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생각은 사양합니다 - 잘해주고 상처받는 착한 사람 탈출 프로젝트
한경은 지음 / 수오서재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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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나 생의 과업이 있다. 저마다 짊어져야 할 고통이 있고, 완수해야 할 삶의 주제가 있다. 그들의 외로움과 공허를 채우고 자신의 수치를 가리기 위해 나를 사용하도록 내버려 둘 순 없다. 그건 그들의 몫이다. 애초부터 내가 대신해줄 수 없는 일이다.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나는 타인의 부탁을 쉽게 거절하지 못하는 타입이다. 더해서 내가 타인에게 부탁하는 것도 조금 불편해하는 타입이다. 웃기게도 이 두 상황에서 나는 나의 어떤 감정을 표현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나이를 먹으면서 거절하는 법도, 부탁하는 법도 조금씩 배워가고 있지만 (과거에 비하면 지금은 웬만큼 말은 한다!) 여전히 거절과 부탁 앞에서 나는 수없이 많은 시나리오들을 머릿속에 그려낸다. 물론 거절의 상황이나 부탁의 상황에서 내가 쓴 수십 가지의 시나리오 중 가장 최악은 일어나지 않았다. (얼마나 최악까지 생각하길래? 스스로도 궁금하다.)


'상대'가 나의 거절이나 부탁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생각하는 것이 좋은 상황을 만들 수 있다는 생각으로 끙끙 앓는 나를 종종 발견하곤 한다. 내 감정보다 '죄책감, 미안함'이 먼저인 사람들에게 《당신 생각은 사양합니다》은 사이다 같은 시원한 프로젝트를 제안한다. 일명 착한 사람 탈출 프로젝트.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고 사랑받고 싶은 마음 때문에 힘들고 아파하는 사람들을 위해 심리상담사인 저자 한경은은 오롯이 자신에게 집중하는 방법들을 이야기한다.



남은 내가 될 수 없다. '우리가 남이가?'라고 물으면 '남이지 그럼!' 하고 답해야 한다. 나 외에 모든 존재는 남이다. 부모도 자식도 모두 '타자'이다. 그러니 남의 일에 내 마음을 쏟으며 남의 인생에 얹혀갈 요량을 내다 버려야 한다. 나에 관한, 내가 원하는,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에 주목하자.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나에 관한 것밖에 없다.




우리는 타인에게 온전히 받아들여지기를 원한다. 조건부 칭찬을 받는 것도 싫다. 좋은 평가를 받기 위해 시험 치듯 살며, 아등바등하는 게 내 삶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잘 모르겠다. 그동안 미련하도록 착해서 고달팠고, 이제는 정말 힘에 부친다. 그리고 외롭다.


우리는 왜 스스로가 아닌 타인의 감정을 최우선으로 여기는 걸까? 그 질문에 대한 궁금증을 저자는 자신에게 상담을 받았던 내담자들의 사례를 통해 설명한다. 더구나 한경은 작가는 어머니와 자신의 관계를 통해 '착한 사람'이 되고자 했던 자신의 경험담을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어렸을 때는 '착하다'라는 말을 듣는 것이 좋았다. 하지만 언제부터인지 그 한 단어에 내 모든 것들이 가려지는 느낌을 받기 시작했다. 한 발자국씩 더 큰 사회로 나아가면서 이 말은 오히려 독이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착하다'라는 말이 가져온 틀에 어떻게든 들어가려고 스스로를 욱여넣고 있었고, '그 틀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서는 안된다'라는 더 작은 틀까지 들어가려고 했다.


《당신 생각은 사양합니다》는 이 과정 속에서 사실 나를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은 '나 자신'이라는 사실을 깨닫도록 한다. 특히 타인에게 인정받지 못하고 사랑받지 못한다는 생각에서 오는 죄책감은 그 누구보다 스스로를 냉담하게 대하도록 만든다는 사실을. 그래서 한경은 작가는 작가는 죄책감을 털어낼 수 있는 방법들을 차근히 제시한다. 가장 근본적으로 내 속에 숨겨진 '진실된 감정'과 마주하는 것부터 시작하기를. 책을 읽으며 스스로에게 한 번이라도 진지하게 감정을 묻고 마주하려고 했었는지 끊임없이 질문하도록 만든다. 다른 사람을 떠나 나 스스로 내 감정에 솔직했던 적이 있는가?







