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의 우울 

 
하루 종일,

진보란 글자를 마음에 달아본다.

그런데 참 우울해지는 것이다. 글자가

유리창에 내리는 비에 굴절되듯 비틀어져 흘러내리는 것이다.

 

하루 종일,

보수란 글자를 마음에 매어본다.

그런데 참 꿀꿀해지는 것이다. 현실이

가뭄의 뙤약볕에 말라 비틀어지는  잡초처럼 푸석거리는 것이다.

 

하루 종일,

두 단어를 머리 속에 넣어본다.

그런데 참 가슴이 미어지는 것이다. 녀석은

목이 메여 도대체 목구멍으로 넘어가려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 것이 있기나 한 것인지

상상 속의 동물처럼 그려내려고 할 뿐

어처구니 없는 현실에 살 수 없는 무엇인 것처럼 체하기만 한다.

 

어쩌면 세상은 자꾸만 마르고 탄 똥만 눈다. 어쩌면 세상은 변비꼴통이다. 아 지근
  
 

 보 라 


 
내가 너에게 취한 것은

아마 감청感靑때문이었을 것이다.

감청에 눈이 어두워 다른 색은 색도 아닌 듯

어깨에 힘 좀 주고 다녔을 때일 것이다.

 

너가 나에게 취한 것은

아마 자주自朱때문이었을 것이다.

자주에 눈이 어두워 다른 색은 색도 없는 듯

마음에 덧칠을 하고 다녔을 때일 것이다.

 

그런데 정작

우리가 너에게 취한 것은

아마 아마 보라輔拏때문이었을 것이다.

너와 네가 섞여 시나브로  말려오는 보라촉에

나와 네가 섞여 피우는 보라의 춤사위에 

(붓꽃)


 


깃대종 


 
건강한지, 잘 살 수 있을지, 행여 문제는 없는 것인지

활동에 안위를 묻는 이에게

운동이 어떤 상태인지 묻는 이에게

그리고 내일은 해가 뜰 것인지 묻는 이에게 가족과 친지의 안부를 묻다.

  

가족을 묻는 것이 세월보다 더 빨리변하는 시류를 묻는 것이 아니라,

그래도 너의 삶이 살만하다는 것을

그래도 너와 연결된 다른 너들의 삶이

악다구니가 아니라 한번 흉내내어 보고 싶은 것이라는 한마디를 듣고 싶은 것이다.

 

그래도

너의 가족들은,

네가 아는 이들의 연대는 ㅅ ㅏ ㄹ ㅁ  마디 마디가 따로 노는 것이 아니라

살만한 것으로 향한다는 소리를 하고 싶은 것이다.

 

친지들로 향하는 작은 시선이 따듯한 것은,

그래도 조카들이나 자라는 이들에게 따듯한 마음을 섞는 일이고,

너에게

너에게 마음도 삶도 한켠을 담보잡히고 싶은 것이다. 이념과 이데올로기에 나를

곧추 세우는 것이 아니라 머리로만 말로만 연대의 깃발을 나부끼는 것이 아니라

물밑의 손발이 끊임없이 부지런을 떠는 몸짓이라는 것.

 

그래서 그 몸짓이 다행히도 그 스러진 깃발을 세우는 것이라고, 그 삶의 깃대를 곧추 세우는 것이라고

거름은 거름을 낳고, 거름은 거름의 거름을 낳고, 이 몸이 스러져 거름이 되더라도

밟고 밟고, 손을 포개고 마주잡고, 나를 넘고 넘어서는 일이라는 것을 그렇게 몸의 연대로 밀고 가는 것이리라.

 

그렇게 어느새 가족의 경계가 묘연해지는 것이리라. 친지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것이리라.
 
