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뇌의 원근법-고흐편을 본다. 남자들의 문화심리학을 보면 원근법이 나온다. 소실점을 달리하면 관점이 바뀌어지는 것이라고, 사람은 쉽사리 변하지 않지만 맥락 속에서는 쉽게 바뀐다고 그러니 맥락에 자신을 담그면 변한다고, 재미와 놀이를 이야기하되, 고뇌는 사멸된 원근법이다. 서경식님은 원근법보다 고뇌에 방점이 찍혀있다. 똑같은 이야기를 하지만 연결되어 있는 끈과 맥락은 현저히 다르다. 그러니 같은 이야기를 하면서도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 현실을 보는 두가지 차원이 생긴 것이다. 그렇지만 고민을 엮지 않는다. 성철스님 백일법문집을 얻었다. 일목요연하게 흐름을 살필 수 있어 기쁘기 한량없다. 아침 이십여분씩 보고 있는데, 중도라는 것이 나온다. 양변은 없고, 불교에 대해, 학문에 대해..그러다보니 인도를 전공한 학자의 우리의 불교학이라는 책은 맥락을 고스란히 간직한 점에서 문외한이지만 문외한이 아니다. 

 

잠시 기차에서 우리시대의 그림책 역사를 보았다. 진화론적 방식에서 기술하였는데 눈에 거슬르지만 볼만하다. 일러스트레이션 화가의 역사와 맥락에 대해 알 수 있어 좋기도 했다. 다른 나라 몇군데는 어설피 알고 있지만 조금 더 관심이 가기도 한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제, 자립과 이기와 욕망의 윤리학에 대한 이야기라고 여기지만 세세히 들어가보자. 

페어플레이는 아직 이르다엔 끔직한 사진이 나온다. 효수장면이 어찌 그리 선명하게 잡히는지. 그리고 엄두가 나지 않아 세세히 읽기도 겁이 나지만 노신의 숨결을 들여다보고 싶어 박홍규책과 함께 구입했다.  

 

페어플레이는 아직 이른데, 시집 고양이가 돌아오는 저녁은 볼만하다. 그러다보니 제목들과 책들이 색들이 글처럼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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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부사적 정서와 삶의 방식
    from 木筆 2009-07-25 00:40 
    1. 화가의 신체성 고흐의 터치가 변화한 것이 그런 변화가 나타나는 것이 흥미롭다고 말했다. 실제로 작품을 보면 엄청난 힘과 품이 들었음을 알 수 있다. 단시간에 그린 그림과 달리 그가 "밭을 가는 것처럼"이라고 말한 것처럼 구불구불 굴곡을 만들며 그린 것이다. 한 번의 '구불'마다 생명이 깎인다고 할까, 깎인 생명이 캔버스 위에 쌓인다고 할까. 그런 변화는 아를시대부터 나타나기 시작해 생레미 시대에 전면적으로 드러난다. 그것은 화가가 신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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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몸에 감기는 것이라곤 불감의 기술. 불감은 살아낼 궁리로 이어져 살지 않고 살아지는 삶. 불안을 생산하고 제조하고 갇힌 나는 우걱우적 그것만을 받아먹는다. 이미 씨없는 쾌락만 먹고 싼다. 너로 넘어설 수 없는 금단의 열매만 먹는다. 타들어가는 목. 나는 그칠 수 없다. 이미 세상에 중독되었으므로, 내몸은 담금질 되었으므로. 나를 넘어선 그 무엇도 경험해본 적이 없으므로. 세상은 거울 속에 갇힌 나만 있을 뿐, 거울밖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  

