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기가 만만해지는 이과식 독서법 - 필요한 만큼 읽고 원하는 결과를 내는 힘
가마타 히로키 지음, 정현옥 옮김 / 리더스북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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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란 책을 읽고 어떻게든 '의미'를 깨달으면 족한 것으로, 그 의미가 남들과 달라도 상관없다. 책을 읽는다는 행위는 그다지 딱딱한 게 아니다. 적당히 해도 좋으니 자신과 가장 어울리는 책 읽기를 하면 된다.



책을 펼친다. 흰 종이 위에 새겨진 까만 글씨들. 세 장이 넘어가기가 무섭게 눈꺼풀이 서서히 무거워져 내려오기 시작한다. 어느새 책을 놓치고, 그렇게 무의식의 세계 속에서 헤맨다. 시간이 지나 정신을 차려보면 놓쳤던 책은 저 한구석에서 꾸깃해져있다. '다시 책 읽기가 이렇게 어렵다니!'


대학에 들어와 친구들과 놀러다니기를 좋아했던 내가 다시 취미로 '독서'를 선택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페이스북(facebook)도 따지고 보면 북(book)이니 '책' 아니냐는 우스갯소리를 친구들과 주고받으며, 짧은 글에 익숙해져 있던 내가 다시 긴 글 호흡을 가진 문장들을 다시 읽는 것은 너무도 힘든 일이었다. 이미 '유튜브'라는 시·청각 세계에 중독되어 있던 나는 정적이고 조용한 이 독서의 세계로 돌아오는 것이 그 어떤 것보다 힘들었다. 그리고 나와 같은 학생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독서 방법에 관한 책이 널리고 널린 이 세상에서 《책 읽기가 만만해지는 이과식 독서법》은 4년 전의 나처럼 책 읽기에 소질이 없었던 사람들을 위한 독서법을 소개한다. 책보다 유튜브가 더 재밌어 독서가 힘든 사람들이 알아두면 도움이 될 책이다. (본격적인 책 읽기에 앞서 책을 읽어야 한다는 딜레마에 빠질 수도 있지만…) 저자 가마타 히로키는 정확한 책 읽기 방법을 모른 채 두꺼운 전공서를 마주하는 교토대생들을 위해 자신만이 생각해낸 간단한 방법들을 이야기한다. 책은 결코 어려운 것이 아니라 아주 만만한 존재임을!



읽을수록 내면이 풍성해지고 살아가는 데 자신감을 얻을 수 있는 책을 만난다면 그 책은 평생의 보물이 될 것이다. 독서 행위는 형태로 나타나지 않지만 정신이 변화하는 계기를 제공한다. 바꾸어 말하면 책은 인생을 풍요롭게 해주는 가장 저렴하면서도 가장 효과 높은 수단이다.



한 권의 책도 읽기 어려웠던 대학교 2학년은 어떻게 4년 만에 한 달에 10권 이상의 책을 읽는 습관을 가지게 되었을까? 《책 읽기가 만만해지는 이과식 독서법》을 읽다보면 그 사이에 내가 시도했던 다양한 독서법들이 나온다. SNS로 순간의 감정이 담긴 짧은 호흡의 글에 익숙해졌던 나는 우선 책을 들고 다니기 시작했다. (사실 책은 그냥 들고만 있어도 지적으로 보이는 패션 아이템이다.) 그리고 시간이 날때마다 아주 짧게라도 읽어 내려갔다. 그렇게 한 권, 두 권의 책을 독파하기 시작하니 어느새 긴 호흡의 문장을 읽는 것이 불편하지 않게 되었다.



애초에 독서란 행위는 읽는 사람에게 일말의 변화가 일어날 때 비로소 가치가 있다. 즉 삶의 방향이 바뀌어야 독서가 완성된다. 문자를 따라 읽어가며 지식만 쌓는다고 인간의 내면은 달라지지 않는다. 지금까지 살아오던 자신과 다른 삶을 선택할 정도로 감동했을 때 독서라는 체험은 비로소 숨을 쉬는 것이다.



그리고 책을 읽으면서 스스로 조금씩 나아가고 있음을 느꼈다. 가지고 있었던 고민들을 어느정도 해결하는 수단으로 삼기도 하고, 또 다른 문제들을 직면하는 순간 어떤 선택을 해야되는지 기준들을 세워가기 시작했다. 그러다보니 독서라는 행위가 더이상 부담스럽지 않았다. 오히려 고마웠다. 앞으로도 나는 계속 책을 읽어갈 것이다.


