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 반진리 그리고 삶

 로쟈의 철학페이퍼 01, 02 꼭지 참조 -  철학계의 아인슈타인 니체는 신은 죽었다라고 했다. 여기서 신이 뜻하는 것은 어떤 인격체가 아니라 초월적 의미다. 우리에게 주어진 것, 즉 이삶을 넘어서는 , 혹은 이삶의 바깥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그 선언에 함축돼 있다. 먼댓글의 글을 읽다보면 신이라는 것을 삶의 흐름이라고, 삶을 대위한다.  

없는 것을 있다라고 하는 이데아의 철학에 대비하여 가족이 세상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아줌마. 아줌마의 철학이라고 한다. 뭔가가 있다라고 하는, 이것 '너머에' 있고, 이것 '다음에'있다. 이게 다가 아니다라는 것이 이데아철학의 구호인데, 그 메타라는 건 가상이고 속임수다. "이게 다예요!"  이것이 우리의 존재 근거이자 원리이다.  

언제부턴가 인간은 소화시킬 수 없는 질문을 하게 되었는데, 그 물음은 '무엇을 넘어선 무엇'에 대한 물음이다. 이 개뼈다귀같은 물음을 떠안게 되면서 새로운 인간이 탄생했으니, 바로 '병든 인간'이다. 인간이 '무엇들의 세계'뿐만 아니라 '무엇을 넘어선 무엇들의 세계'에 살게된 것이다. 먼댓글의 전염병이야기도 비슷한 것 같다. 그래서 '병든 인간'은 병든 인간들'이 되었고, 언젠가부터 인간자체가 되어버렸다. 종교사야말로 가장 인간적인 역사이면서 동시에 병리학사 아닌가? 모든 종교의 전제는 "삶=질병'이라는 것이니까. 그래서 치료가 필요하고, 구원이 필요하다고...  

먼댓글은 이런 그리스도의 기원과 사회주의의 기원을 살핀다. 진리가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마치 저쪽에 잇는 것처럼, 삶을 넘어서 있는 위선의 세계가, 삶의 바깥엔 아무것도 없음에도 저당잡힌 병든 인간의 삶이란, 삶에 살아있는 진리가 아니라 반짝이는 진리를 이야기하는 철학,과학,경제, 미학의 분기점을 이야기한다. 모두 원심으로 분리해나간 자유, 평화를 이야기해댄다. 허울 좋은 예술의 분기점에 대해 이야기한다. 진리라는 것, 삶이란 것, 밥벌이를 넘어선 사유와 삶, 학문에 대한 진도가 맥을 끊긴 시점이 거기라고, 거기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말이다. 그 애꿎은 스스로 설 수도 없는 개인이라는 원자에 대해 지식의 편집증이, 끊임없이 [나]만 있는 것 같은 나르시즘의 환각이, [삶]에서 시작하지 못한다. 살아가는 것을 함께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져 끊없이 패대기쳐지는 현실만 짜집기할 뿐이다. 고민을 삶을 원점으로 되돌리려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정말 이게 다예요!. 이 삶 바깥엔 아무것도 없다니까요! 마치 바깥에 무엇이 있다고 얘기하는 것은 다 거짓이라니까요! 뭔가가 없다니까요! 삶의 바다에 대해, 삶의 가지에 대해, 삶의 파도에 대해, 삶의 흐름에 대해.... 사람이란 것이 위대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가 목적이 아니라 하나의 교량이라는 것이다. 사람에게 사랑받아 마땅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가 하나의 과정이고 몰락이라는 것이다. 우리의 존재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우리는 과정일 뿐이고 몰락일 뿐이며, . 나는 사랑하노라. 몰락하는 자로서가 아니라면 달리 살 줄을 모르는 사람들을. 그런 자들이야 말로 저기 저편으로 건너가고 있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진리라는 것은 여성이고, 바다고, 위버멘쉬의 창조라는 것. 그 위버멘쉬를 낳을 때까지 우리의 삶의 과정은, 몰락의 과정은 영원히 지속되고 반복될 것이다. 

