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우리는 야만인이 문명인보다 자연스럽다고 여기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야만 상태보다 폴리스에서 사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고 여겼다. 33

 

아퀴나스폴리스적 동물사회적이고 정치적인 동물로 번역한다...그런데 아퀴나스는 사회적 동물이라는 표현을 훨씬 더 자주 사용할 뿐만 아니라 폴리스라는 한 단어로 표현되던 것을 사회와 그것의 정체(다스림)로 구별하고 있다....사회와 정치의 구별 가능성을 열어놓음으로써 아리스토텔레스가 한 유명한 말의 번역은 정치적 동물이 아닌 사회적 동물로 굳어졌고, 정치적 삶 또는 좋은 삶 없이도 사회적 삶이 가능하다는 생각이 생겨났다. 36-37

 

만인에 대한 만인의 전쟁의 원인은 경쟁, 불신, 공명심이며, 이 세 가지는 인간의 자연 본성으로부터 나온다. 그래서 홉스에게 인간의 자연 상태는 곧 전쟁상태이다. 이러한 전쟁 상태에서는 올바름과 사악함의 구별이나 정의와 불의의 구별이 있을 수 없다. 공통의 권력이 없는 곳에는 법도 없고, 법이 없는 곳에는 불의도 없기 때문이다. 45

 

홉스는 전쟁 상태로부터 빠져나오기 위한 기본 자연법의 원칙을 평화를 추구하라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자신을 방어하라로 규정한다. 후자는 자연권을 함축하고 있다. 홉스는 이러한 기본 자연법으로부터 제2의 자연법이 도풀된다고 말하면서 권리의 포기를 주장한다. 모든 수단을 동원해도 자신을 방어하기 어렵다면 강력한 주권자에게 권리를 양도함으로써 자기를 보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권리를 상호 양도하는 것이 계약이다. 47

 

게몽사상사들과 자유주의자들...이러한 사회 분화의 추세는 턱과 무관한 자유연애의 정당화로 이어졌다. 평범한 사람들도 누구나 연애할 수 있고 교회나 가문의 허락없이 결혼할 수 있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그리고 19세기에는 종교적 목적과 도덕적 가치 평가가 배제된 예술, 에술을 위한 예술이라는 슬로건을 내건 작품들이 탄생했다. 이런 분화는 어쩌면 17세기의 자유주의자들이 의도하지 않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자유 담론은 사회가 수많은 자율적 영역들로 분화되는 데 직간접적으로 기여했다. 63

 

루소는 만장일치의 게약으로 탄생한 공화국을 공동자아”, “공적 인격등으로 표현한다. 개인에게만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은 단어인 자아’, ‘인격등이 공동적인 것 혹은 공공적인 것이 될 수 있다는 관념, 이것이 루소의 계약론이 앞선 다른 계약론자들과 같는 차별점이다. 괴물이 곧 나라고 주장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75

 

루소는 계약에 참여한 사람들을 집합적으로는 인민”, 참여 개인으로는 시민”, 법률에 종속되는 자로서는 신민이라고 부른다. 75

 

신이 죽고 세계의 궁극적 의미는 상실되었지만(탈주술화의 세계, 세계의 의미 상실은 베버에게 니체의 영향이다.) 학자는 나름의 가치로서 진리를 추구하고 예술가는 나름의 가치로서 아름다움을 추구하며 종교인은 나름의 가치로서 신성한 것을 추구한다. 베버는이러한 근대의 분화된 가치 질서를 가치 다신교라고 표현한다. “어떤 것은 그것이 아름답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신성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또 그것이 아름답지 않기 때문에, 그리고 그것이 아름답지 않은 한에서, 신성할 수 있다는 것을 근대인은 받아들여야 한다....가치 다신교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추하게 생긴 위인이 있을 수 있고, 천박한 행동을 하는 과학자가 있을 수 있고, 과학적 진리에 반대되는 설교를 하는 성자가 있을 수 있다는 점을 받아들인다. 진리,아름다움, 성스러움 사이의 연쇄가 끊어졌기 때문이다. 97

 

아렌트공적이라는 용어가 뜻하는 두 가지 현상을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첫째, 공적인 것은 공중 속에서 나타나는 모든 것이 모두에 의해 보일 수 있고 들릴 수 있으며 매우 널리 알려질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둘째, 공적인 것은 우리에게 있어 공동의 것이며 우리가 그 속에서 사적으로 소유한 장소와 구별된다는 점에서 세계 그 자체를 뜻한다. 그리고 아렌트는 이런 세계 안에서 함께 산다는 것은 우리가 탁자에 둘러앉아 있는 것처럼 서로 관계를 맺는 동시에 서로의 독자성을 유지하는 것이라는 말을 덧붙인다. 110

 

