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슐라르의 <로트레아몽>에 "전기의 문제"라는 장이 있다. 로트레아몽(이지도르 뒤카스)의 시를 이해하는 데 그의 전기가 줄 도움은 전혀 없다고 말하는 장. 내겐 이 책이 바슐라르의 문학 책들 중에서 읽지 않고 나중으로 미뤄둔 거의 유일한 책이라서, 이제 읽으려고 꺼냈을 때 감당하기 벅찬 도전을 앞에 둔 것 같았음. 다른 책들, 여러 번 읽고 읽을 때마다 감탄하고 감탄을 노트하고 그랬던 책들도, 그의 책이 지식의 책이 아니라 행동의 책이기 때문에 (은유/개념의 지성주의 vs. 이미지/상상의 행동주의. 이런 구분을 한다면 후자가 압도적이다. 가끔 다른 철학자들처럼 쓸 때도, 바슐라르의 문장들은 어김없이 어떤 '실행'을 요구하기도 하고), 다시 읽으려면 언제나 도전이긴 하다. 그러니 처음 읽는 거나 마찬가지인 책이면.... 


15페이지 정도 길지 않은 장임에도, 

그 문장들, 생각들의 강력함과 새로움 앞에서 이리 쓰러졌다 저리 날아갔다 하는 기분이었음. tour de force란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이어야지 않을까. 독자를 똑똑해지게 하는 힘을 1-10 척도로 평가한다면 300 정도. <계몽의 변증법>이 한 280이라면. 어쨌든 얼떨떨한 상태에서 인용해두고 싶은 문단 하나 옮겨 온다. 로트레아몽의 삶에서 그 무엇도 특이한(특기할) 바 없다는 얘길 하는 문단. 


충동을 언어 형식으로 유지하는 능력, 그리고 그의 삶에서 야성적인 활동은 전적으로 부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로트레아몽이 자신의 컴플렉스들의 주인이었음은 충분히 증명된다. 그의 삶에서 그 무엇도 "특이하지" 않다 (Nothing in his life is strange). 그는 몬테비데오 출신이다. 그는 프랑스 중학교로 공부하러 온다. 그는 수학을 공부하기 위해 파리로 간다. 그는 시를 쓴다. 시를 출판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출판업자들의 소심함을 더 신중하게 감안하는 다른 작품을 준비한다. 그는 죽는다. "특이한" 무엇이라도 보여주는 단 하나의 사건, 특히 단 하나의 행동도 없다 (There is not an incident and especially not a single action that reveals anything strange). 그러니 독자는 그의 작품으로 돌아가야 하고 그의 작품 안으로 온전히 진입해야 한다 -- 그 영감받은 광기 속으로. 그리고 그 때 독창성의 시험을 시작할 수 있다. 


이탤릭체로 쓴 strange가 있는 두 문장의 영어 역문 포함시킨 건, 

어쩌면 이런 사소한 지점에서도 완벽할까, 감탄했기 때문이다. (불어 원문에서는 어떤 단어가 쓰였을까 찾아봐야겠지만) strange라는 이 기초 단어는 여기서 어찌나 적절히 쓰이고 있으며, 그리고 이탤릭체는 어쩌면 꼭 맞는 양의 강조를 그 단어에 주고 있는지. Nothing in his life is, 까지 읽고 나서 잠시 멈추었다 천천히 strange를 발음해야 한다. 그러면 선명히 떠오르는, (작품의 기괴함과 전혀 무관한) 그의 삶의 정상성. 평범성. 사실 이탤릭체, 이것 잘 쓰기 쉽지 않다. 이탤릭체로 강조된 말이 있는 문장의 십중팔구, 저자의 강조가 독자에게 강요되는 편. 아무리 부드러운 강요라 해도 거추장스러울. 이 문단에서 바슐라르의 strange는 문장과 문단에서 꼭 필요한 역할을 아주, 아주 그냥, 아름답게 하고 있다. 


strange에 감탄하면서 두 번 더 읽긴 했지만 사실 이 문단은 힘의 면에선 평범한 편이고, 

진정 막강한 문단들은 다른 곳에 (전체에). 문단들이 다 서로 연결되어 있어서, 도려내면 효과가 떨어지기도 하고, 

아무튼 이게 바로 그 tour de force의 예라며 하나나 둘 옮겨 오긴 어려운 일. 


