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들러스 타운의 동양 상점
우성준 지음, 송섬별 옮김 / 아토포스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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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지난 겨울, 영어 회화 공부가 필요하다고 생각해 학원을 다니기 시작했다. 드라마, 영화는 물론이고 유튜브, 인터뷰 프로그램 등 영어가 흘러나오는 영상은 모두 수업자료로 사용하는 수업이었다. 토익 공부를 했던 사람들이라면 흔히 구분 짓는 미국식, 영국식, 호주식 영어 외에도 다양한 억양의 영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 중, 눈길을 끌었던 건 한국계 이민자들의 이야기를 다룬 캐나다 드라마 <김씨네 편의점 Kim's convenience> 와 중국계 이민자들의 이야기를 다룬 미국 드라마 <프레쉬 오프 더 보트 Fresh off the boat>였다.


당시에 나는 캐나다 워홀을 꿈꾸고 있었고, 그래서 영어를 더 잘하고 싶었다. 영화나 팝송 등으로 익숙해진 억양이 아닌 영어를 듣는 순간 나는 당황스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딱딱 끊어지면서 어딘가 엉성한 느낌의 억양. 조금은 우스꽝스럽게 느껴지는 이 영어를 듣고 나니 무언가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만약 내가 이대로 한국을 떠나 외국에서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며 살 수 있을까?



15년 전에는 지희도 행복했고 남편은 아메리칸드림을 약속했었다. 사실 남편이 그녀의 발을 비틀어서 억지로 이곳으로 끌고 온 것도 아닌데 지금 두 사람은 어디에 있나? 아직도 아파트에 살면서 토요일 아침이면 위층에서 귀가 찢어지게 틀어 대는 스페인 음악에 잠을 깨고, 쇼핑몰에 입점한 할인점에서 구찌 지갑 모조품을 팔면서 간신히 수지뉴저지 맞는 장사를 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휴가를 간 지도 3년이 지났고 그때도 뉴저지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고작 모기가 끓는 뉴저지 해변가 모텔에 묵으며 돈을 쓴 게 다였다. / p.167



소설 《페들러스 타운의 동양 상점》은 드라마 <김씨네 편의점>, <프레쉬 오프 더 보트>처럼 아메리칸드림을 꿈꾸며 한국을 떠나 미국으로 간 한국계 이민자들의 이야기를 그려낸다. 데이빗이라는 영어 이름을 가진 대준의 가족과 홍씨네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이민자들과 그들의 2세대의 삶을 보여준다. 특히 저자 우성준이 한국계 이민자라는 점에서 엉성하게 영어를 배우기 시작하며 적응하는 대준이의 모습에서 그의 어린 시절이 언뜻 비춰지는 느낌을 받는다.



이상하게도 이 깨달음이 울적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희망이 샘솟았다. 우울이 정말 내 안에 있는 거라면, 그 우울의 열쇠도 내가 쥐고 있다는 뜻이니까. 나는 계속 자기 연민의 웅덩이 속을 헤엄칠 수도 있고, 앞으로 나아갈 수도 있을 것이다. 다른 누가 아니라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일이다. / p. 54



먼저 미국으로 떠난 아버지를 따라 미국으로 온 대준이네 가족은 의사소통이 쉽지 않은 이 생활을 적응할 수 있을지 걱정한다. 날이 갈수록 짧아져가는 친구들의 편지는 서운하게 만들고, 밤새 열심히 외운 몇 마디 영어로 손님들께 물건을 파는 일은 너무도 버겁다. 김치 냄새를 싫어하는 손님들을 피해 창고에서 도시락을 먹거나 그마저도 허용되지 않아 기름이 뚝뚝 흐르는 피자를 먹어야 하는 일도 고역이다. 그럼에도 대준이네 가족은 페들러스 타운에 적응해가기 시작한다.


