 입학과 동시에 해소되어 버린다. 마치 그전까지 있었던 모든 것들이 낮잠을 자며 꾸었던 꿈과 같았던 것처럼. 그저 나른하게 자고 일어나 내가 어떤 꿈을 꾸었던 걸까, 떠올려봐도 기억이 잘나지 않아 금세 자리 털고 일어나 다른 일을 하며 까맣게 잊어버릴 수 있는 것처럼. 그러나 김세희 작가는 그 꿈의 일부를 떠올려 《항구의 사랑》을 써 낸다. 그 일부를 기억하고, 이렇게 표현한다는 것이 신기했다.


어쩌면 다시 돌아오지 못할 그 시절이 그리워 그 감정이 소중하게 느껴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모든 것이 처음이었으니까, 그렇게 서툰 감정을 확신할 수도 없었던 그 시절을 그리워하는 마음은, 《항구의 사랑》을 읽는 여성 독자들에게 기억 한구석에 미뤄두었던 어떤 친구를 떠올리게 만들지도 모른다. '그냥 오랜만에 연락해봤어.'라며 연락해보고 싶은 그 시절을 함께 보낸 친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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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육관으로 간 뇌과학자 - 실험실에 갇혀 살던 중년 뇌과학자의 엉뚱하고 유쾌한 셀프 두뇌 실험기
웬디 스즈키 지음, 조은아 옮김 / 북라이프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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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녔던 운동을 그만둔 요즘, 드는 생각은 딱 하나다. 그래도 운동할 때만큼은 집중력은 좋았는데. 신체적 활동이 뇌의 활성화에 영향을 준다는 많은 연구들을 뉴스 기사, TV 정보들을 통해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스스로 경험한 적도 있었다. 3년 전, 처음으로 운동 후 상쾌한 기분을 만끽한 뒤로 주변 사람들에게 운동의 효과를 전파하고 다닌 적이 있었다. 아침마다 눈 뜨는 것이 버겁지 않았고, 하루를 바쁘게 보내도 전혀 피곤하지 않았다. 수업을 들을 때도 그 어느 때보다 집중했고, 과제를 하는 것도 나름 즐거웠다. 하지만 운동을 그만둔 지금은, 모든 것이 망한 느낌이다.


이런 나에게 다시 운동을 다니길 권유하는 책 한 권을 만났다. 《체육관으로 간 뇌과학자》는 신경과학 교수인 웬디 스즈키가 스스로 운동과 신경가소성의 관계를 증명하는 표본이 되어 연구한 결과를 유쾌하게 풀어낸다. '괴짜 소녀'였던 자신이 어떻게 신경과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뇌'라는 신체의 일부를 활성화하기 위한 방법으로 운동을 선택하게 된 이야기를 흥미롭게 설명한다. 그녀가 체육관으로 가게 된 것처럼,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은 단 4분이라도 몸을 움직여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된다. 바로 나처럼.



이 책은 여러 가지 면에서 나만의 창의성 프로세스를 찾아가는 여정에 대한 서사이며, 이것은 운동과 두뇌의 연관성을 발견하면서부터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지난 몇 년간 나는 온갖 낯선 분야에 뛰어들었고, 창의적 사고에 관한 모든 것을 밝히고 이해하는 데 방해가 되는 장벽들을 허물었다. 창의성과 과학은 이제 나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가 되었다. / p. 256



사람들은 자신이 기억할 수 있는 것이 많길 바라고, 효율적인 일 처리를 위해 집중할 수 있길 바라며, 번뜩이는 아이디어 하나쯤은 만들어내기를 바란다. 기억력, 집중력, 창의력 등 우리의 뇌가 완벽한 기능을 선보이면 좋으련만, 그러지 못해 아쉬운 사람들에게 《체육관으로 간 뇌과학자》은 방향을 정해준다. 웬디 스즈키는 신경과학의 세계가 얼마나 흥미로운지 자신의 일화들을 빗대어 설명하는데, 그동안 나 자신이 뇌에 대한 관심이 없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여기서 뇌를 활성화하고 정신과 신체의 연결에서 나오는 힘을 사용하여 우리를 행복하게 만드는 비밀병기 또는 램프의 요정 지니가 바로 신경과학이다. 나는 신경과학의 살아 있는 표본이었고, 모든 신체 활동이 내 뇌를 더 나은 방향으로 변화시키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이 확실해지자 나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음을 깨달았다. 시간을 투자하여 다양한 정체성을 더 많이 계발할수록 스스로가 충만해지고 완전해지는 것을 느꼈다. / p. 11



