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행복한 책읽기 - 김현의 80년대 중반의 독서비평집을 읽고 있다. 머리맡에 두고 새벽 이른 잠이 깨거나 잠이 오지 않을 때 아껴보고 있다. 1986년이 지나고 1987년 겨울에 머무르고 있다. 날카로움에 대한 감탄보다는 그 당시 낯부끄러움이 외려 밀려올라와 곤혹스러웠다. 안목과 시선이 부럽기도 했지만, 그 날카로움의 끝은 비평이 무엇인가 잘 드러내어준다. 몽매의 시절은 아니었을까. 아니면 젊음은 늘 부끄러워해야 한다고, 그래도 무언가를 하는 것이 대견하다고 할 것인가.....인물과 작품에 대한 또 다른 시선을 갖게 만드는 것 같다.

2. 고야 - 지난 주 다큐멘터리 <고야>편을 보았다. 예술 영화라고 하루에 한 편만 상영하였다. 물론 관객이 혼자인 것 같아 내심 독차지하는구나 싶었는데 상영 몇분 전에 몇 분이 더 관람했다. 마침 책들을 읽고 있기도 하고, 그 이력도 살피고 있는 참이어서 더 강렬하게 다가온 듯하다. 화면은 천천히 그리고 그 이력을 온전하게 전달해주었고, 시선은 더욱 깊이 들어갈 수 있어 고마웠다. 울컥거리는 것을 뒤에 있던 관람객이 눈치챌 것 같아 불안하기도 하였다.

3. 감정 - 강준만의 책을 사두고 짬짬이 보고 있다. 이성이 아니라 감성, 그에 대한 사유의 진척인 셈이다. 이에 공감한 저작을 미처 눈치채지 못했는데, 연구논문의 결과물들을 보기 쉽게 옮겨놓고 있다. 조금 더 구체성이 있고 현실성이 있어 하나하나 챙겨보려 하고 있다. 언제, 어떻게 감정이 감성이 사람들을 옭죄는지,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지 조금 더 치밀하고 풍부한 사유가 필요하다. 실망시키지는 않을 듯 싶다.

4. 비장소 - [장소와 장소성상실]이라는 책을 통해 ‘비장소‘의 개념을 얻었지만, 다시 심층 강도를 더하고 싶기도 하다. 술을 좋은 술과 나쁜 술로 구별하지 않고 좋은 술과 더 좋은 술로 구분하는 짓, 장소 또한 좋은 장소와 나쁜 장소를 나누는 것이 은연 중에 좋은 것만 헤아리게 한다는 점. 이것이 간과하고 있는 것이 온전히 전체를 읽으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방법의 착각인 셈이다. 좋은 장소와 더 좋은 장소로 사유하는 기초가 된다. 여백처럼 있는 비장소성이 오히려 우리의 안온함을 갖게하는 편안함의 힘이 있다는 것이다. 도시와 시골 역시 좋고 나쁨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도시화율이 90%가 넘은지 오래된 우리 현실에서 귀촌이라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일이다. 다 들여다볼 수 있다는 갑갑함은 그리 향수어린 것이 아니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 [건축의 경험]은 스피노자와 베르그송을 부분 부분 연상하게 한다. 기쁨과 슬픔의 요소로서 건축, 스칼라가 아니라 벡터로서 운동을 포함한 힘으로 다시 읽어보는 것은 새롭다. 건축만이 아니라 여러 분과학문도 다시 시선처리를 해보는 것도 좋을 듯싶다.

볕뉘.

0. 한 소설가의 증정본 [컬트 포르노 탐정 소설의 장르적 우울과 클리셰]는 이동 중 가지고 다닌다. 뭔가 들킬 것 같아, 그 다음 관계가 쉽지 않을 것 같아 아껴두면서 책장을 넘기지 않고 있다.

1. 어제 서울갈 일이 있어 과천관 현대미술관에서 균열전을 관람하였다. 이 역시 이성이 아니라 감성, 아니 ‘몸‘에 관한 다시보기였다. ‘층과 사이‘의 판화전도 색다른 안목을 더할 수 있어서 좋았다.

2. 읽어야할 시인들이 늘었다. 읽을 책들로 풍요로운 년말이다. 녀석들이 눈을 치켜뜨고 있어 걱정이긴 하지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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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로 나눈다는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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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건과 정치: 사건의 양식은 문제 제기다. 하나의 사건은 하나의 문제에 대한 대답이 아니라 여러 가능태에의 입구이다. 11 ˝인간은 답할 수 있는 문제만 제기할 수 있다˝는 맑스의 생각과는 반대로, 사건에서 출발하여 구축된 문제는 처음부터 그 답을 문제 안에 포함하고 있지 않다. 12 사건의 철학은 세계와 주체성이 구성되는 과정을 정의하기 위해 처음부터 주체(혹은 노동)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사건에서 출발한다. 15 세계란 혼(높은 차원의 단계) 안에 현실화하고 신체(낮은 차원의 단계) 안에 구현화한 하나의 가능태다....들뢰즈에 의하면 세계란 잠재성이고, 관계의 다양체이다. 세계는 언표의 집단적 배치안에서 (즉 혼안에서) 표현되어 가능태를 창조하는 다수의 다양한 사건으로부터 성립된다. 16 우리가 가능성을 ‘가능태/실재화/라는 체제에 의거하여 고찰한다면, 여러 가능태의 배분은 기존의 양자택일 형식(남성/여성, 자본가/노동자,자연/사회, 어른/아이, 지적인 것/육체적인 것 등)에 의거하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의 지각과 기호, 정동, 욕망, 역할, 가능 등은 이미 현실화된 것으로서 이항 대립의 틀내에 있게 된다....그와 반대로, 만약 우리가 가능성을 ‘가능태의 창조와 그 달성‘이라는 형식 아래 사고하면, 가능태는 이미 알려진 것들의 양자택일에 의거한 사고와 행동으로 나가는 것이 아니라 창조되어야만 하는 것이 된다...사람들이 사랑에 빠지는 상대는 그 인물이 아니라 그 인물이 표현하는 가능세계이다. 16, 17 양자택일에 대한 거부는, 눈앞에 있는 것의 정당화에 대한 저항을 가능하게 하는 일종의 행위로서 이해되어야만 한다. 말하자면 거부는 ˝일종의 중단 혹은 무력화로 보이더라도 주어진 것의 저쪽에 주어지지 않는 것의 새로운 지평을 우리에게 여는 것˝이다. 18

