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회의를 에둘러가다. 간만에 추스리는 몸과 마음. 수북히 쌓인 낙엽들과 달빛이 곱다. 갑*에 비친 달을 잡으려했는데 생각보다 어렵다. 서툴게 비친 빛들을 남겨두다. 6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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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더 레프트란 말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와 좌의 직선상에서 어느 하나를 골라야 한다는 강요같은 것이 질문속에 박혀있기 때문이다. 물론 사회의 현실을 보는 눈은 우와 좌 사이의 다양한 눈이 필요하기도 하다. 그러면서도 더 스스로 더 극단으로 밀고가려는 노력도 존중한다. 하지만 이런 직선상의 선택과 노력은 자칫하면 혼자만을 기준점으로 하며 직선위의 평면을 만들어간다는 현실을 결여하기 쉽다.

2.

현실의 지평에서 나만이 아니라 나-너의 관계로 사고하고 행동할 수 있다면, 존재의 한계에서 사고의 지평을 좀더 넓게 선택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존재를 인정한다면 현실을 만들어가는 다양한 시도를 해볼 수 있다. 어떤 레프트를 상품처럼 고르는 것이 아니라 생각의 고정점을 두고 현실을 달리 사고하고 만들어갈 다양한 씨앗을 품어볼 수 있다.

3.

머리앎이라는 것이 자발적 균형이 아니라 기울어져, 역으로 행동까지 강요한다면, 그것이 어느 덧 당위로 자리매김하여 스스로 구속한다면 계몽은 초라함으로 전락하고 의도된 방향만 남거나 옳으냐 그르냐의 문제로 재전락하게 될 수도 있다. 몸앎의 영역과 풍부함은 설령 이것이 경제적인 여건때문에 출발했을지라도 다양한 삶의 영역의 기준점이 될 수 있으며 섞이게 할 수 있다.

4.

언플러그의 획일적 적용이나
친환경의 그물에서 벗어날 수 없는 식탁의 지구화로 선택이 불가능한데도 가능하다라고 하거나
친환경의 그물에 걸려 가사시간등 물리적인 시간이 더 투여되는 상황이라면


5.

현실이라는 꼭지점에서부터 지금보다 더 좌편향하며, 더 많은 민주주의로 가며, 나만이 아니라 [(나-너)-나)-너)]로 마음이 움직일 수 있다면

6.

가족이라는 자장과 편차는 다양하다. 계급에 따라서 문화적 자산에 따라서 2-3대에 걸친 가족의 문화에 따라서 여건이 다르다. 경제적인 여건도 그러하며 건강도 그러하며 여러 감안해야할 잣대가 다르다.

7.


아무리 그 동선에 벗어나 혼자 선택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므로, 설령 현재 우리 안에서 대안을 그려본다고 하더라도 대척점의 다른 나라와 비교하는 순간 그 가정은 어이없이 무너질 것이다. 그러므로 대안은 역시 상품 선택하듯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지점이란 맥락의 깊숙함 속에 각기 다른 꼭지점을 가지며 방향을 달리 가질 수 밖에 없다. 이런 면에서 역시 대안은 만들어간다는 진행행이나 좀더 확장하면 형용사나 부사로 진화하는 것이 적절할 수도 있겠다.

8.

여건-처지-관점이란 맥락에 함께 설 수 없다면 역시 기존의 관계이상 나아갈 수 없으면 서로 심정적인 동조에 그칠 수밖에 없다.

9.

계몽의 초라함
지행합일의 강요
진보를 또 다른 과시의 수단으로 파는 것은 아닌지?

뱀발

안다는 것과 앎을 강요하는 것과 앎을 빌미로 행동을 강요하는 것, 행동으로 앎을 유추하는 것의 간극, 느끼는 것과 느낌을 강요하는 것과 느낌을 빌미로 행동을 강요하는 것, 행동으로 느낌을 유추하는 것의 간극. 아프다는 것과 아픔을 강요하는 것과 아픔을 빌미로 행동을 강요하는 것. 행동으로 아픔을 유추하는 것의 간극. 형용사만 달리해본다. 가족의 성원이 다 다르다. 어느 하나를 매도해 끈다면 그 반대편으로 움직이고 그 반대편만 배울 것이다. 삶은 긴 시간의 누적이다. 앎이 강요처럼 느끼게 되면 더 이상 앎을 필요치 않는다. 앎을 빌미로 궁핍을 강요하면 궁핍의 반대편으로 생각과 욕망은 자랄 것이다. 아픔이 세뇌로 이어진다면, 그 아픔에서 헤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혼자 아는 것이 두렵다. 강요할까봐~. 주춤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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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지난주 빌린 책들의 늦은 반납, 밀린 책들을 한 곳에 모아본다. 제법 쌓여 일주일간 일용할 양식은 되겠다 싶다.  그리고 건네온 직접행동도 모둠에 넣는다. 주말 건강검진도 미루고 모처럼 토요일 오전 휴식을 취한다. 오후 참*에 들러 이것저것 마무리하고 보내온 과제에 대한 코멘트를 하고 돌아와 식구들과 저녁을 맞고 책을 보다 존다.  졸다나니 안해와 아해들이 안방으로 권면하고 잠을 청한다. 새벽을 맞을 줄 알았는데, 누적된 피로는 내달려 해가 한참 제 몸을 익힐 때 쯤에서야 깨어난다.  막내의 목욕탕 행차에 같이 왕림하고 난 뒤,그제서야 직접행동을 이어본다. 목차와 행간, 요약을 번갈아보며 재촉하기도 하고 세심히 살피기도 하면서 부지런을 떨어본다.