웬디 스즈키는 '인텐사티' 라는 활동을 통해 자신이 운동을 한다는 사실을 의식한다. 그리고 이를 자신이 맡은 강의실의 학생들과 함께 꾸려간다. 운동복을 입은 교수님이 강의실 안으로 걸어 들어온다고 상상해보자. 이보다 더 웃긴 일이 어디 있을까. 그러나 웬디 스즈키는 그런 것은 신경 쓰지 않은 채 자신이 경험한 것들을 학생들과 함께 나누길 원한다.《체육관으로 간 뇌과학자》를 읽으면서 그녀와 같은 교수님이 있었더라면, 조금은 즐거웠던 대학생활을 하지 않았을까 싶다. 물론, 대학 시절의 내가 그 실험에 동참했을 것이라고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운동을 하기 시작한 이후부터 그녀의 삶에는 행복한 것들로 가득 차기 시작한다. 아니, 그녀가 달라졌기 때문에 주변의 것들이 달라 보이기 시작한다. 그래서 행복하다고 스스로 느낀다. 운동은 그녀에게 활기를 가져다주었고, 활기는 그녀의 생각을 바꾸기 시작했다. 운동이 스트레스 완화, 기분 전환에 좋다는 것이 이런 이유에서가 아닐까.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나도 그녀와 같은 경험을 한 적이 있다. 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로 힘들고 우울해질 때, 운동을 시작했던 것은 정말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할 정도로.



훨씬 더 깊은 내면의 자기 인식과 자기애로 관심을 옮기자 스트레스에 대처하는 방식이 완전히 바뀌었다. 삶의 불필요한 스트레스를 모두 재평가하여 제거할 동기도 생겼다. 나는 그것이 스트레스를 최소화하기 위한 총력전이 아니었음을 분명히 하고 싶다. 그보다는 더 많은 기쁨과 사랑, 행복을 삶으로 가져오려는 의도에 집중했다. 나는 스트레스를 감당하지도 못하면서 얼마나 많은 스트레스를 견딜 수 있느냐로 성공과 가치를 규정했다. 그 모든 스트레스를 계속 감당하는 대신 훨씬 더 많은 기쁨을 얻겠다고 선언한 것은 얼마나 큰 변화인가! / p. 217



어제보다 더 가뿐해진 느낌을 받으며 운동을 한다. 서서히 몸의 열이 오르기 시작하고, 땀이 흐르기 시작한다. 수건으로 닦으며 거울 속 얼굴이 빨개진 내 모습을 본다. 어제보다 더 나아졌다. 이 상쾌한 기분으로 눈을 감고 오늘 하루를 마무리한다. 몸 안의 소리에 귀 기울인다. 오늘 하루도 수고했다고. 기분 좋게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 다시 한번 느끼고 싶다. 《체육관으로 간 뇌과학자》에서 웬디 스즈키가 그랬듯이, 나도 운동하러 가야겠다. 잠자고 있는 나의 뇌를 깨우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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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보니 삶은 아름다웠더라 - 모든 어른 아이에게 띄우는 노부부의 그림편지
안경자 지음, 이찬재 그림 / 수오서재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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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우리는 무엇을 그릴까 생각한다.

소재를 찾고 이야기를 나누고,

남편은 그림을 그리고 나는 글을 쓴다.

화가도 아니고 작가도 아닌 우리가.




좋아하는 일을 하는 데에는 나이가 대수일까. 가끔 나이 드신 분들이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문득 나 스스로가 너무 많은 걱정을 가지고 살고 있지 않은지 생각하게 된다. 그런 일을 할 시간적 여유가 없을뿐더러 끝까지 좋아할 자신도 없다는 생각으로 미룬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떠올린다.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조차 알 수 없는 일들을, 남들도 하기에 따라 하는 일들을 하고 있자면 더욱이 그런 생각들이 몰려온다. 어떤 일을 좋아하고, 그 마음을 계속 유지하려면 어떻게 해야 될까?


