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1.0  <디워>를 넣지 않았다. 영화를 자주 많이보는 아이들(초1,5,중2)의 평을 듣더라도(논란이 있기에 앞서) 별표를 몇개주지 않았기때문이다. 그리고 그 가감되지 않은 관전평을 믿는다. 그 점에 있어서는 <트랜스포머>가 점수를 조금 더 받았다. 하필이면 똑 같은 과의 <오래된 정원>과 <화려한 휴가>를 다르게 넣는다.

1.1 <트랜스포머> 선입견이 있었다. <마이너리티 리포트><컨택트><쥬라기공원>, 대중의 평균적인 시선, 상상력을 넘어서는 다른 스케일들이 있어왔다. 헐리우드 영화들이 가져오는 경계를 넘는 것이 있어왔다. 선전을 하도 하기에 이번에도 그런 줄로 알았다. 인터넷, 컴퓨터 기술, 그리고 상상력을 받쳐주는 도구의 발전에 이내 우리들이 적응해버렸다는 생각이 든다. 웅장함이라든가 틀을 넘어서는 것이 이젠 또 다른 버전의 입체영화이지 않고서는 힘들지 않을까? 기대를 넘어서는 기술의 발전에 이미 적응해버렸고, 내용에 있어서도 이미 고갈되지 않았나 싶다. 돈을 아무리 퍼부어도 이젠 나름 한계가 보이지 않나싶다. 아이들의 감수성에 맞추어 돈만 번다는 컨셉이라면 성공한 것이겠지만. 집중의 가공스런 효과는 멈칫하지 않을까 싶다. 냄새도 나고, 공간을 압박해오는 입체영화관이라면 좀더 벌어먹을 수 있겠지만, 당분간은 힘들지 않을까?  영화에 관심없는 작자의 혼자 생각이다.

1.2 <오래된 정원>과 <화려한 휴가>의 마지막 장면은 유사하다. 한 화폭에 담긴 <청춘의 할아버지,딸,그리고 주인공 둘..>과 <결혼식 장면>. 감독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의도를 전달하고자 하는 것이 여기에 머물 수밖에 없음이 안타깝다. 안타깝게도 영화가 할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 일 수 밖에 없지 않을까? 87년 이후 20년, 할아버지할머니나 엄마아빠나 아들딸이나 잘날 것도 못날 것도 없이 그냥 당대를 살아가는 지금, 오래되지 않은 지금의 정원을 나타내고 싶었을 뿐이다. <화려한 휴가> 역시 감독의 최소한의 작가적 메시지 - 죽은 자는 웃지만 산자는 웃지않는-와 달리, 눈물을 흘리며 극장을 나오는 관객에게 열에 아홉에게 이번 대선에 누굴 찍겠습니까라고 하면, 안타깝게도 현실은 열에 아홉은, *나라당이다.

1.3 그렇게 전유하는 현실과, 감독의 의도, 가져가는 시선은 어긋나있고, 갈라져 있다. 사분오열된 마음은 그렇게 위로받고, 한번에 묶어서 사유하기를 거부한다. 아니 그 길이 이어져있는지도 모른다. 누가 이야기해준 적도 없다. 그리고 어떠할 지도 선문답처럼 어렵기만 하다. <화려한 휴가>를 보았으니 달라질 것이다. ?!

1.(-)1  많은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까?가 관심사이다. 사람들과 만남, 시공간의 축에서 드러나는 모습들이 좀더 지금의 나-너-우리를 알게 만든다. 그 점이 이 무더운 여름에 감사할 일 가운데 하나다. 여전히 20년을 추억으로만 눈물지우며, 삶을 보상받고 싶어하는 부류 - 그 눈물은 대부분 현실의 비참한 처지, 감독의 의도가 중요하지 않다.

잊혀진 과거가 현실로, 힘들었던 삶이, 지금 다른 나가 이해해주길 바랄 뿐이다. 그것이 겹쳐 감정을 요동치게 만든다. 하지만 그때 태어난 아이들, 청춘들의 시선은 어디있는가? 과거와 지금 달라지지 않은 것은 어디인가? 어디가 더 심해진 것일까? 그들과 현실을 바꾸어나갈 부분은 어디인가? 왜 지금이 더 힘든가? 생각과 경험은 겹쳐지지 않는다. <오래된 정원>은 사람들이 많이 보지 않았다. 그리고 감독의 시선으로도 나눠진 것이 없다. 더 더구나 지금과 섞여 감독의 시선에 출발하여 앞으로를 한번도 나눠진 적이 없다. 그렇게 우리의 시선에서 너무나 빨리 사라져버렸다.

