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틀 바이 리틀
시마모토 리오 지음, 김난주 옮김 / 시공사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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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영상 만들기 놀이.

 

 

(05.04)


  2004년 출간 당시, 서점에서 바로 발견해서 약간 기간이 지나 구입하고, 읽었던 기억. 최연소 수상작가라고 거창하게 소개한 띠지와, 너무나 얄팍한 분량에 처음엔 그저 어처구니가 없어서 한 번 쓱 봤다가 도로 그 자리에 꼽아놓았다. 그러다 표지와(좋아하는 타입의 일러스트;) 팔랑팔랑 책장을 넘기다 보니, 소소한 일상이 펼쳐지고 있어 읽기에 별 무리가 없을 듯 판단해서, 그 후엔 이것저것 따지기를 접고 구입했다. 그 당시, 복잡하고 까다로운 교재와 거듭 파고들어도 제대로 의미를 파악하고 건지지를 못해 잠시 미뤄두고픈 소설책이 여럿 있었기에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소설을 간절히 원했던 건지도 모르겠다.

  두세 번 되풀이해서 읽을 수 있을 만큼, 책 두께는 한없이 얇다. 그리고 스타트를 접했을 때, 굉장히 싱거운 맛이 났다. 갓 20살이 된, 여자아이의 시선에 닿는 가족, 풍경, 그리고 기다림과 아기자기한 사랑 에피소드.
 

  커다란 충격을 몰고 올 사건은 터지지 않고, 이렇다 할 외적갈등은 없으며, 여자 아이의 내면에서 생긴 불안이다. 그렇다고 그런 불안이 두드러지지는 않는다. 매일 겹쳐지는, 어쩌면 무지 사소한 일상에서 자그마한 구석에 웅크린 심리라고 할 수 있다. 주인공 후미는 그 ‘무서움’을 표면에 드러내지 않는다. 거의 결말이 다가올 즈음, 남자친구 슈에게 조그마한 단서를 넌지시 비출 뿐이다.

 

“가끔은, 무서워.”
“무슨 말이야?”
“모든 것이, 하나같이 전부. 오늘 자고 나면 내일 아침 아르바이트, 인파, 따분한 평일, 잠들기 전, 전부.”
“그런 때는 어떻게 하는데?”
“죽은 것처럼 눈 꼭 감고 참아. 그러면 언젠가는 지나가니까.”
“왜 무섭다고 말 안 하는데?”
“말로 하면 분명해지니까. 한 번 말이 된 것은 절대 지워지지 않으니까.”
“하지만, 말을 해야지 안 그러면 다른 사람은 모르잖아.”
“무섭다고 느낄 때마다, 그렇다고 말하면 되잖아.”

- 160~161.

 

  전체적으로, 이 소설의 분위기와 전개되는 양상은 마치 투명 유리병 캡슐 편지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 안에 캡슐이 들어있다는 건 뻔히 보인다. 편지(소설의 분위기랄 수 있는)라는 건 대강 짐작이 가지만, 곳곳에 숨겨놓은 주인공의 심리 변화(캡슐 안, 편지 내용)를 보여줄 하나하나 에피소드는 알아차릴 수 없는 것처럼. 살짝살짝 궁금하여, 잠깐 휴식에 책을 덮어놓고도 이내 슬그머니 들추게 만든다.