예전에 대강, 조금 읽을 때 이 장의 마지막 문단, 마지막 문장 "천재의 작품은 삶의 안티테제다 A work of genius is the antithesis of life" 여기 밑줄을 그었다. 작가의 전기와 작가의 작품이 무관하다는 건 때로 진실이겠지. 때로 진실인 그걸 말하는 걸론 심한 과장이 아닌가? : 이런 생각을 했던 것 같음. 지금 전체를 읽고 나서, 이거 진짜 심오하다며... (말을 잇지 못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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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대사 출전은 Six Feet Under, 아마 2시즌 첫 에피. 

처음부터, 보자마자, 중독되고 볼때마다 해방의 체험이었던 식스핏언더. 

브렌다. 미드에서도 사실 초유의 인물이겠지만 한국 영화, 한국 드라마에서는 본 적 없는 유형의 인물. 

"한국의 -- (외국 사람 이름)" 식의 명명이 왜 존재하겠니. 문화가 다른데 똑같은 유형 인물을 왜 기대해. : 이렇게 누가 반문한다면, "한국의 브렌다"를 보지 못한 건 한국에 브렌다가 없어서가 아니라, 한국이 브렌다를 결코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답해 보겠다. ;;; ㅋㅋㅋㅋ ;;; (아 진짜 이런 거 쓰고 있는 이것도 참 한가하고 잉여력, 잉여력의 낭비...)


식스핏언더에, 브렌다라는 인물 하나에만도 재미있고 탐구해볼 지점들이 참 많지만, 

밤이 영원한 게 아니니 이 포스트에선 f-word만 생각해 본다면, 이 말 쓰이는 사례들을 한국어로 전환할 때 거의 100% 일대일 대응이 되는 경우들도 많지만 ("*되다" 혹은 "*같다"의 여러 활용들), 아닌 경우도 많아서 이 말도 <번역불가인 말들의 사전>을 쓴다면 표제어 후보가 되어야할 것이라는 점. 


번역불가인 사례의 좋은 예가 위의 브렌다 대사. 

이 경우 이게 욕이라서만이 아니라 (욕을 욕처럼 쓰지 않는 것이기도 하고), 

자기 삶에서 어쩔 수 없었던 것들을 향한 항의이고 고발이면서 그 안에 날카로운 비명을 감추고 있는, 

그런 강력한 지향점 가질 수 있는 말이 여기서 브렌다의 f-word. 그런데 그와 비슷하게 쓰일 수 있는 한국어를 찾기가 참 어렵다. (나는 찾지 못했다). 한국의 브렌다라면, 한국어로 뭐라 할까. "나 원래 그런 사람이야. 당신이 고칠 수는 없어"? 







올해 구입한 비싼 책 top 5. 

연말에 선정한다면 반드시 들어갈 것같은 이 책. 

한국어로 번역불가인 외국어 말들, 외국어로 번역불가인 한국어 말들. 둘로 나누어, 

한국에서도 같은 책이 나왔으면 좋겠다 바라게 되는 책. 제대로 만든다면, 진짜 재밌을텐데. 


*f-word가 번역되지 않는 정황들이 보여주는 건, 

경험의 부정. 인생의 부정. 여기선 삶이 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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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가 진정 생산적일 때, 사고가 창조할 때, 그것은 언제나 반응이기도 하다. 능동적 계기의 핵심에 수동성이 있으며, 에고는 비-에고를 모델로 자신을 빚는다. 철학적 사고의 경험적 형식은 여전히 이와 비슷한 무엇과 닿아 있다. 생산적이려면, 사고는 언제나 사고의 대상(주제)로부터 결정되어야 한다. 이것이 사고의 수동성이다. 이같은 수동성의 능력이 없다면, 사고의 노력은 일어날 수 없다."


이건 아도르노의 "철학적 사고에 대한 노트 Notes on Philosophical Thinking"에서. 