비난 받는 것이 두려워 절절맸던 자신에게, 사실 가장 큰 비난을 쏟아부은 건 남이 아니라 자신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두 번째로 잘 사는 방식이라고 생각했던 건 칭찬받고 인정받는 삶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할 수 있는 만큼'만 하려고 한다.



'착하다'라는 말의 틀이 나를 옥죈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을 때부터 나는 누군가에게 "착하다"라는 말을 들으면 그 말에 쉽게 응하지 않는다. 때로는 싫어하는 말이라고 단호히 이야기하기도 한다. 《당신 생각은 사양합니다》을 읽었다고 해서 바로 내 감정과 마주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었다. 왠지 모를 쑥스러움이 가득했다. (나는 나와 내외하는 사이였나 보다.) 하지만 스스로 감정을 속이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나는 모든 것을 멈추고 "그래서 지금 가장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물으려 한다. 그렇게 스스로를 아껴가는 방법을 알아가기를 바라면서. 아, 지금도 충분히 잘하고 있다.



인생이 내 마음대로 되지 않기도 하고, 뜻하지 않게 내 마음에 쏙 들 때도 있다. 그저 그런 세상에서, 그저 그런 나 자신과 친하게 지내보자. 친하다는 건 내 허접한 속내도 보여주고, 그 인간의 실수도 받아주는 거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단비가 내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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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로틱 조선 - 우리가 몰랐던 조선인들의 성 이야기
박영규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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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 아침의 나라, 선비의 나라, 은자의 나라, 동방예의지국……. 모두 조선을 수식하는 표현이다. 이 미사여구들을 뒤집어 보면, 조선은 유학의 탈을 쓴 양반들만의 폐쇄적인 나라였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 이는 우리 역사에서 조선이라는 나라가 가장 폐쇄적인 사회였다는 사실로도 확인된다. 특히 성(性)에 대한 폐쇄성은 가히 폭력적이었다.



오랜 한국 역사를 공부하다 보면, 한반도에 터를 잡았던 나라 중 조선의 폐쇄성은 두드러진다. 불교가 아닌 유교를 국교로 삼아 시작된 나라는 사대부의 예의를 강조하며, 유학을 공부하는 양반들 중심으로 사회를 끌어간다. 그래서 조선이 풍기는 이미지는 한반도에 터를 잡았던 다른 나라와는 달리 조용하고, 정적이다. 이런 이미지 때문인지 '조선'이라는 나라와 '성(性)'이라는 단어는 전혀 상관없는 듯한 느낌을 자아낸다. 정말로 조선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성욕을 금기시하며, 굳은 선비의 절개를 고스란히 지켜냈을까?


《한 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으로 알려진 박영규는 그동안 우리가 몰랐던 조선인들의 성 이야기를 《에로틱 조선》에 풀어낸다. '에로틱'과 '조선'이 결합된 제목은 그 자체만으로도 독자들의 호기심을 자아낸다. 지조와 절개를 강조했던 이 나라에서 에로티시즘은 상상하기 다소 어려운 소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박영규는 이 모든 생각을 뒤집어 놓는다. 가두고 누르고 가려도 완전히 봉쇄할 수 없는 인간의 본능인 성욕을 당시의 조선 역시 어찌할 바를 몰랐다는 사실을 역사적 기록에서 찾아내면서 말이다. 겉으로는 도덕군자를 자처했던 선비들이 속으로는 음탕함의 극치를 내달리며, 제도적으로 허용하는 장치를 만들기까지 했다니.



첩 제도는 남성 중심 사회가 낳은 차별의 산물이다. 대를 잇는다는 핑곗거리가 있었지만, 명분을 만들기 위해 둘러댄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했다. 첩을 두는 본질적인 목적은 남성들의 성욕을 해소하는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첩 제도는 시대가 만들어낸 합법적인 성폭력의 일환이었고, 첩은 남성 중심 사회에서 희생된 존재였다.