  *어릴 적 좋아했던, 비가 시원하게 바닥을 간질이듯 톡톡 떨어지는 풍경이 비친다. 내내 풍경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문득 충동적으로 마루에서 내려와 마당을 거닌다. 손바닥을 내밀어 조그마한 물방울이 그 위에 퐁퐁 연주를 하면, 히죽 웃으며 바라보았던, 한 장면. 어렸을 적에는 때때로 학교 현관에서 한참 지켜보다가, 마지못한 듯 우산을 켜고 집으로 갔다. 여전히 비 내리는 그 회색빛 풍경은 마구 좋아한다.(오직, 풍경만 좋아할 뿐. 통행에 불편해서, 다닐 적에는 구시렁구시렁;)취향의 음악을 틀어놓고, 멜로디를 짚어나간다. 현재도, 띄엄띄엄 지나가는 비는 좋아하지 않지만, 한 타이밍에 과감하게 쏟아지는 비에 열광.
더불어 자랑하듯 마루에 책을 늘어놓으며(구연동화를 펼치고, 빗줄기랑 속닥거리기)뿌듯해하던, 한 장면.
구불구불 골목길을 더듬어가다, 미로처럼 숨겨진 길을 발견했을 때의 신기하고 흥미로운 호기심, 한 장면.……*
소설을 읽으며, 나름 유쾌한 조각이 등장할 때, 내 어릴 적 겹쳐지는 기억 파노라마를 풀어놓고 동동 띄우며 함께 하고 있었다.
 

  *주기적으로 반복하는 모드, 답답하고 불안할 때, 꽁꽁 숨기다가, 그나마 조심조심 비밀리에 소설을 건드리곤(썼다, 는 다른 의미를 부가한 내가 좋아하는 단어)했던, 한 장면.
소설이란 도화지에 여러 바탕을 칠하고, 갖가지 물감을 짜놓고 추상미술을 펼치듯, 내가 만들어낸 주인공에 각각의 색을 입혔던, 그 장면.……*
그리고 소설을 읽으며, 나름 숨이 턱 막히듯 후미의 심리가(내가 겪기도 했던)떠오를 때, 또한 겹쳐지는 과거랑 현재의 이야기 퍼레이드를 펼치며, 따라간다.

  개인적으로, 이 소설의 밑바닥에 보이는 기운이라고 해야 하나, 꼭 old fish의 음악이 겹쳐지고 있었다, 신기하게도.

  몽롱한 기운에 영상 만들기 놀이를 할 수 있었던 것까지는 일단, 색다른 경험으로 괜찮았다고 생각한다. 허나, 어디까지나 그냥 괜찮다는 거지, 소설이 대단하다고 평할 단계는 아니라는 거다. 신인상과 아쿠다가와 후보작이라기엔 어딘가 엉성한 데도 많았고, 좀 더 깊이 담기지 못한 심리 표현도 몇 가지 내 눈에 띄었다.(주관이 섞였을 거라는 것도 인정한다.)
언젠가 다시 또 책을 끄집어내 파락파락 넘길 때, 다시금 끌어당기는 요소를 쥐고 굴릴 수 있도록 기대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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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틀 바이 리틀
시마모토 리오 지음, 김난주 옮김 / 시공사 / 2004년 8월
품절


(2007. 05. 04) _ 밑줄 긋기를 위해 2004년 이후 오랜만에 꺼내 듦.
그래서 생일이 다가오면 기분이 묘해진다. 아직도 내가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나이를 새로 먹는 것이 아니라, 언제까지고 역 앞 가드레일에 걸터앉아 있는 듯한 기분.-(34쪽)쪽

열린 창문 너머로 높은 아파트 옥상에 올라타듯 떠 있는 둥그런 달이 보였다.
창밖을 내다볼 때면 나는 곧잘 생각에 잠긴다. 머릿속으로 많은 사건들을 그린다. 바깥의 어둠에 비추어 내듯. (…) 좋았던 일도 나빴던 일도 절대 잊지 말자고, 내게는 모두 필요한 일이었다고 생각하면서 떠올린다.-(41쪽)쪽

빛이 눈에 반사되어 지면은 밝은데, 뾰족한 잎 사이사이 풍경은 어둠에 갇혀 있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아니, 아무것도 보이지 않은 것이 아니라 어둠이 보였다. 이 먹색 같은 어둠이, 산의 밤 풍경 자체라고 생각했다. 점점 짙어지는 먹색을 보면 마음이 차분해지는 것도 그 경치를 봤던 순간과 비슷했다.-(50~51쪽)쪽

"재미있고 없고는 마음먹기에 따라 달라지는 것 같아요."

