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년생 김지영 오늘의 젊은 작가 13
조남주 지음 / 민음사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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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영 씨는 우리 나이로 서른네 살이다. 3년 전 결혼해 지난해에 딸을 낳았다. 세 살 많은 남편 정대현 씨, 딸 정지원 양과 서울 변두리의 한 대단지 아파트 24평형에 전세로 거주한다. 정대현 씨는 IT 계열의 중견 기업에 다니고, 김지영 씨는 작은 홍보대행사에 다니다 출산과 동시에 퇴사했다. 정대현 씨는 밤 12시가 다 되어 퇴근하고, 주말에도 하루 정도는 출근한다. 시댁은 부산이고, 친정 부모님은 식당을 운영하시기 때문에 김지영 씨가 딸의 육아를 전담한다. 정지원 양은 돌이 막 지난 여름부터 단지 내 1층 가정형 어린이집에 오전 시간 동안 다닌다.


 나와 비슷한 나이, 비슷한 지역에 사는 작가의 책을 읽는 것은 마치 거울을 들여다보는 것과도 같다. 이때 소설은 작은 반사판이 되는 것 같다. 도시 생활자라는 별명이 붙은 정이현 무렵부터, 서울이나 대구, 부산, 혹은 다른 친숙한 지역 출신의 작가들이 조금씩, '지금, 여기'를 쓰기 시작했다. 이상하게도 그 이전 작가들은 그러지 않았던 것일까? '그게 이상하게도, 그렇게 됩니다.'라는 어느 소설가의 말이 떠오른다. 
 그러니까 정이현이 '삼풍백화점'을 통해 냉면을 먹고, 백화점에서 어떤 무늬 다이어리를 살까 고민하고, 정장 바지 코너에서 친구라기에는 낯선 그를 만나는 이야기를 그려낸 그 시점이 하나의 갈림길을 만든 때라고 생각한다. 대도시에서 지하철을 타고, 회사에 나가고, 커피를 마시거나 쇼핑을 하는 여자의 이야기. 이상하게도 그 전에는 소설 속에서 조금은 보기 힘들었던 이야기들.



 1978년생, 사회학을 공부하고 PD수첩, 불만 제로 등의 작가로 10년간 일했다는 조남주의 82년생 김지영은 제목이 많은 정보를 준다. 82년생, 그러니까 지금 삼십 대 중반, 한국에 사는 여자. 1982년, 여아 낙태 통계 그래프가 가파른 상승곡선을 그렸고 그 이후 99년, 워렌 버핏은 금융위기를 맞은 한국을 돌아본 다음 경구피임약 회사의 주식을 사들였다. 그의 말에 따르면 한국은 여성인권이 낮았다가 당시 그에 대한 인식이 바뀌기 시작했으며, 90년대 후반부터 여성의 대학진학률이 남성과 비슷해지기 시작했다. 낮은 혼인율과 출산율. 이것이 그가 예상한 대한민국의 미래였다. 
 결코 원금을 잃지 않는다는 이 주식 전문가의 의견과 맞물리는 82년생 김지영 씨의 이야기는 지나치게 쉬워 생각할 틈을 주지 않는다. 쉽다는 것은 어떤 일이 행해지는 데 그다지 많은 수고나 노력이 필요하지 않다는 뜻이고, 생각할 틈을 주지 않는다는 것은 이야기의 속도감이 상당하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나는 외려 이 '쉬움'이 나로 인한 것임을 안다. 한 치의 틈이 없이, 내가 잠시 82년생 김지영이었으므로. 그래서 나와 이 글의 간극이 긴밀하여 마음이 급해질까봐, 그 점이 저어된다.



"원래 애 낳고 나면 마디마디가 다 약해져. 모유 먹이면 약도 편하게 못 쓰는데. 물리치료 받으러 올 수는 있어?"
 김지영 씨는 고개를 저었다.
 "손목 많이 쓰지 말고 잘 쉬어. 어쩔 수 없지 뭐."
 "애 보고 빨래하고, 청소하고.......손목을 안 쓸 수가 없어요."
 김지영 씨가 푸념하듯 낮게 밀히지 할아버지 의사는 피식 웃었다.
 "예전에는 방망이 두드려서 빨고, 불 때서 삶고, 쭈그려서 쓸고 닦고 다 했어. 이제 빨래는 세탁기가 다 하고, 청소는 청소기가 다 하지 않나? 요즘 여자들은 뭐가 힘들다는 건지."
 더러운 옷들이 스스로 세탁기에 걸어 들어가 물과 세제를 뒤집어쓰고, 세탁이 끝나면 다시 걸어 나와 건조대에 올라가지는 않아요. 청소기가 물걸레 들고 다니면서 닦고 빨고 널지도 않고요. 저 의사는 세탁기, 청소기를 써 보기는 한 걸까.
 의사는 모니터에 뜬 김지영 씨의 이전 치료 기록들을 훑어본 후, 모유 수유를 해도 괜찮은 약들로 처방하겠다고 말하며 마우스를 몇 번 클릭했다. 예전에는 일일이 환자 서류 찾아서 손으로 기록하고 처방전 쓰고 그랬는데, 요즘 의사들은 뭐가 힘들다는 건지. 예전에는 손으로 모심고 낫으로 벼 베고 그랬는데, 요즘 농부들은 뭐가 힘들다는 건지......라고 누구도 쉽게 말하지 않는다. 어떤 분야든 기술은 발전하고 필요로 하는 물리적 노동력은 줄어들게 마련인데 유독 가사 노동에 대해서는 그걸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전업주부가 된 후, 김지영 씨는 '살림'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가 이중적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많았다. 때로는 '집에서 논다'고 난이도를 후려 깎고, 때로는 '사람을 살리는 일'이라고 떠받들면서 좀처럼 비용으로 환산하려 하지 않는다. 값이 매겨지는 순간, 누군가를 지불해야 하기 때문이겠지.


  김지영 씨가 하는 대가 없는 노동, 까닭 없는 힘듬이 과연 대가를 측정할 수 없고 까닭이 없이 일어나는 일일까? 왜 김지영 씨의 말이 새롭게 들리고, 할아버지 의사의 말은 너무 많이 들어 당연한 것이 되었을까? 왜 그는 언어에 대한, 단어에 대한 선택조차 제대로 하기 힘든 것인가? 

 조금 다르게 말하자면, 왜 여성은 자기 몸에 대한 주도권을 가질 수 없을까? 왜 페미니스트라는 단어를 말하는 것을 조심스러워 해야 할까? 아무도 차별받지 않는다지만 그 말이 누구의 입에서 나와 누구의 귀로 들어가는 것일까? 많은 틀린 일을 하는 이들은 자기 행동에 그 어떤 반성도 자각도 없건만 왜 페미니스트들은 자기검열을 거쳐야 하며 다른 모든 방면에서 조심해야 할까? 