체념하지 않고 몰락하지 않는 절대나만 있으므로 섞지 않아 살아낼 수 없다. 영원히 너는 없으므로. 너에게서 불감과 불안과 냉소만 받아먹었으므로. 나는 할 수 없다. 나는 살 수 없다. 체념도 몸에 묻혀 너로 넘어가는 다리. 사그라지는 것도 너로 넘어가는 길. 체념하고 몰락하는 것이 인간이라면 나는 예외가 될 수 없다. 나만은 고독하지 않을 수 없다. 너를 빌리지 않을 수 없다. 살아지지 않고 살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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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조급의 근원- 그대의 삶에 눈여기지 않고 혼자 뭘해야하므로" 090711-1047. 무엇을 해야한다는 강박은 늘 삶의 언저리였던 것은 아닌가? 삶에 한번도 정면도전해보지 않았으므로 무엇은 늘 강박처럼, 나의 조급함으로 끝났던 것은 아닌가? 아니면 나를 너에게 대위하면서 스스로 소멸했던 것은 아닌가? 삶을 용감하게 들이밀지 않았으므로 늘 다른 것에 안방을 내어주었으므로, 기껏 그것이 뱉어놓는 것은 추억의 여운은 아니었을까? 끊임없이 그리운 것이 저 뒤안길에만 있어 퇴행했던 것은 아닐까? 저만치만 향수병처럼 그리움은 멀어졌던 것은 아닐까? 

2. 

" 삶은 추억으로 그리운 것"090711-1115이 아니라 삶은 충만으로 밀어내거나 만들거나 한 것인지도 모른다. 향수가 늘 그리운 것은 좋지 않던 기억들을 추려내고 간직하고 싶은 것만 남겨놓는 시간 속에 있기때문인데, 혼자 삶에 지룃대나 환하게 하는 어떤 것이 있다면, 시간의 독설을 넘어설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 삶이란 것이 혼자 속에 갇히는 것이 아니라 삶들이 서서히 연결되기를 바라는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광막한 불안의 늪을 조금씩 안전모드로 만들어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살아내는 것이 아니라, 추억의 미련에서 갇히지말고 살아가는 것이라면 가급적 확율을 높이는 삶이 필요하지도 모른다. 동지의 마음 속과 삶의 동선을 과감히 거닐며 말걸다, 마음섞다보면 말이다. 

3. 

"삶과 추억 그리고 자유등급"090711-1127 아마 자유를 떼어놓고 등급을 붙인 것을 보면, 추억하는 것도 삶이 될 수 있겠지만, 삶의 질로 볼 때, 그다지 바람직하지 못할 것이다. 불안과 욕망에 대한 강박은 삶을 살아내고 끊임없는 좋은 기억의 반추로 머물 것이다. 삶은 닫혀있을 뿐 열려있지 않다. 자유가 숨쉴 공간도 그물도 없다. 불안과 초조에 대해, 그나마 쩐으로 인한 사고먹고의 자유만 있을 뿐, 자신이나 너-나의 자유공간도 없고, 준거의 삶공간도 없다.

4. 

그리고 나머지 메모이유 "낚시오감"0022"문화십대 만드는 것일뿐 시간강박"0032"유지풀의 이유"0038 시간의 간극, 기억이 희미해져 왜란 낚서흔적도 혼란스럽다. 모임의 2세들이 자리를 차지 하고 불쑥 커버린 것이 아니라, 어른스러움이 보태져 든든함에 연유하는 것일까? 아니면 녀석들이 비집고 들어선 자리를 그대로 물려줘야한다는 존재감이 자리를 잡아서일까? 벌써 어른이 아이들의 얼굴에 들어서고, 즈문동이들은 낯을 가리는 나이가 되어버렸구. 삶의 반추가 아니라 5년뒤, 10년 뒤, 15년의 삶은 어떻게 이어질지? 생길지 박장대소하는 경험의 공유, 몸의 공유를 키우는 어른들. 이렇게 살기엔 밋밋하지 않은지? 추억으로만 간직하기엔 좀 그렇지 않은지?  

뱀발. 

(1) 삶의 동선이 많이들 겹쳤으면 좋겠다. 삶에 문외한이 아니라 간섭되고 섞이더라도 조금 더 고민이 불감이나 외면의 철면피같은 현실을 뚫고나가, 외면이나 불감보다 더 쉬운, 더 좋은 추억거리는 그저 주어진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좀더 팍팍하기보다는, 좀더 풋풋한 시도들이 곁들여졌으면 좋겠다. 날것같더라도. 