  


  
 잡아라 

 
절박이란 말이 입에서 새어나왔다. 정말 절박해서였을까? 절박이란말이 그렇게 쉽게 쓸 수 있는 것일까? 어쩌면 그놈은 신음같을 것은 아닌가? 고문의 막바지에 나오는 신음같은 것이지 옛날이야기처럼 술술 나오거나 저자거리에서 회자되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네가 절박이란 금지어를 사용했으므로 절박이 전염되는 것은 전적으로 너로부터 책임이다. 그로 인해 평온과 새순이 베여 연두빛 피가 흥건해지거나, 마음에 아픔이 스며들어 밤잠을 설치거나, 먼너에게 취해 더 간절해지거나 내몫이 너의 몫을 담지 않고 생각을 할 수 없게 된다면... ... 그 방이 붙은 것을 보았는가? 그러면 당신은 무엇을 잡을 것인가? 신음처럼 새어나오는 그 몸빛 절규로부터.. 그러면 나는 무엇을 잡을 것인가?
  
 


  
 호인好人과 잔인殘人의 사이 

 
 

돈칠한 일터는 돈을 남기기위해 협박을 일상화하는데, 안타깝게도 편안함의 지시에는 익숙치 않다. 다가올 것이 자신의 본능에 위협이 되지 않으므로, 상황을 넘겨도 된다라는 생각이 그 틈을 비집고 있다. 그래서 대부분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방법으로 잔인함을 쓴다. 잔인을 은연중에 비추면,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긴장하며 상황을 넘겨도 되라는 생각을 쭈욱 짜버리게 된다. 그 위협과 협박에 자극을 받아서야 움직인다. 그러니 사람다움은 상황을 쥐어짜는 잔인보다 사람을 움직이는 힘이 약하다. 
 

그런데 잔인에 익숙하게 되면, 잔인을 부리는 사람이나 잔인으로 움직이는 사람이나 물리력에 익숙하게 되어, 늘 불안을 중심에 넣는 셈이다. 불안을 동력으로 삼고 사는 사람들은 늘 힘의 지시에 익숙하게 된다. 끊임없이 다른 관계를 잘라버리고 사소한 관계를 자라게 하는 능력이 부족하게 된다. 어쩌면 상황은 악순환의 문턱으로 들어가는 셈인데, 문 안에 들어서면 그 소용돌이와 늪에서 헤어나기 힘들다.

 
잔인을 벗어나는 길은 어쩌면 스스로 단련하거나 세련의 기술을 익혀야 하거나, 익힌 이들이 우세를 점해야 한다는 점이다. 내면화는 현실이기에 무서운 것이다. 문 안에 들어서면 문밖이 현실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양쪽 다 엄연한 현실이다. 불안하지 않고 스스로 서는 편이 혼자나 여럿을 위해 서로 좋은 일이다. 일들도 미리미리 여물게 하는 기술이 필요하다. 의타심을 갖지 않게 하는 것도 이런 좋지 않은 상황을 예방하는 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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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톱도 길어지고, 머리카락도 많이 웃자라있다. 일상은 숨이 차있고, 모임과 모임사이는 틈이 없이 비좁고  빡빡하고 팍팍하다. 일터 일로 잔뜩 신경이 곤두서있다.  여유를 음용치 못해 불안하고 있을 무렵, 어김없이 읽을 거리를 마저 읽지 못한 채 모임 앞에 선다.  하고싶은 이야기를 책속의 밑줄을 빌려 한다. 계속되는 동어반복이지만, 스며들고, 마음 속으로 가져가는 일은 또 다른 행로이겠다. 진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새벽 출장으로 무르익은 자리의 아쉬움을 뒤로 한다.  

인천으로 오가는 길, 욕심으로 가져간 책들이 밀려오는 졸음으로 밀렸다. 어제 박음질한 단 한장만 곱씹게 된다. 저녁에 돌아와 웃자란 머리를 자르고, 손질해주겠다는 사장님께 바쁘다는 눈치를 주며 덜 다듬은 채 돌아온다. 쪽잠을 자서 피곤을 던다는 것이 벌써 한시간 남짓 잠을 청해 약속한 손전화에 잠을 깬다.  