[ ] 가능태의 현실화와 달성은 (자연과 타자를) 변형하는 활동이 아니라 세계를 실효화하는 것이다. 가능태의 현실화는 생산하는 것...이중의 개체화, 이중의 창조, 이중의 발명 과정으로 향하는 것이다. 20 기성의 대답을 미리 준비하고 있었던 사람들(그와 같은 사람들은 무수히 많다...)은 사건을 경험할 기회를 놓쳤다....사건은 집요하다. 결국 사건은 계속 활동하고 있고 여러 가지 효과를 계속 산출하고 있다. 24, 25 모든 개체는 무수한 다른 개체로부터 합성된 것이고, 각자가 다른 정치형태를 뒤따르면서 믿음과 욕망을 기반으로 하나의 통합을 이룬다...세계가 객체와 주체가 아니라 관계의 짜임새로부터 성립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 관계의 짜임새는 무수한 다른 개체의 포획에서 이루어진 위계에 따라 구성된다. 31 역사란 ˝똑바로 뻗어 있는 곧은길이 아니라 매우 깊고 갈림길이 무수하게 있는 도로망이다...한 걸음 나아갈 때마다 다른 길로의 교차로가 나타난다. 32

[ ] 모나드의 활동은 어느 행위에 귀착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를 개시하는 것과 실효화라는 것에 귀착한다...세계를 창조하고 실효화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믿음과 욕망, 그리고 의지와 지성에 대해 작용하는 것, 즉 정동에 대해 작용하는 것을 의미한다...하나의 세계는 (하나의 본질이 아니라) 하나의 사건에 기반한 관계의 다양체다...세계의 창조와 실효화는 무엇보다도 느낌에 관계하고 있는데 그것은 이미 ‘이데올로기‘의 구축이나 보급과 동일시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또한 거기에서 생기는 감각 양식의 변화는 우리에 의해 ‘실재‘ 세계를 은폐하는 것이 아니라 ‘실재‘ 세계를 구성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34, 35존재는 자신 속에 차이화를 일으키는 내적 요인을, 즉 잠재력의 차이를 품고 있다. 그래서 존재는 항상 하나의 통일을 넘어서는 것이다. 36 감각 양식의 표현과 구축은 생산양식에 의존하고 있기는 커녕, 경제의 노동보다 이전에 있다. 36 타르드의 모나드는 보편적인 시공간 속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각각 고유의 시간성과 공간성을 낳고 있다. 모나는 열리고, 문도 창도 지니고 있어서 서로 작용한다...유물론이 점(원자)의 연속에 한정해서만 보려고 할 때, 타르드는 상호 침투하는 작용영역, 즉 믿음과 욕망의 흐름을 확인했다....20세기 사건의 철학에서 각각의 모나드는 하나의 잠재적인 우주이고, 하나의 가능세계이며, 상호 교류하고 만나는 복수의 가능세계이다...우리는 예정조화에서 다성악적인 조합으로, 초월적인 조직화의 과정에서 내재적인 구성 과정으로 이행한다. 38, 39

[ ] 사회 혹은 차이의 공존, 그것은 ˝매우 다채로운 형태로서의 각자에 의한 전원의 상호적인 소유˝이다. 사회는 동료를 소유하고 그리고 동료에 의해 소유되는 방법에 따라 정의된다. 설득에 의해, 사랑에 의해, 두려움에 의해 믿음과 욕망의 공통성에 의해, 그리고 부의 생산에 의해 ˝사회의 제요소는 무수한 방법으로 서로 결합되고 끌어당긴다.˝..사람들은 존재의 다양한 단계의 목록을 만들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소유의 다양한 단계를 분류하는 것에는 전혀 생각이 미치지 못했다. 40 각각의 모나드가 서로가 서로의 일부를 이루고 있는 것은 확실한데, 그 모나드들은 많든 적든 서로 전유할 수 있고, 또 더욱 높은 정도의 소유를 바라고 있다. 그 때문에 모나드들은 점점 집중해 간다. 또한 모나드들은 무수히 다른 방법으로 서로가 서로를 전유할 수 있으며, 각각의 모나드는 다른 모나드를 전유하는 새로운 방법을 알고 싶어 한다. 41 결국 집단적인 것이든 개인적인 것이든 행동의 방향을 고찰하는 것이 중요하다. 42 주체의 철학은 다만 하나의 세계만 가능하다는 전제에 서 있기 때문이다. 44

[ ] 결국 사회적 조정 원리는 시장과 가치법칙, 국가, 변증법 등의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모나드에 내재적인 구성적작용 안에 있다. 45 각각의 기관은, 그리고 각각의 기관 내의 각 세포와 각각의 세포 내의 각각의 요소는 자신 안에서 자신을 위해 작은 은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46 개인의 등질성과 획일성은 개인의 유동성과 유연성의 또 다른 측면이고, 보다 풍부한 특이화와 다양한 사건이 일어나기 위한 조건이다. 47 이 전체(결국 사회와 제도)를 붕괴시키기 위해서는 모나드들이 이 전체를 재생산하려는 믿음과 욕망을 변화시키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49 모든 발명은 (위대하든지 사소하든지간에) 사건이다. 그 사건은 그 자체 안에는 어떠한 가치도 포함하지 않지만, 가능태를 새롭게 창조하기에 모든 가치의 전제조건이 된다..발명은 일종의 구성적인 힘이기도 하다...발명의 시원에서는 모두가 이 복수의식에 의해 이루어지고, 그 후에 발명은 단수-의식을 통해 드디어 모습을 나타낼 수 있다....다양한 모방의 흐름(관념, 습관, 몸짓, 지각, 감각) 사이에 일어나는 마주침이고 잡종형성이며 협력이다. 51 발명도 사회적 보급도 명령에 따라 이루어지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와 같은 구성 과정은 바로 차이와 반복으로부터 성립한다... 모든 발명은 개인과 사회에 정해져 있었던 규범과 규칙, 습관으로부터의 단절이다. 발명이란 그것을 성취한 자를 역사적 시간의 외부에 두고 그 자를 사건의 시간 안으로 파고들게 하는 행위이다. 52 발명의 작용은, 노동의 작용과는 달리 그 자체로 공공적인 것이다. 이 작용은 만인에 대해 열려 있기 때문이다. 발명의 작용은 만인의 눈에, 정동에, 지성에, 의지에 미치기 때문이다. 54 발명에서 가치의 구축으로, 미시에서 거시로, 로컬에서 글로벌로의 이행은 전체를 성립시키는 힘에 의해 이루어진다...그 능력은 패치워크들과 네트워크들을 서서히 편성하는 능력이다. 또한 타르드의 어휘를 가져오자면, 그것은 (믿음과 욕망의) 흐름과 집합체를 편성하는 능력이다. 55

