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리 채플린의 영화 독재자에 나오는, 비행기를 타고 구름 속을 날아가던 주인공이 기체가 상하 거꾸로 뒤집혀 있는 것을 알아채지 못하는 장면을 언급한다. 실은 인간이 이러한 거꾸로 된 세계에 살고 있는 것이 지금은 일상적인 상태이며, 현대란 인간과 사회의 관계 그 자체가 근본적으로 도착되어 있는 시대이외에 다름 아니라고 기술하고 있다. 즉 국가나 다양한 조직의 내측에 속하여, 그 내부에만 침투하는 이데올로기나 상식에 따라 처음부터 일정한 이미지를 갖고 세계를 보게 되는 것이다.....인간에게 남겨져 있는 길은 어디까지나 내측에 머물러 있음을 자각하면서, 바깥과의 경계선상에 지속적으로 서 있는 것이다. -“경계에서 삶을 영위한다는 것의 의미는, 내측에서 살아가는 사람들과 서로 실감을 공유하면서도, 부단히 바깥과의 소통을 유지하여 내측 이미지가 자기 누적에 의해 고정화되지 않도록 끊임없이 적극적으로 노력하는 것에 있다.” 184

 

분명 지식인이 살고 있던 세계는 관념적으로는 상당히 근대적이었지만, 그러한 관념의 세계는 일반국민의 생활을 규정하고 있는 사상과는 거리가 멀어서, 국민생활 그 자체의 근대화 수준과의 사이에는 심각한 불균형이 있었다. (중략) 그런데 커뮤니케이션의 발달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대중의 동향이 정치적으로 영향력을 발휘하게 되자, 그러한 잠재적인 사회의식에 군부 파시즘이 불을 붙여 확 타올랐던 것은 아닌가 73

 

도덕과 법률이 항상 외부적인 권위로서 강행되어, 한쪽에서는 엄격한 교법이, 다른 한쪽에서는 수치심 없는 회피 의식이 병행하여 존재하는 것. 비판적 정신의 적극적 의미가 인정되지 않기에, 한편으로는 권력은 점점 폐쇄적으로 되고, 다른 한편 비판은 점점 음성적 내지는 방관적으로 되는 것. 이른바 관존민비, 또 관료조직 내에서 보이는, 아래를 향해서는 팽창하고 위를 향해서는 수축하는 권력. 사물에 대한 경신. 종래의 동양맹신에서 서양맹신으로의 비약 등등 89

 

마루야마가 말하는 근대 내셔널리즘은 대혁명 이후의 프랑스와 산업혁명 이후의 영국에 나타난 국민의식을 전형으로 하는 것이다. 또 스위스나 미국의 예에서 보이듯이 영토나 언어나 문화의 공유는 그것의 필수조건이 아니다. ‘자유, 평등, 박애와 같은 보편적인 정치적, 도덕적 이념민족적 자긍심의 내실로 삼아, ‘공통의 정치제도하에 사는 것을 서로의 귀속 의식의 핵심에 둔다. 그리고 독립된 개인이 모여서 이루어내는 자발적인 인민의 의지가 그 유대를 끊임없이 확인하며, 데모크라시 제도를 통해 인민 스스로가 정치의 결정 주체가 되는 것을 필수조건으로 한다. 91

 

근대적인 것의 지표로 설정된 것은, 그때까지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생각되어왔던 정치의 세계와 도덕의 세계와의 사이에 균열이 생겨 공적영역에 고유한 논리가 인정되는 동시에, ‘사적영역에서의 개인의 활동이 다양한 것으로 해방되는 것이다. 99

 

비록 나는 무력합니다만, 전후 끊임없이 생각해온 것은 일본이라는 상황 속에서 리버럴하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행동으로 리버럴하다는 것을 실증해가는 데는 어떤 선택을 해야하는가 하는 점입니다.” 자유에 관해서는 볼테르의 말, “나는 당신이 말하는 것에 찬성하지는 않지만, 당신이 그것을 말할 권리는 죽는다해도 옹호하겠다.” 그리고 로자 룩셈부르크가 말한 자유라는 것은 언제나 다른 사람과 생각을 달리 하는 자유다.”라는 정의를 전후의 마루야마는 즐겨 입에 담곤 했다. 115

 

자주 얼굴을 마주하던 무렵의 마루야마는 종종 학문적 사색이 무르익게 되면 곧장 집을 나와 걸어서 3,4분 거리의 다케우치 집으로 달려가서는, “그 상념의 피력과 검증에 열을 올렸다. 120

 

근대일본에서 국가가 윤리적 실체로서 가치내용의 독점적 결정자가 되었다는 사실에 근거하고 있다. 진리나 도덕에 대하여 국가가 중립을 지키는 유럽 근대국가와는 달리 국가가 인간의 내면에 무한히 개입하고, 또 반대로 사적 이해가 국가권력을 쉽게 움직인다. 마루야마의 조수논문이 그려낸 공사 영역을 나누는 근대국가의 원칙과는 거리가 멀다. 그리고 보다 상위자에게 순종하는 권위에 대한 의존성이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으로부터 군인이나 관료나 정치가 그리고 황조황종의 유훈에 따라 통치하는 천황에게까지 침투해 있는 것이다. 138