도덕군자의 나라에서 가장 많은 희생을 요구당한 것은 여성이었다. 《에로틱 조선》에서는 남성들의 권력을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었던 여성들이 겪어야 했던 또 다른 희생에 대해 이야기한다. 기생, 궁녀, 의녀, 첩의 삶들을 조명하며 그들이 남성들의 에로틱 심벌이 될 수밖에 없었던 사회적 분위기를 짚어낸다. 고려와 조선 초의 여성들이 과거 시험을 제외하고 남성들과 비슷한 지위를 가졌던 것에 비해 조선의 여성들의 삶은 억눌리고 고통받는 삶을 살았음을 《에로틱 조선》에서는 성적인 관점에서 설명한다.


이 역설적인 상황에서 더 많은 폐단이 발생하기 마련이다. 기생 하나를 놓고 서로 차지하겠다며 다투는 사대부의 모습은 말 그대로 '양반'인 셈이다. 시주를 받기 위해 돌아다니던 중은 일반 아낙네와 정을 통하는 것도 다반사였으며, 첩 제도에도 모자랐던 선비들은 그들의 여종들에게까지 손을 뻗기 시작한다. 그러다 보니 여성들 사이에서 질투는 살인이라는 처참한 결과까지 불러온다. 이처럼 조선 사회 이곳저곳에 단편적으로 흩어졌던 에로티시즘을 모아놓은 《에로틱 조선》은 조선이라는 한 사회를 다시 바라보게 만든다.



가뭄이나 홍수가 극심하거나 궁궐에 우환이 이어질 때에도 궁녀들을 내보냈다. 이 경우에는 대개 젊은 나인들이 출궁되었는데, 나라의 재난이 혼인하지 못한 처녀들의 원한이 모인 결과라는 속설 때문이었다. 지금 보기에는 우습고 미신적인 이 믿음이 조선 시대에는 뿌리 깊게 자리했다. 남성도 예외가 아니어서 나라가 어지러울 때마다 환관들도 부인을 들이고 가정을 이루도록 했다.



조선의 에로스가 마냥 아름다워 보이지는 않는다. 모든 것을 감추려고 했던 그 폐쇄성은 결국 많은 여성들에게 희생을 강요했고, 오히려 부적절한 관계들을 양산했다. 청렴할 것만 같았던 선비들의 가면 뒤에는 다양한 스캔들이 난무했다. 그 민낯을 보고 나니 오히려 그 폐쇄성이 더 문란해 보였고, 부끄러웠다. 무엇보다도 그 속에서 마주한 여성들의 가련한 삶들이 더욱 불편하게 만들었다.


과거 조상들의 삶에 대한 호기심으로 시작된 《에로틱 조선》에 대한 탐독은 그렇게 씁쓸함을 안겨주며 끝난다. 모든 역사가 아름다울 수 없듯이, 이 이야기 역시 그리 아름답지는 않다. 지나간 역사 속의 아픈 페이지, 그것을 들춰봤을 뿐인데. 무언가 허탈감이 남는 이유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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널 죽이기 위한 다섯 가지 테스트
코즈카 토리 지음, 이희정 옮김 / ㈜소미미디어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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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은 불안정하다. 기억의 불안정성을 메우기 위해 우리는 ‘기록’을 택한다. 기록하는 방식은 사람마다 다르다. 누군가는 글로 정리하고, 누군가는 그림으로 정리한다. 요즘처럼 좋은 화질의 스마트폰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사진이나 영상을 남기면서 불안정한 기억을 대신한다. 아무리 오랫동안 기억하려고 해도 잊어버리게 되는 순간이 찾아와 속상해지지만 이윽고 기록으로 남겨진 것들을 보는 순간, 잊힌 기억들이 떠오르고 기분이 좋아진다. 사진 한 장, 글 한 편으로 머릿속에서 흐려진 기억을 다시 상기할 수 있으니 기억이 사라지기 전에 기록하는 것을 선호한다. 특히 좋은 사람들과 함께 한 기억이라면 더더욱.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가 연재되었던 <소설가가 되자>에서 큰 인기를 누렸던 《널 죽이기 위한 다섯 가지 테스트》은 '소중한 사람과의 기억'에 대한 가슴 뭉클하고 순수한 러브 스토리를 그려낸다. 우연히 같은 수업을 듣게 된 사진학과생 리쿠와 영상학과생 사요가 서로 가진 상처를 보듬어주는 과정을 보여주며 코즈카 토리는 독자들에게 가슴 설레는 캠퍼스 로맨스를 선사한다.

