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거나 읽고 있는 책

1. 화가의 신체성

고흐의 터치가 변화한 것이 그런 변화가 나타나는 것이 흥미롭다고 말했다. 실제로 작품을 보면 엄청난 힘과 품이 들었음을 알 수 있다. 단시간에 그린 그림과 달리 그가 "밭을 가는 것처럼"이라고 말한 것처럼 구불구불 굴곡을 만들며 그린 것이다. 한 번의 '구불'마다 생명이 깎인다고 할까, 깎인 생명이 캔버스 위에 쌓인다고 할까. 그런 변화는 아를시대부터 나타나기 시작해 생레미 시대에 전면적으로 드러난다.

그것은 화가가 신체성을 자각해가는 역사이다. 그림을 그리는 힘의 강약이 신체에 전해져 화가에게 들어오는 것이다. 부드러운 붓대신 거친 돼지털 붓으로 그리면, 시각적으로도 다른 것이 나오게 된다. 화가에게는 몸으로 전해져오는 감각이 있다. 근대회화는 이 감각을 강하게 의식했다. 그런 감각이 일단 해방되면 거기에 반응해, 힘을 담아서 리듬을 만들 수도 있고 터치로 두께를 표현하기도 한다. 그림물감의 두께로부터 전해져오는 감각을 표현하는 것이다. 화가의 몸이 알아서 반응해하는 식이다.

그림을 그리는 행위가 매우 신체적이라 생각한다.


고흐는 자신의 감각을 끝까지 관철하는 사람이다. 대부분의 사람이 그렇게까지 철저하진 못해도, 끝까지 해봐야 한다는 명제를 부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이건 머리가 시키는 것이 아니다. '삶의 방식'이라고 말하면 마치 자신의 머리로 선택한 것처럼 들릴 수 있지만, 고흐의 원근감과 색채에는 신체화된 '삶의 방식'이 투영되어 있다. 303

고흐는 원근법을 부정하겠다는 생각이 전혀 없다. 원근법을 부정하지 않고 제대로 지키려 했는데, 그만 원근법을 위반하고 뚫고 지나가게 된다. 고흐가 죽고나서 20-30년뒤 대상자체를 제거하려는 시도가 나타난다 -고흐라는 인간 자체가 가진 그런 거리 감각와 인간주의적으로 말하는 고흐 자신의 삶의 방식, 그것도 이념이나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훨씬 신체화된 듯한 삶의 방식. 더럽고 가혹한 자유 쪽으로 기울어가는 삶의 방식과 원근법을 뚫고 나가 저편까지 가버린 시선은 뗄 수 없게 꼭 붙어 있다.

2. 


정서에는 기쁨, 슬픔과 같은 개념적으로 정의할 수 있는 '명사적 정서'만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랑받는 듯한', '가슴 설레는' 것과 같은 '형용사적 정서'도 있다. 그러나 가장 근본적인 정서는 오감을 통해 감각적으로 느껴지는 '부사적 정서'다. 같은 이야기를 하더라도, 그 말하는 속도, 음의 높낮이, 말하는 이의 표정을 통해 전달되는 느낌이 달라진다. - 부사적 정서란 오감을 통해 전달되고 느끼는 정서적 신호를 뜻한다. 같은 말이라도 '아' 다르고, '어' 다르다는 이야기는 바로 이 정서 공유의 부사적 차원을 가르키는 것이다. 마치 '얼씨구'라는 단어가 탈춤에서는 감탄사가 되지만, 일상에서 비꼬는 단어로 느껴지는 바로 그 차원이다.

부사적 정서, 즉 감각적으로 경험되는 정서 공유는 수도관에 비유할 수 있다. 우리가 전달하려는 논리적인 앎은 물이다. 물은 수도관이 있어야 흘러갈 수 있다. 수도관의 한구석에 구멍이 나 있으면 물이 흘러가지 못하고 다 새 나간다. 공유가 가능하려면 바로 이 부사적 정서로부터 활성화되는 정서 공유의 과정이 있어야 한다. 이 부사적 정서가 가장 강하게 활성화되고 공유될 때는 재미 있을 때다.