 

중세에는 신이, 근대에는 인간성이 담당하고 있던, 여러 다양한 영역을 관철하는 가치의 중심이 없어지고 회의가 만연하여, 다양한 가치관의 모순과 충돌로 번민하게 된 시대, 계류점을 잃어버린 마음속 심연의 에너지가 불안정하게 요동치면서, 사람들을 격렬하게 움직여간다. 그것이 니체의 눈앞에 펼쳐진 바로 그 현대이다. 149

 

사람들이 정보의 그물 속에 휩쓸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어떤 사상에 물들어가는 것은 정부에 의한 교묘한 선전 때문만은 아니다. 후에 [정치학 사전]에 마루야마가 쓴 항목 정치적 무관심에 따르면, 매스미디어나 영화,연극,스포츠와 같은 대중오락 또한 사람들의 관심을 비정치적인 것으로 향하게 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정치화의 작용을 돕게 된다. 153

 

만약 경험적 현실로서 눈에 비치는 세계가 전부가 되어버려서, 그것을 초월한 눈에 보이지 않는 권위-신이라도 이성이라도 주의라도 좋다. 여하튼 보이지 않는 권위에 의해 자신이 구속되어 있다는 감각이 없어지면, 결국에는 보이는 권위에-이것 또한 정치권력이든 여론이든 평판이든-끌려다니게 된다는 것이 나의 비합리적인 확신인 것이다. 156

 

그렇기는 해도, 나는 이번 문제 등을 통해서 타인의 입장이 되어본다는 것이 현실적으로는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새삼 느꼈다. 따라서 실제로 나 자신, 요양소 의 사람에 대해서는 어엿한 주인으로서 말하고 있지만, 일단 장기요양자나 중증환자 앞에 서게 되면, 나 같은 사람의 어설픈 동정으로는 이 사람들이 살아가는 내면에는 아무래도 파고들어갈 수 없는 영역이 있으며, 그러한 정신세계에는 밖에서는 도저히 체험할 수 없는 리듬과 기복이 있는 것처럼 느껴져, 요양자로서 하는 내 발언 또한 공허하게 느껴지게 된다. 163

 

현대에 이르러 정치기구는 복잡해지고 국제세계의 동향이 사람들의 생활에 곧바로 영향을 미치게 됨에 따라, 누가 결정을 하고 있는지 전혀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 손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 정책이 결정되고 있다고 느끼고 무력감에 휩싸이게 된다. 이것이 무관심의 실체이며, 그러한 체념과 절망으로부터 정치에 대한 초조함과 울분까지의 거리는 한걸음도 되지 않는다. 그것을 간파한 정치 지도자가 미디어를 이용한 선전을 통해 반대 세력이나 특정 외국에 대한 증오심을 부추기게 되면, 사람들은 그 강렬한 자극에 흥분하여 자아를 포기하고 권위에 대해 맹목적으로 귀의해간다 166

 

아마추어에 기반한 데모크라시 서로 얼굴을 볼 수 있는 소집단 속에서 평소부터 정치나 사회나 문화와 관련된 문제를 토의함으로써 자주적인 비판력과 적극적인 공공정신을 배양하는 것에 한정되어간다. 그러한 기초 위에, 일상 생활 사이사이에 정부의 움직임을 감시하는 비직업적 정치가의 정치활동이 중요하게 된다. 167

 

정치적 리얼리즘은 현상을 움직이기 어려운 기성사실의 축적으로 보지 않고, 항상 변화할 수 있는 것, 개량할 수 있는 것이라 보는 자세에서 시작한다. 그러나 거기서 멈춰서는 안 된다. 뜻하지 않은 현상에 직면해서는 적의 음모탓으로 돌리지 않고, 자신의 상황인식이 잘못되었는지를 성찰하고, 결과에 깨끗이 책임을 지는 태도. 현실을 일반적 추상적인 명제로 환원시키지 않고, 그 다양한 측면을 구분하여 적절한 선택을 행하는 사고력. 정체에 베스트를 기대하다 격심한 실망에 빠지는 것을 피하기 위해, 그것은 어디까지나 덜 나쁜 것을 선택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각오로 임하는 것. 그리고 어느 정치세력을 지지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지금까지의 세력 분포에 얽매이지 말고 전체 상황에 대한 판단에 따라 유연하게 결정해가는 것. 이와 같은 사고법을 일상생활 속에서 지속적으로 훈련해가는 것이 중요하다. 169

 

안보반대운동에 대해, “에너지만 있을 뿐, 질서 형성적 힘이라는 것이 혼돈으로부터 나오지 않고, 단지 형식에 대한 반발에만 머물고말 가능성을 마루야마는 지적한다. 그리고 창밖의 데모대가 부르는 노랫소리를 들으면서, 칼 마르크스의 말, “혁명 정신이 절정을 지난 후엔 장시간의 숙취가 밀려온다를 읊조렸던 것이다. ‘현대대중사회의 상황에 대한 암울한 불안감은 사람들이 민주주의를 옹호하기 위해 일어서는 모습을 보아도, 혹은 그것을 목도했기 때문에 더욱 증폭되어갔다. 171