같은 말이라도 말투에 따라 사람의 인상이 달라지는 것처럼 글자도 그렇다. 너나 나나 모두 쓰는 언어가 나만의 언어가 되어 종이 위에 출현하는 것을 보면 묘한 기분이 든다.-(53쪽)쪽

그의 등에 몸을 기대자 고동이 이중으로 들려, 마치 두 개의 심장을 지닌 듯한 느낌이 들었다. 정신이 아득해지는 소리였다.-(82쪽)쪽

담 너머로 넒은 마당과 툇마루가 보이고, 마당에서 무슨 빛이 반짝반짝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아주 순간적인 일이었지만, 손전등을 든 야나기 씨와 부인이 마당에서 어정거리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윤곽을 잃은 두 사람의 모습이 희미해, 마치 두 마리 개똥벌레가 너울거리는 것 같았다.-(89쪽)쪽

곧바른 길이 계속 이어지는 데다 대부분이 언덕길이라 한없이 멀게만 보여 늘 우울했는데 시간에 쫓기지 않아도 되는 지금, 이렇게 느긋하게 걸으니 전혀 다른 길 같았다.-(102쪽)쪽

그 후로 나는 얼마나 성장했을까 하고, 뜬금없이 의심스러워졌다. 그리고 천천히 불안이 밀려왔다. 그때, 아니 그 이전부터 시간이 멈춰 있는 장소가 내 안에 자리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116쪽) 험한 꼴을 당하면 당할수록, 언젠가는, 하고 기대하는 것은 어째서일까. 멀어질수록 머릿속에서 실상과 다른 모습이 제멋대로 형성된다. 많은 기억 중에서 희망을 낚으려 한다.
-(115~116쪽)쪽

"어떤 말이든 내뱉고 나면 혼이 깃들어. 말에 혼이 있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야. 서도도 마찬가지지. 쓰는 순간 말의 힘이 종이 위에 살아나니까. 그리고 쓴 당사자에게도 영향을 미치고."-(122쪽)쪽

어둠에 익은 눈에 희미한 잔상처럼 그의 등이 비치자, 이대로 손을 목에 두르고 졸라버리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마음만 먹으면 그럴 수 있는 상황이라고 생각하자, 무방비한 상태로 자고 있는 그가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어깨를 흔들어 깨워, 이렇게 쉬 믿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싶었다. 혼자서 무슨 엉뚱한 공상을 하고 있는 거냐고 생각하면서도, 내가 정말 망가진 것은 아닐까 하고 의심스러웠다. 눈을 감자 폭도 깊이도 없는 안구와 눈꺼풀 사이에 낀 보일락 말락 한 틈새로 새로운 어둠이 퍼졌다.-(138쪽)쪽

나는 이제 아무것도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내가 기다렸던 것은, 벌써 오랜 옛날에 무의미해지고 말았다. 물론, 오래전부터 알고는 있었다.-(145쪽)쪽

"가끔은, 무서워."
"무슨 말이야?"
"모든 것이, 하나같이 전부. 오늘 자고 나면 내일 아침 아르바이트, 인파, 따분한 평일, 잠들기 전, 전부."
"그런 때는 어떻게 하는데?"
"죽은 것처럼 눈 꼭 감고 참아. 그러면 언젠가는 지나가니까."
"왜 무섭다고 말 안 하는데?"
"말로 하면 분명해지니까. 한 번 말이 된 것은 절대 지워지지 않으니까."
"하지만, 말을 해야지 안 그러면 다른 사람은 모르잖아."
"무섭다고 느낄 때마다, 그렇다고 말하면 되잖아."-(160~161쪽)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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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ackt - THE SIXTH DAY ~SINGLE COLLECTION~
Gackt (각트) 노래 / Kakao Entertainment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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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내 홈 음악 사연(거창한 건 없지만)에 담기 위해 썼던 글이다. 주크박스가 비공개라서, 사연도 비공개가 되어버린_ 지금에서 찾아내 등록해 두는 건, 앞으로 음악 코너에도 계속 무언가 건드리고 싶어졌기 때문에. 건드린다는 단어는 건방진 의도가 아님.