뱀발.  

1. 라이히를 읽다보면 갖게 되는 편견 가운데 하나는 오르가즘에 대한 것인데, 성경제학의 관점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결혼-섹스-성-포르노-사랑이 분기되기 이전의 사랑으로 이해하는 것이 합당할 것 같다. 그 점을 이해하지 못하면 자칫 그가 이야기하는 부분에 대한 와전으로 이어질 것 같다. 어쩌면 철학을 비롯한 학문의 문제점, 종교와 틈, 예술과 경제와 간극들에 대한 통찰을 살펴보는데 훌륭한 조건이 들어있다. 사랑-일-지식이라는 그의 응집된 결절점은 그토록 인문이 하고 싶어하는 삶과 진리와 지식이 통합되어 있다. 한몸이어서 따로따로 나눠볼 수 있는 다른 것이 아니다. 삶이 논의에서 사라진 것은 어쩌면 이천년, 어쩌면 오백년, 어쩌면 150년. 원심력으로 뿔뿔이 흩어진 것이 논의의 출발점으로 되돌아오지 않으면, 인문학도 삶도 점점 더 괴물되기를 멈추지 않을지 모른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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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반진리  

 진리의 도구를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반진리 counter-truth를 능숙하게 알아야 한다. 문제는 왜 사태에 대한 진리가 있느냐가 아니라 왜 진리가 우세할 수 없느냐이다. 모든 진리 및 평화설교에도 불구하고 거짓말쟁이와 사기꾼과 수다꾼이 그렇게 넘쳐난다면, 진리를 가로막는 매우 강력한 무엇인가가 있음에 틀림없다. 거짓은 오래 지속되지 않으므로 그것은 거짓 자체일 수 없다. 적절한 진리를 가로막는 다른 종류의 몇몇 결정적 진리가 있음에 틀림없다. 우리는 그것을 반진리라고 부른다.

자신의 법적인 남편 외에 애인을 가지고 있는 여성은 중요한 진리를 살아간다. 결혼은 낡아버렸거나, 남편은 그녀에게 못되게 굴거나, 남편은 불능이거나, 다른 측면에서는 중요할지라도 그녀에게는 단지 맞지 않는다. 삶은 풍부하고 너무 풍부해서 중세의 구속복에 갇힐 수 없다. 그럼에도 이 여성은 거짓 없이는 진리를 살아가지 못한다. 이 경우에 거짓은 진지한 반진리를 즉 남편이 안다면 그녀나 그녀의 애인 또는 둘 다를 죽일 것이라는 것을 감춘다. 아무도 돕지 못할 것이다. 이 경우에 진리를 말하는 것과 관련하여 반진리는 진리보다 더 강력하다.

진리의 무기는 사람들이 좋아할지 안 할지, 그 결과가 무엇이든 생각하지 말고 질문할 것을 요구한다. 당신의 가장 모진 적이 거짓을 말한다면, 당신은 그 거짓을 찾아야 한다. 그가 진리를 말한다면, 당신은 당신의 적의 진리가 아무리 고통스러울지라도 그가 진리를 말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당신의 적의 진리는 당신 자신의 진리에 반진리이다. 당신의 진리의 적이 진리를 말한다면, 그러면 당신 자신의 진리 안에 잘못된 또는 미숙한 또는 불완전한 어떤 것이 있다.

제도적 거짓말을 지지하고 정당화하는 반진리를 아는 것은, 앞으로 발전할 소지가 있는 진리가 이 세계로부터 벗어난 거짓말보다도 더 나쁜 거짓말로 바뀌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해야 할, 사회적 궁핍을 극복하는 일에 속한다. 진리는 공허한 장식을 위해 거울 속으로 넣어지지 않도록 보호되어야 한다. 310

진리의 사용[적용]은 본질적으로 하나의 예술이며, 전염병에 맞선 싸움에서 중요한 진리를 무기로서 사용하는데 필요한 요령을 얻기 위해서 모든 다른 예술처럼 경험에 의해서 끈기 있게 발전되어야 하는 예술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자유행상인"에 "진리행상인'을 덧붙일 뿐이며, 우리의 노동의 단 하나의 대상에도 도달하지 못한다.