사람은 카메라 너머로 볼 때 더 알기 쉽다.

그 사실을 깨달은 게 언제였을까. 파인더로 들여다보면 그 사람의 속마음을 접하는 느낌이 들었다. 무의식적으로 남들과 거리를 두는 리쿠에게 카메라는 자기 마음대로 다가갈 수도 멀어질 수도 있는 편리한 도구였다.

한 번 더 카메라를 대고 사요에게 초점을 맞추었다. 

미술대학교 사진학과에 다니는 리쿠는 늘 카메라를 가지고 다니며 사진을 찍는다. 그리고 우연히 듣게 된 영상 수업에서 자신과 비슷하게 비디오카메라를 꺼내 말없이 촬영을 하는 영상학과 사요를 보게 된다. 친구들과 함께 다니면서도 늘 항상 비디오카메라로 친구들을 촬영하는 사요의 모습을 궁금해하는 리쿠는 자신의 프레임 속에 그녀를 넣고자 한다. 그러나 무슨 영문에서인지 다른 사람을 촬영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자신을 촬영하지 말라는 사요의 주의에 리쿠는 더욱 그녀를 향한 호기심이 커져간다. 한편, 한 학기 동안 영상 과제를 촬영하게 된 리쿠는 사요와 짝이 된다. 과연, 둘은 좋은 호흡으로 과제를 끝마칠 수 있을까?

촬영하는 모습을 보기는 했지만 실제로 찍은 영상은 본 적이 없다. 그것만 보면 그녀를 조금 더 이해할 수 있을까. 카메라 렌즈 너머로도 들여다볼 수 없는 본심을 알 수 있을까. 

코즈타 토리는 닮은 듯 다른 두 남녀를 주인공으로 하여 독자들의 호기심을 자아내며, 풋풋하고 설레는 로맨스를 전개한다. 리쿠의 시점으로 진행되는 소설 속에서 독자들은 함께 '사요'에 대해 궁금해한다. 그녀는 왜 비디오카메라를 들고 모두를 촬영하고 있을까? 《널 죽이기 위한 다섯 가지 테스트》은 조금은 느린 호흡으로 그 질문에 대한 답을 풀어나간다. 그리고 질문에 대한 명쾌한 답이 나오는 순간, 로맨스 소설답지 않은 《널 죽이기 위한 다섯 가지 테스트》라는 제목의 의미가 와닿게 된다.

《널 죽이기 위한 다섯 가지 테스트》를 읽으며 좋았던 건 나의 대학 시절의 모습을 다시 보는 듯한 기분 때문이었다. 신문방송학을 전공하며 한 학기 동안 팀 별로 영상을 제작했던 과정을, 서로 의견을 조율해가며 과제를 하는 리쿠와 사요의 모습에서 겹쳐 보였다. (물론 슬프게도 두 사람처럼 로맨스가 펼쳐지며 아름답게 과제까지 완벽하게 마무리했다는 결말은 내 이야기 속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다.) 영상을 제작하며 끊임없이 가졌던 회의 시간, 콘티와 스토리보드 제작, 그리고 촬영부터 편집까지 당시에는 죽을 만큼 힘들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웃으며 이야기할 수 있는 시간들이 떠올랐다. 어쩌면 그래서 두 사람의 감정에 더욱 이입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리고 그때의 기억은 나의 드라이브 어딘가에 저장되어 있다. 글로, 사진으로, 그리고 영상으로. 때때로 드라이브를 정리하다 보게 되는 기록들은 당시의 느낌들을 다시 떠올리게 만든다. 《널 죽이기 위한 다섯 가지 테스트》를 통해 코즈타 토리는 독자들에게 당신들의 기억을 상기시킬 수 있는 기록들을 다시 생각할 수 있도록 한다. 이 소설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는 순간, 내가 어딘가에 저장해뒀을 기억의 기록들을 찾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잠시나마 그때,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갈 수 있는.