드라마에서 문법도, 단어도 엉성한 영어를 들어서 그럴까. 엄마 인영이 외운 영어 몇 마디로 손님들께 전구를 파는 장면이 쉽게 그려졌다. 12인치 전구를 팔기 위해 알음알음 말하는 그녀에게 알아듣지 못한다고 신경질을 내던 손님의 모습이 떠올랐고, 기회가 된다면 한국어 번역본이 아닌 영어로 쓰인 책을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어 번역보다 능숙지 못한 영어로 표현된 글이 그들의 고충을 더욱 드러낼 수 있을 테니까.







어서 어른이 되고 싶어. 정말 빨리.

그래서 내 마음대로 선택하고, 내가 가고 싶은 곳에 가고,

내가 있고 싶은 곳에 있고 싶어.


아메리칸드림을 꿈꿨던 그들은 정말 있고 싶은 곳에 있는 것일까. 모든 것이 낯설고 무엇 하나 호락호락하지 않은 타지에서 그들은 내일은 더 나을 것이라 생각하며 다짐한다. "하루가 끝난다는 것이, 아침이 있고 밤이 있다는 것이 다행이었다."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뜰 테니. 어제보다는 오늘이, 오늘보다는 내일이 더 좋은 하루가 되길. 그렇게 하루를 마무리하는 페들러스 타운의 '동서양의 만남'의 조명이 하나, 둘 꺼지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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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서울파크 젤리장수 대학살 안전가옥 오리지널 1
조예은 지음 / 안전가옥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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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들이 녹아내렸다.

그들이 허물던 모든 것처럼 허무하게 녹아 사라졌다.

뉴서울파크엔 내 발바닥 같은 분홍색 젤리 덩어리만이 남았다.



놀이동산. 곳곳엔 형형색색의 풍선들이 떠있고 신나는 퍼레이드 음악이 거리를 가득 메운다. 설레는 마음을 가지고 입장하는 사람들의 얼굴엔 행복한 미소가 번져있다. 신이 난 아이들은 소리를 지르며 이곳저곳을 뛰어다니고, 두 손을 꼭 잡은 커플들은 장난치며 지도를 본다. 테마파크에 대해 떠올리면 사람들은 흥겨운 분위기, 그리고 그곳에 있는 즐거운 사람들을 떠올린다. 그러나 '뉴서울파크'는 사뭇 다르다.


인스타그램을 보다 강렬한 표지에 이끌렸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을 정도로 너무 재밌었다.'라는 후기 때문이었을까. 최근 들어 오로지 유희를 위해 책을 읽은 적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더 이 책이 읽고 싶었다. 그리고 첫 장부터 절반까지 쉬지 않고 읽었다. 읽는 내내 나는 '뉴서울파크' 한가운데에서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행복한 것 같은 테마파크, 그리고 그 속에 행복하지 않은 사람들의 모습을.




그 경계를 넘는 순간 현경은 전에 한 번 경험한 적 있는, 푸딩으로 몸을 던지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아주 포근하고 축축한 공기가 자신의 전신을 감쌌다. 그리고 펼쳐진 광경을 바라봤다. 달콤한 젤리로 가득한 유원지, 서로에게 어떤 위협도 가하지 않고 말랑말랑한 젤리가 되어 녹아내리는 인간들. 노래처럼 울려 퍼지던 비명들은 곧 사그라들었다. / p. 195




스토리 프로덕션 안전가옥의 첫 번째 오리지널 시리즈 《뉴서울파크 젤리장수 대학살》는 자주 싸우는 부모님이 걱정되는 유지라는 꼬마 아이의 시선으로 시작된다. 행복한 순간을 만들고 싶어서 찾아온 테마파크에서 여느 때처럼 싸우고 있는 부모님을 지켜보던 유지는 그 자리를 피하고자 한다. 뉴서울파크에서 두 번째로 유명한 다람쥐통을 타러 갔던 유지는 입구에 굳게 묶인 쇠사슬을 보고 실망한다. 그렇게 돌아서는 순간, 연두색 직원 모자를 깊게 눌러 쓴 아저씨가 나타났고 '절대 헤어지지 않도록' 만드는 젤리를 건넨다. 



