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3년 세기의 여름
플로리안 일리스 지음, 한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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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1월 한가운데. 나는 너무 멀리 떠나왔고 어딘가를 늘 다친다. 음악, 뜨거운 차. 적당히 차가운 공기. 책 몇 권. 닿지 않는 마음 끝. 아니, 이런 것이 지금을 설명할 수는 없다. 지금 내가 현재라고 부르는 시간은 어디서부터 온 것일까? 우리는 언제나 그랬듯이 새로 일어난 사건을 지나치게 커다란 의미를 지난 것으로 보고 이미 있어온 무언가를 곧 없어질 무언가로 생각하곤 한다. 새로운 것과 오래된 것. 과거와 현재가 자연스레 교차하는 어느 순간. 1913년, 백 년 전의 그 날을 들여다 보기 전의 나의 마음이었다. 아마 여느 독자들도 그러했으리라. 




 시간은 흐르는 것인데 그것을 종종 잡으려 하거나 나누려는 시도가 지나간 시간을 돌이켜 보는 방법의 하나였다면, 벨 에포크, 세기말, 모더니즘, 현대, 근대, 이런 단어들은 어떻게 해야 손에 잡히는 것일까. 별 하나에 1913년, 별 둘에 1913년의 사람들 이름을 붙인다. 어느 날 나의 손끝에도 현재라는 시간이 무성히 쌓이게 만드는 책. 시간은 외따로 떨어져 있지 않다. 어느 시간이 중요하다거나 의미를 지닌다는 것은, 곧 그 순간의 사건이 앞뒤를 연결하며 누군가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는 뜻일게다. 아름다운 작품은 지천으로 널렸다. 아름다운 문장도 마찬가지다. 올바른 것도 역시 매한가지다. 그러나 그게 왜 아름답고, 왜 올바르며 왜 의미를 지니는가? 말을 만드는 것은 가장 단순한 작업이다.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진정 어려운 일이다. 나만 이해 못 한다 하여 알 수 없다고 단정 짓거나 내가 아는 것이 전부라고 만천하에 떠벌이는 것만큼 슬픈 일이 있을까. 그리하여 더 알기 위해 들여다 보고 더 이해하기 위해 읽게 되는 역사의 한 페이지. 그렇게 조용 따라가게 되는 오래된 미래. 1913년의 1월부터 12월까지 시간을 사소한 것이든 그렇지 않은 것이든 찬찬히 들여다 보면 태초에 있던 말과 그다음 생성된 의미가 보인다. 우리가 잡으려 했으나 더러는 놓쳤던 것, 우리가 상상했으나 더러는 실현했던 것이 백 년 전 일 년 열두 달을 통해 드러난다. 




 그런데 왜 하필 1913년인가. 저자 서문이 없어 저자 서문 대신 출판사 책 소개를 들여다보면, 1913년은 19세기의 끝과 20세기의 시작을 동시에 알리는 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제국주의는 정점으로, 민족주의는 구심점으로, 영토 분쟁이 점조직처럼, 기술 발전은 박차를, 신경과민자들이 넘치는 도시가 꼭짓점에, 모더니즘이 요란스레 모습을 드러내는 시기이다.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 홉스봄의 말을 빌리자면 우리가 말하는 20세기는 엄밀히 말해 1914년부터 1991년까지이다. 1차 세계대전과 소련 몰락이 그 시작과 끝을 알렸다면, 그 직전, 1913년에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 그 사람들은 어디서 무엇을 했을까? 





히틀러와 스탈린은 비엔나 쇤부른 궁전을 자주 산책했다. 아마 슬쩍 마주쳤을지도 모른다. 카프카는 그 소심해 미쳐버릴 지경인 오락가락 연애편지에 자신의 심경을 드러낸다. 키르히너는 포츠담 광장에서 창녀들을 그리느라 바쁘다. 모나리자는 도난당했고 뒤샹의 '계단을 내오는 누드'는 아머리 쇼의 간판 그림이 되었다. 뒤샹 형제는 미국에서의 명성 소식을 듣지 못하고 뇌이에 있는 아틀리에에서 작업을 한다. 카프카는 작년 12월에 보낸 '관찰' 이라는 책에 펠리체가 아무 말을 하지 않아 속을 태우다가 몇 달 뒤 펠리체 바우어에게 청혼 편지를 급행으로 보내고, 예술은 추상을 향해 치닫는다. 뮌헨의 칸딘스키, 파리의 들로네, 러시아의 말레비치, 네덜란드의 몬드리안. 그들은 자신의 방식으로 현실의 모든 관계를 끊는다. 미래주의는 러시아 지방을 떠돌고 코코슈카는 알마에게 미쳐버렸다. 발터 그로피우스는 '현대 산업건축 예술의 발전'을 독일공예연맹 연감에 발표한다. 잠시 그로피우스의 말을 옮겨보자면 이러하다.



 "산업의 모국인 아메리카에서, 독일 최고의 건축물을 능가하는 낯선 웅장함을 지닌 걸작 건축물들이 생겨났다. 그 건축물들은 어청난 설득력으로 관찰자에게 건물의 의미를 분명하게 이해시키는 확실한 건축적 얼굴을 가지고 있다." 



 다르게 말해보자.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가 나왔다. 버지니아 울프의 출항이 어렵게 빛을 본다. 사실 아내와의 성교까지 다이어리에 기록한 특성 가득한 남자 무질은 '특성없는 남자'를 낸다. 아나톨 프랑스는 '인생은 짧고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너무 길다.'라고 말한다. 마르셀 뒤샹의 자전거 바퀴, 말레비치의 검은 사각형이 파리와 모스크바에서 선보인다.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은 객석을 아수라장으로 만들며 등장한다. 코코 샤넬의 모자 가게가 있었고 프라다의 첫 매장이 이때부터 있었다. 




 이 모든 것은 그저 사건의 나열, 우연성의 결과일 수도 있다. 우연히 일어나는 일,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마주치는 어떤 인물. 이것은 사람들이 처음 만났을 때 가장 흔히 하는 대화에서도 드러난다. 서로의 학력, 거주지, 하다못해 여행지라도 들추어 보며 우연히 만났을지도 모르는 어떤 상황을 유추해 보는 일. 1913년은 모든 것이 바뀌는 해였다. 그전까지 몸에 맞은 옷처럼 느껴지던 역사에서 인간이 분리되었다. 그전까지 통제하고 구속하고 속박했던 모든 전통의 권위, 그 틀이 허물어지던 해. 그 모든 안절부절과 신경쇠약과 신경과민은 그러한 자유로움에서 온 것. 개인과 사회, 관계와 변형, 개인과 개인의 영속성을 탐구하기 시작한 해. 한마디로 융의 프로이트에 대한 친부살해와도 같은 일이 사회 전반에서 일어난 것이다. 카프카는 변신을 통해, 토마스 만은 마의 산을 통해, 스트라빈스키는 봄의 제전을 통해.




5월 29일 저녁에 모인 파리 관객은 구 유럽의 가장 고상하고 가장 교양있는 관객이었다. 특별석에 채권자를 피해 이탈리아에서 파리로 도망쳐 온 가브리엘레 단눈치오도 앉아 있었다. 그리고 또다른 특별석에는 클로드 드뷔시가 앉아 있었다. 코코 샤넬은 1층객석에 앉아 있고 마르셀 뒤샹도 마찬가지다. 뒤샹은 나중에, 이날 저녁의 "아우성과 날카로운 부르짖음"을 평생 잊을 수 없었다고 말한다. 스트라빈스키의 음악은 고대의 근원적인 힘을 무대로 불러냈다. 이미 표현주의 예술의 모범이 된 아프리카인과 오세아니아인의 원시성이 이제 문명의 중심, 다시 말해 샹젤리제 극장에서도 약동하는 생명으로 깨어났다. 

 -책 속에서(5월)




그러나 그렇다 하여 1913년의 사람들이 르네상스 인간처럼 자신감을 갖게 되었을까? 오히려 반대가 아니었던가? 과도기의 비엔나는 신경쇠약의 도시였음이 분명하다. 에곤 실레의 집도의와도 같은 여인 누드, 코코슈카의 침대 크기 화폭, 쇤베르크의 뺨따귀 음악회. 음색이 날카롭다는 이유로 공개적으로 뺨을 맞은 쇤베르크도, 알마를 잡으려고 안간힘을 쓰던 코코슈카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누드를 그리던 에곤 실레도 아마도 융이 프로이트에게 보낸 유명한 편지 앞머리의 테두리 내에서 움직인 것일 것이다. 



 "제자들을 환자 다루듯 하는 교수님의 태도는 잘못이라는 점을 알려드리고 싶습니다. ..그동안 교수님은 늘 저 높은 곳에서 아버지처럼 품위있게 앉아 계십니다. 오로지 복종만 하느라 그 누구도 감히 예언자의 수염을 잡아당길 엄두도 못내죠. "


융은 다른 편지에서 이렇게도 말한다. "저는 사적인 인간관계를 끊자는 교수님의 말을 따르겠습니다. 그런데 이 순간이 교수님께 어떤 의미인지는 당신 스스로가 가장 잘 아시게 될 겁니다. 나머지는 침묵입니다."



 침묵 서약으로 시작된 절교, 서로의 방법론을 버리게 된 두 사람.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계몽에는 자기파괴의 계기가 포함되어 있음을 '계몽의 변증법'을 통해 설명한 바 있다. 원시 부족 사회의 친부살해. 자신이 죽인 아버지와 같은 가면을 쓰기. 이것은 그 전에 프로이트가 내린 것이 아닌가. 역사는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을 통해, 자신이 내린 정의와 그 안에서 일어나는 작용과 반작용을 통해 의미를 가진다. 전과는 달리 어떤 시대 양식도 만들어내지 않는 미술 역시 마찬가지다. 과거에 우리가 쉽사리 찾았던 일관성은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단 하나 발견되는 지속적인 성질은 바로 작용과 반작용일 것이다. 서양미술사의 잰슨이 지적했듯이 다양한 '주의'는 물결이 퍼지듯 국가적, 인종적, 연대기적 경계를 허물어뜨렸고, 어떤 지역에서도 오래 가지는 않았다. 1913년, 국가의 개념이 허물어지고 국가 대립항이 아닌 도시 대립항, 아니, 그보다는 개인의 산발적인 사건과 개별적인 작품으로 드러나는 다양한 주의를 살펴보자면 심증은 물증을 얻기까지 한다. 잠시 책 밖으로 눈을 돌려, 잰슨의 서양미술사 한 단락을 들여다보면 역시 이런 부분이 보인다. 