만약 당신이 4년 전의 나처럼 책 한 권을 다 읽는 것이 너무도 힘들다면, 《책 읽기가 만만해지는 이과식 독서법》을 먼저 읽어보기를 추천한다. 누군가가 만들어놓은 독서법 중 가장 맞는 독서법을 내 것으로 만드는 순간의 희열을 잊을 수 없을 테니. 그리고 계속해서 까만 글씨가 새겨진 흰 종이의 세계에서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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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단, 하나의 사랑 1~2 세트 - 전2권 - 최윤교 대본집
최윤교 지음 / 김영사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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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를 지키고 싶은 마음이 무엇입니까?

절망이 앞을 가로막아도 절대 포기하지 않는 마음은 무엇입니까?

《단, 하나의 사랑》 중에서



하나의 대본이 영상으로 표현되어 시청자들에게 선보이기까지의 과정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노력이 들어가는지. 남들이 말하기엔 고작 '그런' 동아리에서 영상을 만들며 알았다. 남들에게는 크게 와닿지 않는 완성품일지라도, 그 하나를 만들기 위해 내가 보낸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그래서 이런 대본집을 읽을 때마다 괜스레 마음 한 편이 찡해온다. 누군가의 대본이, 그를 빛낼 연출이, 더 많은 시청자들에게 와닿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니까.


《단, 하나의 사랑》. 대본집을 읽기 전에 나도 모르게 드라마부터 찾아보기 시작했다. 첫 시작부터 강렬한 도입이 눈길을 끌었고, 극이 절정에 치달을수록 농도 깊어지는 배우들의 연기는 눈길을 사로잡았다. 드라마의 중반부까지 보고서야 대본집을 들었다. '최윤교 작가는 어떤 마음으로 이 드라마를 집필했고, 사람들에게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 그 마음을 들여다보고 싶었다.



건배사가 길었네요.

오늘을 즐기세요. 내일도 무사할지는 아무도 모르니까.



《단, 하나의 사랑》은 선과 악이 섞여 있는 인간 세상을 철저히 낯선 존재가 지켜본다면 어떻게 비칠까라는 생각에서 시작된다. 완벽한 존재인 천사가 오직 사랑 때문에 불완전한 인간이 되고 싶어지는 과정을 통해 사람이, 사람으로서 지향해야 할 '인간성'이란 무엇인지를 다시금 되짚는다. 또, 누구나 꿈꾸는 완벽한 사랑이 결코 완전한 두 사람의 만남이 아니라 부족한 두 사람이 만나 서로를 채워주며 마음을 키워간다는 이야기를 그려낸다.






모르겠습니다. 인간의 몸을 하면, 인간을 알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봅니다.

인간은 대체 왜 이렇습니까?

좋아하는데 왜 가슴이 아픕니까. 뻔히 헛된 줄 알면서, 왜 바라고, 또 바라는 것입니까.

인간의 사랑은 어째서 이토록 어리석은 것입니까?



열일곱에 두 부모를 여의고, 스물셋에 사고로 시각을 잃어버린 연서는 불의의 사고를 당하게 된다. 사고 장소에 찾아온 천사 단은 떨치려 해도 떨칠 수 없는 그녀의 목소리에 인간사에 개입하게 된다. 그리하여 천국으로 가지 못하고 육신을 통해 미션을 수행하라는 신의 벌을 받게 된다. 100일의 시간 동안 그녀에게 '사랑'이 무엇인지 알게 하라. 그녀를 행복하게 만들어줄 갈빗대도 찾고, 사랑만 하면 되는데…… 단은 자신도 모르게 그녀를 볼 때마다 묘한 감정에 휩싸이게 된다.



나는, 연서가 내가 누군지 알았으면 좋겠어. 내가 사람이든 아니든, 죽었든 살았든.

지금의 나와 과거의 나를 모두 알고 사랑해줬으면 좋겠어. 당신은 그렇지 않아?

이해받고 싶지… 않아?