<화려한 휴가>, 아무대책없는 민주신당그룹은 국민들이 많이 보아 뭔가 의식에 변화를 일으키기를 바라는 것 같다. 좀더 사회에 대한 인식으로, 아픔에 대한 인식으로 이어지길 희망하는 것 같다. 진보성을 가지고 있거나, 그러한 사람들의 심성도 이쪽으로 기울었다. 뭔가 선거국면에 반응이 있을 것이다라고 하면서. 어떨까~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울음의 의미가 무엇일까? <디워>와 <화려한 휴가>를 보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일까? 희망사항과 현실의 사이에는 무엇이 있을까?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2.

2.1


제일 먼저 본 책은 <신데렐가가 된 하녀>이다. 겨우존재하는 사람의 이야기다. <화려한 휴가>의 드러난 공로자들이다. 고학을 하거나, 구두 수선을 하거나, 몸을 팔 수 밖에 없는, 하루 끼니를 걱정해야만 하는, 잠을 줄어야만 생계를 이어나갈, 나가고 있는 부모님과 우리와, 우릴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지난 역사가 조금만 복구를 해주지만, 여전히 현실에서는 사각지대이다. <이랜드>처럼.  지식을 구분짓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형식지와 암묵지로 나눈다. 그리고 암묵지-노하우, 노웨어 잠재된 문화, 경쟁력을 뒷받침하고 있는 그런 것을 얼마나 형식지로 만들 수 있느냐에 따라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다고 한다.  뒤늦게 각광받고 있는 문화의 힘, 철학의 힘, 예술의 힘이다. 안타깝게도 보이지 않는 부분들이다.

오웰의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 <소금꽃나무>의 김진숙님의 현생활이 그러하다.  히틀러는 그 지긋지긋한 생활을 독서와 보상심리로 채웠다. 너무도 생리를 잘 알았다. 그 습속까지. 반면 오웰은 똑같은 생활을 하면서, 보이지 않는 것이 어떠하며 왜 반복되는지? 통찰을 얻었다. 욕이 난무하는 현장, 무거운 일들 속에서 그들이 얼마나 예술의 감각과 쿨한지에 대해 혀를 내두르면서 탄복하고 있다. 

아이러니 하다. 언제는 역사의 주역으로, 일상에서는 하대로 점철된 현실, 보이지 않는 암묵지에 어느 누구하나 시선을 보내지 않는데, 역사는 묘하게도 그들 때문에 이렇게 역사는 발전했다고 한다. 사실이거나, 사실이 아니거나... 매개역할을 하거나, 온도를 올리는데, 과정을 만드는데 선천적인 재주가 있는 것일까?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말만 잘하는, 생각 몇줄기만 훔치는 지식인들이 매듭에만 존재해 과도한 대접을 받아서 그런 것일까? 사실이거나 사실이 아니거나..

그들의 역할이 왜 수면위로 올라오지 못하는 것일까? 왜 수면위로 올라온 것은 전유하기 급급한 것일까? 소설가로 성공하고, 대변해서 성공하고, 다시는 그 틈으로 가고싶어하지 않는 무리들, 그리고 그 반복. 누군가 결과만 낚아채는 것일까? 과정까지 배우면 더 낚아챌 수 있는 것일까? 왜 다들 나는 옛날에는 어렵게 살았다고 떠벌리는 것일까? 옛날에 그렇게 산 것하고, 지금 수백억 수천억을 가지고 있는 것 하고 상관이 있는 것일까?

<태양의 아이>와 <바리데기>는 이런 물음에 진도를 더 나간다. 사회적 동화라고 표현했는데 그 슬픔, 배워야할 슬픔, 교감 그리고 아픔, 오웰의 런던까지 이어닿는다. 아픔은 자본만큼이나 전지구적인 것이니까? 왜일까? 왜? 이 여름 섞어있는 의문 가운데 하나이다. 아직 명쾌한 것은 하나도 없다.

2.2


유시민은 이야기해야할 두가지를 숨겼다. 에프티에이를 맑스와 박현채선생님 뒤로 숨겼다. 맑스는 세계화를 이야기하고, 민족경제론을 한 박현채선생님은 찬성할 것이며 슬그머니, 정작 담론의 중심에 서야 할 부분을, 뒤로 놓았다. 이에 예전 개혁정당그룹에게 박수갈채를 받고 있는 것 같다. 이렇게 비전과 입장마저 뒤로 숨겨놓은 다른 정치가들을 보면, 아예 무관심한 '우리'를 보면 그나마 낫다고 할 수 있을까? 아무래도 이런 <우리>를 뒷전으로 하고, 에프티에이를 중심으로 민*당과 유시민의 접전만이 난무하게 되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편이 갈린 이상, 자칭 진보들의 말빨은 <우리>을 고려하지 않은 채, 지적유희를 담뿍 안은 채로 저쪽 절벽까지 가지 않을까 싶다.