설정이 매력적이었다. 누구나 변하지 않는, 영원한 사랑을 꿈꾸고 그런 행복한 감정을 느끼기에 좋은 장소인 테마파크. 언제나 즐겁고 행복한 순간들이 계속될 것만 같은 그런 장소에 닥쳐온 기괴한 현상. 서로 엉겨 붙은 채 녹아내리던 사람들은 자신의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오묘한 감정을 보인다. 사랑이라고 하기엔 언뜻 집착 같기도 하고, 그럼에도 여전히 사랑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 그런 감정.



주아의 엄마가 주아를 떼어내려 할수록 둘은 더욱더 서로를 옭아맸다. 둘은 하나가 되어 쓰러졌다. 그리고는 모든 걸 포기한 듯이 함께 녹기 시작했다. 얼굴과 어깨가, 팔과 팔이, 다리와 손이 하나가 되어 어그러졌다. 천천히 녹아내리는 덩어리들 사이로 한때 주아의 얼굴이었던 부분이 꿈틀거렸다. 그 둥근 덩어리는 주위를 돌아보는 것처럼 차분히 회전했다. 방황하던 주아의 머리가, 그중에서도 아직 녹지 않은 하얗고 섬뜩한 안구가 유지를 향했다. / p. 47







젤리는 아직 너무 어려서 모를 뿐이다.

떠나거나, 떠나지 않는 건 마음대로 되는 일이 아니란 사실을.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모든 인간들이 녹아내린 뉴서울파크에 혼자 남은 꿈냥이는 '영원한 것'에 대해 생각한다. 자신이 사랑했던 자신을 떠나버린 인간들을 생각하며, 사랑에 영원하다는 것은 없다고 단정 짓는다. 그러나 분홍색 젤리로 가득 찬 뉴서울파크를 걷던 꿈냥이는 자신도 몰랐던 기억의 조각들을 꺼내게 된다. 그리고 자신이 정을 주었던 모든 것들이 떠나지 않길 바라게 된다. 세상에서 제일 조절하기 어려운 게 마음이 아닐까. 영원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은 하지만, 그 누구도 확신하지 못하기에.


대체 누가 이 사람들에게 젤리를 먹였는지, 그런 것을 따질 시간이 없었다. 연두색 모자를 눌러 쓴 젤리장수의 정체가 궁금했지만, 더 중요했던 건 젤리를 먹은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젤리가 되어 한곳에 모인 그들은 그렇게 영원히 함께했을까. 그들이 원한대로 절대 헤어지지 않게 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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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루티드
나오미 노빅 지음, 오정아 옮김 / 노블마인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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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몇 진짜 마법사들의 이야기를 토대로 야가라는 인물이 만들어졌고 세월이 흐르면서 거기에 상상력이 덧붙여지고 과장이 더해져 신화와 같은 위상을 얻게 되었지." / p. 380



어릴 적 나는 책상 밑에서 오랜 시간을 보냈다. 세계 동화 전집이 그 자리에 꽂혀 있다는 이유로. 다양한 국가의 전설, 민담 등을 바탕으로 구성된 동화 전집 속에서 유독 눈길을 끈 동화책 한 권이 있었다. <아름다운 바실리사>. 전체적으로 어두운 분위기와 무서운 마녀가 등장하지만, 의외로 마녀는 주인공인 바실리사에게 어떤 해도 입히지 않는다. 물론 바실리사의 옆에는 바바야가가 원하는 것들을 충족시킬 수 있도록 도와준 귀여운 인형 하나가 있었으니까.


《테메레르》로 전 세계 독자들의 마음을 훔친 나오미 노빅은 어린 시절 즐겨 읽었던 '바바야가'에 관한 폴란드 동화에서 영감을 받아 《업루티드》를 집필한다. 인간의 끝 모를 공포와 두려움을 흡수하는 비밀의 숲 '우드'를 배경으로, 그 곳을 한 때 관리하고자 했던 마녀 바바야가를 전설로 만들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바바야가라는 마녀가 가진 원래의 어둡고 무서운 분위기를 유지하며, 나오미 노빅은 자신만의 상상력을 곁들여 한 소녀의 성장을 그려낸다.