감정정체를 해결할 수 있는 바람직한 방식은 '내적 민주화'다. 내적 민주화란 자신의 정서적 장애와 결핍증후군을 인식하고 남에게 피해주지 않는 방식으로 해결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위해 많이 슬퍼하고 타인에 의해 진심으로 수용되고 인정받을, 인내의 시간과 공간이 필요하다. 그렇지 못할 경우 편견과 적대감, 폭력의 위험이 생겨난다. 내적 민주화는 '치료적 문화'를 통해 가능하다. 치료적 문화란 함께 정서를 공유할 수 있는 문화를 뜻한다. 강요나 억압에 의해 동참하는 것이 아니라 사소한 정서의 공유를 통한 의사소통 방식이 필요한 것이다. 우리에게 요구되는 가장 시급한 과제는 타인과 정서공유를 통해 내적 민주화를 가능케 하는 문화다.

순종적이며 획일적인 사고에 쉽게 적응하는의존적인 성격의 사람들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사회에서 자라난 어린이는 자신의 가능성과 꿈을 구체화하려는 어떠한 시도도 할 수 없다. 오히려 어릴 때부터 자신에게 주어지는 타인의 눈길을 의식하며, 타인의 기대와 요구를 재빠르게 찾아내는 재주만 발달할 뿐이다. 타인의 요구에만 적응하는 사회화과정은 여타의 심리적 기본 욕구들이 억압되는 결과를 낳는다. 이를 '결핍증후군'이라 한다. 어릴때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란 사람은 이 부족한 부분을 다른 방식으로 채우려고 한다. 다양한 중독현상으로 이어지게 된다. 억압된 삶의 경험들은 '감정정체'라는 결정적인 정서장애로 이어진다.

서양인은 타인의 존재를 항상 '나'의 상대방으로서 '너'다. 한국인의 상호작용은 사뭇 다르다. 나와 너의 상호작용이 서구인들처럼 곧바로 성립되는 것이 아니다. 나와너라는 상호주체의 만남은 무엇보다 먼저 우리와 남이라는 경계선을 넘어야만 가능하다. 남은 상호작용의 상대방이 아니다. 그래서 우리가 남이가?라는 질문이 무서운 것이다. 남은 상호작용의 주체가 될 수 없다. 그래서 무시해도 된다. 관심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건이나 크게 다를 바 없다....그러나 우리라는 경계선을 넘어오는 순간부터 상대방은 너라는 가치를 갖기 때문이다...서구인들과 달리 이 우리 안에 들어있는 너에게 나는 정말 간까지 빼줄 만큼 잘한다. 우리사이는 그래야만 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한국인들의 존재근거가 되었던 '우리'라는 그 울타리가 변형되고 해체되고 새로운 형태의 우리가 만들어져야 한다. 그러나 문제는 지금 그 대안적 우리가 잘 형성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만지고 만져지는 자연스러운 스킨십을 통한 의사소통과정이 박탈당하면서 에로티시즘의 왜곡이 나타났다. 온몸으로 느껴야 하는 상호관계성이 왜곡되고, 건강한 일상의 재미가 사라지면서 자연스러운 정서적 교류가 박탈된 한국 남자들의 의사소통 장애가 더 더욱 근육과 살을 탐하게 된다.
 

뱀발. 어쩌면 우리는 그렇게 말하는 근대도 넘어서지 못하고, 모더니즘도 해본 적이 없는지도 모르겠다. 더구나 이땅의 남자들과 남자가 된 여자들의 천국이기 때문이리라. 나도 그렇게 방점찍고 있는 사람일테고, 점점 울타리는 좁아들고 다독거려줄, 받아줄 곳 하나 없는 곳이다. 그래서 그렇게 간절하게 축구에 동호회, 부나비처럼 모여들고 메뚜기처럼 우리만을 만든다. 너는 안중에도 없고... ...  명사-동사, 부사에 대한 나름의 의미를 잘 정리해둔 것 같아 옮겨 적어본다.  아래책은 저자도 코멘트하고 있지만 심리학적 환원으로 몰아가는 경향이 많다. 현상에 대해 한편 수긍이 가면서도 그에 대한 텃치가 매우 유사하고, 간간이 보이는 편협된 시각도 많이 내비친다.  놀이-재미-문화가 심리적 공감이나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라 연루된 것이 그토록 많은 제도의 시선이 얽혀있기 때문이다.  

책을 두고가서 지금에서야 접힌 부분을 메모해둔다. 시간이 멀어지니 기억이 희미하다. 외려 기억을 상기시키는 시간이 더든다.(고뇌의 원근법) ...회화의 신체화를 말하니 오치균?의 지필유화가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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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거의 인문(酌)

1. 가끔 사람들이 그리워지면, 내 마음이 사람들의 울타리 안에 머물고 있는지? 몸이 썰물처럼 밀려나가고 마음만 온전히 남게 되면, 마음 속엔 온통 사람들이 머물고 있음을, 그리워지는 사람들이 그렇게 서성거리고 있음을 느낀다. 내 머리가 아니라 내 몸이 그렇게 사유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그래 이렇게 생각 속에서만 배회해서는 되지 않는 것이란 것.