락 장르는 여간해서는 질리지 않는 편인데, 그 중에서도 드럼과 기타가 주를 이루는 폭발적인 사운드를 선호한다.(내 기분이 업 상태일 때) 또, 보컬의 목소리도 좌우한다. 상당한 박력의 소유자라던가, 술을 한잔 걸치고 부른 듯한 목소리나 헐떡이는 숨소리가 은근히 배어 나오는 듯한, 자신 안의 열정을 밖으로 피를 흘리듯 토해내는 목소리를 좋아라 한다. 목소리 때문에 남자 보컬의 음악을 주로 따라 부르는 편인 나는, 특정 가수의 조그만 버릇을 발견하면 비슷해질 때까지 줄곧 흉내내는 게 취미다. (처음에는 그저 따라하려 드는 경향이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내 목소리 톤이 굳이 따라하지 않아도 그렇게 나오는 경우였다.) 그리고, 작곡과 작사, 연주 가능하고, 노래까지 부르면, 진짜 금상첨화! 엄청 좋아라 한다! 내 취향에 적격인 사람이 바로 저 사람!(몇몇 더 계시다;)

일본문화가 개방되고, 처음 ((The Sixth Day)) 가 발매되었을 당시, 시니컬한 반응을 보이다가 무작정 샀었다. 쭉 모험하는 형식으로 음반을 구입해 오고, 그리하여 이름은 알고 있었지만 별 관심을 안 보이다, 열광하는 가수가 하나 둘 생기곤 했었다. 아무 거리낌 없이 평소의 습관에 따랐던 거다. 근데, 덧붙여진 사항이 있다면,,, 정확하게, 내가 ((The Sixth Day))를 구입한 짤막한 이유는 사랑스러운 내 주치의 친구만 아는 사실이다. 귀띔해주었기 때문에:)
어쨌든, 이 음악을 가만히 듣고 있노라면, 내가 직접 운전을 하며 드라이브를 하는 듯한 기분을 만끽할 수 있었다. 미지의 세계에 발을 디딘 느낌과 더불어. 때로는 시한폭탄을 가슴에 안은 듯, 떨림이 멈추지 않은 적도 있다. 두근두근, 거리는 긴장이 오래도록 유지됐었다. 전체적으로 좋지만, 특히 간주 부분이 귓가에 착 잘 달라붙는다. 여러 악기가 복합적으로 들어가 잘 어우러진 느낌이 특징이다.
저 아저씨를 좋아라 하며, 마구 방방 뛰게 만든 계기가 되었던 노래이기도 하다. 선입견을 지우개로 쓱싹 지워버릴 수 있었다. 그리고, 내 동생이 제일 먼저 노래 제목과 음악을 이을 수 있었던 노래. 지금은 전주만 흘러도 내 동생의 입에서 아, 오아시스* 라는 말이 튀어나온다. 또, 최초로 아저씨 따라 하기 시작한 노래, 성공한 노래, 음악과 가사(일본어와 해석까지)를 통째로 외운 노래였다.
Oasis 노래 하나로 이 앨범 리뷰를 다했다고 할 수는 없으나, 내게는 이 노래가 그 무엇보다 기막힌 발견이었고, 그만큼 특별했다.