왜 에프티에이를 고민하고, 우리 가슴 속에 품어야 하는가?는 이런 정치인의 일이 아니라 우리 일이기 때문이다. 진보이기때문에 화려한 지식의 깃발을 요란스럽게 날려야 하는 것이 아니라, 대중의 무지를 가르치려고 선동하는 일은 더 더구나 아니기때문이다. 차분히 삶과 일터에 중심에 넣고, 내 자식도 마음에 넣고, 살림살이처럼, 은행에 적금들 듯 일상에 고스란히 가져갈 일이기 때문이다.

때로는 불쑥 커버릴 아들-딸들이기에, 정치가의 위선에 속지 않기때문에 그러하기도 하다. 삶의 문제가 정치의 뒷전으로 숨어버린다면, 지금의 황당한 만큼, 그 시간 뒤에 또 다른 처절한 황망함을 겪기 때문이기도 하다.

<화려한 휴가>보며 저때 아빤 뭐하셨어요? 언로가 막혀 도대체 무슨일이 일어났는지도 몰랐다. 빨갱이들 데모만하는 줄 알았다가 용인되어도, 20년뒤 <에프티에이> 국면때 아빠엄마는 대체 무엇하셨어요. 언로도 막히지 않았을텐데요라고 자식들이 되물어오면 일하느라 정신없었다라고 답변하긴 거시키하잖아요.

 

2.3

<관용>에 대하여, <바리에떼>, 똘레랑스 - 정치적 중립을 가장하거나, 다양성을 부르짖으며 저쪽에 서있는 사람들이 있다. 벌써 그쪽에 서 있으니 중립을 이야기할 수 있는 형편이 되지 않는다. 입으로는 <순수>를 이야기하지만, 벌써 자신이 어디에 서 있는지 조차 분간 못하는 경우가 종종있다. 무더운 여름, 한 가운데 <기독교>가 서 있다. 순수한 마음을 가진 평신도의 책임이 있겠지만, 극히 작은 부분이라 여긴다.

여러가지 작고 큰 결정을 신에게 의탁하는 경우를 본다. <신>은 합리적으로 결정할 기회를 준 것이지, 그렇게 하라고 계시를 준 것일까? 아들 놔 달라고, 우리새끼 꼭 시험에 붙게 해달라고 의탁하고자 하는 차이가 무엇일까? 샤머니즘화된 종교가 합당한가? 더 큰 목소리를 낼 수록 <관용>과 거리가 더욱 멀어지는 현실을 어떻게 메울 것인가? 점점 멀어져가는 평신도를 어떻게 붙잡을 것인가?

정치적 목사, 점점 대형화하는 교회를, 그 순결하지 않은 축재를 중립이란 이유로 가만 보고만 있는 것은 아닐까?< 이것만이 살길이다>라고 주장하는 부류에 비슷한 감정을 느낀다. 연민의 정까지... <화려한 휴가> 정치적 현대사에 관심이 있다면, 대형교회들의 현대사와 커지고 있는 우리의 교회의 정치적 습속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래야만 당신은 중립을 지킬 수 있지 않을까?



2.3.1



<우리의 죽은 자들을 위해>-이시영,샘님의 글은 황석영 <바리데기>에 맞닿아있다. 기사 한올을 모아왔을 뿐이지만, 시인과 소설가의 가슴 속에 또렷이 남아있다. 그것을 나누고 싶은 것이 장년의 그들의 심사이다. 녹슬지 않았고, 여전히 더욱 더 칼날을 벼리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면에서 달라진 김선우님 <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는 예리한 맛도 있지만, 달라졌다. 젊은 시인을 보면 안타까울 때가 있다. 쥐어짜내야 한다는 강박을 여전히 만드는 것은 아닐까? 삶을 훑어내리는 시들은 오롯이 마음을 전한다. 신기하게도 울리는 마음은 퍼진다. 연못의 동심원처럼. 어쩌면 그런 면에서 시집의 가격은 너무 박하다. 야박할 정도로, 젊은 시인의 삶이 들어있는 아픈 마음들을 그렇게 알량한 값을 치루고 산다는 것이... ...

전업 시인처럼 고달픈 직업이 있을까 싶다. 그렇다고 예술은 궁핍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닐 것이다. 직업에 연연해 하지 않을 때, 쥐어짜내지 않을 때...그런 면에서 시대는 자꾸 시인의 영혼을 너무나 짧은 시간에 헐값으로 매매하는 것은 아닐까? 허명하나 남겨두고.  그런면에서 <시간의 부드러운 손>, 교수직을 물러난 뒤, 장년의 움직임과 눈길은 마음길이 많이 남는다. 새벽길 부지런한 움직임의 향연에 대해 적정한 마음의 연대가 느껴진다. 그리고 따듯한 시선이 늘 마음에 머물러 있고 곱다. 이십대 청춘처럼. 그렇게 예쁘게 나이먹고 싶다 느껴질 정도로.