 이런 주의 들은 끝없는 변화 속에서 서로 경쟁하거나 뒤섞이는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따라서 근대의 미술에 대한 리의 분석은 국가 개념보다는 양식 개념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오로지 이런 방법을 통해서 우리는 지역적인 차이에도 불구하고 근대 미술 역시 근대 과학처럼 국제적인 움직임 속에서 형성되었다는 것을 분명히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잰슨, 서양미술사.




 이즈음 되면, 저자가 왜 한 가지 분야가 아닌 사회 전반을 아우르는 1913년의 풍경을 이렇게도 사적으로, 방만하게 보일 정도로, 가십까지 검증하고 때로는 추측도 과감히 옮기며 그려냈는지를 알 수 있다. 가볍게 스치고 지나가는 부분 부분, 그 조각 조각을 쭉 훑고 나면 전체가 보인다. 따로 떼어내서 한 가지만 보는 것은 얼마나 위험한가. 어떤 그림, 어떤 시, 어떤 소설, 어떤 개론서, 어떤 조각, 어떤 기사, 어떤 건축, 어떤 무엇. 무형의 무엇과 유형의 무엇. 사람의 생각이 빚어내는 복잡함. 이 모든 것의 전체를 조망하고 부분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알지 못한 채 호오의 기준만으로 가치를 판단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 1913년이라는 부분을 떼어내어 조망했지만 읽고 나면 저자가 보여주고자 한 맥락과 전체 역사 속에서 1913년이 드러내는 의미가 만져진다. 부분을 통해 흐르는 전체.





 그 가로 세로직조된 사건과 사람들을 따라가다 보면, 서서히 일어나고 변화를 겪는 사람들의 얼굴이 하나씩 보이기 시작한다. 수많은 가정법이 있지만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 결국, 사람이 역사를 만든다는 것은 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달린 일일 것이다. 무엇인가를 만들거나 소비하면서. 어떤 것을 이야기하거나 떠올리면서. 이 속에서 사람이 빚어낸 1913년의 자유, 역동성. 모더니즘은 예술가로 하여금 새로운 양식을 창조하고 그에 따른 정의를 내리게 했다. 강렬한 도전의식, 리얼리티의 구조에 중심을 둔 추상주의의 관점. 미래에 대한 가능성, 직관과 양식, 모방과 재창조. 죽지 않은 과거, 오래된 미래. 머지 않았던 시간. 우리가 현재라 부르는 시점의 시작. 우리와 비슷한 우울, 우리와 비슷한 신경과민, 우리와 비슷한 강박. 지금 우리가 겪는 시간은 결국, 그때로부터 온 것이었다. 서로 무관한 사건과 상황의 입체적인 몽타주가 손끝에 닿을 듯 만져진다. 이 책을 읽음으로써 보이는 것인 1913년, 만져지는 것은 2013년. 아마 백 년 뒤에도 이러한 기획이 역사로 나타나겠지. 우리가 진정 두려워해야 할 것은 오직 역사이며 조심해야 할 것은 부분만 따로 떼어 자신만의 기준으로 바라본 것을 전체라 우기는 일일 것이다. 

 

 




 "아주 새로운 안무와 음악. 완전히 새로운 비전, 처음 보는 것. 마음을 사로잡는 것. 그럴듯한 어떤 것이 갑자기 내 눈앞에 있었다. 예술이 아니면서 동시에 예술인 새로운 종류의 야만성이다. 모든 형식을 파괴하고, 혼돈에서 갑자기 새로운 형식이 나타난다." -캐슬러,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 관람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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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가의 여행 - 모로코, 프랑스, 스페인 스케치 여행기 미메시스 그래픽노블
크레이그 톰슨 지음, 박중서 옮김 / 미메시스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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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여행의 현실이 우리가 기대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에 익숙하다. 물론 비관주의자들은 현실이 반드시 실망스럽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일단 현실은 기대와는 다르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진실에 좀더 가까울 수 있고, 또 좀더 보람도 있을지 모르겠다. ... 내가 상상한 대로인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이 말에 놀라기 전에, 그동안 내가 무엇을 상상했는지 먼저 생각해보아야만 한다. 지난 몇 주일 동안 이 섬에 대한 나의 생각은 광고 팸플릿과 비행 시간표를 읽는 동안에 짜맞추어진 세 가지 고정된 이미지의 주위만 맴돌고 있었다.

-알랭 드 보통, 여행의 기술




특별할 것이 없는 이야기를 특별한 것으로 만들고 일상의 이미지를 한 어촌에 살던 작달막한 거북의 기록으로 만들던 작가. 사막, 하렘, 현대 산업화의 흔적 사이로 스민 서사시를 만드는 그래픽 노블의 크레이그 톰슨이 '만화가의 여행'으로 펜 끝으로 여닫은 자신의 여행 일기를 공개한다. '만화가의 여행'은 그 책의 첫 장, 마지막 장에서 여행 일기를 쓰는 동안 카메라를 전혀 사용하지 않았고 눈과 펜을 사용했다는 것을 밝힌다. 단 두 가지의 예외는 그가 만난 이들의 옛날 사진을 활용한 두 컷이니, 여행하는 자의 기록 수단에 따른 다른 이야기가 슬며시 엿보이는 책인 것이다.




2004년 3월 5일부터 5월 14일까지, 유럽, 모로코. 엄마와 떨어져 앉은 아이에게 좌석을 바꿔준 답례로 항공사에서 제공한 샴페인을 누구와 함께 마실까 생각하며 샤를 드골 공항에 도착. 낯선 곳에서 만나는 낯선 사람들, 혹은 낯익은 얼굴이 주는 안정감. 덧문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햇빛. 빵, 버터, 꿀, 그리고 캐러멜 차로 만든 아침 앞에서 그가 아는 간단한 프랑스어로 완벽하다고 말하기도 하고, 만화 가게에서 여는 사인회에 참석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속삭속삭 걸치는 것은 그의 펜촉이다.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바람이 머리카락과 귓등을 스쳐 코끝을 지나갈 때, 조금 차갑거나 뜨거운 공기가 입술에 닿을 때. 낯선 곳에서 만나는 어디선가 본 듯한 이미지. 마치 영화 니키타 같다고 그가 생각한 광경은 그의 머릿속에 있던 이미지와 만난 낯선 현실의 결과였다. 전혀 상관없는 두 점이 만날 때 열리는 풍경. 비밀 조직에 킬러로 양성되는 주인공의 이야기와 파리에서 열리는 사인회에 참석하기 위해 프랑스 출판사 카스테르만에서 나온 직원이 안내해준 아파트, 휴대전화 등은 완전히 다른 것이다. 이 다른 것을 한 점으로 연결하는 여행자의 시선은 아직도 생생하고 활기차다. 지치지 않은 여행자의 들뜬 공기. 나중에 지칠 것을 예상치 못하는 사람의 홍조.




낯선 풍경을 만날 때 남기는 사진, 기록, 메모, 영수증. 혹은 핸드폰 문자, 현지에서 얻은 기념품. 크레이그 톰이 종종 여행에서 주목하는 것은 자신과 비슷한 누군가이기도 하다.
낯선 풍경을 감싸는 나뭇가지, 커다란 나무. 더 거대한 건축물. 그 속에서 어떤 이가 앉아 그림 그리는 모습을 역시 자신의 스케치북에 남긴다.




3월의 모로코. 크레이그 톰슨의 모로코는 온통 검정과 흰색의 세계였다. 건조한 공기. 오후 다섯 시의 기도문 낭독. 서쪽에서 들려오는 찬송가. 그가 살피는 북쪽의 제마엘프나 광장은 혼돈 상태의 커다란 고래 뱃속 같은 곳. 사람들이 파스티야를 먹고 어스름 밖에서 등불을 걸쳤다. 여행자의 등 뒤에서 뭔가를 슬쩍 하는 꼬마 아이가 있고 술잔을 기울이는 남자들, 뭔가를 요리하는 여자들이 있다. 그는 비록 자신이 너무 지쳐 살펴보기 커녕 식사도 겨우 했다고 하지만 그래도 이 모든 것을 남기는 열의가 수증기처럼 퍼져있음이 느껴진다.




동그랗게 몸을 말거나 무심하게 어딘가에 기대어 자는 고양이. 뭔가를 씹어먹는 노새. 여성을 그리기는 금지되어있었고 남자는 거절했으며 아이들은 돈을 달라고 했다. 어쩌면 그런 상황에서는 슬쩍 그리고 찰칵으로 끝나는 카메라가 더 편했을 수도 있으나 대신 그는 고양이, 사람들의 뒷모습, 풍경, 궁전의 문양, 소화제 겸 설사약의 여행을 그린다. 이 개인적인 시선을 만드는 펜촉이 나는 늘 궁금했다. 무심하거나 개인적이어서 이타적인 행위. 나로서는 발돋움 해도 들여다볼 수 없는 세계라고 느꼈던 것은, 어쩌면 내가 그 펜촉을 이해하지 못해서였을 것이다. 마조히스트가 사디스트를 알아볼 수는 있을지라도 이해하기는 어려운 것과 같이, 소리와 빛이 다르듯이, 가는 지점이 같을지라도 가는 방법이 다른 지도를 크레이그 톰슨은 펼쳐 보인다. 어떠했다고 말하면서(그래픽 노블이라니까) 이런 것이다, 라고 그려 보인다.





낙타, 모래, 사막의 밤, 여성의 다양한 옷차림, 흐릿해져 가는 시야, 고향에 있는 친구들이 어른거릴 때. 잠시 다른 여행자의 기록을 머릿속에서 들추어 본다. 박완서는 미국 여행 도중 몸이 아플 때 그 말을 한국말로 하고 싶다는 열망에 휩싸인다. 들큰하게, 눅진하게, 싸아하게, 이런 소리 같은 단어를 그릴 때 여행자는 집을 그리워하게 되는 것이다. 낯선 것과 낯익은 것의 조야한 차이와 당연한 귀결. 무엇을 말해도 구태의연해지는 순간. 크레이그 톰슨의 여행은 이러한 순간을 서서히 드러낸다. 낙타를 보거나 사막을 건너기. 친구들을 그리워함. 평화와 위안을 찾고 풍경에도 놀라지 않고 익숙한 기억의 카펫을 펼쳐보기도 한다. 그러다 자신의 영웅 레너드 코헨이 묵었다는 호텔을 찾아 호화롭고 평안한 개인적 랜드마크를 찾아낸다. 이 엎치락뒤치락하는 심사를 열없이, 조금은 계면쩍다는 듯이 그려내도 이상스럽지 않은 것은 그가 순전히 여행자라는 이유도 있겠다. 그러나 나는 그가 인간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노릇이라는 것이 더 큰 이유일 거라 생각한다. 아, 이러한 말조차 오히려 사람을 너무 대단한 존재로 본다는 뜻일지도.