아렌트가 볼 때, 중세에는 관조적 삶’, 즉 혼자 사유하고 명상하는 수도자의 삶이 활동적 삶을 대체해버렸다. 그래서 인간의 조건의 한 축에 상응하는 활동인 행위와 정치적인 삶이 위축되었다. 근대에 들어서자 관조적 삶은 비판의 대상이 되었지만 관조에 맞서 강조된 활동은 노동에 국한되었다. 근대는 인간을 노동하는 동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노동과 작업을 중심으로 인간의 활동적 삶을 회복하고자 한 마르크스의 시도가 인간의 조건 중 하나인 다수성을 고려하지 않았다고 비판한다....마르크스는 관조와 행위의 대립에 주목하지 않고 관조와 노동을 대립시켜버림으로써 활동적 삶을 왜곡했다는 것이다. 111-112

 

아렌트에게 정치적인 것은 다수의 인간들이 서로 간의 차이를 기반으로 토론하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그것은 합의나 계약과 같은 결과를 낳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행위의 과정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다....아렌트는 폴리스에서의 행위에 대한 개인적 관조의 우위를 주장하기 시작한 소크라테스학파 이전의 그리스, 즉 오이코스에서의 소유를 기반으로 다수의 시민들이 자유롭게 토론하던 폴리스의 전성기를 모델로 삼고 있다...이외에 미국 혁명의 전통을 높이 평가하고, 혁명초기 사라져버린 평의회들에 주목함으로써 그가 지향하는 정치의 상을 직간접적으로 드러낸다. 113

 

아렌트는 프랑스 혁명이 가난한 자들이 정치 무대에 등장함으로써 필연성, 생존 과정 자체의 절박성 때문에 자유를 포기해야만했던 혁명이자 빈곤과 필요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실패한 혁명이라고 평가한다. 그리고 그 이후에 벌어진 유럽의 혁명운동들도 대부분 사회의 문제, 즉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는데 집중했고, 그로 인해 공적 자유의 실현과는 거리가 멀어졌다. 그에 반해 미국에서는 빈곤의 곤경이 없었다. 그곳의 근면한 자들은 필요의 절박함으로 찌들지 않았고, 혁명이 그들에 의해 압도되지도 않았다.“ 그래서 미국 혁명에서 제기된 문제는 사회적인 것이 아니라 정치적인 것이었으며, 혁명의 방향은 자유를 확립하고 지속적인 제도들을 설립하는 데 집중되었다.115

 

아렌트가 공적 영역을 정치와 동일시한데 반해, 하버마스가 말하는 공론장은 정치적 공론장의 경우에도 정치 체계와 구별된다. 하버마스는 공론장에서 활동하는 결사체들을 정치 및 경제와 구별되는 시민사회라고 부른다. 아렌트의 공공성 이론과 구별되는 하버마스 이론의 핵심적 특정이 바로 행정 중심의 정치 체계와 공론장을 구별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제3영역으로서의 시민사회를 정치사회로부터 뚜렷이 구분한다는 점일 것이다. 126

 

하버마스19세기 말부터 국가의 사회화사회의 국가화가 진행되면서 공공 부문과 사적 부분의 교착 경향이 일어나 정치적 공론장의 독자적 입지가 줄어들었다고 분석한다....20세기에 들어와서는 부르주아 공론장이 붕괴되어 갔다고 진단한다. 대중매체와 광고의 발전으로 문화를 논하는 공중에서 문화를 소비하는 공중으로의 변화가 일어났기 때문이다.....19세기 파리의 갤러리는 단순히 미술 작품을 관람하는 공간이 아니라 수많은 무명 평론가들이 모여 논쟁하는 장소이기도 했다.(샤를 보들레르) 128 - 체계에 의한 생활세계의 식민화

 

루카치는 자본의 상품의 물신숭배를 지적한 것을 모티브로 삼아,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인간의 대상성 형식이 물화된다고 비판했다....대상성 형식이 물화된다는 것은 우리가 사물이 아닌 것도 사물처럼 측정 또는 계산 가능한 것으로 인식하게 된다는 것을 뜻한다. 이렇게 되면 인간의 정신, 감성, 사회적 관계 등이 모두 점수, 수치 등으로 매겨져 서열화될 수 있다....교육공학에서 사람을 인적 자원으로 간주하는 것도 물화의 사례로 볼 수 있다. 130

 