 답은 간단하다. 아직 자유롭지 않기 때문이다. 아직 이야기의 주체가 되지 못하고 객체로서, 'her'로 머물러야 하기 때문이다. 




 다른 이야기를 해보자. 나는 여자이며, 화장하는 것을 좋아한다. 내가 좋아하는 어떤 책과 어떤 음악은 지독한 여성혐오자가 남긴 것일 때도 있다. 나는 짧은 드레스를 입는 것을 즐기고, 하이힐도 좋아한다. 그 하이힐이 내 엉덩이를 치켜올려주고, 남자들로부터 시선을 받는 것을 즐긴다는 것과는 다른 뜻이다. 왜 내가 옷을 입고 거리에 나서는 것이 남자들의 시선을 의식해서라고 재단하는 것일까? 무거운 물건을 들어 올릴 수 없는 것은 그 물건이 무거워서이지, 내가 남자처럼 힘을 길러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이유와 당위를 헛갈리는 것은 어리석은데, 왜 김지영 씨는, 김지영 씨의 주변 사람들은 이 덫에서 헤어나올 수 없었을까? 




 "남자애들은 쉬는 시간 10분 동안도 가만히 안 있잖아. 축구든, 농구든, 야구든, 하다못해 말뚝박기라도 한다고. 그런 애들한테 어떻게 와이셔츠 목까지 닫아 입고 구두 신고 다니라고 하겠어?"

 "여자애들이라고 싫어서 안하는줄 아세요? 치마에 스타킹에 구두까지 신겨 놓으니까 불편해서 못하는 거라고요. 저도 국민학교 때는 쉬는 시간마다 말뚝박기하고 사방치기 하고 고무줄놀이 하고 그랬어요."



 그 그물망이 너무나도 촘촘하고 엄밀하다는 것과는 별개로, 나는 이것이 전 사회의 암묵적인 동조에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본다. 지금이 아무리 여자가 대학을 가고, 판사도 하고, 이전과는 다름을 강조하여도 그것은 전과의 다름이지 남자와 같은 자유를 누린다는 뜻은 아니다. 씨네 21의 이다해 기자가 말하였듯 '당신은 페미니스트입니까?'라는 질문에는 '그럼 당신은 남자와 여자, 인간이 모두 평등하다는 것을 믿지 않습니까?'라고 되받아치는 것이 적절하다. 적절한데, 문제는 '페미니스트'라는 단어에 감히 '나치'라는 단어를 붙인 '페미나치'라는 조어를 만드는 시대에 내가 살아있다는 것이다. 모욕을 모욕이라 말하기 힘들 때가 있고, 내가 느꼈던 이상한 감정을 상대에게 설명하여야만 할 때도 있다. 내가 자동차를 타고 다닌다 해서 누군가가 내 자동차를 들이박아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그런데 왜, 유독 여성 범죄에 관해서, 여성이라는 특질에 대해서는 원인과 당위가 뒤바뀌어도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일까.



 조남주의 소설은 조용하다. 지나치게 앞서나가거나 뒷걸음질 치는 법 없이 김지영 씨의 시간을 연도별로 훑는다. 그러면서 조심스럽게 통계자료나 당시의 이야기를 덧붙인다. 그 자료는 김지영 씨의 이야기에 간결한 힘을 싣는다. 

 이것은 일어나지 않았던 일, 허구가 아니라 지하철 어느 역에서 네 옆자리에 앉았던 어떤 여자의 이야기라고, 집회에 나가 함께 촛불을 들고, 무엇이 떳떳하고 옳은 일인지, 무엇이 부끄러운 일인지를 고민하는 사람의 이야기라고, 무엇보다도 너와 다를 것이 없는 한 사람의 이야기라고. 어쩌면 좀 과할 수도 있는 소설 끝 진료 부분에 이르러서는, 좀 과장됐어. 그런데, 그게 그렇게 과장된 것도 아니고 다시 보면 실제 있는 일이잖아? 하는 자조적인 헛웃음이 나온다. 길가며 무심결에 바라본 누군가의 모습이 사실은 거울에 비친 나였음을 자각하는 순간 나오는 표정과 같은 색깔의 웃음. 나는 이 헛웃음이 아무 성과 없이 사라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너무 내 이야기 같아서 거리를 유지하기 힘들었던 책.



 *따옴표 글은 모두 책속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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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개 2016-12-12 19: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냥이와 잘지내시죠?

Jeanne_Hebuterne 2016-12-28 05: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무개님!
삼남매 모두 잘 있습니다! 요즘은 사료 고민이 많아요ㅠㅠ 제가 먹이는 사료가 괜찮을까 싶어서 조리식을 시도중인데 이게 삼남매가 먹어야 먹일 수 있으니까요...홀리스틱 급 캔푸드를 주문했는데 이곳도 얘들이 잘 먹을까 조바심중입니다. 냥이들 소식 전해주셔요^^

2017-01-03 16: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1-05 08: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1-08 23: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1-10 15: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1-12 18: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
수 클리볼드 지음, 홍한별 옮김 / 반비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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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9년 4월 20일, 에릭 해리스와 딜런 클리볼드는 총과 폭탄으로 무장하고 콜럼바인 고등학교에 갔다. 두 사람은 학생 열두 명과 교사 한 명을 살해하고 스물네 명에게 부상을 입힌 다음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역사상 최악의 학교 총기 난사 사건이었다.

 딜런 클리볼드는 내 아들이다.

 그날 일어난 일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내 목숨을 바칠 것이다. 그 날 죽은 사람 한 명의 목숨과 내 목숨을 바꾸자고 하더라도 기꺼이 그렇게 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는 것도 안다. 내가 무슨 짓을 하고 무슨 말을 하더라도 학살을 속죄할 수는 없다.

 그 끔찍한 날 뒤로 16년이 흘렀다. 그 열여섯 해를, 나는 아직도 여전히 알 수 없는 일을 이해하려고 애쓰는 데에 바쳤다. 어떻게 창창한 아이의 삶이 그렇게 한순간에, 바로 내 눈앞에서, 재앙으로 바뀔 수 있는가 하는 문제 말이다. 전문가들, 우리 식구들, 딜런의 친구들, 그리고 누구보다도 나 자신에게 묻고 또 물었다. 내가 대체 무얼 노힌 건지, 어떻게 그걸 놓칠 수 있었는지. 내가 쓴 일기를 들추고 또 들추었다. 법의학자처럼 엄밀하고 철저하게 우리 가족의 삶을 파헤치고 일상적 사건이나 대화를 곱씹어보며 내가 놓친 단서를 찾았다. 뭘 놓친 걸까? 어떻게 했어야 할까?




