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살아도 괜찮은가(ing)

 

 도덕에 가까운 것이 아니라 자유에 가까운 것인지 모른다.  도덕이 정치에 근사한 이분법의 도식이라면 윤리는 행동과 순간, 자유의 만끽을 예비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행위는 늘 이분의 도식과 적을 가르는 것이 아니라 이분을 감싸고 있는 나머지 여덟, 아니면 나머지 98, 어쩌면 998의 여분에 대한 배려인지도 모른다. 문제는 우리가 너무도 이분의 현실에 치우쳐 늘 다른 것은 보이지 않는 것으로 처분했다는데 문제가 있는지도 모른다. 모든 결을 두가지 가닥으로 모으는 유치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 지금의 문제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살아지는 것이 우리들의 운명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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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함께 고민하는 꿈을 꾸자
    from 木筆 2011-09-21 19:17 
    밤이 늦다. 스타일에 대한 딩가딩가 강의 뒤 옷맵시 이야기로 가을밤이 깊다. 법인사업1팀 영업동선을 한번 따라가본다. 목표와 실적 시간을 팔고, 마음을 팔고, 영혼까지 팔아야하는 동시대인의 버거움이 느껴지기도 하지만, 생동감은 지금 여기를 달군다. 가을 바람이 알맞아 아카데미 잡지 영업을 해본다. 어디를 가볼까? 수자원공사, 담배인삼....등등 법인 대상으로 광고영업이 먹히지 않겠느냐는 조언이다.공동이냐 공동 체냐지역의 착한 단체들, 지역화폐 렛츠, 문
 
 
이잘코군 2009-09-01 19: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윤리는, 철학은 더더욱, 자유에 가깝다는 생각입니다. 교과목으로서는 도덕과 윤리를 거의 동일한 개념으로 보는데, 교과서로의 도덕과 윤리는 자유와는 반대 개념처럼 보이죠. 그래서 철학, 윤리교육을 전공한 저는 다른데 가서 당신이 가진 도덕과 윤리의 잣대로 나를 이미지화시키지 말라고 합니다. 구속, 강압, 규정에 가까운 도덕과 윤리로 저를 알기도 전에 가두어버릴까봐요.

여울 2009-09-02 13:46   좋아요 0 | URL
철학만 이야기하셔야겠는데요. ㅎㅎ. 윤리?라! 많이 친숙해지시면 내공을 건네주셔야겠는데요. ㅎㅎ. 암튼 윤리에 대한 도움을 많이 받겠습니다...고민도 건네주시구요.
 
이렇게 살아가도 괜찮은가(ing)
내가 할 수 있는 기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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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윤리와 일상을 하나가 되게 만든다면, 삶의 가치나 선택이 다시 복권될 수 있을 여지가 있는가? 회자될 수 있는가? 삶이 좀더 가치로 나올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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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힌 글을 보셨나요? 당신의 몸은 어디에 가까운가요? 당신의 가슴은요? 당신의 차가운 머리는요? 당신이 식당아주머니라면, 당신이 도서관 직원이라면? 도서관 직원이 아니라 시간제근무를 하는 일용직이라면? 도서관 관장이라면? 도서관 운영위원회 위원이라면? 며칠전 도서관 게시판 질의응답란을 보다 마음에 걸려 가져옵니다. 

두분 모두 도서관에서 모욕에 가까운 일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그 절박함이 가슴에 응어리가 이렇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절박함을 따라가자니 응당 소외된 도서관 이용객의 모습이 아픕니다. 하지만 이 절박함은 끝까지 그 감정을 가지고 고스란히 올라갈까요? 당신이 관장이라면 어떻게 하실거죠. 당장 바꿀 수 있을까요? 실무자들은 위탁을 주었으니, 매점이 운영되면 어쩔 수 없다. 매점 위탁자가 직원에게 그렇게 시킨 것을 어쩌겠느냐고 하겠죠. 식당 아주머니 이야기를 들으면 그런 사람 한두사람 봐주게 되면 장사 못한다고 하며 또 도서관에 대고 뭐라하겠죠. 설령 운영위원회에서 두번째는 논의가 될 가능성은 큰데, 우리의 권한과 예산에 한정이 있으니 쉽지 않아 몇건은 처리가 되겠죠. 그런데 첫번째는 논의조차 되지 않고 배제될 확율이 크겠죠. 그런데 절박한 이용자들은 학생을 비롯해 이런 친구들이 많이 있겠죠. 직접적인 표현을 하지 못하겠지만요. 