하버마스는 체계이론의 체계 개념을 수용하면서, 이 하위 체계들 중 언어적 의사소통이 불필요한 두 개의 체계, 즉 권력을 조절 매체로 하는 행정 중심의 정치 체계와 화폐를 조절 매체로 하는 경제 체계만을 자신의 사회이론으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학문, 교육 등 언어매체가 사용되는 영역은 조절 매체에 의해 의사소통 부담이 경감되지 않기 때문에 생활세계로부터 분리된 영역이 아닌 것으로 간주한다. 반면에 권력과 화폐라는 조절 매체는 언어적 의사소통의 부담을 경감시키며, 그에 따라 정치와 경제는 생활세계로부터 자립화된다고 본다. 쉽게 말해, 힘과 돈을 이용해 서로 묻지도 따지지도 못하게 하는 영역이 말로 해결해야 하는 영역으로부터 떨어져나온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버마스는 사회가 생활세계의 단계와 체계의 단계라는 2단계로 고찰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두 단계의 구별은 의사소통적 행위와 목적론적(전략적) 행위의 구별에 상응한다. 따라서 하버마스에게 체계란 인간을 수동적으로 만드는 괴물인 반면, 생활세계란 우리가 함께 능동적으로 일구어나가는 인간적 세계라고 규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137-138

 

하버마스의 공론장이 제도로 개념화될 수 없으며, 더구나 조직으로 개념화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 공론장은 권한, 역할, 구성원 자격 규제 등을 갖춘 규범적 구조물이 아니다. 공론장은 외부에 대해 열려 있고 변화 가능한 지평이기 때문에 체계도 아니다. 하버마스는 공론장을 정보와 견해의 의사소통을 위한 네트워크로 서술하며, 그것이 일상적인 의사소통적 실천의 일반적인 이해 가능성이라는 기초 위에서있다고 말한다. 따라서 공론장에서는 전문가들뿐 아니라 문외한도 부담 없이 의사소통에 참여할 수 있다. 그리고 공론장은 생활세계라는 드넓은 일상적 상호작용의 저수지를 기반으로 한다. 141

 

푸코의 비판이 계보학적이라 함은 우리가 존재하는 형식으로부터 우리가 행할 수 없고 알 수 없는 것을 연역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오히려 우리에게 우리의 존재를 만들어주었던 우연성으로부터 우리가 존재하고 행하고 생각하는 대로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행하지 않고 생각하지 않을 가능성을 분리해낸다는 의미에서라고 말한다. 이 말 그대로를 해석해보자면, 고고학이우리의 현재적 존재가 과거로부터의 연속적 서사도, 역사적 진보도 아님을 보여준다면, 계보학은 더 나아가 우리의 존재에 부과된 이념을 거부할 수 있는 태도를 가르쳐줌과 동시에 우리가 다르게 존재하고 행하고 생각할 수 있게 해준다. 푸코는 주제 만들기 방식과 관련된 고고학적 연구와 달리 계보학적 연구가 실천과 변화를 통해 주제 만들기를 수행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고도 말한다. 좀 쉽게 풀어보자면, 계보학은 고고학을 통해 족보의 우연성과 임의성을 깨달은 후 족보가 부과해온 가문의 의무와 다르게 행하고 아예 가문으로부터 이탈해서 살 수도 있게 하는 태도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에게 주어진 한계를 위반할 수 있도록 동력을 제시하는 방법론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150-151

 

푸코는 말과 사물의 마지막 부분에서 근대 에피스테메의 종말, 인간의 사라짐을 전망한다. 인간이 세계를 구성하는 초월적 주체라는 관념, 즉 인간중심주의는 20세기에 들어와 정신분석학과 문화인류학의 발전을 통해 무너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인간을 더 이상 주체가 아니라 무의식적 구조 혹은 잠재적 구조의 효과로 간주하는 구조주의적 반과학의 관점에서 볼 때, 인간중심주의는 근대에 한정된 사고방식이다. 그래서 인간을 중심에 놓는 배치가 흔들리게 되면 인간은 바닷가 모래사장에 그려 놓은 얼굴처럼 사라질지 모른다.” 154-155

 

존재의 미학을 추구하는 주체에게 중요한 것은 이러한 외적 관계가 아니라 자기와의 관계이다. 그래서 삶의 기술로서의 절제는 자기가 잘 돌보는 일이지 그 대가로 어떤 보상이 따르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지금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은 미래의 향락을 위한 금욕이 아니라 바로 지금 나 자신을 아름답게 만들고자 하는 노력이다. 자기 존재를 아름답게 가꾸는 것 또는 자기 배려에는 다른 외적인 목적이 없다.....푸코의 비판적 존재론과 존재의 미학을 통해 우리에게 괴물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다음과 같이 알려준다. 괴물이 우리에게 부과한 한계를 분석하고 위반의 가능성을 모색하라. 하지만 괴물 전체를 근본적으로 변형하려는 무모한 시도를 하지 말고 특정한 변형을 시도하라.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이니 우선 자기를 잘 돌보라. 자기를 돌볼 때 괴물의 시선으로 보지 말고 스스로 규칙을 세워 절제 있는 삶을 살아라. 162-163

 