2.  그런데 블로거들의 일상을 들여다보면 교차되지 않는 동선, 마음의 그림자만 보여 불안하다. 삶의 동선에서 교차되지 않기에, 그게 뭐 대수인가라고 하지만, 마음들이 울타리안에 머물러 그 마음의 빗물들이 웅덩이에 고이지 않나 싶다.


3.  가끔 머리, 가슴, 몸, 손, 발을 따로 보고 거기에 꼬리말을 붙인다. 머리의 연대, 가슴의 연대, 몸의 연대, 손의 연대, 발의 연대로 말이다. 그러다가 머리(만)의 연대, 가슴(만)의 연대, 몸(만)의 연대, 손(만)의 연대, 발(만)의 연대로 이어가다보면 아프다. 그런데 일상이 그렇게 섬처럼 인지되고, 그 섬을 당연히 여기는 것이 아닌가 싶다. 현실의 진동을 넘어서지 못하고, 그 벽의 자장안에 더 강하면 강할수록 힘들어지는 그런 상황에 가슴이 미어진다.

4. 블로거들의 인문은 벽을 트지 못한다. 갇힌 회로나 갇힌 곳으로 소용돌이의 나선을 그리며 소멸한다. 생활의 자장에 갇혀, 나에게 갇혀 삶은 블로거의 밖을 외출하지 못한다. 빈약한 손과 발. 무서운 속도의 자장. 생각의 과속은 또 다른 색깔을 희석한다.

5. 하지만 누군가 물음을 댈 것이다. 여유가 없으므로 여유가 밀고가지 못하므로 인문은 더 여유없다라구.

1. 그럴까?

2. 삶의 여유가 없다라고 여기나 삶과 여유를 따로 떼어놓고 보면, 연애란 것이 삶의 여유가 있다고 많다고 되는 것도 아니니 그건 핑계의 한부류란 느낌이 든다. 그러니 아마 그것은 머리가 하는 일이 아니라 가슴이 하는 일일 것이다. 가슴이 차가운 사람들의 모임이겠다 싶다. 머리만 끓어넘치는 것은 아닌가?


3. 음주의 잔향은 깊다. 마음을 깊게하거나 들뜨게 만들고, 생각할 엄두를 내지 않던 길을 가게 한다. 그래서 약물복용은 또 다른 진폭을 만들고, 가끔은 이해되기도 한다. 중독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아무래도 불특정다수블로거에 대한 연민이 아니라 아마 연애들을 하고싶은가보다. 사람들과 관계하고 싶은가보다. 마음 속에, 밀려나간 몸 속에 꿈 속에 사람들이 남는 것을 보면, 사람들을 그리워하는 것을 보면, 사람들을 궁금해하는 것을 보면... ...

4. 그러다가 마음을 내민다. 머리만, 가슴만, 몸만, 손만, 발만이 아니라 만을 빼내고 (도)를 들이민다. 머리도, 가슴도, 몸도, 손도, 발도. 그래서 머리-가슴-몸-손-발의 그물에 갇히고 싶다. 그 그물에 드러누어 한여름을 보내고 싶다. 해변가 야자수 그늘에 느긋한 낮잠을 즐기고 싶다. 그대도 옆에 눞고 싶은가? 우리는 (만)의 시대에 지치도록 살고 있다고, 그대는 느끼는가? (도)의 시대가 열리지 않으면 (만)의 늪에서 당신의 삶을 소진될 수 밖에 없다고. 당신은 아는가? 당신은 머리가 커서 이미 손과 발이 퇴화되었는지 모른다고, 눈으로만 느낄 수 있다고, 감각이 소멸했고 더 이상 즐거움의 촉수가, 신경이 발라비틀어졌다고... .. 

뱀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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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노신

느낌의 단편들 - 누더기를 걸친 자가 지나갈 때마다 발바리가 짖어대는 것은, 알고보면 번번이 개 주인의 의도나 사주에 의한 것은 결코 아니다. 발바리는 왕왕 그 주인보다 더 사납고 지독하다. 