《돌아보니 삶은 아름다웠더라》는 한국으로 돌아간 손주들이 그리워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기 시작한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사랑이 담긴 책이다. 브라질로 이민을 갔던 이찬재 할아버지와 안경자 할머니는 함께 살던 손주들을 한국으로 보내고, 아들의 권유로 그리기 시작한 그림을 인스타그램에 매일 업로드하기 시작했다. 'For AAA'라는 손주들의 이름을 사인으로 사용하며 손주들을 향한 사랑이 담긴 할아버지의 그림은 전 세계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였는지 책을 집어 든 순간부터 따뜻함이 전해져왔다, 이 일을 좋아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느껴졌기에.






문득 너희 목소리가 듣고 싶은 순간이 찾아온다.

그럴 땐 이렇게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쓴다.

/ p. 29 '그리운 순간' 중에서



이찬재 할아버지의 그림과 안경자 할머니의 글에는 손주들이 많이 등장한다. 사이좋게 학교로 걸어가는 모습,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모습, 할아버지에게 안겨있는 모습 등등 손주들을 흐뭇하고 기분 좋게 바라보는 할아버지, 할머니의 얼굴 표정이 머릿속에 그려질 정도로. 맞벌이 부부였던 부모님을 대신해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는 나와 내 동생을 애지중지 키우셨다. 아침에 일어나 따뜻한 밥 한 끼 먹여 학교에 보내고, 하교 후엔 출출할까 봐 손수 간식을 만들어 주시며 말이다.


함께 11년을 살고, 나와 동생의 교육 때문에 우리 가족은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품을 떠났다. 그리 멀리 가지는 않아 주말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찾아뵈었지만,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집은 이전보다 더 고요하고 조용해진 느낌이었다. 예전에 함께 살았던 곳이라고 믿지 못할 만큼, 두 분만의 냄새만이 느껴질 뿐이었다. 그래서 《돌아보니 삶은 아름다웠더라》를 읽으며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의 모습이 떠올랐다. "다음 주에 또 올게요,"라며 차에 앉아 작별 인사를 할 때, 두 분의 표정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그 헛헛한 마음이 가득한 얼굴이.






"할머니도 할아버지도 죽으면 여기에 묻힐 거야."

그냥 그렇게 말했어. 아니 말하고 싶었단다. 어린 손자들에게 죽음이라는 걸 말해주고 싶었다. 그날은 하늘이 맑고, 사람들은 조용조용 움직였고, 묘지마다 꽃들이 아름다웠기에.

/ p. 281 '성묘의 날에' 중에서



벌써 돌아가신지 6년이 되었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외할아버지와 5년을 함께 살았다. 이전보다 많이 쇠약해진 할아버지께 식사를 차려드리고, 간식을 챙겨드렸다. 어릴 적 나를 보살폈던 할아버지는 어느새 커버린 내게 보살핌을 받고 계셨다. 더 약해진 당신의 곁을 지키기 위해 병원 소파에서 시간을 보내기도 했고, 매일같이 내가 누구냐는 질문을 던졌다. 다른 건 몰라도 내 이름만은 불러주던 외할아버지셨기에 2년이 지난 지금도 떠올리면 조금은 아픈 기억이 되었다.


《돌아보니 삶은 아름다웠더라》는 점차 쇠약해져가는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생각이 담겨있다. 사랑하는 손주들이 다 클 때 즈음에 곁에 남아있을 수 있다고 확신할 수 없는 애석한 나이에 대한 이야기들은 책을 읽는 나의 기억을 톡 하고 건드린다. '늙음' 과 '죽음'에 대하여 다시 한번 생각하도록 만든다.






갈라파고스의 별들은 인생을 가르쳐준다. 여기 와서 할아버지는 문득 인생을 돌아보게 되었다. 산다는 것이 힘들고, 괴롭고, 피곤한 것의 연속이라 생각했었는데, 이제 돌아보니 아름다웠더라. 할아버지는 여태 그걸 몰랐는데 별들이 가르쳐주었어.