인간은 커뮤니케이션할 수 없다는 루만의 주장은 사회가 인간으로 구성되어 있지 않다는 주장과 연결된다. 루만은 지금까지의 사회학이 가졌던 인식론적 장애물의 첫 번째를 사회는 구체적인 인간들로, 그리고 인간들사이의 관계들로 이루어진다는 가정이라고 말한다. 루만에게 있어 사회의 요소는 오직 커뮤니케이션들인 것이다. 175

 

현대인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에 대해 나는 나다라는 동어반복으로밖에 답할 수 없다. ‘나는00이다00자리에 무엇을 집어넣는다 하더라도 나를 온전히 표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렇게 온전히 표현될 수 없는 나를 그런 것처럼 대해주는 사회적 관게, 즉 나를 역할로서가 아니라 유일무이한 개인으로 확인해주는 관계에 대한 욕구가 커진다. 루만은 현대 사회에서 확산된 이러한 독특한 사회적 관계를 친밀관계라고 부른다. 현대 사회에서는 역할에 따른 익명적이고 비인격적인 관계들의 가능성도 확인되지만, 인격들이 서로를 유일무이한 세게를 가진 자로 확인해주는 밀도 높은 관계에 대한 욕구도 동시에 커진다. 178

 

루민의 매체이론에 따르면, 각 기능체계들 사이의 연결고리가 차단된 것은 사회의 기능체계들이 탈도덕화 되고 각 영역별로 커뮤니케이션의 성공 가능성을 높이는 상징적으로 일반화된 커뮤니케이션 매체들이 성립했기 때문이다. 중세까지 커뮤니케이션의 성공 - 누군가의 정보 선택 및 통지 기호 선택이 다른 누군가의 이해와 새로운 정보 및 통지 기호 선택으로 이어지는 일-종교도덕이 보장했다. 정치와 법은 이러한 포괄적 도덕의 영향력 아래 있었다. 그래서 악마적 예술이나 신성하지 못한 진리는 배척당했다. 그에 반해, 현대화 과정에 분화된 매체들인 권력, 소유, 진리, 사랑, 예술, 가치들과 권력의 이차 코드화 매체인 법, 소유의 이차 코드확 매체인 화폐 등은 각각의 맥락에서만 제안된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거절이 개연적인 경우에도 수용을 기대할 수 있게 만드는 기능을 갖는다. 예를 들어, 권력은 민방위소집 통지서 한 장으로 밤새 술을 마신 30대 아저씨가 아침 7시에 초등학교 운동장에 서 있을 수 있게 하며, 화폐는 그냥이라면 절대로 하지 않을 더럽고 힘든 일을 할 수 있게 한다. 그리고 사랑은 피곤에 삐든 상태에서도 연인의 모든 제스처나 말과 뉘앙스에 집중하면서 맞장구칠 수 있게 한다. 하지만 소집 통지서로 상품을 살 수 없으며, 돈을 많이 낸다고 재판에서 이길 수 없고, 권력으로 사랑을 쟁취할 수도 없다. 180

 

각 기능체계는 그 나름의 체계/환경 차이에 따라 작동하기 때문에 전체 사회의 구조 유지나 그 생태학적 위기에 대해 무관심하다. 기능체계들 간의 상호견제가 약화되면, 목적 지향이 강한 기능체계들은 고유의 실적 추구에 전념할 뿐 전체 사회를 고려하지 않는다. 루만은 1990년대의 저서들에서 경제, 학문 등 목적 지향이 강한 체계들은 빠른 속도로 세계화되는데 반해, 목적 지향이 약한 면역체계인 범은 세계법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국내법에 의존한 국제법에 머물면서 침식되고 있다고 진단한다. 그래서 법이 보장하던 규범적 기대의 안정화와 헌법적 기본권 보장은 약화된다.....기존의 코드들을 포함/배제라는 슈퍼코드가 무력화시키는 경향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배제되지 않기 위해 부정의한 전쟁에 대한 파병에 찬성할 수 있고, 배제되지 않기 위해 진리를 무시할 수 있고, 배제되지 않기 위해 사랑 없는 결혼을 할 수 있거나, 경제적으로 배제되지 않기 위해 사랑과 결혼을 포기할 수 있다. 포함과 배제의 차이가 첨예해질수록 현대 사회의 구조적 명령인 보편적 인권은 외면당한다. 182-183

 

대안적 커뮤니케이션이 송수신자로서 오늘날의 사회가 조금 다른 방식으로 재생산되도록 기여해야한다...이러한 기여를 통해 사회구조를 바꾸려는 노력이 힘겹다면, 그 노력이 우리 자신을 너무 불행하게 만든다면, 좀 쉬어도 좋고, 좀 이기적으로 즐겁게 살아도 좋다...우리 각자, 즉 각각의 나는 유일무이한 개인이며 사회의 일부가 아니다...사회구조를 변형하기 위한 노력은 내 삶을 즐겁게 또는 아름답게 만들거나 고통스럽지 않도록 하기 위한 투자이자 자아실현의 계기이다....노력이 성공하더라도 그에 대해 보상받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태도를 존재의 미학이라고 부를 것이다. 185