[ ] 언어와 과학도 또한 사회적 양과 마찬가지로 추상과 전체화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무한소의 구축주의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다..발명을 무시한다면 고려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은 재생산밖에 없다. 59 모나드들 사이에는 명령과 복종, 포획의 관계밖에 없다. 시장, 증권 거래소, 자본, 사회는 포획의 포획이다...전체라는 것은 인식의 대상이 아니라 실험의 대상이라는 것이다. 61 모나돌로지, 혹은 무한소의 관점에 따라, 우리는 사회적 영역의 구성 과정을 의인론적으로서가 아니라 우주론적으로 사고하도록 유도된다. 62 모든 관계가 생기는 것은 사건으로부터이고, 본질로부터는 아니다. 맑스와 타르드 사이에는 근본적인 단절이 있다. 62 자연은 항상, 그리고 이미 주체와 인간 내부에 있다. 무한의 존재 - 즉 무한의 유기체적 모나드와 무기적 모나드, 모든 의지하는 것, 믿는 것, 생각하는 것 -의 투쟁과 협동이 없다면, 인간은 대체 무엇이겠는가? 64 이념형 - 혹은 개인 -은 무한의 괴물성을 일시적으로 안정시켜 봉합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무한한 괴물성이란 각자의 힘을 그 자체 안에, 그리고 다른 힘과의 관계 안에 은폐하여 간직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정의된 괴물성은 예외적인 형이 아니라 자연(본성) 그 자체다. 주체화의 모델은 괴물이다. 67

[ ] 통제사회에서 삶과 생명체의 개념: 자본주의에 관한 ‘유일한 드라마‘ - 헤겔에게서의 정신과 맑스에게서의 자본의 드라마 -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드라마의 다양체‘를 생각해야 한다. 70 모순의 논리를 ‘유일한 드라마‘의 원동력이지만 그것은 너무 빈곤하고 무력하다. 71 경제구조와 공장은 이미 규율훈련의 메커니즘이 영혼과 신체에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71 감금의 기술(규율훈련)을 구성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우선 다양체를 공간에 다시 배열하는 것(바둑판처럼 분할, 감금, 정렬 등) 다음으로 다양체에 시간의 순서를 붙이는 것(몸짓의 분해, 시간의 세분화, 행위의 프로그램화) ..다양체를 특정한 공간-시간 안에 다시 틀 지우는 것. 이상 세 가지다. 생명정치의 기술(공중위생, 가정정책...)은 삶을 관리하는 것으로서 이러한 다양체에 대해 행사된다. 이 경우엔 규율훈련의 제도와는 달리, 다양체는 다수 (전체 인구) 가 되고 공간은 열린다. (인구의 한계는 국가에 의해 정해진다) 73

[ ] 들뢰즈는 권력관계와 제도를 구별한다. 권력은 여러 힘 사이의 관계이지만, 제도는 여러 힘을 통합하고 계층화하는 심급이다. 제도는 여러 힘의 관계를 명확한 형식 안에 정착시켜 그 힘들 및 힘 관계에 대해 재생산 기능을 부여한다. 74 다양한 권력관계의 현재화는 ˝하나씩 돌을 쌓아 올리˝듯이 진행된다...통합이란 네트워크와 패치워크 또는 흐름과 응집체를 하나로 정리하기 위한 기술이다....일반화, 추상화를 통해 이해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통합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그는 적분계산을 모델로 하여, 사회유형과 사회적 양을 미소한 차이와 변용의 통합(적분)으로 이해했다. 75 남성/여성이라는 대치는 무수한 성으로의 생성변화 가능성을 분리하여 그 가능성을 이성애라는 규범의 이원론 속으로 결정화했다. 다양체를 계급으로 변환하는 것과 무수한 성을 이성애로 변환하는 것은 특정한 유형을 구성하고 다양체를 억압하는 기능을 담당하는 것에만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또 규범을 구성하고 코드화하며, 다른 생성변화를 향한 다양한 잠재성을 무력화하는 기능도 담당하고 있다...사회는 그 생산양식에 의해 정의되는 것이 아니라 그 사회를 표현하는 언표와 그 사회를 현실화하는 가시성에 의해 정의된다는 것이다... 76, 77

[ ] 기계적 배치 또는 신체적 배치는 그 형식(감옥)과 실체 (수인)를 갖추고 있다. 표현기계도 또한 마찬가지로 그 형식(형법)과 실체(범죄)를 갖추고 있다. 77 규율훈련이란 ‘몸짓의 잠재성‘을 대상으로 하는 권력이며, ˝잠재성이 현실로 생성변화하고 있는 그 순간에 간섭하는 권력˝이라고 푸코는 말하고 있다. 78 규율훈련과 생명권력이 외부 혹은 잠재적인 것으로부터, 그리고 ‘차이화하는 차이‘의 역동성으로부터 모든 힘을 분리하고 있기 때문이다...확실히 제도는 과거(전통), 현재(지금 여기서의 다양한 권력관계의 관리), 그리고 미래(진보)를 손에 넣고 있지만, 생성변화와 변용을 결여하고 있다. 사회과학은 이와같은 제도의 구성과 작용을 정당화하기 위해 균형(정치경제학)과 통합(뒤르켐), 재생산(부르디외), 대립(맑스주의), 생존경쟁(다위니즘), 또는 경합이라는 개념을 활용한다 그러나 그와 같은 사회과학들은 생성변화를 무시하고 있다. 79 규율사회는 라이프니츠의 신처럼 작용한다. 결국 규율사회는 단지 하나의 세계만을 현실로 이행시킨다. 그 관점에서 말하자면, 규율사회는 생산적이라고 간주되어도 좋다. 규율사회는 규율사회의 세계를 위해 여러 모나드를 구성하는데, 그 세계는 감금 기술과 생명권력의 기술을 통해 각각의 모나드 속으로 함입된다....균형의 이론(정치경제학과 사회학) 또는 모순의 이론 (헤겔주의와 맑스주의)에서도 또한 그 이론들이 인정하는 실천은 하나의 동일한 공통 지평을 보여 준다. 즉, 단 하나의 가능세계밖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고방식이다. 81닫힌 공간 안에서 주체성을 규율훈련할 필요는 없게 되고, 열린 공간에서 주체성을 변조시키는 것이 필요했다. 이리하여 종래의 규율훈련 위에 통제가 새로이 중첩되었다. 82