잠결에 걸어가 뜻이있는 집에 들러 쟈스민차로 잠을 밀어내고 지인들과 선거를 여운삼아 이야기를 건넨다. 찻집의 정원은 마거리트와 작약, 장미가 불쑥 손을 내민다. 밤이 색깔있게 내린다. 이야기도 내린다. 진보는 삶을 섞을 수 있거나, 열 수 있을까? 문화도 얇고 원심력의 자장과 머리만의 확장속도는 겁이 난다. 말로만 연대뿐, 몸의 연대는 씻고 찾을 길이 없다. 고민도 생각도, 짧은 삶의 편린도 섞이지 않는다. 벌써 시선은 십년 십오년으로 가 있지만, 또다시 유사한 상황이 막다른 골목에 서 있다. 접촉점도 접촉선도 접촉면도 접촉삶도 없는 진보가 무슨 진보인가? 그저 시류와 유행에 편승할 뿐 보고싶어도 만나고 싶어도 얘기하고 싶어도 얘기할 수 없는 서울에, 아니 지금여기가 아니라 저기먼곳에 머리를 담보맡긴 진보와 무엇을 도모할 수 있을까? 

검붉은 작약이 검게 익는 밤에 혀를 날름날름 내민다. 별들도 잎새에 이는 바람결에 잠들고 있을 듯, 잎새를 들추고 싶다. 당신의 마음을 들추고 싶다. 당신의 삶의 흔적을 들추고 겹친 잎새처럼 겹치고 싶다. 

100602 선거날 100603 런던코뮌세미나 6장이론적 배경 100604 참* 뜰이있는집  

 뱀발. 머리진보, 몸진보, 생활우파, 머리좌파, 시간우파, 삶좌파, 머리진보-삶우파,관계우파,관계좌빨...마음만진보, 마음도진보....괜한 딴지다. 물론 나에게도 말이다. 세미나 뒤풀이에서 *샘이 질문을 던진다. 두바이에 원전수출을 엠비가 했는데 왜 했을까요? 왜 했을까요? 몸에 뭍어있지 않는 앎들을 수소문해야 했고 어렴풋이 긁어오는 지식은 아무런 답변을 뱉어내지 못한다. 의문도 갖지 않았고, 선무당같은 앎들을 연결시켜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당위만 전시하는 모습이 들어오고 예민하지 못함이나 어설픈 앎의 뿌리들.......이 생각을 스친다. 바람이 안개처럼 몸에 달라붙는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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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움직인 동선에 대해 피터지게 절망하라(作)

맥주 캔을 따서 한모금 들이키는데, 문자가 온다. 살아있으면 응답하라....그래서 함께 자꾸 늦어지는 지역 방송의 시스템을 운운하며 시시콜콜한 선거이야기를 한다.  

그러다보니  십여년쯤 일이다. 엠비로인해 나서지 않은 사람이 나서고, 말도 되지 않는 것이 말 꺼리가 되는 현실이 되풀이 되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자꾸 민주당이 눈앞에 오르는 것이 아니라, 외려 진보에 눈길이 간다. 또 한번의 기회가 왔다는 생각이 든다. 그들이 몸으로 열 수 있는 능력도 없으며, 할 수 있는 것도 별반없다. 온몸으로 성장을 말하는 자본주의신자임이 여실히 증명되었기 때문이다. 진보가 정녕 진보라면 이 환상의 잔치, 이 땅의 어리석은 알을 깰 수 있는 능력을 보여줄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그래도 한차례 준 것이 아닌가 한다.

죽은 노무현을 빌미로 그들은 성장을 이야기할 것이다. 어떻게 되는 성장인지 모르고 그저 무의식에 감염된 신자들앞에 발전을 이야기할 것이다. 그 치적과 입발린 소리를 어쩔 수 없으므로 또 되뇌일 것이다. 그래 이 상황은 달라진 것이 없다. 디제이와 노무현. 발을 딛고 선 상황은 변함없다.  시민사회단체는 별의별 프로포즈를 다했다. 정치한다고, 제도권의 등을 업고 무엇을 한다고 그렇게 명멸한 수많은 별과 진로를 보았다. 그런데도 반엠비의 응집력만 있다. 아무생각없는 반대의 응집력만 간신히 상황을 유지해나간다.