원칙상의 진리와 특수한 진리의 관계를 잘 고려해야 한다. 진리를 말하고 진실한 삶을 사는 것은 항상 우정과 인간적 속박을 위태롭게 하는 것과 함께 간다. 진리와 인간적 속박은 둘 다 살아있는 필요 속에 뿌리 내리고 있다. 그러므로 인간적 속박이 진리를 방해한다면, 제도적 거짓말을 유지하는 다른 진리, 즉 반진리를 정확히 알지 못하는 한 어느 쪽을 따르지를 결정할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의 진리는 또 다른 진리에 비추어 측정되어야 한다. 306

진리를 무기로 사용한다는 것은 진리임이 발견되어 온 것을 말하는 것 뿐만 아니라 우선 이러한 특수한 진리가 왜 전에 발견되지 않거나 언급되지 않았는지를 아는 것을 포함한다. 그것은 기술적인 또는 과학적인 지식의 부족 때문이었을 수 있다. 그것은 또한 그러한 진리를 아는 것이 중요한 제도적 또는 구조적 구성체를 위험하게 할 것이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그러므로 하나의 진리를 선언하기 전에 이러한 진리에 대한 방해물을 알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러한 진리회피, 자유행상의 방식에 의해서, 즉 진리를 구원이라고 주장함으로써만 중화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정확히, 제도적인 거짓말보다도 진실함 삶을 정립하는데 훨씬 더 나쁜 것이다. 306

인간에 대한 지식의 발전과 더불어, 기독교 교회에 의해 유지되는 그리스도에 관한 반진리가 천천히 녹아 없어지며, 그리스도의 의미에 관한 충분한 진리는 성숙하여 세상에 나온다. 인간 속에있는 우주에너지가 삶에너지로서 기능하는 것과 인간의 우주적 뿌리내림이라는 측면에서 신의 의미를 실현하는 것은 종교와 지식 사이의 틈을 상당히 연결해 왔다. 우리는 아주 오랜동안 인간의 정신적 실존을 인간의 생물학적 실존으로부터 구분해온 공통분모에 막 이르고 있다. 311

당신에게 타당한 특수한 진리를 발견하는 데는 하나의 공통적인 타당한 규칙만이 있다. 그것은 당신 자신에게 신중하게 듣는 것을 배우는 것이며, 당신에게 당신의 것이지 다른 사람의 것이 아닌 당신 자신의 방식을 발견할 기회를 주는 것이다. 모든 진리는 살아있는 삶의 기능이며 살아있는 삶은 진동에 의해서 움직이는 모든 것 속에 있는 기본적으로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인류의 모든 가르침 속에 있는 기본적인 진리는 같고 오직 하나의 공통적인 것에 이른다. 즉, 당신이 진실로 사랑할 때 또는 당신이 창조할 때 또는 당신이 당신의 집을 지을 때 또는 당신이 당신의 아이를 낳을 때 또는 당신이 밤에 별을 볼 때, 당신이 느끼는 것에 대한 당신의 방식을 찾는 것. 304

들에 있는 씨앗이 잠재적으로 거기에 있는 것처럼 진리는 아직 기꺼이 행동하지는 않는다. 가움과 얼음 얼게하는 추위는 씨앗이 있는 곳에서 발아를 중단시킬 수 있으며 과일을 맺지 못하도록 막을 수 있다. 전염병은 진리의 씨앗이 열매를 맺지 못하도록 하는 얼음얼게 하는 추위이자 가뭄이다. 전염병은 진리가 살 수 없는 곳에서 지배한다. 그러므로 눈은 묘목이 무엇을 할지 또는 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보다 가뭄과 추위의 예방에 진리에 대해서가 아니라 전염병에 일차적으로 집중해야 한다. 묘목은 삶을-주는-태양을 향해 가는 자신의 길을 알 것이다. 305