[ ] 생명권력은 삶의 특유한 과정 전체 (삶, 죽음, 생산 활동, 병 등)를 포괄하는 것이다...생명정치는 ˝생물학적 과정 전체 안에 신체를 위치 짓는다˝..생명권력의 목적은 삶을 관리하는 것이다. 그 의미는 단지, 생명권력이 인구의 존속 조건을 재생산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것에 있다. 85 타르드는 ‘미래의 사회집단‘은 군중도 계급도 주민도 아니라 공중(또는 다양한 종류의 공중들)이라고 주장했다. 공중이라는 개념을 통해 타르드가 이해하고 있었던 것은 미디어가 만들어 낸 공중, 신문이 만들어 낸 독자로서의 공중이다. ˝공중이란 원거리에서 서로 정신적인 작용을 끼치는, 여기저기 흩어진 군중이다.˝...규율훈련 기술이 기본적으로는 공간에서의 조직화인 것에 비해, 통제 기술과 공중을 구성하는 기술은 시간과 잠재성에 최대한의 중요성을 부여한다. 공중은 시간 속의 현전을 통해 구성된다. 86 통제사회에서 제도는 기계적인 테크놀로지(왕권사회)와 열역학적 테크놀로지(규율사회)가 아니라 원격작용의 테크놀로지를 이용하고 있는 것에 그 특징이 있다. 88 공중에게서 발명과 모방은 ˝정말 한 순간에, 마치 완전히 탄력적인 환경 속으로 파도가 밀려˝오듯이 보급된다....사회는 여러 공중으로 분할되어 간다. 그 분할은 ˝점차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더구나 강력하게, 종교에 의한 분할, 경제에 의한 분할, 미적 가치관에 의한 분할, 정치에 의한 분할로 거듭된다.˝ 89 습관의 지배에 이어 유행의 지배를, 전통의 시대에 이어 혁신의 시대를 수립하고 있다. 90 통제사회의 노예화 기술은 규율사회의 노예화 기술을 대신한 것이 아니라 그것과 중첩되면서 점차 넓어졌다. 92 ˝생명체의 본질은 기억이고, 그것은 현재에서 과거의 신체를 지속하는 것이다. 생명의 형태는 자기의 재생산을 통해 과거를 현재에 결합하고 미래를 위해 메시지를 기억한다.˝ 94

[ ] 뇌의 협동에 의해 움직이고, 새로운 제도(여론 등)에 의해 포획되는 모든 힘은 기억과 주의력이다. 그것은 베르그손이 ‘지적 협력‘이라고 정의하고 타르드가 ‘뇌의 코나쿠스‘라고 정의한 힘이다. 95 기억과 주의력은 다양한 관계 안에서 현재화하고, 그들 관계와 함께 사회적 경제적 힘들이 된다. 96 통제사회는 (규율사회와 반대로) 신체적 기억보다도 정신적 기억을 둘러싸려고 한다...통제사회에서는 인간정신이 더욱 주요한 대상이다. 97 기억으로서의 삶과 인간이라는 종으로 생물학적으로 특징지어진 삶(죽음, 탄생, 병 등)은 구별되어야만 한다.. 기억과 그 코나투스(주의력)를 대상으로 하는 이 새로운 권력관계를 인지정치라고 정의하려고 한다....(통제기술의 총체).. 98 규율훈련은 신체를 틀에 넣는 일(감금, 학교, 공장 등)을 수행하고, 생명정치는 삶의 관리(복지국가, 건강의 정치 등)를 조직화하며 인지정치는 기억과 그 잠재적인 역능의 변조(전파네트워크, 음향 영상 네트워크, 정보통신 및 여론과 집단적 지각 지성의 구성)를 제어한다. 이들 각각에 대응하는 사회학적 개념은 (감금양식의 하나로서의) 노동자 계급, 인구, 그리고 공중이다. 99

[ ] 사회적 리스크 (실업, 퇴직, 병)를 보장한다는 예전 방침은, 현재 모든 개인의 삶에 개입하고 예속노동에의 종사를 강제한다는 방침으로 변했다. 인지정치의 새로운 모든 장치는 정보기술과 통신기술의 발달에 수반하여 비약적인 진보를 이루었다. 100 냉전기 사회주의 정책과 자본주의 정책의 계획경제는 근본적으로는 전혀 다른 것이 아닌데, 그것은 바로 ‘예정조화‘를 구현하는 것이었다. 102 20세기란 자기와 세계를 구성하는 것으로서 노동과 주체가 장기에 걸친 불가역적인 위기를 맞이한 시대였다고. 2차 세계대전 후, 주체/노동의 패러다임을 조절 시스템으로 잘 기능시키기 위해서는 완전히 정치적인 결정을 거듭 쌓아올리는 것만으로도 좋았던 것이다. 105 우리가 그려볼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은 고용의 대안이다. 노동에서 고용으로의 이행은 노동운동이 쇠퇴해 간 역사의 또 다른 슬픈 페이지다. 노동이 규율사회에서 지배적 지위를 점하게 된 것은 바로 규율사회가 쇠퇴하던 시기였다.(포디즘) 그에 비해 고용은 통제사회에서 조절의 기본적 형태 중의 하나를 이루는 것이다. 106

볕뉘

0. 진로집이었다. 오랜만의 연락에 차 한잔이 술 한잔으로 되었다. 다음날 아침, 그의 영화대본을 푹 빠져 읽으니 벌써 도착해버렸다. 그 뒤 몸이 일주일을 앓는 듯했다. 친구는 물었다. 다 괴물이지, 그게 맞는 거지라고 물었다. 주저없이 답했다. 맞아.

1. 어제는 정규뉴스가 끝나갈 쯤 잠이 들었는데, 곧 다시 깨었다. 지진멀미를 하는 것인지 아무 일이 없어도 뱃사람이 육지에 걸음을 떼고 울렁거린다니...타첸의 고야를 보았다. 귀족의 세상과 귀족들이 단두대에 거침없이 사라지거나, 집시의 패션을 부러워하는 일이거나....성직자이거나 거의 게으르거나 시대의 당연한 것들은 이내 그 시간의 흐름에 벗겨지거나 지쳐버리는 모습이었다.