그러다 그가 돌아와 그리는 아르장티에의 샬레.





여행자의 전환된 흐름. 물결이 줄기를 바꿀 때의 유쾌한 소리. 놀라움, 피곤함, 지침, 놀라움, 피곤함, 지침. 이 사이를 조금씩 오갈 때 쉼표를 찍는 것은 마치 도서관 서고의 장서 표를 구경하는 일과 같다. 자신에게 익숙한 분류기호를 발견할 때의 관심, 익숙하지 않은 숫자 앞에서의 경계. 여행자가 여행에서 돌아왔을 때 이야기하는 것은 조금만 파고들면 얼마나 구태의연한 것이던가. 결국, 모든 것은 사람, 음식, 잠자리, 건물, 자연환경, 풍경, 상점, 사고파는 물건, 음악 등등이다. 모든 같음을 모든 다름으로 환산하는데, 자신에게 익숙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붉은색 혹은 푸른색으로 분류한다. 이 색상의 명도와 채도는 순전히 여행자 자신의 머릿속 어느 작은 구름에서 시작하여 혀끝에서, 손끝에서 완성된다. 다녀와서 연인의 손을 잡을 수도, 손주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을 수도 있다. 펜으로 남겼던 흔적을 어루만질 수도 있고 기념품을 생각할 수도 있다. 여행지에서 만났던 어떤 혀끝 감촉을 다시 느끼겠다는 이유 하나로 훨씬 비싼 가격으로 들어온 음료와 음식을 위장 속으로 밀어 넣을 수도 있다. 그럴 때사물에는 어떤 그림자가 비친다.



아무도 손을 댈 수는 없는,

있는 그대로의 무엇.

더도 덜도 할 수 없는 것.





마음만 동한다면 찹잘한 감촉을 볼 수도 있으나,

그 열없는 객쩍은 웃음 끝에,

마음을 내는 그 사물만이 사물이 된다는 생각.

또르르 굴러가는 그림자, 똘똘 또아리를 튼 시간.

비추는 그림자를 황홀이 바라보면, 마침내는 어떤 풍경이 펼쳐진다.

크레이그 톰슨이 발견해 나가는 것은 이 무심한 파장과 황홀한 심사이다.



그새 만나는 사람들에 관한 기록. 그는 그가 무척 존경하던 이를 만나기도 하고, 뜻하지 않게 만나는 여자를 그리기도 한다. 옛 여자친구가 보낸 시로 하루를 시작하기도 한다. 수양버들과 비교하는 가지 잘린 플라타너스. 수양버들을 여유로움으로, 플라타너스를 마음아픔으로 치환하는 것은 순전히 그의 심사에 달린 것이니, 이 주관적인 시각을 재미있어할지 미심쩍어할지는 순전히 독자의 마음이다. 그러나 이해와 공감이 다른 것이듯 읽는 내가 절대적으로 옳으며 나의 판단이 전부라고 착각해서는 안 될 일.



잠자코 크레이그 톰슨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면, 예상외로 이 작가가 비우고 그려내며 자신이 보고 느낀 것을 충실히 기록하고자 했음이 보인다.







책 밖에서 찾은 이미지, 아이엠러브 속의 다른 곳 같은 느낌. 또다른 수평과 수직.




우연히 만난 여자가 있다.
사진에서 수없이 보아온 건축이 보인다.
나는 스페인의 구조 앞에서 내가 이전에 보았던 어지러이 아름다웠던 영화 '아이 엠 러브'를 떠올린다. 색상의 빛나는 조합과 위치 에너지와 운동 에너지의 수직 수평으로 어우러진 구조. 그 광경에서 느껴지는 아찔한 긴장. 그는 그 앞에서 '저녁에는 라우레아노를 다시 만났는데, 우연히도 그는 사그라다 파밀리아에서 멀지 않은 곳에 살고 있었다. 밤하늘과 뚜렷이 대조를 이룬 그 모습을 다시 보고 있으려니, 나도 모르게 무릎을 꿇을 뻔했다. 라우레아노는 말했다. 사그라다 파밀리아 같은 무언가와 이렇게 가까운 곳에서 살다 보면, 그게 얼마나 아름다운지 잊어버리게 됩니다. 매일 보기 때문이죠.





제발 내가 잊어버리지 않게 해줘.




망각을 거부하는 인간의 마음을 내세우는 크레이그 톰슨은 이 여행일기의 뒷장에서 고백하듯 행복할 때 무언가를 더 잘 그리는 사람이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 서랍을 열고, 옛날에 먹었던 오렌지의 신맛과 그 포들한 속살을 떠올리는 사람이다. 이 여러 개의 서랍 중, 이번에 잠시 열었다 닫은 여행 일기을 여닫게 한 손가락은 왜, 무엇 때문에 움직였던 것일까. 좀 계면쩍게도 크레이그 톰슨은 이 여행일기를 마감하게 된 까닭을 이렇게 밝힌다.



내가 이 책을 마무리하는 것은 내가 행복하기 때문일까?
아니, 사실은 훨씬 더 따분하고 한심한 이유 때문이다. 그 이유는 바로 마감이라는 것이다. 나와 게약한 출판사에서는 앞으로 2주 안에 이걸 인쇄해서, 그로부터 2개월 안에 이걸 판매할 계획이라고 한다. 게다가 출판사에서 내게 요구한 분량은 딱 224페이지였다.



마지막까지 그가 매 순간 마주친 것은 자기 자신이었다. 비가 내릴 때 유리창에 생기는 진흙탕 길. 손가락으로 두드리는 창턱. 옷 가방의 화물 표시. 점심으로 먹은 것이 엉킨 뱃속. 여자의 스커트 자락, 먼지로 뒤덮인 모자. 그새 모니터 뒤에 숨은 옛 모습도, 자전거를 타고 있는 새로움도, 결국 크레이그 톰슨 자신이었다.



아쉬운 것은 이 모든 것이 '사랑해!'라는 외침 속에 사그라질 뿐, 어디로 가는 것인지 알 수 없다는 점이다. 미래의 독자인 그 자신을 염두에 둔 일기가 꼭 어떤 결론을 내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은 작가의 몫이 아니다. 무용하기 때문에 유용한 무엇을 통해 환원하는 세계의 모습. 그 몸체가 그리 육중하거나 촘촘하지는 않다. 오히려 구멍이 많은 이야기라서 위험한 구석도 있고, 그 위험한 구석에서 비롯되는 매력도 있다. 개인적이라는 것은 이러한 것이다. 글씨와 그림이 빚어내는 구멍과 들쑥날쑥함으로 만드는 개성이 이런 것이다. 결국, 어떤 것에 초점을 맞추고 어떤 방식으로 사물과 사건을 바라보고 생각하느냐는 작가의 몫이 아닌 독자의 몫 아닐까, 하고 약간 능청스레 웃는 펜촉의 소리가 들린다. 이 하루하루 수많은 독자 중의 하나인 내가 보내야 하는 여행의 도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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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자 - 죽음의 수용소에서의 삶의 해부
테렌스 데 프레 지음, 차미례 옮김 / 서해문집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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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악몽과 꿈. 피하고 싶은 모든 것. 마음 전체를 지배하는 절망. 과거와 단절된 현재, 집착이 존재를 넘어서는 순간. 단 하나의 구멍도 없는 이야기. 증언.

 


 


그의 운명은 비록 삶의 정도로부터 탈선해 버리고 말았지만, 아직도 그는 수천 명의 운명을 자신이 여기까지 짊어지고 헤쳐 나왔다고 여기고 있다. 그는 결코 그 모든 고통을 '돌처럼 무감각하게' 견디어 나온 것이 아니었다. 그 모든 희생자들의 피가 언제나 그 자신의 피 속에 섞여 흘렀으며, 그들의 많은 아픔이 그의 피를 더 붉고 진하게 만들어 왔던 것이다. "우리들을 잊어버리지 말라!" 이것이 그들의 소리 없는 절규였다.

 "우리들을 기억하라!"

 "우리를 구해다오!"

 "우리를 잊어버리지 말라!"

 아니, 그는 절대로 그들을 잊을 수 없었다.

-비헤르트



 테렌스 데 프레의 '생존자'는 증언이 갖는 힘을 보여준다. 침잠해 들어가는 고통 끝에 그래도 인간이 인간으로 살 수 있는 이유. 절망과 좌절의 모퉁이에서 만나는 한줄기 외침. 그래도 사람이 혼자가 아니라 다른 누군가와 손잡을 수 있는 까닭. 이런 것들이 밑바닥에 깔린, '실제로 있었던 인간의 깊이를 보여준다. 이 외침이 테렌스 데 프레의 펜을 빌려 다른 색채를 띠는 까닭은 생존자의 좌표를 영웅도, 희생자도 아닌 인간 그 자체에 두었기 때문이다.

 부득이하게 찬란하지도, 부조리하게 속쓰리지도 않은 사람 그 자체의 피와 뼈.

 


 

 그러한 사람의 색채가 갖는 그림자. 피와 뼈와 머리카락은 이미 많이 있다. 소피의 선택, 안네의 일기, 더 리더, 수용소군도,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암병동, 페스트. 이것은 모두 생존자가 직접 썼거나, 혹은 어떠한 절망 속의 생존자를 생각하며 썼거나. 그리하여 드러나는 살아남은 어떤 이들의 면면이다. 저자는 먼저 문학작품 속에서의 생존자의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는 것으로 독자가 느끼는 공기를 전환한다. 그곳은 카뮈의 페스트 속 오랑 시이기도 했고 솔제니친의 수용소군도이기도 했다.

 

 

 

 앞을 알 수 없는 인간이 확신할 수 없는 상황에 놓였을 때.

 영웅의 죽음보다 자신의 생존이 더 흐릿하게 보일 때.