 

정치라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매일 제기하는 산문적인 요구에 응하는 본래부터 보수적인 것이라고 강조하고, 과격한 행동에 의한 급진적인 변혁에 대한 동경을 신랄하게 비판하게 된다. “정치학이란 영구히 완벽한 사회를 만들어내는 기술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고 있는 일종의 전통 사회를 연구하여 다음에는 어느 방향으로 나가야 좋을지를 분간하는 기술이다라는 영국의 마이클 오크쇼트의 말을 발췌하고 있다. 172

 

어느 토픽에 대해서 열풍과도 같이 한 방향으로 쏠리는(반동적이건, 자칭 혁명적이건) 정신적 풍조가 형성되면, 놀랄 만한 순응주의가 인텔리 세계조차 지배한다는 점에서도, 도대체 전후 일본은 개인 독립의 기상이라는 면에서 얼마나 진보한 것인지, 오히려 텔레비전 주간지 문화의 획일성이 그러한 경향에 박차를 가한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다. 178

 

전통은 우리들이 주체적으로 인류의 과거유산으로부터 선택하여 우리의 피와 살로 소화해내야 하는 것인 이상, 외래문화라는 것은 그것을 전통으로부터 배제할 이유가 되지 않는다. 185

 

인간의 지적 작용의 근본을 이루며 가장 중요한 것은 학교에서의 학습과는 관련이 없는 서민의 지혜’, ‘생활의 지혜에 해당하는 예지wisdom”이며, ‘이성적인 앎의 작용으로서의 지성이 그 뒤를 잇는다. 그러나 현대의 정보사회는 이 네 가지 앎의 순위를 완전히 역전시켜 정보최상 예지최하의 상태에 빠져 있다. 예스 노로 대답하는 단순한 퀴즈나 실용서의 소재가 될 만한 정보의 단편이나 학교 수재들의 지식들만이 편중되어 세상에 넘쳐나고, ‘지성예지는 극히 메말라가고 있다. 187

 

뱀발

1. 성탄절, 애프터 예수 ᆞᆞ꿈을 꾸어본다 절에 가지 않는 초파일 꿈꾸듯 교회가 없는 예수에 대한 마음이 간절한 기독교인들로 넘치는 세상을 꿈꾸어본다. 그래도 하루 쯤은 ᆞᆞᆞ

2. 책장을 넘기고 닫는다. 나는 거꾸로 된 세계에 살고 있으며 그 경계에서 `타자감각`를 느끼는 존재가 될 것을 요구한다.


3. 그의 친구론을 우선 남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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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아니 잠을 설친 밤의 끝, 아침녘 눈이 떠지자마자 고운 색에 손길이 간다.

 

 

파도 소리를 들으며 걷는다. 졸졸 흐르는 냇물처럼 마음을 달랜다. 겨울바다가 아니라 제법 봄에 조금 미치지 못하는 날인 듯 싶다.  몸은 고요나 적막보다는 약간의 웅성거림이 필요한 것 같다. 약간 시큰하지만 그런대로 괜찮은 날씨다.

 

 

백사장이 무척이나 곱다. 발에 모래가 하나도 묻지 않을 정도로 부드럽고 푹신한 느낌이다. 백사장을 걷는 이들이 제법이다. 발맛도 한 몫하지 않을까 싶다. 가까이엔 바다내음도 날린다.

 

 

사물은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혹은 멀리있다.  현실도 그러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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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업, 불안정, 해고' 위협이라는 공포는 거꾸로 '자유'의 소망 위에 세워진다 (1)

 

자기 계발하는 주체의 정치학

 

어린이 비즈니스 스쿨에서 창의와 도전정신 그리고 자율과 책임의 주체가 되기 위한 다양한 놀이, 토론프로그램에 참여하는 어린이부터 고령화 시대에 대비해 인생 2모작’, ‘인생 3모작을 경영하기 위한 노하우를 알려주는 강연회에 참석하는 노인들에 이르기까지, 우리 모두는 자기계발하는 주체라는 울타리 속으로 들어왔다. 따라서 자기계발하는 주체의 모습은 끊임없이 펼쳐지고, 모든 주민을 아우르며, 모든 삶의 공간을 흡수한다. 348

 

한마디로 말하자면 자신을 책임지는 자율적인 주체로서의 시민이라고 할 수 있다. 349

 

수많은 상투어들을 대신하는 것에 불과하지만 기업가적 자아의 정체성을 리스크를 관리하는 주체로 분명히 서술함으로써, 기업가정신의 근본적인 특성, 위험을 감수하는 주체로서의 정체성을 잘 보여준다. 구본형의 표현을 빌리자면 미래를 아직 발생하지 않는 시간이나 사건으로 보는 불확실성의 횡포로부터 우리를 구해주는 시간 개념을 택한다. 이는 리스크 담론이 이야기하는 시간과 다른 것이라 할 수 있다. 리스크는 계산 불가능한 것을 계산 가능한 것으로 전환시킴으로써 그것을 지배할 수 있는 대상으로 다루려는 대표적인 사회적 관리의 기획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354