2. 우리는 어느 시대를 살거나 견뎌내고 있는 것일까. 어쩌면 둘로 나누는 습관과 그 둘에 걸려 아무 것도 어쩌지 못하는 주춤에 있는 건 아닐까. 둘로 나누고, 또 나누는 것으로 이루어진 세계. 단 하나의 원칙이 있다면 말을 새로 만들지 말 것. 그러니 늘 낡은 단어를 써야 한다. 이것이나 저것의 세계. 이 것의 삶과 저 것의 삶만 있다. 우리 삶의 양식은 붕괴되지 않는다. 뭐라고 하지 않는다. 진리는 찾는 게 아니라 책을 천의 결로 독해해내듯 달리 읽어내서 펼치는 것. 사랑은 진리가 아니고 목적이 아니다. 끊임없이 새롭게 펼쳐지는 것이다. 그렇게 이항이 다항의 음을 내지 못할 때, 그 현물이 눈 앞에 있지 못할 때 아무 것도 아니다. 주춤거리고 머뭇거리는 것이 아니라, 속의 괴물성이 드러날 때만 가시화되는 것은 아닐까. 사건이 만들어진다는 건 공감과 느낌, 따스함이 나누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낡은 단어와 표식은 다 지워진 것으로 없는 것으로 사유해내도 되지 않을까.

3. 사람을 겉의 표식으로 다양한 존재로 나누는데만 익숙하지, 속에서 들끓고 있는 소유의 다양한 결로 사람을 나누지 못하는 우리는 답답하다. 사건도 없는 무미, 아무 맛도 없는 삶, 그 삶의 외부를 곁들여보려는 안타까움이 없다.

4. 늘 등장인물들은 물고 물린다. 덥썩 물었다 싶으면 꼬리에 다른 이가 꼭 물고 있다. 물고물려 어느 것이 새것이고 어느 것이 누구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중요한 것은 아닐 것이다. 이마에 눈이라는 것이 생겼다면, 그것이 시력을 갖고 있는 것인지, 서서히 눈의 형태를 갖추고 있는 것인지 궁금하다. 갇혀있어도 주장하고 더 장황하게 서술하는 저자의 단순을 품어본다. 어째서, 무슨 상관이라고, 나는 여기까지라고... ... 이 책은 여기서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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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사회주의 정치운동에서 저항과 창조:

[ ] 그 실천은 이질적인 주체성을 만들어 내는 과정임에도 동시에 생성변화하는 주체성을 만들어 내는 과정이기도 하다. 결국, 그 실천은 다양한 생성변화, 괴물적인 생성변화, 분자적인 ‘천개의 성‘의 실현, 인간정신에 잠재해 있는 무한한 괴물성을 현실화하는 과정인 것이다....이성애라는 단 하나의 관계로 한정되어 있었던 ‘남성/여성‘이라는 두 세계의 올가미에서 탈출하게 하는 것이다. ‘기발한 주체 excentriques주체‘(테레사 드 로레티스), ‘단편화한 자기동일성‘(다나 해러웨이), ‘노마드적 주체‘(로지 브라이도티 rosi braidotti) 라는 다양한 개념은 랑시에를가 멈춰 섰던 지점에서 출발한 차이와 반복에 관한 사상과 실천인 것이다. 236, 237 우리는 여성이라는 계급으로부터의 탈주자이다. 그것은 탈주한 미국 흑인 노예가 노예제로부터 달아나려고 했던 것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237 정치란 일종의 검증작업이고 실천이라고 말할 수 있다. 정치는 쫓겨서 저항에 참가하는 것도 아니고 공통적 존재에 관한 ‘항상적‘으로 ‘불변‘인 정의에 멈추는 것도 아니다. 사태에 촉발되어 평등을 요구하는 활동에 참가하는 것 또한 사건의 정치, 즉 생성변화의 정치, 실험으로서의 정치에 바탕을 두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의미에서의 정치인 것이다. 239 68년의 정치 운동 이후, 우리는 제도를 두 개의 종류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한쪽은 이미 설립된 제도로서 그것은 기존의 것(계급과 성별의 이항 대립, 소수자를 노예화하는 재생산)을 단순하게 재생산하는 것 이외에는 바라는 것이 없다. 다른 쪽은 투쟁 속에서 생기는 제도로서, ‘반복‘에 관계된 것으로서의, 즉 새로운 것의 생산이 행해지는 층으로서의 제도, 차이의 캔버스로서의 제도이다. 240 설령 그녀들이 반항했다고 해도 ‘제2의 성‘이라는 다수자적인 자기동일성의 환원되어 버린다면 해방이란 있을 수 없다. 해방되기 위해서는 여성으로 생성변화하는 다양체 속으로 스며들 필요가 있다. ...다수자 모델로부터 탈주하여 무하나게 변용하는 양태 안에서만 우리는 운동의 다양체와 만날 수 있다. 243

[ ] ‘만인을 위한 권리‘의 의미가 전도시키는 것은 ˝우리는 이러한 인간이기 때문에 이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다른 존재로 생성변화하기 위해 이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말해야 한다. 244 이 차이의 정치란, ‘자본과 민주주의의 소란‘이 아니라 대립하면서 다양하게 존재하려는 세계를, 여러 주체성을, 타자에의 생성변화를 발명하고 실현하려는 정치이다. 247 투쟁은 볼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있는 것이 ‘치안에 의해‘ 미리 규정되는 것을 거부하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않고, 다수의 다양한 새로운 언어와 의미, 언표 형태를 발명한다. 248 평등은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평등은 차이를 위해, 모든 사람들의 생성변화를 위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평등은 다양성을 파괴하는 집단주의가 되고, 다양한 주체성의 평균치, 즉 평균적인 주체성(다수자)을 만드는 것으로 전락할 것이다. 257 연대 조직은 정식 대표자를 정하지 않고 성원들 각자가 의견을 표명할 수 있도록 하며, 각자의 주장 모두가 연대조직에서 정당한 것으로 인정한다. 제도적인 분할을 실천적인 이유에서 문제 삼는 것은 새로운 정치적 공간을 여는 일이다. 262 연대조직이 만들어지는 것은 발명이 확장되고 전달되어 가는 예측 불가능한 양태(신뢰와 공감을 바탕으로 한 상호적인 포획)로부터이지, 이상적인 계획의 실현이나 정치적 방침의 자각적 달성으로부터는 아니다. 연대조직은 그 조직이 다양한 특이성으로부터 이루어진 힘을 표현하고, ˝그 성원 한 사람 한 사람이 자신의 책임으로 움직일˝때 이외에는 성공할 수 없다. 264