  

 한 아이를 기르는데 십육 년, 그 아이가 죽은 다음 그 아이 생각을 하는데 십육 년을 보낸 사람이 있다. 바로 콜럼바인 총기 난사 사건의 가해자 에릭 해리스와 딜런 클리볼드 중 딜런 클리볼드의 엄마 수 클리볼드이다. 너무나도 거대한 사건이어서 운을 떼기조차 어려운 사건을 담은 이 책의 표지에는 두 모자의 사진이 있다.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라는 강렬한 제목 뒤에 숨은 원래 제목은 이보다 훨씬 조용하게 말한다. 엄마의 회고록. 비극 이후의 삶. 



 습관대로 제목 뒤의 목차를 본다. 1부는 상상도 하지 못한 일. 즉 총격, 마지막 밤, 다른 사람의 삶, 쉴 곳, 불길한 예감, 어린 시절, 엄마가 엄마에게. 슬픔의 자리, 비탄을 안고 살아가기, 현실 부정의 끝. 2부는 이해를 향해. 즉 절망의 깊이, 치명적인 역학, 자살로 가는 길, 폭력으로 가는 길, 부수적 피해, 새로운 인식, 선서증언, 뇌건강과 폭력의 교차점. 

 



 딜런을 키우는 16년과 딜런이 죽은 다음 16년이 1부와 2부 사이 그 어딘가에 평행선을 그리듯 놓였다. 한가지 주목할 점은 결론과 주, 자료이다. 결론에서는 모든 이에게 안전한 세상이라는 제목에 각종 자살 예방, 폭력 예방, 총기 안정, 위협 평가 관련 도움을 받거나 지침을 참조할 수 있는 곳이 실려있다. 즉, 저자는 자신이 벌이지 않았으나 자신이 관련된 문제에 관해 끝없이 사과하고 참회하고 회고하는 것을 넘어서 비슷한 문제가 생길 가능성, 그 가능성을 막을 방법까지 생각하고 있다. 

 목소리는 내도록 조용하고 끈질기다.  자기가 남긴 빵조각을 찾아 거꾸로 집에 가는 길을 찾으려는 눈길처럼 모든 것을 다르게 보기 시작한다. 다르게 보며 다르게 읽는 일. 마침내 수 클리볼드가 딜런 클리볼드의 마음에서 읽어내려는 것은, '왜'이다. 그러나 대답할 아들은 세상에 없으며 그에게는 다시 살아가야 할 일만 남았다. 자신이 무엇을 했는지도 모르는 채 죄를 짊어지고, 온갖 소송이 난무하고, 모든 언론이 그들에게 눈길을 쏟는 당시 빠르게 도망치면서 수 클리볼드가 하는 일은 단 하나, 끝없이 파헤치는 일이다.




 정말 몰랐을까?




 정말 몰랐을 수도 있다.




 거짓의 구조는 생각보다 단순하다. 그것은 했다, 하지 않았다 정도로 간단한데 문제는 그 간단함이 제대로 된 질문을 만났을 때만 열리는 문과 같다는 것. 수 클리볼드의 잘못이 있다면 제대로 된 질문을 하지 않았다는 것, 혹은 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는 것. 그러나 애초에 수백가지 경우의 수에 대비해 수백가지 경우의 열쇠를 마련하는 것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부모가 자식에게 갖는 기대와 끝없이 펼쳐지는 서로의 관계는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바꾸어 말하면, 어떤 경우에는 통하는 방법이, 어떤 경우에는 무용지물이다.


 "보여드릴 게 있어요." 딜런이 주머니에서 스테인리스 술통을 꺼냈다. 위쪽에 깨진 부분을 솜씨는 없고 땜납은 많은 누군가 지저분학 때워놓은 흔적이 있었다.

 "그게 뭐니? 내가 물었다. "어디에서 났어?"

딜런은 주웠다고 했다. 안에 뭐가 들었냐고 묻자 딜런이 페퍼민트 슈냅스가 들어 있다고 했지만 그 술이 어디에서 났는지는 말하지 않으려 했다. 내가 늘 읊는 술의 위험에 대한 잔소리를 늘어놓으려 하자 딜런이 손을 들어 내 말을 막았다.

 "저를 믿어도 되고 로빈을 믿어도 된다고 말슴드리고 싶었던 거예요. 오늘 밤에 마시려고 술을 담아놨어요. 아주 조금밖에 안 먹은 것 보이죠." 딜런은 나에게 술통을 주면서 자세히 살펴보라고 했다. 마치 마술사가 마술을 시작하기 전에 그러듯이. "처음에 조금 마시고 그 뒤에는 안 마셨어요. 보여요? 거의 차 있잖아요." 나는 술통이 거의 차 있다는 걸 알겠다고 했다.

 "절 믿어도 된다고 말씀드리고 싶었어요." 딜런이 말했다. 나는 아직 약간 충격 받은 상태였지만 말해줘서 고맙다고 말하고 이렇게 덧붙였다. 너를 믿어." 그럭는 아닛ㅁ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사실 술 한 번도 입에 안 대고 고등학교를 졸업하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으니까. 게다가 나한테 먼저 말해주었으니 걱정하지는 않았다.

 조용한 한밤에 있었던 어마와 아들 사이의 이 사적인 순간을 그 뒤에 곰곰이 되새겨 보았다. 돌아보면 나에게 그 술통을 보여준 게 딜런이 나에게 한 가장 잔인한 장난이 아니었나 생각이 들 때가 있다.딜런이, 한편에서는 학살을 계획하고 있으면서 내가 자기를 믿도록 일부러 조종한 것인가? 나를 놀린건가? 이러나저러나 며칠 안으로 죽을 생각이었다면 왜 나의 신뢰를 더욱 북돋으려 한 걸까? 내 믿음을 확인하고 싶었던 걸가, 아니면 내가 혹여 자기 방을 뒤질까봐 쐐기를 박은 걸까?

 이런 생각들을 정신과의사에게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 의사는 이렇게 말했다. "딜런이 솔직했는지 아닌지 어떻게 알 수 있지요? 어쩌면 어머니에게 인정을 받고 싶었을지도 몰라요. 그 뒤에 있었던 일과는 무관하게요. 내가 영원히 알 수 없는 여러 일 가운데 하나다. 