 

세 장면에서 괴물이 되진 말자는 충고를 듣는 인물들은 각각 어떤 규칙을, 즉 사람 취급받기 위한 최소한의 규칙을 어길 때 그 말을 듣는다. 돈 문제로 예술 동료를 곤경에 빠뜨리는 것, 돈으로 인간 신체를 노예화하고 성을 사는 것, 사랑과 섹스 사이의 견결 고리를 희화화하고 사랑에서 최소한의 일관성에 대한 기대를 좌절시키는 것 등이 그러한 규칙들이다......이 영화에서 괴물은 되지말자는 다짐이 함축하고 있는 것은 첫째 장면에서는 돈이라는 가치가 미적 가치를 대신해서는 안 되고 우정을 파괴해서도 안 된다는 것, 둘째 장면에서는 생필품에 대한 욕구를 상징하는 매체인 돈이 사랑이라는 매체가 상징하는 섹슈얼리티를 지배해서는 안 된다는 것, 셋째 장면에서는 그런 사랑이 남발되지 않음으로써 그 상징적 가치가 지켜져야 한다는 것과 섹슈얼리티가 우정을 파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191-192

 

필자는 괴물을 큰 괴물, 사회와 함께 살면서 각각의 고유한 사람 되기라는 힘겨운 과제를 포기하고 사회의 여러 조직들로부터 부여받은 역할과 자기 자신을 동일시하는 인간, 그래서 자신의 역할 수행에 대해 반성하지 않는 인간으로 규정하고자 한다....문제는 자신의 여러 가면을 비교해 살펴보면서 이렇게 괴물이 되어가는 자신을 반성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짐승, 사람, 괴물, 이 세 가지를 뚜렷이 구별하는 객관적 기준이 없기 때문에 인간은 오직 자신이 지금 과연 사람으로 살고 있는지, 오늘은 짐승처럼 행동한 건 아닌지, 요즘 괴물이 되어가고 있는 것 아닌지 끊임없이 반성하는 길밖에 없다. 물론 이렇게 반성하는 것 자체가 곧 사람됨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아무리 자신을 돌아보며 자신이 알지 못하는 다른 모습들을 염두에 둔다 하더라도, 보지 못하는 사각지대가 남기 때문이다...아무리 노력한들 자기자신과 자신이 아닌 것의 통일합리성에는 이를 수 없는 것이다. 200

 

학살 결정자들이 자신들에게 중요한 공적 역할을 부여한 맥락 이외의 다른 삶의 맥락에서서 자신의 가면을 되돌아보지 않았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그들은 히틀러와 당시의 독일 국가를 사회, 즉 큰 괴물과 동일시하고 거기에 복종했다. 그들은 나치 사회의 괴물로 사는 것이 곧 사회 속의 개인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푸코식으로 말하자면 그들은 자기 자신에 대한 역사적이고 비판적인 존재론을 가질 수 없었다. 202

 

필자가 이 책에 괴물과 함께 살기라는 제목을 붙이면서 강조하고 싶었던 것은 개인은 사회 속에 사는 것이 아니라 사회와 함께 산다는 것이다. 나는 사회와 동일화될 수 없을 뿐 아니라 사회 속의 일부도 아니다. 그리고 나와 함께 사는, 그래서 나에게 여러 가지 삶의 보람과 쓰라림을 동시에 안겨다주는 저 사회는 다맥락적이다. 나는 사회와 함께 살기 위해 학자로도, 선생으로도, 소비자로도, 소송인으로도, 당원으로도 살지만, 그 역할들 중 어는 것도 진정한 나는 아니다. “나는 나다라는 공허한 동어반복을 인정할때만, 그리고 끊임없이 자신을 되비추어볼 수 있을 때만, 나는 사회와 함께 살며 사람되기라는 힘겨운 과정을 계속해갈 수 있다. 206

 

 

볕뉘. 읽고 난 뒤 오랜만에 옮기니  가물가물하다. 밑줄로 상기시켜 본다. 니클라스 루만의 관점에서 철학자들을 맥락있고 간결하게 설명을 잘해두었다. 발표 밑자료로도 쓸모가 있겠다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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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121

 

대전미술의 모더니즘, 지역화가의 지역소재 작품(계룡산, 동학사, 목척교, 금강...)을 발굴해낸 전시가 인상픽다. 옛 충남도청을 활용한 점도 접근성도 좋다. 어제가 마지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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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길

 

 

지나온 길가로 우연히 발걸음이

다가서 멈춰진다. 가만히 웅크려

서성이다. 꽃이 진 줄 알았는데 

마음이 미리 진 걸 몰랐다.