[ ] 예전의 노동운동 조직이 보여 주었던 수단과 형태는 옛 공장에서의 협동을 참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들은 정치적 행위를 발영하고 발견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단지 처음부터 준비되어 있었던 것, 즉 조직의 지도자의 생각을 그대로 전개하는 것밖에는 사고하지 않기 때문이다. 265 투사란 단순하게, 존재하는 것 안에 불연속성을 도입하는 인물을 가리킨다. 투사는 발화와 욕망, 이미지의 흐름을 분기시키고, 그 흐름들을 다양체를 편성하는 힘으로 이용한다. 그리고 그 흐름들 사이에서 다양한 특이한 상황을 결합하지만, 초월적이고 통일적인 관점에서 자리매김하는 일은 하지 않는다. 그러한 투사는 곧 실험가이다.˝우리는 ‘공통적 존재‘와 ‘대항적 존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한다. 또한 우리는 어떠한 제도가 생성변화를 촉진하는지 알지 못한다. 그래도 우리는 여러 가지 장치와 기술, 배치, 언표를 통해 그 물음들을 모으고, 검토하고, 실험하고 있다. 269 예전의 주인들은, 옛 배치 방식에 갇혀 있다. 그러한 사람들은 새로운 질문을 던지려 하지 않고, 에전의 대답에 매달려 있다. 그러나 사건은 계속 일어난다. 270 자본가들은 1968년 이후, 사회적 정치적 타협을 의미하고 있었던 ‘조절관리‘를 ‘비인격적‘인 테크놀로지 장치에 의지한 ‘변조‘로 치환하려고 했다. 즉, 그것은 금융의 변조이고, 생산의 변조이며 소통, 사법, 제도....의 변조이다.....좌익은 무익하게도, 거의 30년에 걸쳐 임금노동이라는 다수자의 기준을 유지하고 내부에서 안정시키기 위하여 그 바깥의 문제(불안정생활, 실업, 빈곤)에 관해서는 유연한 태도를 가졌던 것이다. 조적관리와 변조라는 두 개의 가치-노동 모델은 모두 상이한 것이지만 우리이 삶을 종속시키려는 의지를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는 일치한다.274

[ ] 만인의 소수자로의 생성변화가 성립하기 위한 경제적 조건은 임금노동 체제에 의해서는 보증되지 않는다. 그것을 보증하는 것이 있다면 소득의 정치뿐이다....만인의 소득 보장은 그 이상의 진정한 제도적 혁신인 동시에 모든 사람들의 생성변화를 창조하고 실험하기 위한 조건으로 서 생각해야 한다.....소득이 보장되어 고용시간에 대해 대가가 지불되는 것만이 아니라 활동을 구성하는 다양한 이질적인 시간에 대해서도 대가가 지불된다면, 그러한 소득보장은 노동의 실험장임과 동시에 삶의 실험장이기도 하는 새로운 정치공간에의 길을 열게 될 것이다.... ˝생성변화를 구성한다˝는 말은, 그 말이 적용되는 사물 내용의 변화에 맞추어서, 그 변화를 예측하여 자기 자신을 변화시키는 ‘규칙‘과 장치, 제도 전체를 발명하는 것을 지칭한다. ..기업과 고용주에의 투자는 지배적인 다수자의 기준과 그 권력의 논리, 즉 변조나 규율훈련에 투자하는 것이다. ‘만인의 소득 보장‘안에는 복지의 다양한 제도도 포함되어 있다. 그 제도는 임금노동자와는 다른 다양한 종속적 소수자를 ‘재생산‘하는 것에 유용한 것이 아니라 다양한 소수자의 생성변화를 ‘반복‘하는 것에 유용하다. 279

[ ] 저항은 창조 과정인 것입니다. 창조하는 것, 재창조하는 것, 상황을 변형하는 것, 과정에 활발하게 참여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저항입니다...정말로 나는 그렇게 모든 일을 정의하고 있습니다. ‘아니오‘라고 말하는 것이 저항의 최소 형태를 구성합니다. -미셀 푸코. 286 나와 타자의 관계는 주체와 객체의 관계로서, 또는 주체 간의 관계로서 이해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사건으로서의 ‘가능세계‘ 사이의 관계로서 이해될 수 있다. 타자란, 객체도 주체도 아니고 다양한 가능 세계의 표현인것이다....권력관계를 타자들의 가능적 행위를 구성하고 결정하는 것으로 이해함으로써, 우리는 다양한 실천과 장치, 권력기술에서 걸리는 내기, 즉 연대조직과 여성운동과 신자유주의적 글로벌화에 대한 반대투쟁에서 움직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287 권력이 타자의 가능적 행위의 장을 만들어 낼 능력으로 정의된다면, 그 권력의 행사에 관해 생각하기 위해서는 전략적 관계 안에서 움직이고 있는 힘들을 잠재적으로 ‘자유‘로운 간주해야 한다. 권력이란 ‘움직이고 있는 주체‘ 또는 ‘자유로운 존재인 한에서의 자유로운 주체˝에 대한 작용 양식인 것이다. ㅜ체가 자유라는 것은 주체가 ˝항상 상황을 변화시킬 가능성을 가지고 있고, 그러한 가능성이 항상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288 노동조합과 정당, 국가기관은 자신들의 절차가 민주적이라고 주장하지만, 그렇게 주장한다고 해도 그 조직들은 개인들이 타자의 행위를 이끌려고 하는 시도를 중단시키고 방해하도록 미리 구성된다. 289 권리와 법률은 이미 존재하고 있는 것에 관해서밖에 말할 수 없다. 295 통제사회의 경제와 정치를 전복하고 있는 것은 가능세계의 발명과 증식, 분기이다. 통제사회를 위험사회로 정의하는 것에는 사건으로서의 새로운 것의 창조는 이제 예외가 아니며 다양체의 창조적 역능이야말로 현실을 구성하는 원인이라는 것이 부정적이면서 애매한 방식으로만 말해질 뿐이다. 298

볕뉘

0. 고여있는 개념에 이의를 제기하고, 고여있는 존재에도 손을 들고, 타자란 다양한 가능세계의 표현이라는 점에 고개를 들어보자고 한다. 느끼고 공감하는 것에서 시작하여 키우면서 분기하는 것에 대한 사유. 조금 폭넓은 그림이자 사유의 캔버스. 말미 지나치게 들뢰즈, 가타리에 기대어 설명해서 지루해보였다. 자본주의가 무엇인가? 다시 한번 저자의 시선을 쫓아가며 짚어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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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현과 소통의 대립