진리는 환경뿐만 아니라 자신과 충분한 접촉을 의미한다. 진리는 다른 사람의 방식과 구별되는 자기 자신의 방식을 아는 것을 의미한다. 동료에게 그가 살아갈 수 없는 진리를 강요하는 것은, 그가 지니고 다닐 수 없는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그의 실존을 위태롭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비참할지라도 잘 정돈된 생활방식의 균형을 깨는 것을 의미한다.292

진리는 지각하는 '살아있는 것'과 지각되는 '삶'사이에 충분하고 직접적인 접촉이다. 그 접촉이 좋을수록 진리의 경험은 더 충만하다. 살아있는 지각의 기능들이 잘 조정될수록 진리는 더욱 포괄적이다. 그리고 살아있는 지각은 살아있는 원형질의 움직임의 조정 정도에 따라 정확하게 조정된다. 그러므로 진리는 '살아있는 것[사는것]'과 살아지는 것 사이에 상호작용하는 자연스런 기능이다. 진리는 당신 속에 있고 당신 속에서 작용한다. 진리를 살아간다. 291

철학,종교,정치적 규정의 미로에 인간적 삶에 대한 새로운 교리를 추가하는 것은 바벨탑의 건물에 또 다른 혼동조각을 덧붙이는 것을 의미한다. 과제는 새로운 생활철학의 구축이 아니라 관심을 헛된 교리에서,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모든 교리는 왜 지금까지 실패해 왔는가? 하는 하나의 기본적인 질문으로 바꾸는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자리잡고 있는 인류의 질무에 대한 대답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 태어나지 않은 우리 어린이들이 올바른 방향에서 찾을 길을 열어줄지도 모른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어린이가 관심의 초점이 된다. 그것은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인류의 공통적인 작동원리다. 335



삶은 자신의 길을 살 뿐이지, 누구에게도 그의 길을 어디로 가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삶은 자신의 일이 아닌 것에는 개입하지 않는다. 이것은 삶의 위대함이다. 일단 발견되고 이해되면, 삶은 자신으로부터 생기는 모든 것을 지배하게 되어야 한다. 그것은 결코 신이나 기독교의 애초의 의미와도, 사회주의의 진정한 애초의 의미와도, 인간의 삶, 자유, 행복을 향한 어떤 다른 진정한 노력과도 불일치하지 않는다. 삶-자유-행복을 향한 열망과 노력은 오늘날 서로 망하고 있는 인간의 정치조직들의 모든 분파의 공통분모이다. 삶은 그 자신의 성격상 모든 경계, 모든 작은 접경, 모든 관습장애물, 모든 민족[국가]적 제한, 모든 인종적 편견을 넘어선다. 330

삶이 무엇인지 그리고 삶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배워라. 결국 지금까지 당신이 황제와 공작과 지도자와 이념과 명예와 부와 단명한 조국과 모국을 위해서 싸워온 대로 삶을 위해서 싸워 봐라. 결국 삶을 위해서 싸우기 시작하라. 그리고 정직하고 열린 얼굴의 표현과 뱀같고 성격학적으로 거짓말쟁이의 표현을 구분하는 것을 배워라.321

진리는 삶의 손에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이다. 무기를 사용하는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적을 알아야 한다. 행복과 건강과 삶의 방식을 아는 것이 행복과 건강과 삶을 증진시킬 수 있을 뿐이지 결코 파괴하지 않을 것이듯이, 삶의 진리에 관하여 더 많은 진리를 아는 것도 삶을 진전시킬 뿐이지 결코 파괴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진리는 병든 삶의 손에서는 삶을 죽일 수 있는 폭발물이다. 병든 삶은 자신에 관하여 진리를 사용할 수 없으며 자신의 병을 죽일 수 없다. 그러나 병든 삶은 다른, 행복한 삶을 죽이는데 삶에 관한 진리를 사용할 수 있다....건강한 삶은 썩은 삶, 유해한 삶에서 좋은 삶을 결코 만들어 내지 않을 것이다. 유해한 썩은 삶은 그러하며 그래서 다른 어떤 것보다도 좋은 살아감을 더 심하게 미워한다. 316-7