우리는 골짜기의 사람들이었다. 골짜기에서 태어나 딸을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속에서도 그곳을 떠나지 않을 정도로 골짜기에 깊숙이 뿌리 내린 사람들. 그리고 우리는 우드가 들이마신 그 힘을 들이마시며 골짜기에서 자랐다. 문득 탑의 내 방에 걸려 있던 그 이상한 그림이 떠올랐다. 스핀들과 그 지류들이 은색 선으로 표시된 그림. 이상한 끌림이 느껴져서 내가 본능적으로 가려버린 그 그림. / p. 440



10년에 한 번씩 드래곤은 드베르닉 마을에서 열일곱 살의 소녀들을 데려갔다. 소녀들은 저마다 울음을 터뜨리며 계단에 줄지어 서 있었고, 그는 유력 후보로 생각되었던 카시아가 아닌 천방지축 소녀 아그니에슈카의 손을 낚아챈다. 나오미 노빅은 아그니에슈카의 눈으로 드래곤과 상황들을 바라보며 독자들이 그녀의 성장을 응원하도록 유도한다. 드래곤을 따라 마법을 공부하고, 새로운 마법의 힘을 느끼고 깨달으며 더 나아가 사람들의 두려움을 먹고 사는 우드의 힘에 맞서도록 만든다.


천방지축이지만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고, 가족들을 비롯해 드베르닉 마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아끼는 마음이 느껴지는 아그니에슈카는 주체적이며 독립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아름다운 바실리아> 속의 바실리아가 자신을 괴롭히는 계모와 두 언니에게 굴하지 않고,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묵묵히 해내는 것처럼. 그러기에 《업루티드》 속 아그니에슈카는 누구보다 빛나는 존재로 그려진다. 서서히 성장하며 빛날 수 있는 존재가 되어간다는 것, 그 모습만으로도 《업루티드》를 읽으며 흐뭇해졌다.



나는 드래곤의 모든 경고를 무시했다. 이 끔찍한 나무를 쓰러뜨릴 수만 있다면 내 안의 모든 것을 한 방울도 남김없이 쏟아내고 여기서 죽어버릴 것이다. 내가 살던 세상, 내가 카시아를 이 오염된 괴물에게 먹이로 남겨주고 돌아갈 세상을 나는 상상할 수가 없었다. 차라리 내가 일으킨 지진으로 으스러져 죽는 편이 나았다. 반드시 놈을 함께 데려갈 것이다. 나는 땅을 파헤치며 우리 모두를 집어삼킬 구덩이를 열 준비를 했다. / p. 169



살짝 아쉬웠던 점은 나오미 노빅이 만들어낸 로맨스랄까. 《업루티드》의 초반부에, 아그니에슈카를 선택한 드래곤은 그녀가 신비한 능력을 가졌음을 깨달으면서 그녀를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기 시작한다. 둘 사이의 미묘한 감정이 오가기는 하지만, 소설의 후반부가 될 때까지 확실한 감정을 주고받지는 않는다. 아그니에슈카의 마녀로서의 성장에 치우쳐서일까, 소설의 끝이 다가와서야 개연성 없는 로맨스가 펼쳐친다.