지나친 골목을 들르다.

닫힌 점포의 사연이 궁금해 서성인다.

마음이 진 줄 알았는데

꽃을 미리 피운 걸 몰랐다.

그 골목 그 길가 안개처럼 내린

이슬들이 돌틈에 고여

잊힌 꽃씨를 틔웠다

때를 잊은 마음과
정신 줄 놓은 시간이

낳은 꽃씨들이 피었다. 

마음의 기름기를 빼고

시간의 채찍질을 거두고 간다. 

온길의 저기여기가 꽃길이다.

버려진 곳곳이 꽃밭이다.

온길이 갈길이다.

 



발. 자기계발의 신민. 아니라고 대답할 수 있을까. 올인의 기계. 이의 특징은 중독처럼 자각증상이 늦고 소진증상이 오면 회복시공간이 많이 필요하다.

마라톤을 하면 목마른 순간 물을 찾으면 이미 늦었다. 생각보다 몸이 필요하는 물은 아주 조금이다. 때를 늦추면 물도 갈증이상으로 필요하고 무거워진 몸은 금방 탈진상태로 될 수 있다. 어느 순간 물을 마실 시점을 놓친 건 아닐까. 갈증같은 조바심이 들어선 건 아닐까.

송곳 지노위 재판장면을 시청하다가 낯잊은 인물과 이름이 스친다. 르뽀작가 이★옥과 하종강이 아니라 하도강, 그리고 일반노조이야기가 나온다. `행위의 동원`이 아니라 `교감의 동원` 장면은 생생하기 그지없고 교과서 판본으로 삼을 듯하다.

「괴물과 함께살기」란 사회철학책은 제목처럼 아이러니하다. 괴물이 되지말자가 아니라 사는 것이 괴물일 수밖에 없다는 측면을 심도깊게 헤아리고 있다. 거기서부터 껍데기를 벗자고ㆍㆍ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은 온전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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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을 수 없어 터뜨리는 아우성

멈출 수 없어 흘러내리는 눈물

뜨겁다 못해 차가운        첫눈

차갑다 못해 시린           별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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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자꾸 되뇌는가

 

   

 

말을 만들거나 정한다는 것이 그리 좋은 일이 아니다.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것을 다 안을 수 없어서이기도 하고, 말로 묶어두자마자 운신의 폭이 그만큼 줄어드는 것이겠다. 하루하루 살아나기도 힘든데 말 같지 않은 소리로 삶을 추상화시켜 또 다른 구석으로 몰아버리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더 여유롭게 생각할 기회를 뺏거나 여러 갈래길을 오히려 막는 것은 아닐까? 삶에 밀려가는 강도는 개개인마다 가족마다 다 다를 수밖에 없다. 가족이라는 것에 남아있는 정서적인 연대도 점점 사라져간다. 사연만큼 서로 떨어져나가 혼자를 생산하기만 하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경제적 삶이 오롯이 가족과 개인을 짓누를 수밖에 없다. 잘 살든, 못 살든, 혼자이든, 여럿이든, 부양가족이 많든 적든, 아프든지 아프지 않든지……. ... 각자생존으로 몰리는 상황에서 피폐함은 늘어나고 원심력이 현실에 더 영향을 미쳐 더 크나큰 어려움이 목도될 수밖에 없는 것이겠다.

 

삶의 버거움을 얘기한다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은 일이다. 가뜩이나 조사하는 방법을 취해서도 안될 테고, 연구하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감추고 싶은 사실을 나눈다는 것은 쉽지 않다. 가뜩이나 예기치 않은 불운에 연루되어 빚마저 진 마이너스 삶들이라면 더 그렇다. 그래서 모임들 사이사이 양념처럼 나누거나, 책과 주제를 핑계로 가늠해보기도 하고 구체적이지는 않지만, 어려운 일상을 미뤄 짐작해보게 되는 것이다. 경제적 살림살이의 수준을 느낀다는 것마저 쉽지 않다. 아이들에 대한 기대도, 중요한 일의 순서도 모두 다를 테니까.

 

하지만 경제적 삶, 살림에 대한 규모나 틈을 엿볼 수 있다면, 자본주의 현실에서 그것이 제한하는 운신의 폭과 일상을 양적보다 질적인 측면을 살펴볼 수 있다면 어떨까? 모르는 것이 약인가? 또 다른 측면에서 보면 현실을 드러내놓지 않으면 어쩌면 더 나은 일상과 출구에 대한 생각조차 헤아리기는 더 어려운 것은 아닐까?