희망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있는 것 사이의 틈은 어쨌든 인민으로 하여금 새로운 생각을 짐으로, 그들의 비이동성과 죽음을 끊임없이 생각하게 하는 것으로서 느끼도록 강요한다. 욕구 뒤에서 지체하고 절룩거린다는 이러한 느낌은 새로운 것, 움직이는 것, 자극하는 것에 대한 미움으로 틀림없이 발전한다. 이와 관련하여 살아있는 모든 것에 대한 미움은 파멸된 인간 쪽에서는 합리적이다. 새롭고 움직이는 생각은 인민으로 하여금 그들의 정서적 안정과 안전에서 곧바로 벗어나 움직이게 한다. 여기서 보수주의는 합리적으로 된다. 이러한 안전은 그것이 비록 인간을 둔화시킬지라도 인간의 실존에 본질적이다. 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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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 삶의 바깥에는 아무 것도 없다
    from 木筆 2009-06-28 23:46 
     로쟈의 철학페이퍼 01, 02 꼭지 참조 -  철학계의 아인슈타인 니체는 신은 죽었다라고 했다. 여기서 신이 뜻하는 것은 어떤 인격체가 아니라 초월적 의미다. 우리에게 주어진 것, 즉 이삶을 넘어서는 , 혹은 이삶의 바깥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그 선언에 함축돼 있다. 먼댓글의 글을 읽다보면 신이라는 것을 삶의 흐름이라고, 삶을 대위한다.   없는 것을 있다라고 하는 이데아의 철학에 대비하여 가족이 세상의 전부라고
  2. 진보도 단순한 진영논리에서 벗어나야 한다
    from 木筆 2009-08-30 16:14 
    [황해문화 가을호]의 권두언과 소설과 만화, 시, 한윤형의 글을 보다. (상품이 없다.)             >> 접힌 부분 펼치기 >>  진리의 도구를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반진리 counter-truth를 능숙하게 알아야 한다.(1) 문제는 왜
  3. 삶을 결여한 논리 DNA
    from 木筆 2010-07-17 17:23 
    말의 DNA, 논리의 DNA - 방사선조사식품에 관련하여 작은 강연을 이어듣는다. 피곤의 누적이다.들으면서 기술-경제논리가 결합하여 말을 만든다는 느낌이 든다. 안도현의 연탄재가 아니라 연탄이론이, 탄음식이론 등으로 기존 관념을 전도시키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 싶다. 그런데 그 말의 DNA는 경제의 매듭만 있고, 모든 다른 논리를 숨겨버려, 다른 논리를 복속시키고 있다. 기술을 먹어치우고, 과학을 자양분으로 해서 만든 논리는 다른 담론의 DNA를 괴멸시켜
 
 
 

 

1. 치과에 들렀다가 우연히 옥살이를 한 모국장님을 뵌다. 1년반의 옥고와 책읽기. 하지만 현실과 단절은 여러모로 소통의 왜곡점을 발생하게 하는 것 같다고 한다. 촛불이란 공간. 지나감으로 인해 달라진 것을 지금있는 다른 사람들은 못느끼지만 공간의 단절을 경험한 분의 시선엔 확연하다고 한다. 고향친구나 활동하는 분들, 회의란 공간은 엄연히 다른 모습을 보인다한다. 세상이야기하지 않던 친구들의 입에서 헌법이야기가 나오는 것도 그러하고, 불쑥불쑥 섞여있는 단체간의 회의모습도 그러하며, 문득 공간의 바다를 경험한 지금우리는 다이나믹한 과정을 거치긴 거쳤다는 느낌이 그로 인해 든다. 호불호의 판단은 경계하지만 달라진 지점은 그대로 인식할 줄 알아야 한다는 점. 