이 단단한 알을 뒤덮고 있는 자본의 공기와 그 호흡의 중독은 다른 공기로 살 수 없다 한다. 자본주의신자는 자본의 증식이 없는 순간, 목숨이 다한 것으로 안다. 그래서 알을 깰 수 없다. 진보의 바늘들. 진보의 생각들이 아니라 진보의 몸들. 진보의 다른 삶들이 어쩌면 조금씩 조금씩 그 단단한 껍질을 조금씩 조금씩 금을 가게할 수 있을지 모른다. 이념과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삶의 동선이 조금씩 다른 공기와 다른 호흡의 맛을 보여줄지 모른다.

구호를 믿을 수 없다. 반대로 나온 구호나, 삶을 담지 않은 구호를 보아왔다. 좋아할 수 있으나 좋아할 것이 없다. 행여 반성한다면...죽은 이를 들여놓지 말고 정말 반성한다면, 말이 아니라 몸으로 보여줄 것이 있는지? 별반 바랄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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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시간, 손님이 온다. 오전 일정도 틀어지는 바람에 시간도 어정쩡해 먼저 자리를 뜰 수가 없다. 말미 몇가지 챙길 일들이 생기면서 또 한차례 늦어진다. 십여분정도 시간에 대지 못할 것 같았는데, 지하철을 갈아타고 도착하니 30분 이상 늦었고, 회의는 벌써 들어가 있다. 


#1.

참*와 아***는 이상일까? 어제밤 헤어지며 받은 말이 남아있다. 생*이 현실이라면 말이다.

 

어제 지하철을 타면 읽은 꼭지가 튄다. 요지는 이렇다.

이론은 근육이다. 중력에 풀죽으며 소멸하는 것이 아니다. 설명과 해석이 아니라 근육을 써서 중력을 벗어나 반동하는 새로운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객관적인 판단이란 것은 이미 정치적인 입장을 가진 것이며 행동을 전제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론이란 현실의 벽에서 그것을 넘기위해 새롭게 탐구하며 시도하는 행위를 포함하는 것이다.

[인문좌파를 위한 이론 가이드]

현실이란 바다에 뿌리를 내릴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이상이라면, 현실에 연착륙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재정-잡지-회원-먼회원-웹진-돈-작은모임-대중강좌-회비-연구팀. 그래 우리 수준을 냉정히 파악하자. 우리가 하고싶은 것과 할 수 있는 것을 냉정히 따지다보면 정말 뜻이 통하는 사람들에게 손이 펼쳐지는 것이다. 알음알음의 수준을 어떻게 벗어나는 것인지? 벗어난 적이 있는데 눈치를 차릴 수준이 되지 않는 것인지? 시도와 합의된 실험을 해보기나 한 것인지? 우리가 부담지우는 것이 열정일 뿐이어서, 그 다음은 간수도 관리도 하지 않는 것인지? 행여 돈냄새나는 영업행위로 비춰져서 마음이 내키지 않는 것인지?

운영에 대한 걱정을 내리는 것이 부담스럽게 하는 일이지만, 현실의 바닥의 깊이를 같이 느끼는 것이 오히려 운영을 모호하게 대리하는 것이 아니다. 운영에 대해 아프지만 공감하는 편이 스스로 서는 것에 도움되지 않을까? 의탁이나 대리행위는 이제 줄여야 할 때가 된 것은 아닐까? 나의 문제의 일부분으로 가져가는 것이 낫다라고 판단한다.