 사람이 자신의 존엄성을 되찾는다는 것은 숙명, 혹은 운명에 대한 태도를 돌아보는 데에서 시작한다.

 

 

 

 굳이 존엄성이라고 쓸 필요도 없다. 무너지지 않고 살아있는 것. 그 이상을 넘볼 수 없는 상황에서 그 이상을 대비하는 일이라고 해도 될 것이다. 이를테면 페스트가 창궐한 오랑시에서 죽음에 맞선 것은 살아남겠다는 각오 같은 것. 병든 이를 돌보고 확신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끝까지 죽은 자를 치우는 사람들의 모습. 끝이 보이지 않아도, 살아남겠다는 목표 하나에 기대어 살아남는 이야기를 통해 테렌스 데 프레는 문학이 이야기하는 인간의 힘을 거울에 비추듯 바라본다. 그 어느 것도 선택할 수 없을 때, 오로지 삶을 선택함으로써 생존하는 인간의 숨소리에 귀를 기울이노라면 '실제로 일어난 일'을 들을 준비가 어느새 되어 있을 것이다. 조용히 따라갈 것. 좌표 그대로를 볼 것. 그것이 독자의 몫이다.

 


 

 테렌스 데 프레가 이 책에서 중점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유대인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그들은 개인이 겪은 일을 개인이 말하는 것으로 생각한 것이 아니다. 거대한 전체 중일부로 살아남은 한 사람이 전체를 이야기했음을 테렌스 데 프레는 지적한다. 소비에트의 어느 수용소 변소 벽에는 '자유의 몸이 된 후에 입을 다물고 있는 놈은 어느 놈이고 저주를 받을 것이다.'라는 낙서가 있었다고 한다. 살아서 나가는 자, 누구든지 우리 모두가 남긴 기록을 한 덩어리로 기술할 것. 죽음이라는 절대성 앞에서 한 명이라도 살아나가는 것이야말로 죽음을 허물고 굴복하지 않는 최소한의 저항의 방편이었으리라. 죽음의 절대성. 그 절대성은 아마도 처음에는 어느 순간 느닷없이 시작된 총질, 친위대원들의 모욕적인 행위, 혹은 가슴팍에 달아야 하는 다윗의 별 등으로 시작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여타의 다른 책들과 다르게 그 모든 것의 문을 열 때 오물과 역겨운 냄새도 있었음을 이야기한다. 왜 그래야 했을까. 그에 관한 명쾌한 답이 아래의 증언으로 드러난다. 수많은 이들이 기차에서 선 채로 용변을 처리하고 서로의 얼굴에 토악질하고 인간이 아닌듯한 몰골로 있어야 했던 이유. 죽어야 했던 이는 죽여야 했던 이의 반대편에 있어왔다는 것이 아래의 증언에서 더욱 명확하게 보인다.


 

 

 나는 슈탄글에게 질문했다.

 "저 사람들을 죽일 예정이면서 왜 모욕을 가하는 것입니까? 왜 저렇게 잔인한 짓을 하는 것입니까?"

 그러자 슈탄글은 말했다.

 "정책을 일선에서 수행하는 사람들에게 여건을 마련해 주려는 것이지요. 그들이 할 일을 할 수 있게 해주기 위해서입니다."-책속에서

 


 한나 아렌트는 1974년 뉴욕의 강연에서 "사람을 죽이는 것보다 개를 죽이기가 쉽고, 개보다는 쥐나 개구리를 죽이는 것이 쉬우며, 벌레 같은 것을 죽이는 일은 아무것도 아니다. 즉 문제는 시선, 눈동자이다." 라고 말했다. 인간의 모습을 허물어버리는 일. 소용소에는 몇천 명의 인원이 있는데 변소는 고작 하나였다. 강제수용소 생존자들이 누구나 오물 냄새를 잊을 수 없다고, 몇 미터 밖에서도 그 냄새가 냤고 그곳에서는 새조차 날지 않았음을 증언한 것은 그저 후각에 관한 기억이 기억의 여러 갈래 중 가장 우직해서 그런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람의 모습을 사람에게서 벗겨 내 수용소 내에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서로의 혐오감을 키우고, SS 대원들의 입장에서는 작업이 더욱 쉬워지는 상황을 빚어낸 정점에 그 오물 냄새가 있기 때문이다. 

 

 

 

 증언의 힘은 그 원형을 한층 더 강력하게 만든다. 한 명이 자신이 겪은 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겪은 일을 그중 하나인 생존자 한 사람이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련의 증언 문학, 혹은 생존자를 다룬 영화나 희곡 등이 한편으로 그 드라마틱함을 과장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남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책 속의 증언에 귀를 기울이고 눈을 감고 그 광경을 상상하노라면, 어쩌면 상황의 극대화가 당연하다는 생각이 든다. 구덩이를 파던 중 옆에 있던 이들이 갑자기 뒤에서 빗발치는 총알을 맞고 쓰러진다. 혹은 아이들의 사진을 모두 내놓으라고 한 다음 그 위를 진흙 묻은 신을 신고 걸어가는 대원도 있었다. 이러한 사건을 문학의 영역에서 다룰 때, 우리는 문학성과 사실을 분리하기가 어렵다. 상황은 극적이고 의도가 노골적으로 보일 만큼 모든 이미지는 상징적으로 구현된다.

 

 

 


       <Battle field>, by Kathe Kollwitz

 

 

 

 

 사람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생각과 경험의 깊이와 넓이는 이러한 극적인 상황에 직면하면 언제나 육체와 정신을 서로 연결하곤 했다. 밀턴의 지옥, 호메로스와 베르길리우스가 노래한 지하 세계, 리어 왕에 나타나는 폐허, 단테의 지옥도. 즉, 노스럽 프라이가 지적하는 '전적으로 거부하기를 바라는 세계'의 원형과도 같은 집단 수용소는 이제 하나의 이미지로 남아있다. 오물과 악취, 가난과 배고픔, 모든 친숙한 것들과의 이별, 구덩이와 하수구, 무지개 저 너머 있을 거라 상상도 못 했던 쓰레기장, 시련의 객관적 상관관계. 죽기와 살기, 그리하여 마침내 전략적 망각과 과거 속에서 살기. 



 


 

...우리들은 그곳으로 달려가서 아직 채 파묻지도 않은 발가벗은 시체들이 산처럼 쌓인 커다란 네모진 구덩이를 보았어. 우리가 아는 사람들도 많았고, 엄마도 거기서 찾았어. 온통 피투성이였어. 그리고 내 약혼자 헤네코, 내가 목숨보다 사랑했던 그도 거기 있었단다. 나는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어. 내 마음이 죽어 버렸을 뿐이야. 무슨 얘긴지 알겠니? 그들이 내일 다시 와서 아버지를 죽여도 난 까딱도 안할거야. 울지도 않을 거야. 아버지를 위해서는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할 거야. 그들이 나를 죽여 주었으면 좋겠어. 이제부터 나는 유태인 금지 구역으로 아무 데나 막 걸어다닐 테야. 그들에게 붙잡히고 싶어. 나는 죽었으면 좋겠어. 그래도 난 아무렇지도 않을거야.-클라인



 


 인간이 완전히 빈털터리로 벗겨지고 나면 과거는 마치 이미 죽은 자의 미래와도 같이 존재하지 않음으로 존재하는 것이 된다. 과거 속에서 살기 시작하는 즉시 현재에 집착하지 않게 되며, 점점 모든 일에 소홀해져 마침내는 죽어도 상관없는 상황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그러한 상태를 피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현재에 집착하는 순서가 따른다. 헬링은 이를 가리며 '철조망 안에서 몇 년을 살고 난 다음, 타고난 능력 이상으로 과거의 기억을 훨씬 더 잘 조절할 수 있게 된 인간이 존재할 뿐이다.' 라고 지적한다.

 

 

 

 협력과 저항, 한 명이라도 더 살리기 위해 생존 자체를 목적으로 조금이라도 인간다운 모습을 유지하려는 이 노력 아래, 그런 마음이 있었다. 가스실에 가는 이의 명단을 이미 죽은 이름을 올려 바꿔치기하고, 카포(나치에 협력하는 유대인)로는 필요 분야의 비전문가를 보내는 일. 기기를 수리하는 척하면서 친위대가 흘리는 정보를 수집하여 저항조직에 전달하고, 라디오에서 조금이라도 좋은 소식이 있으면 수용소 전체에 소문을 퍼뜨리기. 적극적이든 소극적이든 생존자들은 가만 앉아 죽음을 기다리던 이들이 아니었다.

 

 

 

 인간이라는 생명 자체에 아로새겨진 생존에의 속성은 '모든 살아있는 생명체 역시 하나의 화석이다.'라는 자크 모노의 말로 다시한번 증명된다. 누군가 살아남았다면, 그것은 필연적으로 다른 누군가가 그를 도왔기 때문이다. 인간이라는 종의 전체적인 틀에서 볼 때, 몰살과 멸종의 위협 앞에서 수용소 사람들이 만든 연대와 협동, 하나를 살리기 위해 전체가 함께 행동하는 행동이 인간의 역사를 만들었다. 절망이 지배하는 곳에서 절망에 무릎 꿇지 않기.  이때 절망에 대한 최선의 보호책은 바로 희망을 품지 않는 것. 현실을 살되 과거를 끊고 조금씩 미래로 나아가되 희망을 버리는 일. 버림으로 하여 가지고, 가짐으로 하여 버리는 뫼비우스의 굴레 속. 전쟁이 끝나갈 무렵, 사면 소식이 수용소 내에 퍼질 때에도 절망에 대비해 희망을 품지 말아야 했음을 이 책에서는 아래와 같이 증언한다.