 사람의 마음은 한 가지 요인과 한 가지 답을 지니지 않아서 이제 없는 아이의 마음속을 알 길이 없는 엄마의 마음은 더욱 막막하다. 그때 딜런은 왜 술통을 보여주었을까? 담배를 피우냐는 말에 '내가 바보로 보여요?'라고 왜 답했을까? 정신분석학자가 말했듯, 남을 죽이려고 갔는데 자신이 죽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한 아이가 에릭이었고, 자신이 죽으려고 갔는데 남이 죽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아이가 딜런이었는데, 대체 왜 자살과 학살 직전 SAT 시험을 치르고, 몇몇 대학교에서 합격 통보를 받아 아버지와 함께 기술사를 보러 가고, 프롬에 참석하였던 걸까?



 

 거꾸로 짚어 보자. 딜런은 에릭이 종종 만나자고 하면 엄마에게 모종의 신호를 보냈다. 그럼 수 클리볼드는 딜런, 너 오늘 방 청소해야 해! 라는 등의 말을 꺼냈고, 딜런은 '엄마가 잔소리해서 못 가' 같은 핑계를 댈 수 있었다. 또한, 시합에서 졌을 때 에릭이 너무나도 분통을 터뜨리며 딜런을 모멸스럽게 대할 때에도 딜런은 '괜찮아요. 늘 저래요.'라고 말하며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에릭은 딜런 말고도 다른 몇몇을 물망에 올린 적이 있으나 콜럼바인 학살에 참여한 것은 에릭과 딜런, 두 사람이었다. 둘의 관계의 어떠한 교집합이 맞아떨어진 것일까? 엄마가 여겼던 아들과의 친밀한 감정 공유는 아이가 다른 특정 친구에게만큼은 제대로 된 거절을 할 수 없었다는 뜻이다. 속이 깊고 의연하게 대처한다고 생각했던 순간이 되짚어 보니 자기 주도권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하고 스스로 그르다고 생각한 일도 참게 되는 일이 된다. 한마디로 수 클리볼드가 되짚는 모든 일은, 당시에는 잘 안다고 생각했으나 겪어보니 몰랐던 일들이었다. 제대로 된 질문을 해야 제대로 된 답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은 만고 불면의 진리이건만, 이 복잡한 마음과 관계의 양상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까?



 한 편지는 검은 마커로 쓴 굵은 글씨로 이렇게 외쳤다. "어떻게 모를 수 있어요??"



 스스로도 밤낮으로 던지는 질문. 심지어는 장애 학생들을 돌보는 일을 했고, 나름대로 과보호라 생각할 정도로 딜런의 교우관계, 가족 내에서의 위치에 신경을 썼던 수 클리볼드로서도 답할 길이 없는 질문. 그는 자신을 위로하고 비슷한 처지에 놓인 사람, 혹은 이웃과 친구들의 이해에 감사한다. 그러나 그를 이해하지 못하고 비난하는 사람의 목소리도 받아들인다. 잘못된 점을 군소리 없이 사과하고 되짚어나가려고 한다. "좋은 부모라면 아이들이 어떤 상황인지 알죠."라는 컴퓨터 교사의 말이 그의 마음을 아프게 찔렀던 이유는 '그 말이 사실이 아니어서가 아니라, 나 역시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이다.'라고 판단할 줄을 안다. 자기가 기울인 수많은 노력이 더 실패했음을 깨달았을 때 필사적으로 의미를 찾으려는 노력이 다른 방향을 찾게 되는 지점은, 마침내 보안관 사무실에서 증거 영상을 보는 시점이다.


한 가지 사실이 의문의 여지없이 뚜렷하게 떠올랐다. 딜런이 그 일을 했다는 것.


 의미와 무의미, 헛됨과 전혀 의도치 않았던 사건의 결실 앞에서 이 사건이 뜻하는 바는 자명하다. 이미 벌어진 일이 있고, 일어난 일을 돌이킬 수는 없는 것. 

'엄마가 아이의 마음을 어떻게 모를 수 있을까?'라고 아무리 생각해도 어떤 아이는 감추지 못하고 어떤 아이는 감춘다는 것. 

수없이 많은 '만약에'는 다른 경우를 대비하여 할 수 있는 질문이다. 자신이 안다고 생각했던 모든 일을 몰랐다고 인정하고, 제대로 된 질문을 해보는 것. 




 일어나지 않았을 때에만 대비할 수 있는 어떤 일에 앞서 수 클리볼드가 이 책을 쓰고 생각을 정리하게 되는 이유는 간단하다. 자신이 한 모든 일에 대해, 아들이 한 모든 일에 대해 사과하고 참회하는 것. 그리고 다른 불행이 일어나는 것을 막기 위한 것. 악의 얼굴은 단순하지 않고 사랑의 얼굴 또한 맹목이 아님을, 어둠의 역설을 통해 써내려간 책. 생각의 맺음을 책표지 뒤의 서천석(소아청소년정신과 전문의)씨의 말로 대신한다.



이 책은 어둠이다. 저자가 위험에 뛰어든 것은 아니다. 어느 날 멀쩡한 바닥이 무너지며 갑자기 어둠 속으로 떨어졌다. 그럼에도 그는 어둠 속의 희미한 빛과 촉각에 기대어 그 어둠을 통과해나간다. 그 힘은 아이에 대한 사랑에서 나왔다. 나는 이 책에서 어떤 메시지를 읽고 싶지 않았다. 인생이란 많은 부분이 설명할 수 없기에 평소엔 살짝 가려져 있을 뿐 막막함은 본질이다. 그 막막함을 통과하는 한 인간의 모습을 보았다. 그것만으로도 대단한 책이다.-서천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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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단 위의 여자 시공사 베른하르트 슐링크 작품선
베른하르트 슐링크 지음, 배수아 옮김 / 시공사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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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도 언젠가 그 그림을 보게 될 것이다. 오랫동안 행방을 알 수 없다가 갑자기 불쑥 나타난 그림이니 미술관마다 서로 나서서 전시하려고 할 테니까. 카를 슈빈트는 지금 이 시대에 의심의 여지 없이 전 세계에서 최고로 유명하고 최고로 비싼 화가가 아닌가. 그의 일흔 살 생일날에는 무슨 신문을 펼쳐도, 텔레비전의 무슨 채널을돌려도 어김없이 그의 얼굴이 나타나곤 했다. 물론 나는 한참을 쳐다본 다음에야 그 노인이 내가 아는 젊은 얼굴과 동일인이라는 것을 알아차렸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 그림은 보자마자 즉시 알아차렸다.