 

실업이란 표현은 신자유주의자에게는 있을 수 없는 현실이다. 그리고 이처럼 항상적으로 사업을 관장하는 주체로서 개인을 바라보는 시점이 1인기업가란 개념이다. 1인기업가란 관점에서 실업을 리스크 관리로 바라보자면 그것은 자신의 인적자본의 가치를 증대시키고 변화하려는 사업이 된다. 359

 

기존의 성공학과 그를 가리키는 또 다른 경멸적인 표현인 처세술은 언제나 이미 마련되어 주어진 규칙이나 이상이란 테두리 안에서 자기 성공을 도모했다. 따라서 그 또한 자기를 적극 계발 향상시키는 행위를 요구하고 또 그에 관련된 테크닉을 사용하지만, 이를 자기경영이란 관점에서 보자면 그 역시 또 다른 모습을 한 순응과 복종에 불과한 것이다. 361

 

성공학이 내세우는 시간관리 테크닉은 규칙적인 일과의 엄수, 근면, 성실, 절조, 금욕 등의 이상을 시간관리라는 테크닉과 연계시키는 훈육의 시간관리 테크닉이었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른다. 반면 자기경영의 시간관리 테크닉은 DMBO든 아니면 사명선언문, 시간가계부이든 그 세부적인 차이를 떠나 한 가지 점에서 수렴한다. 그것은 더 이상 정해진 일과를 살지 않는다는 것이다. 361

 

지난 20년간 교육개혁을 통해서는 학생의 주체성을, 구조조정이라는 일련의 경영혁신을 통해서는 노동자 관리자의 정체성을, 그리고 일상적인 현실에서는 개인 정체성을 변화시켜온 과정에 공히 흘러다니고 있던 주체화의 권력을 가리킨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이는 자기주도적 평생학습의 주체에서 고용 가능성을 즐기는 유연하고 역량 있는일하는 주체, 나아가 1인기업가로서 자신의 삶을 적극적으로 경영하는 자유와 해방을 꿈꾸는 개인이라는 각각의 자기계발하는 주체란 모습으로 변화무쌍하게 나타난다. 365

 

정치적인 당파의 성격과 소속을 떠나 지난 수십 년간 전지구적으로 진행되어왔던 변화는 거칠게 말하자면 새로운 정치적 합리성이 등장했다는 것이고, 그것은 다양한 만큼이나 동질적이고, 차별적인 만큼이나 유사하다. 자기주도적 학습주체와 평생학습체제를 위한 영국의 개혁과 한국의 개혁 사이에는 아무런 질적인 차이가 없다. 위대한 직장을 만들기 위해 리엔지니어링을 시도하고 기업문화를 도입하며 학습조직을 만들어내는 미국 기업과 경영혁신과 인재경영을 역설하며 신노사문화를 제창하고 문국현 모델의 확산을 위한 캠페인을 펼치는 한국 기업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스티븐 코비의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은 한국과 대만에서 더욱 많이 읽히며, 미국에서 유행했던 모든 자기계발의 테크닉과 프로그램은 모두 한국의 자기계발 전문가들이 이미 번창하는 사업으로 판매하고 있다. 366

 

권력은 지배받는 주체에게 직접 작용하지 않는다. 그것은 주체성을 형성하고 그 주체가 자신의 삶에 작용하는 방식을 규정함으로써 주체를 멀리에서지배한다. 신자유주의는 바로 그런 지배대상으로서의 주체를 빚어낸다. 그렇지만 그것은 동시에 자기 삶을 대하는 주체에게 새로운 행위 가능성, 즉 개인적 자유를 행사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하면서 작용한다. 따라서 자기계발하는 주체가 품고 있는 자유는 허위적인 기만도 아니고 한낱 허깨비에 불과한 것도 아니다. 언제나 권력은 자유를 통해 작동하기 때문이다. 367

 

자본은 노동을 착취하면서 동시에 생산한다. 마르크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자본은 사회적 관계 자체를 생산해야 하며, 푸코의 표현을 빌리자면 근대 권력은 주체성 자체를 생산해야 한다. 따라서 지식기반경제로 변화한다는 것은 또한 새로운 주체성의 체제로 변화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368

 

자기계발하는 주체의 계보학적 분석

 

등장하는 주체들의 모습은 여럿이지만 그들은 하나의 명령에 따라 앞으로 나아간다. 그것은 몸값을 올리고 명품 인재가 되기 위해 자신을 브랜드화하는 다양한 인성-상품을 소비하는 개인이기도 하고, 평생학습의 주체가 되어 급변하는 지식정보사회에서 자기 인적자본의 가치를 꾸준히 제고하는 자율적이고 성숙한 시민이기도 하며, 자신의 암묵지를 적극적으로 공유하고 자신의 핵심자아와 기업가치를 일치시키는 지식근로자이기도 하다. 372

 