그리고 초대받은 잔치는 조촐하지가 않다. 말들은 익고, 들뜨고 목축인 술잔들은 비는데, 마음은 여물지 않는다. 아침, 일터 동선들을 다시 한번 음미해본다. 미동이 보일 듯 보이지 않고 입질이 올 듯 말 듯 모호함은 무척이나 피곤하다 싶다. 대안교육이나 안전한 먹을거리에 대한 이어지는 이야기들도 직접적인 선택의 문제일뿐, 품평의 여유가 없으며 내 새끼에 걸려 더 이상 논의가 다채로와지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들이 목에 걸린다. 더 더욱 예민해지지 않거나 세밀해지지 않아 그 결들을 나눌 수 없음은, 가족이란 장벽에 갇혀 그 이상을 논의로 밀어내지 못하는 일들이 막막함을 키워내는 것은 아닐까?

[가장 보통의 존재]1)로 맥락을 두거나 그 매듭에서 천착해서 사고하는 연습이 되지 않으면, 늘 우리라는 시선은 그 매듭에서 벗어난 별다른 시선이 되기도 한다. 토해낸 많은 말들. 다른 관점. 다른 눈의 요란함. 다른 시선은 숙성되거나 현실로 품을 수는 없는 것일까? 감정의 교감들까지 읽히면서도 여전히 나-너의 생각틀은 무뚝뚝하고 예민하지 못하다. 현실의 다양한 결을 읽어내지 못한 것은 아닐까? 읽어낸 현실이 몸의 언어로 바뀌지 않는 것일까? 서로 통하는 말로 바뀌어야 되는 것일까?

뱀발

1. 아무래도 난 더 좋은 부모, 더 잘해주고 싶은 부모가 아닌 모양이다. 더 잘해줄려고 하는 것이 부모욕심이 아니냐구 되묻는다면 더 잘해주지 못하거나 못해줄 수밖에 없는 부모도 생각의 반열에 올려놓아야한다고 말하고 싶다. 평균적인 삶이 무어냐고 묻는다면 그것에 대해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만, 충분히 잘 해줘서 이 모양 이꼴인 것도 사실이다. 부모-자식이란 도그마에 벗어나지 못하는 사고나 잘해줘야 한다는 강박이 서로를 더 좀 먹고 있는 것은 아닌가도 생각해보야 한다.

2. 1)은 키바님의 글이다. 방년 스물넷 꽃나이의 사회새내기?이다. 어렵지 않고 쉽게 이해되지만 한번쯤 새겨보면 좋을 것 같다. 현재 아*** 사무국 요원?이다. 이은 글은 클릭하셔야 볼 수 있다.

blog.naver.com/nadia11111/7003633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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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하모임, 한켠에 자리잡은 목련닮은 연꽃사진을 보다보니 검은색 바탕이 이리도 고울 수가 있나 싶다. 내맘대로 흔적.



낙엽들이 풍성하다. 바람결에 이리저리 몰려다니는 꼴하군.  느티나무는 아직도 악보가 많이 남아있다 싶다. 빨간톤부터 그윽한 톤까지......녀석들하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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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안에(만) 앎을 가지고 있는 것,
앎을 가슴으로(만) 가져가는 것,
몸으로(만) 아는 것을 가슴과 머리로 가져가는 것과 관계들은

어쩌면
별난음식을 머리로(만) 알려고 하는 것과
먹던음식을 몸으로(만) 느끼고 있는 것과
맛난음식을 가슴으로(만) 전율하는 것과 관계가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서푼짜리 생각이 든다.

머리로(만) 아는 음식은 몸에 배이지 않아 허무하고
몸으로(만) 느끼는 음식은 맛도, 음식과 음식사이를 이을 수 없으며
가슴으로(만) 전율하는 음식은 강열함만 남기에
이들 사이 사이 서로를 갈망하는데도 맛의 풍요로움으로 서로 잇지 못하는 것은 아닐는지

한번 작심하고 그렇게 다른 감수성을 인정하고 서로 비워두는 것은 어떠한지?

머리로 알려고만 하는 것은 느끼지도 전율하지 못해, 결국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것에 근사하고, 몸의 경험으로만 반추하는 것도 다른 느낌이나 앎의 영양분을 사전에 봉쇄하는 일이며, 가슴으로만 열망하는 일은 지속성이나 머리와 몸으로 그 뜨거움을 통하게 하지 못하여 그 역시 머리와 가슴, 몸을 따로따로 움직이게만 하는 것은 아닐까?

결국은 한몸에 서로 뜨거워질 마음으로 만나는 것임에도 그렇게 따로따로 떨어져 있는 것을 보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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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8-11-03 2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번에 아퍼서 인천집에 올라가 지내는 동안 가족들이 먹는 밥상,
친구들이 사 준 밥상,
후배들과 먹은 밥상을 두루 경험하면서
촌구석에서 제가 먹는 밥상과 너무나 다름에 놀랍고 걱정만 가득 생겼슴다.
풍요로움과 풍요로움 후에 오는 낭비, 그리고 비정상적인 생산방식이 가려진 맛의 찬미.
그들에게 농촌의 고통이 근접할 수 없는 그것을 확인하면서 돌아오는 길에 울었습니다.

여울 2008-11-04 09:05   좋아요 0 | URL
불안과 불감을 동시에 생산하고 파는 것은 아닐는지요. 스스로 어쩌지 못하네요. 움직이는 동선도 울타리를 넘지 못하고, 울타리를 넓히지 못하는 나날들. 또 다른 불안과 불감에 사로잡히는 것은 아닌지 두려운 나날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