아마 절박함은 희석될 것이고, 게시판에도 형식적인 답변이 처리될 확율이 큰 것이겠죠. 일이 처분되듯이 말입니다. 

한번 이렇게 생각해볼까요. 게시판에 글을 올린 두분이 시간이 지나 한분은 공무원으로 한분을 일터를 얻고 상대적인 여유가 생겼다고 해봅시다. 아마 저처럼, 아니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이들이 도서관에서 대접을 받았던 절박함은 사라질 겁니다. 어쩌면 행간의 주장대로 서비스가 형편없으니 삼진아웃제 하고, 친절 모니터링해서 시간제이든 일용직이든 상관없이 근무시간 규정도 개념없는 소비자 정신에 투철하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겠지요.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그래요. 시간이 지나도 그런 절박함들이나 일리들을 빗겨서는 관심이나 유사답은 없을까 하는 겁니다. 내가 식당아주머니이고, 위탁자더라도 꼭 사정이 있는 친구들은 봐줄 수 있는 여력은 없는 것인지? 도서관운영위원으로 이렇게 빈 사각지대는 공적인 세금으로 내는 것이므로 별도의 공간을 만들어내야 한다던지? 이런 친구들은 운영위원회에 참관시켜 소외된 시선이나 절박함이 반영되도록 한다던지? 관장으로 예산만 탓할 것이 아니라 적은 예산으로도 일용근무자나 시간제 근무자들의 여건이나 관리를 개선시키는 노력을 정녕 불가능한 것인지?에 대한 의문을 가질 수는 없는 것인지 말입니다. 

게시판 두번째 글의 이야기가 옳으면서도 옳지 않을 수 있죠. ...이따 이어 쓸게요. 쓸데없이 길어지는 듯. 지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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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어쩌면 윤리는
    from 木筆 2009-09-01 17:25 
       도덕에 가까운 것이 아니라 자유에 가까운 것인지 모른다.  도덕이 정치에 근사한 이분법의 도식이라면 윤리는 행동과 순간, 자유의 만끽을 예비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행위는 늘 이분의 도식과 적을 가르는 것이 아니라 이분을 감싸고 있는 나머지 여덟, 아니면 나머지 98, 어쩌면 998의 여분에 대한 배려인지도 모른다. 문제는 우리가 너무도 이분의 현실에 치우쳐 늘 다른 것은 보이지 않는 것으로 처분했다는데 문제가 있는지도
 
 
 

 

퇴근길 유*산의 낙조는 바다에 비쳐 달무리 같다. 하늘인지 바다인지 한몸에 어울린 뒷빛은 눈이부셔 바로 볼 수 없다. 설렁설렁 부*산 한바퀴를 돌며 이곳에 당종려나무를 옮겨본다. 달무리로 타박타박 달린다. 배불뚝이 반달은 오늘도 새초롬이 떠 다닌다. 얕은 파도에 은갈치배처럼 흔들리며. 바다인지 하늘인지 모르는 그 쪽빛하늘을 만나면 마음도 둥실 띄워보고 싶다. 

뱀발. 돌아와 이렇게 살아도 괜찮은가와 물에빠진 아이구하기 책들의 메모들 다시 본다. 먼댓글에 이어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이 있어 몇번 시도를 하다 엉켜 그만, 잠을 청해도 일찍 일어나지 못한다. 몸이 아직인가보다. 그제 산 시집을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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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 반진리 그리고 삶

[황해문화 가을호]의 권두언과 소설과 만화, 시, 한윤형의 글을 보다. (상품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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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임도중 이야기를 나누다 [반진리]라는 메모가 생각난다. 그리고 아침 도착한 황해문화를 들고 내려오는 길에 보다나니 생각이 겹친다. 먼댓글을 이어본다. 글 가운데에도 있는 이야기지만 법적남편을 가진 여성이 애인이 있다면 당신은 어떠한가? 불륜인가? 일부일처의 도식만을 말하고 잘못되었다고 비난하겠는가? 그런데 그 여성이 남편이 폭력을 늘 행사한다던가 불능이라던가 그녀와 맞지 않는다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그녀는 거짓없이 진리를 살아갈 수 없다. 그녀의 삶은 반진리가 진리보다 더 강력하다. 

진보는 어떨까? 이분구도에 사로잡혀, 진리만을 말하기만 하는 것은 아닐까? 진리를 찾아내서 빼내어 쳐들고 제발 이 진리를 바라보세요라고 구걸하는 것은 아닐까? 진리를 추상화시킬대로 시켜놔서 아무런 잔뿌리조차 현실적응력은 없는 것은 아닐까? 어느 덧 진리행상인으로만 전락하여 현실에서 별반 귀기울려주는 이 조차 부족한 것은 아닐까? 진리가 있느냐가 아니라 왜 우세할 수 없느냐가 문제다. 그러기 위해 우리가 다 아는 것처럼 치부하는 반진리의 결을 찾아내는데 더 예민해져야 한다.  