사실 think (thinking, thought), 이 기본 중 기본 단어도 한국어 번역에선 의미가 미흡하거나 오도적이 되는 수많은 경우들이 있다는 생각을 한다. 생각, 사고, 사유. 이 세 단어 중 하나를 쓰게 되는 경우가 거의 전부일텐데, 위와 같은 대목에서 세 단어 전부 영어 번역에서 thinking, 과는 조금 다른 의미라고 생각하게 됨. 나만 그런 걸지도. ㅋㅋㅋ;;가 아니라 ㅜㅜ. 그런데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 걸 피할 수 없다. "생각"의 경우엔 대상 조작, 혹은 대상 지배가 암시되는 일이 많지 않은지? 오늘 종일 널 생각했어. : 이런 문장에서 생각은 무슨 의미인가. 여하튼, 아도르노가 강조하는 "수동성을 핵심에 두는 능동성" 혹은 적극적 "반응" 이것이 "생각" 이 말에 담기는 일은 드문 것 같다. 이상하지만 (주체 이전인 이 곳에서), 주체의 과잉. "사고"는 ("사고력"으로 흔히 쓰이는 데서) 생각하는 능력의 수단화가 암시되는 일이 많지 않나? "사유"라면, 사고 on steroid? 뭔가 유장하고 방대해지는 사고? 진정, 각잡는? 















바슐라르의 문학 책들이 다 그렇지만 특히 <로트레아몽>, 

오늘 보면서 (하아 한숨) 진짜 이젠 이게 내 인생의 괴작이 되겠다.. 내 인생을 통틀어 가장 좋아한 괴작이란 뜻에서가 아니라 내가 살면서 본 가장 괴성 높은 괴작. 같은 의미로. 그런데 아도르노가 위의 글에서 탐구하는 바의 철학적 사유, 다른 곳들에서 탐구하는 "철학적(정신적, 지적) 경험" 이 주제들에 대하여, 이보다 더 좋은 실례가 될 텍스트 찾기 어려울 것같기도 하다. 이보다 더 적극적인, 더 대담한 수동성. 드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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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aston Bachelard, Revised and Updated: Philosopher of Science and Imagination (Hardcover)
Roch Charles Smith / State University of New York Press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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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나 해서 검색해 보니, 

82년 Twayne Publishers라는 데서 Twayne's World Authors Series로 나왔던 이 책이 뉴욕주립대 출판부에서 올해 7월 개정판으로 재간 예정. riss.kr에서 검색해보면 82년판은 국내 도서관 중 전북대, 전남대 도서관만 소장하고 있다. 


얇지만 (뜻밖에) 강한 책이다. 지금 갖고 있긴 한데 사실 그렇게 애타게 구했던 책은 아니었다.  

큰 기대가 없었던 건 이 책이 인용되는 사례를 본 적이 없었던 데다, 저 "트웨인 세계 저자 시리즈"로 나왔던 (대학원 시절 대출에서 본) 어떤 책들이 별 깊은 인상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책 뒤의 주석, 서지를 제외하면 150페이지 정도 분량에서, 

바슐라르의 삶과 사상을 정리하는 책. 그의 과학철학도 두 챕터(2장 초기 인식론, 3장 새로운 과학 정신)에서 다루고 있고, 여기서 논의가 전혀 허술하지가 않다.  (*바슐라르 과학철학의 논의 수준을 내가 판단할 입장은 아니지만, 내용이 아니라 형식만 보아도 알 수 있는 것들이 있다고.. 말해 보겠다. 문장이, 여일하게 허술하지 않다면, 탁월하다면, 그게 그 자체로 말해주는 바 있을 거라서. 그리고 나도 조금씩이지만 과학철학도 읽고 있는 중이기도 해서.) 


바슐라르 시학, 상상력의 현상학에 관한 논의들도 (여기엔 3장이 주어짐) 좋다. 기대가 크지 않았기 때문에 놀라며 만족한 면도 있겠지. 무능하고 무성의한 책을 예상했다가, 도대체 어떻게 이런 책이 아무 반향없이 잊혀졌을까? 80년대의 (연구서 계에서) 저주받은 걸작! 뭐 이럴 정돈 아니더라도, 자기 주제에 정통하고 그것을 좋아했으며 그것에 대해 성실하고 좋은 글을 쓰면서 저자 자신 느낀 기쁨이 전해지는... 이런 책을 받아본 것임. 