한때 떵떵거리던 자들은 복고를 주장하고,지금 떵떵거리고 있는 자들은 현상유지를 주장하고, 한 번도 떵떵거려보지 못한 자들은 혁신을 주장한다. 대체로 그렇다. 대체로! 그들이 말하는 복고란, 그들이 기억하고 있는 몇 해 전으로 되돌아가자는 것이지 우,하,상,주의 시대로 되돌아가자는 것은 결코 아니다. 
 

 사람은 적막을 느낄 때 창작할 수 있다. 정갈을 느낄 때 창작은 나오지 않는다. 그는 이미 사랑하는 것이 하나도 없으니까. 창작은 사랑에 근거하기 마련이다. 양주에게는 저서가 없다. 창작은 자신의 내면을 서술하는 것이라고들 하지만, 보아줄 사람을 바라기 마련이다. 창작은 사회성을 지닌다. 그런데 어떤 경우는 한 사람으로도 만족하는 경우가 있다. 벗이나 애인.

2. 불교학과 불교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과 비견하여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던 문헌학은 로마시대, 중세의 신학적 부활과 재건에 봉사하면서 역사의 연대를 통해 성장하게 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문헌학은 예술의 차원에서 비판적이고 과학적인 차원으로 부상하게 된다. 다시 역사학과 문헌학의 관계는 르네상스에 이르러 더 공고히 된다. 영어로 문헌학 philology은 "배움과 문학에 대한 사랑"을 의미한다. 1716년에서야 '언어의 과학'이 되었고 18세기 말 독일에서 그리스 세계의 "과학적 연구"를 의미하게 되었을 대 비로소 언어에 대한 학문이라는 정의를 갖게 된다. 문헌학이 언어학적 변모를 거치는 것은 산스크리트의 발견으로 인한 비교언어학의 시작이다.(1786년)

르낭 - 문헌학이란 정신적 사물을 대상으로 하는 '정밀과학'이다. 여러 인문과학과 문헌학의 관계는 물체에 관한 여러 철학적 과학에 대한 물리학과 화학의 관계와 마찬가지다. 61

한일 불교학의 근대화에서도 커다란 차이를 보인다. 일본은 불교학의 근대화에서 학문의 제도적 인프라를 택했고, 조선은 사람을 선택했다. 양자의 차이는 장기의 말판과 말의 관계와 같다. 말판과 말은 둘 다 장기를 두는데 필수적인 것이다. 하지만 그 학문의 장기적 전망으로 볼 때, 차이의 결과는 상상할 수 없다. 장기 말이 없어지면 다른 물건으로 대체해서 게임을 계속할 수 있지만, 장기판의 온전한 형태가 없으면 게임은 성립하지 않는다. 이 구조적 비유는 지금 학계의 사정을 잘 반영해준다. "인물"을 중시하는 한국의 학계는 주로 출신학교나 학위에 모든 학문의 미래를 걸고 있다. 그러나 학문이 발전하기 위해서 마련되어야 할 제도적 장치가 소홀할 때에는 그 인물은 물론 학문까지도 고사해버리고 만다. - 일본은 '불교학'을 근대화시키고자 했고, 조선은 '불교'를 근대화시키고자 했던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74-75

'네팔-독일 간 필사본 보존 계획'(1970.2)-독일의 두 인도학자가 기획한 것으로 네팔의 고문서들이 모두 마이크로필름으로 남겨저 보존되었다. 독일은 이로인해 여러면에서 불교학이나 인도학의 영역에서 상당한 문화정보력을 획득하게 되었다. 이제까지 독일이 기록한 필사본은 모두 5백만장의 폴리오로 이루어진 16만건에 이른다.

[탈식민시대 우리의 불교학], 심재관, 책세상, 2001

 뱀발. 책접이를 해둔 것을 메모해두지 못해 잠시 짬독하기 전 남기다. 수구라는 것이 저기 무엇 내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기억하고 있는, 경험하고 있는 이전'으로 돌아가자는 것일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모두 떵떵거렸던 자들이었기에 더하다는 것이다. 주인의 사주도 없었는데, 개들은 물고 짓어대고 알아서기고 난리부르스다. 물에 빠진 개는 사람취급을 해주어서는 안된다. 