《단, 하나의 사랑》을 읽다 보니 문득 '사랑'에 대한 기준이 생각났다. 어떤 사람을 만나고 싶다며 지인들과 이야기했던 기억은 있었지만, 어떤 사랑을 해보고 싶다는 기억은 없었던 것 같다. 그저 내가 꿈꾸는 사람을 만나면 자연스럽게 좋은 사랑을 하지 않을까, 하고 막연하게 생각했던 것이 전부였다. 어떤 사람을 만나고 싶냐는 질문에는 늘 한결같이 '나에게 좋은 영향을 미치는 사람이었으면 좋겠어, 내가 여기에 안주하지 않고 어딜 향해 나갈 수 있도록 자극이 되는 사람.' 라 대답했다.



누구도 평생, 옆에 있어줄 수 없어. 그건 내가 잘 알아요.

우리한테 주어진 시간이 얼마 안 남았으면, 더 많이 사랑할 거에요.

후회 남지 않도록.



후회 남지 않을 정도로 온전히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먼저 되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 나에게 이렇게 해주길 바라길 보다 내가 먼저 그런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세상을 향해 벽을 세우고 누구보다 까칠했던 연서는 조금씩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법을 배운다. 그녀가 사랑한 단이 그리했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해서는 아니다. 온 마음으로 단을 사랑했던 연서는 서서히 문을 여는 법을, 그리고 더 나아가 다시 세상을 마주하는 법을 스스로 알아간다. 그를 사랑하고 지키고 싶은 마음으로.



때로는 움직이는 화면보다 정적인 글이 주는 울림이 더 클 때가 있다.

천천히, 느리게, 그 글을 다시 곱씹어 본다.

세상에는 이런 사랑의 표현도 있구나, 하고 조용히 마음속에 적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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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잔상들
장혜령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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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형의 것들은 정확한 어떤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 눈에 보이는 형태 그대로 이야기할 수 있는 유형의 것들과는 달리 눈에 보이지 않는 무형의 것들은 명확한 한 마디로 정리하기 어렵다. 사람의 마음도 그렇다. 눈에 보이지 않아 하나의 말로 끝낼 수 없다. '기쁘다'라는 큰 감정의 카테고리 속에서 사람마다 다른 정도의 기쁨을 느끼고, 다양한 형태의 기쁨을 느끼니 말이다. '슬프다'라는 감정도 그렇다.


수많은 마음과 감정 속에서 가장 표현하기 힘든 것은 '사랑'이라 생각한다. 그러니 그만큼 표현도 많은 것이 아닐까 싶고. 드라마 <도깨비>에서는 사랑을 느낀 그 순간을 김인육 시인의 《사랑의 물리학》의 표현을 빌려와 "심장이 하늘에서 땅까지 아찔한 진자운동을 계속하였다 / 첫사랑이었다."라고 말한다. 영화 <러브스토리>에서 제니퍼는 올리버에게 "Love means never having to say you're sorry.(사랑은 미안하다는 말을 해서는 안 되는 거야.)"라고 말하기도 하고.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받는 사람은 서로 다른 세계에 속한다. 사랑하는 사람, 그는 사랑받는 사람이 자기 안의 사랑을 일깨우는 역할일 뿐임을 아는 사람이다. 무수한 사랑과 이별 끝에도 자기 내면에 결코 사라지거나 부서지지 않는 것이 있음을 아는 사람이다.



문득 읽게 된 책 한 구절에 이끌려 《사랑의 잔상들》을 읽게 되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받는 사람.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서로 다른 세계에 속하게 되다니. 사랑을 받는 일도, 사랑을 하는 일도 모두 어렵다. 그럼에도 두 일 중 어떤 일이 더 어렵냐고 묻는다면 나는 단연 '사랑하는 일'이라고 말할 것이다. 누군가가 나를 사랑해주는 일은 그만큼의 노력이 더 필요할 테니. 자신이 가진 온 마음을 표현하는 일이 그리 쉽지 않음을 충분히 알기에. 그래서 《사랑의 잔상들》을 읽는 시간이 좋았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어떤 마음으로 그 사랑을 감싸 안는지 잔잔하게 풀어내기 때문이다.




당신을 사랑해요, 란 말에 대해 나도 당신을 사랑해요, 라는 답을 듣길 바라는 한 사람을 떠올려본다. 두 개의 진술은 실제로 아무런 연관성이 없다. 저는 잘 있어요, 라는 언술 안에는 듣는 상대가 어찌할 수 없는, 말하는 존재의 상태가 내포되어 있을 뿐이다. 그것은 들어와도 된다는 승인과, 상대가 읽었다는 끄덕임과, 하나의 답장과는 무관한 일일 수 있다. 그러나 쓰는 사람은 어쩔 수가 없다.