 베른하르트 슐링크, 넬레 노이에하우스, E.T.A. 호프만, 프리드리히 실러, 괴테. 이들의 공통점은 바로 법학 전공 내지는 법조계 종사자. 어쩌면 이 나라 국민들은 법학과 문학을 그것도 이렇게 훌륭하게 다룬단 말인가. 어쩌면 '작은 이야기'인 소설의 무용함이 사실과 진실의 충돌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더 리더'(책읽어주는 남자)의 저자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계단 위의 여자'를 주문하고, 기다리면서 내가 기대했던 것은 전작에서 그가 팽팽하게 다루었던 인간 개인의 의사, 그들이 행하는 행위, 작용과 반작용, 이런 것이었다. 아무렴, 문제 해결의 최적임자는 문제 당사자라는 말이 무색하도록 슐링크가 쌓아올린 탑은 번역자 배수아의 말을 빌리자면 건조하고 담담한 톤으로, 허식이나 과장, 과도한 감상은 찾아볼 수 없다'. 해야 할 일을 하는 법관처럼 슐링크의 낱말은 단정하고 소설의 구조는 간단하다. 소설의 화자의 삶이 그러하듯 최소한도로 바라고, 최소한도로 행동한다. 대중을 대상으로 하되 감상적이지 않고 추리를 해나가되 장르 문법에서도 비켜나가있다. 그러니 차분하게 조용히 이야기 속에 스며, 그의 이야기 문법을 즐기기에 독자로서는 전혀 어려움이 없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계단을 내려오는 여자의 전신을 그린 그림에서 시작한다. 두 명의 남자가 그림 하나를 두고 싸운다. 그 사건을 중재하는 것은 주인공인 '나'. 그러나 그림의 주인공 이레네를 보는 순간 사랑에 빠진 그는 이레네가 두 남자, 남편과 화가(슈빈트) 모두를 그림과 함께 떠날 수 있게 도와준다. 


 "쉿." 그녀는 손을 내 입술에 갖다 댔다. "내가 알아서 다 할게. 그의 집에 있는 내 짐들은 별로 중요한 것도 아니니 신경 쓸 필요 없어."

"그런 넌 언제 올 건데?"

"나중에. 일이 끝나는 대로."

...그렇지만 두 시간이 채 지나기도 전에 나는 불안으로 가슴이 터질 듯했다. 집 안을 정신없이 왔다 갔다 했으며 한순간도 쉬지 않고 연신 창밖을 내다보았고, 차를 끓였고, 찻잎을 주전자에서 빼는 것을 잊었고, 그래서 다시 차를 끓이고, 다시 마찬가지로 찻잎을 잊어버렸다. 그녀는 혼자서 그림을 어떻게 처리하려는 것일까? 그녀에게 너무 무겁진 않을까? 도와줄 사람은 있을까? 누구일까? 아니면 진짜 혼자서 들 수 있단 말인가? 왜 나를 믿고 맡기지 않는 걸까? 



 그러나 기다리는 이 남자의 마음 속에서, 제대로 된 답이 떠오르지 않는것은 제대로 된 질문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쉴새없이 이유를 생각해내는 인간의 어쩔 수 없음, 그럼에도 자기 본위로 생각하는 이 교만함. 40년이 흐른 뒤 갤러리에서 과거의 그 그림을 본 그는 다시 이레네를 찾아낸다. 늙고 주름지고 쇠약하고 아픈 그녀를. 또한 그녀의 남편과 화가 슈빈트도 그녀를 찾지만 독자의 눈에 보이는 것은 늙은 남자들의 니코틴에 절은 손가락 같은 것. 그림의 소유권이 무슨 중요한 일이란 말인가? 자기 자식들의 영락을 자랑하고, 자신의 직업적 성공을 뽐내고, 그런 것이 죽어가는 자 앞에서 무엇 하나 가치를 지니는 것일까?  '나'는 그 모든 것이 자신과 상관없는 문제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림, 이레네, 군트라흐, 슈빈트. 이 모든 것에서 자신은 조력자이자 구경꾼일 뿐. 그 자각과 각성의 시기에 맞물리는 서늘한 죄책감. '위협이 없어도 느껴지는 공포와도 같은,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밀려오는 슬픔과 같은 느낌.'이락 화자는 말한다. 조용하고 어두운 집안. 죽어가는 이레네, 그리고 모두가 돌아가자 두 사람은 둘만의 과거를 미래의 시간으로 겪는다. 그러는 와중 맞딱드리는 시간의 옹이, 이상한 후회와 지금에서야 찾아오는 자각. 이른 봄, 풀밭에 누워 잠시 잠이 들었다가 나뭇잎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처럼 차갑고 서늘한 회한.



 "넌 어디서 누벨바그 클리셰를 읽은 모양이로구나? 60년대 후반에는 아무도 검게 차려입지 않았어. 여학생들은 소녀 시절을 보낸 지방 여학교에서 못해본 일을 만회하려고 안달했고, 남학생들은 비판 이론이나 혁명적 프락시스 등을 커다란 소리로 떠들면서 우리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려고 애를 썼지. 이런 걸 정말로 전혀 모른단 말이야?"

"말했잖아. 난 공부 말고는 아무것도 해보지 못했다고." 

"그럼 대학을 졸업하고 바로 일을 시작했고, 그게 전부야? 법률회사에 입사해서 회사를 인수하여 크게 더 크게 키운 것 말고는 없어?"

"네가 뭘 원하는지 모르겠어." 

"너에게서 아무것도 원하는 건 없어." 그녀는 내 팔을 잡았다. "네 삶을 상상해보는 것뿐이야. 케이스 속에 들어 있는 삶을. 그럼 케이스 속에서 일생을 산다면 바깥세상은 정말로 클리셰가 되어버릴지도 몰라." 

 나는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랐다. 직업상 많은 해외여행을 했고 항상 열린 마음과 눈을 유지했다. 집에서는 두 종류의 신문을 구독하면서 경제와 금융 면을 주로 읽었지만 정치와 문화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나는 이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을 누구보다 더 많이 알고 있는 편이다. 그런데 단지 60년대 후반 대학생 패션 유행을 잘 모른다고 해서 일평생 케이스 속에서 산 셈이 되어버린단 말인가?그녀의 팔에 벗어나려는 내 몸짓을 느낀 그녀는 나를 더욱 가까이 끌어안았다. 

"넌 네 아이들이 대학 생활을 어떻게 하는지 한 번도 보러 가지 않았구나? 아이들과 함께 학생 주점에 가거나 대학 축제를 구경한 적도 없지?"

"내 아이들은 열네 살 때 영국의 기숙학교로 갔고 대학도 거기서 다녔어. 케임브리지 졸업식에는 나도 참석했지. 화려하고 위엄있는 대단한 행사였어. 막내아들이 옥스퍼드 대항 보트 레이스에 출전해서 우승한 날도 거기 있었고."

"아이들과 자주 만나?" 