서로 공명하고 교차하는 세 가지 주체성의 형태가 나름의 독자적인 궤도에서, 또 서로 다른 시간적 연대기를 거치며 생산되는 과정을 분석하고자 했다. 그것은 거칠게 나누자면 다음의 세 가지 계기, 국가가 추진한 새로운 시민 형성프로그램, 자본에 의해 구조조정이란 이름으로 진행된 새로운 일하는 주체 만들기기획, 그리고 자유로운 삶을 열망하는 개인들이 추구했던 자기주체화의 행위들이라 할 수 있다. 372

 

유연한 노동주체를 형성하는 것과 자율과 책임의 시민을 빚어내는 것, 그리고 자기계발하는 자유로운 개인이 되는 것은 서로 다른 사회적인 공간에서 서로 다른 시간의 궤도를 따라 진행되었지만, 또한 양자는 상호교차하며 서로를 강화하는 흐름 속에서 움직이기도 했다. 375

 

지난 20년간 한국 자본주의의 변화 과정에서 형성된 권력의 주체화의 논리, 자기계발하는 주체의 형성은 아이러니하게도 동시에 기존의 규율사회를 비판하고 자유를 꿈꾸는 주체의 자기형성 논리와 겹쳐져 있다. 그렇다면 이런 자기계발에의 의지와 자유에의 의지의 공모는 불가피한 것일까. 자유에의 의지를 통해 우리의 삶을 예속시키는 권력에 맞서 싸우기 위해 우리는 자유에의 의지를 거부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전연 새로운 자유의 이미지를 고안해야 할 것인가. 물론 자기계발하는 주체가 소망하는 자유가 협잡이나 기만이라 말해서는 안될 것이다. 적어도 거의 모든 자유주의적 사회에서 자유란 자명하고 선험적인 이상이 아니다. 그것은 끊임없이 도구화되고 조작화됨으로써 사회적 삶을 관리하고 지배하는 데 사용된다. 그렇지만 반대로 우리는 자유를 통해 지배와 관리의 규칙과 의무, 규범을 의문시하고 현실에 관해 새로운 질문을 던질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게 된다....그런 자유의 동원을 다시 문제화함으로써 자유가 지닌 위험을 알리고 비판하는 것도 역시 자유의 정치학이어야 한다. 376-377

 

신자유주의를 비판한다는 것이 자유를 거부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더 많은 자유를 위해 관료제와 공장, 학교와 가족의 규율과 통제에서 벗어나려고 했던 우리는 지금 그 자유를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는 기괴한 맹목적 필연성에 구속되어 있다는 불안을 떨치기 어렵다. 자유를 추구하면 할수록, 자유와는 반대방향으로 치닫는다는 느낌이 우리를 휩싼다. 따라서 이제 자유를 향한 열망은 자유에의 환멸로 반전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유혹에 굴복해서는 안 될 것이다. 외려 함께 지혜를 짜내어 자유와 경제, 자유와 통치 를 새롭게 합성하면서 자신을 이끌어나가는 우리시대의 자본주의를 분석해야 할 것이다. 3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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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인생 2015-01-25 05: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책도 있었군요!

여울 2015-03-24 16:46   좋아요 0 | URL

네, 이제서야 댓글을 보았습니다. 서재 곰팡이 피겠습니다. 인상깊게 보았네요. 마음 나눌 이들이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실업, 불안정, 해고' 위협이라는 공포는 거꾸로 '자유'의 소망 위에 세워진다 (1)

 

유연한 노동주체


 

자본의 변증법은 노동과 노동주체를 분석함에 있어 두 가지의 근본적인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먼저 노동을 자본의 운동법칙에 종속된 경제적 실재로 환원함으로써(경제주의), 노동주체를 노동력, 그것도 직접적인 고용관계에 종속된 노동자로 한정한다. 따라서 오직 경제적인 삶, 그것도 노동력이라는 범주의 매개를 통해서만 노동 현실을 표상한다.  125 그 탓에 노동 분석은 임금, 고용관계 등 노동력의 경제적 삶을 분석하는데 머물러버리고, 노동주체 분석 역시 노동력의 분석, 혹은 노동자라는 특수한 법률적이고 경제적인 주체를 분석하는 것으로 축소된다.

 

다음으로 자본의 변증법은 경제적 삶 바깥에 놓인 자본의 운동을 이차적인 배경이나 조건, 아니면 '상부구조'로 환원함으로써 자본이 재생산되기 위해 사회적인 삶 자체를 생산해야 한다는 것을 간과한다. 따라서 자본은 자신의 지속적인 운동를 실현하기 위해 공장과 사무실 밖에서의 삶이 이뤄지는 조건과 규칙을 '동시에' 생산해야 한다는 것을, 그리고 노동력(노동자)이 아닌 주체 역시 자본주의적인 삶의 권력에 따라 빚어내고 또한 지배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간과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노동의 분석은 자본의 정치경제학으로, 노동주체 분석은 허위의식으로서의 이데올로기에 관한 분석으로, 각기 한정되어 버린다. 125