마법과 숲, 판타지적 요소로는 충분했다. 더구나 한번 펼치는 순간 놓을 수 없는 가독성까지. 670페이지가 넘는 방대한 양을 쉬지 않고 읽게 만들었던 나오미 노빅의 상상력과 필력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앞으로 아그니에슈카는 어떤 삶을 살게 될까? 나오미 노빅이 남겨놓은 상상력은 오로지 독자들의 몫이다. 그 어떤 상상이든, 모두 새로운 이야기의 뿌리가 될 수 있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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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시작의 역사 - 우리와 문명의 모든 첫 순간에 관하여
위르겐 카우베 지음, 안인희 옮김 / 김영사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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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이 모든 질서의 근본이라는 오래된 표상은 여기서 맞지 않는다. 이른바 시작이라는 것을 면밀하게 관찰할수록, 그것은 더욱 알 수 없고 우연하게만 보이니 말이다. / p. 287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가 만들어지기까지 역사는 끊임없이 이어져왔다. 인류는 이전에 없던 것들을 새롭게 발견하고, 이를 바탕으로 발명하며 많은 것들을 이룩해왔다. 그리고 앞으로 더 많은 역사를 쓸 가능성의 길 위에 서서 미래를 바라보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이제는 당연하게 여기게 된 사회적 질서는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모든 시작의 역사》는 그동안 역사책에서 깊이 들어가지 못했던 역사적인 첫 발자취들을 짚어낸다.


《모든 시작의 역사》는 흥미로운 목차로 독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당연하게 여겼던 인류의 직립보행은 물론, 불의 사용, 말하기의 시작 등 인류의 첫 발자취들을 그 어떤 역사 관련 책보다 낱낱이 파헤친다. 인지를 하기 시작한 인류들을 미술을 통해 자신들이 보고 느낀 세상의 아름다운 것들을 담아내고, 음악과 춤을 통해 자신들의 감정들을 표현하기 시작한다. 문명은 그런 바탕 속에서 서서히 드러나게 된다.



핵심은 다음과 같다. 사회적 변화를 맞이한 사람들이 그것의 기록을 남겼거나, 심지어 그렇게 하기로 결심했다는 가정을 하지 않고는 상상할 수 없는 사회적 변화가 있다는 점이다. 그들의 의도가 이런 변화를 결정했다거나 또는 심지어 그 방향을 결정했을 것이라는 뜻이 아니다. / p. 194



위르겐 카우베는 우리가 자명하다고 확신하는 것들의 시작을 《모든 시작의 역사》을 통해 모두 뒤엎는다. 고고학, 역사학, 인류학 등을 바탕으로 하여 유전한, 언어학, 문학 등 방대한 영역의 학문을 토대로 하여 그것들의 시작을 자세하게 탐구한다. 그리고 지금의 쓰임새들이 대부분 그것이 생겨난 이유가 아니었음을 알도록 만든다. 아무 연관성이 없던 사건들은 예상할 수 없는 방식으로 서로 결합되면서 지금의 결과를 낳았을 뿐임을 인지하도록 한다.



시작들이 나타나기 위해서는

언제나 여러 가지가 필요했다는 사실도 우리는 배울 수 있다.

그 어떤 문명적 업적도

단 한가지 메커니즘이나 단 한 가지 원인 덕에 생겨나지 않았다.



불편한 지식이 생각의 지평을 넓혀줄 수도 있다는 어느 저자의 말처럼, 《모든 시작의 역사》은 가끔 나의 지식 배경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불편한 지식들을 다양한 관점으로 제시한다. 조금은 친절하게 생각의 환기를 위한 효과로 그림 자료가 있었더라면 더욱 좋았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동물과 인간이 다른 점을 '말하는 행위'로 구분하거나 세상에서 들어온 불확실성을 깨버리는 데에 '언어'가 큰 역할을 한다는 등 개념으로 이해하고 있어 정확히 표현하기 어려웠던 그 쓰임새를 《모든 시작의 역사》가 명확하게 정리해주어 흥미로웠다.


역사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이 시작에 대한 탐구를 계속하게 되면, 우리는 이 가능성의 길 위에서 더 나은 사유들로 가득한 역사를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멀고 낯선' 고대에서부터 지금까지 인류는 충분히 많은 것들을 해왔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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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부 매뉴얼
루시아 벌린 지음, 공진호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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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이야기는 사실 아직 쓰여지지도 않았다. 내가 성취하고자 하는 것은 복잡한 세부 묘사로, 이 여자를 실제로 있을 법한 인물로 만들어서 사람들이 이 여자에게 동정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것이다.