어느 순간 사랑에 갑과 을이 존재한다는 이야기는 너무도 당연한 말이 되어 버렸다.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의 수신인에게 열심히 보낸 그 사랑이 되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사랑하는 사람은 어느 정도 알고는 있다. 그럼에도 더 말하지 못해 주체할 수 없는 그 마음을, 혹여나 이 마음에 짧은 답변이라도 남겨줄까 끙끙 앓는 그 마음을. 《사랑의 잔상들》은 그동안 사랑하는 사람들이 표현하지 못했던 자신의 마음들을 대신 말해준다. '당신이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감정이 이것은 아닌지요?'라는 물음을 글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말한다.


돌아온 짧은 답변에 사랑하는 사람의 심정은 더욱 모호해진다. 그는 나에게 어떤 의미로 말을 한 걸까,라는 의문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나도 당신을 사랑해요.'라는 답이기를 바라지만 그것으로 해석할 수 없는 이 애석한 답을 부여잡고 밤새 고민한다. 어느새 머리는 터질 지경이다. 이렇게라도 보내지 않으면 답답함에 오늘 밤잠은 다 설칠 것 같은 마음이다.




사랑이란 결국 자기 안에 머무는 감정이라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우리는 사랑하는 대상이 죽거나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야 할 때에도 그 사랑이 완전히 소멸되지는 않음을 경험한다. 외로움 혹은 다른 어떤 이유 때문에 사랑을 좇는다 해도 사실 그것은, 철저히 자기 안에 머문다.



그렇다. 우리가 사랑이 끝났다고 이야기하는 그 순간이 찾아와도 사랑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우리는 그것에 무뎌질 뿐이다. 얼마나 짙은 잔상을 남긴 사랑인지에 따라 그 느낌은 사뭇 다르겠지만. 우리 안에 머문 그 사랑으로 우리는 또 다른 사랑을 시작할 수도 있을 테다. 그래서 이 끝의 순간까지도 장혜령 작가는 애틋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두근거리는 설렘부터 이별이 가져오는 외로움과 공허함의 순간까지. 그 모든 것을 '사랑'이라고 한다. 우리 모두는 매일 사랑하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 나는 이 글을 읽고 있는, 사랑 속에 살고 있는 당신에게 이 책을 권한다. 

당신의 마음에 존재하는 사랑을 마주하길 바라며.



"마음에 사랑하는 사람들이 생겨나는 것이, 그러다 그들에 대한 감정이 변화하고 사라지게 되는 것들이 지금도 두려운 것은 사실이다. 네가 나에게 그랬듯이, 내가 너에게도 그럴 수 있다는 것이. 그러므로 흘러가기 때문에 우리가 목격하는 모든 장면은 궁극적으로는 슬픔에 대한 것이다. 그것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것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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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아메리카나 1~2 - 전2권 - 개정판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지음, 황가한 옮김 / 민음사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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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아닌 곳에서 살게 되는 상상을 해본다. 한국어가 아닌 다른 언어로 인사하며 하루를 시작한다. 한국에선 전혀 상상할 수 없는 생활방식으로 살아가게 되겠지, 흔히 영화와 드라마 속에서 보던 모습 그대로. 그러나 20년 넘게 살아온 방식을 버린 채 타국에서 살아간다는 사실은 두렵게 느껴진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멀리 떨어지는 불안은 물론이고, 낯선 환경 속에서 이방인처럼 서성일 내 모습이 언뜻 보이는 것 같아서.


《엄마는 페미니스트》,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로 주목받는 작가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의 소설 《아메리카나》는 나이지리아 출신의 여성 이페멜루의 삶을 통해 미국 이민자의 삶을 그려낸다.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아닌 비미국인으로서, 백인이 아닌 흑인으로서, 그리고 남성이 아닌 여성으로서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에 적응해가면서 조금씩 달라지는 사고방식과 삶의 방식들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그 지독히도 아픈 성장통이 결코 그녀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님을 확실히 알 수 있다.



세상은 거즈에 싸여 있었다. 그녀는 사물의 형태를 볼 수 있었지만 또렷이는, 절대 또렷이는 볼 수 없었다. 그녀는 오빈제에게 자신이 당연히 할 줄 알아야 하지만 모르는 것들, 자신의 영역으로 흡수했어야 했지만 하지 못한 세세한 것들이 있다고 말했다.