진리를 알아내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적절하게 사용하는 것은 예술이다. 경험에 의해 끈기있게 발전되는 것이라면, 지금의 진보와 우리는 되돌아볼 점들이 많이 있다. 시선이 어디에 있어야 하고, 몸이 어디에 섞여야 하고, 가슴이 어디에 뜨거워져야 하는지, 마음을 어떻게 나눠야 하는지 말이다. 

그런점에서 1983년생 한윤형의 [루저는 '세상 속의 자신'을 어떻게 인식하는가]는 88만원세대의 결을 세세히 놀라울 정도로 예민하게 그리고 있다. 박정애의 소설도 김해자의 [그때 나는 어디를 보고 있었을까]란 시, 김성희의 [아빠를 위하여] 만화도 아리고 아프다. 

어쩌면 나도 너도 너-나도 사회적 궁핍을 벗어나는 일인 반진리를 아는 일에 궁색하다. 아니면 블랙박스로 만들어버려 애초에 궁금하지도 않았던 것은 아닌지 한다. 권두언에서도 이야기하는 바이지만 생각좌파-몸우파인 현실의 간극에서 아무도 진보의 삶을 살아내고 싶지 않고 눈길주고 싶지 않은 것이 당연한지도 모른다. 그나마 자유주의자의 유용성이 그나마 쿤내나지 않게 하는 지금이지 않나싶다. 그 유용성은 활동하는 공간도 그럴 것이며, 일터도, 삶터도 그러한 것이 작금의 현실이지 않나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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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0611-12 초급!? 활동가 아카데미_수료?식 흔적들

1. 

* 이란 사람이 있다고 하자. 생각의 틈을 비집고 들어갈 기회가 있다면, 그(녀)가 쓰는 표현이나 방점 가운데 많은 것이 들어있다. 아마 그때 첫만남이었고, 그래서 이름은 기억나지 않더라고 했던 이야기들이 어슴프레 기억의 수면위로 올라오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이란 것이 정해진 동선을 돌고 익숙해지다보면 그 틀에서 그 알 안에서 끊임없이 회전하게 되는지도 모른다. 사람의 관계도 그 관계를 벗어나 알을 깨뜨리거나 틀을 흔들어주지 않으면 의외로 다른 생각이 들어갈 틈이 없다. 일상인들이 대부분 어릴적, 대학적 사고로 결빙된 상태로 살아지는 것도 그러하다. 그런면에서 나이라는 것이 별반 도움이 되지 못한다. 지속적으로 어른이만 제조해낼 뿐이다. 

2. 

우리에게 디디고 설 바닥이 있었던가? 우리가 믿고 있던 바닥이 시인의 말처럼 얼음이었다면? 그래도 저수지 가운데 버드나무에 다다랐다고 여겼는데 이미 얼음은 쩍쩍 갈라지고 더 이상 발디딜 것도 없다. 그래 온몸으로 헤엄치는 수밖에 나무라도 붙잡으려면, 갈 곳은 더 선명해졌다. 삶의 강물은 점점 더 불어나 홍수다. 제 한몸이 정신차린다고 될 일도 아니다. 더욱 더 우리는 빠른 속도로 떠내려가고 있다. 나무 한그루라도 부여잡고 싶다. 바위틈만 보이더라도 잡고 싶다. 너무도 빨라 어떻게 해볼 도리도 없다. 세상의 물살은 사람의 사 자에도 안중에 없다. 

3. 

 블랙박스로 남아있는 삶의 철조망을 부수고 들어갈 수 없을까? 그렇게 낱개로 하나하나 가재도구도 살피고 어떻게 집도 짓고, 개간도 할 것인지 좀더 구체적으로 할 수는 없는 것일까? 세상 강물 흘러가는 것만 볼 것이 아니라, 삶을 살아가는 것과 살아지는 것의 선명한 전선이 그려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좀더 삶에 착근하는 것이 나의 살림살이가 너의 활동의 아니라 나-너-나..의 살림살이와 활동을 엮고 생각연습해보는 것이, 시나리오를 만들어 내는 것이 어쩌면 강물을 달리내는 일인지도 모른다. 우르르. 우르르. 강물이 몰리지 않도록 생각의 산을 몇개나 미리넘어 보면 어떨까? 미리미리. 포기할 것은 포기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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