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짓기, (잡된)글쓰기, 마음쓰기

1.

교실 내에서 앎을 위한 고단하고 기계적인 싸움이, 교실 밖에서는 통하지 않고, 사원내의 열정적 믿음이 사원 밖에서는 편협한 고집과 독선으로, 교과서 속의 진리들은 삶 속의 구체적인 일리들을 비껴가고, 천명이라는 이념들은 진솔한 욕망 한줄기를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는 괴리

2.

집이 되지 못하는 건물, 글이 되지 못하는 논문, 그리고 마음이 되지 못하는 이성은 한 통속이다

3.

인심은 민심으로 모이고, 민심은 천심으로 오르고, 다시 천심은 지심으로 내려서, 그 당 위에 흐르는 인심을 어루만져주는 마음쓰기

4.

돈 씀씀이만 제대로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마음 씀씀이를 제대로 다스려야 한다

5.

조율되지 못하는 文化는 文禍를 낳고, 文禍에 이르도록 곪은 文化는 섣부른 복고주의로 돌아선다.

6.

논문중심주의와 원전중심주의의 가운데는 바나나콤플렉스(겉은 노란데, 흰척하는), 중앙집중적이고 폐쇄적인 글쓰기이다. 독재성와 우리의 타성적 허위의식이 공모한 수세강박증, 순결콤플렉스이자, 강박과 허위의식의 [마음쓰기]에 맞닿아 있다.

7.

집이 더 이상 정과 의미를 채우는 곳이 아니라 욕망의 배설지. 익명의 기능성만 키우는 건물일 뿐이자 욕망을 담는 텍스트이다.

8.

글쓰기는 글쓰기를 통해서 글의 안팎이 어울리는 현상이다. 글의 생명력은 역사성, 컨텍스트성의 후원이 있어야 한다.

9.

마음 위에 마음 쓰기

10.

잡된 글쓰기




10.1 글쓰기의 한계, 불안, 결핍을 보듬는다.
10.2 삶의 복잡성와 구체성 속에서 일리라는 집을 짓는 글쓰기
10.3 원칙상 긴글이며 패턴을 갖는다
10.4 역사, 터, 이름, 일리를 설계도 삼는다
10.5 자신의 집을 자신의 손으로 지어야 한다.(자신의 체험을 자신의 말로서 옮기는 글쓰기)
10.6 일도쾌단이 아니다. 단순성이 아니다. 해체가 아니다. 무리가 아니다.
10.6 글쓰는 이들은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형이상학, 존재론적 규정의 영향을 받고 있다.

10.0.1 여백과 틈의 글쓰기(능동적 침묵)
10.0.2 개성적 글쓰기 - 지은이를 숨기지 말자, 쓰는 언어의 맥락드러내 보이기, 구체성을 더함, 지식의 권력화 경계, 주변적 자리를 드러냄
10.0.3 구체성의 글쓰기 - 경험들이 위계화 되지 말아야 하고 차별화되지 말아야 한다. 지식 수입상들의 증거로 현실이 그 이론을 예증해주는 자료창고 역할이 되지 말아야 한다. 중앙집권이 아니라 지방분권이 되어야 한다. 추상성이나 전지를 하는 글쓰기가 아니라 일리의 연대이어야 한다.
10.0. 4 글쓰기의 임상성 - 인간에 의한, 인간을 통한, 인간의 변화, 쉬움과 전문성의 상생관계를 회복해야 한다.
10.0.5 골과 마루의 글쓰기(원리-에피소드) - 글의 구심력과 현실의 원심력을 조화시키는 것.

뱀발.  김영민글쓰기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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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 그럴생각은 아니었는데, 자전거 투어를 할 요량이었는데. 도서관엘 들러 빌리다보니 한가마니다. 참터로 가서 좌판깔아놓고 시집한권으로 시식하고 그늘서린 책숲으로 들어선다. 사무실에 냉기가 오를 무렵 김*영 친구는 받을 선물이 있다고 오고, 곧 포항행을 준비한다. 이런저런 책이야기를 나누다. 한차례 스콜이 요란스런 천둥과 번개를 동반하며 나무들을 뽑을 듯이 요란하다. 그것을 한편으로 두고 햇빛서린 책숲으로 들어선다.  다음날, 절반은 돌려주고 나머지는 또 시집으로 꾸어온다.

읽은 시간보다 메모흔적 정리할 시간이 더 걸릴 듯하다. 하여야 하나 말아야 하나? 읽고싶은 책들보다 읽고싶은 책들이 쏟아져나오는 량이 더 많다. 책읽기와 책메모가 달라져야 할 것 같다. 상상으로 읽고 써내지 않으면 되지 않는 세상이 되어버린 것인가?

10여년전쯤 이분의 책들을 읽었으면 다른 길로 에둘러오는 어려움이 없었을까? 하고싶은 이야기, 나누고 싶은 이야기, 쓰고싶은 표현들이 너무 많이 담겨있어 놀랍다. 나머지 책들도 보고싶은데 도서관엔 책들이 없다. 메뚜기가 되어야 하나.? 구즉으로 튈까? 아마 거기도 없을 확율이 크겠지? 궁금해진다. 무엇을 썼는지가 예상되면서도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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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밭 2008-08-12 23: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여울님의 책숲으로의 산책이 어떠했으리라 감히 짐작해도 될까요? 신비한 새소리를 쫓는 소년은 아니었을까요? 주제넘는다면, 잘못 짚었다면 죄송...부럽습니다. 그리고 닮고 싶어지네요.ㅎㅎ

여울 2008-08-14 08:48   좋아요 0 | URL
하하. 작은 산을 몇번씩 오르락내리락 했습니다. 파랑새두 보구요. 잠자리두 보고 나비도 보았습니다. ㅎㅎ
 

다음에 동의하는가?!!