[ ] 언표가 표현하는 것은 항상, 결코 그 이전에 만들어진 것이 아닌 새로운 것, 재생산되지 않은 것, 그리고 항상 가치(진, 선, 미)와 결부되어 있는 것이다. 177 차이를 창조하는 것은 다양하고 새로운 의미의 가능성을 창조하고 다성악화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언어표현의 존재방식을 바흐친은 복수언어주의라고 부른다. 그와 반대로 정보와 소통의 실천은 통일과 중앙집권화를 목표로 하는 힘들로부터 성립한다. 그 힘들은 발화, 언어, 의미의 다양성과 이질성을 파괴하는데, 바흐친은 그와 같은 존재방식을 단일언어주의라고 부른다....바흐친은 거의 모든 철학과 언어학이 무시해 왔던 힘들에 주의를 기울였다. 그 힘들이란 ‘탈중심화하는 원심적인 흐름‘이다. 이 흐름에서 우리들은 저항과 투쟁, 창조와 만난다. 그리고 바로 이 원심적인 흐름안에서야말로 언어적 다양성이 구축되는 것이다. 178, 179

[1 ] 대화는 매우 미세한 현상이지만 끊임없이 넓어지는 활동이고, 사회의 모든 형성과 변형의 원인이다. 즉 대화가 야기하는 것은 언어적인 변형이 아니라 종교적, 정치적, 경제적, 심미적, 도덕적인 변형인 것이다. 이를테면 산호 벌레가 산호초를 만들어 가는 것과 같은 대화 과정의 이러한 중요성은 지금까지 완전히 무시되어 왔다. (사회적 변형의 뿌리) 182 대화는 바로 경제학자가 관심을 가져야 할 주제이다. 왜냐하면 만약 사람들이 말을 하지 않고, 글자도 쓰지 않으며, 인쇄물도 전보도 전화도 사용하지 않는다면, 그러한 사람들 사이에서는 경제적 관계 등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183 말한다는 행위는 타자의 말을 전유하는 것에 의해 일종의 대화관계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것은 말의 의미작용에 의해서가 아니라 표현과 억양, 목소리에 의해 시작된다. 184 우리의 말 안에는 모든 목소리들이 반향하고 있다...타자의 말과 관계를 맺는 일은 항상 사건과의 만남이어서 단순한 (언어학적인) 교환이나 (간주관적인) 인식인 것은 아니다. 185 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발화는 적어도 그 반은 타자가 발화한 말로부터 성립한다. 사람들이 전하고, 생각하고, 사고하고, 논의하는 것은 ˝타자들이 말하는 언어와 여론, 주장, 정보인 것이다. 그것들에 대해 사람들은 반대하기도 하고, 납득하기도 하며 참조하기도 한다. 186 정보와 소통에 관한 현대의 여러 이론들은 대화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 이론들은 언어의 교환을 대화적인 사건으로서, 또는 다양한 주체성의 협동의 공통적 창조와 공통적 실현으로서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86

[ ] 여론은 욕망과 믿음을 형성하고 변형하는 무한소의 힘을 수반하며, 그 힘에 의해 다양화한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는 그 다양성에서 모든 잠재성을 탈취하여 단일 언어를 강조하는 수단이나 정보 소통을 전달하는 수단을 만들어 내고, 다양한 가능세계의 공통적인 창조와 실현을 행하는 역능 모두를 무력화하는 것이다. 187 철도, 여행...상업... 사람들의 행위 사이에, 극히 먼 거리에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견고한 유대(이는 비인간적인 유대여서, 공동체와는 관계가 없다)를 만들어 냈다. 그리고 그 유대에서 생겨났던 공중은 이제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이해하는 것도, 식별하는 것도 불가능하게 되었다. 존 듀이 188 시간의 테크놀로지 장치는 통제사회에 특유한 동력이다. 그것은 왕권사회의 기계적인 동력과 규율훈련사회의 열역학적 동력과는 구별되어야 한다. 그 장치는 떨어진 장소에 있는 다양한 정신적 습관과 그 구성요소인 욕망과 믿음을 움직이게 만들기 때문이다. 198 시장이 가져온 ‘무한‘의 선택은 그러한 정치적 양자택일(선인가 악인가)이 협소한 틈 안에 있다. 왜냐하면 시장도 또한 동일한 전략을 채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그것은 가능성의 창조를 착취하고, 문제를 구성할 능력과 사회적 힘들을 분리하며, 미리 준비된 해결책을 강요하는 전략이다. 201

[ ]지적소유권이라는 간접적인 방법으로 새로운 인클로저를 시도하고 있다. 신경제의 시도는 독점하여 계층화와 중앙집권화를 꾀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가장 큰 이유는 무상성의 논리가 희소성의 논리와 상응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205 네트워크가 현실화하는지 어떤지는, 타르드의 낙관주의에 의하면 배치와 결합을 조금씩 만들어내는 능력에 달려 있다. 그 망의 구성은 이미 언급한 두 개의 축, 즉 네트워크와 패치워크에 의해 조직된다. 거기에서 모나드들은 기호와 소리, 이미지의 흐름에 편입된다. 그 흐름은 분기하는 것도 있다면(발명), 그대로 넓어져 가는 것도 있다(반복) 206 개인을 ‘분할가능한 것‘으로 변환하고 공통재를 시장화하려고하는 계획을 그 눈앞에서 가로막는 것은, 특이성을 만들어 내고 세계를 분기시키며 가능성을 창조하는 과정이다. 원심적 힘들이 사용하는 전략은 매우 단순한다. 그것은 모나들이 고객이 아니라 협력자로서 활동한다는 전략이다..바로 협동 그 자체에 수반되는 역동성이다. 협동은 이제 에고이즘의 균형에 의해 조정되지 않으며, 공감과 우애, 슬픔에 의해 작동하기 때문이다. 기업 논리를 밀어붙인다는 것은 뇌의 협동을 파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주체성에 있어서 활동한다는 것이란 함께 느끼는 것이기 때문이다. 209