"아이들은 영국에서 계속 살아. 큰딸과 큰아들은 변호사고 막내아들은 소프트웨어 회사를 갖고 있지. 손자나 손녀가 태어나거나 뭔가 함께 축하할 일이 있으면 나도 영국으로 건너가. 그 이상은 아이들에게 부담 주는 걸 원치 않고." 

이레네는 조심스럽게, 천천히 내 등을 쓰다듬었다.

 "순진한 바보 같으니. 넌 만사를 훌륭하게 하려고만 하는구나." 그녀는 상냥하면서도 슬프게, 다시 한 번 더 반복했다. "순진한 바보같으니."



 꼬마야, 내 꼬마야. '책읽어주는 남자'의 여자가 그랬듯 계단 위의 여자, 이레네는 그의 삶을 한 번에 통찰하고 관망한다. 이레네의 질문, 정말 생활 속에서 공기를 함께 나눈 적이 있는지에 대한 남자의 모든 답은, 아무리 애를 써도 출구를 찾지 못한채 유리창에 머리를 박는 새 한마리와 다르지 않다. 흘려보낼 수 없는 감정, 다른 사람과 '나' 사이 가로막힌 유리벽, 마침내 그것을 보여줌으로 화자에게 자각시키는 이레네의 서늘한 목소리를 듣노라면, 지나간 시간이 이제는 어제와 오늘, 일주일 안 정도로 나뉠 수 없는 독자의 귓가가 아득하게 울리는 듯하다.



 "순진한 바보 같으니." 그녀가 말했다. "너는 살아오는 내내 너의 투쟁을 치렀어. 마치 기사들이 자기 시대의 종말을 알지 못했듯 너 또한 그 투쟁이 어느새 허상의 투쟁이 되어버렸고, 진즉에 전부 종말에 이르렀음을 알지 못한 거야. 그토록 열심히 계약과 계약을 성사시키며 다니고, 합병과 인수 건을 매번 충실하게 해치우고, 그것이 이 세상을 위해서 참으로 중요한 사안이라고, 그렇게 진심으로 믿고 있는 네가 나는 정말 좋아. 그런 태도는 나를 감동시키지. 그리고 동시에 슬프게 만들어."

 나는 항의하려고 했다. 내가 하는 일에 대해서 해명하려고 했다. 합병과 인수가 왜 중요한지, 이유를 설명하려고 했다. 내가 싸웠던 투쟁들이 허상이 아니라고,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다고. 모든 거이 계속해서, 계속해서 앞으로 전진해나갔다고 말하고 싶었다. 

"심각하게 생각하지 마. 사람들이 세상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내용은, 대개 그들 자신에 관한 내용이니까. 아마도 내가 지금 유일하게 견딜 수 없는 건, 세상은 계속해서 굴러가는데 나 홀로 종말을 맞는다는 그 사실 때문일지도 몰라. 그러니까 진정해!"





 아, 우리는 이렇게 생긴 거울을 얼마나 많이 구경했던가. 그 거울은 지나가는 버스 정류장에도, 책을 읽으려 들어간 카페 옆 테이블에도, 생각지도 못했던 기이한 뉴스가 실리는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도, 그리고 매일 들여다보는 거울  그 자체로 있지 않은가. 


 마침내 질문과 대답, 대화와 함께 나누는 공기가 다 떨이진 다음, 화자는 마침내 생각한다. 용서를 빌어야 할 사람에게 용서를 빌고, 헤어져야 할 존재에게는 작별 인사를 하고, 멀리 있는 소중한 존재에게 전화를 하기로. 우아한 자각의 퇴장은, 이렇게 커튼을 내린다.



 회사에는 내일에나 가볼 예정이다. 오늘은 묘지로 가서 아내와 이야기를 나눌 거이다. 나는 용서를 빌고 싶었다. 그리고 작별의 인사를 하고, 내가 왜 더이상 우리들의 집에서, 우리들의 물건과 함께 살 수 업는지, 그 이유를 설명할 것이다. 아내에게 이레네 이야기를 할 것이다. 아이들에게 전화할 것이다. 카르힝어와 다른 파트너들에게 할 이야기를 준비할 것이다. 그들이 퍼붓는 수많은 질문에 나는 대답할 말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뭐가 중요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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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사는 고양이 기분을 몰라 - 어느 심리학자의 물렁한 삶에 찾아온 작고 따스하고 산뜻한 골칫거리
닐스 우덴베리 지음, 신견식 옮김 / 샘터사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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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고양이는 이튿날부터 꾸준히 나타났는데 가만 보니 우리 정원 창고에 자리를 잡은 듯싶었다. 




 어쩌다 키우게 된 고양이 이야기. 큰 목소리도 짙은 그림자도 없는 조용조용 나직나직한 목소리. 



 반려동물 이야기를 하는 많은 사람의 목소리는 종종 같은 톤의 음색을 띤다. 그것은 종종 사랑이 지나쳐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쓸 겨를이 없을 때도 있고, 익숙해진 생활을 이야기하느라 듣는 귀를 피곤하게 할 때도 있다. 어쩔 수 없는 일 일지도 모른다. 모든 반려동물에 관한 이야기는 하나의 사랑 이야기니까. 




 그것은 자신과 감정을 공유하는 대상을 향한 연서, 혹은 하나의 인격체를 그리워하는 편지. 

 '박사는 고양이 기분을 몰라'에는 감정이 극에 달하는 끓는점이 높다. 액체가 기화되기 시작하는 지점, 그 비등점이 높다는 것은, 어쩌다 키우기 시작한 '나비'라는 고양이를 세상 유일한 것으로 두되 자신의 위치를 동등한 집사의 자리에 놓음에서 비롯된다.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나비의 어떤 특성, 나비가 글쓴이에게 오게 된 계기, 나비를 떠나보내게 될 때를 생각하는 집사로서의 박사의 모습을 살폈지만, 그 어디에서도 감정의 과잉과 고양이에 대한 신격화는 찾아볼 수 없었다. 대신 멀리서 조금씩 가까이, 천천히 거리를 두며 고양이 나비와 저자가 나누는 이야기에 관한 책.