그리고 창작에 대한 메모는 최민식님의 내용과 겹친다. 우리 불교에 대한 지적도...기억해둘만 한데 얕은 앎으로....겹칠 때가 올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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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장미 2009-07-23 0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창작에 대한 메모를 보고 고개를 끄덕입니다. 적막감은 생각을 헤집게 하고 또 다른 현실을 상상하도록 이끄는 것 같습니다. 현실에서 도피하고 싶은 게지요. :)

여울 2009-07-23 10:30   좋아요 0 | URL
도피만은 아니겠죠. 사랑하거나, 또다른 현실의 가능성을 만들거나, 또 다른 현실을 보여주거나.....다독거림을 받거나...^^
 

[와인과 음악은 사랑의 묘약이다], 박정희, 책생각  


[낮은 데로 임한 사진-나의 인생 나의 사진], 최민식, 눈빛 - 사진이 감동을 주는 것은 그것이 삶에 뿌리박고 있기 때문이며, 삶과 동떨어진 사진은 결코 감동을 주지 못한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나는 인간과 사진은 일치한다고 생각한다. 사진은 진실과 가장 가까이 있을 때 울림이 크고 빛나 보인다. 나는 사진으로 휴머니즘을 추구하였다. ...인간의 사랑은 그 자체로서 충분히 아름답고 의미가 있다. 특히 가난한 사람들의 사랑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깨닫게 해주고, 고통과 절망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도 열어준다. 낯설고 황폐한 세상에서 아름다운 사랑을 발견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새로운 희망의 가능성을 갖도록 해주는 일이다. 무너진 도덕과 가치관, 맹목적인 삶, 눈 뜬 장님의 삶, 이것이 바로 거의 모든 현대인의 삶이다. 

-나의 사진은 도미에와 밀레의 그림과 사상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 두 화가는 나에게 주제를 정해주었고, 그 속에서 숭고함과 영원성을 부여받았기에 항상 고맙게 생각한다. 31  

- 생각은 글로써 정리되며 사진은 느낌으로 정확히 표현된다. 사진에 생명을 주는 것은 논리 이전에 감동이다. 체득의 과정 속에 그리고 감성과 이성의 만남 위에 사진이 있다. 아픔처럼 우리를 깊게 하는 것도 없다. 어쩌면 나는 누구보다도 많은 고통을 느꼈기에 사진을 통해 항거하는 데 익숙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것이 '휴머니즘'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32  

- 나는 어던 난관에 부딪혀서 체념 상태에 주저앉으면 문득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분발하곤 한다. 그리하여 젊은 날의 숱한 방황과 좌절을 거쳐 지금까지도 사진을 통해서 자신의 길을 구하고 사진을 나의 심장과 함께 고동치게 하다가 그 속에 자신을 불살라버린 외톨박이의 길을 가고 있다. 42 

-에즈라 파운드는 이렇게 말했다. "만일 당신 사후에 당신의 시가 세편만 남아도 자신을 위대한 시인으로 알고 시를 쓰십시오. 그리고 생전에는 절대로 유명해질 생각은 말고 시를 쓰십시오. 

-참된 희망은 일상의 삶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사진의 창작은 처절한 절망을 체험한 뒤에야 가능하다. 삶을 통해 부대끼게 되는 괴로운 문제들 모두는 체험에서 나온다. 창작은 이런 것을 넘어설 때 가능해진다....또 많은 사람들의 운명을 가슴으로 체험하는 법을 배워야 했다. 그곳에서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사진을 얻을 수 있었다. 63  

- 1982년 서독 정부의 초청으로 독일을 방문했다. 정부 관계자와 만나 [인간] 3집을 기증했다. 여러 얘기 끝에 여성국장이 몇집까지 출판한 예정인가 하고 물었다. 얼결에 10집까지 만든다고 답했다. 잠시 후 그녀는 "베토벤은 심포니를 9번까지 만들었는데..."하는 것이다....14집은 2009년 중반에 출간할 예정이다.- 사진을 눈뜨게 된 것은 내 나이 28세이던 1955년, 미국의 사진가 edward steichen이 기획한 사진집 [ the family of man]을 접하면서부터이다. 76  

- 예술의 주체는 사람이다. 예술가는 자신이 살고 있는 그 시대를 가장 예민한 촉수를 가지고 가장 멀리, 가장 깊이, 가장 널리 바라보는 사람이다. 그리고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동시대 사람들에게 이해받지 못해 어렵고 외롭게 사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그들은 그 고통을 찬란한 예술로 승화시켜 우리에게 남기고 떠나간다. 그래서 그들이 남긴 작품 하나하나에는 그들의 혼이 어려 있다. 147 도스토예프스키 [가난한 사람들] 