 

좋은 삶은 무엇일까? 우리는 다루어볼 여력이나 남아있는 것일까? 현실감 없는 이야기를 이론의 책장에서 가져다쓰는 것은 아닐까? 어디까지 살펴볼 수 있을까? 고민을 나눌 수는 없을까? 하지만 그 역시 책 속의 이야기일 뿐 지금 여기의 생생한 삶, 아픈 현실을 딛고 살펴볼 수 있는 또 다른 문턱너머의 이야기는 아닌가? 좋은 시절의 이론 속 탐구는 아닐까? 일상의 한 땀 한땀, 또 다른 아픈 생각들로 다시 채워지지 않는다면 이 역시 무용한 것은 아닐까? 그날그날 먹을 우유와 끼니 걱정도 어려운데, 여유가 가미되거나 경제적 삶이 받쳐주는 삶들의 현실을 어긋난 삶의 주변머리들이나 하는 얘기는 아닐까? 그래도 나눈다는 것은 정녕 우리들 관계에 도움이 되는 것일까.

 

좋은 삶, 좋은 이야기들이 고아한 고전의 풍미들 속에 멈춰져있다면, 단 한걸음도 현실을 변화시킬 수 없어 이 또한 자신에 대한 위안이나 위문은 아닌가? 곁의 살림에 대한 가늠이 없다면, 다른 이들의 삶들의 변화를 읽거나, 눈여겨볼 수 없다면 이 또한 유행을 쫓아가는 이야기는 아닌가? 돈도 시간도 빙빙 돌아가는 현실에 매여 있는데 좋은 삶이 가당찮은 말씀아닌가? 현실은 그저 빙빙빙 현기증나게 돌고 있는데 무슨? 당신같이 여유붙들어맨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닌가?

 

아니 또 다르게 생각하여 만의 하나 곁의 살림살이를 가늠하게 되어, 그것이 숨 쉬듯 서로의 일상 호흡으로 다가온다면 또 다른 출구가 될 수는 없을까? 곁의 삶의 패턴을 읽거나 소화하게 되거나 활동반경의 겹침도 생각해볼 수 있게 되는 것은 아닐까? 참여의 한계가 어디에서 나타나는 것인지? 해보고 싶은 것들이 어떻게 매여있게 되는 것인지? 조금 더 새롭게 살려나가는 일들의 영역을 서로 찾을 수는 없는 것인지? 살림살이가 일상의 데이터와 매체를 통해 간접적인 확인이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생생함이 각인되어 좀 더 가슴에 담는 말로 가슴에 새겨진 언어로 가슴을 뒤흔드는 몸짓으로 서로에게 다가서는 방법으로 전화되는 계기는 될 수 없는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와 같은 전제조건이 동일하다는 가정의 물음보다 선행되는 질문과 상황이 있다. 그냥 바라는 것을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삶이 있고, 영역이 있고, 계획이 있기에 의도가 드러날수록 목적은 외면되는 것이다. 삶의 동선이 우연히 마주치거나, 일상에서 만날 수 있다면 그만큼 같은 길을 걸어갈 수 있는 것이겠다. 하지만 거기까지일 수밖에. 상황과 처지, 형편이 다 다르기에, 그것을 이해한다는 것도, 그것을 너머선다는 것도 너무 힘들고 어려운 일이다. 가늠할 수 없다. 이 간극이 줄어들지 않고 멀어지기만 하는지. 가까워지고 있는데, 멀어지지 않고 가까워지는데 오해하는 것인지조차 모르겠다. 방편을 삼은 것이 무리수인지, 뜬구름인 것인지도 모르겠다. 삶들은 점차 이해해서는 안되는 것, 알려고 해서는 안 되는 것. 경제적 삶은 더 더구나 궁금증의 터부영역으로 자라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경제적 살림, 그 쇠락의 파고는 어김없이 여기에 미치는 것이겠다. 점점 더 살림살이의 어려움이 가중되고 안위를 찾을 수 있는 이들이 줄어드는 세상이다. 안온을 더 구할 수 있는데 기댈 수 있는 곳이 늘어나길 바라지만, 이 역시 이상이다. 갈증을 느끼지만 탄산수로 일시적인 해소만 할 뿐 끝내 약수를 구할 수 없는 현실. 어쩌면 그 현실을 직시해내고, 가능한 방법과 삶의 시나리오들을 강구해내지 않는다면 모임도 그 파고에 잠길 수밖에 없는 것은 아닐까? 바라던 안위와 마주잡은 손의 따스함도 잃고 각자도생이란 형용모순인 말에 매여 버리는 것은 아닌가?