 어느 날 작은 고양이가 저자 닐스 우덴베리의 집에 나타난다. 처음부터 키울 생각은 없었기에 늘   두고 보던 그 모습이 눈에 밟히기 시작한다. 고양이는 고양이대로 저자의 집 헛간을 자기 집으로 삼았고 저자는 저자대로 고양이를 그대로 둔다. 눈에 익숙한 고양이가 며칠 안 보일 때도 있고 저자가 집을 비울 때도 있다. 고양이는 선택하고, 글쓴이는 받아들인다. 받아들여진 후의 고양이는 천천히 집 안으로 들어와 자리를 잡고, 그런 고양이를 가족들이 함께 돌보기로 한 다음에야 고양이와의 함께 살기가 시작된다.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곁을 서로 내어주기. 밥을 같이 먹기. 이야기와 체온을 나누기.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지 하나씩 조금씩 주고 반응을 살피는 것. 어느 날에는 햇볕을 쬐는 고양이를, 또 어느 날에는 무언가에 집중해서 응시하는 고양이를 바라보는 것. 사람이 고양이를 보는 것일까, 고양이가 사람을 보는 것일까? 확실한 것은 반려동물과 인간과의 관계는, 세상에서 가장 바람직한 관계의 한가지 양상을 띤다. 공감하되 간섭하지 않는 것. 필요충분조건의 모든 조건을 갖추지는 않지만 어떤 몇 가지를 갖춘 관계. 이런 관계를 갖는다는 것, 어떤 기분일까?





아침에 우리는 창문을 연다. 나비는 한동안 밖에 나가 있었지만 곧 돌아온다. 차가운 편북풍이 불어서 일주일 만에 처음으로 아침 식사를 집 안에서 한다. 나비는 창문을 들락거린다. 여기저기 검사하며 돌아다닌다. 개들이 사라졌다는 걸 직접 확인하고 싶은 걸까? 내가 뭘 알겠는가.




 섣불리 다가서지 않고 쉽사리 참견하지 않는다. 언젠가 한 번씩 있었을 수도 있는 사람과 동물의 감정 공유는 '섣불리 다가서지 않기'에서 시작한다는 생각이 든다. 언어처럼 간접적인 것이 있을까? 소리처럼 직접적인 것이 있을까? '초록색'이라고 말하는 순간 우리는 우리의 세계를 한정한다. 나머지의 모든 아흔아홉 개의 색은 사라진다. 사람이 느껴 표현하는 감정을 언어가 다른 동물이 더 잘 느낀다는 것이 나는 늘 신기했으나, 이제는 그 생각의 기본 바탕이 바뀌는 경험을 이 책을 통해 알게 된다. 모든 사랑하는 대상이 꼭 그렇게 숨 막히는 관계는 아니라는 것. 이렇게 담담하고 별것 아닌 이야기도 있을 수 있다는 것. 그 애정의 비등점이 낮은가 싶어 천천히 글쓴이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조용히 햇볕을 쬐는 고양이 나비가 보인다. 





 3 킬로도 안 나가는 이렇게 작은 생명이 어떻게 내게 이런 안정감을 불어넣는 걸까? 나는 나비보다 훨신 더 힘이 세고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손쉽게 이 녀석을 망가뜨릴 수 있다. 나비는 나를 능가할 그런 힘이 없다. 나비가 내게 보이는 신뢰가 그렇게 중요한 걸까? 내가 보여준 자비심과 호감을 나비는 고맙게 받아들인다.



 인간의 언어로 말하지 않지만, 고양이의 입장에서는 인간 역시 고양이의 언어로 말하지 않는다. 대신 서로가 서로를 선택한다. 혹은 받아들인다. 즉, 인정한다. 저자는 나비가 자신을 찾아와 자신의 고양이가 되었다고 확신한다. 그러나 나비의 몸뚱이에 곧바로 다가서면 물러서며 나비는 불안해하고, 저자는 이것이 '위에서 오는 공격에 대한 공포는 굶주린 독수리가 많은 아프리카 평원에서 진화한 모든 작은 동물의 뇌 속에 깊이 각인되어 있다'고 하며 고양이의 움츠러듦을 이해한다. 뾰족한 귀, 동그란 눈, 돋아난 수염, 복슬복슬한 털. 조용한 걸음걸이와 종종 내는 그르렁거리는 소리. 




 세모꼴 두 귀는 여러 방향으로 향할 수 있고 예리한 두 눈은 칠흑같이 어두운 열대의 밤에도 먹잇감을 찾을 수 있으며 코는 개만큼 예민하지는 못하더라도 상당히 무딘 후각을 지닌 인간보다 상대적으로 더 발달했다. ... 나는 고양이의 안정적인 성격 형성도 역시 인간처럼 초기 경험과 관련이 있을 거라고 믿는다. 때로 우리 고양이가 인간과의 관게에서 자신의 위치를 확신하지 못하는 걸 보곤 하는데 그럴 때면 나비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알고 싶어진다. 하지만 나는 당연히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



 추측하되 확신하지 않고 확신하지 않되 무시하지 않는다. 조심스러운 관찰과 서로가 공유하는 집안의 공기. 이 책의 어조가 내도록 무심하고 차가워 보인다면 그것은 이 조심스런 관찰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 누군가를 애정을 가지고 지켜보는 마음을 이야기하는 목소리. 동시에 서로는 다른 존재이며, 다를 수밖에 없음을 명확하게 선을 긋는 저자를 보노라면, 이 책은 아주 담담하고 조용한 러브레터라는 생각이 든다. 고양이 한 마리가 온 도시 사람들의 마음을 바꾸는 기적은 없지만, 대신 함께 살아가는 조용한 이야기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책.




나비도 우리와 지낸 뒤로 달라졌다. 몸과 마음이 다 무르익은 듯하다. 장난기를 ㅇ맇었다기보다는 잘 자라서 제 처지를 더 제대로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추위와 배고픔에 떨며 내 정원 바구니를 안식처로 삼던 덜 자란 고양이가 이제 자신만만한 집고양이로 발전해 숙녀의 풍모와 나름의 버릇도 갖추었다. 어느 때는 주인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똑바로 훈련받아 까다로운 고양이를 어떻게 대할지 안다는 것을 각인하고 만족하는 듯싶기도 하다. 물론 녀석이 옳다. 우리가 고양이를 잡았을 뿐만 아니라 고양이도 우리를 길들여진 집사로 만들었다. 우리는 쌍방이 기쁘도록 서로 길들였다. 

 나로서는 고양이 세계를 조금이라도 파악하려는 것이 철학적 과제가 되었다. 나비는 어쨌든 내 일상적 사교 활동의 일부고, 가장 가까운 이를 이해하려는 것은 인지상정 아니겠는가. 그것이 설령 고양이라 할지라도. 



 그래서 고양이, 아내, 나는 쭉 함께 살기를 기대한다. 고양이는 15년 넘게 살 수 있으니 오래 책임져야 한다. 내가 그때까지 살아 있다면 아흔 살이 된다. 아마 그 나이까지 못 갈지도 모른다. 나비가 나와 아내보다 오래 살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다. 그것도 뭔가 마음에 든다. 가까이에 나비를 두고 내 침대에서 죽는다는 생각을 해볼 수도 있겠다. 그만큼 우리는 좋은 동무가 되었다.


 


 *따옴표 안의 인용은 모두 이 책에서.