2. 절주의 나날. 조금 몸이 챙겨지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강연으로 광주에서 동행한 분의 고마움 덕에 달님도 하구. 오랫만에 집안일도 이것저것 챙긴다. 마음공백도 몸공백도, 야단 덜 들을 요량으로 근신중이다. ㅎㅎ 어젠 동네 인근을, 오늘은 자주구름터에 목련행렬을 보러 다녀오다. 오랫만의 해후라 맘이 뭉클해진다.  



3. 짬짜미 [그리스도의 살해]를 마저보다. 일월서각의 [작은사람들아 일어서라]라는 라이히의 희귀본도 있다. 푸른골목에 말이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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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 사 ㄹ ㅁ. 아 ㄹ ㅁ.그 공약수와 공배수. 활발한 모임들과 교육, 화려한 강사진과 성찰과 소통에 대한 많은 기획과 행사들. 그 흐름들이 잡고 가는 것들, 섞고 가는 것들은 무엇일까? 뜨거운 교감의 경로를 통해 서로 나누어지는 것은 무엇일까? 강연소비자로 더 더 강한 강연자만 찾는 것일까? 그러다보니 강연평론에 익숙해지는 것일까? 그런 앎이 나의 삶과 어떤 공약수가 있는 것일까? 약발이 떨어졌으므로 또 들어야되는가? 삶과 앎을 따로 떼어낸 것이 어제 오늘일이 아니기에, 앎을 삶에 접속시킨다는 것 자체가 무리가 될 수 있는 것일까? 삶이란 도식이 흔들리는 것일까? 앎을 매개로 사ㄹㅁ의 간극은 움찔하게 되는가? 삶의 머리 속에 아편처럼, 아니면 일용할 양식처럼 주입될 뿐, 요지부동인 살음은 별반 달라질 것이 없다.  

인문을 부여잡는 강연의 주제는 유명세인가 삶의 결을 세세히 확장할 수 있는 공감의 노력인가? 더 쎈 앎, 더 강한 강연자의 끌림을 요구하는가? 아무것도 달라지는 것 없이 높아지는 눈은 또 다른 불감인가? 내 속에 갇혀있는 앎이 흔들려 요동치는 것인가? 그리고 그 앎이 나의 삶의 근저를 따듯하게 만들거나 나의 동선 속에 있는 일상을 다시 다른 눈으로 보게하는가? 그 따꼼한 소리에 명민해지는가? 가까이 있는 너-나로 예민해지지 못하는 나의 삶만이 아니라 나-너의 삶으로 같이 흔들리지 않는 그저 따라만 유행의 바다처럼, 인문의 단맛만 한차례 흘러내려가는 것이라면, 나의 뿌리깊숙히, 너의 뿌리깊숙히 연결짓지 못하는 앎과 삶의 언저리에도 가지 못하는 것이라면 그저 황수관류의, 또 다른 건강강좌에 별반 비견할 것이 없다. 

앎과 삶의 연장. 확장. 안온한가? 평안하기만 한가? 그 역시 작고 얕아지고 분권이 되지 않으면 현실에서 교감과 현실의 삶의 결 나누기로 이어지지 않을 확율이 크다. 고민은 대행이 되는 것이 아니므로, 고민의 결이 모여 현실의 바다에 해본 것도 한번 없으므로, 그저 아련한 추억으로 향수처럼 흘러갈 확율이 크다. 그렇지 않기로 했음에도, 너도 나도 기획의 전제에 대한 기억은 없다. 그래도 없는 것보다 있는 것이 낫다는 것이 맞기도 하는 말이지만, 우려는 [왜]하는지보다 그저 유행된 [소통]과 [연대]처럼 빠른 속도로 현실을 통과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하는 우려때문이다. 