 

가까운 이들에게 삶을 걸고 삶의 맥락을 짚어낼 때, 일상의 결의 혼자에서 슬며시 곁뿌리를 내릴 수 있는 것은 아닐까? 가까운 이들이 삶에 대한 단단한 벽을 좀더 말랑말랑한 것으로 바꾸는 계기가 되는 것은 아닐까? 나만의 갇힌 살림살이의 왜곡된 벽을 허물게 되어 살아지는에서 살아가는희미한 가능성을 맛보게 되는 것은 아닐까? 우리의 삶의 지평이 조금이나마 멀리 바라볼 수 있는 기회로 이어질 수는 없을까? 살림살이를 더 이상 고정된 것이나 내 삶을 짓누르는 등짐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함께 덜어내야 하는 우리들 삶의 지혜로 가져올 수는 없을까? 자본주의라는 칠흑 같은 어둠에서 살아지는것이 아니라 살아내는구명보트를 타는 것이라는 실낱같은 희망을 논할 수는 없는 것일까?

 

 

 

다른 삶은 어떻게 만들어갈 수 있는가

 

 

그때그때 살림살이의 수준과 굴곡을 가늠하지 못하면, 삶들의 형평성을 제대로 느낄 수 없다. 생동감 있는 정책이나 정치적 행위로 번지지 못하고 단절되는 것은 아닐까? 닫힌 주장과 닫힌 해석에 머물러 설득도 제대로 할 수가 없는 것은 아닐까? 자본주의 사회에서 삶이란 팔 할이 경제적 삶을 바탕으로 할 수밖에 없다. 경제행위로 귀결되고 경제행위에서 출발한다는 것을 헤아리지 못한다면 마르크스가 이야기했듯이 전체를 하나도 볼 수 없고 총체성을 느낄 수 없는 건 아닐까? 대부분의 판단 고리는 경제로 시작하고 귀결되며 경제의 맥락과 배후를 살펴야 한다는 것이 암묵적인 질문이자 주장이겠다.

 

연금, 공무원, 대기업, 정규직 등 상대적으로 안정된 일터와 생애주기 속에 있는 자신감들은 이런 평형감각 속에서는 다시 무게중심을 잡아야하고 잡을 수밖에 없다. 경제적 파이가 변했을 뿐만 아니라 변해가고 변해갈 것이기 때문에 깊이 있는 탐색과 자전거타기와 같은 기술을 배우는 것이 필요하겠다. 경제적 풍요와 빈곤에 대한 일상의 감을 갖지 않고서는 정치토론이 불가능하고 불용하다. 비정규직, 노인과 노약자의 삶을 비교해서 얻은 감을 느끼지 못하고서는 맥락있는 정책과 대안이 나올 수 없지 않을까?

 

뒷북만 치는 정치와 정책, 문화흐름들은 정작 경제적 삶의 저류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어 요구의 수준도 제도의 틀이 얼마나 왜곡되고 있는지 조차 보려고도 바꾸려고도 할 수 없는 것은 아닐까? 그러다보니 늘 피해자와 피해만 과장되게 나타나며, 같은 부류의 집단이 형평의 차이가 나는 집단과 어떠한 관계를 가지고 지향할 바가 무엇인지 알 수가 없게 되는 것은 아닌가? 그 평형감각조차 퇴화되어 버린 상태가 지금 여기의 수준을 나타내는 것은 아닐까? 반대의 논거만이 충만하고, 단기적인 시각만이 돋보이고 좀 더 장기적인 실용적인 대안들이 회자되지도 살아남을 길도 없는 것은 아닐까?

 

행위 이면의 경제의 맥을 잡으려는 노력은 경제적 상처로부터 삶이 떨어져나가는 이들에 대한 아픔으로 이어져있는 것은 아닐까? 밀려드는 아픔들에 대한 구체적인 현실을 헤아리고자 하는 것이다. 삶의 중심부에서 탈락하는 이들에게 삶이 바래져버리는 것을 사전에 체험하는 것이기도 하겠다. 그렇게 팔딱거리는 그물 같은 맥동 속에서야 모임의 존속도, 네트워크의 미래도, 변화의 조짐도 흐릿함에서 또 다른 가시성을 확보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사람의 이력과 삶의 맥락을 다시 보게 되는 바닥을 확인하고 나서야 일상과 삶의 질과 좀 더 다른 가치를 나누고 살필 수 있게 되는 것은 아닐까? 그렇게 살피면서 궁구한 것을 그제야 현실 속에 적응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아닐까? 살림살이의 파고와 아픔이 느껴지는 범위만큼에서야 자본주의를 벗어난 논의와 실천과 사유가 펼쳐질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지역이란 실체 없는 것이 그제서야 구체적인 이름을 얻게 되는 것은 아닐까?

 

경제에 목매인 살아지는 존재에서 경제의 자장에 정치를 삶 속에 대입시켜볼 수 있게 되는 기회를 얻는 것은 아닐까? 중앙이 아니라 분권의 실마리는 살림살이에 좋은 삶들의 자흔들을 모아 흔들리는 자장 안에서 힘을 발휘하는 것은 아닐까? 원심력이 아니라 구심력은 그렇게 생기게 되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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