《아메리카나》는 이페멜루와 오빈제의 약 20년에 걸친 사랑과 이별에 관한 이야기 속에서 각자 꿈을 안고 떠난 미국과 영국에서 어떤 현실과 마주했는지를 말한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소설에 매료되는 순간 두 사람의 사랑보다는 그들이 주어진 환경에서 어떤 방식으로 문제를 안게 되는지에 집중하게 된다. 세밀하고 섬세한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만의 묘사는 이페멜루가 가진 고민들을 독자들과 함께 나누도록 만든다. 내가 그녀가 된 것처럼, 어느새 고민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으니.


소위 말하는 '아메리칸드림'을 꿈꿨던 이페멜루는 비자가 붙어 있는 여권을 받는 순간, 새로운 삶이 시작될 것이라는 승리의 성취감에 부풀게 된다. 그러나 도와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일자리 하나 얻지 못하는 현실을 마주하자 그녀는 점점 자신감을 잃게 된다. 무엇보다도 '미국인'들에게 비미국인이며, 흑인인 자신은 그저 수많은 아프리카인 노동자 중 한 명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잉크 한 방울이 옷감에 스며들 듯, 그녀 역시 서서히 그들 속으로 스며들기 시작한다. 물론 자신의 외형이 그들이 거부하지 않을 완전한 소속감을 얻는 데에는 여전히 방해 요소로 작용한다.



이페멜루가 방종한 룸메이크의 따귀를 때리려고 했던 이유는 군침 흘리는 개가 그녀의 베이컨을 먹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녀가 세상과 전쟁 중이었기 때문에, 아침마다 얼굴 없는 적의 무리를 상상하며 멍든 가슴으로 잠에서 깼기 때문이었다. 내일을 마음속에 그릴 수 없다는 사실에 그녀는 공포를 느꼈다. 그녀는 부모님이 자동 응답기에 남긴 메세지를 저장해 두었다. 그것이 마지막으로 듣는 부모님의 목소리가 아니라고 확신할 수가 없었다. 이곳에 있는 것, 언제 다시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 모른 채 외국에서 사는 것은 사랑이 불안으로 변해 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과 같았다.




그녀는 자신이 보고, 느끼고, 경험한 모든 것들을 블로그에 적어내려가기 시작한다. 아프리카에서 온 이민자로서, 이방인으로서 겪은 모든 감정들을 솔직하게 토로한다. 그 과정에서 자신이 가진 생각들을 확고하게 정리한다. 단단해진 이 생각들을 안고 그녀는 다시 나이지리아로 돌아가기로 한다. 미국에 자신이 쌓아두었던 모든 흔적들을 정리한 채.


이페멜루가 자신을 차곡차곡 성장시킬 동안 오빈제 역시 영국에서 그녀와 비슷한 상황을 겪게 된다. "미국에서 석사 학위를 받고, 미국에서 직장을 구하고, 미국에서 사는 것." 오랫동안 품어온 계획은 뜻대로 풀리지 않게 된다. 남들처럼 막연하게 외국에 가고 싶어 했던 것도 아니었기에 더욱 확신에 찼었지만 영국으로 간 그는 전혀 다른 자신의 삶에 지쳐가게 된다. "자신이 갖게 되리라 상상했던 삶, 그리고 노동과 독서, 공포와 희망으로 덧칠된 지금의 삶에 대해 생각했다. 그토록 외롭다고 느꼈던 적이 없었다. "



미국에서 자신의 인종을 자신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남들이 결정해 준다. 지금 모습과 같은 외모를 가진 버락 오바마는 오십 년 전이었다면 버스 뒷자리에 앉아야 했을 것이다. 오늘날 어떤 흑인 남자가 범죄를 저지른다면 버락 오바마는 인상착의가 일치한다는 이유로 불심 검문을 받을 수도 있다. 그 인상착의가 과연 무엇일까? 바로 '흑인 남자'다.