 


 

그러한 환희 작약의 뒤에는 으레, 예정 시간이 지나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데서 비롯되는 깊고깊은 절망의 늪이 도사리고 있었다. 만약 희망에서 절망으로의 엄청난 반전을 겪고도 정신이상을 일으키지 않으려면, 정신적 평형감각을 보존할 수 있는 특수한 테크닉을 스스로 개발해 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 과정을 거치고 나면 많은 사람들이 구제받을 길 없는 비관론자로 전락해 버리기 때문이다. -골비체르

 


 


수용소 안에서는 아름다운 꿈을 꾸는 것보다 악몽을 꾸는 것이 낫다. 스마글레브스카 라는 생존자의 증언을 들으면, 수용소에 있는 이는 단 한 순간이라도 자신이 집단 강제수용소에 있음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악몽을 꾸며 비명 지르는 이를 깨우지 않는 곳. 아름다운 꿈을 꾸고 깨어나면 더욱더 깊은 나락으로 떨어지고 마는 곳이 아닌가. 그곳에서 그들의 투쟁과 저항은 결코 희망을 품었기에 했던 일이 아니었다. 정신이상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언제나 최악의 상황을 염두에 두어야 했으며 비참한 수용소에 자신의 모습을 바위처럼 박아두어야 했다. 그들은 실제 이 세 가지 태도를 보였다고 한다. 첫째, 성공할지도 모른다. 둘째,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셋째, 그래도 계속해서 시도하겠다.





이 거대한 폐허에서 살아남은 생존자의 이야기를 들으며, 무엇을 생각할 것인가.

 

 

 

 나는 종종 몸을 가누기 힘들 정도로 분노에 떨게 되는 순간, 내가 희망을 품었다는 사실을 떠올린다. 세수는커녕 손가락 하나 까딱 할 수 없을 만큼 자신 속의 모든 것이 빠져나가 껍데기조차 거리에 뒹구는 것같이 느껴질 때에는 먼저 씻은 사람만이 생존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는 옮긴 이의 말이 있다. 가족이 사라졌을 때에는 그는 모두 뿔뿔이 흩어져 생사조차 알 수 없었던 수용소 사람들을 떠올렸다는 말도 그 옆에 나란히 있다.

 

 

 

 이 덧입혀지거나 살짝 걸쳐진 생각, 무겁거나 딱딱하고 육중한 형체 앞에서 나는 나 역시도 지금까지 죽은 이들의 화석이라는 생각이 든다. 혼자가 아닐지도 모른다. 누군가가 기적처럼 대꾸해 줄지도 모른다. 내가 누군가의 생존을 돕듯 누군가도 나의 생존을 도울지도 모른다. '그럴지도 모른다.' 속에서 아주 작게, 기대어서는 안 될 희망이 살짝 피어오른다. 그러면 안 되겠지만, 하고 작게 중얼거리면서도 아마 바닥에 떨어지는 순간 기억날 책 한 권. 11월이 다가오는 가을, 낮 기온이 점점 밤 기온에 다가서려는 추운 날 읽노라면 살아있는 모든 사람이 귀해 보이는 귀중한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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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13-10-24 07: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프리모 레비의 <이것이 인간인가>와 같이 읽었어요. 살아남아 증언하는 일. 삶의 무게에 대한 일. 삶이라는 게 때로 너무 비루하고 잔혹하지만 어떤 의미를 갖는다고 믿는 일.

쟌느님의 독서 궤적은 신기하게 저랑 닮아 반가워요. 잘 읽고 가요.

Jeanne_Hebuterne 2013-10-27 12:29   좋아요 0 | URL
오랜만이어요, blanca님 :) 여전히 부지런히 읽고 쓰시는 모습, 보기 좋습니다.


프리모 레비를 읽으셨군요. 참 신기한 것은, '소피의 선택'을 썼던 슈타이런도, '주기율표'의 프리모 레비도, 그리고 이 책을 쓴 테렌스 데 프레도, 책표지의 말과는 달리 제가 들은 어떤 말로는 자살을 했다 하더군요. 온전히 살아남은 이들도 물론 많지만(로고테라피의 창시자 빅터 프랑클), 종종 이런 이들의 궤적은 사람의 마음에 어떤 그림자를 남기곤 해요.

정말,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건축을 뒤바꾼 아이디어 100 100 IDEAS 시리즈 2
리차드 웨스턴 지음, 김광현.서울대 건축의장연구실 옮김 / 시드포스트(SEEDPOST) / 2012년 12월
평점 :
품절





뉴욕의 엠파이어 스테이트를 바라보는 이들은 무엇을 생각했을까? 우리는 늘 철근, 콘크리트, 나무, 벽돌, 유리로 만든 건축 속에 살면서도 쉽게 잊는다. 우리가 무엇으로 이루어졌는지, 우리가 만든 것이 우리에게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샌프란시스코의 골든게이트 브릿지를 보면서, 뉴욕의 마천루와 런던의 코쿤을 보면서, 파리의 퐁피두와 로마의 원형경기장을 보면서도.


'뉴욕에 있는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만큼 철골구조(강구조)를 집약적으로 잘 보여주는 건물은 없다. 102층으로 이루어진 이 건물은 놀랍게도 단 14개월 만에 지어져 40년간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다.-책속에서.

건축을 뒤바꾼 아이디어 100가지. 이 명쾌한 100이라는 한정 속에는 부정이 없다. 지은이 리차드 웨스턴이 시작하는 글에서 밝히듯, 이 책에는 두 갈래 길이 있다. 건축의 흐름을 주도한 아이디어와 이 아이디어가 선별된 건축과 어떻게 그 흐름 속에 모습을 드러내는가, 하는 문제이다. 이것은 건축가의 눈으로 본 것이되 낯설지 않고, 편향과 파편화가 있되 외따로 떨어져 있지 않다. 미술공예운동이 어떻게 건축으로 모습을 드러냈나? 바우하우스는 왜 중요한 것일까? 고대 그리스 기둥 양식과 인본주의가 지금과 무슨 연관이 있을까? 저자는 평범한 특성을 기술의 발전과 건축가의 생각, 형태와 기능에의 고민을 담은 건축물과 함께 제시한다. 이것은 교과서와 같이 일정한 흐름에 따라 엮은 책이 아니다. 일정한 범위를 지정하지도 않았다. 대신 공간을 구성하는 수단을 좀 더 실용적으로 다루었을 뿐이다. 단, 백 가지 아이디어를 연대순으로 간략히 소개하며 개념을 소개할 뿐이다. 이 흐름을 따라가노라면 논점이 최근의 혁신에 집중되었으며 아이디어와 아이디어 사이를 오가는 여행을 하는 기분이다. 어쩌면, 이 다양한 생각을 잇는 여행은 깊고 넓은 가벼운 나들이와도 같은, 시계토끼가 지닌 시계를 살짝 엿보는 기분이 들기도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시작은 벽, 천장, 창문, 기둥, 벽돌, 계단 같은 것으로 먼저 드러났다.






사진은 마요르카의 요른 웃존의 자택, 칸 리스. 전망을 특별하게 선사하고 빛과 공간을 나누는 방식을 보노라면 창문이 우리에게 무엇인지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공기, 건물의 표정을 보여주는 건물의 눈. '창문을 설계할 때는, 여자친구가 밖을 내다보며 앉아있는 모습을 상상해보라'는 알바 알토의 말을 떠올리면 창문이 사람에게 어떤 것인지를 단박에 알 수 있다. 이 수사학은 창문이 실용적인 이유 외에도 건물의 표정을 결정짓는 요소임을 일깨워 준다.

르네상스가 전성기를 이루던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고전적인 비례를 따르는 창문, '벽보다 유리가 더 많다'는 농담이 오가던 하드윅 홀의 유리의 성과도 같은 수많은 창문, 20세기 들어 나타난 알루미늄과 강철, UPVC로 이루어진 실용적인 창문까지, 창문은 건축의 성격을 나타내는 눈과도 같다. 절벽의 저 창문을 바라보노라면 그 공간이 한없이 깊어, 바다와 하늘이 하나로 이루어진 듯한 극적인 효과까지 느껴진다. 감성과 질서, 장식과 형태는 그러나 비단 창문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 조화와 질서를 이루는 다른 영역을 살펴본다. 코니스, 프리즈, 기둥머리 등으로 이루어진 기둥을. 아주 먼 옛날부터 당연히 그 자리에 있는듯 지금도 있는 기둥을 훑어보면, 아래와 같은 양식이 눈에 들어선다.








책에서는 '오더'라고 영어를 한글로 굳이 옮기지 않았지만 잰슨의 '서양미술사'를 참조하자면 역자는 오더를 양식이라고 옮겼다. 이 양식이 어떤 기원을 가졌는지는 학자들 사이에서 아직도 논쟁이 되고 있다 전하는데, 서양 건축 역사에서 그 단어 자체가 그러하듯, 양식은 특정한 형상, 형태, 모양, 비례를 넘어 음의 높이, 지속, 조화와도 같은 전체적인 체계를 아우른다. 콜로세움만 하더라도 아래에서부터 토스카나식, 이오니아식, 코린트식 기둥이 함께하고 있는 것을 보면 '오더'라는 단어가 갖는 느낌이 좀 더 명확해지는 느낌이다. 추상적인 연상작용, 상호 관련성, 일괄된 방식.


책에서 소개하는 그리스의 건축 양식은 오른쪽에서부터 도리스식, 이오니아식, 코린트식이 있다. 가장 복잡한 상부를 가진 도리스식은 아키트레이브, 트리글리프, 메토프로 조직된 프리즈와 코니스가 그 특징이다. 분명 세 가지 고전적 건축 양식이 그리스에서 나타났으나 가장 코린트식은 실제로는 이오니아식의 변종이라 할 수 있기에 실제로는 이오니아식과 도리스식, 이 두 가지 양식만 존재한다 하여도 무방하다. 건축학자들이 도리스식 양식에 더욱 집중하는 이유를 잰슨은 도리스식이 가장 기본적인 양식이며, 가장 먼저 나타나 다른 양식에 비해 훨씬 정확한 모습을 갖추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이 책과 잰슨의 책을 번갈아 들여다보노라면 결국, '양식'은 건축의 형태가 기능과 기술에서 비롯된 것인지, 혹은 그 목적이 아름다움의 추구에 있는 것인지가 궁금해진다. 어쩌면, 잰슨의 해석처럼 이 두 가지 입장이 서로 어우러질 때 그에 대한 답이 나오는 것이 아닐까.