- 사진은 물음을 포착하는 활동이다. 사진은 우리들의 일상적인 물음으로부터 시작된다. 참된 사진 활동은 생활 속에서 진실하고 가치가 있는 것들에 관하여 철저하게 그리고 근본적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다. 사진은 심상의 세계이다. 따라서 내면의 문을 열고 찾아 들어가는 세계이다. 사진가는 시각의 세계로 감성,이성,지성을 표현해야 한다. 삶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 참으로 엄청난 이 물음 앞에서 사진가는 사진을 생각해야 한다. 사진예술에 있어서의 리얼리티는 종합적인 삶에서 생기는 형상성의 힘이다. 156  

- 나의 서재에 있는 장서량은 1만권정도 된다. 그중에서 1천권 가량은 사진집이다. 나는 게을러지거나 나태해지려고 할 때 책을 더 많이 읽으려고 노력한다. 책을 읽으면 게으르고 싶었던 마음이 사라지고 건강한 자신으로 돌아올 수 있기 때문이다. 생활에 지쳐서 게을러지는 것이 아니라 책을 읽지 않아서 게을러지는 것이다. 그래서 나에게는 독서가 삶의 근면성을 측정하는 기준이 된다. 164 사마천 [사기]  

- 사람들은 독서를 지겨워하고 싫어하지만 한 권의 독서가 끝난 후의 성취감은 일의 성공과 다를 것이 없다. 게다가 독서는 지식을 축적하고 경험을 정리하도록 돕기 때문에 다음 일을 하는 데 큰 자신감으로 작용한다. 독서가 알게 모르게 삶의 태도에 영향을 끼치는 것이다. 166 유진 스미스, 베르너 비숍, 살가도와, 쿠델카  

- 인생은 그냥 왔다가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실천을 통해서만 삶의 진정한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인간 존재의 진정한 의미와 경험을 탐색하고 발견할 때 삶은 우연히 일어나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삶은 우리가 만들어 가는 것이다. 우리 스스로가 삶을 의미 있게 살아야 하는 것이다. 168

[창조적으로 이미지를 보는 법-사진에서의 구성,색감, 그리고 디자인], 브라이언 피터슨, 청어람미디어

[구스타프 클림트, 정적의 조화], 박홍규, 가산 - 그가 남긴 253점의 유화 작품 중 60여점은 에로틱하기는 커녕 마치 명상이라도 하는 듯한 분위기를 풍기는 정적의 조화를 표현한 풍경화였고 나머지 대부분도 조용한 분위기의 초상화거나 상징적인 우의화였다. 클림트가 이런 정적의 조화를 인물과 자연을 통해 그린 세기말 빈은 교조적인 전통과 양극화의 빈부갈등으로 점철된 사회현실의 모순이 뒤범벅된 혼란의 시대, 무질서의 도시였다. 클림트의 삶과 사랑 그리고 예술은 그런 허위의 전통과 사회현실의 모순에 대한 반항이자, 현실의 혼란과 무질서를 초월하여 새로운 미래의 아름다움인 정적의 조화를 창조하기 위한 추구였다. 인간과 자연 모두 그런 정적의 조화 속에 살기를 바랐다. 

- 나의 몸은 [키스] 속의 남녀처럼, 숲 속 깊이 명상하는 나무들처럼 한없이 그림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그래, 몸에 맡겨라, 감각에 맡겨라 어쩌면 몸은 머리나 마음보다 더 정직할 수 있을지 모른다. 헛된 지식을 버려라. 아는 만큼 보이지 않고, 도리어 잘못 아는 만큼 잘못 보일 수도 있다. 그냥 보고 느껴라. 아는 것은 그 다음이다. 32

[바람이 되어도 좋아], 김진아, 랜덤하우스  

뱀발.  

 1. 집회에 가려다가 소식을 알길이 없어 답답함을 누르고 책방으로 향한다. 걸음이 내내 무겁다. 될수록 가벼운 책들을 집어들고 정작 읽으려 가져간 책들은 건너 뛴다. 오늘은 우연히 집어든 책이 최민식님 사진집인줄 알았는데, 작품론과 삶에 대한 이야기를 정신없이 빠져든다. 아버지도 겹쳐지고 지나간 많은 사람들과 지난 흔적들이 묻어올라온다. 한마디 한마디 뼈속깊다. 그리고 삶의 깊이도 고통도 아픔도 엷디 엷은 내가 비추인다. 다음은 박홍규님의 클림트론이다. 그리이스 신화를 통해 그려진 그림들도 많은데 작품론을 쓴 분들의 글들이 겉만 핥은 모양이다. 백년전의 오스트리아 빈과 지금을 대위한다. 빌려보고 싶어 대출하려고 하니, 며칠 더 기다려야 한단다. 아쉽지만 그렇게 훑어보고 작품을 대하는 태도의 흔적을 남겨본다. 나머지 책들은 사진구성, 색상, 여행집들이다. 굳이 찾아볼 필요는 없을 듯하다. 그리고 책같지 않은 책-와인과 음악이 아래 책과 묘하게 대비된다. 아직도 이런 책들이 왜 나오는지 모르겠다. 