자본주의란 곧 사회적 삶을 자본이라는 명령에 복속시키는 사회적 배치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자본주의는 사회적 삶을 주체화하고 대상화하는 담론적/비담론적 실천을 지배하는 규칙과 코드를 끊임없이 갱신하고 변형한다. 그러므로 자본주의가 변화한다는 것은 자본주의가 사회적 삶을 생산하는 방식을 교체하고 변형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자본주의는 자신의 새로운 경제적 운동의 조건을 고안하고 강요하는 과정을 통해 자신의 위기를 해결하는 것이지만, 그와 더불어 반드시 주체성을 새롭게 생산하지 않을 수 없다. 126


후기근대 혹은 고도근대, 유체적 근대라는 이름으로 현재의 사회적 조건을 제시하기는 한다. 그렇지만 이들이 분석하고 있는 자아정체성이란, 비록 직업과 일의 세계에서 자아정체성의 변화를 포함한다고 할지라도, 의미와 해석이라는 재현의 영역에 갇힌 것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들이 "기초적인 신뢰의 위기"(기든스), "위험사회"(벡)를 역설하며 새로운 주체성을 가능케 한 맥락과 배경을 분석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주관적 의미와 객관적 세계의 관계"를 문제삼는, 반영 혹은 재현의 관계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127


노동주체의 주체성을 형성하는 이질적이고 자율적인 사회적 실천이 결합하는 과정을 분석하는 것이란 점에서, 계급구성은 곧 주체성의 계보학적인 분석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네그리는 자본주의 발전의 단계를 자본의 유기적 구성이 아니라 계급구성의 변화라는 관점에서 분석한다. 자본주의의 발전 과정을 크게 세 가지의 단계로 나누고 각각의 계급구성을 (1) 노동과정, (2) 소비규범, (3) 규제양식, (4) 프로레타리아트의 정치적 구성이란 측면에서 분석한다. 전문노동자(-1차대전)/대중노동자(-1968)/사회적노동자(-현재)  131-132


계급구성이라는 관점을 참조하되, 그것이 결여하고 있는 '자기'라는 주체의 형성에 관한 분석을 시도하고자 한다. 135


기존 방식은 언제나 일터라는 조직 속에 울타리 쳐진 세계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전략경영 담론은 이런 장벽을 무너뜨린다. 그것은 일터에서의 노동주체를 기업의 경영전략 혹은 비전이란 새로운 경제활동의 합리성에 따라 움직이고 분절되는 대상으로 표상한다. 나아가 노동주체를 관리하는 방식과 노동주체가 자신을 주체화하는 방식에 있어서도 새로운 차원을 열어놓는다. 171


전략경영 담론은 기업의 경제적 행위를 새롭게 재현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그와 연관된 행위자들을 주체화하는 권력이기도 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담론적 권력 메커니즘의 진리 효과는 주체성을 구성 혹은 재구성하면서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정의하는 것"에 있고, 이는 전략경영 담론에서도 역시 동일하다. 전략경영 담론은 기업에서의 경제적 삶에 참여하는 주체들을 '전략행위자'로 주체화한다. 173


노동주체는 더 이상 경영 명령과의 동일시를 꾀함으로써 자신을 주체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전략에 따라 스스로 역량 있는 주체로 계발하고 향상시켜야 하는 책임을 지닌 인물인 것으로 주체화된다. 그런 점에서 전략경영 담론은 생산의 양(얼마나 생산했나)이나 시간(얼마나 일했나)과 같은 외적인 기준을 통해 일하는 사람을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하는 이의 '자아'를 직접 겨냥하고 그것을 통해 노동주체가 스스로 기업전략과 일치된 주체로 자신을 향상시키고 변모시키도록 요구한다.  189


BSC가 작용하는 방식은 다름 아닌 "학습 및 성장(혹은 혁신)"이라는 단언을 생각해보면, BSC가 주체화의 테크놀로지로서 지닌 특성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BSC는 전략경영 담론을 도구화하는 객관적인 지식과 절차, 평가의 규준 등으로 이뤄져 있지만, 그렇다고 BSC를 전략경영 담론에 부속된 하위 테크닉으로 평가절하할 수는 없다. 197


역량은 경영권력이 일하는 주체를 관리하는 모든 영역에 작용한다. 선발과 채용, 보유, 평가와 보상 그리고 개발과 육성에 이르기까지, 일하는 주체의 삶은 이제 역량의 그물망 안에 갇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38


역량이란 언표는 일하는 주체의 능력을 그려내는 개념에 머물지 않고 일하는 주체의 주체성을 지배하고 관리하는 다양한 사회적 실천체계를 생산한다. 이는 일터에서 일하는 주체의 능력을 측정하고 평가하며 보상하는 경영 실천의 체계(채용, 선발, 승진, 보상, 상벌, 퇴직 등)와 결합할 수도 있고, 일하는 주체를 개발하고 관리하며 향상시키기 위한 실천의 체계(교육, 훈련, 경력개발 등)와 결합할 수도 있다. 또 그것은 일터의 안팎에서 일하는 주체가 더 적합하고 유능한 주체가 되기 위해 행하는 다양한 실천의 체계와 결합할 수도 있다. 261

 