초기 고딕 양식의 아미앵 대성당의 형태를 바라보노라면, 가벼워진 조적 구조가 보인다. 끝이 뾰족한 아치, 높이에 대한 폭의 비례. 이 책에서 지적하는 석재 건축의 가능성에 나타난 혁명적인 변화가 아치에서 단번에 드러난다. 공간을 가로지를 수도 있고 석조 벽에 개구부를 낼 수도 있는 잠재력. 누르는 힘은 강하지만 밀고 당기는 힘에는 약한, 벽돌로 만들기에 이상적인 구조. 이 책에서는 구조상의 건축기법에 주목하고 있으나 나는 잠시, 고딕 양식이 가져다주는 그 특징을 떠올려 본다. 초기 고딕, 전성기 고딕, 고전적 전성기 고딕, 국제 고딕, 국제 양식. 얼핏 생각하면 앞의 세 단어가 시대 명칭이라 생각할 수도 있으나 실은 서로 다른 양식적 특성에 따른 분류이다. '위대한 성당의 시대'였던 1150~1250년의 건축. 처음 건축에서 시작된 이 단어는 회하 쪽으로 그 비중을 옮겨가면서 건축적인 성격이 회화적인 성격으로 대체되었음을 알 수 있다. 사진에서 볼 수 있듯 고딕의 효과는 '가벼움'에 있으리라. 회당의 벽이 얇아 보이는 효과, 높이에 대한 깨달음. 시간이 좀 더 흐른 1400년대, 유럽 전역을 뒤덮은 놀랍도록 통일된 양식, 국제 고딕이 꽃피기까지, 고딕은 높이와 무게에 관한 인간의 개념을 다시금 창조해냈음을 보여준다.






이렇듯, 건축은 저 홀로 돌연 생겨나지 않는다. 사진의 도나토 브라만테가 설계한 원형의 순교자 기념 성당은 로마에 위치한 것으로, 이 책의 설명으로는 르네상스 인본주의자들이 고대 로마문화와 이상적인 기하학을 지향했음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더는 중세에 살고 있지 않음을 자각하는 목소리, 인간 스스로 이름을 부여한 최초의 시기, 과거와 현재의 구분. 이런 것들이 생겨난 '새로운 시대'로 서서히 그 이름표를 붙여나간 시기.


스위스 미술사학자 야콥 부르크하르트는 우리에게 있는 예술적인 재능, 인간의 주관성을 강조하였다. 일반세상의 모든 사물과 상태에 대한 객관적 인식과 태도를 부르크하르트가 생각했다면 사진의 순교자 기념 성당은 고대 그리스 로마 문화의 고전적 형태, 신체 치수의 비례에 기반을 둔 건축에 대한 생각이 시작되었음을 보여준다.






시간과 공간을 훌쩍 뛰어넘어 이 아름다운 제퍼슨 격자를 보며 나는 잠시 말을 잊고 오랜 시간, 이 사진을 들여다보았음을 고백한다. 한 변이 1마일로 이루어진 이 사각의 격자. 서부 개척을 용이하게 하려 도입된 것인데 하늘에서 내려다본 시카고의 사진을 보노라면 로마의 군사 주둔지 계획에서 비롯된 격자 시스템이 지금 우리가 바라보는 도시 풍경에서도 여전히 반짝임을 볼 수 있다. 교차하고 평행한 선, 미국에서 중국에 이르기까지 사회적 질서와 합리성을 여전히 증명해 보이는 격자의 역사는 이 책에서 이르듯 '공간의 질서를 그물 안에 넣는' 시도였을 것이다. 평등주의에의 지향, 인체와 비례적으로 관계를 갖는 원주 지름을 이용하는 고전적 방식에서 벗어난, 원주의 중심과 중심 사이의 거리를 측정했던 그리드 사용은 분명 합리적이고 보편적인 사용을 염두에 두고 사용한 것. 이러한 격자 사용을 보면 지금 흔히 우리가 바라보는 수많은 양식과 형식은 아주 먼 옛날부터 있었던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자연의 원칙을 건물에서도 따른다."-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땅, 그 자체에 부응하는 행위. 공간보다 장소에 갖는 관심. 재료의 본질을 살리는 건축.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낙수장을 보노라면 대지의 기운이 어떻게 형상화되는지가 보인다. 지질학적 성층, 나무줄기 주위를 감싼 콘크리트 그리드 구조. 이 낙수장을 자세히 보면 귀퉁이가 둥글게 처리된 것이 재미있다. 어떻게 콘크리트가 둥글게 나타날까, 생각하는 즉시 떠오른다. 콘크리트는 본래 액상 재료였음을. 자연을 바라보는 태도, 재료를 다루는 태도, 재료의 특성과 본질에서 나타나는 근본적인 형태.






베네치아 출신 안드레아 팔라디오는 인정된 양식에 자기 이름이 붙어있는 최초의 건축가이다. 팔라디오의 작품은 그리스와 로마 신전건축의 기반이 되는 형식적 원칙을 엄격하게 해석함으로써 전 세계에 영향을 두루 미쳤는데, 이는 그의 저서인 건축사서의 출간 때문이었다. 이 건축사서에는 건물에 대한 실무적 조언, 설계에 대한 체계적인 규칙만이 아니라, 고대 로마 건축과 팔라디오 자신의 계획안을 실측한 도면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책 속에서


팔라디오의 이러한 고전적 본보기를 따른 건축물 중 하나가 사진의 치즈윅 하우스. 이후 주택, 공공기관에 많은 영향을 준 팔라디오의 건축은 사진에서 전하듯 주택, 건물의 정면에 신전의 정면을 사용하는 방식을 도입했다. 빌라 로톤다의 모든 장식을 떼어낸 재해석. 주택 옆에 나란한 부속건물...... 대통령이자 아마추어 건축가이기도 했던 토머스 제퍼슨은 자신의 건축 경전이라고까지 부른 '건축사서'에 따라 자신의 가족 사유지와 버지니아 대학교를 설계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심지어 백악관도 팔라디오주의의 아일랜드풍 변형임을 이 책을 통하여 알게 되었는데, 건축이든 미술이든 어떠한 사조의 중요성은 후세에 끼친 영향이 그 맥락에서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기준 삼아 판단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지금 내가 느끼는 미국의 이미지가 팔라디아니즘에 따른 것이었다니!






그런데 이러한 건축사조가, 아카데믹한 양식이 그 양식 혼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위의 설계도를 통해 알 수 있다. 보자르, 프랑스어 그대로 옮기자면 BEAUX-ARTS. 이 미술학교 에콜 데 보자르의 장 니콜라 루이는 1830년 출간한 그의 저서에서 저 설계도를 통해 다양한 교회 설계가 비교하고 있다. 화려한 장식, 엄격한 방법론. 초점을 고전주의 미술과 건축에 두고 회화, 조각, 건축으로 교육과정을 나누고 당시 건축 실무를 가르친 프랑스 국립토목햑교는 지금에도 그 명성을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보자르를 굳이 지금에 와서 다시 떠올리는 것은 그 명맥을 짚고자 하는 의지가 아니다. 오히려 이는 현재 주요 공과대학의 교육 시스템(아이디어 구성, 에스키스, 부공간과 주공간 개념)에 영향을 주었고 뉴욕 그랜드 센트럴역, 버클리의 대학 건물과 파리 오페라 극장을 둘러보는 작업의 일환이다. 즉, 현재를 훑어보는 일이다.





그리고 여기에 시대정신, 세계의 계획을 각 시대가 펼쳐나가는 것이 역사라고 보았던 칸트, 특정 사회나 문명의 정신을 형성하고 진보에 그 위치를 규정하는 능동적인 힘이 시대정신이라 보았던 헤겔의 철학이 있었다. 신고전주의자 카를 프리드리히 싱켈의 물음. '모든 중요한 시기는 후에 그 시기의 고유한 건축 양식을 남겼다. 우리는 왜 우리만의 양식을 찾으려 노력하지 않는가?'라는 질문을 통해 건축의 영역에서 근대를 향한 생각을 읽을 수 있다.


교장 발터 그로피우스가 설계한 바우하우스 건축 디자인 학교의 건물을 들여다보면 그 어느 건물보다도 당시 기계시대의 정신을 형상화하려 했던 의지가 느껴진다. 기계의 효율성, 수공예품의 대량생산. 이 지점에서 나타난 기계시대라는 낱말. 강철, 철근 콘크리트, 유리. 벽을 아예 전면 유리로 대체한 저 바우하우스 작업장 건물을 실제로 보면 어떨까. 투과와 반사를 동시에 하는 유리를 전면에 두른 저 구조를 보노라면 생각지 못했던 생동감이 느껴진다. 1920년대 초반 미스 반 데어 로에의 말이 떠오르는 순간.


"건축은 공간으로 변환된 시대의 의지이다. 건축은 살아있고, 변화하며, 늘 새롭다.'






르 코르뷔지에의 빌라 사보아. 독창적이고 아름답다. 왜 아름다우며 왜 독창적인 것일까? 이 책에서 저자는 르 코르뷔지에 건축의 아름다움을 다섯 가지 특징에서 찾는다. 자유로운 기둥의 필로티, 옥상정원, 자유로운 평면, 가로로 긴 창, 전면부의 자유로움. 강화 콘크리트로 만든 기둥, 추상적으로 존재하던 '공간 블록'에의 표현, 기계적인 효율성을 벗어난 생활을 위한 설계. 활짝 열려있으면서도 사생활이 보장되는 공간. 르 코르뷔지에의 양식은 참신하며 명료하며 정확한 형태를 보인다. 잰슨의 말을 빌리자면, 어쩌면 르 코르뷔지에는 자신이 지은 주택에 의해 하나의 새로운 인간이 창조될 수 있을 정도로 자신의 설계 개념이 전통적인 주택 개념과 다르다는 점을 표명하기를 원했는지도 모른다(서양미술사 참조).






회화와 건축을 따로 떼어 볼 수 없음은 자명한 이치이지만, 앞서 고딕을 살펴보며 건축에서 시작된 이 이름표가 회화로 넘어갔음을 다시 생각해본다면, 이 반대의 현상이 추상에서 드러난다. 이 책에서 68번째 아이디어로 다룬 '순수한 형태 언어', 추상.