2. 우린 아까운 예술가들을 너무 많이 놓치고 있다. 그들의 삶과 열정. 김수영의 일상의 뜨거움과 대비되는 다른 무엇이 있다. 하지만 울타리 밖의 그(녀)들로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3. 최민식님을 좋아하는 분들은 조금 기웃거리다 마음을 가져갔으면 좋겠다. 힘들더라도 마음도 아픔도 다독이며 가시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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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독서가로서 최민식선생님의 명복을 빌며
    from 木筆 2013-02-13 16:12 
    나의 서재에 있는 장서량은 1만권정도 된다. 그중에서 1천권 가량은 사진집이다. 나는 게을러지거나 나태해지려고 할 때 책을 더 많이 읽으려고 노력한다. 책을 읽으면 게으르고 싶었던 마음이 사라지고 건강한 자신으로 돌아올 수 있기 때문이다. 생활에 지쳐서 게을러지는 것이 아니라 책을 읽지 않아서 게을러지는 것이다. 그래서 나에게는 독서가 삶의 근면성을 측정하는 기준이 된다. 164 사진은 물음을 포착하는 활동이다. 사진은 우리들의 일상적인 물음으로부터
 
 
 

발제문을 훑어본다. - 이*태위원의 세계금융위기와 잠정적 대안들, 하*수 - 지역에서 희망찾기: 개론의 성격인 듯하다. 좀더 세밀하여 감탄을 자아낼 수 있는 안들이면 좋을텐데. 다소 일반적인 이야기다. '삶의 질'에 대한 코멘트, 하지만 지역주민이 참여할 수 없는 이유, 참여가능한 경로에 대한 고민, 기발한 방법이나 아이디어는 없을까? 싶다. 이*태위원은 런던 G20회의 미국의 시스템변화에 대해서 논한다. 금융의 대응력이 런던회의로 다소 안정적인 국면에 접어들었다고 평하는데, 이후 지속성 여부에 대해 세부적으로 논한다. 논거가 좀더 활발하고 다양하거나 다른 전문가의 의견이 보태지면 좋을 것 같다.

[추방과 탈주], 고병권, 그린비 2009 - 그는 이야기한다. 환자가 덜 아픈 어제를 그리워할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병이 어제 이미 시작되었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오늘 넘어야 하는 것은 어제 넘어야 했던 그것이다. 대중들이 지난 정부와 지난 여당에게 마음을 주지 않는 이유는 어제의 증세와 오늘의 증세를 왕복할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대중이 부와 권력의 주변으로 밀려나고, 시간과 공간 그 어느 것도 보장받지 못한 불안할 존재로 전락한 것, 자기 나라 안에서 자기 정부를 잃은 내부난민으로 떠돌기 시작한 것이 과연 오늘의 일인가. 분명히 어제와 오늘은 규모도 다르고 수준도 다르다. 그러나 오늘은 어제가 낳은 야수이고, 오늘은 지난 십 년의 숙성이다.

한국 민주주의가 매개나 조정보다는 명령이나 통보형식을 띠고 있다고 했지만, 어찌 보면 매개나 조정, 합의 등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것들이 사라졌다기보다 명령과 통보, 추방의 체계 안으로 흡수되었다고 말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여야는 정치적 갈등을 조정하고 해소하기 위해 조정하고 합의한다. 여전히 언론들은 여론을 매개하고 전달한다. 여전히 시민단체들은 운동을 조직하고 대의한다. 그러나 매개와 조정, 대의는 그 자리에서 내려진 결정에 의해 배제되는 사람을 산출하고 있다.

추방, 그것은 지난 십여 년간 학국 사회에서 일어난 일을 말해 준다. 탈주, 그것은 앞으로 일어날 일의 전조이다. 길 위의 무수한 대중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에 대한 증언이자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에 대한 예언이다.