*밑에 분과 함께, 피아노를 다시금 좋아하게 영향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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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집
소니뮤직(SonyMusic)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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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own Eyes 시절 때부터 그의 음악에 이끌렸다. 피아노 선율이 귓가를 촉촉이 적시며, 굉장히 편하고 부드럽게 몸을 감싸는 느낌. 그리고 과거(꼬맹이 시절)에 비 내리는 풍경을 무지 좋아해서 마루에 앉아 책을 가슴에 꼭 안고 구연동화를 펼치던 영상이 퐁퐁 피어오른다.
어렸을 적 기억에는, 친구들이 피아노 학원에 간다며 하나 둘 사라지는(;)것에 멀뚱하게 바라보았던 장면이 있다. 여러 명의 친구들이 피아노를 배웠던 초등학교 때. 나는 피아노를 배우고 싶었지만, 부모님께 말씀드릴 수 없었다. 중학교 때는 괜히 피아노란 악기를 따분하다고 멋대로 판단해서는 엄청 싫어하기까지 했다. 아마도 심술이 아니었나 싶다. 그리고 그 시기에는 기타나 드럼이 마구 끌렸던 시점이기도 했다. 내 안의 폭발적인 감정을 쏟아내기 위해서는 피아노보다는 기타나 드럼이 더 탁월하다 생각이 들었으니까.
아무튼, 내가 이렇게 피아노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덕분에 다시금 심취하게 되었던 계기가 생겼기 때문.
그의 목소리 톤은 꺼끌꺼끌하지만, 어딘가 미묘한 어긋남이라고 해야 하나, 그 부분의 조각을 다시 맞춰가는 것처럼 특별함이 다가온다. 그래서 더욱 그 음악에 잘 녹아들 수 있다는 개인적 견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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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쁨과 즐거움을 빼버린, 너그러움과 행복감을 제외한 모든 감성이
유선의 마음속에서 미친 파도가 되어 출렁거린다.
단단하게 비끄러맨 의식의 틈으로 그것들은
어느 순간 해일처럼 터져 나와
유선을 죽도록 외롭게, 죽도록 슬프게, 죽도록 부끄럽게 몰아붙인다.
(…) 조금만 몸을 기울이면 그것들은 함부로 쏟아져
살을 베고 발등을 깨고 핏줄을 잘라놓을 것 같다.
(…) 점액질의 잠 속으로 가라앉아 버리면 끔찍한 가려움조차 힘을 못 쓰듯
머릿속에서 회오리처럼 맴도는 상처의 조각들도 같이 잠들어줄 것이다.
어두움, 차가움, 배반당한 정절, 만져지지 않는 존재감,
익숙했던 만큼 낯설어져 버린 남자, 지독하게 가려운 육체,
가슴에 가득 찬 그것들 위로 미지근한 밥을 밀어 넣었다.
밥을 씹을 때마다 몸 안에 고인 그것들이 제 존재를 주장하며 출렁거렸다.
사랑이란 어떤 것에 대해서는 너무 예민하게,
어떤 것에 대해서는 너무 둔감하게 만들어버리는
감정의 알러지 상태 같은 것이니까.

(…) 가려움증이 사라진 건 아니다. 잠이 질겨진 것뿐이다.
그저 끈적거리고 질긴 잠이 백혈구처럼 가려움을 감싸고 녹이고 삼켜버렸다.
약이 주는 잠은 폭염 속 한낮의 아스팔트처럼 뜨겁고 끈적거린다.
가려움뿐만 아니라 유선의 모든 감각을 망가뜨려 주었다.
미쳐버릴 것 같은 불면도, 불면이 새끼 치는 깨진 유리 조각 같은
감정의 파편들도 고요히 덮어주었다.

(…) 자신이 망설이는 건 커피의 온도가 아니라는 생각을 했지만
자잘한 얼음알갱이가 든 차가운 컵을 빼드는 순간,
유선은 뜨거운 커피와 코끝에 번지는 온기를 그리워하고 있었다.
… 유선은 제 속에 갈피를 잡을 수 없는 그런 뜨거움과 차가움이
제각각의 온도를 유지한 채 엉겨 있음을 바라본다.

“… 질문이란, 비록 불완전하더라도
어딘가에서 대답을 찾을 수 있는 걸 말하겠지요.
이럴 땐 의사나 보호자나
질문이 아니라 딜레마에 부딪치는 거죠.
끝내 답을 찾을 수 없는.“


- 나의 피투성이 연인, 정미경.(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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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5-01 22: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리뷰로 적었지만, 정말 좋은 소설이었어요 :)

302moon 2007-05-01 2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밑줄 긋고, 그 표현력에 얼마나 자극(;)을 받았었는지.
저도 조만간 어설픈 리뷰 올리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