추상을 처음으로 옹호한 선언은 러시아 화가 바실리 칸딘스키가 1912년에 출간한 '예술에서의 정신적인 것에 관하여'에 담겨있다. 당시 칸딘스키는 독일 표현주의 집단에서 활동했는데, 이 집단을 통하여 처음으로 온전하게 만들어 낸 추상적인 건축물이 바로 에리히 멘델존의 설계로 등장한 아인슈타인 탑이다. ... 추상은 급진적인 새로운 표현 형식일 뿐만 아니라 영국 비평가 허버트 리드가 1935년 글로 썼던 표현을 빌자면 예술과 건축의 영원한 성질을 '신성하게 유지하는' 수단으로서도 간주되었다. 이는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가 새로운 개념에 대해 주장하면서 스스로 왜 '보수파'라고 묘사했는지, 그리고 르 코르뷔지에는 '로마의 교훈을 끝없이 격찬하면서도 어떻게 건축 혁명을 주창할 수 있었는지에 대한 대답이었다.-책속에서


추상, 그 비구상적 작품. 근대주의의 특징, 그 개념 중의 하나. 어쩌면 이는 어떠한 연관도 없는 새로운 건축일 것이다.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유니티 템플에서는 정방형 격자가 등장한다. 비율과 구조를 통제하는 이 격자는 추상의 특징이 건축에 어떻게 투영될 수 있는지를 한눈에 보여주는, 앞서 말한 순수 형태를 그대로 드러내는 하나의 언어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르 코르뷔지에가 하나의 새로운 인간이 탄생할 수도 있는 건축을 생각했다면, 스위스 발스에 있다는 피터 줌터의 온천 욕장은 모든 감각을 느낄 수 있는 건축이 아닐까. 인간이 자신의 신체로 느낄 수 있는 모든 강렬한 느낌. 신체로 경험하는 건축물을 소개하면서 저자는 후설, 하이데거, 메를로 퐁티가 이야기하는 현상학을 설명한다. 체화된 존재의 경험, 형태의 복잡함과 규모를 강조하던 건축이 이제는 경험을 이야기하게 되었다. 일부러 노력하지 않고도 느끼는 감각과 삶의 문맥, 일상과 마주하는 공감적 태도를 통한 현상학적 환원.


줌터가 설계한 온천욕장에는 설재 벽과 콘크리트 지붕 사이의 빛이 있다. 공기의 흐름이 보일 것이다. 아마도, 느낄 수 있는 모든 감각이 생활세계에서 열릴 것 같은 느낌이다.






보는 순간 '지금' 볼 수 있는 건축이라는 느낌이 든다 했는데, 설명을 보니 렌조 피아노가 설계한 캘리포니아 과학 아카데미. 초록 융단을 덮은 지붕, 에너지 효율, 자연순응형 설계. 이제는 건축물의 생애주기와 생태 발자국을 전체적으로 바라보고 평가하고자 하는 시기. 급격한 오염, 급속한 인구 증가. 지속가능한 개발,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 경제학자 슈마허의 '작은 것이 아름답다'. 그러나 렌조 피아노의 설계를 본다 하여도, 이 쟁점에 체계적으로 대응하는 시스템은 아직 찾아보기 어렵다고 저자는 판단한다. 이를테면 '옛날 수도자가 털이 섞인 거친 천으로 만든 옷을 입듯이, 친한경 자격증처럼 식물을 담고 있는 노골적인 생태 건축물을 넘어 건축의 질을 혁신하는 지속 가능한 건축물을 찾아내기란 아직도 어려운 실정이다.'와 같은 문장을 읽노라면 환경 건축, 지속가능성, 건축물이 신축 건축물에는 효과적일지도 몰라도 기존 건축물에서는 적용하기 힘들 것이라는 판단이 보인다. 특징과 맥락을 짚고자 하는 평가기준.








베를린 유대인 박물관. 이 사진의 왼편에는 발바오의 구겐하임이 있었다. 수평의 바닥과 수직의 벽, 직교 구조에 대한 공격이라는 이름표를 단 '해체', 는 이 챕터의 이름이 그러하듯 순수한 형태를 위한 꿈의 파괴이다. 저자가 붙인 이름표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그러다 펠릭스 누스바움관을 떠올렸다. 내부의 불안정한 구조, 지하 요새를 연상시키는 공간. 다니엘 리베스킨트는 당시 펠릭스 누스바움관을 설계하며 진열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생애와 작품을 이어주는 비극적 관련성을 표현하고 건물 자체가 기념물과 같은 상징성을 가질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다른 책을 잠시, 서경식의 '고뇌의 원근법'에서 서경식은 '경사와 비스듬히 날카롭게 뻗어 나가는 평생선을 많이 사용함으로써 극히 기능적이면서도 방문자의 심리를 끊임없이 불안감과 위기감에 몰아넣는 효과를 자아내고 있다'고 말한다.


다시 이 책의 사진으로 눈을 돌려 본 베를린의 유대인 박물관.


무너질 듯 말 듯 보이는 선. 직교와 질서에 대한 도전. 어쩌면 데리다가 말한, 군림, 지배, 권력, 해체와 타자, 대립항이 분해와 탈중심화, 불연속으로 드러난 것일 것이다.






앞서 살펴보았던 해체와 구성의 특징은 렘 쿨하스의 머리를 거치면 이렇게, 직물과도 같은 형태를 드러낸다. 주름이 있는 건물. 캐드와 3D 모델링, 스플라인 기법의 패키지를 이용한 이러한 설계는 구성요소에의 관심과 주름 잡힌 형태, 다양한 요소의 복잡한 결합과 구조체의 생성을 가능케 했다. 그리하여 사진의 시애틀공공도서관. 구체적이고 기술적인 이러한 기술은 미국의 디지털 건축분야의 선구자 그렉 린이 '디지털 고딕'이라고 칭한 이러한 형상의 구현에 일조하고 있다. 이질적인 장비로 둘러싸인 친숙한 주름을 보노라면 사람이 생각하는 복잡하고 다양한 구상이 느껴진다.


저자의 말을 빌리자면, 인간이 만드는 모든 것은 결국, 하나의 아이디어에서 비롯된다. 개념과 아이디어는 다른 시공간 속의 서로 다른 사람들 속에서 생겨난 것. 어떻게 처음 반짝였을까. 그 '어떻게'를 이 책을 읽는다 하여 모두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저자도 말하였듯, 앞으로도 그것은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함께 길을 걷듯 같이 호흡하는 철학과 회화, 조각과 건축의 대화 도중 탄생한 사진의 아름답고 놀라운 건축을 바라보노라면 평범하지만 특색있는 흐름이 엿보인다. 저자는 전문용어를 최대한 덜 사용해가며, 그러나 굳이 사용해야 할 때에는 친절한 설명을 덧붙이며 자신이 중요하다 생각하는 백 가지의 재료와 역학, 특성과 개념을 설명한다. 다양한 아이디어의 유형, 연대순 정렬, 그리하여 나타나는 이 흐름. 개념과 개념 사이를 오가는 친절한 설명. 세심하면서도 친숙하고 일상적으로 보이면서도 전문가의 기술이 엿보이는 건축의 한 자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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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eamout 2013-09-15 2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을 사놓고 안읽고 있다가, 올초에 집에 놀러온 조카에게 줬어요. 이제 막 건축학과에 들어간 신입생이라 관심을 보이더군요. 그 이후 다시 구입하진 않았는데.. 새롭게 관심이 가네요.

오늘 막 읽은 유하니 팔라스마의 '건축과 감각'을 보면, 고딕성당의 기둥배치는 그레고리오 성가와 관련이 깊다네요. 건축은 늘 흥미로워요. 10대 후반에 누군가 또는 뭔가가 자극이 되었다면, 저도 건축학도가 되었을지도...

Jeanne_Hebuterne 2013-09-17 12:40   좋아요 0 | URL
dreamout님, 저는 이 책을 처음 접했는데, 역시 먼저 알고 계셨군요! 개념을 쉽게 풀어나가면서도 전문용어를 알맞게 써서 관심있는 일반인도, 전공자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개념을 다 읽지 않고 사진과 간략한 설명만 읽는다 해도 시간가는 줄 몰랐지 뭡니까.

고딕성당의 기둥배치가 그러했군요! 이 책에서는 계속 서로 영향을 주고받은 회화와 건축, 철학을 넘나드는 시도가 보이는데 저는 서양미술사와 함께 훑었답니다. 어떤 분야이든 그 하나만 외따로 있지는 않은 것 같아요.

덧-이미 dreamout님께서 10대 후반에 받으신 자극이 지금의 dreamout님을 만들었을 거라는 생각을 하면, 제가 dreamout님을 잘 모릅니다만 아쉬워할 일은 아닌 것 같아요! 곧, 추석, 잘 보내시기를 바랍니다.

2013-10-02 16: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0-16 13: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요나스 요나손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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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번은 중요하지 않다. 한 번이면 그것으로 영원히 끝이다. 유럽 역사와 마찬가지로 보헤미아 역사도 두 번 다시 반복되지 않을 것이다. 보헤미아 역사와 유럽 역사는 인류의 치명적 체험 부재가 그려 낸 두 밑그림이다. 역사란 개인의 삶만큼이나 가벼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가벼운, 깃털처럼 가벼운, 바람에 날리는 먼지처럼 가벼운, 내일이면 사라질 그 무엇처럼 가벼운 것이다.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시간에도 단위가 있다면 나의 것은 종종 시계 없이 이루어져 있었다. 

 그것은 리뷰 하나, 페이퍼 하나, 혹은 문자 메세지 한 통, 전화 한 통, 그리고 어떤 일의 범위로 이루어져 있었다. 장소와 사람이 바뀌고 그에 따라 이야기가 바뀌는 길. 그것이 로드 무비였다면, 종종 그 이야기에서 나타나는 선의 궤적이 궁금해질 때도 있었다. 어차피 백 년을 기본 단위로 생각할 수밖에 없는 인간 이라는 핑계로, 그것이 커다란 원으로 이루어져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본 적도 있다. 현재를 온전히 내 것으로 할 수 없으면 이럴 수밖에.




 이러한 백 년 단위로밖에 생각할 수 없는 인간의 최대의 시간, 백 년을 제목에 내세운 소설이 하나 나왔다. 바로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제목과 표지에서 그 목적과 궤적을 또렷하게 밝힌 책이다. 유머가 왜 유머러스한 것인지, 이 책에서 말할 이야기가 어떤 것이 될지, 그리고 얼마나 많은 이들이 웃었는지가 분명하다. 말하자면 가는 길이 명확하고 인물의 표정이 또렷한 이야기. 그 명암이 워낙 확실해서 알란이라는 100세 노인이 양로원 창문을 넘어 도망치는 순간 이미 이 책의 전체가 훤히 보이는 느낌이다. 이야기가 인물이 사건 속에서 일으키는 갈등의 구조에서 나타나는 것이라면, 이미 이 인물 속에 이야기가 담겨 있으니까. 그래서 그 속에서 독자의 표정과 눈꼬리가 다른 각도로 춤을 춘다. 