한편 <조성웅>님의 시다. 예수와 부처는 곳곳에 숨어있다. 단 느끼지 못할 뿐. 나는 그에게서 타인의 죄를 사하기 위해, 제 몸을 사르는 사람임을, 서늘한 의무감도. 그리고 거기에 덧붙여나오는 부끄러움이 옮았다. 한편 온전히 불사르고 있음에 대한 경외는 어떤 표현으로도 다가설 수 없음을 느낀다. 그리고 분노와 절망도, 그 막막함에 대해서도. 그리고 그렇게 내몬, 내몰 공모자 가운데 한 사람임을 역으로 느낀다. 비정규직의 절망과 외침, 그 외로운 고도에서, 골리앗의 외침에 어느 누구도 귀기울이지 않는다. 내 몸 속에 그림자도 살지 못하게 만들겠다는 마음들만 단단하게 뭉쳐서, 가져가지 않는다. 마음에 가져가는 즉시 나락으로 떨어질 것 같다는 반발심때문일까?

다가서는 법도, 마음을 나누는 법도, 불을 지펴내는 것도...외로운 섬에 가교를 놓는 것도, 그의 몫이 아니다. 우리 몫일지 모른다. 그 일 역시 고도에서 외롭게 외치는 것만큼 외롭고 힘든 일이고, 아무도 관심기울이지 않는 일일 수 있다. 

3.







그리고 무더운 이 여름, 세분의 샘을 만났다. 더위 만큼 갈증이 심했는데, <정보사회>,<파시즘과 대중심리>,<교육>에 대한 명쾌한 맥락의 설명은 책자나, 논문들로 범접할 수 없는 다른 것이 있었다. 모든 것이 다 중요한 것이 아니라, 줄기와 뿌리와 곁가지를 선명하게 분류해주는 마력같은 것들이다. 인터넷망 극시대에 , 인터넷이, 매스미디어가 속류자본주의에 의해 추잡하게 커 가고 있는지? 불과 20년 내로 달라지는 접근 모드에 대한 폭넓은 이해는 강의를 접하지 않고서는, 계속하여 길잃은 아이처럼 헤매일까하는 생각마저 든다.

빌레흠 라이히를 접하게 된 것. 새벽이 가깝도록 윤샘님과 이야기를 나눈 것, 윤샘의 모호한 답변 역시 행운인 것 같다. 물론 다리놓은 신대표님에게는 더욱 큰 감사를 드려야겠다. 내심 지금도 그러하지만, 라이히가 묻는 것이, 질문하는 것이, 늘 탐색하려는 것이 덩어리가 크다. 숲과나무를 적절히 안배하며, 안개가 드러나듯, 선명해지는 놀랄 만한 그의 능력은 번외로 하더라도 말이다.

그리고 한분의 선생님. 의대와 교대가 지형을 바꿔놓은 서열화된 대학의 현실. 노동운동을 하다가 뒤늦은 공부를 한 경제학-교육정책 교수님을 뵈었다. 신제도주의학파 입장에서, 아니 자본주의 틀을 고스란히 인정하더라도, 엘리트를 키운다는 입장을 이해한다고 하더라도, 자본의 천박함 만큼이나 교육의 천박함이 드러나보였다. 시민성과 사회성을 키우지 못해 똑똑하지만 팀플레이를 전혀할 줄 모르는 경쟁력 있는 아이, 혼자는 똑똑하지만, 팀은 똑똑하지 못할 아이, 자기 전공은 만만하지만, 역사-인문은 전무한 아이, 공부이외에 팀플레이를 할, 만들지도, 축구한번 제대로 하지 못하는 아이. 그리고 아무런 교육 재생산을 고민하지 않고 늙어만 가는 힘,권력많은 노조들

이렇게 <사회의 변화>와 <대중>의 시선으로, <교육>에 대한 교감을 나눌 수 있다는 일도 무더운 여름을 난 보람 가운데 굵은 하나이다.

4.

너무 정신을 한 곳에 놓았다. 일터에 마음과 몸이 많이 벌어졌다. 폭염만큼 마음도 산만하지 않았나 싶다. 좀더 차분하게 간극의 좁히고, 일터에 집중해야한다. 동료들에게 약간 미안한 마음이다. 몸도 추스려야 하고, 뫔이 좀더 세련되었으면 싶다. 몸에겐 너무 헤프게 대한 듯하다. 두루두루 죄스런 마음이다. 산발한 글을 읽어주신 분들에게도 늘 미안한 마음뿐이고, 고마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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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팽이 2007-08-20 1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어인일로 트랜스 포머를?
저는 김쌤 때문에 어쩔수(!) 없이 보긴 했어요.
타인의 취향을 존중하는 마음으로요.
(김쌤 여기도 온다고 했는데 ㅎㅎ)

여울 2007-08-20 14:26   좋아요 0 | URL
볼 것도 없는데 괜한 연락을..... 이래서 제가..ㅎㅎ

달팽이 2007-08-20 15:56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그림만 올려져 있길래 가볍게 덧글 달았는데 이렇게 어마어마한 개수의 글씨가 나중에 추가되어 버렸네요? 저도 일터에 마음과 몸이 많이 벌어졌어요. --;;

해적오리 2007-08-20 12: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화려한 휴가>는 보고 몸살을 앓았고...