인문학을 한다는 것이 늘 다른 생각이나 관점을 현실에 섞거나 만드는 것인데, 우린 작은 일상과 문제에는 너무 인문의 결이 살아숨쉬지 않는 것은 아닌가? 삶의 결은 보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일상의 작은 것들에 새눈을 붙여줘도 괜찮을 것 같은데 말이다. 어쩌면 현실을 인정하는 법에도 인색하고, 현실을 달리 여겨볼 엄두도 내지 않는 것이 지금의 모습은 아닌가?

#2

궁해서 증명을 찾는 것일까?  생각을 위로받기 위해 시차를 두고 책들이 나온다. 그래 이것이 나의 생각이었다고 증명해보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가?그런데 그들의 생각이 풀어서 나올 쯤이면 비슷한 순간과 환경에 솟아나온 것이다. 그런 것들을 감안해보면 조금 새로운 생각들은 차라리 현실에서 밀고 나가는 것이 낫다는 것이다. 책들로 합리화를 받는 것은 이미 늦은 것이고, 문제는 현실을 얼마나 밀고 나가는 것인가이다. 그것이 열매로 맺든, 상처로 결과짓든 상관할 일이 아니다. 열매이든 상처이든 그 과정을 빌미삼아 다른 것을 할 수 있는 발판이 만들어진 것이다.

유명(한이,한것)에 목을 단 이들은 여전히 패션을 찾을 것이고, 그 글귀를 목에 걸면서 합리화를 할 것이다. 그렇게 명분이 생겨야만 움직일 수 있는 이나, 습관은 고질병이다. 말로만 인문을 외치는 환자이다. 진보를 자칭하는 자들은 여전히 유명한 이의 렌즈를 통해서만 자기 말을 한다. 결국은 자기 말이나 생각이 없다는 것을 우회적으로 알리는데, 그들의 고민 속에는 일상이 없다. 일상을 삭여내는 이가 드물다(없다라고 쓰고 이렇게 양보하고 있다.). (유명)렌즈의 자막과 슬로건만 있을 뿐이다.

일상에 인문의 결을 들이밀지 않는다. 일상의 결에 인문을 스미는 연습을 하지 않으면 인문도 없으며 새로움도 없다. 현실이란 일상에서만 새로운 것이 뿌리내릴 수 있으므로, 그러지 아니한 것은  뿌리내릴 수 없으므로 현실이 아니다. 현실을 살아낼 수 없다.

# 3

삶을 만들어내지 않으면 혁명은 없다. 혁명은 삶위에만 착근할 수 있다. 만들어진 삶이 없다면 어떤 혁명도 실뿌리를 내리지 못한다. 삶이 지난 뒤에야 이론이 생긴다. 이론이 생기면서 다른 현실을 볼 수 있다.(이론은 근육이다라는 논리를 빌린다면)

자꾸 작고 세세한 것에 집착하는 이유다. 세밀하고 작은 것에 간을 배이게 할 수 없다면 하물며 인문을 적용하고 연습해볼 현실은 어디에 있을까? 저기 렌즈를 빌려 해석하고 설명하는데 쓸 뿐, 기껏 아이에게 실험을 할 뿐 그 이상은 없다.

# 4

+ 지금에 대한 관심과 연결 강도, 위원회의 자발성, 자발적 알림,관심도
- 결정난 사항에 대한 진척 부족, 사*국의 고민 외화부족, 영업아이디어-실행력부족, 소수집중,공개정도 약함
* 소위*회의 현실에 대한 아이디어와 사회적 실험-역할분담, 고민의 자생성
/ 동아리의 울타리, 타단체의 경험 접목부족,기획능력(만)

 

뱀발.  

1. 일터 일로 중간중간 어제 느낌을 단다. 달다보니 기분에 따라 달리 말들이 앞을 선다. 뱉은 느낌은 바늘이 되어 고스란히 돌아온다. 마음에 박히다. 

2. 김수영의 말이 남다.  