"꿈을 계속 갖기 위해 꿈을 꾼다고 생각해."

꿈속에서 아무리 소원이 이루어졌다고 해도 깨어나면 또다시 꿈을 좇는 일상이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꿈이 이루어진 기쁨을, 설령 꿈의 내용은 잊어버리더라도 그 감각만은 기억하고 있다. 그래서 또다시 그 기쁨을 느끼기 위해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된다고 사요는 이야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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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월일
옌롄커 지음, 김태성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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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갑자기 지나간 세월을 돌이켜보았다.

얼마나 많은 시간이 지났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순간 낮과 밤, 새벽, 황혼, 일몰과 월출 등 하루 안의 시간만 알 뿐,

몇 월 며칠인지는 전혀 모른다는 것을 깨달았다.

셴 할아버지는 머릿속이 텅 비어버린 것을 느꼈다.

《연월일》 중에서


"


급격한 도시화로 인해 사람들은 농촌을 떠나 도시에 살기 시작했다. 도시에 태어나 자랐기에 농촌 생활은 마치 먼 곳의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문학은 당대의 시대를 반영한다.'는 누구나 아는 사실은 최근 문학에서 보이는 배경들이 더이상 농촌이 아님을 더욱 절실히 보여준다. 도시를 배경으로, 그 속에서 사람들이 느낄 수 있는 고립감과 외로움 등. 그리고 더 나아가 우리에게 닥칠 미래, 특히 이 도시를 배경으로 한 디스토피아를 그려내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래서 농촌에서 벗어난 독자들에게 농촌 배경은 어딘가 어색한 느낌을 자아낸다.


중국 소설에 쉽게 다가가기 어려운 이유 중 하나는 아마 그 때문이리라. 농촌보다 도시 생활이 익숙한 사람들에게 농촌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해 공감하기 어려운 탓이 아닐까. 《연 월 일》은 우리에게 다소 낯설게 느껴질 수 있는 농촌을 배경으로 한 4개의 단편 소설들을 묶은 책이다. 오랫동안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되며, 중국 당대 최고의 소설가로 불리는 옌렌커는 자신의 작품들을 하나로 주제로 모아낸다. '가난과 굶주림, 그 속에서의 다양한 인간 군상들.' 도시 배경 속에서 비춰지는 탐욕 속에서의 다양한 인간 군상들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의 주제로.



만년달력이 없이는 몇 월 며칠인지 알 수가 없을 것이고 날짜를 정확히 알지 못하면 옥수수가 언제 다 여무는지 알 수 없을 것 같았다. 어쩌면 가을 수확까지 한 달이 남았을지도 몰랐다. 아니면 40일 정도 남았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천리만리 먼 세월까지 매일 무얼 먹고 산단 말인가? 밭에 뿌려진 종자들은 이미 쥐들이 깡그리 먹어치운 터였다.



<연 월 일>, <골수>, <천궁도>, <할아버지 할머니의 사랑>, 총 4편의 단편 소설들의 주인공들은 어디하나 부유하지 않다. 가난으로 인한 굶주림은 일상일뿐더러 그들의 삶이 어디 하나 나아질 기미는 보이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이들은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세상의 이치를 깨닫고자 하는 태도를 보이지도 않는다. 그저 자신이 생각할 수 있는, 딱 그만큼의 생각 속에서 하루하루를 버텨나갈 뿐이다. 옌롄커는 오로지 이들의 행적에 집중한다. 그 특유만의 묘사로.



골목 끄트머리에 이르러 넓은 황톳길을 건너자 밝고 깨끗한 햇빛이 보였다. 햇빛 속에 먼지가 흩날리는 금성과 진홍빛 하늘 끝, 비취빛 숲과 파란 농작물드이 보이자 이내 마음이 평온해졌다. 알고 보니 죽음이라는 것도 그리 대단한 일이 아니었다. 등불이 꺼지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죽음이 어찌 꼭 좋은 일이 아니라고만 말할 수 있겠는가?