<디워>는 요번 토욜에 봤어요.
사람 몰리는 영화는 별로 좋아라하지 않는 버릇이 있는데 그냥 한번 보고 싶단 마음에 봤어요. 그냥 별다른 의미를 두고 싶진 않고 그냥 봤다는 말만 할 정도네요. ^^

여울 2007-08-20 14:31   좋아요 0 | URL
10살의 저라면, 15살이라면, 스무살이라면...같은 느낌일것이고, 그것으로 존중받아야 합니다.다른 사람과 다른 무엇이 있다면 나누면 좋을 것이고요. 김치맛도 좋아하는 음식도 다 다른데 하물며, 영화평이야 .. 그냥 편하게 생각하고 존중합니다. 폄하하는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해적오리 2007-08-20 15:44   좋아요 0 | URL
아.. 전 그냥 제가 그케 봤다는 거에욤. ^^;;
전 영화보고나서 감정적인 면만 동요가 크게 되서 생각은 정리가 안되는 타입이라서요...^^

비로그인 2007-08-20 14: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페이퍼에는 추천을 두번씩 누를 수 있었음 합니다.
여울마당님 감사히 잘 읽고 가요 :)

여울 2007-08-20 14:45   좋아요 0 | URL
고마워요. 역시 체셔님밖에 없구랴~ ㅎㅎ

프레이야 2007-08-20 16: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울마당님 반갑습니다. 우선 길고 알찬 페이퍼 쓰윽 읽고 추천부터 날리고 갑니다~~ ^^

여울 2007-08-20 16:40   좋아요 0 | URL
반갑워요. 고맙구요.

이리저리 산만해서 보시기 힘들거예요. 그냥 마음들이 날라갈 것 같아 급히 매놓고만 있습니다요. 여름이 길고 난폭하네요. 건강 잘 챙기시구요.
 

틀 안에서 사유



- 전반적인 능력은 핀란드와 마찬가지로 높아가고 있다. 이 점은 인정하여야 한다.

- 대학은 학생대비 교수의 수는 OECD 국가에서 최하위 수준을 면치 못하고 있다. 학교별로 열악한 정도도 심하다. 대학내 품질이 높지 않고, 학교별로 차이가 현상태를 고착화하는 원인이기도 하다.

- 학생 1인당 지원금액은 상상을 넘어설 정도로 균등배분이다.

- 혼자 능력과 똑똑하지만, 협동하여 일을 처리하는 것이 무척 서툴다. 경쟁이 만연해있어 팀플레이에 익숙하지 않다. 이점은 미국학생들이 최소한 월화수목금금금인 우리와 비교해 월화수목금일일이어서, 팀웍을 높이는 일상활동을 하기때문이다.

- 민주노총, 한국노총, 울산현대노조 등 상급단체들이 교육에 대한 담당자도 없거니와, 앞날의 노동자에 대한 교육에 대한 고려도 없다. 실업계학교나 일터에 교육프로그램, 강사로 참여하는 고민조차 하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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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뒤늦게 보게된 책이다. 경주 분황사에서도 흔적이 본 적이 있다. 마음 길이 여기에서 걸린다. 그다지 연결되는 것도 아닐텐데. 자리를 틀고 빠져든다.

1. 유홍준교수님의 20여년에 걸친 족적을 담은 책이니, 그림을 보는 것도, 길을 따라서는 것도 이내 안내자를 잊어버리게 만든다. 까탈스럽고, 징그럽게 정확하게 박식한 향내, 그리고 까칠함까지 겸비한 그가 별반 마음에 다가서지 않는다. 그런 글씨도 집안의 문화, 가문의 문화의 힘, 차이도 느껴지지 않았다. <완당평전1>은 실망스럽기 직전이다.

2. 이렇게 어이없게 끝나서는 되지 않는데, 분량이 벌써 후반에 접어드니... 하지만, 촘촘하고 빽빽한 <완당평전 2> 목차를 보고나서야  지금부터 시작임을 확인한다. 내지르고, 뻗치기만 하는 성격은, 하지만 유독 세심한 성격의 사람들은 간간히 있지만, 완숙미란 것이, 삶의 중반을 넘어서야 발휘하는 운치와 향은 남다른 것 같다. 한결같은 까칠함와 지식와 애정을 담은 열정이 열매맺는 속도와 완숙미는 정도를 넘어서는 것 같다.