시작(詩作)은 머리로 하는 것도 아니고, 심장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몸으로 하는 것이다. 온몸으로 밀고나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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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oken he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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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무겁다. 늦은 점심에 졸음이 밀려와 의자에 눈을 붙인다. 그래도 몸은 편치 않고 갑갑한 마음이 더해진다. 사무실을 조금 일찍나와 뭔가 마음의 가닥을 풀 꺼리를 찾지 않으면 안될 듯 싶다. 일터 일도 그렇고 깔끔하게 해결될 기미가 적은 것들이 마음에 잔뜩 채워져 있어, 그래도 뭔가 해결책이 있지 않을까 싶다란 꼭지를 그림에 건다. 강렬한 색의 어감을 설핏 들어왔기도 하고, 뭔가 몸으로 말하고 싶은 것이 있겠지.

#1

이른 잠으로 새벽. 선선한 기운이 느껴지는 사이 딴지일보 총수의 안*정대담의 말미 눈물을 훔치는 사진에 스크롤이 가있다. 그리고  한숨 더 잠을 청한다.

큰방에서 토론이 붙었고 대각선 맞은 편에 안*정이 있고 몇번의 논전이 오고간다. 그리고 난 당신이 자본에 대해 무슨 생각을 하고 싶은지 질문을 했고, 도대체 하고 싶은 것이 노**의 주변을 벗어나기 위한 것이 있냐고 말하지만 그는 의중을 넘어 태도를 물고늘어서는 것이다. 그래서 의도적인 위악으로 받아치고 자리를 일어선다. 그러다가 낡은 건물을 빠져나가려다 한번은 막다른 길을 만나고, 한번은 옥상으로 통하는 굴같은 곳을 간신히 기어올라간다. 그 통로로 가니 가야하는 산중턱의 봉우리위에 지름길로 온 셈이다. 그렇게 장면이 끊기고 어디 전주의 외곽지대에 멈춰선다. 토론하던 곳에서 벌써 멀리 벗어났고, 그곳으로 되돌아가려한다는 생각에 조급함을 머금고 있다. 옆에 아리따운 친구가 서있고, 그 친구는 위악의 이유에 대해 이해하겠다고 위로해준다. 따듯한 손을 잡고, 또 한차례 길을 잃고 마음은 그리로 가야하고..

. ... 시간에 대한 강박으로 새벽잠을 설친다.

#2

그의 그림은 성의없다. 판단을 정지하고 도움자료 없이 그림을 본다. 여자의 실루엣이 낙서처럼 여기저기 있고 의도하는 것에 접촉이 되지 않는다. 천천히 흔적보다 색이 강렬하게 들어오는데 제목도 그러하다. 녹색, 노랑보다 덜한 노랑, 빨강보다 더한 빨강....그 바탕에 톤을 깊이 만드는 것이 인상적이다. 색감에 심혈을 기울이려는 듯 파랑과 검정이 캔버스 위에 두께를 더하고 있다. 몇번을 보고나서야 의중이 올라오는 듯 상처난 마음에 그나마 마음이 머문다. 도록을 보고 몇편의 평론을 살피다보니 색에 대한 부분만 밑줄이 가고, 나머지는 글쎄 ..잭슨폴락처럼 캔버스를 만드는 과정, 몸와 음악의 캔버스 작업에 마음이 가긴 하지만....그렇게 생각과 마음을 열어주지 못한다.

"마티스의 색은 아름답다. 그러나 모이소의 색은 자유를 가졌다. 칸딘스키의 자연은 음악이다. 그러나 모이소의 언어는 원초적이다. 피카소의 생각의 인간의 이해다. 그러나 모이소는 인간을 우주적 존재로서 이해하고 있다. 샤갈은 생명의 찬양을 얻었다. 그러나 모이소는 대중의 삶에 기쁨을 알게 한다. 라파엘로는 예술의 꽃을 피웠다. 그러나 모이소는 구상과 비구상의 경계를 지웠다."



뱀발. 꿈까지 꾸리라고 생각진 않았는데, 여러 일상들이 여지없이 겹쳐겹치고, 조각난 마음들. 마음에 얕게 붙어있는 몸의 지침처럼 이런 저런 단편들이 모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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