옌롄커의 작품을 처음 읽는 순간, 60~70년대에 쓰여진 한국 농촌 소설들이 절로 생각났다. 특히 김동인의 《감자》, 나도향의 《벙어리 삼룡이》 같은 지극히 향토적이고 토속적인 농촌의 정취가 물씬 풍겨져 왔다. 익숙한 듯 익숙하지 않은 이 느낌은 《연월일》의 페이지를 계속해서 넘기도록 만들었다. 오래 전 한국 문학에서 보았던 익숙한 분위기와 뭐라 형언할 수 없는 중국식 표현의 조화는 독특한 끌림을 자아낸다. 우리나라와의 해학, 풍자와는 사뭇 다른 색이랄까.



어망을 거둘 때 나는 청백색 물방울 튀는 소리가 났다. 셴 할아버지는 이 소리가 물소리도 아니고 나무 소리도 아니고 풀 속의 벌레 소리도 아니라는 것을 잘 알았다. 이는 광활하고 허무한 밤이 극도의 정적 속에서 응집해내는 적막의 소리였다. 할아버지는 계속 손가락으로 개의 머리털을 어루만지면서 등줄기를 따라 꼬리까지 갔다가 다시 머리로 돌아왔다. 개는 이제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사실 그리 많은 중국 문학을 읽지 않은 터라 중국에서는 어떤 분위기의 소설들이 한 주류를 이루고 있는지 잘 알지는 못한다. 그러나 서서히 달라져가고 있는 그곳의 정서를 생각하면 이러한 농촌소설에서 조금씩 탈피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을까? 마치 산업화가 시작되고 서서히 도시로 모인 우리가 이제는 농촌보다 도시를 배경으로 하는 소설들을, 더이상 가난과 굶주림보다는 탐욕과 외로움, 고독함을 앓고 있는 인물들이 주류를 이루는 문학들을 써내는 것처럼.


문학은 당대의 시대를 반영한다는 특성은 우리가 현재 놓인 상황과 마주하게 만들면서 동시에 과거의 우리가 직면한 문제도 다시 돌아보게끔 만든다. 그러기에 문학이 지나온 발자취는 너무도 특별하다. 우리와 인접한 중국이라는 나라의 문학을 통해 한국 문학을 다시 되돌아 보게 되다니, 신기한 경험이 아닐 수 없다. 앞으로의 한국 문학, 그리고 더불어 중국 문학이 걸어갈 길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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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 와, 이런 정신과 의사는 처음이지? - 웨이보 인싸 @하오선생의 마음치유 트윗 32
안정병원 하오선생 지음, 김소희 옮김 / 작가정신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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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어차피 사람은 모두 한 권의 책과 같은 것이 아닐까.


읽어도 이해 안 되는 사람이 있고,


계속 읽어볼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어서 와, 이런 정신과 의사는 처음이지?》 중에서



예전과 달리 '정신과'에 대한 많은 장벽이 허물어지고 있음을 느낀다. 어디서도 쉽게 접할 수 없어 일반인들로서는 알기 어려웠던 영역이 책이나 다큐멘터리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어느 정도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오래전부터 존재했던 '정신 치료'에 대한 사회의 따가운 시선이 여전히 남아있는 탓에 부정적인 이미지는 쉽게 벗겨지지 않지만, 자신의 투병 사실을 솔직히 고백하는 수기나 더 많은 사람들이 찾아올 수 있도록 손길을 내미는 의료계 사람들의 이야기들로 하여금 이 이미지도 머지않아 사라지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어서 와, 이런 정신과 의사는 처음이지?》는 꽤나 흥미로운 책이다. 중국 안정병원의 정신과 의사이자 SNS 웨이보의 인기 블로거인 하오 선생의 《어서 와, 이런 정신과 의사는 처음이지?》은 그가 안정병원에서 근무하면서 10년간 경험한 것과 5년간 정리한 것을 3년에 걸쳐 글로 탄생시킨 첫 책이다. 정신과 의사로서 바라본 병원의 일상을 보여주며, 자신이 만난 환자들이 가진 내면세계를 펼쳐낸다.