2부 3. '앎'은 '삶'을 구원할 수 있는가 - 현장인문학에서 만난 '가난한 사람'들은 지식을 받아들임에 있어 자신의 삶을 참조하는 것 같다. 물론 이 사람들 대부분이 학력이 낮다는데서 일부 연유하는 특징일 것이다. 그러나 앎이 다른 앎을 참조하지 않고, 곧바로 삶을 참조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중요한 의미가 있다. 더 흥미로운 점은 앎이 삶을 참조하고 있기때문에, 그 배움이 곧바로 삶의 변화로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앎의 신체성]

우리가 극복해야 하는 것은 '장애'가 아니라 '정상성'이라는 것, 우리는 우리 시대의 지각구조, 우리 시대의 공통감각을 문제삼아야 한다는 것, 오랫동안 철학자들은 우리가 '현장인문학'을 통해 만나는 사람들, 즉 재소자나 노숙인, 여성, 어린이, 장애인 등을 결핍과 미숙의 존재로 이해해 왔다. ... 진리란 한 사회가 가진 체계적이고 객관적인 오류이며, 그 사회에 고유한 어리석음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이 인문학자들이 갇혀 있는 감옥이다. [비정상성 되기]


[누구의 과학이며 누구의 지식인가(여성들의 삶에서 생각하기)], 조주현 옮김, 나남, 2009 -서구과학과 기술을 제국주의적 기획으로부터 가장 덜 혜택받은 사람들의 입장에서 본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 매순간 억압받는 사회집단이 역사의 무대에 등장할 때 그 집단은 "우리의 삶의 관점에서 보면 상황은 다릅니다"와 같은 말을 하곤 합니다. 입장론은 집단경험들간의 바람직한 관계는 어떤 것인지, 그리고 무엇을 지식으로 간주해야하는지에 대해 새로운 논쟁의 가능성을 열어놓습니다. 이것이 더욱더 악명 높아지는 서구 인식론과 과학철학의 "저발전"을 치유하기 위해 필요한 첫번째 조치입니다. "서구의 인식론적 위기"는 또한 서구 남성성의 위기임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샌드라 하딩

하딩은 연구결과의 객관성을 증대시키기위해 여성들의 삶의 관점에서 생각을 시작하기를 권한다. 이것은 타자의 삶의 관점에서 연구를 시작하는 것으로서 체계적으로 지배당하고 착취당하는 삶의 관점을 택한다는 것을 말한다. 하딩은 지배집단과 피지배집단이 모두 각각의 사회적 위치로 인해 현실인식이 이데올로기적으로 왜곡되어 있지만, 피지배집단의 삶의 위치에서 생각을 시작하는 것이 지배집단의 삶의 위치에서 생각을 시작하는 것보다 덜 왜곡된 지식을 산출할 수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가치중립적 객관성을 비판하였다.
2002, [페미니즘과 과학], 이재경 박혜경 공역, 이화여대출판부

[니체와 악순환-영원회귀의 체험에 대하여] 피에르 클로소프스키,조성천옮김,그린비 -
[세상에서 가장 우아한 두바퀴 탈 것 - 자전거의 역사문화오늘], 데이비드 V. 헐리히,김인제옮김
[네그리 사상의 진화],갈무리
[꿀벌없는세상, 결실없는 가을],에코리브르 

 

 

 

 뱀발. 발길이 뜸했는데 책방을 오랫만에 들르다. 신간서적란에 맘에 두던 책들이 있어 여러권 챙기고, 강연자료 복사물을 읽다. 병어찜의 여운이 채 가시지 않은 채, 졸음이 잠시 다녀가신다. [세상에서 가장 우아한..] 자전거의 사진은 진작 나왔으면 짝퉁채널 만들때 안성맞춤이었는데 아쉽다. 꿀벌없는 세상은 지식채널에서 방영된 바가 있다. 오늘 잠깐독서엔 당연 졸음에 맞춤인 히딩의 난해한 이야기다. 부제가 여성의 삶에서 생각하기인데 당황스럽기도 하고 간학문을 넘나드는 모양이 이해도 되긴하지만, 덧붙인 책들을 읽지 않으면 되지 않을 듯하다. 사회 속에 embeded한 과학의 이해는 이해될 법도 하지만 혹 읽게된다면 그 진전이 딱딱한 글만큼이나 지지부진하지 않을까 걱정스럽다. 조주현님의 번역이 이어져있다. 고추장님의 글은 최근 3-4년간 수유+너머의 동선이 담겨있다. 현장인문학-노숙자,교도소-의 행간이나 생각들을 따라 읽을 수 있어 좋다. 사회적 독서 프로젝트의 흔적도 담겨있다. 앎의 신체성, 몸의 말이, 몸과 머리, 가슴의 연대에 대한 생각이 겹쳐진다. [고뇌의 원근법 - 고흐편] 화가의 신체성과도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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