자기계발의 의지


한국사회에서도 대마불사와 철밥통의 신화가 깨어지면서 많은 개인들이 스스로 구제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된 것이다. 미국인들에게 건국이후 줄곧 지속되는 자조의 전통이 대한민국에선 그제야 싹트게 된 것이다....많은 이들이 창업과 전직이라는 낯선 단어를 자신의 목표로 인식하게 됐고, 자기계발은 그를 위한 필수적인 요소였다...이런 경향은 경제신문의 구독률 상승과 더불어 출판시장에서 가장 먼저 나타났다. 각종 재테크 서적과 자기계발에 관련된 책들이 출간 붐을 이뤘다. 이와 더불어 한국에서도 서서히 책이 아닌 세미나를 통해서도 지식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미국의 경우와 비교될 수 없지만 일반인들이 자기계발을 위해 시간과 돈을 투자하기 시작한 것이다. 274


기업교육이란 장 안에서 자기게발 담론을 이해하려고 할 때, 그것은 기업교육을 통해 생산되고 교육됐던 지식의 내용이 아니라 일하는 주체를 형성하는 다양한 담론적 실천과의 관련 속에서 이뤄져야 한다. 한국능률협회가 1972년부터 '능력주의 시대의 자기계발은 통신교육'이란 이름으로 경영자나 직장인들을 대상으로 실시했던 경영통신교육은 이후 '창의력 개발 훈련', '감수성 훈련', '성취동기 제고' 프로그램 등을 확충하면서 문자 그대로 본격적이 전문화된 자기계발 담론을 수행한 ㄱ서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성공학이나 처세술이란 이름으로 활동하는 기업교육 강사들이 제공하던 것과는 다른 것이었다. 278


자기계발 담론은 직접적인 사회적 활동의 내용과 상관없이 모든 종류의 자아를 향해 말을 건넴으로써 매우 세속적이고 보편적인 대중문화 현상으로 자리 잡게 된다. 280


자기 계발 담론은 언제나 자신을 변화시키고 계발해야 할 대상으로서 자아를 규정하고 고정시키는 실천과 더불어 그것에 작용해 변화를 꾀하고 성공과 성장, 향상을 결과로 끌어낼 수 있도록 하는 다양한 테크놀로지를 포함한다. 이런 '자기의 테크놀로지'는 그 자체 자기계발 담론의 한 장르로 간주될 수 있을 것이다  281


자기계발 담론은 언제나 특정한 정치적인 목표와의 관련 속에서만 존재한다. "주체가 스스로의 실천으로 자신을 적극적으로 구성하는 방식에 대해 내가 관심을 갖고 있다 해도, 개인이 스스로 이런 실천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가 속한 문화 속에서 발견한 양식이며, 그의 문화, 그의 사회, 그가  속한 사회적 집단들이 그에게 제의하고 부과한 양식들입니다"라고 푸코가 말할 때, 그 주체화의 양식이 바로 그에 가깝다. 281


자기경영하는 삶을 산다는 것은 단지 개인적 선택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주체성'(직장인, 아버지 세대의 삶)을 '비판'하는 행위이며 자신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규정하던 기존 지배방식을 부정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그것은 새로운 자유의 윤리적 주체가 되는 일이다. 289


푸코는 문제설정에 관해 이렇게 말한다. "문제설정이란 상이한 해결책들이 응답하고자 하는 질문을 구성하는 요강을 정의합니다. 주어진 것을 질문으로 발전시키고, 일련의 장애와 어려움을 다양한 해결책들이 응답을 산출하게끔 문제로 변형시키는 것이 바로 문제설정의 요점이자 사유의 특수한 작업인 것입니다." 따라서 문제설정은 주어진 대상을 어떻게 인식하는가(재현), 그에 대한 태도는 무엇인가(태도)를 묻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앎의 대상으로 구성할 때 그와 동시에 형성되는 차원들을 함께 이해하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문제설정이란 그것을 인식의 대상으로 구성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것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 것인가란 실천 역시 포함한다. 아울러 가장 중요하게는 어떤 대상을 문제로 구성한다는 것은 동시에 그것을 다르게 사유하고 달리 다룰 수 있는 가능성을 항상 전제한다는 점에서 자유를 수반한다. 굳이 요약하자면 세 가지 계기를 동시에 포함한다. 첫째 문제로서의 대상에 관한 지식 혹은 언어의 생산, 둘째 대상을 조작하거나 변형하는 다양한(양립 불가능할 수도 있고, 대립적일 수도 있는) 실천 및 테크놀로지의 구성, 셋째 그 대상과 행위의 주체 사이에 맺어지는 관계, 즉 자유와 권력, 그렇다면 자기경영 담론에서 자기의 문제설정이란 것도 이런 세 가지의 측면에서 함께 분석할 수 있을 것이다. 292

 

거시적으로는 정부와 기업의 역할이 중요하지만, 결국 미시적으로 자신의 가족을 구원할 사람은 바로 자기 자신인 것이다. 그러므로 당신에게는 시간이 없다. 지금 당장 새로운 계획을 실천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아직 직장을 가지고 있다면 좋은 일이다. 직장에서 일을 하면서도 자신이 하고 싶어하는 일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라. 관심을 가지면 그 일이 달라 보인다.  293