저자인 로쉬 스미스는 41년생. 노스캐롤라이나 대학 그린스보로에서 불문학 교수였다. 노스캐롤라이나 대학의 주캠퍼스는 채플힐. 그린스보로도 나쁜 학교는 아니겠지만 채플힐에 비하면. 아마 이게 만든 인상이기도 할 텐데 (그는, 정신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은 사실 없다고 봐도 될 어느 시골 대학에서 늙어가던 무명의 대학교수.... 같은), 울프가 칭송했던 "무명의 삶"을 산 소박한 학자 쯤으로 그를 상상하면서, 괜찮아요 당신이 좋은 일을 했고 좋은 삶을 살았다는 걸 아는 독자가 여기 있어요. 당신의 나라에서 머나먼 저 곳에서. 같은 심정이 되기도 했다. ㅋㅋㅋㅋ;; 저자를 향해 그렇게 느꼈던 (아직까진) 유일한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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캔사스 대학 스페인어문학과 교수 조나단 메이휴가 운영하는 

Stupid Motivational Tricks란 블로그가 있다. 논문 쓰기와 관련해서 여러 팁들을 주는 블로그. 꽤 도움되는 얘기들 볼 수 있다. 조금이라도 (계획엔 못 미칠지라도) 글을 쓴 날은 달력에 표시하기, 공백인 날 없이 얼마나 많은 날들 연속으로 쓰나 보기 (*음 이보단 더 복잡 정교한 방법이었는데, 내가 그대로 한 바 없으니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고보니 그의 조언이, 그대로 해봐서 도움되었다는 게 아니라, 도움될 걸로 예상할 수 있었다인 것), 아침에 그 날의 쓰기를 끝내고 오후부터 밤까지는 다음 프로젝트를 위한 리서치하기. 이런 팁들. 지금은 거의 들르지 않지만 한땐 매일 갔었다. 리서치 & 라이팅, 이것에 대해 자주, 그리고 꽤 개인적이며 좋은 얘길 올리는 블로그는 흔하진 않을 거라서. 


매일의 쓰기 목표를 구체적으로 (오전 중 3시간이라거나, 1천 단어) 정하고, 

일단 그걸 끝낸 다음 연구를 해라. 이건 연구자가 아니라 작가들 중에서도 그 방식으로 썼거나, 아니면 같은 조언을 준 여러 사람들이 있을 거라서, 거의 보편적이게 들리는 얘기. 지금 바로 생각나는 건 토마스 만이다. 매일 오전 중 써야할 양을 쓴 다음 오후에 다른 일들을 했다는. 그에게 글쓰기는 거의 시민적 직업이었다는. 아마 무라카미(하루키)도? 


쓰기는 매일의 일과여야 한다. 여기에 보태어 메이휴가 강조했던 건, 

일단 쓰기 시작했으면 연구가 미흡하다는 이유로 (연구부터 하고 오겠다며) 중단해서는 안된다, 

연구가 끝난 다음 쓰겠다며 쓰기에 착수하기를 미뤄서도 안된다, 할 수 있는 한 빨리 일단 쓰기 시작하고 연구해라. 쓰면서 그에 필요한 연구를 하기도 하지만, 다음 프로젝트를 위한 연구를 해라. 


이것, 거의 보편적으로 타당하고 도움될 조언일 것임.  

그런가 하면, 루 살로메와 니체가 여름을 같이 보냈던 82년. 루 살로메가 그 여름을 회고하며 전하기로, 

당시 니체는 이후 10년 동안 글쓰기를 중단하고 대학으로 돌아가 자연과학을 공부하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자기 철학에 더 단단한 기반을 주기 위하여. 니체는, 그 누구도 아닌 니체가, "연구부터 하고 오겠다며" 쓰기를 10년이나 포기할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니체의 MO. 그게 보통 학자들의 것과 같겠냐.;; ㅋㅋㅋ;; 이기도 한데, 

바슐라르의 <로트레아몽> 꺼내서, "불의 이미지에 저항하는 것은 삶의 이미지에 저항하는 것과 같다 To resist images of fire or resist those of life is the same thing." 이 문장 읽으니, 이 문장과 근방 문단들 보면서 (그것만 하면서) 이틀은 보내야할것같아진다. (이 심정과 별 상관없어보이겠지만) 니체의, 10년 동안 과학공부해야겠다. : 공감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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