치마만다 응고지 아다치에는 여성으로 사는 삶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각 사회가 만들어놓은 사회적 틀 속에서 얼마나 많은 여성들이 자신이 가진 것들을 하나씩 포기하고, 결국 스스로를 잃어버리게 되는지를. 사랑에 모든 것을 울부짖는 고모를 보며 이페멜루가 생각했던 것들, 결혼을 한 뒤 이전의 자신을 상상할 수 없는 형수를 보는 오빈제의 시선에서 아다치에가 여성들의 삶에 얼마나 주목하고 있는지 느껴진다. 그리고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은 채 앞으로 나아가는 이페멜루를 통해 그녀는 많은 여성들에게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모두 표현한다.



그녀가 자신이 잃어버린 모든 가능성을 아쉬워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그는 이해되지 않았다. 여자들은 처음부터 그런 자질을 갖고 태어난 걸까? 아니면 개인적인 회한을 숨기고, 자기 인생을 중단하고, 자녀 양육에 온전히 투신하는 법을 후천적으로 배운 걸까?



복합적인 문제들을 하나의 소설에 모두 풀어놓을 수 있다니. 아다치에의 《아메리카나》는 어떤 내용의 소설이라고 집약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웠다. 이페멜루와 오빈제가 경험했던 많은 문제들을 함께 겪은 독자로서, 이 소설이 결코 쉽게 읽히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럼에도 그 시간을 함께한다면 당신 역시 그들이 그랬던 것처럼 가지고 있던 생각의 일부분이 산산조각나는 경험을 하게 될 지도 모른다. 그리고 《아메리카나》의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 그 조각난 부분이 아닌 새로운 부분들이 당신의 생각을 다시 메꿀 것이다, 이전보다 더 단단하고 견고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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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당 바캉스 - 제2회 웅진주니어 그림책 공모전 우수상 웅진 모두의 그림책 23
심보영 지음 / 웅진주니어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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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따라 덥고 습한 여름으로 기억되지만 여름만이 가지는 시원하고 청량한 이미지는 그 어떤 계절에서도 상상할 수 없다. 서점가에서도 그런 이미지를 가진 책들이 하나, 둘씩 보이기 시작한지 오래다. 우연히 그 계절에 맞는 책을 읽게 되면 다음 해에 그 계절을 새로이 맞이하게 되었을 때 문득 떠올라 찾게 된다. 올해로 2회를 맞이한 웅진주니어 그림책 공모전 수상작 《식당 바캉스》 역시 여름이 되면 떠오를 것 같다. 귀여운 붕어빵 버스가 인상적이었으니까.


제2회 웅진주니어 그림책 공모전 우수상 작품인 《식당 바캉스》는 동글동글한 그림체가 돋보인다. 표지를 보자마자 '귀여워~'를 외쳤다. 음식을 좋아하니 《식당 바캉스》라는 제목에서부터 신났다. 맛있는 것들이 귀여운 그림체로 표현된다니! 심보영 작가의 상상력이 기대되었다.







휴가철이 시작되고 곳곳에 바다와 산에서 여름을 보내는 지인들의 소식이 들려온다. 아직 휴가를 가지 못한 나는 부러운 마음으로 그 이야기를 듣는 게 슬프다. 《식당 바캉스》 속 휴가는 오죽할까. 엉뚱하고 귀여운 상상력으로 무장한 이 휴가 티켓을 얻고 싶다고 생각했다. 여름하면 생각나는 음식들은 물론이고, 좋아서 자주 먹는 음식들을 바캉스 내내 즐길 수 있으니 이보다 더 즐거운 휴가는 없을 듯 싶었다.






심플하면서도 동시에 형형색색의 화려한 일러스트를 좋아하기에 책을 꼼꼼히 살펴보았다. 살짝 아재 개그처럼 느껴지는 유머러스한 표현들이 피식, 피식 웃게 만든다. 한껏 올라간 광대가 내려오기도 전에 《식당 바캉스》는 따뜻한 분위기로 마지막을 장식한다. '음식'이 가지는 그 특유의 따뜻함을.


어른이 되어갈수록 신나는 일이 줄어든다는 것을 깨닫고 있다. 조금은 웃기지만 경험하고 깨닫는 것들이 많아질수록 이전보다 더 무섭고 두려워하는 나를 종종 발견한다. '그때 이렇게 되어버렸으니까 피하는 쪽을 택하자.'라며 위험 요소들을 맞닥뜨리는 것이 힘들어하는 나를. 자꾸만 현실적으로 생각하는 그런 어른이 되어가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그래서 《식당 바캉스》를 읽는 시간이 좋았다. 어른들도 때로는 신나는 일들을 즐길 수 있다고 말하는 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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