3. 많이 무너졌다. 황홀한 글씨만큼이나, 울림이 큰 폭 만큼이나 깊이와 넓이를 가진 500백년만의 창조성덩어리인 완당은 낯설지 않게 느껴진다. 돌아서면, 그 깊이와 높이가 두려워지지만. 금석학과 고증학, 그리고 집안의 문화의 힘 - 까칠한 성격, 그리고 역경 속에서 스스로, 같이 만든 작품이라 생각이다. 두렵다. 수천년의 역사를 냉큼 마음에 넣고 종횡무진하는, 학문의 분야를 넘어서는 정도도, 통찰도 그러하다.

4. <시골의 봄날> 이란 말년의 글은 봄꽃과 들과 산과, 아지랭이...글로써 풍기는 느낌이 아득해진다. ... ....<板殿>... 이렇게 달랑 몇번 뒤돌아보기엔 아깝다. 무척.

5. 최근 한권으로 줄여 나왔다고 한다. 더 많은 분야, 더 폭넓은 완당에 대한 연구결과가 이어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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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투쟁 홍신사상신서 17
아돌프 히틀러 지음 / 홍신문화사 / 1991년 9월
절판


마르크시즘이라는 유태적 교설은 자연의 귀족주의적 원리를 거부하고, 힘과 권력이라는 영원한 우선권 대신에 대중의 수와 그들의 공허한 중량을 주장한다. 마르크시즘은 그처럼 인간에게 있는 가치를 부정하고 민족과 인종의 의의에 이론異論을 주장하며, 그와 함께 인간성에 있어서 그 존립과 문명화의 가능성을 절단하려고 한다..... 나는 오늘날 내가 유태인과 투쟁하는 것은 전지전능한 조물주의 뜻이라고 믿으며, 동시에 나의 주主의 일을 위해서 싸우고 있다고 확신한다.-40-41쪽

연설의 의의
펜에는 언제나 혁명을 이론적으로 기초한 것만이 남아있다. 그러나 종교적 정치적인 방법으로써 위대한 역사적인 사태를 야기시켰던 힘은 과거에도 그러했듯이 미래에도 직접 입에서 나온 말의 마력뿐이었다. 대다수의 민중은 무엇보다도 먼저 언제나 연설의 힘만이 그 토대가 되어 왔다. 위대한 목표를 가진 운동은 민중과 폭넓은 관계를 유지하도록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 어느 문제라도 우선 이런 관점에서 음미하고, 그리고 이런 방향으로 결정을 내리지 않으면 안된다.-54-55쪽

현명한 독일 외교가 1904년 (러일전쟁)일본역할을 인수했다면 어는 정도로 독일을 위한 것이 되었을지는 헤아릴 수 없는 것이다. 짐작하건데 결코 '세계대전'으로까지 확대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1904년의 유혈은 제1차 세계대전 유혈의 약 10분의 1에 불과했던 것이다.-68쪽

당시 사병이었던 나는 정치를 논의하려 하지 않았고, 또 시기적으로도 부적당했다.(중략) 나는 전쟁의 기쁨을 고양시키기 위한 어떤 수단도 강구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에 분격했다.-78쪽

나는 그 당시 정부가 마르크시즘의 구체화로서의 사회민주주의에 대해 태도를 달리해야 할 것이라는 생각에 몰두하면 할수록 점점 더 이 교설에 대한 효율적인 대용물이 결여되어 있음을 깨달았다. (중략)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대중을 우둔하다고 생각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정치적인 사항에 있어서는, 지성보다는 감성 쪽이 보다 정당한 판단을 내리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사람들은 현존하는 것을 부정하는 경우 매우 조심해야만 한다.-80쪽

선전의 목적
잔학하기 이를 데 없는 무기도, 그것이 보다 신속한 승리를 가져올 수만 있다면 인도적이었다. 그리고 국민이 자유의 존엄성을 확보하도록 돕는 방법만이 미였다. 선전은 누구에게 해야 하는가? 지식층에 대해서인ㄱ, 아니면 지식 수준이 낮은 대중에 대해서인가? 선전은 영원히 오직 대중에게만 필요한 것이다.(선전이란 그 내용상으로 보아 학문이 아니다)-83쪽

모든 선전 공작의 독창성은 언제나 동시에 기초적인 원칙이 날카롭게 고려되지 않으면 성과를 올릴 수 없다. 선전은 짤게 제한하고, 이것을 계속 되풀이해야 한다. 이 견인불굴성이, 여기서도 성공에 이르는 첫째이며 가장 중요한 전제가 된다. 선전은 우매한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흥미있는 변화를 공급해 주는 것이 아니고 대중에게 확신시키기 위해 있는 것이다. 이것이 대중의 우매함 때문에 하나의 일에 관해서 지식을 갖고 싶어하기까지 언제나 일정한 시간을 요한다. 가장 간단한 개념을 몇천 번이라도 되풀이 하는 것만이 결국 기억하게 만들 수 있는 길이다.-86쪽