이런 표상은 단순히 기업조직으로부터 독립한 자영업자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일을 비롯한 경제적 행위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 또는 일하는 주체 혹은 경제적 삶의 주체로서 자기 삶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라는 문제 전반을 아우르는 것이다. 따라서 '1인기업가'란 새로운 '주체화의 윤리'를 가리키는 개념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294


문화비평류의 담론이 생산해낸 '개성과 자유의 세대'란 모습은 아마 서태지나 안철수 같은 대중음악 스타나 벤처사업가의 모습으로 의인화시켜볼 수 있을 것이다. ...자기실현에 몰두하는 개성적인 주체가 대두하는 것을 둘러싸고 쏟아진 분석, 예컨대 신개인주의라거나 나르시시즘적 주체의 등장이라거나, 생존가치에서 표현적 가치를 중시하는 개인의 등장이라는 진단과 옹호 혹은 비판은 모두 일면적인 것이라 할 수밖에 없다. 301


일터는 물론 자기계발에 매진하는 일상 등 어디에서든 끊임없이 자신을 혁신하고 스스로를 책임지며 자신을 실현하고자 하는 자아, 즉 기업가적 자아는 성숙한 근대, 2차근대 혹은 후기근대라고 말하는 시대를 역설하는 이들이 주장하는 것과는 다른 모습을 가진다. 그것은 해방된 주체가 아니라 새로운 주체화의 권력에 예속된 주체이기 때문이다. 317

 

 

볕뉘. 

 

 1. 일터의 변화를 끊임없이 푸코와 대위한다. '민주'와 '노동'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사회'의 흐름을 읽어내려는 노력이 놀랍다. 어쩌면 미생이 또 한번 그려진다면 일터내부의 군상들이 어떻게 개조되고 있는가를 다시 살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만들어진 인간들이 아무 쓸모없이 버려지는 현실을 더 적나라하게 보여줘야 할지 모른다. 일터 안의 변화에서 답을 찾으려는 노력이 얼마나 허무한 것인지, 개인의 노력이 얼마나 작을 수밖에 없는 것인지 재삼 확인하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미생이 아니라 또 다른 한집을 얻기 위해서 일터의 중심이라는 시지프스의 신화에 사로잡히는 것이 아니라 일터 곁과 일터 밖을 제대로 보는 시선을 가졌을 때라야 조금 있게 되는 것은 아닐지.

 

 2. 그렇게 찾고 헤매이던 삶은 '나'에게서 멈추고 스르르 녹아버리게 된다. '나'에 대한 무한 책임을 덮어쓰고 '내탓이다'라고 스러지는 군상들로만 흥건해진다. 극(최)정상을 위해 달리던 주체는 참으로 허망하다.

 

 3. '간지럼으로 킥킥 거리는 주체'의 담론을 그려보면 좋겠다. 서로 그만 속고 살았으면 좋겠다. 서로 굶어죽지 않고 먹고 살 방법이 너무도 많을 것 같다. 푸코 방정식으로 삶의 해답을 하나씩 구해본다고 해서 문제되겠는가? 처음부터 늘 다른 생각은 이렇게 걸음마부터 시작하는 것은 아닐까?

 

 4. 시간의 흐름 속에 어쩌면 국가가 헤아려야 되는 일들을 가족이 분담했다면, 가족을 너머 개인이 부담하고 책임져야 한다는 강박을 거꾸로 심어주었다고 읽을 수는 없을까? 온 세상과 대면한 개인의 이미지와 공포를 일상적이고 흔한 일로 만들어져 버린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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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민주주의라는 것이 있다면 

명사는 아닐 겁니다.

형용사도 아닐 겁니다.

아마 동사이거나 부사에 가까울겁니다.

만약 민주주의라는 것이 있다면

화석이 아닐겁니다.

캐내고 때고 태우고

불을 지피는 걸겁니다.

만약 민주주의라는 것이 있다면

모시거나

섬기는 것이 아닐 겁니다

민주주의가 있다면

역사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생물에 가까울 겁니다.

지금 여기 바닥 위에

지지고 볶고 싸우고 나누는 걸겁니다.

어쩌면 우리는 민주주의를 외치기만 했지
어쩌면 우리는 민주주의를 빌리기만 했지
어쩌면 우리는 민주주의를 묶어 놓기만 해서

어떻게 다룰지도 모른다고 고백하는 편이 나을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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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울 2014-12-22 1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민주주의를 지금 여기에 풀어놓으면 할 일이 참 많아요. 지금보다 낫게 할 일. 물고 늘어질 일들. 정치만이 아니라 제도 정당만이 아니라 지금당장 벼랑에서 떨어지기 직전의 `민`들에게요. 오해받겠지만 `민주주의`는 모셔지고 있어요

조선인 2014-12-23 1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없이 댓글을 썼다 지웠다 했습니다. 할 말이 너무 많아 결국 댓글을 다 지웠습니다. 한숨이 쌓이는 나날들입니다.

여울 2014-12-23 13:39   좋아요 0 | URL

ㅠ.ㅠ

네 마음 느낄 수 있는 듯요. 우울한 나날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