/ <관점> 중에서



소설은 작가의 삶과 맞닿아 있다. 자신의 생각, 경험들을 조각조각 잘라 소설 이곳 저곳에 투영한다. 소설이 좋아 자주 읽다보니 그런 부분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유독 글을 읽는 속도가 느려지고, 자주 곱씹게 되는 부분이 있었다. 작가의 생각이, 그리고 자전적 경험이 드러나는 그 순간들이 계속 눈에 밟힌다. 마지막 책장을 덮는 그 순간까지.


사후 11년 만에 떠오른 루시아 벌린의 《청소부 매뉴얼》도 그런 소설 중 하나였다. 24살에 첫 단편 소설을 발표한 그녀는 자신의 삶을 가져와 소설 속에 넣는다. 칠레에서 보낸 10대의 일부, 실패한 3번의 결혼, 싱글맘으로서 네 아들을 부양하기 위해 일한 경험, 알코올 중독 등 타인이 본다면 소설처럼 느껴질 수도 있었던 삶의 일부분을 써 내려간다. 소설 같은 삶, 삶과 같은 소설. 루시아 벌린, 그녀의 삶과 소설 작품들은 너무도 닮아 있었다.



대부분의 나이 든 청소부들은 나를 잘 받아들이지 않았다. 나는 '많이 배운' 여자라서 청소부 일을 찾기도 쉽지 않았다. 당장 다른 일을 찾을 수 없다는 건 확실하다. 나는 곧바로 알코올중독자인 남편이 자식을 넷이나 남기고 죽었다는 말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아이들을 키우느라 직장을 가져본 적이 없다.

/ <청소부 매뉴얼> 중에서



루시아 벌린의 단편 소설 속에는 병동 사무원, 교사, 청소부, 간호보조사 등 다양한 직업을 가진 여성 화자들이 등장한다. 그리고 이 화자들은 각자의 위치에서 자신들이 보낸 지극히 일상적인 하루 또는 짧은 시간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이 일상은 그리 빛나지 않는다. 그녀들에게 일상을 바꿀만한 특별한 상황은 일어나지 않는다. 특히 《청소부 매뉴얼》은 더욱 그렇다. 청소부로서 자신이 느꼈던 고단한 삶을 아주 담담하게 말한다.


그래서 《청소부 매뉴얼》을 읽는 동안 조금은 힘들었다. 나의 경험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그녀의 경험들은 먹먹하면서도 뭐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을 일으켰다. 지금의 나와 비슷한 나이에 첫 단편 소설을 썼단 루시아 벌린이 어떤 삶을 살아왔을지 가히 짐작할 수 없었다. "나는 마침내 울고 만다."라는 《청소부 매뉴얼》의 마지막 구절처럼, 어쩌면 그녀는 그 삶을 살아내는 동안 울고 싶은 순간들을 참았으리라, 그저 그렇게까지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보통 늙어가는 것이 아무렇지 않다. 어떤 것들을 보면 아픔을 느끼는데, 스케이트 타는 사람들을 보면 그렇다. 머리를 휘날리며 긴 다리로 미끄러지듯이 나아가는 그들은 얼마나 자유로워 보이는지. 또 어떤 것들은 나를 공황 상태에 빠뜨린다, 샌프란시스코 고속철도 문이 그렇다. 열차가 정지하고도 한참 기다려야 문이 열린다. 아주 오랜 시간은 아니지만 너무 길다. 시간이 없는데.

/ <카르페디엠> 중에서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까지 이 이야기들은 눈에 밟힌다. 표현할 수 없는 감정들이 온몸을 휘감는다. 분명 날카롭게 쓰인 문장들이 아닌데, 라는 생각이 들면서 동시에 날카롭게 느껴진다. 허구의 이야기라고만 생각할 수 없는 이 소설들은 그렇게 뇌리에 박힌다. 맞닿은 삶이 생각나 더욱 오랫동안, 진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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