내가 평화롭고 무위한 시대에 태어나 것을 운명의 장난이라고 생각하였다.나는 어렸을 때부터 평화주의자가 아니었으므로... 이럴 즈음 발발한 남아전쟁은, 나에게는 번갯불 같은 힘을 주었다. 나는 매일매일 신문을 기다기고..멀리서나마 이 영웅적인 투쟁의 목격자로서 희열을 느꼈다.-74쪽

나는 소년시절이나 청년시절에 내 애국적인 열정이 헛된 망상이 아님을 행동으로 확인해보 싶은 희망을 여러 번 가졌었다...이 기분의 진실정을 표명하기 위해서 이제 영원한 심판자이신 신의 법정에 증인으로서 설 수 있는 허락을 받은 것은, 나에게는 늦은 일이긴 했지만, 신의 은총이라고 생각되었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나는 전쟁이 일어나면 당장 책을 버리고 출전할 것이 확실했기 때문이다.-76쪽

나는 한번 결심한 것을 나중에 번복하는 성격이 아니므로, 나의 결심은 확고한 것이 아니면 안되었다. 이번 일을 영원한 문제로서 결심을 해야만 했다. 그 무렵, 나는 언제나 무엇이든 시작해서, 또 무엇 하나 실행 못하는 인간에 대해서는 본능적인 혐오를 느꼈다.-110쪽

민중의 마음을 끌어들이는 것은 자기의 목표에 대해서 적극적인 투쟁을 지도해 가는 것과, 이 목표의 적대자를 절멸시키는 경우에만 성공할 수 있다. 반대파를 맹렬히 공격한다는 것은, 국민에게 자기의 정당성을 제시하는 증거가 된다. 대중은 본능적이며, 그들의 감정은 원수간이기를 바라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사이의 상호의 악수를 이해하지 않는다. 그들은 강력한 자으 승리와, 약한자의 절망, 또는 무조건적인 예속을 바란다.-163쪽

맺는 말
이 운동이 오늘날 우리 의회주의적 부패의 세계 속에서 더욱더 그 투쟁의 가장 깊은 본질을 자각하고, 자신을 인종과 인물의 가치에 있어 순정한 권화로 감지함으로써 그것에 의해서 질서를 부여받게 된다면, 운동은 거의 수학적 규칙성에 입각하여 언젠가 그 투쟁을 승리로 이끌게 될 것이다.(중략) 인종 타락의 시대에 각국의 최선의 인종적 요소 보호에 몰두한 국가는, 언젠가 지상의 지배자가 될 것이다.-36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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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멘트]<디 워> 광팬들, 집단행패 그만해라(진중권)

[아침햇발] 이무기에 짓밟힐 위태로운 운명 / 신기섭 


» 신기섭 논설위원


괴물이 판을 치고 있다. 필름 속에서 미국 로스앤젤레스 한복판을 휘젓고 다닌 이무기가 현실로 뛰쳐나온 통에 인터넷은 불에 탄 검은 땅 꼴이 됐다. 기존의 모든 것은 녹아내려 사라질 판이다. 이른바 ‘기자·평론가와 네티즌의 전쟁’을 진단하는 이들은 애국주의, 유사 파시즘, 반지성주의 따위의 수식을 붙여가며 사태를 걱정한다. 하지만 많은 대중은 이런 걱정에 아랑곳하지 않는다. 잃을 것은 ‘영화가 지킬 최소한의 기준’이라는 사슬뿐이요, 얻을 것은 ‘할리우드와 겨룰 컴퓨터 그래픽’이 가져다 주는 자부심이라고 느끼기 때문일까?


<디 워>를 보기 전엔 왜 이렇게 요란한지 이해할 수 없었으나, 극장의 불이 꺼지는 순간부터 사태가 조금씩 선명해졌다. 할리우드 영화로 착각할 만한 화면 속에서 서양 배우가 ‘이무기’, ‘여의주’를 입에 담고 한국의 오래된 전설을 이야기한다. 이것만으로도 왠지 뿌듯하다. 미국에 대한 콤플렉스의 산물이라 해도 상관없다. “<쥐라기공원> 영화 한편이 현대차 몇백만대보다 더 큰 수익을 올렸다”는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말을 떠올리면서 이 정체 모를 뿌듯함은 최고조에 이른다. 자부심에다 경제적 잠재성까지 느낄 수 있는데, 서사구조가 부실하면 어떤가.(사실 서사구조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배우들은 도망 다니기 바빠서 연기를 선보일 짬도 별로 없다.)

수백만 관객이 극장을 찾는 데는 다 이유가 있을 것이다. ‘심빠’라는 딱지도 개의치 않는 일부 누리꾼의 주장이 마냥 억지는 아니다. 자부심과 경제적 잠재성이라는 달콤한 상상의 대가만으로도 몇천원은 아깝지 않다. 영화가 올림픽 경긴 줄 아느냐는 비판은 ‘우리도 해냈다’는 자부심을 깨기엔 너무 허약하다. 영화가 지켜야 할 최소한의 기준은 경제적 잠재성 앞에서 ‘먹물들의 잘난 척’이 되고 만다.