1.
일제시대 황군, 정신대의 상흔이 있다면, 여전히 진행중인 산업화의 역군은 현대판 기생을 한 축으로 한다는 사실에 말이다. 낮은 더욱 더 저돌적인 근육을 원하는 사회라면, 밤은 더욱더 살을 요청하는 사회라고 말이다.

2.
과잉남성화는 과잉여성화를 불러들인다.

3.
사회의 한편이 근육화될수록 다른 한쪽은 살로 바뀐다. 여성의 매력이 말을 줄이고 살을 늘리는 것으로 일반화, 표준화된다.( 유럽 사람들이, 아니 일반적인 듯, 모 여대앞을 지나면서 하는 말, 여기가 대학이 아니라 매춘지역인지 알았다구하는 우스개아닌 우스개)

4.
지식인과 심층근대화, 과연 이 사회는 여성의 언어를 배울 수 있는가? 여성의 말을 배우는 사회가 될 수 있는가? 더욱 더 근육을 강요하는 사회! 더욱 더 살을 요구하는 현실!!

5.
살로서 여자가 아니라 말로서 여자, 숭배받는 살, 일하는 살, 살에서 말로 갈 수 있는가?
자문자답을 해본다. 말많은 여자를 좋아하는가? 말없는 여자를 좋아하는가? 가슴에 손을 얹고... ... 답을 해보았는가? 여자의 말을 배우고 싶은가? 당신의 피부관념론은 안녕한가?

6.
내그림자를 바꾸고 싶으면 내가 바뀌어야 한다.

0. 담론의 부재가 문제가 아니라 담론의 부실이 문제다. 공론화의 방법은 상식과 기초적합리만 있다면 가능하다. 담론을 만들려고 조차 하지 않는다. 문제는 이 지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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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에 2008-08-12 2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육과 살, 담론조차 만들지 않으려는 것. 그러게요. 음.. 만들어야 할텐데요. ^^; 에구구. 바보같은 댓글 하나 남기고 갑니다.

여울 2008-08-14 08:46   좋아요 0 | URL
ㅎㅎㅎ. 힘이 되는 댓글입니다. 정신없는 사회인데 너무 조용하기만 한 것 같군요. 일상의 경계선 인근들은요.
 

080810 크로스컨트리 8K 80', 자전거 24K 80', 080809 자전거 6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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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0808 자유주의, 공동체주의, 민족주의 - 주어진 것이나 결과로 사고하는 경직성, 그리고 공화주의

1.
[자유주의]는 정작 간섭의 부재[주종이나 예속상태를 없애는 것을 개인에 대한 문제로만 보는]를 이야기 못하고 정의나 평등만 이야기한다. [공동체주의]는 참여가 목적이라고는 하지만 결정담당자의 공공선의 봉사여부나 역할의 가능성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시민적, 정치적 평등과 도덕적 선에 대해 이야기 할 뿐, 사회-경제-문화적 조건 보장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 [민족주의] 역시 자치의 과정에 시선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쓸까하는 결과에만 관심이 있다.

2.
[자유주의], [공동체주의], [민족주의] 모두 주어진 것으로만 사고할 뿐, 또는 결과만 가지고 다룰 뿐, 그것의 바탕이 되는 여러 조건이나 과정에는 별반 관심이 없다.  사적이익과 공적이익 역시 충돌하는 것이 아니며, 존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공공선 역시 자신의이익과 합치하여야 함을 전제로 하고 있다.

3.
일자리도 없이 가난 속에 없이 지내야하는 한 조국은 없다. 자유없이 애국은 불가능하며, 비루투(시민적 덕성)없이 자유가 없고, 시민없이 비루투가 불가능하다.

4.
자유주의 역사와 논의에 대해 2여년에 걸친 세미나와 토론이 있어 왔다. [자유주의]가 지금에 있어 원론적으로 이야기한다면, 그 자체로도 대단히 진보적이다. 그리고 다양한 진보를 가지고 올 수 있다고 여긴다. 지식인 사이에도 신념에 가까운 분들이 있는데, 아쉬운 점은 역사적인 시야에 의외로 둔감하지 않은가 한다. 보수주의와 자유주의의 흐름, 그 논의가 된 발화지점에 대한 고민이나 토론은 없고, 늘 전유하는 결과만을 지금에 대입한다. 그것도 다른 나라의 경험을 지금 여기에 말이다.

5.
진보나 사회주의에 관심이 있는 만큼, 자유주의의 역사에 관심이 있다면, 그 황망함에 어이가 없을 것이다. 힘과 자본에 얼마나 애초의 의도와 달리, 지금 신자유주의로만 꽃피게 되었는지를 돌이켜봐야 한다. 강자 독식의 자유만으로 전취되었다고 하면 어떨까? 리버럴만 강조하고 있다면 그 귀에 담을 말만 골라 지금여기에 단발의 타깃으로 대입하는 것이 아닌지 의심해보아야 한다. 그리고 그 [자유주의]가 연발의 지형으로 풍부해지지 않으면 당신의 생각은 역시 간섭의 부재를 이야기하지 못하고 정의와 평등만 연발하는 오류를 낳는다. 그리고 당신의 주장은 시민의 덕성(비루투)를 이야기하지도 못하고, 일자리 없고, 가난할 자유만 강조하는 꼴이 되기 쉽다.

6.
역도 마찬가지다. [자유주의]를 힐난 하는 당신은 전혀 자유를 모를 수 있다. 어쩌면 더욱 몰 역사적일 수 있다. 그렇다면 역시 자유주의의 발화점에 대한 고민을 역으로 당신도 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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