/p. 83 '별들이 가르쳐주었어' 중에서



할아버지, 할머니와 조금 더 많은 대화를 나눴더라면 나는 이런 이야기를 다 들을 수 있었을까. 그때는 너무 어렸던 내가 할아버지, 할머니의 말을 모두 알아듣고 그 마음을 헤아릴 수 있었을까. 《돌아보니 삶은 아름다웠더라》는 나의 할아버지, 할머니가 내게 해주지 못했던 말들을 모두 담아 사랑스러운 손길로 마음을 위로해준다. 당신들도 그런 마음으로 나를 보살펴주고 키웠을 것이라고, 감히 추측해본다. 그리고 그 마음을 받아 찬란한 삶을 꾸려가고자 한다. 좋아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우리의 이야기를 한 권의 책에 담고 보니 문득 지나온 인생이 보이더라. 어떤 때는 눈앞에 놓인 하루하루 살아내는 게 무척 힘들고, 벅차고, 피곤하기만 했을 때가 있었지. 그런데 여기 서서 돌아보니까 모든 순간이 아름다웠더라. 찬란했더라. 참으로 삶은 아름다운 것이었더라. 너희에게 꼭 이 말을 해주고 싶었어.

/ p. 296



앞으로도 두 분이 사랑이 담긴 편지를 써주었으면 좋겠다. 삶에 지쳐 상처받고 힘든 어른 아이들을 위해. 그들이 위로받고 찬란한 삶을 꿈꿀 수 있도록.




우리는 이곳에서 늘 그랬듯이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쓴다.

어제처럼 오늘도,

그리고 오늘처럼 내일도 그렇게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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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내일 1~2 세트 - 전2권
라마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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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일요 웹툰 《내일》이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 요 근래 웹툰을 집중적으로 챙겨보지 못해 처음 알게 되었는데, 읽는 순간 매력에 빠지게 되는 웹툰이다. 작가 라마는 자신의 경험을 담아 《내일》의 이야기를 그려나간다. 모르는 타인의 비극에 대해서 안타까운 마음과 연민을 느끼며 공감할 수 있게 된 어느 터닝포인트를 기점으로, 그는 '자살'이라는 사회적 문제를 조금씩 끄집어낸다. 왜 사람들은 그것이 차선이라 생각하며 그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지에 대해 라마 작가는 조심스레 그려나간다.



살다 보면 누구에게나

내일이 오지 않기를 바라게 되는

힘든 순간이 반드시 찾아옵니다.






《내일》 단행본 1권은 우연찮게 사건에 휘말려 혼수상태에 놓이게 된 준웅이 저승사자 구련과 륭구 팀에 합류하는 에피소드와 많은 독자들의 관심을 받은 '낙화' 편으로 구성되어 있고, 《내일》 단행본 2권은 저승탐방 에피소드와 재수생의 심정을 담은 '시간의 숲' 편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사건의 중심인물들이 놓인 상황과 감정들을 솔직하고 세밀하게 묘사하여 읽는 독자들이 쉽게 공감할 수 있도록 만든다.







사실 '자살'이라는 선택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입장은 아니었다. 스스로 목숨을 끊겠다고 말하는 이야기에 쉽게 공감할 수 없어서였다. 《내일》은 자살이라는 소재를 사용하지만 그것을 주로 다루지 않는다. 구련과 륭구, 준웅이 하는 일은 그 사람들이 그러한 선택을 하지 않도록 막는 것이기 때문에, 라마 작가는 그들을 통해 사람들이 왜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지, 이유에 주목한다. 그래서 《내일》을 읽으면 혹여나 내 주변 인물이 같은 상황에서 같은 감정을 느끼고 있지는 않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것을 가볍게 넘겨짚었던 무심한 나를 돌아보게 만든다.



누군가가 보기엔 '겨우 저것 가지고?'라는 생각이 들 만큼 별것 아닌 일이어도 당사자에게는 결코 가볍지 않을 거라 생각해요.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살짝 스친 정도의 통증일지라도 내게는 큰 칼에 벤 듯한 통증으로 느껴질 수 있듯이, 아픔의 무게는 주관적이니까요. 그 아픔의 크기를 또 다른 누군가가 이해해주고, 공감해주는 것만으로도 사람은 큰 위로를 받게 되는 것 같습니다. / p. 7 '작가의 말' 중에서





계속해서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졌다. 사람들은 저마다 각자의 이유로 힘들고, 아파하고, 슬퍼한다. 그 슬픔을 들어주고 공감하다 보면 어느새 오히려 위로받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서로 그렇게 토닥이며 살아가는 거지,라며 나는 당신에게 묻고 싶다. 당신의 《내일》은 안녕하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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