아무도 유명강좌나 강연회에 까끌까끌하거나 밤톨같거나 현실의 삶으로 농축되는 어떤 다른 것이 얕아보인다. 아무런 연결에 대한 기획이 없는 것 같다. 기우이길 바라지만 어디서나 강좌인데 그 숨결이 진해보이지 않는다. 그냥 하면 낫지 않을까? 막연한 것은 아닐까? 상흔마저, 상흔을 배후한 독식의 흐름. 그저 우연한 접촉점 이상도 아닌 것 같아 불안하다. 지나가는 길에 맛난 음식을 먹거나 좋은 구경했다는 정도의 인식. 우려의 그물로만 기획이 자라는 것 같다. 없는 것 보다 낫다는 것에 동의하지만, 깊어지지 않는 기획이란 늘 제일 우려스러운 것이 단맛이 빠지면 더 이상 거들떠보지 않는다. 너도하고 나도하는 것도 좋지만, 접촉점의 사람들과 교감도 앎도 삶도 별반 까칠함이나 다른관점이 섞이지 못하는 경험은 그 뒷일이 우려되기 때문이다. 

주제의 전환과 구체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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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쁨이나 보상 같은 것들에 대해 시장이론가들이 떠올리는 기본적 이미지는 공적이고 사적인 향연에서 나누는 음식이 아니라 홀로 앉아 음식을 먹고 있는 인간의 모습인 것이다. 사랑을 나누거나 콘서트에 가는 것, 심지어 게임을 하는 것 같은 그런 경험들만 생각해 보더라도 우린 이런 경험들에서 비롯된 쾌락이론이 시장이론가들의 그것과 상이한 것인지를 쉽게 상상해볼 수 있다. 557

대부분의 철학자들이 실재를 물질로 구성된 것으로 간주하면서 "힘", 잠재성, 잠재력 등으로 부른 것들, 즉 대부분의 실제 생활 혹은 "미결정적" 상황들 속에서 궁극적으로 예측할 수도 없고 또 재현되지도 않는 그런 요소들은 간과했기 때문에 물리적 실재를 설명할 타당한 이론을 제시하는 데 실패했다고 주장한다.

일상적 지식으로는 미처 꿰뚫어 볼 수 없는 문제들의 이면으로 우리를 안내하곤 하는 사회이론이 어째서 이렇게 상식적인 해결이 존재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정작 우리의 시야를 더 흐리게 만들고 있는 것일까? 이런 상황에 대한 책임의 상당 부분이 사회 혹은 문화라는 개념 뒤에 숨어 있는 파르메니데스적 관점에 놓여 있으며 바로 이것이 우리를 사회적 형식과 개인적 행위 동기 사이의 풀 수 없는 패러독스를 이끌고 있다. 549

시장원칙에 기초한 이데올로기의 가장 결정적인 영향력은 그것이 사회로부터 욕망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 일체를 제거시키고 행복을 단지 사물과의 관계로만 사고하게 만드는 순간 행사된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식의 자가당착적 이데올로기가 오랫동안 우리를 지배해 온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이런 상식으로 질문할 수 있는가? 논리를 허용해서 아무런 준비없이 그저 이끌려가는 것은 아닌가?) 551

욕망이론이라기보다 좌절된 욕망의 이론은 아닌가? 우리가 실재라고 부르는 것 역시 이런 욕망들 혹은 에너지의 부수적인 효과뿐이다. 욕망에 대한 별도의 이론이 필요하지 않다는 사실에 대한 선언이라 할 만하다 553

구조라고 부르는 것이 일련의 고정된 형식이나 원칙이 아니며 사회구조 내의 행위와 그 변화가 조직되는 방식일 뿐이라는 것이다. 모종의 규칙에 해당되는 것들을 더 이상 의식하지 않는 방식으로 행해질 때 진정 성공적인 것으로 평가받기 때문이기도 하다. 자신을 은폐하는 데 성공하는 규칙들, 바로 그런 규칙들이야말로 그 유용성과 완성도를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이다. 554

 
   

 뱀발. 줄을 그어놓거나 접어놓은 부분들을 다시 적어둘 짬이 나지 않는다. 거꾸로 마지막 흔적부터 되돌아오다 중동나버렸다. 주장이 파격적이다 못해 시원시원한 구석도 있고, 평소 궁금증에 대해 원하던 바이기도 해서인지 잘 읽히기도 했는데, 조금더 흔적을 남기고 새겨볼 요량인데, 과연 남길 수 있을지 모르겠다. 급한대로 남겨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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