 *원래 제목은 'old man and c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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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북쪽
마르셀 서루 지음, 조영학 옮김, 무라카미 하루키 후기 / 사월의책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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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앗은 나름대로의 힘이 있다. 서쪽 사막에서는 씨앗 상태로 100년 동안 비가 오기를 기다리는 식물들도 많다. 그저 다시 꽃피울 날만 기다리는 것이다. 직접 본 적은 없지만 비가 100년만에 내렸는데도 바위와 모래가 온통 꽃과 식물로 뒤덮였다는 이야기를 여러 번 들었다. 

-책속에서

 



 작가의 목소리는 여러 갈래를 지녔다. 어떤 글씨는 아름답고 어떤 글씨는 섬세하다. 그런가 하면 마르셀 서루의 글씨는 묵직하다. 형용사와 부사를 뺀 진실, 현실과 맞닿아 있으면서도 벗어난 미래. 그 가까운 미래, 씨앗의 파종기한을 보며 종종 린넨을 세탁하는 에반젤린의 메이크피스를 보면 묵직한 거품 같은 안개를 보는 느낌. 거품은 가라앉고 안개는 걷히기 마련이지만 이 슬픈 sf가 꿈꾸는 것은 현재라는 점이 마음을 찌른다.





 sf가 꿈꾸는 것은 언제나 역설적으로 현재. 물론 이 작품이 전적으로 sf는 아니다. 아마도 작가가 특정 장르를 염두에 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최대한 장르로부터의 자유를 꿈꾸었다는 점이 오히려 이야기의 흐름을 돕는다. 







 이 책 속 메이크피스는 에반젤린의 유일한 시민이자 보안관이다. 작가는 체르노빌의 거주 금지 구역에 들어가 혼자 자급자족하는 여인을 취재한 다음 이 소설을 생각했다는데, 체르노빌 금지 구역의 유일한 주민과 메이크피스가 다른 점이라면 고요함의 정도일 것이다. 혼자서 모든 것을 해결한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메이크피스의 마음이 여행을 함에 따라, 그리고 사람들을 만나면서 한 번씩 요동치는 것을 보면 생각하게 된다. 사람의 마음이 씨앗과 다를 바가 무엇일까.





 시베리아 툰드라 지역, 황량하고 먼지와 적막함이 감돈다. 책장을 넘기고 얼마 안 되어 메이크피스가 만나는 사람이 임신 상태의 핑이라는 것, 그리고 책장을 덮으면서 메이크피스의 이 기록이 '혹시나'라는 기대를 품었다는 것은 인류가 꿈꾸는 세계와 닿았다. 

 세월이 잘 맞물리는 시계처럼 돌아가고 봄이면 작물을 심던 시절. 언제나 옛날은 '좋았던 옛 시절'로 기억되고 윤색되기 쉽다지만, 마르셀 서루의 '현재'는 엄정한 현실을 담았다. 모든 것이 사라진 다음의 사람은 어떻게 될지 품었던 의문. '더 로드'에서 무겁게 그렸으니 '먼 북쪽'이 굳이 필요할까 싶었으나 sf가 꿈꾸는 것은 이제 종말 후의 삶이라는 생각에 다시금 생각의 솜털이 곤두선다. 





 아주 오랜 옛날 해저 이만리와 달세계 여행을 꿈꾸던 인류가 이제 와서 그리는 미래가 아무것도 없는 세상이라니. 

 이 저릿한 슬픔 이후, '이 없음'에 던져진 것이 여자 두 명과 태아 하나라는 설정은 이상하게도 당연하게 느껴진다. '어쩌면'하고 생각해 본다. 남자는 유전자 전달 이후에도 너무 오래 살아남아 문제이고 여자는 생명 잉태 이후에도 또한 너무 오래 살아남아 문제라면, 인간의 이기적인 속성은 어떻게 살아남아야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일까. 30년을 살 수 있는 생명체가 2년 후 도살되고 30년이 전부인 생명체가 100년을 산다면 이것은 생명의 이상한 진행이다. 이 나선세계의 행진이 도착하는 곳이 설사 오염된 세계, 아무것도 가리키지 않는 쓸모없는 플라스틱 조각이라 해도 기이할 것이 없다.





그러나 이 플라스틱 조각에라도 희망을 품게 되는 때가 있다. '드디어'와 '혹시나' 사이를 가파르게 오가는 사람의 마음. 메이크피스라는 화자가 일인칭으로 모든 것을 서술하는 이 모든 사건에 독자는 필연적으로 그의 일을 자기 일처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작가가 택한 방법은 지극히 단순하다. 일인칭 화자를 내세우고 시제는 현재로 제한할 것. 그러나 이 모든 상황에도 불구하고 '남자는 다 죽고 여자만 살아남아야 한다'라든지 '남자는 다 불안한 존재다', 혹은 '여자만 완전하다'라는 느낌은 없다. 메이크피스가 살아남은 것은 여자가 남자보다 강한 생명력을 지녔기 때문이다. 작품 속 여성성과 남성성은 극도로 제한된다. 메이크피스가 여자라는 것을 알게 된 후에도 그가 가녀려 보이거나 행동이 독자에게 다르게 보이지는 않는다. 'like a girl'을 뒤집은 'like myself'의 느낌이 이야기를 장악한다. 



 


 끝이 없는 한계를 그리는 마르셀 서루의 스타일은 모호하지 않다. 오히려 그의 문체는 분명한 형식에 간단한 수단을 고의로 심어놓는 것인데, 이 자체가 아름다움을 일구어 낸다. 여성성도 남성성도 사라진 인간성을 그리기 위해 이보다도 더 명확한 입장이 있을까. 허구 없는 진실은 이런 것. 메이크피스가 마지막으로 접하는 것은 어느 소녀의 기록. 메이크피스 역시 '언젠가 내 글을 볼 사람들을 위해 이 글을 남겨둔다'라는 대목을 접하노라면, 인간의 읽는 행위 자체의 숨은 뜻을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작가가 인터뷰에서 언급하는 '마음과 마음이 겹쳐지는 신비로운 행위'로서의 읽기.



 


아버지는 일이 작못되면 '서쪽으로 빠진다'라는 표현을 썼다. 하지만 서쪽은 나한테 항상 좋은 느낌이었다. 결국 서향은 태양의 길이 아닌다. 더욱이 내가 아는 어떤 역사에서도 사람들은 자유와 거처를 찾아 서쪽으로 이동했다. 반대로 우리 세상은 '북쪽으로 빠진' 셈이다 정말로 북쪽으로 빠졌다. 그것도 얼마나 먼 북쪽인지 나도 이제 막 배우려는 참이다. 

-책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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