자부심과 경제적 잠재성은 뿌리가 같다. 한국인이 느끼는 자부심은 거의 전적으로 경제적 성과 덕분이다. 그리고 돈이 최고인 사회에서 경제적 잠재성은 최고의 희망이 된다. 게다가 이 가치는 ‘광기에 사로잡힌 듯한 네티즌’이 만든 게 아니다. 그들은 ‘먹물들’이 퍼뜨린 가치를 따를 뿐이다. 어차피 이 가치를 자신있게 거부할 자가 없지 않은가.

그런데 이 가치보다 더 문제인 것은, 이무기에 박수 친 많은 사람들의 현실이 이 가치를 기준으로 볼 때 바닥이라는 사실이다. 멋진 컴퓨터 그래픽이 꿈꾸게 하는 경제적 가치는 쪼들리는 현실을 잠시 잊게 해주는 대리만족의 아편이다. 시장과 경제가 종교를 대신하는 새로운 종교가 됐다는 미국 신학자 하비 콕스의 말은 비유가 아니다. 눈앞의 진짜 현실이다.

이 새로운 종교 앞에서 예술은 허깨비가 되고, 아름다움은 컴퓨터게임을 연상시키는 이무기의 승천 장면에서나 느낄 수 있는 것이 된다. 뭐니 뭐니 해도 이 종교 앞에서 가장 무력한 것은 ‘비판적 지성’이다. 이 종교가 가짜라는 것, 이무기는 눈앞의 현실을 가리는 값싼 진통제일 뿐이라는 진실을 말할 목소리 말이다. 게다가 진실을 말할 의무가 있는 비판적 지식인들도 대부분 돈이라는 괴물에 항복한 지 오래다.

비판적 지식인이 사라졌다고 비판적 지성도 똑같은 운명에 처하는 게 당연한 것은 아니다. “돈이라는 종교는 가짜”라고 외치는 순간 비판적 지성이 되살아날 수 있다. 돈이라는 괴물이 뿜어내는 불길로 온 땅이 재가 되기 전에 누군가 해야 할 일이다. 이 괴물은 ‘먹물들’만 골라서 희생물로 삼지는 않는다. 이무기에 박수 친 ‘당신’도 피해갈 길은 없다.



신기섭 논설위원 marishin@hani.co.kr   한겨레신문 070817


 안타까운 뱀발

0. 중독 - 알코올중독, 게임중독, 경마-도박중독, 주식중독, 로또중독 주변에서 당신은 중독이라고 해도, 정작 본인은 아니라고 한다. 그것도 '절대로', 자각증세는 몇번의 신호를 보낼 것이다. 나만의 짜릿함을 가져오는 그것이 '스트레스'해소란 스포츠와 미사여구로 입혀진다.

1. '음란'과 '폭력' 역시 떨어져 있으면 보인다. 하지만 천박한 '자본', 아니 '자본'과 얼마나 근친한지 누구나 주지하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이 일상으로 돌아가면 '스트레스'해소로 바뀐다. 어린이에게 '음란'과 '폭력'의 무서움을 절감하지만, 어른이 본인은 다른 일들이 된다. 일상의 스트레스와 절벽에서 떨어질 것 같은 두려움에 노출되어 힘들다고. 그런 삶의 공극을 채워질 것은 '격투기'와 더 가학적인 '음란물'이라고 강변을 한다.

2. 어쩌면 이 시대에 깊히 함침해 있는 이상, 이 땅덩어리에 몸을 담고 있는 한, 정상은 비정상이 되고 비정상이 정상이 될 수밖에 없는지 모른다. 그 단순한 신화의 구도가 이렇게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지금은

3. 사회적 정신적 전염병에 감염되고 있는지 모른다. 도박을 도박이라 부르지 못하고, 중독을 중독이라 진단하지 못하는, 그 중독증을 어떻게 자각하지 못하는... ...

4. '중독된' 또 다른 종과 주변을 배회하는 종, 중독되지 못해 안달하는 종. 당신의 로망과 신화는 안전한가? 최음제는 현실의 건강과 상관없다. 아편과 약물은 정신건강의 영역을 넓혀주는 신의 선물이 아니다. 쓰면 쓸수록 즐기면 즐길 수록 우리의 심미적 감각은 현실과 동떨어진, 지속성을 상실한 '변*'에 가까워진다.

5. 당대의 가치, 특히 급조된 우리의 가치에 대해, 뿌리부터 의심해보는 ... 그 기둥을 받치고 있는 주춧돌을 의심해보는...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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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중독
    from 木筆 2007-11-19 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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