 이 소설에서 드러나는 갈등의 구조를 보노라면 코미디와 다큐멘터리가 만나는 지점은 늘 아슬아슬하다는 생각이 든다. 다큐멘터리라는 직선의 선은 영원히 반복되지 않고 한 번에 쓱 지나간다. 한 번은 없는 것과 같은데, 코미디의 점이 과거와 현재, 미래에 촘촘하게 흩뿌려져 있다. 작가는 이 책에서 그 점을 한번에 쓱 연결하는 것으로 큰 고민 없이 이야기의 큰 축을 일군다. 하나의 축은 100세가 된 알란, 다른 축은 100세가 되기까지의 알란. 전자는 어느 순간 외친다. 나라고 태어날 때부터 100살이었는 줄 아는가! 후자는 또 외친다. 일어날 일은 일어나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알란이 왜 도망쳤는지는 처음부터 그리 중요한 이유가 아니었다. 그에게는 별다른 목적의식이 없었으며 목표 또한 없었다. 목표란 목적이 있어야 단짝처럼 움직이는 것 아니던가. 그러니 가야 하는 길도 없다. 단지 일어날 일이 일어나니까, 따라간달까. 




 "뭐? 정말로 당신이 히말라야 산맥을 넘으셨소? 백 살이나 된 양반이?"

 "아니, 내가 미쳤소? 이 나이에 히말라야를 넘게? 내가 항상 이렇게 백 살이었떤 건 아니야. 백 살이 된 건 아주 최근의 일이지."

 "아, 그래서요?"

 "우리 모두는 자라나고 또 늙어가는 법이지." 알란은 철학자처럼 말했다. "어렸을 때는 자기가 늙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해......"

-책 속에서.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는 정언명령을 없앤 체 움직이는 이 노인의 길을 따라가노라면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는 찰리 채플린의 말이 떠오른다. 100세가 아니었을 때, 부모는 차례로 세상을 떠나고 열 살 무렵 폭약 회사에 취직. 폭약 실험을 하다 정신병원에 수용되고 스페인의 프랑코 장군, 미국의 해리 트루먼, 중국의 마오쩌둥, 러시아의 스탈린 등을 만난다. 모든 고비는 죽을 고비였으나 인물은 캐리커처처럼 희화화된 채 남아있다. 그 생각의 깊이가 깊든 얕든 노인은 정치공학에서 나온 판단을 배제하고 순간의 바람에 따라 움직인다. 이 모든 것이 먼지처럼 가볍게만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역사는 큰 틀로 준비되어 있을 뿐, 그 속에서 움직이는 인간은 한없이 가볍게만 보였기 때문이라면 이는 무거움에의 예찬일지도 모른다. 또한, 한바탕 실컷 웃자는 작가의 의도를 내가 잘못 받아들인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밝고 가벼운 것만을 취하는 대신 어떤 것이 무슨 이유로 밝거나 어두운지를 잠시 생각해 보아도 그것이 그리 잘못된 일은 아닐지도 모른다. 독자의 책 읽는 행위는 무조건 아름답거나 밝은 것만을 취하려는 활동이 아닌, 작가의 역량을 파악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그것은 순간의 말장난, 재미있는 캐리커처, 잠시 지나가는 한 톨 유머가 아닌 진실을 직시하고 그것을 자신만이 할 수 있는 방법으로 그려낸 창작자로서의 역량이다. 기교와 재주는 그다음이다. 그런 의미에서 요나스 요나손의 글쓰기는 한없이 가벼운 것일 수도 있다. 문학에서 가벼운 기쁨과 유머러스함만을 얻는다면 그것은 잘못된 일이지만 그것 역시 문학에서 얻는 여러 가지 효용 중의 하나이다. 그런 면에서 요나스 요나손의 글은 문학 그 자체는 될 수 없을지언정 독자의 눈에 쉽게 스미는 글쓰기의 방법을 아는 것이 분명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 자체로 재미있고 쉬우며 간간이 웃기기도 하여 읽는 이로 하여금 별다른 저항감이 들지 않는 이야기는 이렇게 반짝, 잠시 빛나는 효용을 발휘한다. 





 이 잠시 빛나는 순간이 한국의 독자가 느끼는 유머의 구조와 조금 다르다는 것이 잠시 의아했으나 어찌 보면 그것이 바로 핵심일 수도 있다. 명랑함에도 색채가 있다면 그것은 문화의 색채일 것이다. 나라마다 고유한 유머코드를 번쩍이는 캐릭터나 작품을 하나씩 갖고 있다. 프랑스의 아스테릭스, 미국의 아메리칸 파이, 한국의 코미디 프로그램의 캐릭터 등이 있는데 예외로 영국의 미스터 빈은 어느 나라에서 개봉하여도 인기를 누린다는 점을 떠올려 보자. 미스터 빈이야말로 대사가 거의 없는 코미디라는 것을 생각해 본다면, 유머의 큰 부분은 언어와 문화에서 오는데, 그 두 가지를 전제할 수밖에 없는 소설이야 말할 것도 없지 않은가.  또 다른 북유럽권 소설 '기발한 자살여행'의 경우, 핀란드 사람들은 해마다 그가 내놓는 유머러스하면서도 기발한 신작을 기다린다지만 한국에서 그의 인기는 그에 영 못 미친다는 점을 보아도 그렇다. 작가가 보는 세계관, 그 안에서 사건을 비틀거나 인물을 점으로 연결하는 방식은 사회와 언어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밖에 없다. 우리가 재미있다고 말하는 많은 부분은 이렇게 다를 수밖에.




그런데 이 소설의 재미있는 부분은 100세 노인 알란이 주변 인물과 다르다는 점에서 생겨난다. 그는 시간을 목표를 설정하고 가치를 추구하는 일로 보내지 않는다. 방향이 없고, 갈 길은 묘연하다. 무엇을 하여도 길은 보이지 않는다. 되는 대로, 살아지는 대로 사는 사람이다. 그 사이 하필 역사의 주요 인물을 만났다는 점 또한 다른데, 이 역시 우연한 산물이다. 인물 하나마다 챕터를 따로 만들어서 독립된 이야기로 보아도 될 만큼 파편화되어 있다. 그리고 우리의 삶도 그렇다. 인과관계가 1:1로 성립되지도 않으며 목표와 가치를 추구하여도 그것이 이루어진 다음에는 새로운 무언가가 또 있어야 한다. 시간은 직선으로 흐르는 것이지 원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따로 떨어져 존재하는 현재를 나는 본 적이 없다. 다가오는 1초 뒤의 미래, 이미 사라진 1초 전의 과거, 그 사이의 기대와 가능성, 후회 혹은 성취를 인간은 계산하고 따져보느라 현재를 누릴 수가 없다. 지금이 영원하다는 듯 귀를 펄럭거리는 이 소설 속 코끼리처럼 현재를 즐길 능력이 인간에게는 없다. 오로지 알란에게만 있는지도 모르겠다. 





어느 쪽이 더 가치 있는지를 따져보는 것은 작가가 의도한 바도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 노인이 재미있다고 느꼈다면 찬찬히 들여다 보라. 이 이야기의 재미있는 구석과 재미없는 모든 구석은 일반적으로 우리가 '해야 한다'고 생각한 정언 명령과 도덕률에서 벗어났기에 보이는 것이다. 어쩌면 이것을 느끼는 순간, 별안간 소설이 끝나버려 의아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이 노인이 200세까지 살다가 그 해 다시 어디론가 사라졌다는 후속편이 나와도 놀랍지 않을 것 같은 기분도 이런 측면에서 나온 것일지도. 





알란은 결코 바보가 아니었다. 학교는 3년밖에 다니지 않았지만 쓰기와 읽기와 셈하기를 배우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정치의식이 투철한 니트로글리세린사의 동료들은 그에게 세상사에 대한 호기심을 불어넣어 주었다.

 하지만 알란의 인생철학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남편의 사망소식을 접한 어머니가 했던 말이었다. 그 메시지가 소년이 영혼에 뿌리를 내리기까지는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지만, 그렇게 정착한 뒤에는 영원히 남았다

 <세상만사는 그 자체일 뿐이고, 앞으로도 무슨 일이 일어나도 그 자체일 뿐이란다.>

이 말에 내포된 의미 중 하나는 절대로 불평하지 않는다는 거였다. 적어도 타당한 이유 없이는 절대로 그러지 않는다는 거였다. 예를 들어 아버지의 사망 소식이 윅스훌트의 거실에 날아들었을 때도, 알란은 가족의 전통에 따라 묵묵히 숲으로 가서 나무를 베었을 뿐이다. 물론 다른 때보다 좀 더 오래, 그리고 좀 더 무거운 침묵 속에서 베었지만 말이다. -책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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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아이즈 2013-09-12 1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따라 서재 커버글 부질없다, 실낱같다가 확 들어옵니다.
부질없고 실낱같다는 걸 알면서도 과감하게 버리지 못하는 나날입니다.
<세상 만사는 그 자체일 뿐>인데 뭣 때문에 이렇게 허덕이거나 헤매는 것일까요?
부디 에뷔테른님만은 시간에 쫓기지도, 실낱 같더라도 희망 버리지 않는 가을 꾸려가소서.
살짝 안부만 여쭈고 사라집니다^^*

Jeanne_Hebuterne 2013-09-14 15:29   좋아요 0 | URL



팜므느와르님, 그러셨군요!

종종 사는 것이 무척 유용한 일이 아닌가 생각하다가도 시골길을 달리는 마차와도 같이 어느 순간 금속 접합부분이 고장나서 덜컥, 하는 순간도 있는 것 같아요.

그럴 때는 두 시간이나 이른 점심을 먹고 마차를 고치면 다시 길을 떠나야 할텐데 이상하게도 마음이 쓸쓸해지는 순간이 있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돌이켜 보면 그 두 시간 이른 점심 덕분에 내가 저녁까지 다시 길을 떠날 수 있는 것이기도 하고, 혹은 그 두 시간 이른 점심 때문에 박자가 깨어질 수도 있는 노릇인데 늘 마음에는 정답이 없는 걸 보면, 역시 사람은 참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시간에 쫓기지도, 희망 버리지도 않는 가을......

팜므 느와르님의 낱말이 참 곱고 예뻐서 소리내어 조용 읽어보았답니다.

고마워요, 팜므 느와르님. 많이 읽고 생각하고 꺼내어 보는 가을날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