나는 매일 펑위와 같은 환자들을 만나왔다. 그들은 저마다 현실에 대한 괴로움으로 심리적 억압과 우울, 절망을 겪고 있으며 자신을 믿지 못하고 타인을 받아들이지 못해 어두운 구석에 혼자 고립되어 있곤 했다.



'정신병원에는 어떤 환자들이 찾아오게 되는 걸까?'라는 질문에 하오 선생은 생생한 시선으로 전해준다. 기본적으로 알고 있는 우울증, 불면증 등등 정신적 문제를 떠나서 다양한 사례의 환자들의 모습을 보여주며, 환자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에 대해 세세한 설명을 덧붙인다. 그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대하는 과정 속에서 정신 질환에 대해 많은 것을 알지 못하는 일반 독자로서는 흥미를 느낄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도 그 과정에서 하오 선생의 인간적 면모는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유쾌하고 재치 있게 사람들의 마음을 표현해내는 하오 선생의 글 속에서 느껴지는 이미지는 마치 오쿠다 히데오의 소설 《공중그네》 속 이라부 선생을 보는 듯하다. (물론 하오 선생은 소설 속 인물이 아닌 실존 인물이다!) 이라부 선생처럼 의사라고 믿기지 않을 이상한 말투를 사용하지는 않지만, 환자를 대하는 모습은 비슷해 보인다. 단순한 '환자'라고 여기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때로 농담을 던지거나 진심을 다한 조언을 하며 '친구'같은 모습으로 다가가기 때문이다. 자신의 병을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 없을 그런 딱딱한 이미지가 아닌 친근하고 재치 있는 의사로서, 하오 선생은 환자 입장에서는 매력적인 의사로 느껴질 수밖에.





나는 더 이상 펑위를 나무라지 않았다. 병의 고통이 가져오는 '해방'에 대한 갈망을 잘 알고 있었으니까. 환자들은 병의 고통을 감당할 수 없을 때, 특히 희망, 이를테면 치료에 대한 희망, 삶에 대한 희망, 생명에 대한 희망이 보이지 않으면 죽음을 일종의 해방으로 여긴다. 이건 마치 감기에 걸리면 재채기가 나오는 것처럼 병으로 인한 것일 뿐, 우리가 정상적인 상황에서 이해하고 있는 '자살'과는 다르다.



중국 소설이나 에세이는 개인적으로 진입 장벽이 높다고 느끼는 편이다. 어딘가 한국 정서로는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생활상과 문화를 반영한 유머러스한 표현이 부담스럽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어서 와, 이런 정신과 의사는 처음이지?》는 SNS 웨이보에 그가 작성한 글을 엮어 만든 책이기 때문에, 꽤나 재미있는 표현들이 돋보인다. 하오 선생만이 가진 특유의 유머들이 글 속에 자유롭게 퍼져 있달까. 하지만 때로는 그들의 문화를 알아야 더 크게 웃을 수 있는 표현들이 문화적 차이로 마음껏 음미할 수 없어서 아쉬웠다.


사실 우리 모두는 크고 작은 정신 질환을 안고 살아간다. 하오 선생의 유쾌한 글 속에 있는 환자들이 전부가 아닐뿐더러 이 책을 읽은 사람들 중에 남에게 말하지 못할 고민으로 밤잠 이루지 못하는 독자들도 있을 수 있다. 그래서 《어서 와, 이런 정신과 의사는 처음이지?》와 같은 책들이 자주 사람들의 눈에 띄길 바란다. 하오 선생이 만났던 일부의 환자들처럼 정말 대화로 가볍게 풀릴 수 있을 문제일 수도 있으니까. 그렇게 마음 아파하는 사람들이 적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들을 위해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정신 질환은 두려운 것이 아닙니다. 감기에 걸리거나 열이 나는 것처럼 우리 몸이 아픈 것일 뿐이죠. 우리가 정신 질환에 대해 정확하게 인식할 수 있다면, 정신 질환 환자들을 좀 더 바르게 대할 수 있을 것이고, 그들이 자신의 병을 마주하도록 도울 수 있을 겁니다. 동시에 여러분은 곧 알게 되실 거예요. 정신 질환 환자들에게도 귀여운 구석이 참으로 많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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