[ ]권위주의적 발화 (종교적 발화, 도덕적 발화, 성인의 발화, 교수의 발화...그 발화들은 이른바 ‘아버지들‘의 발화이다...)는 우리에 대해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일 것을 요구하지만, ˝우리의 마음 속에 자유로이 들어오는˝ 것은 아니다..˝수렴하거나 발산하고, 다가가거나 떨어져 나오기도 하는 유희는 ˝여기서는 불가능한 것이다.˝ 211 설득적 발화의 방법은 ˝타자의 발화가 최대의 상호 작용을 발휘하는 장소를 만들어 낸다. 그곳은 문맥을 통해 대화가 쌍방에 영향을 주는 장이고, ‘낯선‘ 발화가 자유로이 창조적인 혁명을 가져오는 장이며, 이행이 단계적으로 행해지는 장, 경계와 유희하는 장이다. 212 기도할 때에는 교회의 언어를, 영주와 말할 때에는 자신이 속한 사회계층의 언어를, 그리고 가족과 친구들과 말할 때에는 또한 별개의 언어를 사용하여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언어들은 각각 닫혀 있었고, 상호 교환도 없었으며, 주체성을 구성하는 과정에서 서로를 비추어 주지도 않았다. 215 바흐친은 자본주의의 힘이 당시의 다양체를 자본/노동의 이항대립으로 환원했다는 점만을 보지 않았다. 그는 또한 그 파괴적 과정이 자본주의 이전 러시아의 생활을 구성하고 있었던 다양한 세계와 충돌하면서 차이의 거대한 에너지와 잠재성을 해방했음을 명확히 보여주었다...현대는 비서구적인 다양한 세계를 자본주의에 의한 통일화와 중앙집권화, 단일언어화로 향하게 하려는 의지가 관통하는 시대인 것이다. 216

[ ] 바흐친에게 자기와 타자의 관계는 다양한 가능세계 사이에서 일어나는 사건에서의 관계로, 또는 언표에서의 다양한 가능성의 표현으로 이해해야 한다...결국 발화에는 의미내용으로서의 측면(개념으로서 발화)과 표현으로서의 측면(이미지로서의 발화), 그리고 그 감정-의지의 양상을 전달하는 측면(발화의 어조)이 있다. 222 세계와 지각, 정동, 사고, 객관성에 구조가 부여되는 것은 바로 이 타자의 출현에 의해서다. ˝타자만이 유일하게, 나에 대해 타자를 맞이하는 기쁨, 타자로부터 떨어져나가는 슬픔, 타자를 잃어버리는 고통....을 준다. 의지와 감정에 관한 가치는 모두, 어떤 타자와 관계할 때만 가능하다. 그리고 그 가치들은 나만의 삶에서는 가질 수 없는 특별한 사건의 중첩을 타자의 삶에 부여한다. 이러한 사건이 가진 성질은 나만의 삶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나의 삶은 시간 안에서 타자의 존재를 품으면서 존재하는 것이다....나와 타자 사이에는 원리의 차이가 있다고 해도 그 차이는 ...사건적 또는 가치론적 질서에서 유래한다...그래서 존재를 구성하는 것은 나도 아니고 고유의 의미에서의 타자도 아니며 나와 타자 양쪽에 앞서 존재하고 있는 사건적 관계인 것이다. 223

[ ]바흐친은 언어학과 철학이 무시하고 있었던 존재의 새로운 잉여, 즉 그가 ‘대화성‘이라고 부른 영역을 구출한다. 이 영역에서 관계는 의미 관계이다. 의미는 언어와 기호에 의해 표현되지만 언어와 기호로 환원되지 않는다...감정, 가치판단, 표현은 언어에서의 어구와는 많은 점에서 관계가 없고, 구체적인 언표에서 살아있는 사용의 과정에서밖에는 생겨나지 않기 때문이다. ..바흐친에 의하면 존재의 영역은 ‘응답과 물음‘의 영역이고, 그것들은 ˝동일한 논리적 관계에 속하지 않는다. 사람은 단지 하나의 동일한 의식 그대로 정지해 있지 않는다. 모든 응답은 새로운 질문을 산출한다. 224 의미는 물리적 물질적 현상을 변화시킬 수 없고, 그것을 바랄 수도 없다. 의미는 물질적 힘으로서 활동할 수 없다. 처음부터 의미는 물질적 힘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의미는 어떠한 힘보다도 강한 힘이다. 그것은 실재하는 (실존적인) 요소를 털끝조차도 변화시키지 않지만 사건과 현실의 의미 전체를 변화시킬 수 있다. 모든 것은 그대로 머물면서도 완전하게 별개의 의미를 손에 넣는 것이다.(존재에서의 의미 변형) 226

[ ] 바흐친은 외부(잠재성)의 현실을 표현하기 위해 어떤 새로운 단어를 만들어 냈다. 즉 ˝모순어법을 이용하여 ‘로부터의-외부‘의 장소를 내부의 장이라고 말˝해야 한다. ˝예술가는 바로 삶으로부터의 외부에서 활동하는 사람이다. 그는 오로지 삶의 내부에 있는 삶(사회적, 정치적, 도덕적, 종교적인 실천)에는 참가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그는 삶을 그 외부에서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그 외부에서는, 삶은 삶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거기에서 삶은 외부를 향하며, 삶 그 자체의 외부와 의미의 외부에 있는 활동을 요구한다. 이 외부의 삶에 다다르는 수단을 발견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예술가의 작업인 것이다.˝ 227

볕뉘

0. 2시간이 넘는 녹취를 풀었다. 토씨 하나 틀리지 않게 옮겨 놓는다. 하지만 나눈 얘기의 감정의 고저, 그의 삶에서 우러나오거나 응어리진 대목의 호흡은 역시 기록할 수 없었다. 하지만 나는 그 사람이 이야기하면서 그가 옮겨 놓고 싶은 감정과 대목, 그 호흡을 이미 알고 있다. 활자화된 녹취록에서는 그 감정의 결을 쉽게 헤아릴 수 없다. 어쩌면 그 녹취는 그 감정의 진도, 그 매듭에 따라서 전혀 다르게 재서술될 수 있다. 그러니 여러개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 셈이다.

1. 바흐친이 궁금해졌다. 이 친구가 읽는 모습도 그러하지만, 좀더 달리 다른 언중을 느끼고 싶기도 한가 보다. 한나 아렌트의 정치에 대한 대목과 달리 더 세밀하고 풍부하게 느껴졌다. 타자에 대한 개념도 레비나스와 달리 손에 쥐어질 듯하다 싶다. 물론 오독일 것이지만 몹시 궁급해졌다.

2. 정보와 소통을 이야기하는 우리는 정작 대화가 무언지도 모르고 있다는 말이 넘어가다 걸린 가시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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