(2) 모임의 뒤끝, 일찍 시작한 모임들이라 헤드뱅잉하는 플라타너스와 바람소리, 시골학교의 공간은 점점 수다와 놀이로 저물어간다. 모임사이 몸으로 부딪치는 생각들을 잡아놓으려고 메모장에 남겨두고 다짐을 하는데, 취지는 점점 상형문자의 난독으로 이어진다. 근 15년이상의 몸의 공유이다. 매년 한번씩 맘에 들지 않은 구석들이나 해보고, 나누고 싶은 말들이 많던 때, 벌써 아이들이 어른이 되어가고, 어른들과 벌써 말이 필요하지 않는 시간이 되어버렸다. 가족!  아니 가---족----나----너---.....그물같은 일상, 나누지 않아도 나눌 수 있는 사이. 그래도 나눈 것이 많지 않다. 삶은 늘 녹록치 않으므로... ... 비껴서지말자 하면서....뒤끝을 남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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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마츄어같은 생각낱장을 올려놓는다.  회비라는 것이 혹세무민-장삼이사가 좋아할 수 있는 쩐을 포함하되, 몇가지 생각 규칙을 정해두는 것이다. 이를테면 지금보다 더 알게되었다거나 더 나은 관계를 유지하게 되었다거나 하는 유무형의 것을 말한다고 하자. 그런데 지켜야 될 약속은 그렇게 쩐을 포함하여 얻게된 관계와 작업을 통해 얻은 것은 혼자 꿀꺽하면 암튼 그날부로 제명되거나 문밖으로 나가야 한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거꾸로 그렇게 얻게된 앎이나 관계나, 행동이나, 맥락이나, 상황들은 삶 속에 드러나야 한다는 것이다. 아마 족보. 언제 그 사람과 어디서 논쟁하다 얻은 생각씨인데, 그 생각은 내 속에 들어와 이렇게 증폭되어 이렇게 쓰이거나 표현되었다라는 추상도 괜찮고, 정말 아끼던 시집인데, 그 시집이 선물로 보내져, 장마비 내리는 어느날 심금을 울렸던 적이 있는 것이었는데, 그 시집은 누구누구를 거쳐 누구의 선물로 있다. 거나 똑같은 천원이 아니라, 몇끼를 굶은 상황에서 사랑하는 님을 위하여 아낀 천원은 마음이 굶주리던 차에 시집이나 차 한잔을 마시기 위해 쓰여졌다하고 하는 관계의 내력이 드러나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회비란 애초의 흔한 생각에 몇가지 덧칠을 해본다. 꼬치도 끼워보고, 꽁짜로 얻은 것 같은 것은 절대 혼자 인마이포켓하면 안되고, 드러나야 한다는 사실을 명심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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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091012 죽음, 자유 그리고 사회
    from 木筆 2009-10-13 14:34 
    [칼 폴라니로 가는 여러 산책길에 대한 소묘]란 주제로 텍스트 [초국적자본주의인가 지역적계획경제인가]에 다른 색깔들을 배경삼아 자료를 만들어본다. 가장 잘배우고 알게하는 방법은 가르치는 것이란 말을 실감한다. 시간의 흐름만큼이나 책들이 섞여 어디에 기록했는지도 깜박한다. 어쩌면 하고싶은 이야기는 산책길에 나서기전 준비사항에 있다. 경제인이란, 이분법에 의한 근대인, 직선적인 시간관이나 발전관에 녹아있는 우리는 다른 것을 상상하기 힘들다. 블로그의
  2. 마음과 사람의 거래를 주장하며
    from 木筆 2010-01-12 09:15 
    폴라니의 경제인류학의 한 장면 가운데 그러한 구절이 있다.  "   "   100112 관계를 통해 얻게된 유무형의 것의 내력을 말하거나 남기는 것은 단순한 돈이나 이익의 관점을 넘어선다. 열정같은 뜨거움, 이성의 날카로움, 그리고 밋밋한 일상에 다른 사람의 향기가 배이게 만드는 새로움으로 이어질지 모른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무형의 것을 복식부기처럼 투명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자본이 그러한 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